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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173강-창 45장 11-15절(가족연대성)190116-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창세기

173강-창 45장 11-15절(가족연대성)19011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5장 11-15절입니다. 구약성경 72페이지입니다.

창 45:11-15

“흉년이 아직 다섯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속과 아버지의 모든 소속이 결핍할까 하나이다 하더라 하소서 당신들의 눈과 내 아우 베냐민의 눈이 보는바 당신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입이라 당신들은 나의 애굽에서의 영화와 당신들의 본 모든 것을 다 내 아버지께 고하고 속히 모시고 내려오소서 하며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야 요셉과 말하니라.”

여기 12절에 보면, 당신들의 눈과 내 아우 베냐민의 눈이 보는바, 당신들 형들이 나를 볼 때에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입이라. 제가 바로 내 자신을 이야기합니다, 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형들이 요셉이 옛날 아버지에게 잃어버렸던 그 아들이라고 아버지에게 이야기하라고 한 겁니다.

우리가 이 대목에서 이삭이 아버지의 손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준비하신 숲 속의 양으로 인하여 죽었다가 구사일생으로 다시 살아난 대목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지상에 주어지는, 실행되는 하나님의 약속, 언약은 반드시 죽음이라는 절차가 필수적입니다.

그냥 살아있는 것의 연속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는 그 말입니다. 죽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그 말입니다. 사람들은 죽는 것을 싫어해서 사는 것으로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지요.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전혀 주님의 이 노선과 상관없는 노선으로, 영원한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도 나중에 죽는 죽음이 아니라 일찍 당겨서 죽는 이 죽음이 하나님에 속한 사람들의 공통적으로 체험되는 일이고 현상입니다.

요셉은 죽은 아들이었지만 지금 내가 살아서 이 이야기를 합니다, 라고 함으로서 살아있는 형들로 하여금 그들의 손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죽은 자의 자격으로 살아있다는 형들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이로서 하나님이 개입하고 주관하는 이 특별한 현실 속에서 소위 살고자 하는 생명보다 도리어 죽음이 우위에 있고, 죽음이 구심점이고 중심이라는 사실을 요셉을 통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이것은, 우리가 성경을 그냥 편하게 안일하게 보게 되면, 이것은 야곱의 개인사, 개인적인 집안 이야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개인적인 집안이야기, 그것도 내 집안이 아니고 남의 집안 이야기라고 우리가 제켜놔 버리면 우리가 하나님과 상대할 때 어떤 식으로 상대할거냐 그 말입니다.

하나님을 상대할 때 진공상태에서 하나님을 상대하지는 않습니다. 이게 남의 가정사, 남의 집안 이야기가 아니고 평소에 인간이라 하는 것은 매진하고, 몰두하고, 그리고 그곳에 있어야만 목숨이 부지된다고 하는, 이미 선재적인 환경이라는 것이 있어요. 그게 바로 집안이고 가정입니다.

집안과 가정이 우리에게 목숨을 부지하게 한다는 이런 전제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상대할 때 우리가 단독적으로 산위에 가서 “하나님, 저와 교제합시다.”라고 할 수가 없어요. 평소에 우리가 모든 정신을 집중시키는 이 가정일, 그리고 도저히 빠져 나올라야 빠져나올 수 없는 우리 집안에 속한 일원, 여기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시고 여기에 관여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을 상대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큰 모험이지요. 개인적으로 큰 모험이지만 그동안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상대하려면 우리가 개인적으로 하던 일 말고 특별한 시간, 특별한 공간이 있어야 된다고 안일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거의 모든 시간을 열중하고 집중하고 있는 이 가정에 친히 하나님이 개입하고 있다는 생각을 잘 안 갖고 있어요.

