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산된 꿈 190108
강남-요한복음 20장 1절(무산된 꿈)190108a-이근호 목사
요한복음 20장 1절부터 보게 되면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사도 요한’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라고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막달라 마리아나 그 뒤에 나오는 베드로나 또는 사도 요한이 뭐를 몰랐습니까.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구원이라는 것은 가르친다고 해서 우리가 구원받을만한 요소를 우리가 여기에 배울 수가 없어요. 내가 배운 지식을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이 정도 지식을 소유했기 때문에 이제는 주님이 언제 부르더라도 이거 내놓으면 주께서 오! 그게 내가 원했던거야. 그래 이제 천국 와. 이런 경우는 인간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뭐냐 하면 주님에 의해서 계속해서 불신의 상태로 계속 내려가줘야 해요. ‘불신의 상태’. 그럼 불신의 상태가 됐는데 불신자로서 계속 주님께서 이끌어 가신다면 그러면 우리가 언제쯤 신자가 되느냐 라는 생각이 들겠지요? 언제쯤 신자가 되느냐 하지요.
우리가 신자가 되는게 아니고 우리 속에서 신앙이 나타나죠. 우리가 신자가 될 필요는 없어요. 우리 속에서 없던, 없는 신앙이 주님에 의해서 만들어지면 되는거예요. 그 차이가 굉장히 중요한 차이입니다. 내가 만약에 신앙을 가져버리면 그 신앙의 주인공이 누가됩니까? 내가 되지요. 그러면 성경에서 자기를 부인하라하는 그 말에 이게 충돌이 됩니다. 자기를 부인하라에 충돌이 되요. 다른건 부인해도 이 신앙만큼은 부인 못하겠다 버티게 돼요. 그건 신앙이 아니고 자존감이죠. 자존심이죠. 그 자존심은 반드시 남과 비교하게 되어 있어요.
믿음이 네가 신앙이 많냐? 내가 신앙이 많냐? 비교하게 되어 있습니다. 경쟁하게 되어 있어요. 그거는 누가 했느냐 하면 유대인들이 했지요. 그걸 가지고 주님께서는 교만이라고 했어요. 우쭐댐. 우리는 저 사람과 같지 아니하고 바리새인이 옆에 세리보고 한 이야기가 이미 견주고 비교하고 있었던 겁니다. 내가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하니까 우수하니까 하나님께 구원을 받고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초반부터 어려운 이야기 나옵니다만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상호 주관성’이라고 합니다. ‘상호 주관성’.
상호 주관성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그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어떤 신앙이라든지 소망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뭐 성령의 구원을 이렇게 특히 이렇게 오늘 본문 같으면 부활을 할 때는 누군가 우리 앞에 누가 등장해야 돼요. 누가 등장해서 서로가 서로가 생각하는 것이 이게 차이난다는 사실을 이게 밝혀져야 됩니다. 그런데 인간세계의 상호 주관성이라고 하는 것은 차이를 보여주기 위해서 상호 교제하는게 아니고 의기투합하기 위해서 서로 만나게 되지요. 의기투합하기 위해서. 의견을 같이 합치기 위해서.
그래서 개인이 뭐냐? 사회를 구성하잖아요. 유대사회가 유대사회가 그렇게 구성되거든요. 예수님이 어떤 특정 개인에 의해서 돌아가셨습니까? 아니면 유대사회에 의해서 돌아가셨습니까? 바라바를 이렇게 예수님 대신 죽이고 예수님 살려내겠다는 전략을 빌라도가 그렇게 마지막 배려하는 차원에 그렇게 했을 때 빌라도가 예상 못한 일에 봉착했지요.
저 질 나쁜 사람과 그리고 대중들에게 훌륭한 사람으로 인식되는 예수님 사이에서 선과 악 사이에서 사람들이 악은 배제하고 보다 남에게 착한 일한 예수님은 살려둘 것이다 라고 생각해서 억지로라도 예수님 살리기 위해서 그렇게 마지막 카드를 준비했는데 결과가 어떻게 됐습니까? 반대로 뒤집어졌지요. 선한 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 인간은. 특히 자기보다 더 선한 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
상호 주관성이니까 타인이 없으면 나 자신이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는가를 측정할 길이 없어요. 반드시 남과 비교하고 학교에서 시험치는게 그거거든요. 순서를 매기는. 남과 비교해서 내가 어느 지금 위치에 있고 레벨에 있다는 그것을 가지고 자아 정체성. 나는 지금 이것이 바로 진짜 내 모습이라는 것을 규정하려고 하는 겁니다.
