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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90201a 울산강의-레위기 21장 : 흠자유게시판레위기

20190201a 울산강의-레위기 21장 : 흠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 할 것은 레위기 21장 21절 봅시다. “제사장 아론의 자손 중에 흠이 있는 자는 나아와 여호와의 화제를 드리지 못할지니 그는 흠이 있은 즉 나아와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지 못하느니라” 여기에 흠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16절부터 나와 있어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아론에게 고하여 이르라 무릇 나의 대대 자손 중 육체에 흠이 있는 자”라고 돼있고 그 항목들이 리스트가 쭉 나와 있습니다.

어떤 자가 흠이 있다고 보느냐 하면, 소경, 절뚝발이, 코가 불완전한 자나, 지체가 더한 자(손가락이 여섯 개인), 발 부러진 자, 손 부러진 자, 곱사등이, 난장이, 눈에 백반이 있는 자, 괴혈병(비타민 씨가 모자란), 버짐이 있는 자, 불알 상한 자, 아론의 자손 중에 흠이 있는 자는 여호와에 나와서 화제를 드리지 못하고 육체에 흠이 있는 자는 가까이 나아와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지 못한다고 돼있어요.

우리가 이스라엘의 율법을 대하면서 상당히 분위기가 고요하다고 느낍니까, 분주하다고 느끼겠어요? 말씀을 보게 되면 규격이 정해져있지요. 뭔가 원칙 같은 게 고정돼있어요.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분주합니다. 굉장히 바빠요. 하루하루 일과가. 아침에 일어나서 쓰레기 비우는 것부터 해서 굉장히 바쁜데 레위기에 나오는 성경말씀은 세상 변화에 꿈쩍도 안 합니다.

세상이 어떻게 달라지든 간에 흠 있는 자는 나한테 오지 못한다는 이 원칙은 어떤 변명이나 어떤 상황설명도 통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정지된 질서, 또는 정적인 질서라고 해야 됩니다. 기존 질서는 분주하다고 제가 방금 말씀드렸는데 인간들은 질서에 대해서 계속 변화를 추구하지요. 왜냐하면 적응해야 되니까. 내가 살아야 되니까.

그렇다면 방금 한 걸 정리해보면, 하나님의 율법은 내가 세상에 적응하고 변화시켜나가는 나의 생존의 의지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다고 정리하면 돼요. 하나님의 뜻은.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든지 가족들 밥 먹고 살다보니까 제가 죄를 좀 지었습니다, 라는 구차한 변명도 하나님 앞에 통하지 않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왜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도 말씀을 외면해버리고 기존의 생활에 연연하면서 거기에 열중하느냐, 왜 그게 우선이고 관심사냐? 그것은 우리가 장소에 매여 있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께선 꿈쩍도 안 하지요. 이 장소에서 내가 백 살까지 살아야 됩니다, 애썼습니다. 그러니까 봐주세요, 라고 하질 않고 하나님은 장소가 아니고 소속으로 바꿔버립니다.

네가 이민하든지 몇 년을 이 땅에 살았는지 울산에 이사 와서 아이를 몇 살까지 키웠는지, 그런 것은 고려하지 않습니다. 몇 년을 살든 어디서 살았든 네 소속이 어디냐고 묻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소속은 뭘 초월한다? 우리 삶의 장소와 환경을 완전히 초월해버리죠. 우리가 어떠한 변명을 하더라도 흠 있는 것은 안 받겠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안 받는 게 두 종류가 있어요. 하나는 이스라엘 바깥에 있는 건 안 받아요. 이방인들. 이방인들을 왜 안 받느냐 하면, 그들은 확정된 고정된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요. 율법이 없으니까 내놓은 자식들이죠.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어떻게 하시는가? 그걸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이렇게 보시면 정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버려두시는 거예요. 내 자식 아닌 것은 내버려두는 방식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에게서 내어버림을 당하지 않고 하나님 쪽에서 유지하게 된다면 그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에요.

반면에 교회 가든 말든 말씀 보든 말든 관계없이 방치돼있으면 이걸 히브리서에서는 사생자라 해요. 남의 자식이다. 내어버려두다. 로마서 1장에 나오는 말씀이죠. 그럼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불쌍한 사람일까요? 부모 없는 자식이 제일 불쌍하다 하지요. 안 거둬주는 자식이 제일 불쌍하지요.