인간들은 가정이 우선이고 그 다음이 하나님이거든요. 하나님을 거론해도 내 가정 잘되기 위해서 거론합니다. 자기 자신이 가정이 우선이고 그 안에 자기가 소속되어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가정에 몰두하고 있는 내가,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을 상대한다는 것, 그 표준적인 사례의 경험을 오늘 본문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 언약을 사적으로 준 것이 아니고 이 야곱가정에 줬다는, 그리고 진행시킨다는 점을 놓치면 안돼요. 그만큼 사람들이 태어나서 눈 뜨면 자기보다 먼저 있었던 집안, 가정이라는 것이 이미 환경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어디에 친숙되어 있느냐 하면, 가정이라는 그 영역, 그 집안일에 이미 깊숙이 관여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이 가정이 없으면 내가 안 되고, 내가 죽고, 그리고 가정이 없으면 내가 사는 이유도 보람도 더는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음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자진해서 가정을 빠져나와서 주님 홀로 섬기겠다는 것은 참으로 인간에게서는 있을 수가 없지요.

인간이 가정 버리고 하나님 찾는다는 것은 사실은 빈말입니다. 그 가정이 자신의 삶의 터전이니까 내 가정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으면서도 마치 어떻게 위장하느냐 하면, 자기 개인적으로 따로 하나님을 상대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자기 자신이라고 오해하고 있었지요. 가정은 따로 있고 사적으로, 개인위주로 하나님을 단독적으로 상대할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하나님이 일을 그렇게 하십니까? 우리가 개인적으로 존재한 적이 없어요. 우리는 가정이라는 바탕위에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개인적으로 마주하려고 하면 우리의 요청을 거부하고, 우리가 그렇게도 친숙하고 우리가 그렇게도 못 놓겠다는 이 가정에 하나님께서 직접 참여하게 되는 겁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에요. 요셉도 가정에서 추방되었지만 다시 가정으로 돌아옵니다. 요셉도 어릴 때는 이 가정이 자기의 목숨 줄이라고 생각했겠지요. 거기서 요셉 본인의 의사 없이 하나님이 꿈을 줬다는 그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하여 요셉은 억울하게 가정에서 벗어납니다. 그것은 요셉에게나 형들에게나 아버지에게나 죽음을 의미하는 겁니다.

요셉은 죽은 자에요. 죽은 자인데 오늘 본문에서 요셉이 다시 본래의 가정으로 돌아옵니다. 이것은 본래의 가정을 살리기 위함이 아니라 요셉중심의 새로운 가정으로 재편되어서 돌아옵니다. 죽었던 자아중심으로 새로운 가정이 편성되지 아니하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지 않다고 봐야 됩니다, 라는 이야기를 오늘 이 시간 우리들보고 이야기해주는 거예요.

어쨌든 간에 개인적으로 하나님 믿어서 개인적으로만 구원되는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구원된다면 새로운 패밀리, 새로운 가정을 형성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만 소개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라고 예수님의 가족을 우리에게 소개하지요. 아버지와 내가 하나된 것처럼 이제는 너희와 내가 하나 될 것이다. 새로운 천국가정이, 패밀리가 그렇게 구성됩니다.

이처럼 애초부터 개인적인 구원은 성경에서 언급될 수가 없고 논의할 대상도 아닌 거예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요셉이 비로소 자기정체를 공개하고, “형들의 세계에는 더 이상 없다고 여긴 그 요셉이 여기 당신 앞에 있잖아요. 아직 5년이나 흉년이 남아 있으니 이제는 형들은 빨리 가서 아버지와 아버지의 손자들을 빨리 먹이시고 요셉이 이렇게 살아 있다고 알리세요.”라고 합니다.

그리고 14절에 보면 베냐민의 목을 끌어안고 울고,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울고, 형들도 입 맞추고 울고, 그제야 그들 손에 버려진 요셉이 살아 있다는 현실을 수용합니다. 그전까지의 현실은 요셉이 빠진 현실인데 이제는 요셉을 추가한 현실 정도가 요셉이 중심이 되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해석할 때는 일단은 형들의 입장에서 해석을 해보자는 겁니다. 형들 입장에서 어떤 낯선 사람이 등장해서는, 자기가 형들이 팔아먹은 어린 동생 요셉이라고 할 때 얼른 납득이 안 되지요. 왜냐하면 형들은 자기중심적이거든요. 자기중심적인 그들의 현실관에서는 요셉은 그들에게는 없는 사람이에요.

