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요한복음 19장 25절(순수 슬픔)181218a-이근호 목사
강남-요한복음 19장 25절(순수 슬픔)181218a-이근호 목사
요한복음 19장 25절부터 보겠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데” 네 사람이죠. 네 사람인데 전부 다 이름이 한결같이 마리아에요.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이야기를 그렇게 답답하게 십자가 위에 올라가셔서 불편한 자세에서 그렇게 힘들게 말씀하실까요. 평소에 식사 중에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 달릴 거 아시잖아요. 그럼 식사 중에 편하게 식사하시면서 ‘사도 요한아 너의 어머니다’ 이렇게 하시면 되는데 이게 십자가 위에서 그렇게 이야기하시는거에요.
그럼 우리가 알다시피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일으킨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다 이루었다’ 했으니까. 그럼 그 다 이룬 내용 속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자기 어머니 마리아를 자기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위탁하는 그 일도 다 이루심 안에 꼭 필수적으로 들어있어야 할 내용이기 때문에 십자가 달린 채 이야기 하신거에요.
그렇다면 십자가 이것은 신의 이야기냐 아니면 인간 예수의 이야기냐 하는 것을 살펴봐야 되요. 이 십자가라는 것은 신의 이야기냐 하나님 이야기냐 아니면 하나님 아닌 인간 예수에 관한 이야기냐를 이렇게 의도적으로 제가 이렇게 구분을 했습니다. 구분한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 이야기가 인간 예수 여기에 결합이 안 되기 때문에 그래요. 끊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이유가 있어요. 예수님의 자신의 하나님 됨을 의도적으로 인간이 알고 있는 신의 이야기를 피해서 인간 예수님으로서의 이야기를 하는 의도가 바로 신의 이야기와 이렇게 연결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겁니다. 인간 예수라고 했으니까 지금 여기 누가 있습니까? 어머니가 있지요. 어머니 마리아가 있지요. 천주교에서는 상당히 중요시 하는 대목입니다. 십자가에서 마리아가 언급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구원의 파트너로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구원의 파트너로서 반드시 들어가야 된다고 천주교는 우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를 부탁했다. 누구한테? 사도요한에게 부탁한거에요. 그러면 하나님의 이야기와 인간 예수의 이야기가 이렇게 저는 끊어졌다고 생각하는데 만약에 이어졌다고 한다면 이어질 수 있는 근거가 뭐냐 하면 이거에요. 예수님은 효심이 깊었다 이렇게 되요. 효심이 깊었다. 예수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하나님으로써 자기 일을 다 하면서까지 인간의 역할도 하나님께서 소홀히 하지 아니하시고, 인간으로서 어머니한테 효도를 해야 하는 그것까지 다 기억하시고 그걸 배려하셔서 사랑하는 제자에게 나 떠나고 난 뒤에 자기 어머니를 사도 요한에게, 사랑하는 제자에게 부탁했다는 겁니다.
그거는 뭐냐 하면 나는 어머니 아들로서 자식을 자기보다 먼저 목숨을 빼앗긴 아들을 보면서 어머니의 심정이 얼마나 큰 슬픔에 잠기겠는가. 그것을 아시고 그 어머니에게 자식으로서 할 도리를 끝까지 다 해줬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거는 하나님 이야기가 곧 사람 이야기가 되고 효심 이야기가 곧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되어 버려요. 그럼 이렇게 연결이 되어 버립니다. 역시 하나님도 효도하라고 했구나. 아니 하나님 자신이 효도했구나. 따라서 우리가 효도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의 일부다 그렇게 생각되는거에요. 세상에서는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걸 끊어버렸다. 이걸 끊는다는게 좀 억지가 아니냐 그렇게 생각하실텐데 여러분들 가나안 혼인잔치 때 마리아하고 예수님하고 대화의 호칭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자기 어머니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여자여.” ‘여자여’라고 했지요 어머니라고 안하고 여자여 라고 했지요. 그런데 여기서는 어머니라고 이야기한거죠. 여기에 호칭을 그렇게 한게 아니고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고 호칭은 하지 않지만 사도 요한이 새로운 아들이라고 이야기해서 자기가 아들인 것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 볼 수 있는데, 그 가나안 혼인잔치에서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는 말은 요한복음 2장에서 나오거든요.
