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 190111
안양20190111a야4장15절(연출)-이 근호
야고보서4장15절부터 하겠습니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그렇게 되어있지요. 15절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주의 뜻이 뭐보다 우선되느냐 하면 나의 행함보다 우선된다는 겁니다.
“주여, 내가 이걸 행했고 주님 앞에 옳았느냐, 그렀느냐 내가 필요한 재료를 내 쪽에서 제공합니다.” 하는 것은 건방진 생각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뭘 하고 심사는 주님이 하신다는 것은 그런 것은 이 세상에 애초부터 없던 사항이 되는 겁니다. 인간 자체를 출발점을 인간 존재로부터 출발하는 것을 아예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니가 내 뜻을 벗어나서 존재하는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이걸 분명히 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뜻이라는 게 너무 포괄적이고 모호하지요. 주의 뜻이라는 게. 지 멋대로 하고 주의 뜻대로 한다. 하면 안 되잖아요. 그러면 주의 뜻이 뭐냐, 앞에 죽 면 바로 10, 11절에 나오지요. 거기에 누가 입법자냐, 라고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유일한 입법자로 간주합니다. 법을 만들 때 누구하고 의논 안했다? 인간하고는 의논을 안 한 거예요. 법을 만들 때.
그럼 법을 만들 때 인간하고 의논 안 했다. 이걸 쉽게 말하면 선악과 따먹지 말라. 는 그 엄명. 그 지시를 사람하고 의논해서 좋은 게 좋다고 만들어낸 법이 아니에요. 이건 너무나 일방적입니다. 일방적으로 니가 따먹지 말라. 그리고 니가 따먹는 날에는 일방적으로 너는 죽게 되리라. 이게 주의 뜻입니다. 이미 주의 뜻 안에 무슨 요소가 들어 있느냐 하면 내가 만들었기 때문에 내가 없앨 수 있다는 요소를 품은 채 주의 뜻이 나타나요.
자, 주의 뜻은 한 자로 하면 ‘법’이 되겠지요. 두 자로 하면 뭐가 돼요? ‘율법’이 되겠지요. 율법 안에서 무엇을 발견해야 하느냐 하면 우리의 부재, 부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음. 우리가 없음. 우리의 없음을 우리가 발견해야 된다 말이죠. 우리가 없음을. 주의 율법 안에는 우리의 없음을 전제로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없어야 되는데 있잖아요. 그건 주의 뜻에 의해서 우리가 출몰한 겁니다. 이 땅에.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하잖아요. 그게 우리 자신이 스스로 자기 영광을 받기 위해서 내가 여기 존재하는 걸 과시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난 게 아니고 부재해야 되는데 불구하고 이 땅에 니가 태어난 것은, 정자와 난자 사이에서 수억 분의 비율을 뚫고 태어난 것은 선제한다는 것은 선제라는 것은 먼저 계신 거죠. 주의 뜻이 선제하고 있음을 우리를 통해서 증명하고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가 부재 없는 데서, 부재한 데서, 부재에서, 존재가 되는 거예요. 있음이 되는 거예요. 없음에서 있음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있음에서 출발하면 안돼요. 모든 잘못과 오인이 뭐냐 과오가 여기 있는 내가 어떻게 하면 더 있게 됩니까, 그것이 잘못이에요. 우리의 자리는 어느 자리냐 하면 내가 있음이 우리의 자리가 아니고 우리가 없음의 자리로 들어가야 우리의 없음을 포함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의 성취. 뜻이 드러남의 목적이 이루어지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제가 이렇게 법이 우선이고 인간은 그 안에서 부재된 존재라는 것을 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준다. 라고 이야기하지요. “그러면 인간은 왜 있습니까?” 인간은 왜 있습니까, 라고 묻지 말고 질문을 이렇게 해야 돼요. “선악과 법은 왜 만들었습니까?” 이렇게 질문이 내가 여기 있습니까? 없습니까? 라는 그 질문을 나의 의미로 둬서는 안 되고, “나보다 먼저 있는 율법은 왜 있습니까? 주님은 왜 있습니까?” “하나님은 왜 그런 말씀을 줬습니까?” 질문 자체가 내 쪽에서 이탈해야 돼요. 나는 부재의 존재니까.
질문 자체가 뭐가 포함되었는가 하면 나는 없어도 되는데 왜 있지? 라는 투로 질문이 되어야 돼요. ‘나는 없어도 되는데 왜 있지?’ 여러분 자식들이 있을 때 자식이 얼마나 잘되느냐 묻지 말고 저 자식은 없어야 되는데 왜 나한테 애 둘이나 생기지? 왜 셋이나 있지? 그렇게 되어야 된다 말이죠. 질문 자체가.