따라서 만약에 우리가 요셉의 형들이라면 개인적으로 한 번 물어보고 싶어요. “요셉의형님들 당신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 잘 믿으면 되고,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믿으면 될 겁니다.” 쉽게 말해서 내 쪽에서 성실하게 해서 착하게 바르게 살아서 내 쪽으로 하늘나라 가면 됩니다, 라고 자기가 평소에 아는 대로 이야기를 술술 할 거예요.

그 이야기가 오늘날 교회교인들의 이야기나 흔히 보는 소위 기독교신자들이라고, 성도라고 우기는 사람들의 상투적인 답변일 겁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해서 분명히 아는 것은 우리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마주침이고 부딪힘이에요. 쉽게 말해서 인간은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삶이라 하는 것은 마치 연극과 같아서 이미 고정된 무대에서 그 안에서 돌아다닐 뿐이에요.

인생이란 영화보다는 연극이라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왜냐하면 연극이란 고정된 무대에 갇혀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화는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 다 가능하지만 연극은 공간적 제한 때문에 그렇게 무한한 상상을 제대로 표현을 못해요.

인간이라는 것은 자기의 목숨이라는 그 무대, 목숨이 연장되는 그 무대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겁니다. 가기는 어디로 가요. 그냥 상상할 뿐이지요. 천사 만나고, 하나님 만나고, 삼위일체 공부하면서 성경 이야기나 하고, 그냥 그 무대에서 펼쳐지는 연출에 불과한 거예요. 자신의 행함으로.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한 것들을 주워 모으면 나중에 연극이 끝났을 때 주께서 자기를 천국으로 데려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아닙니다. 천국은 현재 나 자신도 누가 누군지, 내가 목숨 줄로 여기는 내 가정과 내 삶속에 억울한 분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거예요. 마주치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내가 여기 있다가 어디 가자, 하고 놀러가듯이 가는 것이 아니고 이 나의 인생무대 속에 누가 침투해서 나에게 들이대는 겁니다. 들이대 버리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 되는데 그 변화라는 것은 그 전까지는 인간은 자기중심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필연적으로 중요한 필연적인 존재로 보는 거예요. 가장 필수적으로 중요한 것을 자기존재로 보는 겁니다.

나는 반드시 이렇게 되어야 된다고 그렇게 우기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나에게 가장 중요하고 이 중요한 것은 반드시 구원에, 천국에 가는 일이 성사되어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놓고 그것이 필연적이라고, 반드시 그러해야 된다고 우기지요. 그러나 그렇게 우겼던 그 형들의 사고방식으로 인하여 누가 팔려나갔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됩니다.

형들이 요셉을 팔 때는 자기 자신의 그 가치와 내 의미는 내가 지킨다고 하는 그 점에 대해서 요셉이 오히려 방해거리가 되고 우리 집단에서, 우리가정 중심체에서 얼마든지 걔같이 튀는 존재는 없애는 것이 남아 있는 이 중요한 가족의 유대에 보탬이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구원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정리하면, 구원이란 인간들이 현재 자기가치를 고정시키고 그걸 정답이라고 여기고 그걸 진리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 자체 내에서 필히 등장해야 될 이질적인 것, 인간들끼리 정했고 그 정한 “이것은 빼버려야 돼” 라는 그런 요소로서 이미 하나님은 인간세계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좀 더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인간들은 자기중심을 포기를 못해요. 자기중심을 포기 못하기 때문에 자기가정을 포기 못합니다. 가정을 벗어나요? 천만에 오히려 가정을 강화시키려고 하지요. 이 가정이 생명이기 때문에. 이 가정이 생명이기 때문에 나에게 생명을 주는 이 가정, 나를 살게 하고.