이게 어머니와 아들관계는 어떤 관계냐 하면 이게 ‘육적 관계’입니다. 육적 관계. 육의 관계에요. 요한복음 4장에서 분명히 육으로 난 것은 육이거든요. 육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영으로 바뀌지는 않아요. 바뀔 수가 없어요. 예수님이 효심을 다한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 될 수는 없다 이 말이죠. 효심이라는 것은 인간의 육의 관계를 곤고히 하는겁니다. 그걸 계속 안끊고 이어가게 하는게 효심이잖아요. 효도잖아요. 그러나 그 육의 관계가 영의 관계로 전환될 수 있는 어떤 여지는 없어요.
그러면 예수님과 그 마리아의 관계는 뭐냐 하면은 반대로 생각을 해야됩니다. 어머니가 누구냐 하면은 예수님이고 아들이 누구냐 하면은 바로 마리아에요. 왜냐하면 어머니가 아들을 보호하니까요. 보호자의 관계입니다. 부모 자식과의 관계가 아니고 보호자의 관계에요. 마리아가 울어야 될 것은 육적인 인식에서 귀한 내 아들 잃었다고 울으면 안되고 자신의 보호자를 상실한거에요. 자신의 보호자를. 그 보호자를 상실한 것에 대해서 그 보호를 자기가 했던 보호를 사도 요한에게 부탁한겁니다. 사랑하는 제자에게 부탁한거에요.
그러면 그렇다고 치더라도 이렇게 신의 관계, 인간의 엄마와 아들의 관계가 신의 관계와 끊어졌다고 그렇게 강변할 필요까지 뭐가 있겠느냐 무리한 게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는데 요한복음 내내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라는 그 개념 자체가 인간들이 아는 하나님의 개념 자체를 철저하게 예수님은 지금 거부하고 있습니다.
너희들 하나님은 맞는데 너희들이 문제다 정도가 아니에요. 너희들이 뭔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과 내 아버지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하나님이고 더 심하게 주님이 더 심하게 요한복음 8장에서 이야기했듯이 ‘너희 아비는 악마’라고 했습니다. 악마에요. 그러면 하나님의 관계란 너희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관계는 이것은 하나님을 너희들이 인정 안한다가 아니라 너희들이 하나님을 굳게 잡고 그걸 인정하는 이유는 그 출발선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바로 혈육관계에서 나왔어요 ‘혈육관계’. 혈육관계. 로마서 1장 21절인가 거기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좀 어렵지요? 좀 어려워도 여러분 참아내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1장 21절에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라고 되어 있지요. 제가 질문 던져 보겠어요. 하나님을 아는데 몇 살부터 알아요? 하나님을. 하나님을 몇 살부터 아는 겁니까? 아이고 하나님한테 기도해요. 그걸 몇 살부터 그렇게 하나님한테 기도하고 하나님을 인지를 갖고 그렇게 하나님의 표상을 가지고 그렇게 하느냐 말이죠. 갓난아이가 젖 먹을 때부터 젖 먹으라고 하면 맘마맘마. 맘마가 잠깐만. 기도하고 이렇게 기도하고 젖을 먹습니까?
인간은 날 때부터 하나님을 안다고 했잖아요. 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 아니에요. 인간의 혈육관계에서 형성된 유사 이미지인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뭐로 보느냐 하면은 자기를 지켜주는 보호자로 보는데 그 보호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부모에요. 이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라는 울타리 속에 태어났고 점차 부모라는 울타리 속에서 자아가 형성되면서 그 부모의 울타리를 자아가 스스로 독립을 느끼면서 부모의 울타리를 대체하는 이미지로서 신의 이미지를 드디어 형성하게 되는겁니다.
그러면 왜 계속 부모로 가지 왜 부모라는 울타리를 독립하느냐. 그것은 아이가 점점 크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부모의 부재를 느껴요. 부재. 부모가 없을 때를 느낀다고요. 처음부터는 부모 없으면 난리나지요. 이미 그 인간이라는 것은 태어나면서 짐승처럼 곧바로 독립되는게 아니에요. 지금 자궁 안에 있는 그 느낌이 오랫동안 계속 가고 있는겁니다. 적어도 1년 이상은 자궁인지 아닌지 구분 안 될 정도로 계속 갑니다. 여기는 엄마의 몸이 곧 자기 몸이에요. 자기 몸이 따로 있는게 아니에요.
