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사물 190301
20190301a 울산강의-레위기 22장 : 거룩한 사물
(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22장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그들로 이스라엘 자손이 내게 드리는 성물에 대하여 스스로 구별하여 내 성호를 욕되게 함이 없게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그들에게 이르라 무릇 나의 대대 자손 중에 그 몸이 부정하고도 이스라엘 자손이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성물에 가까이 하는 자는 내 앞에서 끊어지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두 가지를 먼저 생각해야 될 겁니다. 하나는 단일성입니다. 단일성 안에 뭘 품고 있느냐 하면, 최종성을 품고 있는데, 단일성이라 하는 것은, 사람이 백 사람이면 백 사람, 천 사람이면 천 사람의 생각들이 다 다르지요. 부부라도 생각이 다르지요. 자식들도 생각들이 다 달라요. 그런데 딱 하나를 바라본다면 자기 생각이 차이가 나더라도 하나를 쳐다본다는 말은, 그 하나가 품고 있는 그 내용이 각 사람 속에 분배가 되겠지요.
예를 들면 태극기를 바라본다 할 때 남녀노소 관계없이 태극기를 바라보면서 나라 생각할 때 나라 생각이 태극기를 통해서 상상 속에 다 분배되지 않습니까. 그럴 때 그 순간만큼은 천이면 천, 만이면 만이 하나의 마음이 되겠지요. 그게 바로 단일성이라 하는 거예요. 단일성을 최종성이라 했지요.
인간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내 마음이다, 내 생각이다, 내 해석이다, 라는 것이 용납될 수가 없어요. 성령이 와야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다면 너의 예수가 있고, 나의 예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단일성이기 때문에. 네가 아는 예수, 내가 아는 예수가 동일해야 돼요. 이게 인간의 능력으로 인간의 힘으론 불가능하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 레위기도 율법인데 율법은, 인간이 지키라고 준 게 아니고 아무리 하나님 쪽에서 단일성을 내세워도 인간은 각각의 마음을 따로 갖고 있다는 겁니다. 따로 갖고 있기 때문에 단일성이 각각의 마음을 용납하지 않고 용서하지 않고 그냥 징벌해버리는 겁니다. 이걸 율법이 모든 인간을 저주받게 한다는 뜻이에요.
다시 설명하면 단일성이란 사람마다 생각이 다 다르다 이 말이죠. 각자 나름대로 하나님 섬기겠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단일성에선 용납이 안 되는 겁니다. 너는 네 식대로 믿고 나는 내 식대로 믿으면 될 것 아닙니까? 그게 안 된다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단일성이 성물로 나와요. 거룩한 물건 또는 물체, 사물로 나와 있지요. 단일성을 하나님께서 먼저 제시하고 난 뒤에 단일성의 취지에 어긋나는 사람은 용서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개인이 성의를 표하는 것은 구원받는 데 전혀 보탬이 되질 못해요.
사람이 성의를 표한다든지 내 생각으로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지 생각이 뭐냐 하면, 지금까지 살아온 머리에 남은 자기의 기억입니다. 자기 체험이란 말이죠. 그것으로 성의를 다하여 열심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면 되겠지, 하는 것은 너무 개인구원 입장이에요. 출제자가 문제를 내야지 지가 문제 내놓고 지가 문제를 풀면 말이 안 되잖아요.
나름대로 하나님을 섬겼다는 말을 하는데 그런 핑계 없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모든 사람이 다 그렇잖아요. 교회 나오려고 했는데 형편이 그래서 못 나왔습니다, 라고 이야기할 때 그런 사람은 교회 나와 봤자 무엇을 기억하느냐 하면, “나, 오늘 교회 나왔다”를 기억해요. 그거는 단일성에 해당이 안 됩니다.
“나는 이십 년 동안 교회 나왔다.” 이것은 하나님이 구원의 근거로 제시한 적이 없어요. 하나님은 최종적인 단일성을 제시한 거예요. 오늘 본문에선 그걸 뭐라고 했던가요? 성물. 다른 말로 하면 거룩한 물건이에요. 거룩한 물체라고요. 거룩한 사물.