질문 자체가 내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하고 질문하니까 뭐라고 답변해야 돼요. 주의 뜻이 우리의 구원하는 게 없습니다. 없는 존재가 무슨 구원을 받아요. 없는 존재가.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은 내가 있다고 치고, 그게 법에 이탈된 거예요. 법과 안 맞는 상태에서 내가 있다고 치고, 있는 내가 죽어서 좋은 나라 가겠습니까? 못가겠습니까? 를 점쟁이한테 묻듯이 목사한테 묻는 거예요. 내가 있다고 치고.
그럼 내가 없으면 주의 율법은 나의 부재와 연결이 되는데 내가 있어버리면 이건 주의 뜻에 대한 그 자체에 대한 반격이고 공격이 돼요. 내가 있는 것이 우선이 되어버리면 상대적으로 누가 밀치게 되느냐 하면 주의 법이 밀침을 당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유대인에게 밀침을 당한 겁니다.
예수님이 누구한테 죽었다? 성경에서 보면 유대사회에서 죽임을 당했거든요. 유대사회는요, 그 사람들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산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 사람들은 자신의 해방과 자기 민족의 해방과 구원을 열망했던 사람들이에요. 메시아를 간절히 고대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 보여준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면 메시아의 십자가의 죽음이거든요. 이건 뭐냐 하면 너희들이 열망하고 그 기대하는 너희 자체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대단히 수치스럽다는 겁니다. 그들이 고대했던 그 해방이 수치스럽고 그들이 하늘나라 이루겠다는 그 고상하기 짝이 없는 그들 보기에 대단하게 거룩하다고 자부하는 그것이 주님보시기에는 꼴사나운 겁니다. 지 주제도 모르는 채 뭘 해방을 원하고 로마에서의 해방, 죄에서의 구원을 원하느냐 이 말입니다.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시작을 해보는 거예요. 무턱대고.
하나님의 법이 우선이고 법의 법다움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여기에 없는 존재가 있게 되었다면 항상 그것을 인정한다면 나의 우선이 아니고 주님의 뜻, 율법의 우선권을 넘겨야 돼요. 그것을 15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도 하리라. 주의 뜻이면. 그러니까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산다는 말은 우리가 항상 죽을 수 있는 대상자로 주께서 우리를 주시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없어도 되는 존재야! 라는 것은 각인시키면서 주의 뜻은 주의 뜻대로 드러나는 거예요. 내가 있어서 내가 주의 뜻을 어떻게 행합니까? 묻지 말고 주의 뜻이 우선 있고, 그 뜻에 맞추어서 너는 행동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라고 언급하는 거예요.
그 행동하는 게 13절에 나오지요.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장사한다는 걸 좀 실감나게 하기 위해서 치킨 집 한다. 이렇게 봅시다. 우리가 어느 도시에 가서 어느 골목 식당에 가가지고 치킨 집 또는 피자집을 해서 할 때는 이유가 있지요. 장사해서 그 다음에 뭐를 보리라 했습니까? 장사할 때는 이득을 보리라. 이렇게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장사해서 이익을 보겠다는 것이 주의 뜻이냐, 이게 주의 뜻이 아닙니다.
뭐가 주의 뜻이냐 하면 장사를 하던 공직에 있던 상관없이 어느 도시에 가던 내가 이 도시에 안 나타나도 되는데 또는 내가 이 장사를 꼭 할 필요 없는데, 이익을 보면 이건 내가 꼭 장사해서 남을 필요가 없는데. 이게 유지되어야 되고 견지되어야 돼요. 왜? I am nothing. 나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내가 부재가 된다는 말은 내가 없다는 말이거든요. 내가 없어지면 없어질 게 덩달아 많이 생겨요. 뭐냐 하면 나의 기대와 나의 희망, 나의 목표도 같이 없어져야 마땅한 겁니다. 모든 인생의 고민과 화근은 뭐냐 하면 목표가 있고, 희망이 있고, 기대 하는 게 있기 때문에 그렇고 그 기대는 내가 계속해서 나는 무조건 이유도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살아남아야 된다는 것이 그게 기반이 되어있기 때문에 기대와 희망을 스스로 접지를 못해요. 포기를 못하는 겁니다.