그러다가 엄마가 없으면 자기도 없는 존재가 되고 그러나 엄마 따로 나 따로가 되는 것은 시각적으로 어떻게 이게 돼요. ‘본다’가 형성될 때 무엇을 본다가 형성될 때 보게 되면 여기 뭐가 떠오릅니까? 영상이 떠오르겠지요 영상. 보통 아이는 어릴 때 보는 것은 엄마를 보고 아빠를 봐요. 처음에는 아빠보다 엄마를 먼저 보지요. 엄마 태에서 나왔으니까 엄마를 보지요. 엄마 보니까 보이는게 엄마잖아요. 엄마하고 자기하고 한 몸이에요. 엄마 시장가면 난리입니다.
그런데 어떤 ‘본다’에서 거울을 본다고 합시다. 거울을 보게 되면 거기에 엄마 모습이 아니고 자기 모습이 보이겠지요. 자기 모습이 보이면서 자아가 여기서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하는겁니다. 자아가 형성됩니다. 쟤 누구지? 거울 앞에. 쟤 누구야? 그러면서 어떤 오해가 있는데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면서 저것이 내 모습이라고 보는거에요. 내 모습이라고.
그런데 내 모습이라고 보는 순간 거울에 비친 그 자기 모습과 자기를 일치화시키는 이런 오인을 범해요 오인. 이런 실수를 범해버려요. 거울에 비친 그 모습을 ‘라캉의 상상’이라고 하는데 거울 단계에서 보는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지금 인간이 어떻게 신의 형상을 어릴 때부터 유아 때부터 어떻게 형성되는가 그 이야기 제가 해드리는겁니다.
처음에는 부모가 만약에 신이라면 부모가 신이에요. 보호자니까. 그런데 어느날 자기가 자기 자신이 따로 존재한다는걸 알지요. 그러면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인지 제가 설명하면서도 하여튼 되는대로 해봅시다. 나와 부모 특히 어머니죠 어머니. 부모 하지말고 어머니라고 씁시다. 나와 어머니의 사이가 무슨 관계냐 하면은 ‘이자관계’에요. 이자관계. 두 사람 관계거든요. 이걸 이자관계라고 합니다.
두 사람 사이에 어머니가 자기를 대신하는 거에요. 그런데 어느날 나를 아는 순간 저 분이 나의 어머니라고 느끼는 순간 이미 자기는 따로 독립되어 있는 겁니다. 두자관계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면 어머니라는 것도 필요없어요. 그 어머니가 나의 전부에요. 그러니까 자기가 독립되어 있으면 자기가 뭐가 되느냐 하면 내가 어머니를 보는 입장이 되는 겁니다. 전에는 엄마 안에서 엄마를 느꼈는데 이제는 내가 엄마를 보는 입장이 되요.
보는 입장이 된다면 여기는 뭐가 되느냐 하면은 나와 이자관계, 나와 엄마 사이에 중간 매개체를 집어넣는데 매개체가 뭐냐? 본인이 나를 집어넣어서 나를 중심으로 엄마를 이해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엄마가 시장갔다하면 엄마 시장갔어? 엄마 시장가면 곧 오겠네. 이렇게 된다니까요. 지금 여기 매개라는 말 또 나왔는데 이게 무슨 취지냐 하면은 엄마가 시장갔는데 엄마가 시장간게 그게 뭐가 오인이고 잘못된 것이냐 이야기할건데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엄마가 시장갔어? 그러면 나는 컴퓨터게임 좀 해볼까? 잔소리 안 할 찬스인데.
이거는 어떤 관계냐 하면은요 이것은 적어도 중학교 정도 되어야 되는 관계거든요. 엄마가 시장갔는데 엄마 시장갔으니까 곧 오겠네 하는 것은 아직 저항력 시대에요. 아주 독립을 해도 덜 독립을 한거에요.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네. 시장갔으니까 좀 기다리면 오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계속해서 ‘엄마 시장갔네’ 에다가 그걸 기다리는 겁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은 엄마 시장갔다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자기의 소망을 중간에 매개로 중간 매개체로 집어 넣는거에요.