부활을 이야기하면서 예수님께서 여기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여기 7절에 보게 되면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되어 있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기의 부활을 이야기 하면서 뭘 보여줬느냐 하면은 빈 무덤 보여줬지요. ‘빈 무덤’. 빈 무덤을 보여준거에요. 빈 무덤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부활의 흔적이 됩니다. 부활의 흔적. 빈 무덤이.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안장되야 될 이유는 모든 인간이 상호주관성이니까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 타인을 요청하니까 인간들에 있어서 확인할 길은 뭐냐 하면은 마지막 모습은 이 무덤이라고 하는 것은 죽은 자가 가는 곳이 무덤이잖아요. 그러면 무덤은 필히 뭐가 있어야 무덤이 무덤 값을 합니까? 여기 누가 있어야 돼요? 죽은 자 시체가 있어야 되지요. 시신 또는 시체가 여기 무덤에 있어야 되지요.
무덤에 시체가 있다고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있다면 모든 인간이 생각한 그 모든 것이 종합적으로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는게 돼요. 무덤에 시신이 없다는 말은 무덤에 시신이 있을 때 평소에 내가 생각했던 것은 얼추 그다지 틀리지 않는 인생을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는 거에요.
그런데 이 무덤에 무덤인데 분명히 죽으신 분을 무덤 여기에다 안치했는데 무덤에 시체, 시신이 없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인간이 근원적으로 평소에 살아있을 때 생각하는 모든 것이 틀어진 잘못되게 인생을 통합적으로 잘못 인생을 살아온 것이 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 말이 좀 어려우면 좀 쉽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요한복음 20장에 부활 이야기 나오고 다른데 마태복음도 나오고 다 나오잖아요. 부활을 우리가 다른 사람이나 우리 친척들이나 교회 안 다니는 이런 사람에게 사람이 부활을 이렇게 언급을 해버리면 예수님 죽었다가 부활했다 이렇게 언급을 해버리면 그들이 굉장히 당황스럽게 여깁니다.
왜냐하면 부활했다는 말은 사람이 현재 무덤에 있어야 될 분이 지금 살아 돌아다닌다는 말이 되지요. 그렇죠? 그러면 지금껏 내가 눈에 보이는 산 사람하고만 상대해서 나에게는 별 하자가 없는 인생을 살았다고 자부하는 인간이 뭐를 놓친겁니까? 죽었는데 살아돌아다니는 그 분과는 지금 상대를 안한 채 소위 살았다고 우기는 인간들하고 상대해놓고 최종 결론을 내려놓고 나 인생 괜찮게 살았다고 자부하는 셈이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만약에 죽었는데 살아계신 분이 그런 나를 뭐라고 규정할지 뭐라고 심판할지 뭐라고 지적할지 그걸 완전히 놓친게 되지요. 그러면 인생은 헛 산게 되는거에요. 산 사람하고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할 수 있는 일이에요. 그런데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분과 상대한다는 것은 인간이 도전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에요. 어이 살아계신 하나님 나한테 좀 와바라 요청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말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부활 이야기 빼고 갑시다 이러는 거에요. 부활절이 뭐냐? 제사 지내는 날이에요. 이거는 산사람끼리만 이해하고자 부활절이라는 제삿날을 마련한 겁니다. 부활절이라는. 물론 봉투 돌리고 헌금 챙기지만 돈 때문에 하는거지만. 부활이란 말은 부활절이란 말은 뭐냐 하면 그냥 희망을 가져도 괜찮습니다 라는 희망을 교회가 상품으로 희망을 제공하는 거에요. 이거 부활 받고 헌금내시라 돈 이쪽 교회에 내시기 바랍니다. 그거 하려고 부활절 만들어 놨거든요.