그래놓고 말하기를 주의 뜻대로 살면 내 소원대로 들어주실 겁니까? 이리 나오는 거예요. 지금 주객이 바뀌었다는 걸 감 잡습니까? 이 성경하고 지금 다르지요.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그렇게 말하고 말씀을 이야기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그걸 여러분들이 고개 끄덕이고 받아들이지만, 많은 사람은 도망쳐버려요. 안양 공부했던 많은 사람들이 고개 끄덕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도망쳐버려요.
자, 제가 궁금한 것은 도망쳐서 어디로 가느냐 하는 겁니다. 그들이 말씀을 피해서 어디로 도피했느냐 하는 겁니다. 그 도피하는 장소가 어디냐 하는 거예요. 추적해보자 말이에요. 그들이 가있는 곳에. 거기에는 뭐가 없어요? 주의 뜻이 없어요. 나의 뜻만 있는 곳이에요. 인간은 아무리 복음을 들어도 주저 없이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그 요인이 뭐냐, 그것은 그것조차도 주의 뜻입니다.
그것 따라서 율법이 율법 되게 하기 위해서 조성된 상황입니다. 그 세계가 무슨 세계냐 하면 바로 나의 세계에요. 마이 월드지요. 나의 세계. 인간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구성되어있는 자기만의 세계를 자기만의 동굴을 따로 만들어놨어요. 그게 자기 안식처고 도피처에요.
거기서 빼꼼히 얼굴을 내다봅니다. 내다볼 때에 본인이 내다보는 게 아니고 자기가 속해있는 자기 세계의 원리 원칙, 질, 또는 성질, 질서, 여러 가지 이야기하는데 이 세계의 원리를 보여주는 대변자로서 빼꼼히 얼굴을 내밉니다. 나는 지금까지 내게 속한 세계는 이것이 옳다고 우기고 그것이 내 몸에 완전히 스며든 내 세계를 소개하는 대표자로서 빼꼼히 얼굴을 들이내면서 뭐냐 하면 이 성경 말씀과 잠시 접촉을 한 거예요.
지금 내가 살아온 내 원리와 성경에서 말하는 원리가 일치점이 있는가를 간을 본 겁니다. 간을 보다가 평소에 내가 속한 원리하고 틀리잖아요. 안 맞잖아요. 후딱 자기 세계로 되돌아와 버려요. 자기 세계로.
그리고 문 닫아 걸고 그 다음에 문 닫아 걸면 혹시 바람이 불면 그 틈새 사이로 바람 들어오잖아요. 그래서 뭘 하느냐 하면 문풍지를 발라요. 일체 바람이 못 들어오게 문지풍로 막아버려요. 이게 캐슬이에요. 이게 성이에요. 이게 하나의 성이라니까요.
이 성에는 주의 뜻이 있는 세계가 아니에요. 이것은 내 살고자 하는 것들만 진리로 채택이 되는 그것만 통용이 되고 그것만 허용이 되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하나님이 하시느냐, 그것조차도 주의 뜻이에요. 왜냐 하면 율법은 엄격하기 때문에 율법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어요. 율법은 무슨 기능이 있느냐 하면 무서운 기능이 있어요. 심판기능이 있어요.
율법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뜻입니다. 주의 뜻입니다. 주님의 뜻에는 심판기능이 있습니다. 굉장히 무서워요. 왜 복음을 듣다가 도망치느냐 복음이 무섭기 때문에 그래요. 무섭다는 말은 누가 존재한다는 말입니까? 내가 살려고 하면서 존재한다는 뜻이에요. 무섭기 때문에 도망치지 말고, 무섭기 때문에 나오면 되거든요. 주께서 알아서 없애주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그런데 안 없어지려고 하는 거예요.
그럼 왜 무서우냐, 없어질까 봐 무서워요. 사람이 언제 불편하냐 하면 자기가 좋아했던 사람이 장례식장에 관 속에 누워있을 때, 자기가 아주 좋아하고 귀하게 여기고 더 사귀고 싶고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죽어서 더 이상 이름을 불러도 대답이 없을 때, 굉장히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런데 제가 문제 낼게요. 관 속에 있는 사람이 불편합니까? 아니면 그 살아있는 사람이 불편해요? 살아있는 사람이 불편해요. 관 속에 있는 사람이 웁니까? 살아있는 사람이 웁니까? 살아있는 사람이 울지요. 살아있는 사람이 우는 거예요. 그동안 내 세계를 아름답게 꾸몄던 요소가 사라지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이 점점 나이가 들어가게 되면 주위에서 하나, 둘이 실종해요. 어디로 가요. 전에는 친구 만나러 가면 아파트에 딩동~ 누르고 들어가면 만날 수가 있어요. 우리 동창생 중에 죽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거든요. 그러면 만약에 그 친구가 죽었다면 그 사람 아파트가면 그 사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러면 그 사람이 살던 아파트는 임시 거처지요. 임시거처에요. 아파트에 산다고 그 지점이 최종지점이 아니라고요.