그런데 엄마 시장갔다 찬스다 컴퓨터 게임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 중간 여기에 뭐가 들어가느냐 컴퓨터 좋아하는 나를 따로 집어넣어요. 이게 무슨 관계냐? 이게 삼자 관계에요 삼자 관계. 나와 엄마사이에 ‘나’라는게 있는데 이제는 엄마는 빠이빠이 이제는 나 하고싶은 대로 가는 겁니다. 왜 이렇게 되느냐 하면은 엄마의 부재가 이게 부재가 당연스러운 것이란걸 아는 순간 부재를 대체할만한 것을 집어넣은 것이 바로 신의 개념이에요. 부재를 대체하는 신 개념. 부재를 대체하려면 부재는 없음이거든요. 없음은 미흡이거든요. 미흡인데 여기 미흡을 대체할만한 완전체 절대체 절대적인 것 완벽한 것. 그러면 내가 어릴 때 엄마와 함께 있을 때 절대적인 그 개념을 이미지를 신으로 대체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엄마가 집 나가면서 곶감 선반위에 올려놨는데 그거 손님 줄거니까 먹지마라 하는거에요. 먹지마라. 미흡이죠. 먹고 싶은데 내가 싫어하는걸 저 선반 위에 오리고기 있으니까 먹지마라 하면 나는 오리고기 아예 싫어하니까 그건 미흡의 대상이 안돼요. 그런데 내가 진짜 좋아하는 곶감을 얹어 놨으니까 미흡한거죠. 그러면 엄마가 시장간 틈을 타서 내가 곶감을 손댄다는 것은 뭘 뜻하느냐 하면은 곶감을 먹고 만족스러운 내 모습을 그리죠.
이게 뭐냐? 절대적으로 만족스러운 상태, 이게 ‘신’의 개념이에요. 왜? 내가 원하는 욕망을 내가 충분히 보호해주고 지켜주니까 이래서 신 개념이 생성되는거에요. 그런데 시장갔다와가지고 엄마가 패버리는거에요. 이게 어릴 때부터 말 안듣고 누구 닮아서 말 안듣나 줘패지요. 패면 엄마는 뭐가 됩니까? 엄마는 뭐가 돼요? 엄마는 악마가 되는거에요. 왜? 악마와 신과는 같은 계열에 속하죠. 같은 동네 존재에요. 나의 만족을 방해하는 악마가 되고 나의 어릴 때 그 있는 그대로 만족을 유지하면 신이 되는 거에요. 하나님 되는겁니다.
악마같은 엄마가 갑자기 성질을 내고 회초리를 들 때에 애들은 ‘엄마 나 실망했어’ 이렇게 나오지요. 실망하면서 여기서 뭘 하느냐 아까 이야기했던 결핍을 느낍니다. 결핍을 느끼면서 무엇을 요구하느냐 하면은 결핍에서 신이 되었기 때문에 결핍에서 신이 되려면 뭔가 충족되어야 되지요. 충족되는데 여기 동원되는 것이 뭐냐 하면 이거에요. ‘영웅’ 다른 말로 하면 ‘초인’. 초인, 영웅. 이게 바로 매개가 되는 겁니다. 이게 누구냐 바로 ‘나’입니다. 이게 나에요.
신을 믿는 내가 신이 되는 거에요. 어떤 식으로? 나는 영웅이고 나는 나에게 초인이 되고. 이게 무슨 세계냐 하면 애들이 많이 보는 동화의 세계. 동화의 세계입니다. 백설공주. 아무리 가난하지만 밤 12시되기 전에 왔어. 신발을 잃어버렸어. 그런데 진짜 못생긴 왕자가 아니에요. 못생긴 왕자가 아니고 박보검 왕자. 박보검 왕자가 와가지고 왕자가 신발 들고 이 신발 들고왔을 때 자기는 누가 되느냐 하면은 송혜교가 돼요. 졸지에.
