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강-YouTube강의(성공)20190122-이 근호 목사
266강-YouTube강의(성공)20190122-이 근호 목사 제 266강, 제목은 ‘성공’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성공이라고 할 때는, 어떤 뜻이냐 하면은 자기 것을 잃지 않는 것을 성공이라고 합니다. 자기 것을 잃지 않는 것 그리고 자기 것이 유지되는 것, 전보다 더 확고히 되는 것. 그것을 성공이라고 이야기해요. 뭐 꼭 재산만이 성공이 아니고 주위도 해당되고 건강도 해당되고. 건강을 잃으면 실패라고 보고 건강을 잘 유지하면 성공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전부 다 성공을 지향하는 그런 정신으로 꽉 차 있어요. 이 세상의 성공. 실패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공하는 이유도 여기에는 없어요. 실패하면 안 되는 이유도 없어요. 자 이유가 없다고 했을 때에, 이 세상은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했을 때에, 사람들의 지금 모든 학문은 그쪽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무 이유 없는 거예요. 우주가 왜 만들어졌는가? 이유를 찾지 마라. 아무 이유 없는 거예요. 그냥 그대로 있던 거예요. 사람이 왜 있는가? 이유를 묻지 마라. 사람은 그냥 유인원인 원숭이에서 이렇게 변화가 되어서 있다. 이유는 없다. 그냥 된 거다. 더 신경 쓰지 말고 그거만 생각하자. 왜? 성공실패를, 성공하고자 하는 이 욕망을 긍정적으로 보려면 그 이유를 잘라내야 돼요. 이유 말고 내가 뭘 요구하느냐만 있으면 족한 거예요. 이 땅에서는. 지금 내가 뭘 원하고 있느냐만 족하지, 이 원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를 따져버리면 사람이 기분이 팍 상하는 거예요. 사는 보람도 상해버리고. 그래서 대학에서 인문계출신들이라도 취직하게 되면 인문계의 모든 의미를 다 버려요. 오직 성공만을 위한 거예요. 성공만을 위한. 인생이 무엇이냐, 성공이 무엇이냐, 그 의미를 찾던 것을 다 버립니다. 내가 성공하겠다는 그 의지보다 더 우선되는 것은 없어요. 그래서 철학하는 사람들은 철학을 버리잖아요. 국문학 한 사람은 국문학을 버리고. 만약에 철학을 안 버리겠다고 하는 사람은 자살하고. 철학을 꽉 쥐고 있는 사람은 거의 자살수준이에요. 세상도피, 은둔, 뭐 그쪽으로 나가버려요. 아무리 공부를 하고 철학을 해도 내가 이 자아정체성과 내 자아를 유지하겠다는 여기에 대해서는, 이거는 불교도 마찬가지고 종교도 마찬가지고, 어떤 적절한 이유가 없어요. 그냥 내가 되고 싶었다는데 왜 말이 많아? 이래 돼요. 내가 그렇게 성공하고 싶다는데? 성공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 내가 나를 잃지 않는 것, 유지되는 것, 그게 커지는 것, 작아지는 것, 다 포함되어 있죠. 그렇다면 교회에 온다. 성공하고 싶으면 오겠죠. 왜냐하면 무조건적이니까. 성공은 무조건적이에요. 성경을 본다. 성공하기 위해서 성경을 보겠죠. 무조건적이니까. 순복음교회가 커졌던 이유가 뭐겠어요? 거기에 온 사람들은 실패하려고 온 사람들이 아니고 성공하려고 온 사람들이에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성공은 이유가 없다니까요. 성공하겠다는 이게 진리지 그 외에는 진리가 아니에요. 하나님이든 예수든 성경이든 전부 다 내 성공이라는 진리를 위해서 보조적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냥 보조적인 역할. 만약에 성경을 보고 교회를 가는 것이 내 성공에 방해가 된다면 그건 당연히 안 가죠. 내 확고한 존재의 의미는 이미 성공으로 굳혀놨는데, 내가 굳힌 것이 아니라 본래 충동이, 욕구가 성공 쪽으로 가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한테 성공이 되고 도움이 된다 싶을 때는 가지만, 성공실패에 지장이 된다면, 예를 들어서 일요일에 손님이 오면 교회에 못 가죠. 왜냐하면 이미 성공이라는 것이 확고하게 된 이상은 그 다음부터는 이 성공을 성경과 대조해서 성공에 보탬이 되느냐, 성공에 방해가 되느냐, 그거만 따지면 되는 겁니다. 따지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가 하려면 성경 속에서 당신의 성공은 정당합니다! 그 이유를 계속 찾아서 그 성공을 성공하세요! 성공한 의지로 성공하세요! 다시 말해서 못 먹고 힘들더라도 성공하겠다는 그 뜻만 버리지 마세요! 그것만은 성공하세요! 그거 잃어버리며 안 됩니다! 성공하는 것을 잃어버리지 않고 유지하는 것을 성공이라고 했죠. 그러면 성경을 한번 봅시다. 성경에서 과연 그렇게 해주는지. 하나님은 사랑합니다. 성공하기를. 이걸 앞에 붙여야죠. 그러면 말이 되죠.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죽이기를. 이러면 말이 안 되잖아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뭐냐, 당신의 소원대로 성공하기를 후원해줍니다. 