매를 맞든 얻어맞든 간섭 받든 꾸중을 듣든 하나님께서 그때그때마다 찾아와서 꾸중을 하던 잔소리를 하던 간에 뭘 챙겨주는 부모가 있으면 결국은 그 사람 성공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부모의 나라, 아버지의 나라에 합류할 수 있습니다.

미운오리새끼가 있잖아요. 내가 낳지도 않았는데 둥지를 사용하는 것 있잖아요. 점유해서 사용료도 안 내고. 하나님은 그런 실수를 끝까지 용납하지 않아요. 너는 내 자식 아니니 나가라. 그런 대우를 받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에요. 물론 그런 불쌍한 사람이 거의 대다수지요. 왜냐하면 넓은 길을 가는 사람은 많으니까.

챙겨주는 사람은 극소수에요. 모든 사람이 재벌 3세가 될 순 없어요. 그러나 재벌 3세는 있습니다. 그것도 0.1% 잘 사는 사람 있어요. sky캐슬에 다 살 수 없지만 거기 사는 사람이 있다고요. 하지만 그 사람들은 다행스럽지요. 왜냐하면 천국 백성이니까. 하나님의 자녀니까. 그 자녀에게 요구하는 것은 뭐냐 하면, 흠이 없어야 된다는 겁니다.

흠이 없다는 말은 달리 말해서 무슨 뜻이냐 하면, 모델이 있다는 거예요. 처음에 율법을 보내실 때는 뭘 겨냥했느냐 하면, 완벽하게 흠이 없는 분은 이렇게 돼야 된다는 모델을 상정하고 그 모델에 입각해서 율법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럼 흠이 있다는 말은 무엇과 비교대상이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따로 생각해놓은 모델이 있는데 그 모델에 비교해서 네가 이만큼 거리가 있다는 거예요. 흠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시스템을 할 때는 하나님께선 인간의 어떤 융통성 같은 것을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정적 질서에요. 꿈쩍도 안 해요. 살다보니까 주께 소홀했다는 그런 구차한 변명 같은 건 하지 마라. 그 원형을 나는 포기 못한다. 율법의 원형은 포기 못한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입장에서 흠이 없다는 말씀 자체를 듣는다는 것은 결국 장소에서 소속, 소속에서 초월을 추구해야 돼요. 이스라엘 사람도 땅에 살고 이방인들도 땅에 사는데 땅에 살면서도 땅의 사람이 아닌 식으로 살아가는 것.

제가 아까 정적, 고정된 질서란 말은 뭐냐 하면, 이 땅에서 그만큼 변화가 심하단 말이죠. 바람 부는 대로 심하잖아요. 우리 마음도 하루 종일 다르잖아요. 그런데 모형이 있는 최종 나라의 상태에서는 고정된 완벽한 원형을 기준으로 해서 율법을 주시고 주께서 초월의 위치대로 우리를 이끄시는 거예요. 개도 사료나 주면 잘 사는데 밥이나 먹는 게 이 땅에서 잘 사는 게 아니에요.

초월적 존재, 남들 보기엔 똑같아요. 장소에 살고 하루 세 끼 먹고 어떤 사람은 두 끼 먹고 사는데 별 차이 없는데 주께서는 초월적 존재를 모델로 하고 있는 거예요. 비교가 안 되지요. 하나님 보시기에 비교가 안 돼요.

그러면 우리가 사는 장소, 장소를 다른 말로 위치, 우리는 위치적 존재고 장소적 존재인데 우리는 이 땅에서 살려고 애쓰는데 어떻게 우리 힘으로 여기서 벗어나 초월에 이를 수 있습니까? 이렇게 말씀한다면 여기에 전쟁이 개입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에 전쟁이 개입돼요. 이거는 싸움이 벌어져야 돼요. 지금부터 어려워지는데 잘 들으셔야 돼요.

싸움이 벌어진다는 것은 무기와 무기체제의 다툼인가? 아닙니다. 율법을 중심으로 싸움이 벌어진다는 것은 의외로 무기가 아니고 이야기와 이야기의 다툼으로 보시면 됩니다. 이야기니까 스토리죠. 왜 갑자기 여기에 이야기가 등장하느냐 하면, 보통 싸움은 주먹질을 동원하잖아요.

하나님의 싸움은 뭐냐 하면, 주의 말씀을 듣고 반응을 나타내고, 주의 말씀을 듣고 거기에 반응을 나타내고, 주고받고, 주고받고 하는 대화하는 형식이에요. 이야기하는 거예요. 마치 한 가정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대화하듯이.

