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강-YouTube강의(은닉)20190305-이 근호 목사
269강-YouTube강의(은닉)20190305-이 근호 목사 제 269강, 제목은 ‘은닉’입니다. 은닉의 반대말은 전시죠. 진열하는 거죠. 쇼윈도show window에다가. 은닉이란 감추는 겁니다. 자 옷을 파는 양품점 같은 경우에는 마네킹에다가 옷을 입혀서 거리 쪽으로 사람들이 지나갈 때 보도록 환하게 보이게 하죠. 조명도 밝게 하고. 그런데 은행에 있는 비밀금고 같은 것은 바깥에 막 내놓지 않죠. 특히 VIP같은 고객들만 출입할 수 있도록 카드 찍고 비밀번호 해서, 그런데 안 들어가 봤습니다만 영화에 보면 나오데요. 거기에 다이아몬드 알맹이들이 수북이 들어있고 목걸이도 들어있고 유언장, 부동산등기등본 이런 것들이 들어있겠죠. 은닉되어 있다는 말은 하찮다는 거예요? 이게 귀하디귀하다는 겁니까? 귀하디귀한 거예요. 그럼 하나님께서 복음을 가지고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비밀이라고 했다고요. 은닉이라고 했다고요. 마태복음 13장에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부터 해서 비유가 여러 개 나오는데, 거기에서 복음을 가지고 보물이라고 본 거예요. 마치 땅 속에 있는 보물, 또는 가루 서말 안에 들어있는 그 무엇. 가루 서말 안에 들어있는, 반죽 안에 들어있는 그 무엇. 손가락으로 후비면 발견될 수 없는데 반죽 자체를 부풀게 하는 자체적인 에너지 같은 그런 것. 꼭 집어서 이게 복음입니다, 라고 할 수 없는데 그 효과는 계속해서 살아있게 하는 그 무엇. 그리고 씨 뿌리는 비유에서는 말씀이라고 했는데, 물론 그 말씀을 뿌리면 씨앗이 보이잖아요. 보이지만 그 씨앗이 땅에 떨어져서 싹이 날 쯤 되면 그 씨앗은 어디에 갔어요? 없어요. 씨앗 자체가 없어요. 다른 것을 키우게 하는 영향력으로 행사하죠. 그래서 은닉이라는 것이 노출되지 않아요. 계속해서 은닉되면서 은닉된 힘이 무엇과 맞닥트려서 싸움을 하느냐 하면은 전시된 것과 진열된 것과 싸워요.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광야에서 예수님이 악마와 만났을 때의 싸움입니다. 악마는 사람들이 다 선호한 것들을 이미 뒷배로 갖고 있어요. 왜냐하면 높은 데에 가서 세상만국을 다 보게 했어요. 세상만국의 모든 영광을. 그러면 세상만국의 영광을 다 보게 했다는 말은 이미 평소에 악마가 사람들이 보고 있는 그것을 그대로 예수님한테 유혹거리로서 제시한 거예요. 사람이라면 다 보고 있는 것. 여기가 5층이잖아요. 그러면 여기 창문이나 복도 창문에서 보면 다 보이잖아요. 다 보이죠. 대치동이 다 보인다 이 말이죠. 누구나 부인할 수 없는 눈에 보이는 것. 이게 은닉된 것이 아니고 진열되어 있고 전시되어 있고 깔려 있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딱 제시했을 때 거기에 대한 반격으로 예수님께서 제시한 것은 전시였습니까? 은닉이었습니까? 은닉적인 것을 내놓은 거예요. 숨겨진 것을 이야기한 겁니다. 그 숨겨진 것이 뭐냐 하면 광야에서 예수님께서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말씀으로 사는 거예요. 보인다, 안 보인다는 제가 집어넣었지만. 마지막에 세상영광이라는 그것을 보여주면서 이야기할 때, 결국은 마지막 끄집어낸 악마의 카드는 보이는 거예요. 은닉된 것이 아니고 보이는 거라고요. 그렇다면 악마가 예수님한테 유혹한 것은 뭐냐 하면은 당신이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 위상을 보이는 쪽으로, 더 이상 은닉에 머물지 말고 보이는 쪽으로 전개시키라고 꼬신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성전 꼭대기에 올라가서 뛰어내리라고 한 거예요. 뛰어내리면 그게 사람들한테 눈에 보이겠죠. 성전이 높다는 것을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고, 뛰어내리면 죽는다는 것을 사람들은 누구나 알고 있어요. 