뭐 이런 식으로 사랑이라는 의미가 또 왜곡이 되겠죠. 그러면 성경을 보자 이 말이죠. 성경에 누가 나와요? 모세가 나와요. 출애굽기 7장에 보면 모세 앞에 누가 나오느냐 하면 바로가 등장해요. 22절, “애굽 술객들도 자기 술법으로 그와 같이 행하므로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모세가 지팡이로 하수를 치니 물이 피로 변했죠. 이건 뭐냐 하면 애굽 나라에 대한 이익을 주지 않죠. 애굽 나라를 유지하는데 위기가 발생했죠. 근데 애굽의 술객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걸 그대로 해서 그들도 그런 요술을 부려가지고, 바로의 눈앞에서 물이 피가 되는 마술을 했어요. 요새 마술에는 그거는 마술 측에도 안 들어가요. 눈속임으로 얼마든지 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바로의 마음이 강퍅했다. 이렇게 나와요. 우리가 성경에서 성공이라고 하는데 그게 성경 속으로 들어오면, 이 성공이라는 단어가 뭐로 바뀌느냐 하면은 이게 강퍅이에요. 그 성공하겠다는 마음이 강퍅한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은 그 바로의 마음이 강퍅했다는 것은 누구 앞에 설 때 그랬냐 하면은 모세 앞에 설 때 그랬다 이 말입니다. 모세 앞에 설 때. 근데 모세는 누가 보냈습니까? 하나님께서 보냈죠.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가 성공하겠다는 이 의지가 사람들 앞에서는 이게 문제가 없어요. 하자가 없어요. 문제가 있으면 어떻습니까? 포기를 못하겠죠.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버리면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은 강퍅이 돼요. 출애굽기 8장 15절에 보면 “그러나 바로가 숨을 통할 수 있음을 볼 때에 그 마음을 완강케 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개구리를 보냈는데 요술사들이 개구리를 내보내니까 마음이 완강한 거예요. 강퍅, 완강,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내 것을 나는 못 잃어버리겠다. 내 것을 유지할 책임자는 나다. 미쳤나? 내가 내 것을 잃어버리게? 하는 그 고집. 그걸 고집이라고 하지 않죠. 그건 당연한 거죠.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그건 강퍅이고 완강이 되는 겁니다. 근데 그 뒤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여호와의 말씀대로 됐다. 여호와의 말씀대로. 이게 무서운 거예요. 여호와의 말씀대로.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아무리 도발적인 생각을 갖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말씀의 영역, 말씀의 무대 밖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말씀의 위력 안에서 놀고 있는 거예요. 이 말을 더 깊이 들어가면 인간이 완강하고 완악하고 그리고 강퍅한 것은 하나님이 말씀이 말씀되기 위해서 그렇게 되었어야 해요. 마음 자체가. 그래야 무엇이 빛나느냐 하면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는데 하나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세상에 돌출했던 사람, 출몰했던 그 사람의 의미와 가치가 세상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돋보이게 되는 겁니다. 그 모세의 후배가 누구냐 하면은 바로 오늘날 성도들이에요. 성도들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성공했다고 할 때에 그걸 성공이라고 보지 마시고 완강해서 강퍅한 데 되게 그걸 자랑스러워한다. 이래 보시면 돼요. 해석하기 쉽죠. 그러면 사도바울은 어떻게 했습니까? 사도바울은 강퍅했습니까? 강퍅했나, 안 했나를 뭐로 알 수가 있습니까? 뭐를 자랑했는가를 보면 알 수가 있죠. 사도바울은 뭘 자랑했죠?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십자가만, 그 어리석은, 예수님이 처형당한 그 사건만 자랑하고 있어요. 쉽게 말해서 이순신 장군이 왜군 이긴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이순신 장군이 왜군에 쏜 총알에 맞아서 죽었다고 하는 것을 자랑하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의 성공한 것을 빛내잖아요. 근데 사도바울 같은 경우에는 “이순신 장군도 별 거 없네?” 이렇게 해요. 인간은 “별 거 없다”를 자랑하는 겁니다. 이처럼 진실이란 그냥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진실과 반대가 되고 진실을 싫어하는 그런 패거리, 그런 분위기 속에서만 진실은 빛을 발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