그래서 정말 구원받은 교회라면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집사님, 십자가 생각했어요?” “나를 부인하라는 십자가 생각하지.” 최 집사님도 십자가, 김 집사도 십자가, 목사인 나도 십자가. 열 명의 교인들이 모여서 뭘 보여준 거예요? 십자가란 단일성을 보여주잖아요. 그 십자가는 뭐냐 하면, 기존의 내 성의와 열심을 다 부정하죠. 왜냐하면 십자가에서는 죽음이니까.
오늘 강의가 또 복잡하고 길어지겠는데. 자, 죽음이 뭔지 생각해보세요. 죽음이 뭐냐 하면, 사라지는 걸 의미합니다. 제 말 틀렸습니까? 맞지요. 그러면 여러분이 지금껏 살아있으면서 장례식에서 관 속에 여러분 말고 다른 사람이 누워있는 걸 많이 보셨잖아요. 그런데 내가 그 관 속에 누워있다고 생각해봅시다.
곧 어디로 가느냐 하면, 화장터로 가잖아요. 화장터 갈 때까지는 나는 지금 관 속에 누워있다. 편안하다. 이 냄새, 하다가 불 속에 들어갑니다. 뭐 타는 냄새나는데? 누가 사라집니까? 내가 사라지지요. 십자가 의미가 뭐냐 하면, 너는 없다는 거예요.
없는 인간이 믿는다? 내가 없는데 내 믿음이 무슨 소용 있으며 내가 없는데 내 헌금이, 내 기도와 충성과 내 소망과 내 사랑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내 믿음 소망 사랑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십자가로 구원받는 거예요. 내 성의로 구원받는 게 아니란 말이죠.
강의 다시 해봅시다. 인간 속에 뭐가 남아있다 했습니까? 기억이 남아있지요. 그러면 나는 나름대로 성의를 표했다는 말은 작년보다 올해가 낫잖아요, 라는 비교의식이 생기겠지요. 작년에는 교회 농땡이 쳤지만 올해부터는 정신 바짝 차리고 교회 나옵니다. 이게 남아있겠지요. 그건 기억이란 말이죠.
작년보다 내가 열심히 한다고 그것으로 구원됩니까? 그건 단일성이 아니고 다양성이에요. 니 경험 다르고 내 경험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한 거예요. 교회 없이 세상에 시장바닥에 나가 보세요. 사람들은 단일성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다양성을 이야기해요.
우리 가정 얼마나 행복하다고? 이렇게 하거든요. 내가 행복하면 다른 사람도 행복합니까? 어림도 없는 소리지요. 자랑질하고 있는 거예요. 이번에 우리 아들 취직 잘 돼서 다음 주에 결혼합니다. 아, 행복해. 이건 누굴 약 올리는 거잖아요. 나의 행복과 다른 사람의 행복이 단일적입니까? 내가 행복하면 저절로 행복해집니까? 그러면 그 행복은 단일성이에요.
지금 김정은과 트럼프 회담이 결렬됐지요. 경상도 쪽에선 지금 좋아서 난리입니다. 고소하다고. 이젠 돈 덜 퍼주겠지, 이러면서. 그런데 서울 쪽에 가면 아쉬워하는 사람들 있을 수 있을 거예요. 이건 다양성이지 단일성이 아닙니다. 사람마다 보는 정치적 해석이 다르고 역사적 견해가 다릅니다. 5.18 이렇게 보던 저렇게 보던 다르다는 건 뭔 뜻이에요? 이건 다양성이라고요.
성경해석 이렇게 할 수 있고, 저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건 뭡니까? 다양성이에요, 다양성. 잘 들으세요. 다양성은 보복이 있을 수 없어요. 여기에 징벌이나 저주가 있을 수 없습니다. 왜? 나름대로 나름 성의를 표했으니까. 앞으로 좀 더 잘해. 이렇게 돼요.