그러나 여러분들이 산 사람에게 제일 모독적인게 뭐냐? 제사 지내는 겁니다. 그날을 기념하는 거에요. 우리가 기념한다는 말은 뭐냐? 당신은 제발 산 사람 이 동네에 좀 오지말라는 뜻이에요. 이 동네는 우리한테 맡겨놓고 우리 살아있는 사람끼리 일임하도록 맡겨놓고 죽었으면 좀 이렇게 뒷방 시어른처럼 그냥 가만히 계세요. 우리가 알아서 다 할테니까. 괜히 산 사람 끼어들면 우리 하는 일이 난처하지 않습니까? 하는 식이에요.
그 이유가 부활의 세계에 대해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는게 그게 옳은게 아닙니까? 그게 옳잖아요. 그게 믿음이잖아요. 내가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는 것.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행하는걸 믿음이라고 이미 믿음의 내용을 이미 선점해놨어요. 뭘 이렇게 기도하든지 헌금하는걸 믿음이라고 보는 거에요. 악바리처럼 살아가는 걸. 악에 받쳐서 살아가는 걸. 오기에 받쳐서 살아가는걸 믿음이라고 하는거에요.
벌써 믿음 개념이 벌써 두 가지 나왔지요. 그런데 이 믿음 개념이 두 가지 나오기 전에 벌써 예수님께서 유대사회에서 마주치면서 제자들과 마주치면서 예수님 믿음 개념이 두 가지 나온거에요. 유대사회가 믿음의 사회입니다. 여호와께서 약속대로 아까 누가 이야기했는데 약속대로 언약대로 우리를 이 나라를 반드시 구원할 것이란 것 그들은 믿었지요. 그걸 제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그걸 ‘희망’이라고 했지요.
사람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희망으로 살아요. 희망으로. 희망을 둘로 한번 나눠봅시다. 희망이 둘로 나눌 수가 있어요. 희망이라는게. 둘로 나누면 영어로 써서 죄송합니다. ‘aim’ 과 ‘goal’, 희망입니다. 희망인데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aim, 목적이라고 하고 이걸 goal, 목표라고 해요 목표. 목표는 최종적인 것을 이야기하고 목적은 최종적인 것을 향하여 달려가는 기대성, 달려감 이런걸 목적이라고 하거든요.
지금 제가 목표와 목적을 나누고 있어요. 목표와 목적, 희망, 이거는 뭐냐 하면 아직까지 미완료지요. 달성되지 않은 것 미완료. 인간이 그냥 인간으로 조용하게 사는게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은 반드시 미흡함을 느끼는 거에요. 그 미흡함을 느끼는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그걸 ‘욕망’이라고 합니다. 욕망. 욕망은 지금에 만족하게 되면 욕망이란게 생기지 않아요. 왜 사람들이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되면 시큰둥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천국에 가게 되면 모든게 완료가 되기 때문에 뭐가 없어요.
천국 가면 꿈도 없고 자신의 열망도 없고 희망도 없고 욕망이 없어요. 이 땅에서는 천국 간다 나 좋은 나라 간다는 희망 때문에 어떤 역경과 고난도 이거 극복하면서 힘든 고생도 감수해가면서 이렇게 고생하는 덕분으로 하나님이 나를 천국 보내주실거라는 그런 자기 자신의 꿈에 대해서 이것이 실효성이 있는데 만약에 목적이 희망인데 목표가 있고 goal, 목표가 있고 그 다음에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는 자기 열의, 그걸 이걸 목적이라고 하거든요. 유명한 책 있잖아요.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고. 이거는 꿈과 희망으로 이끄는 삶이라 이 말이죠.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현재 돈 좀 있다고 그게 사는 재미가 아니고 이 꿈과 희망으로 살아가요. 이 꿈과 희망이 좌절되면 인간은 뭐하느냐 하면 자살합니다. 자살하려고 시도하게 돼요. 자살하려고. 밥이 없어 빵이 없어 돈이 없어 자살하는게 아니에요. 꿈이 없을 때 자살해요 꿈이 없을 때. 인간은 꿈이 없을 때. 꿈이 없다는 말은 기분 좋다는 말이에요? 기분 나쁘다는 말이에요? 기분 더럽다는 말이에요. 누구 기분이 더럽다? 내 기분이 더럽다는 겁니다. 과연 우리가 인간이 자기 기분이 더럽다고 할 자격이 있습니까? 그럴 자격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우리가 신도 아니면서 신의 흉내를 내고 있는 겁니다. 신은 곧 나는 자아는 신의 흉내를 냈는데 신이고자 하려고 하니까 너무 모자라고 미흡한게 많고 아직까지 신인데 몸도 아프고 이러니까 암 걸리고 이러니까 짜증나잖아요. 그러니까 신이 신답게 살기 위해서는 희망이라는 것을 걸고 그 희망에 파트너로써 누굴 요청하느냐 하면 하나님을 요청, 신을 요청하는거예요.