산다는 것은 그저 밥만 먹는 것이 아닙니다. 사는 보람과 의미를 제공하는 것은 바로 내 자식, 내 남편, 내 아내, 그 가정이에요. 이게 없으면 살 이유도 없지요. 자식 죽고 난 뒤에 부모가 같이 따라죽고 싶다는 생각이 왜 듭니까? 부모 죽고 난 뒤에 “나도 자식 따라 죽을래.” 하는 이야기를 왜 하는 거예요?

결속되어 있는 겁니다. 어떤 것에? 이것이 바로 나의 삶이고 이것이 정답이고, 내 생명의 중심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믿고 있을 때 그 믿음으로 인하여 추방된 분이 예수님이라는 생각을 그들이 감히 하겠습니까? 감히 못하지요. 지금 요셉 이야기가 그 이야기에요.

형들의 사고방식부터 출발해 보자는 겁니다. 형들의 사고방식에서부터 출발해 보면 형들은 자기가 필연적이에요. 그리고 요셉은 있으나마나 우연적, 일시적,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그래서 내다버린 거예요. 내가 중요하기 때문에 내 중요한 중심으로 살면 되지 않겠느냐 하지만 하나님이 그 가정에, 요셉에게 꿈을 줬을 때는 그 요셉에게 준 그 꿈 이야기가 펼쳐지는 순간 형들은 자기의 본색을 감출수가 없는 겁니다.

“왜 너에게만 그런 꿈을 꾸게 하고 우리한테는 왜 안줬어? 저건 제거 대상이야.” 제거하려고 한다는 말이지요. 우리 가정이 결속되고 유대관계가 있고 얼마나 행복한가. 가정이 하나가 되면 굉장히 행복해요. 행복한데 주님께서 쑤시고 들어오면 그 행복이 위기를 맞이하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원이라는 것, 하나님을 상대할 때는 우리 쪽에서 건전한 것, 고상한 것, 경건한 것 만들어서 찾아가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생각과 하나님생각이 얼마나 틀린지, 다른지 마주침과 부딪힘을 통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나 이질적이라는 것을 공개함으로서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왔다 가신 거예요. 우리는 그분을 배척했고.

이걸 가정이라고 해도 괜찮고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교회에 방해되는 것은 가차 없이 쫓아내잖아요. 우리교회의 결속에 대해서. 그것은 뭐냐? 우리교회는 진리고 우리교회는 필연적으로, 우리교회는 필수적으로 반드시 천국 가는 교회가 맞다는 그 자부심으로 인하여 어떤 우연적인 존재, 필연성을 깨는, 결속을 깨는, 유대를 깨는 어떤 우연적 존재는 그 때 그 때마다 족집게로 뽑아서 내버리는 것이 내가 나 구원하는 방식으로 이미 보편화되었다 이 말입니다.

이번에 아가서 수련회 했는데 6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 6장 1절에 보면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돌이켰는가” 왜 이 여자의 친구와 그리고 남자는 여자가 돌아오기를 원합니까?

그것은 자기 자신만으로 결코 진리가 될 수 없고, 필연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자기 자신은 중심이 아니고, 우리 곁에 다시 돌아오는 술람미여인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우리는 필연을 접하게 되고, 필연적인 상황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돌아오라고.

자기 자신은 보조적 역할이라는 거예요. 여자의 친구들, 자기들은 보조적 입장에 있어요. 그러나 요셉의 형들은 뭐냐? 요셉의 형들은 오히려 요셉을 보조적 가치로 봐서 내쫓아도 자기결속에 지장이 없다고 여기는 겁니다. 설교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상대할 때 어떻게 합니까? 자기 자신을 중심이 아니고 나는 누구의 보조자라고 생각합니까?

