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제3라운드 율법사 VS 주 예수 그리스도묻고답하기-

제 3 라운드 율법사 VS 주 예수 그리스도큰 인간 대(對) 낮아진 하나님 대결지난 시간에 바리새인의 올무로 책잡기 작전에 이어 제 2 라운드 사두개인의 부활 논쟁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인간은 자기를 위한 신을 늘 꿈꾸기에 자기 관심사로 접근하고 자기 관심사 때문에 화내며 자기 관심사의 전문가로서 아무에게도 책잡히지 않을 의를 측척하기에 그것을 무너뜨리는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전문(자신만만하여 자신감에 차있는)적인 것으로 예수님을 꺽어볼려고 했으나 꺽이기는커녕 도리어 꺽임을 당할 판국에 이르니 꺽여도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해 알려고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회피하고 자기 형편 추슬어 담고자 자기 관리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죽은 자의 특징입니다. (믿음이 있었던게 아니라 처세술만 늘어난 정치적인 술사들인 겁니다. 믿음이 없다면 종교는 기술 전문가로 상승 시키는 겁니다. -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지요.) 그래서 일단 피합니다. 마치 예수님을 3번 씩이나 시험한 마귀처럼 일단 피합니다. 그 마귀의 사고방식이 그대로 담겨진 것이 바로 그들의 질문이요 그들의 믿음인 겁니다.자 오늘은 율법사와의 공방전입니다. 무지무지 재미있겠죠? 예수님이 어떻게 승리 하셨는지 기대가 됩니다. (마 22 : 33 - 23 : 12)왜 우리는 예수님의 승리에 참예하고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찝찝해 할까요? 우리들의 평상시의 관심사를 저들이 대변해주듯 질문하지만 그 답변에 시원해 하는 것이 아니라 저들의 모습처럼 그 꼴 날까봐 은근히 회피하는 모습들일 수밖에 없는 우리의 죄악성입니다.자 사두개인을 대답할수 없게 만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전문가들이 안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야의 전공자로써 그들은 자기 전문 분야로 우열을 가리고자 예수님을 테스트 합니다.(마 22: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마 22:35)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마 22:36)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마 22: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 22: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크냐 라는 질문입니다. 즉 이 질문은 자기들이 큰 계명 지킨 자라는 것을 염두하고 의도적으로 질문 하는 겁니다. 아 그런데 예수님이 큰 계명은 이것이다 라고 저들의 너무너무 잘알고 있는 그대로 답변을 하십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 역으로 질문을 하십니다. 큰 계명 논쟁에선 아무 차질 없던 공방전이 그만 이 질문에는 넉따운이 되고 맙니다. 한 방에 그냥 보내버린 거지요.위의 큰 계명을 지킨 자가 너희들이 아니라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느닷없이 아무런 문자적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그리스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 하며 그리스도는 누구의 자손인가? 에 대해 질문을 하십니다.그야 당연히 다윗의 자손이다 라고 답하는 것이 맞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은 땡 틀렸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자손에게 어찌 주(主) 라고 부를수 있냐 라는 겁니다. 주 이면 자손이 아니라 다윗의 주가 그리스도이지 다윗의 자손이 그리스도가 아니다는 겁니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주 인 겁니다. 문자 고대로 고지곳대로 전혀 의심치 않고 너무 너무 잘 믿었던 자들이건만, 이었건만, 아무도 그들의 믿음에 태클 거는 자도 없었고, 걸기는커녕 다들 우러러 보는 큰 계명을 지키는 자이었거늘, 졸지에 돌삐에 딱 걸려 넘어지고 맙니다. 에누리 없이 그만 예수님의 믿음에 의해 큰 계명은커녕 애초부터 하나님을 모르는 자로써 하나님의 법 계명을 운운하고 하나님께 덤벼드니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홀라당 다 벗겨 버립니다. 벗겨 보면 압니다. 그야 말로 어두움 그 자체임을.그러니 찝찝해서 다들 피하는 겁니다. 그 꼴 날까봐. 벗겨보면 때가 수두룩 하거든요 !예수님은 율법사가 던진 올무에 큰 계명이 무엇인가에 대해 그리스도가 누구냐 로 그 질문을 토대로 하여 큰 자에 대해 큰 계명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그들의 방해가 오히려 디딤돌 역할을 하도록 역으로 그들의 믿음을 엎어버리고 예수님 자신의 믿음으로 큰 계명에 대해 증거하시는 겁니다. 