그럼 그 대화가 왜 싸움이 되느냐? 우리가 평소에 이 지상에서 위치에서 또는 장소에서 살기 위해서 누구와 대화합니까? 하나님과 대화 안 하죠. 바로 같은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다른 사람과 대화하죠. 이 다른 사람과의 대화와 주님의 대화와의 겨룸, 경쟁, 다툼, 이게 바로 초월을 향한 전쟁이에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18절에서 “무릇 흠이 있는 자는 가까이 못할지니 곧 소경이나 절뚝발이나 코가 불완전한 자나 지체가 더한 자나 발 부러진 자나 손 부러진 자나 곱사등이나 난장이나 눈에 백막이 있는 자나 괴혈병이나 버짐이 있는 자나 불알 상한 자나 제사장 아론의 자손 중에 흠이 있는 자는 나아와 여호와의 화제를 드리지 못할지니 그는 흠이 있는 즉 나아와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지 못하느니라”

이런 이야기를 대화니까 던지면 선뜻 동의가 되겠어요? 동의 안 되지요. 인간은 자기가 절뚝발이 되고 싶어 되는 게 아니고 소아마비 걸리고 싶어서 걸린 게 아닙니다. 여기 보면 불알 상한 자, 어릴 때부터 자기가 불알 상하라고 애쓴 것 없어요. 성기능에 문제 있다는 것은 자기 책임 아닌 거예요. 태어난 게 이 몰골인데 어쩌란 말이에요?

만약에 여기에 보태서 쌍꺼풀 수술한 사람 못 들어간다 하면, 쌍꺼풀 없는 사람 못 들어간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발 부러진 자, 손 부러진 자는 흠 있는 자로 규정한다 할 때 여기서 우리가 할 말이 한두 가지가 아닌 거예요. 공평치 못하다, 하나님은 불평등하다, 왜 기회를 균등하게 제공하지 않느냐? 공평하신 하나님인 줄 알았는데 어떻게 스스로 자기에게 손댈 수 없는, 여지도 없이 해서 주류에서 도태시켜서 비주류로 돌리느냐? 이렇게 되면 우리가 평소에 자비로운 인자한 하나님 상이 일그러지지 않느냐? 뭐 나올 이야기가 한둘이 아니지요.

거기에 대해서 주님이 이야기합니다. 그런 구구절절한 반발의 요소가 바로 이 세상이 잘못된 원천에서 나온 스토리라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얼굴에 곰보가 있는 사람은 교회 나오지 말라고 목사가 이야기했을 때 저는 개 같은 여자입니다, 하고 안 나오면 되는데 세상에 내가 나쁜 짓을 했습니까, 태어난 걸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인간의 존엄성을 개무시하느냐고 나온다면, 그런 불만과 불평이 바로 인간 자체가 잘못되게 돌아가고 있다는 하나의 표징이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 흠이 있는 자를 21장 16절 이하에서 지정한다는 것은, 여기에 대해서 인간들이 자동적으로 내부적으로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는 본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노출시키는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전략하니까 또 어려운 게 나와요. 방금 제가 전략이라고 했지요.

전략과 전술이 달라요. Strategy, 이건 전략이고 tactics, 이건 전술인데 전략과 전술이 다른데 어떻게 차이 나느냐 하면, 전략은 어떤 목표치가 있어요. 목표치를 정해놓고 일관되게 밀어붙이는 건 전략이고, 전술은 그때그때마다 융통성을 가지는 게 전술입니다.

예를 들면 토끼와 거북이가 경쟁을 한다. 경쟁하면 토끼가 늘 이겨요. 토끼는 육상 동물이고 거북이는 해상 동물이기 때문에 육지에선 이길 수 없어요. 전략상 토끼가 항상 이기게 돼있는데 여기에 임하는 거북이의 전술은 뭐냐? 100m 달리기하는데 그중에 99m는 물속으로 달리는 걸 하면 돼요. 자기한테 유리한 이게 전술인 거예요.

전략, 전술은 다 어디서 나왔는가? 전쟁개념인 거예요. 성경에도 이런 게 있지요. 위장 후퇴하는 게 성경에 여러 번 나와요. 또는 은폐, 엄폐하는 것. 적들이 기가 살아서 교만할 때 비겁하게 후방에서 치는 방식, 그 대목이 성경에 여러 군데 나오거든요. 특히 사사기에서 베냐민과 전쟁할 때도 나오고.