제가 주일날 설교할 때 혹시 들어 봤습니까? 어려운 대목이 있어요. 인간에게 영원한 수치성이 있다. 그게 뭐냐 하면 내 인생을 나하고 의논 없이 만든다는게 그게 인간이 굉장히 수치심을 느껴요. 그 수치심을 감추기 위해서 신을 믿지요. 신을 믿는데 그건 신을 좋아서 믿는게 아니고 신에게 따지고 싶어서 믿는거에요. 왜 내 인생인데 왜 주제넘게 당신이 왜 개입했습니까? 나는 재벌집에서 태어나고 싶은데 왜 우리 집은 가난하게 태어났습니까?
이게 두고두고 당신한테 따질거야 라는 그 외람된 것을 순화하기 위해서 그래도 당신을 인정하고 당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당신의 살아계심을 인정해주잖아요 이런 식으로 아부에 나서는 겁니다. 좋은게 좋지 않으냐. 당신 하는 이야기 다 믿어주고 당신의 약속 다 믿어줄테니까 나를 이 정도되는 나는 적어도 이 정도 되니까 나를 키워주세요. 나를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하는 거에요. 이게 뭐냐 하면 현재 자기 자아로서는 만족스럽지 않고 아주 불만투성이라는거에요. 불만투성이에요.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보세요. 재벌집 그 초등학생 개인 운전사까지 있는 초등학생이 그게 만족스럽습니까? 어느 재벌집 초등학생 아이는 자기 개인운전해주는 운전사한테 “아저씨 똑바로 운전 안 해? 이러니까 아저씨는 맨날 운전사나 하지” 이런 식으로 초등학교 3학년이 나이 50넘은 사람한테 그렇게 했거든요. 그때 내가 운전했다면 걔는 죽었어. 당장 내려. 너 안 맞아봤지? 나한테 한번 맞아봐. 너 운전사한테 한번 맞아봐.
왜 그렇게 불만이에요? 걔가 왜 그렇게 불만입니까? 인간은 자기가 신이 되기 전까지는 불만이에요. 신이 되기 전까지는. 목 마를 때에 물 마시면 만족이 되잖아요. 그러나 갈증 자체에서 오는 그 요구는 해결책이 없어요. 목마를 때 사마리아 여인 요한복음 4장에 목 마를 때 물 길러 오는 것은 좋지만 계속해서 갈증 자체가 내 안에 장착되어있다는 이 문제는 해결 못 하는거에요. 그래서 인간은 인간의 눈에 보이는 모든 사항들은 자기 꿈에 달성과 관련되어 있고 자기 희망, 자기 목적과 목표를 성취시킬 재료로서만 자기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겁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뭐냐 하면 내가 살아있는 나를 살아있는 채로 천국에 하나님께 신과 함께 합류하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누구하고 이렇게 하나가 될 때 지금 이 모습 그대로 달라진게 없이 합체가 될 수 있을까요? 달라지지 않고서는 천국에 못 갑니다. 뭔가 달라져야 돼요. 만약에 내가 내 목표가 있고 목적이 있는데 누구 친구 만났다. 친구 만나서 커피집에서 수다를 떨면서 수다 떨면서 서로 견제하는게 뭐냐 하면은 네 꿈 접고 내 꿈의 밑으로 오너라 하는 이거는 내 이야기고 저쪽 이야기는 네가 양보하면 안 되느냐? 내 꿈에 의해서 네가 나한테 도움 되는 사람이 되라 라는 이야기가 한시간 두시간 이야기해도 계속 이야기 하고 있는거에요.