신데렐라 동화가 그거잖아요. 백설공주가 그거잖아요. 역시 왕자 등장하잖아요. 백설공주한테. 초인 자기가 어떤 여자보다 이쁜 여자가 될 것이다 또는 남자는 내가 어떤 남자보다 힘세고 제일 돈 많고 부자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그런 남자가 되가지고 내가 남자가 될거야. 이게 바로 남성이 꿈꾸는 이게 바로 ‘신’이에요. 인간이 신을 믿는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분명히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하나님 된 나’에서 나를 닮은 하나님이 나오는 거에요. 인간이 신을 제거하고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 관계가 어디서 나왔어요? 부모와 자식 관계. 어머니와 아들 관계에서 나온거에요. 그걸 잃어버렸을 때 어머니가 그 아들보고 얼마나 슬프겠어요.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그 아들 있음으로서 자기가 어릴 때 동화의 세계에서 엄마가 되도 어떤 엄마가 되겠어요? 초인적인 엄마, 영웅적인 엄마가 되는거에요. 아빠 같으면 영웅적인 아빠 초인적인 아빠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 올 때 신은 어떤 개념의 신입니까? 초인적인 신, 나를 초인되게 하는 신, 나를 영웅되게 하는 신. 내가 원한 신이지요? 라고 노크하면서 교회 들어온다니까요. 내가 원하는 신. 어릴 때 내가 꿈꾸던 그 하나님이 하나님 맞지요? 라고 들어오는 거에요.
그 하나님에게는 뭐가 없습니까? 슬픔이라는게 있을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완벽한 분이기 때문에 하자라든지 패배라든지 죽음이라든지 실패라든지 좌절이라든지 잃어버림, 상실 이런 요소는 하나님에게는 이거는 해당될 수 없다고 여기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신들로 쫙 깔려 있는 이 세상에 완전히 그 신을 작살내는, 박살내는, ‘슬픔을 아는 신’으로 와버려요. 연결 안돼요. 신의 개념과 인간 예수의 개념은 전혀 연결 안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모든 말씀을 이루는 그 십자가 상에서 누가 보호자입니까? 누가 어머니 역할해요? 마리아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마리아의 어머니 역할을 하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아들같은 존재지요. 진정으로 우리가 슬퍼해야 될 것은 내가 원하는 신이 못 되서 슬퍼하는 것이 아니고 보호자가 이 못나고 아무것도 아닌 나를 이 보호자가 떠나보내는 그 슬픔 뿐이여야 된다는 겁니다. 진짜 하나님한테는. 그래서 지금 내 말 이해했는지 모르겠어 하여튼 그냥 해 봅시다.
마태복음 9장 15절 읽어보세요.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라고 했습니다.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럼 인간은 슬픔을 추구합니까? 아니면 완전을 추구합니까? 완전을 추구하지요.
그러나 주님 보시기에는 그러니까 네가 얼마나 오인이고 너 자신을 잘못알고 네가 잘못된걸 네가 모르고 있다는 거에요. 예수님이 다녀가야 처음부터 우리는 슬퍼해야만 마땅한 존재인 것을 너희가 안다는 겁니다. 잃어버린 슬픔을 우리에게 오히려 채워주시는 분이 주님이에요. 모든 인간의 시작은 기쁨이 아니고 무엇부터 출발한다? 슬픔부터 출발해야돼요. 그게 인간의 인간다움이에요. 진정한 인간은 슬픔부터 출발해야 됩니다.
벌써 우리는 아담부터 우리는 잃어버린 자입니다. 잃어버린거에요. 뭘 잃어버린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무조건 잃어버렸어요. 그런데 그걸 모르고 있어요. 우리는 그 태어날때부터 혈육적 관계에 매여있기 때문에 내가 잃어버린 것을 무슨 식으로 얻으려고 하느냐 하면은 옛날 혈육적인 방법으로 얻으려고 하는 겁니다. 자, 어릴 때부터 부모가 자기를 소홀히 하고 바빠서 자기를 돌보지 않으면 그 어린아이는 부모를 대신해서 누구를 찾습니까? 친구를 찾지요. 어릴 때부터 담배피우고 까불다가 옥상에서 밀려서 죽잖아요. 친구 찾잖아요. 친구를 왜 찾습니까? 정 붙일 곳이 없어서 또는 대화 상대가 없어서 이렇게 되는 겁니다.