주님께서 전술적이 아니고 전략적으로 흠 있는 자는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없다고 선언해버렸습니다. 아까 이야기한 고정적인 거예요. 확정적입니다. 변함이 없어요. 왜냐하면 모델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델까지 취소하면서 봐주는 분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 흠 있는 자는 오지 말라는 이유를 아셔야 돼요. 깊은 취지를 알아야 돼요. 제가 물어볼게요. 지금 이스라엘은 누구와 전쟁 중입니까? 율법으로 무장하는데 율법 없는 자와 전쟁하잖아요. 율법 없는 자가 누구죠? 이방인이죠. 이방인은 거룩하지 않습니다. 거룩함이 없어요. 거룩이란 윤리 도덕이나 정치적 개념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이 있으면 거룩이고 언약이 없으면 거룩 아니에요.

나중에 여러분이 천국 가실 때 어떻게 천국 왔느냐고 물으시거든 최종 심사하실 때 요한계시록 말씀대로 하면 돼요. 예수의 피로 씻었다고 하면 돼요. 열심히 교회 봉사했다는 둥 이런 되도 않은 소리하면 탈락입니다. 그건 내어버려둬요.

우리 구원이 구원의 목적이 아니에요. 구원의 목적은 예수님이 기준이었다, 원형이었다, 모델이었다. 그게 기준이에요. 하나님 일의 목표에 대해서 혼동하시면 안 돼요. 내가 죽어서 천당 가는 게 목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기여도, 예수님이 하신 일을 드러내는 게 성령 받은 성도의 존재 이유에요.

아까 이야기했지요. 인간은 장소에 매인다고요. 장소에 매이는 이유는 뭘 고려하지 않는 거예요? 장소 다음에 뭐라고요? 소속이죠. 소속을 고려하지 않으니까 울산 땅에서 밥 먹고 살아야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는 누구 소속이다? 나는 내 소속이니까. 내 가정소속이니까, 난 가장이니까, 난 주부니까, 난 이 집안의 아들이니까, 딸이니까. 이미 소속은 자기가 아는 눈에 보이는 늘 변할 수밖에 없는 그 장소에 자기 소속감을 최종적으로 두는 거예요.

그러나 율법이 주어졌다. 오늘 레위기를 보잖아요. 우리에게 레위기를 보게 하는 것은 네가 어디에 살았느냐는 것이 소속의 전부가 아니고 소속은 율법의 완성된 나라가 네 소속이라는 겁니다. 그럼 벌써 장소적으로 여기서 생존하려는 우리의 모습과 하나님의 의도가 다르지요. 그게 스토리가 다르다.

한 평생 인생 산 것을 쓰라하면 소설책 일곱 개는 쓴다고 하는데 길게 쓰면 일곱 권 나오겠지요. 그러나 일곱 권을 쓰던 일곱 권의 일곱 배를 쓰던 그건 누구 스토리에요? 나의 스토리고 이 장소에서 이만큼 산다고 애 깨나 썼다는 자기 자랑이란 말이죠. 그런데 성도는 누굴 자랑하라 했습니까, 갈라디아서 6장에서?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잖아요.

십자가는 누구 스토리입니까? 예수님 스토리잖아요. 그럼 나의 스토리와 예수님 스토리가 만나야 되지 않습니까. 만나서 누가 월등해야 돼요? 내 스토리 뭉개버리고 주님의 스토리가 더 위에 있어야 되겠지요. 뭉갤 때 그냥 뭉개지면 안 된다고요. 어떻게 뭉개지느냐? 나는 흠이 있습니다, 라고 뭉개져야 돼요.

나는 흠이 있습니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나는 하나님이 준비해놓은 원천과 무관한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에 대적이 되는 원천에서 흘러나온 그러한 스토리에 매여서 살아왔습니다. 인생 헛살았습니다. 살았는데 소용없었습니다. 부질없는 세월 보냈습니다. 이런 고백, 이 장소에, 울산이란 이 위치에 붙잡혀 살라고 소속이 뭔지도 모르고 그냥 광산 김 씨가 소속인 줄 알고 그게 전부인 줄 알고 명절에 집안 제사 지낼 때 제사음식 다 만들면 며느리 도리 다하는 줄 알고 그런 식으로 살았지요.

