Re..출 19:16-21 (흔들리는 세계)
흔들리는 세계
2004년 11월 28일 본문 말씀: 출애굽기 19:16-21
19:16 제 삼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19:17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 기슭에 섰더니19:18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19:19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19:20 여호와께서 시내산 곧 그 산꼭대기에 강림하시고 그리로 모세를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 가매19: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을 신칙하라 백성이 돌파하고 나 여호와께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
하나님과 사람의 만남,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이해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란 있는 지 없는지도 불확실한데 과연 하나님과 사람이 성사될 수 있을까요?
만약에 실지로 성사된다면 이것은 인류 최대한 중대한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신이 없다는 것이 상식화 되어 있고, 설사 신이 있더라도 인간에게 나타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데 이 자연스러움이 다 깨어져 버리는 겁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말도 안 되는 상황'인데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실제로 벌어졌다는 것으로 인해 지금도 유대인들은 무한한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네들이 하나님을 아느냐"하면서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여러 민족을 떠돌아가 다니면서 숱한 수모를 받았지만 그들의 민족 유대감은 도저히 끊을 수 없는 것은 그 이유가 그들에게나 인간적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먼저 자신에게 실제로 나타났다는 오늘 본문 말씀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자신을 만나려 나타났다는데 더 이상 말 할 것이 없다는 겁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동안 단순히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의 다툼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서 그 바탕 위에 인생관과 세계관을 정립했던 모든 아아디어가 다 엉터리에 불과하다는 것이 들통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없다니? 이렇게 나타났는데도 말입니까? 하나님을 무시해도 괜찮다니? 이렇게 실제로 말씀을 주셨는데도 말입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인간의 모든 사고방식을 완전히 뒤엎어버리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들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실제로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 자체가 이제는 살게 되었다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오늘 본문 21절에 보면, "나 여호와께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만남이 이루어진 그들에게도 하나님은 여전히 죽음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니 만나나 아니 만나나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죽어야 될 존재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것으로 인류 역사를 끝장 내어버리지 왜 일부러 이스라엘 백성을 찾아드신 것입니까?
그 이유는 말씀의 갱신, 혹은 언약의 갱신과 관련 있습니다. 그동안 인간은 자연 세계의 덕으로 먹고 삽니다. 자연 세계의 안정감에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정감을 보이든 자연세계가 하나님의 등장으로 여지없는 흔들림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인간들이 딛고 사는 이 세계가 결코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계획하신 세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불안감은 생존의 위협이 됩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있는 공간을 흔들리게 할까요? 그것은 현재 인간들이 의지하고 있는 모든 세계를 더 이상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이 자연세계를 뿌리를 내는 것으로 안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입장에서는 이 자연세계에 뿌리를 박지 아니하면 달리 어떻게 할 대책이 서지를 없습니다. 이 땅에서 숱한 문화와 문명이 세워지고 있습니다. 있는 것을 조립하고 다듬어서 새로운 문화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흔히들 '발전'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발전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그동안 경계선 쳐진 이 세계를 하나로 통합해 버리는 일입니다.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고 난 뒤부터는 자연세계의 운명에 같이 적용될 입장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명나무로 살아야 될 인간이 이제는 하나님의 생명나무의 법칙에서 끊어진 상태에서 살려니 자연 이 자연의 법칙에 예속된 채 같이 움직일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와 인간 나라 사이의 경계선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한계는 명확해졌습니다. 만약에 이 자연세계가 흔들린다면 그것이 인간에게는 끝장입니다. 같이 흔들여져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거주지를 흔들리게 하시면서 임재하십니다. 이상은 인간들의 최후의 도피처가 될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인간은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을 곳이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6:12-17에 보면,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 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임재하실 때에 세상을 흔드시는 이유는, 더 이상 이 세상은 안정된 세계가 아님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세상은 이 세상이 안고 있는 죄악으로 인해 불안정하다는 겁니다. 노아와의 계약이 만료된 것입니다. 노아 언약의 실제 체결자는 노아가 아니라 예수님이십니다.
사람들이 이 예수님을 밀치고 살해함으로서 세상은 더 이상 유지할 이유를 상실해버린 것입니다. 시간이란 공간과 같이 갑니다. 공간이 깨어지면 시간도 깨어집니다. 아무리 긴긴 시간 이어져왔다고 해도 공간이 깨어지면 그 순간에 느끼는 시간의 길이는 찰라에 해당될 뿐입니다.
이제 강림하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아무 것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산 위에서 울리는 나팔소리는 다른 세계의 실재함을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불타는 광경은 죄악된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소멸의지를 말해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팔소리는 하나님의 계명과 더불어 나타납니다. 즉 주어진 계명에 준해서 경계선 안에 있는 인간 세계를 심판해버리겠다는 하나님의 의지 천명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일점일획이라고 무시당할 계명들이 아닙니다. 마지막 심판의 기준들입니다. 온 우주를 다 동원해서라도 말씀에 의한 심판을 취소시킬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9:27에 보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4-17에 보면,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당연히 무너집니다. 인간의 모든 질서도 다 깨어집니다. 우리는 현재 우리가 당연히 무너질 세계 속에서 당연히 우리도 같이 죽어야 한다는 의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오시고 난 뒤에는 이제 십자가 복음으로만 심판이 이루어집니다. 고린도전서 1:18에 보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멸망하는 자'가 나오지요. 그렇습니다. 구원은 오직 복음으로만 이루어집니다. 기도합시다.『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딛는 자연세계를 의지하지 말고, 쓸데없는 목표나 계획에 마음 빼앗기지 말고 언제든지 재림하실 수 있는 예수님을 고대하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