특히 아줌마들 뭐 아무 것도 아닌데 수다 떨면 3시간 4시간까지 계속 하잖아요. 남자들은 이상한게 도대체 3시간 4시간 이야기할게 뭐가 저리 많은지. 그런데 그 이야기 내용이 뭐냐 하면 내 꿈에 대해서 펼쳐놓고 당신 이야기 듣고 있는 친구들은 나한테 어떻게 동조하고 나를 위로하고 힘을 보태주고 협조할 것이냐를 요청하는 거에요. 그럼 저쪽에서 그거 듣고 네 꿈만 있냐?! 내 꿈도 있다. 따라서 우리 적당선에서 협상하자. 딜하자 딜. 이거 해주면 이거 해주고 이거 해주면 이거 해주께. 결국은 정치적 협상에 3시간 4시간 가는거에요. 현재 협상이.
그렇게 되게 되면 나는 달라진다? 안 달라진다? 절대로 안 달라져요. 왜냐하면 나는 꿈과 희망 없으면 나는 죽어야 되니까. 조건이 뭐냐 하면 살아있는 내가 살아있는 하나님을 만난다 이게 조건이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20장 들어오면서 19장에서 이미 누가 돌아가셨습니까? 예수님이 돌아가셨잖아요. 예수님은 뭐냐 하면 그 당시에 열두 제자의 꿈이었습니다. 물론 가룟 유다는 배신했기 때문에 일찍 자기 자신을 알았기 때문에 가룟 유다는 탈락하고 열한 제자의 꿈이 예수님이었거든요.
그 꿈이 자기 현장에서 돌아가신거에요. 그걸 닭 쫓던 개 신세가 된겁니다. 그동안 3년 동안 자기 청춘을 모두 바치면서 자기 직업도 포기하고 고기 잡는 것도 포기하고 그냥 올인한거죠. 거기 몰빵을 한거죠. 하나님 나라에서 누가 높아질 수 있습니까? 할 정도로 잔뜩 주님이 하는 일들을 봐서 그게 믿음입니다. 주님이 하는 일이 저한테 나한테 도움이 되고 내 꿈과 이상을 꿈을 실현시킬거라고 철썩같이 믿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누구나 믿음이란게 있어요. 불신자라는 말이 잘못된 겁니다. 신자입니다. 모든 인간은 다 태어나면서 신자에요.
그 신자가 달라져야 돼요. 뭐로 달라져야 돼요? 불신자로 달라져야 구원을 받습니다. 내 믿음은 천국에 안 통한다는걸 알아야 돼요. 내가 주님을 발목 잡는 이유가 뭡니까? 주님을 위해서가 아니에요. 살아있는 내가 산 채로 천국가기 위해서 발목 잡는 겁니다. 살아있다는 이유 때문에 목적, 목표가 없어지지 않거든요. 꿈이 없어지지 않아요. 왜냐하면 내 속에 내가 미처 모르는 갈급증이 계속 생기니까요.
사람이 뭔가 어떤 대상에 접근하게 되면 가까이 접근이 가능한게 아니고 대상에게 접근하게 되면 그 접근하는 거리가 접근한 만큼 점점 더 난관에 봉착한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여러분들이 그걸 아셔야 돼요. 예를 들어서 나치가 누굴 학살했습니까? 천만의 유대인들을 천만유대인을 학살했지요. 뭐 팔백만 오백만 하는데 천만 보면 돼요. 했을 때 그 유대인들을 죽이면 죽일수록 잔당이 더욱 더 강해져요. 숫자를 많이 죽이면 죽일수록 남아있는 숫자가 전에 있는 개인적인 그 강도보다 더 위협이 되는 요소가 돼요. 희한하지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 보게 되면 어떤 우주선이 광속도로 달리게 되면 그게 뭐 달려가면 달려갈거라 생각하겠지만 속도가 증가하게 되면 우주 자체의 질량이 무한대로 늘어나요. 그래서 그 빛의 속도에 어떤 물질도 도달할 수 없다는 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논리입니다. 물리에서 이야기하는거예요.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하나님의 갭은 커지는거에요. 멀리서 보면 가까이 가지만 그게 합체될 수가 없는거에요.