율법은 안중에도 없고 율법은 생각지도 않고 말씀은 다 잊어버리고 그저 나를 위해서 남들과 이야기하고 대화하는 그걸로 내 인생 장식하려고 오늘도 눈치코치 다 보면서 긴장 속에서 몸부림치며 살아가고 날마다 변화되고 있는 거예요. 고정된 게 없어요. 마음도 한결 같지 않아요. 일기예보처럼 늘 달라져요. 안정된 것도 일관된 것도 없어요. 꾸준한 것도 없고. 애 잘 되면 좋았다가 잘못 되면 울었다가 그저 바깥 환경에 웃었다 울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초월을 모르는 거예요. 일단은 현재 이스라엘은 한 소속입니다. 하나님은 그 이스라엘은 초월로 변모시키려고 합니다. 초월로 변모시키기 위해서는 거룩이 인간의 힘으론 확정되게 아님을 보여줘야 돼요. 그러면 이스라엘 바깥에 이방나라를 배치해야 됩니다. 그것은 뭐냐? 비거룩이에요. 언약이 없기 때문에 거룩하지 않은 겁니다.

전쟁을 할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이기게 하는 거예요. 누굴 상대로 해서? 바로 이스라엘 바깥에 있는 이방민족을 상대하게 해서 승리케 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자동적으로 이스라엘은 거룩이 되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렇다면 거룩을 표현하는데 첫 번째는 이스라엘 바깥과 전쟁, 방금 이것 이야기했죠. 또 한 가지는 뭐가 있겠어요? 이스라엘 내부에 원래 모델과 다른 요소를 율법적으로 규정하는 방식이 있어요. 그게 뭐냐? 지금 우리가 보고자 하는 흠이 있는 거예요. 제물에 흠이 있다든지 또는 인간 자체에 흠이 있다든지. 흠이 있으면 하나님의 거룩에 가까이 오지 못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은 이런 생각할 겁니다. 애초부터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만들지 뭐 때문에 흠이 있고 이방만족이 있느냐 하시는데 그게 하나님이 하시는 스토리를 몰라서 그래요. 우리는 자꾸 내 구원만 생각하니까 흠 없이 그냥 태어날 때부터 지적당하지 않고 죄인 소리 안 듣고 해서 태어나자마자 의인이라 해서 천국으로 데려가자. 이렇게 하면 어떻습니까, 라고 항상 자기 구원에 몰두하다보니 그런 거예요.

그러나 흠이 있다는 이 자체가 완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차이 남. 이스라엘과 이방민족의 차이 남, 그리고 온전한 것과 흠이 있는 것과의 차이 자체가 완전이라면? 우리의 발상을 완전히 뒤집어엎어야 되겠지요. 예수님 오실 때 유대인들은 생각했습니다. 완전한 것이 율법에 흠이 없는 것이 천국 간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은 장례식에 참석 안 했어요. 자기 가족 외에는. 왜냐하면 죽은 자의 신발이나 옷이나 뭔가 묻으면 부정 탄다는 거예요. 정결치 못하다는 거예요.

왜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로마에 지배를 받는가? 그동안 정결치 못했기 때문에 율법을 온전히 못 지켜서 멸망한다고 그들은 생각한 거예요.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그래서 그 증거로 율법의 일곱 계급을 정했어요. 제일 윗대가리, 피라미드 제일 꼭대기에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있는 거예요. 서기관이 있고. 제일 밑바닥에는 세리, 창기들이 있고.

왜 그런 피라미드를 이스라엘 한 가운데 두는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의 지향점은 우리의 초월은 이런 식으로 이런 과정으로 가는 게 옳다고 모든 백성들에게 가르쳤고 양육했던 겁니다. 율법이 이야기하는 바는 율법을 지켜야 지킨 양만큼 거룩해지고 못 지키면 못 지킨 양만큼 그들은 지옥 갈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보다 세리와 창기들이 천국에 먼저 간다고 이야기했을 때 12년 동안 혈우병 걸린 여인에게 네가 믿음이 크도다, 라고 했을 때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그런 이야기한 이유가 뭘까요? 그 피라미드 구조를 엎어버리는 거예요. 유대인들이 그런 피라미드 구조를 만든 것은 그게 완전을 향한 유일한 방법이라 여겼던 겁니다. 예수님은 그걸 뒤집어버렸어요.