라캉이라는 학자는 말하기를 신은 어디서 나오는가? ‘언어’. 진정한 언어에 있습니다. 진정한 ‘대타자’, 대타자는 말이 어려운 말인데요. 소타자 대타자 나누는데 소타자는 그냥 인간을 이야기하고 대타자는 뭔가 인간과 사귀어도 미흡한 그 영역을 대타자라고 해요. 대타자. 큰 ‘남’ 작은 ‘남’. 타자는 ‘남’이라는 뜻이거든요. 그래서 신을 대타자다 큰타자라고 이렇게 이야기 하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은 대타자 소타자를 무엇에 대느냐 하면 ‘말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릴 때부터 어린아이는 부모로부터 계속 지시와 명령을 받고 있어요. 지시와 명령. 지시와 명령 안에 뭐가 담겨있느냐 하면은 그 타자 남의 부모도 남이잖아요. 육체죠. 남의 욕망이 담겨있는 겁니다. 부모의 욕망에 맞춰주려고 하면서 드디어 주체가 형성되는 겁니다. 인간의 자아가 형성되었다는 겁니다. 자아가 형성되면서 그 자아에 뭐가 등장하느냐 하면은 하나님이라는 것이 어떠한 분일 때 하나님이라는 것이 자체적으로 형성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특징은 초인적이고 영웅적이고 내 미흡함을 다 채워주고 내가 어떤 경우에도 나를 보호해주고 그게 바로 인간개념이 형성되는 신의 개념, 신의 개념이에요. 신을 얻기 위해서는 그 타인의 부모죠. 타인의 명령을 들어야 되니까 명령을 따라서 부모 말 잘 들었다고 했을 때 아이스크림 받고 케익 빵 받던 좋은 경험이 있겠지요. 좋은 경험을 두자로 ‘양심’이라고 하는겁니다.
그리고 말 안 들었을때 맞았던 경험 있잖아요. 막 울었던 경험. 그것은 뭐냐 내 속에 악마 개념이에요. 그러니까 창세기 3장에 아담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선도 알고 악을 알았다는 거에요. 그런데 선과 악을 아는데 혼자서 태어날 때부터 천재적으로 아는게 아니고 이미 있기에 아는 분이 누구냐 하면 부모가 알고있어요. 부모가 일방적으로 자기 나름대로의 선과 악을 이미 규정을 해놨어요. 그럼 그 부모는 누가 규정했겠어요? 부모의 부모가 규정하겠지요. 어릴 때 고아는 고아원 원장 하겠지 뭐.
누군가 계속해서 지시하고 명령하고 간섭하고 잔소리하는 거에요. 그 잔소리로 인하여 본인 나름대로 형성된 그 최종적 개념이 하나님 개념이다 이 말이죠. 하나님 개념. 하나님 개념은 다 어디서 나오느냐? 육에서 나오는데 그 하나님 개념은 뭐냐 하면은 한번 정리합시다. 하나님 개념이란 ‘나의 만족성’입니다. 나의 만족성. 나의 만족이라고 하는 것은 육체의 만족이 아니고 육체 안에 들어 있는 남의 욕망의 만족성이 바로 하나님 개념이에요. ‘남의 욕망의 만족성’.
왜냐하면 나는 없으니까. 남들이 이야기할 때 나니까. 우리 눈치보면서 살아가잖아요. 그러니까 ‘눈치 최종 상태’ 그게 하나님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 말 안 들으면 나쁜 아이 되잖아요. 나쁜 아이 어디가요? 교회에서 나쁜 아이 어디갑니까? 지옥가죠. 그래서 지옥 안 가려고 하나님 믿는거에요. 그리고 꼭 죽어서 지옥 안가더라도 살아 있으면서 자기의 뜻대로 안되지요. 그거는 뭐냐? 하나님 앞에 나쁜 짓해서 벌 받아서 그래요. 십일조 안 해서 벌 받는 거에요. 기도 안 해서 벌 받는 거에요. 선교 안 해서 벌 받는 거에요.
바로 이러한 신의 개념이 총동원되어서 누굴 살해했습니까? 예수님을 살해하게 되는겁니다. 어렵게 이야기 하게 되면 인간은 중간 이미지를 앞장세워서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신인데 나의 신의 개념에 합당한 중간 매개체를 설정하고 내가 나를 중간 매개체로. 그러니까 반칙이죠. 내가 남을 만날 때 그냥 만나지 않고 나라는 인간이 안고 있는 생각을 나라는 것을 또 이미지로 투영해서 만들어낸 나를 타인과의 관계에 중간 매개체로 사용한다 뭐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관계는 무슨 관계가 되느냐 하면 이왕 어렵게한거 어렵게 갑시다. ‘필연적 관계’. 왜? 내가 나에게 필연적 관계이기 때문에. 나는 반드시 이유도 없이 무조건 신 해야됩니다. 나는 무조건 최고가 되야 되니까.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최고가 되는 거에요. 선과 악이 인간이 아는 전부입니다. 선과 악이. 선과 악이 최고니까 인간은 아무리 알아도 뭐에 발목 잡힙니까? 선과 악에 발목 잡혀요.