시험을 쳤는데 아이큐가 50 안 되는 사람이 수학시험 40점 맞았다. 그런데 아이큐 155 되는 인간이 80점 맞았다. 누가 잘한 거예요? 머리 좋으면서도 농땡이 부렸다는 뜻이고 머리 나빠도 열심히 했다는 뜻이잖아요. 선생님이 이걸 볼 때 농땡이 부린 놈은 두 대 때리지만 얘는 안 때려요. 잘했으니까. 이게 뭐냐 하면, 성의를 감안해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인간을 감안해주십니까? 이것은 너 하는 것 보고 내가 평가하겠다는 게 되잖아요. 그런데 주님의 성물은 다양성을 고려하는 게 아니고 단일성으로 묶어버렸어요. 누구든지 이 성물을 건드리면 지옥 가는 거예요. 이건 인간들이 협의해서 된 게 아니에요.
제가 강의하는 걸 보니까 목 쉰 이유를 아시겠지요. 지난번에 목 쉬서 죄송스럽게 생각해요. 어떤 사람이 그래요. 목사님, 목 쉰 강의 들어보니까 도저히 못 듣겠다고 해요. 내가 얼마나 미안한지요.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성물이란 율법입니다. 율법을 준 것을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고 너는 아무리 해도 단일성에 대해서 합하지 못한다. 네가 거기에 합치되어 살 수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성물을 제시한 겁니다. 이 성물을 함부로 만지는 자는 용서하지 않는다고 할 때 그러면 함부로 안 만지면 되지, 조심스럽게 만지면 되지, 성의 있게 만지면 되지, 라고 하는 것은 단일성의 취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거예요.
왜냐하면 단일성은 결국 최종성을 이야기하는데 최종성은 최종적인 심판의 기준을 말합니다. 내가 심판의 기준을 말할 때 성물의 가치를 모르고 만진 인간들은 그 기준에 의해서 전부 다 작살낸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취지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완벽한 거룩이 아니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어요. 뭐 성의를 다했습니다. 열심히 했잖아요. 어설픈 그러한 핑계를 대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성물에 대해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3절에 보면, “무릇 나의 대대 자손 중에 그 몸이 부정하고도” 부정이란 말이 나오지요. 더럽다 이거에요. 부정하니까 고상하게 여기는데 쉽게 가겠습니다. 네가 더러움에도 불구하고 성물에 가까이 하는 자는 내 앞에서 끊어진다. 하늘나라 백성으로 천국에 안 넣어준다 이 말입니다. 더러운 몸으로 감히 어디를 만져. 내가 그 자를 천국 넣어주나 봐라. 그런 뜻이에요. 이게 최종성이란 말이죠.
그러면 최종적인 판단기준을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이 만든 게 아니고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제시한 거죠. 그러면 이스라엘은 이걸 주의 깊게 잘 지켰습니까, 못 지켰습니까? 율법대로 완벽하게 지켰습니까, 못 지켰습니까? 지키면 복 받고 못 지키면 저주받아요. 그들이 저주받았어요, 복 받았어요?
거기에 대한 해답은 다니엘 9장 11절에 나옵니다. “온 이스라엘이 주의 율법을 범하고 치우쳐 가서 주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으므로 이 저주가 우리에게 내렸으되” 해답이 나와 있잖아요. 성경에 해답이 나와 있다고요. 괜히 오늘날 성경을 모르고 자기의 가능성, 성의를 봐주세요. 이런 구차한 소리하면 안 돼요. 성경 자체가 문제를 제시하고 해답은 성경 안에 있어요.
어떤 인간도 아무리 철저에 철저를 기하고 완벽에 완벽을 기해도 인간은 자기가 모르는 자기의 내부가 있어요. 그걸 누가 아느냐? 주님이 알고 있어요. 주님이 알기 때문에 우리 내부의 더러운 것들을 바깥으로 끄집어내어서 기어이 우리를 족치기 위해서 저주받도록 율법을 주신 겁니다. 율법은 우리로 저주받게 하기 위해서 주신 거예요.