제가 질문합니다. 그러면 거꾸로 죄 많이 지면 천국 가는 길입니까? 아니지요. 죄 진다고 천국 가고 강도 됐다고 천국 가는 게 아닙니다. 다만 저쪽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반대로 이야기할 뿐이지 창녀 됐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거든요. 이건 뭐냐 하면, 거꾸로든 바로 세우든 인간에게는 천국 갈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없다?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흠이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려고 가지고 오지 못한다는 말은, 사람들은 뭘 생각하느냐? 흠이 없는 자는 가까기 갈 수 있네요, 라고 생각하기 마련이거든요. 여러분, 반대의 반대가 진리가 아닙니다. 반대가 나쁘다고 해서 그 반대의 반대가 꼭 옳다는 보장은 없어요.

여기서 한 가지만 빼면 돼요. 성경은 날 구원하려고 있는 책이 아니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책이다. 그것 하나만 바꾸면 되는 겁니다. 그것만 바꾸면 매치나 되치나 그게 완전이라는 거예요. 그 자체가. 쉽게 말해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냐고 물으면 예수님께서 지시한 게 옳고, 예수님께서 지시하지 않은 게 그른 거예요. 따로 옳다, 그르다를 편성하지 마세요.

우리는 아침에 눈만 뜨면 옳은 것, 나쁜 것을 내가 편성하잖아요. 왜 편성할까요? 그렇게 해서 나한테 유리하도록 내 구원의 조건이 강화되도록 그렇게 하고 싶은 겁니다. 역시 나 위주에요. 나 위주는 나의 스토리가 돼요. 그건 하나님의 전쟁 상대가 되는 겁니다.

말씀 다시 하겠습니다. 율법이 있을 때 율법을 통해서 그 장소에서 소속으로 바뀌려면 스토리와 스토리의 대결로 나선다 했지요. 그렇게 나선 이유가, 이미 인간들은 다른 인간들과 더불어서 주고받고 한 것이 여기 있는 거예요. 이 몸에 장착돼있는 겁니다.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가 이미 우리는 눈치코치 보면서 살아오고 있는 거예요.

따라서 주님께서는 인간들이 구성한 스토리 내용과는 너무나 원리상 안 맞는 이야기를 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인간들로 하여금 반발을 유발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 내부에 있는 흠이라는 것은 결국 무엇을 뜻합니까? 반발심을 이야기해요. 반발심에 대한 유도에요. 신약에 몇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부자 청년이 와서 어릴 때부터 착했습니다. 율법대로 시키는 대로 살았습니다. 할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너의 모든 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빈손으로 나를 따르라 했잖아요. 그럴 때 부자 청년이 근심해서 반발해서 주님을 떠난 것은 물론이고요, 그 광경을 보고 제자들이 어떤 생각을 했어요? 제자들이 더 놀랐어요. 그럴 것 같으면 누가 구원받겠습니까, 라고 자기 구원에 대해서 여전히 집착하고 있었던 거예요.

앞에 하는 말이 있지요.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처럼 어렵다는 이야기를 십자가 지기 이전에 제자들에게 했잖아요. 우리도 제자들의 심정을 알려면 십자가 지셔서 대속했다는 걸 우리가 일단 모른다고 칩시다. 그리고 주의 말씀이 자체가 진리고 반드시 그 말씀대로 지키기 때문에 허튼 말씀은 안 한다고 분명히 확정지읍시다.

그런데 주님께서 앉아서 하신 말씀이,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만큼 어렵다. 그럴 때 주님이 앞으로 할 일을 전혀 모르는 제자들한테는 이게 얼마나 난감하겠습니까? 그래서 제자들이 자연스럽게 이런 반발이 나온 거예요. 그러면 누가 구원받겠습니까? 주님의 답변은 간단했어요. 사람으론 할 수 없다. 이게 복음이에요.

사람으로 할 수 없다는 말은 구원받으려고 애쓰지 말라는 거예요. 애써도 소용없다는 겁니다. 사람으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으로 할 수 없다. 제자들이 그 이야기 듣고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헛짓하고 있구나. 예수 믿는 게 소용없구나.

그런데 그 뒤의 말씀이 뭐냐 하면,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신다. 제가 묻습니다. 첫째, 이게 위로가 된다. 둘째, 위로가 안 된다. 몇 번이겠습니까? 인간의 스토리는 살아온 경력은 뭐든지 내가 할 수 있어야 희망을 가져요. 내가 못하는 것은 희망을 안 갖습니다.