그들의 행함을 꺽어버리고 예수님 자신의 행함, 열심히 복음을 증거합니다. 즉 아무도 모른다는 겁니다.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지금 복음을 들고 온 자는 예수님 뿐이기에 그 분의 입에서만 복음이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 그들이 쥐고 있는 믿음이든 행함이든 다 손 놓아야지 그래도 붙들고 있다면 결국 예수님을 테스트 해보겠다는 의도 밖에 안된다는 겁니다.그리고 그 복음은 큰 계명이 곧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 된다는 엉뚱한 문장 풀이를 한다는 겁니다. 지금 사람들이 지켜야할 판국에 행하냐 못 행하냐 라는 관점에서 행한 자는 우대하고 큰 자로 높이고 못 행한자는 낮추어야 법이 법 다움이 계명이 계명 다움에 놓이는데 영 엉뚱한 해석을 문장에도 맞지 않게끔 낯설게 증거 하시는 겁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가 다윗의 주로써 원수를 때려잡는다 라는 겁니다. 이 원수 문제를 해결 하는 분을 보고서 다윗은 주 라고 성령을 받아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다윗도 몰랐는데 성령이 안 알려줬으면 전혀 알 길이 없었다는 겁니다.그러니 성령 받지 않은 이 바리새인들이 문자적으로 성경 전문가인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다윗의 주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해석 앞에 그만 성령 받지 않은 자로 폭로 당하는 겁니다. 그 성령 받지 않는 자를 외식하는 자로 보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본다는 말로 올무 걸던 바리새인들 성령도 안 받았으면서 그 말씀의 문장만 따와서 성령의 주인 예수님에게 올무를 치니 참 기가막힐 노릇 아니겠습니까? 문제는 그들 보다 더 심한 자들이 오늘날 우리입니다. 구원을 줄 자는 아무 계획도 없는데 우리가 안달해서 구원 달라고 자기 스스로 도취 시켜 구원을 소유하는 목적으로 구원 집착에만 몰두하니 불쌍히 여기시는 분의 의중은 전혀 알려고도 하지 않고 알 수도 없을뿐더러 자기 구원을 토대로 하여 구원 얻기 전문가로 나서는 형편이라 그 방법론(성화론, 새생명의 삶, 구원의 확신, 교회를 교회답게하는 삶)을 퍼트리는 종교꾼으로 급상승 하고 말았습니다.구원을 준 적도 없거늘 구원 받았다고 보는 자가 바로 큰 자입니다. 왜냐 큰 계명이 무엇인 줄 알기에 ! 거봐 거봐 내가 질문한 그 답을 예수님도 같은 답을 말하네 그러니 자기들도 큰 자 라는 겁니다.엉뚱하게 느닷없이 큰 계명과 다윗의 주와 성령을 통해 알게된 원수와는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기에 예수님은 저들이 걸고온 두 계명에 이 질문을 제시하면서 십계명이 압축된 신명기의 두 계명을 증거하는 것일까요?그것은 곧 사랑이란 죽음 문제 사망 문제 죄 문제인 원수를 해결 하는 것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정에 굶주려 있지 사랑은 모릅니다. 그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만 정을 사모하며 정에 갈급할 뿐 이미 죽음이라는 바이러스에 감염 된 입장에서 사랑이란 찝찝한 겁니다. 냉소적인 겁니다 차가운 겁니다. 독선적인 겁니다.그래서 너무 냉소적이고 차갑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에수님은 이 원수를 해결하러 온 다윗의 주 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 말을 알 리가 있나요? 없지요 그저 따뜻한 정을 바라는 자들이 차가운 사랑을 원하겠습니까? 그저 정이란 큰 계명을 알고 있고 실천 하는 우리를 큰 자로 봐 달라, 놀아줘 놀아줘. 그런 정으로만 일관하거늘 정인줄 모르고 사랑이라고만 도취되어 사는 겁니다.자 그래서 23장에 예수님은 벗깁니다. 그들을 한 올 한 올 옷을 벗겨보니 그제서야 냄새가 지독하게 나는 겁니다. 어둠의 냄새요 한번도 씻은 적이 없는 새까만 땟국물이 주르르 흐르는 모습인 것을 다 들추어 내십니다. 이런 실체인데도 그저 높아지고자 크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우리 인생이 한 마디로 안개임에도 불구하고 남이 높여주고 크게 되고 남을 딛고 일어서는 남들은 다 탈락해도 자기는 구원받는게 당연한 그 인생의 허구의 실체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겁니까? 죽음입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우리를 덮쳤기에 그 결핍에 견디질 못해서 지는 것이 견디지 못하고 빼앗기는 것이 자존심 상해질 수밖에 없고, 남을 이겨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 뿌듯함에 마취된 죽음이라는 마약에 중독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바이러스를 오늘날 한국교회가 퍼트리고 있습니다 종교는 마약이요 중독성이 강하기에 빠져나올수가 없는 겁니다.그 바이러스의 정체를 예수님은 폭로 합니다.(마 23:1-11) 그리고 저들의 바이러스를 무리와 제자들에게 주의하라고 합니다.그 바이러스의 정체는 바로 크냐 라는 질문과 연관된 크다입니다.