그런데 뛰어내렸는데 갑자기 안 보이는 천사가 와서 발을 받쳐준다면 이것은 모든 것이 안 보이는 은닉이, 더 이상 은닉의 시대가 끝나고 보이는 무대 안으로, 전부 다 보이는 식으로 마감이 돼버리죠. 은닉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죠. 그러면 은닉이 보이는 세상으로 올 때는 그게 뭐냐 하면은 바로 우리가 원하는, 악마가 원하는 힘의 논리구조에 들어오는 것이 됩니다. 힘으로. 자, 어디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했다면, “제가 복음을 전하겠습니다.”라고 하니까, “돈 좀 가졌냐?” 이래 이야기해요. 목사가 복음을 전하려고 하니까 저쪽 교인이 “교회하는데 우리한테 얼마 보태줄 거예요? 혹시 돈 없어서 우리한테 기대는 것이 아닙니까?” 이래 나왔다 이 말이죠. “한 5억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러면 교회에 아무 사단이 나지 않아요. “부담 드리지 않겠습니다. 한 5억이면 되겠습니까? 운영비하고 교회 만드는데.” 이렇게 하면 아무문제가 없는데, 은닉적인 복음만 달랑 들고 왔을 때, “비겁한 목사! 어데 돈 꽤나 있어 보이는 우리한테 어디 부담주려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거는 뭐냐, 은닉 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의 싸움이죠. 이게 뭐냐 영적싸움이죠. 이게 영적싸움입니다. 이것이 어떤 목사뿐만이 아니고 교인들이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싸움이 이 싸움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싸움이에요. “나이 40가까이 됐는데 너 일 안하고 뭐해? 실적을 내봐. 실적을. 눈에 보이는 현찰을 가져와봐. 사람대우해줄게. 돈도 못 벌고 빌빌거리는 주제에 너 왜 사냐?” 이런 요구를 했을 때, 그거는 그 이야기 자체가 뭐냐 하면은 내가 평소에 이런 인생관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고만 툭하고 털어낸 거예요. 그런 것을 요구하는 쪽이. “나 평소에 이런 인생을 살아왔습니다.”라는 것을 아주 본의 아니게 거기에다 다 노출시킨 거예요. 부모가 자식을 키운다. “공부 좀 해라. 복음을 위해서.” 공부 좀 해라! 복음을 위해서? 여러분 공부 좀 해라와 복음을 위해서가 이게 매치가 됩니까? 저 같으면 제 자식한테 이렇게 하겠습니다. “네가 마음을 낮춰서 공부 좀 해라. 놀 생각하지 말고. 건방떨지 말고. 너의 할 일은 공부를 해서 네가 얼마나 무식한가, 네가 이 땅에서 남한테 봉사할 수 있는 자질이 못 된다는 것을 누누이 네가 깨달아라. 공부를 함으로써 네가 이쯤으로는 남한테 돈벌이한다는 자체가 얼마나 시건방진 것인지 알고 겸손해라. 왜? 복음은 마음을 낮추는 것이니까.” 이렇게 이야기하지만, 이거는 둘러치나 앞으로 치나 결국은 공부 잘해야 너는 내 자식 값을 하는 것이고 내가 기분이 좋겠다는 그 본색을 그냥 어떻게 미화하든지 관계없이 그렇게 되죠. 이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것과 연결되어야 됩니다. 우리가 만약에 보이지 않는 것과 끊어져버리면 마태복음 7장 마지막에 있는 말씀처럼 모래위에 지은 집입니다. 자기가 모래인지, 반석인지, 관심조차 갖겠다는 그 자체가, 그 사람이 바로 은닉과 연결된 소통이 되는 사람이에요. “내가 모래일까? 반석일까?” “마지막 최후의 심판 날에 모래위에 지은 집은 무너진다.”라는 그 말씀이 이게 농담이 아니고, 빈말이 아니고, 진지하게 늘 떠오르면서 살아간다는 것,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떠벌리는 그런 가시적인 자랑질 말고, 주님이 보고 있는 것을 함께 보고 있는 것, 그게 바로 복음 안에 있는, 사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