만약에 저쪽에서 날 구원 안 한다면 난 끝난 거예요. 그러면 저쪽에서 나한테 구원을 주려고 어떤 압력을 가했는데 그 압력조차도 안 된다는 거예요. 압력을 행사할 수 없는 입장이라는 거예요. 우리가. 주면 주는 대로 받고 안 주면 끝나는 이야기를 주께서 하신 거예요. 이건 미칠 이야기입니다. 사람의 희망이 완전히 작살나는 거예요.

이래도 믿을래, 나 따라올래? 하는 그런 발언을 주께서 하신 거예요. 떠나려면 떠나라. 가려면 가라. 그러나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는 반드시 내게 오게 돼있다. 이 모든 이야기가 누구 이야기냐 하면, 내 쪽에 뭘 했다는 스토리가 아니잖아요. 모든 스토리가 나한테 유의미, 의미가 있는 겁니까? 주님이 나로 못하게 해놓고 모든 것을 주님 쪽에서 하셨다는 것을 의미 있게 살아나기를 우리의 몸을 통해서 증거 되기 원한 거예요.

예수님의 스토리는 예수님이 하셔야 의미가 발생되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맹탕이 아니고 나름대로 의미가 있어요. 우리 의미는 뭐냐? 내가 이렇게 믿었다. 내 쪽에서 뭘 했다. 그것이 나의 스토리가 되고 그게 의미 있는 게 돼요. 내가 이미 의미 있게 되니까 주님의 의미에 대해서 우리가 반발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제자들은 낙담하는 거예요. 할 수 없다니까. 그런데 할 수 없음을 포함시켜야 완전한 주님의 일이 돼요. 그러니까 우리의 못남이 주이 일에 흡수가 될 때 주님이 완전해진다고요. 그래야 십자가가 유의미한 게 되니까. 낚싯대로 구원하는 게 아니고 십자가로 구원하거든요. 나로 인하여 상처받은 주님의 상처 있잖아요.

창 자국과 못 자국, 그게 있어야 주님이 주님으로 완전해요. 팍팍 찔러줘야 돼요. 우리가 주님에 반발해야 되고 주님께 대들어야 돼요. 그래서 주님이 주님다워요. 날 죽이라, 인간들아. 너 한 고집하잖아. 너 구원밖에 모르잖아. 하나님은 안중에 없잖아. 너만 잘 되면 그만이잖아. 그 식으로 찔러봐라. 그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에요. 얼마나 고맙습니까? 우리의 철딱서니 없는 짓거리도 주님의 완전에 재료가 된다는 사실.

우리가 그런 주님 앞에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이 한 말이 있어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나는 절망적인 사람이다. 그런데 절망적인 그 이야기가 저가 이야기인 동시에 주의 이야기가 돼요. 절망케 하심으로 구원하시는 주님의 자기 스토리에 이미 포함이 돼있어요.

다시 우리 일상으로 돌아가 봅시다. 우리 일상은 뭡니까? 그저 명절 됐다고 장 봐놨나? 며칠에 촌에 가나 그 이야기지요. 그 이야기가 모이면 나의 스토리에요. 그러다 명절 잘 지내면, 올해는 아무 탈 없이 전 잘 부치고 하니까 다들 좋아하고 이번 명절은 성공했네. 내 자랑 되지요.

자식이 서울의대 가면 왜 좋냐 하면, 그게 자기 스토리가 되기 때문에. 엄마, 아빠의 자랑이 돼요. 그 자랑이 왜 기분 좋으냐? 그게 내 집안의 아들이기 때문에. 내가 확정된 소속에 이런 잘난 아들이 있고 딸이 있다는 겁니다. 이게 우리의 스토리, 우리의 이야기에요. 그 이야기가 원천이 달라서 그래요. 우린 이미 악마부터 시작하거든요. 악마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그런 스토리만 짜낼 수밖에 없어요.

나 자신의 존재 자체를 건드리지 말라는 쪽으로 모든 이야기가 거기서 시작되는 겁니다. 가인의 후예입니다. 주님께서는 그것 때문에 심하게 다쳤고 돌아가셨고. 그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스토리가 있는 이 세상에 주님의 자기 스토리로 찾아오시면 너의 죄도 그게 완전이었다. 의롭다는 게 아니고 완전이었다. 누구 안에서? 예수 안에서 완전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 안에는 뭐가 없느냐 하면, 정죄함이 없어요. 왜냐하면 그것도 주의 완전함을 드러내는 재료가 되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 우리가 흠이 있고 우리가 이방인이라는 것, 이방인은 바깥에 있죠. 흠이란 이스라엘 내부에 있는 겁니다. 어쨌든 간에 원천이 다르기 때문에 거룩이라 할 수 없어요.