그러면 그 사람들은 어디로 끌려간 겁니까? 누가 끌고 간 거고 어디로 끌려간 겁니까? 그 사람은 결국은 죽음이 인간을 끌고 가고 있는 거죠. 15절 다시 봅시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어늘 니가 허탄한 자랑을 하고, 그 다음에 14절을 보면,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라고 했지요.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 아닙니까. 하나님의 뜻이다 말이죠. 하나님의 율법이잖아요. 너희 생명이 자체가 말씀이니까. 말씀이 우리보고 니 생명이 무엇이냐 묻는 것은 우리보고 정답 대라고 묻는 게 아니고 너희들은 내 생명 앞에 ‘내’라는 말을 생명 앞에 붙일 가치도 없다. 이 말에요.
내 생명 같으면 내가 관리자가 돼요. 그런데 니 생명이 무엇이뇨, 하는 것은 이미 그 안에 뭐가 포함된다? 해답이 포함돼있어요. 니는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니 생명도 없는 거고요. 필요에 따라서 생명을 주신 거예요. 따라서 다 떨어지면 주께서 어디로 납치해 가는 거예요. 어디로 가겠어요? 인간이. 나이 들면 하나, 둘 친구도 없어지잖아요. “집사님! 좀 나이 들어 없어진 사람이 더러 있지요?” 없어요. 다들 건강해가지고. 다들 테니스 치니까 건강하겠지요. 친척가운데 돌아가신 분 안 계십니까. 친척이 살아있어 줘야 인간은 자기의 과거가 생생하게 살아있어요.
그런데 어릴 때는 친척들에게 둘러싸인 그게 나의 세계가 일가친척들에 둘러싸인 세계거든요. 그런데 친척들이 나이 많아서 떠나 버리면 인간은 그 사람이 그냥 죽는 게 아니고 나의 과거도 같이 허물어져버려요. 나와 같이 놀던 어떤 어린이놀이터 같은 거. 어린이놀이터에서 동네 친구와 놀았는데 그 애가 얼마 전에 갑자기 암 걸려서 죽었다 하면 암 걸리고 난 뒤에 죽은 소식 듣고 옛날 놀던 놀이터에 한 번 가보세요. 뭔가 허전함을 느끼지요. 미끄럼틀 같이 탔던 그 친구 없어질 때에.
나의 세계 하나가 뻥 뚫린 거예요. 나의 세계 하나이 스폰지처럼 숭숭 구멍 뚫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허물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박정희대통령 살해당해 죽었을 때 우리나라 이천만명이 조문했다는 거예요. 저는 조문 안했습니다마는. 왜 그렇게 조문하고 슬퍼했습니까?
그것은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자기 인생을 자기 월드를 구성했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가 자기답게 내 인생을 내 인생답게, 보람 있게, 의미 있게, 제공했던 그 분이 내 인생에서 빠져버렸으니까 나의 의미 한 쪽이 확 뭉개져버린 거예요. 허파가 두 개인데 허파 하나가 날아간 셈이 된다 말이에요.
그 연로하신 부부가 같이 살다가 사흘 동안 죽어라 싸우다가 그래도 80 넘어서 누구 하나 죽어보세요. 왜냐하면 신성일이 있어줘야 엄앵란의 본인 세계가 맞춤 맞게 구성이 되어있어요. 그런데 한 쪽이 허물어져버리면 그 반 이상을 자기 인생에서 자기가 스스로 잘라내야 돼요. 그러면 자기의 추억과 과거가 다 날아가 버린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무리 현실적으로 날아가도 추억은 생생하게 그대로 있거든요. 그 괴리 어떻게 할 거예요. 그 허무함을 뭘로 메꿀 겁니까? 처음에는 자식들이 와서 “어머님, 식사하셨습니까?” 들여다보지요. 자식들은 지 인생 없습니까. 나중에 엄마가 미안해서 얘야, 이제 그만 와도 된다. 나 혼자 견딜게. 집에 강아지 세 마리 있잖아. 이름을 신성일로 지을 게. 이런 식으로. 버틸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게 오래 못가요.