왜냐하면 우리 쪽에서 달라져야 되기 때문에. 우리 쪽에서 달라져야 되는데 우리는 안 달라진 채 이 몸 이대로 안 달라진 채 내 꿈과 희망 그대로 가지고 예수님은 나의 비전이요 꿈이요 드림이요 하면서 달려가는거에요. 지금 달려가는 그게 그야말로 인간의 하는 말로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한 자로 이거에요. 한 자로 ‘꿈’ 입니다. 꿈. 진짜 앞에 뭐 하나 구체적으로 이해하려면 ‘개꿈’. 그냥 개꿈이에요. 우리가 예수 믿는게 개꿈이라고요 개꿈. 실효성이 하나도 없어요. 이유는 뭐에요?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 우리가 살아있기 때문에 산 자는 천국에서 안 받습니다. 원서 접수가 안돼요. 원서 접수 자체가 안돼요. 살아있는 사람은. 왜냐하면 그냥 목을 숨 쉬면서 살아있는게 아니고 살아있다는 말은 온갖 것이 다 죄가 더불어 살아있는거에요. 내가 선악과 따먹고 신이 되지 않고서는 내가 만족하지 않는다는 그 사실부터 살아있어요.
꿈은 뭐냐 하면 꿈은 뭐냐? 움직이지 않는 운동입니다. 뭔가 열심히 운동해요. 배드민턴 동호회에다가 밴드 취미생활로 밴드하고 또는 나이 좀 이렇게 50되가지고 아줌마 되가지고 등산 취미 있어가지고 등산하고 하루 일과가 빡빡해요. 굉장히 움직이는데 제자리 뛰기에요. 산에 올라가도 살아있지요. 살아있는 내가 산에 올라가지요. 교회 가도 내가 살아있지요. 배드민턴 쳐도 내가 살아있지요. 드라마 볼 때도 내가 살아있지요.
배드민턴 하면서 꿈꾸는 거에요. 이번에 지역예선 나가야되는데 그 꿈꾸는 거에요. 이번에 등산할 때 이번엔 난코스라고 해가지고 먼저 올라가야 되는데 그렇게 하지요. 특히 그 저 산에 등산 동호회 있잖아요. 등산 동호회. 등산 동호회 처음에는 회비 얼마 안 되니까 하지요. 그거 다 꿈이 있어요. 괜찮은 남자 만나고 괜찮은 여자 만나는 꿈이 있어요. 산에 갈 때 이게 불륜인지 아니면 부부인지 아는 방법은 딱 두 가지 있습니다. 각자 배낭 메고 있으면 불륜이에요. 100%. 왜냐하면 각자 집에서 등산 간다고 나왔기 때문에 배낭이 두 개에요.
그런데 부부는 나올 때 배낭을 한 개만 있어요. 남자가 남편이 배낭 메고 여자는 그냥 털래털래 올라가면 돼요. 또 한가지 증거는 뭐냐 하면 여자가 물건 살 때 남자가 가만있으면 불륜입니다. 그러나 부부는 여자가 뭐 살 때 남자가 그거 사지 마라 집에 있다. 어디 가도 반드시 목표가 있고 목적이 있어요 어디 가도. 왜? 내가 살아있으니까. 그런건 적어도 괜찮아요. 구별법 이런 것.
인간은 절대로 자기 자신을 절대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부활을 언급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된 채로 제자들에게 나왔다는 것은 너희들이 고생하면서 3년 동안 따라다닌 것 다 헛것이다 그런 뜻이에요. 아무 소용 없었다. 뭐 배우고 보고 기적 일으키고 베드로처럼 물 위를 걷고 오병이어하고 다 아무 소용없는거에요. 왜? 아직 본인들은 안 죽었으니까. 그렇다면 그들도 주께서 함께 죽으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제자들의 문제점은 제자들이 죽어도 죽음에 이르지 않는다는 사실이에요.
죽어도 죽음에 이르지 않아요. 이게 복음의 핵심입니다. 내가 죽는다고 해서 이게 나의 주님께서 준비한 그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에 그 죽음에 합체되지를 않아요. 죽음이라는 개념은 이거는 누가 성취하느냐 하면 아버지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만이 성취할 수 있는 개념이에요. 이 죽음이. 우리가 죽는다고 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