본문 들어가기 전에 이야기해봅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할 때 무화과나무가 있었거든요. 목이 말라서 열매 따먹으려하는데 아직 열매가 맺지 않았어요. 예수님께서 다음에 열매 맺을 때 오시면 되잖아요. 이게 우리 스토리거든요. 그런데 주님께서 시간적으로 개입해버려요. 내가 요청할 때 열매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너를 저주한다.

여러분, 이게 우리 스토리 역사 속에서 가당치 않는 이야기지요. 그런데 아까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진리가 뭐냐? 예수님의 지시가 진리에요. 예수님의 요구조건이 진리에요. 이 핑계, 저 핑계대지 말란 말이죠. 그래서 보니까 무화과나무가 저주받아서 바짝 말랐어요. 누가 놀랐는가? 제자들이 놀란 겁니다. 제자들 상식에 너무나 반한 현상이 일어난 거예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주께서 받는다, 이게 진리가 아닌 걸 알게 된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역량이 진리가 아닌 걸 알았습니다. 애초부터 우리가 하든 안 하든 주께선 우리 것을 안 받는다는 것이 진리에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진리에요.

우리는 잔뜩 나의 스토리를 많이 만들어놨습니다. 그 속에 주님한테 자랑하고 싶어서 환장할 거리도 많아요.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주께서 받지 않습니다.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내어버려두사. 아무리 훌륭하고 착해도 주께 내어버려둠을 당하면 하나님의 바깥이에요. 하나님의 언약, 율법의 바깥에 있다면 그거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지금 뉴스만 나오면 불쌍한 사람들로 도배가 돼있어요. 안희정, 이재명, 김경수, 손혜원, 문재인, 온 천지가 내어버려둔 사람들의 자기 스토리로 도배가 돼있어요. 이제는 우리가 복음으로 그런 현상을 볼 줄 알아야 됩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나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음주운전하다 귀가하던 경찰관이 죽었다. 내가 만약에 퇴근하다 음주운전 차에 치면 역시 나도 죽을 거예요. 그러니까 항상 우리는 내가 산다는 것이 나의 고유권한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건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계속 살려두는 거예요. 같이 인생을 살더라도 내어버린 사람은 이 사실을 모르게 되고 하나님이 챙겨주는 사람은 이 사실을 미리 당겨서 알려주는 겁니다.

어차피 천국 가면 다 아는 사실이거든요. 네가 몇 년도 태어날 때 내가 챙겼고, 몇 년도 네가 길에 갈 때 챙겼고, 네가 아플 때 챙겼고. 지금 이 순간도 주께서 계속 챙겨주고 있잖아요. 그런데 나의 스토리에 세상 스토리가 너무 둘둘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갇혀있다 보니까 율법의 취지가 전혀 먹히질 않는 거예요. 주님의 스토리가 내 일상 속에 들어오질 않는 거예요. 내 스토리가 꽉 차여서. 창고에 빈곳이 있어야 물건 하나 더 들여 넣지요.

주님 뜻은 이겁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린 한평생 그렇게 고생하고 눈물 콧물 다 짜냈는데 나중에 천국 와보니까 너로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아플 때 있었고, 차에 치어 죽을 뻔할 때 있었지만 그건 아무 일도 아님에 속합니다. 오직 아무 일은 하나밖에 없어요. 주님의 일. 너 같은 인간을 위해서 네 죄를 대신해서 죽었던 그 십자가만 일이 돼요.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만 자랑해야 돼요. 성도는 자랑할 수밖에 없어요. 왜? 우리는 애초부터 흠 있는 자요, 우리는 내다버린 이방인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자체가 결국 버림받습니다. 율법을 못 지켜서가 아니라 율법을 몰라서 버림받았어요. 율법의 기능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율법의 기능을 여러분 아시지요. 율법의 기능은 우리의 죄를 더욱더 죄 되게 하는 거예요. 그 기능을 이스라엘 백성은 몰랐어요. 그들은 나는 절뚝발이 아니다. 나는 불알 안 상했다. 좋다. 불알 상하지 않으면 천당 갑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율법은 이것만 있는 게 아니에요. 율법은 다 지켜야 하는데 이것만 있는 게 아니에요. 마음의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그건 헛방입니다. 그러니까 율법 한두 개 지켰다고 우겨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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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