로마서 3장에 나오는 이야기 아닙니까? 너무나 단출하게 깔끔한 결론이에요. 구구한 변명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법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이 현재 저주받고 있다는 저주받을 만하고 마땅히 저주받아야 될 사실을 우리가 도통 멍청한 인간이 돼서 그걸 모르고 있어요.
그걸 제가 주일 설교에서 미개한 사람이라 하는데, 우리가 얼마나 미개한지 자기가 어느 정도 멍청한지를 몰라요. 멍청함의 특징은 뭐냐? 시건방졌어요. 하루 밥 세끼 먹지요. 법 지켜서 먹는 게 아닙니다. 저주받을 만한데도 은혜 주신 거예요. 우리가 잘나서 하루 세끼 먹는 것 아닙니다. 어젯밤에 잠 잘 주무셨지요? 훌륭해서 잘 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우린 그것도 모르고 저녁에 조깅해서 잠 잘 잔줄 알고 너무 시건방져서 시건방짐이 한도 끝도 없어요. 전부 다 내가 열심히 해서 이만큼 살아왔다는 겁니다. 말씀? 보지도 않아요. 듣지도 않아요. 말씀공부해도 나오지도 않지만. 안 들어요. 나 혼자 열심히 해서 살았는데 뭘 다른 소릴 들을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성물? 어디서 들어본 이야기인데? 단일성? 그건 성경에 없는 이야기인데? 이런 식으로. 최종성? 그것도 성경에 없는 이야기인데? 단일성, 최종성, 이런 것은 우리 일상생활에 전혀 모르고 살아갑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뭐냐? 이 세상은 다양하다. 다양하니까 자기 팔 자기가 흔들자. 내 팔 흔드는데 간섭이나 하지 말라.
마태복음 11장입니까 예수님이 그런 말씀했어요. 내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고 내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아니한다. 이게 뭔 뜻이겠어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세상 풍경이 그런 모습이었어요.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세상 자알 돌아간다. 혀를 끌끌 차시는 거예요.
마태복음 11장 15절에,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세대입니다. 이 세대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 했어요. 이 울산바닥 보고. 그러니까 단일성이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다양성은 그 말이 뭔 뜻인지 몰라요. 각자 자기만의 성장해온 기억이 있기 때문에. 기억에 준해서 예수님도 해석하고 성경말씀도 해석하려 하는 거예요.
그게 얼마나 잘못됐는지 제가 계속 설명하려고 합니다.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뭘 춤춰요? 미쳤나, 하지요. 오히려 욕합니다. 넌 현실을 모른다. 현실이 얼마나 다양한데 각자 자기 해석이 따로 있다. 얼마나 그런 주장하겠어요.
성경을 해석하겠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나 아직 멀쩡하단 뜻이에요. 자, 강의를 잘 들었는지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제가 분명히 했습니다. 하나님이 성물을 제공할 때 성물은 단일성인데 성물을 만질 때는 단일적인 원리가 있어요. 성물이란 최종적으로 이것은 조심해서 만지라 할 때는 그 성물을 제시할 때 이렇게 만지라고 하나의 기준만 딱 제시한다고요.
그 뒤에 아까 강의 전에 읽어보셨잖아요. 무슨 규칙이 왜 그렇게 복잡한지 이것도 하지 말라, 저것도 하지 말라고 나오지요. 그 기준은 단일성을 더욱 더 단일하게 붙이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인간적인 다양한 해석이 끼어들지 않도록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린 이런 질문해야 돼요. 왜 내 해석은 안 통합니까? 너는 네 자신을 몰라. 너는 저주받은 인간이 저주받은 해석을 내게 되면 그걸 받아주겠느냐는 겁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성경해석을 왜 하려고 합니까? 지가 개인적으로 구원받으려 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구원받겠다는 것이 우리가 저주받아 합당한 티를 내고 있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그런 식으로 하면 누가 구원받겠습니까?” 주님께서 합니다. “오지 마.” 답답한 쪽은 내가 아니고 니가 답답해. 누가 구원받고 누가 지옥 가는지는 인간들은 몰라요. 여러분 제가 질문할 테니까 답변해보세요. 성경에 누굴 꼭 집어서 구원한다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