결국 우울증 걸려서, 우울증 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아는 나와 현실에서 나한테 요구하는 나 사이에 알력이 생겼기 때문에 그래요. 현실과 내가 일치가 될 때 사람은 자아구성이 되면서 만족을 하게 되어있거든요. 참, 사람이라는 게 이상해요. 개는 그저 사료만 줘도 돼요. 일단은 짐승은 사료만 주면 돼요. 코끼리 자기 인생 그런 책은 없잖아요.
인간은 밥만 주고 사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밥보다 더 괴로운 것은 뭐냐, 인간의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이 뭐냐, 외로움이에요. 외로움. 외로운 거예요. 혼자서는 못 살겠다는 겁니다. 혼자서는. 외국에 오래 살다 공관에 있다든지 대사관에 근무해서 오래 살다가 자식들 영어 미리 배워서 좋겠네. 자연적으로 배워서 좋겠네. 칭찬하지만 그 한국 얼굴 해가지고 외국에 이렇게 돌아다니다가 뒤늦게 퇴직해가지고 한국에 돌아와 보세요. 쌓아온 스펙이 없어요. 친구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고 어떤 단체나 조직에 배드민턴 동호회에 가고 싶어도 처음부터 회비 새로 내야 돼요.
회비 새로 낸다고 받아주는 게 아니거든요. 계속 경계해요. 심지어 성경공부도 마찬가지고요. 신참, 고참 있잖아요. 자꾸 경계하는 거예요. 자꾸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서 굉장히 노력을 해도 이게 노력해도 외로움은 해소가 안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의 외로움이 나의 외로움이기 때문에 그래요. 나의 외로움. 상대는 그다지 아쉽지 않아요. 상대는 나의 괴로움 때문에 상처받지 않습니다. 나 혼자 상처받는 거예요.
이럴 때는 어떻게 하느냐, 나 자신을 수정해야 되거든요. 나 자신을. 저 사람이 내 사람 되려고 하지 말고, 내가 저 사람의 사람이 되어야 되는데 그렇게 하려면 지금껏 살아왔던 자기 위주의 그 원칙이 이거 전부 다 바꿔야 돼요. 자기 위주의 원칙을. 그럼 자존심 박탈당하지요. 이것은 아이고 안 되지요.
자, 그럼 인간의 외로움이 왜 있느냐, 외로움이 있는 이유는 벌써 강의 어려워지는데 여러분 참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외로움이냐, 이게 없기 때문에 그래요. 대화 상대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대화 상대. 대화가 뭐냐, 언어를 주고받는 거잖아요. 언어를.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사랑을 해야 되는데 사랑이라 하는 것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고 뭘 해야 되느냐 하면 끊임없이 대화해야 돼요. 끊임없이. 끊임없이 대화하는 것.
말을 해야 돼요. 말을 할 때 언어 속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언어 속에는 원칙이 포함되어있어요. 이걸 법이라 하거든요. 법. 이 법에는 기본적으로 다치지 않으면 핵심이 있어요. 뭐냐 하면 나는 존재한다. 나는 잘되어야 된다. 이것을 담고 다른 친구들하고 누구하고도 이야기해요. 부부간 이야기해요. 절대로 나는 다쳐서는 안 된다. 내가 아파해서는 안 된다.
이유가 뭐냐, 이 법이 나를 위한 법이기 때문에. 내 잘되기 위한 법이기 때문에. 그러면 이 대화 상대에서의 이쪽의 상대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상대라 해야 되고, 저건 타인이죠. 타인. 남이 되겠지요. 그러면 지금 나의 세계의 원리가 뭐냐 하면 나는 무조건 잘 되어야 되고, 존재해야 된다는 원리지요.
그 원리 가운데 외로움을 덜기 위해서 누굴 상대한다? 타인을 상대하지요. 그 타인을 상대하는 식으로 누굴 상대하느냐 하면 하나님을 새삼스럽게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하고 교회에 나가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교회에 나와서 친구도 많고 대화 상대도 많고 그리고 또 교회에 나가면 추상적으로 하나님이 계시다고 느껴지기 때문에.
그런데 뭐는 지금 안 바뀌었어요? 나는 내 존재 위주는 안 바뀌었지요. 존재 위주도 안 바뀌면서 하나님을 상대했기 때문에 여기에 법이 동원될 때는 뭐냐 이 법 속에는 나는 다치면 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