아니지요. 내가 구원받아야 돼요, 내가. 내가 구원받아야 되잖아요. 그리고 내가 이대로 구원받아야 돼요. 내가 구원받아야 되고, 우리 가정 잘되어야 된다는 그 이유 때문에 그 이유를 가진 나로 인하여 누가 추방되었고, 배척받았다는 생각을 우리는 감히 하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잘되는 것이 나의 행복이요, 기쁨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어느 인간도 마찬가지에요. 인간이 혼자 태어나서 혼자 죽는 것이 아니잖아요. 죽기야 혼자 죽지만 태어나는 것은 나보다 가족이 먼저 있고, 그 가족 중에서 내가 태어났잖아요. 그러니까 나의 그 생명의 모태, 생명의 원천은 혈육적인 가족이고 집안이에요. 그 집안을 버려요? 내가 거기서 태어났는데요? 그 집안 때문에 나는 성장했고, 양육 받았고, 교육받았고, 모든 필요한 영양분과 그리고 친근감과 정, 그리고 사랑, 애정, 전부 다 가정에서 왔는데요?

그걸 버려요? 일단 가족은 움켜쥐고, 그 가족을 움켜쥐면서 우리는 사적으로, 하나님이 우리 가정을 도와 달라, 나를 도와 달라, 이렇게 하지요. 나만 천당 가도록 하지 말고 우리가족도 같이 구원해 달라, 라는 그 생각,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것이 바로 육적인 안목을 가지고 성경보고 하나님 생각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형들의 육적인 안목이요 불신적 태도입니다. 자기를 필연적 존재로, 남이 죽든 말든 나는 필연적으로, 필수적으로 구원되어야 된다는 사고방식.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구원은 어디서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 쪽에서 침노하는 거예요. 쳐들어오는 겁니다. 이제 형들은 바뀌어야 됩니다.

자신의 모든 행동과 그리고 요셉을 쫓아낸 것부터 시작해서 감추어진 요셉으로부터 왔다리갔다리 하면서 똥개훈련 받듯이 요셉에게 당했던 이 모든 것을 통해서 형들은 요셉의 보조적 위치, 요셉이 필수적이고 필연적이고, 자신은 그 ‘필연적 존재’를 보조하는 우연적인, 중심이 아닌, 그런 존재라는 것으로 달라져야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중심이고 예수님이 필연이에요. 우리는 예수님의 보조적 역할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내 가정이요? 성경에서는 우리 가정에 대한 우상화가 얼마나 심하다는 것을 잘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예 창세기 4장부터 나와요. 모든 사달은 가정에서 시작된 겁니다. 가정에 형이 있었고 이름은 가인이었고, 동생이 있었는데 이름은 아벨이었습니다.

부모보기에는 그 두 형제가 잘 지내기를 바랐겠지요. 그러나 최초의 사달은 형이 그 동생을 죽였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뭐냐? 그 동생과 형은 같은 부모 밑에 있으니까 친하게 지낼 것이라는 것은 우리의 안일한 생각입니다. 그 이유는 뭐냐? 어떤 인간도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없다는 것, 그것을 그들은 가정 속에서 몰랐던 거예요.

가정도 좋지만, 가정이 날 살려서 너무 좋지만 그러나 그 가정이라는 것도 날 위해서 존재하는 가정이라는 이런 사실을, 이것은 아주 악마적이고 못된 생각이지만 그걸 평소에 느끼지를 못한 거예요. 그걸 감지를 못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으로 하여금, 요셉은 하나님의 언약, 꿈을 갖고 있는 사람이지요, 하나님의 요셉으로 하여금 그 가정 속에서 강제로 추방되게 만들었어요.

분명히 한 가정인데 하나님의 의도적인 조치에 의해서 아버지 야곱이 온 식구를 동일하게 사랑하지를 못하고 오직 한 사람 요셉에 꽂혀서 요셉만 특별한 채색 옷을 입혔고 특별히 사랑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열 손가락 깨물어도 특별히 아픈 손가락이 있더란 이야기에요. 이론상 자식은 다 같이 귀하다고 하는 것이고, 인간은 본인 자신을 너무 좋게 봐서는 안돼요.

본인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개인적이라 하는 것은 자꾸 유대관계에 묻히는 경향이 있어요. 가족들에게 희생한다고 해서 가족들을 위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엄마 아빠라 할지라도 역시 엄마는 엄마 본인이 제일 우선이고, 아빠는 아빠가 우선이고, 형은 형대로 동생은 동생대로, 집안에서 개는 개대로, 고양이는 고양이대로 지가 최고에요.