정작 믿음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이러스의 정체는 크다 이고 믿음되신 예수님의 정체는? 낮아진 하나님이다, 낮아진 그리스도이다, 낮아진 다윗의 자손이라 불리우는 다윗의 주 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죽은 자의 하나님과 산 자의 하나님의 차이입니다.낮아진 자만이 원수의 성문을 열고 원수를 잡는 강도를 잡는 죽음을 해결하는 진정한 사랑이라는 겁니다. 죽음 문제를 해결 하지도 않았으면서 사랑한다고 나서는 것은 바이러스를 잡기는커녕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을 모르고 돌아댕기니 오히려 더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낮아진 자는 예수님 뿐입니다.오늘날은 또 한바뀌 잔재주를 부려 이제 서로 낮아진 영웅이 되고파 종교적 열심을 발휘 할려고 서로 부축이고 있습니다. 자 마귀의 세가지 시험은 곧 인간이 원하는 메시아 상이고 그들의 주 관심사요 전문 전공입니다. 우리의 모든 일상은 뭡니까? 첫째는 경제요. 배가 일단 불러야 여유가 있겠죠(돈 가이사의 것인가 하나님의 것인가)둘째는 종교요. 배부르면 다 소유욕에 빠집니다. 종교는 그저 구원 소유, 믿음 소유, 행함 소유, 자기 의(義) 곧 누룩 바이러스 소유, 천국 까지도 감염코자 천국 소유를 시도하는 것이 종교라는 마약이요 취미인 겁니다.(나를 위한 부활, 나를 위한 기적 - 그러나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십자가] 외엔 보여줄게 없다).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치. 힘이 있어야 모든 것을 장악 할 수 있는 겁니다. 바로 권세입니다. 높은 자만이 세상을 가지는 겁니다. 이 크고자 하는 정치성 앞에 인간은 낮아짐을 사모하고 바라보기는커녕 늘 높아지기를 꿈꾸는 비젼이라는 바이러스(죽음)에 감염 되엇습니다. 즉 인간은 오로지 정치적인 사랑뿐입니다. (섬기는 자만 큰 자 = 예수님)(섬기는 자가 주(主)가 됨 그래서 다윗의 자손(문자)인 혈통 계열을 거부하고 다윗의 주가 끝까지 섬기심)이 마귀의 3가지 시험이 메시아가 입성한 예루살렘 성 안에서 바리새인 사두개인 율법사 에 의해 자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두다 거부합니다.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가 다 그들의 어둠을 들추어 냅니다.(눅 2:34-35) 그리고 전혀 예상치도 못한 낮아진 하나님의 참사랑을 보여줍니다(빌 2:5-11). 그 계명은 인간의 마음에 새겨집니다. 영원히 거부할수 없는, 그리고 외면하고 통과 할 수 없는, 철거머리처럼 딱 달라 붙어서 영원히 우리 마음에 못을 박듯이 새겨넣는 그 계명은 율법사가 이해한 법 중의 법이 아닌, 그런 의문의 증서는 확 찢어진 없어진 것이고(골 2:14), 죽음보다 강한 십자가사랑을 새겨 넣는 겁니다. 이제 지우고파도 지울 수 없는, 벗어나고파도 벗어날 수 없는 그 십자가사랑에 포착 당한 자들이 바로 직접 낮아지시면서 죽기 까지 복종한 예수님의 믿음에 도장(인치심) 박힌 자들, 인자의 살과 피를 먹게 된 자들입니다.(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엡 2: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엡 2: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엡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 2: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엡 2: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엡 2: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엡 2: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예수님! 우리는 주님과 함게 높은 자리에서 믿음을 소유할려고만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물 위에서 출발하도록 하지 않고 물 속에 빠뜨려서 다 죽어가도록 만들어서 구원을 손을 내미십니다.(광야교회-이스라엘/ 반석 베드로 = 낮추심)우리는 그런 냉정한 모습이 싫어 예수님 마저도 우리가 원하는 식으로 바꾸워 버렷습니다. 머리교체 당한 교회에서 예수님은 머리 둘 곳 없이 인간의 믿음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어둠의 실체입니다. 아무리 낮아질래야 낮아질 수 없는 우리의 죄속에서 주님이 우리 발 밑바닥에 와서 우리를 등목 태워 일일이 건지신 그 낮아지심은 늘 높고자 꿈꾸는 우리에게 말문을 막히게 마음 속에 새기는 듯합니다. 그저 낮아지고자 하는 영웅들 속에서 주님의 낮아지심을 볼 수 없는 이 악한 세대에 주님의 낮아지신 십자가의 사랑만을 붙들고 갈 수 있도록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http://hompy.sayclub.com/hompy.nwz?targetmsrl=20078551&pop=pop#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3,735건 중 124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