인간이 자기사랑이 절대적입니다. 그 자기사랑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다른 사람 사랑까지 넘어가지를 않아요. 궁극적으로는 내 사랑으로 회수되기 마련이에요. 형들이나 누구나 사람들은 사람 다루는 법은 잘 알면서 사랑으로 산다는 것을 몰라요. 여기에 이 야곱가정에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셔서 언약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이 가정에 도달됩니다.

사랑의 가정, 사랑으로 새롭게 뭉친 가정이 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사랑에 의해서 희생당하고, 사랑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그 사람 속에 그 사랑의 모습이 이 지상에서 너희들이 마주치는 진솔 된 하나님의 참된 모습이라는 겁니다. 요셉을 통해서.

추상적으로 하나님을 그려내지 마세요. 하나님은 추상적이 아니고 실질적으로, 구체적으로, 노골적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다 드러낸 겁니다. 허황되게 하나님을 생각하면 안 된다는 그 말이에요.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생각해야 되는데 그 실제의 하나님은 나와 무관한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내 중심이 되기 위해서 핀셋으로 뽑아내고 제거하고 내가 주인공 되는데 훼방한다는 이유 때문에 나가버린 그 모습 속에서 내가 얼마나 악마적이고 육적이다, 불신자적이라는 그것을 까발리고 노출시키는 그 작업으로 다시 들어오시는 그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에요.

나와 상대하지 않고 지식이나 우리에게 알려주는 이론적인 그런 하나님은 애초부터 없는 하나님이에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 자신이 잘되는 것이 필연적이 아니에요. 우리 자신이 못되는 것도 필연적이 아닙니다. 필연을 내 자신에서 뽑아낼 생각하지 마세요. ‘반드시’는 나한테는 없습니다.

내가 반드시 되는 것은 없어요. 주께서 모든 ‘반드시’ 되어야 될 일은 주님께 이미 응축되어 있고 응집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반드시 잘되기 위해서 그 주님 잘되는데 우리는 보조적 입장에 있습니다. 일종의 엑스트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엑스트라가 하나의 가족이라고 언급하면서 주님의 천국가족에 우리를 편입시키기 위해서 우리의 감추었던 우리위주의 사고방식을 깨트리지요.

오늘 본문에 보면 형들은 요셉을 부둥켜안고 웁니다. 그리고 요셉도 울고, 형도 울고, 그 울음속의 의미는 뭐냐? 제가 지금껏 내 위주로 생각한 그 자체가 인생 잘못 살았습니다, 라는 회한의 울음이고 기쁨의 울음이지요. 내가 버린 자가 오히려 내가 버렸었다는 것을 깨우치기 위해서 다시 찾아오신 그분이라는 사실. 내가 싫어했던 그분이 오히려 네가 하나님으로부터 싫어버린바 된 위치에 있다는 것을 깨우치기 위해서 우리를 찾아주시는 분, 그 분은 누가 보내셨는가?

주님이 우리에게 버림받은 분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찾아온 겁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는 것,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못 고칩니다. 어떻게 우리 사랑을 우리가 고칩니까? 이제 우리사랑으로 인하여 미움 받던 그 분으로 인하여 이제 순서는 우리가 우리 중심체제를 미워할 차례입니다.

이제는 편하게 우리 자신을 미워할 수 있어요. 그게 바로 자유 아닙니까? 아무 부담 없이 우리 자신을 미워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은 나가 아니라 날 위해서 죽으신, 모든 것을 다 해주신, 내가 하지 않더라도 모든 것을 다 준비해주신 그 분이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라면 이제 우리는 편하게 우리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새로운 가족이 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결과에 우리가 충격을 받게 하시고 그리고 우리가 한평생 엉터리로 살아왔다는 점에 또 충격 받게 하시고,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우리는 보조에 불과하니까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상관없음을 아는 그런 충격이 있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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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