여러분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은 구원받았다고 자꾸 우기지말고 뭐 벗어놓은 옷 같은게 있어야돼요. 벗어놓은 옷을 보고서 그 선악이라는 옷을 보고서 거기서 발목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알 때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선악 짊어지고 구원받았다 그게 무슨 구원이에요. 창세기 3장에 2장에 어긋났는데요?! 거짓의 옷을 벗어놓고 “도대체 누가 옷을 벗어놨네. 선악의 옷을 벗어놨는데. 이거 누구 누가 입던거야? 이거 내가 입던거네.” 거기서 벗어난거. 거기서 벗어난게 뭐냐 하면은 나는 하나님과 관계없었다.
다시 말해서 왜 없었는가? 선악을 안 그 이유 때문에 창세기 2장의 원리원칙에 의해서 선악을 아는 자는 정녕 어떻게 되리라? 죽으리라. 따라서 나는 정말 하나님과 상관없는 존재였구나 라는 것을 알 때 더 이상 내가 제시한 ‘나’ 라는 매개체가 매개체에서 더 이상 발목 잡히면 안되지요. “당신 나쁜 짓했다.” 하면 “했다 왜! 헌옷 가지고 되게 뭐라고 하네.” 내가 실컷 벗어 놓은 옷에 불과한데. 내가 나한테 헌옷이여야 해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나의 필연 나는 꼭 천당가야 되고 나는 꼭 구원되야 된다는 그 필연을 거기서부터 그 필연에서부터 발목에서 벗어나야 돼요. 내가 어떻게 되어야 된다는 필연에서부터 벗어나게 되면 뭐가 되냐? 우리는 ‘우연적 존재’가 되는 겁니다. 우연적 존재라는 것은 제가 지난 낮 설교때 했는데 우연적 존재라 하는 것은 원인이 나에게서 출발하지 않는 것을 가지고 우연적 존재라고 합니다. 나한테 원인이 없는데 창세전에 이미 사랑받기로 정해졌기 때문에 나에게 이러한 희한한 우연적 현실이 벌어지는 거에요.
만약에 내가 구원받는 것이 우연이 아니고 필연이라면 그 속에 누가 섞여 있습니까? 나는 반드시 구원되야 될 초인이 되어야 하고 나는 영웅이 되어야 되고 나는 천당 백성이 되야 된다는 그 신적인 것을 아직도 그 위선의 옷을 못 벗은 사람이에요. 아주 껍데기를 벗겨도 안되지. 껍데기 벗긴다고 벗겨집니까. 아직 육에서 못 벗어나서 그래요. 육의 절대성 필연성을 못 벗어나서 그런겁니다.
자, 육의 필연성이란 것은 뭐냐 하면은 부모와 그리고 나 사이에 엮어있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태어난 것은 사람들은 어떻게 말합니까? 내가 태어난 것은 부모 때문에 태어났다고 하잖아요. 이 관계가 필연적 관계에요. 그런데 우연적 관계는 뭡니까? 내가 태어난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부모를 통해서 태어난거에요. 하나님에 의해서 태어났지 부모의 있음에 내가 태어난게 아니에요. 하나님에게서 태어난거에요.
따라서 부모에게서 태어난 필연적에서 나온 뭐가 있겠어요? 신이 있겠지요. 이 신을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인간의 신을 십자가에서 깨뜨린겁니다. 하나님이란 너희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을 내 이름으로 내가 그걸 깨뜨려버린거에요. 그 하나님은 사실은 악마였다. 너희 아비는 악마다. 요한복음 8장의 말씀처럼. 악마를 벗어버려야 돼요. 악마한테 발목 잡히면 안되고 악마의 발목을 툭 치고 나와야 된다고요. 선과 악.
간음한 여인을 현장에서 잡았을 때 주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하신 일이 뭐에요? 구원이잖아요. 자유잖아요. 어떻게 했습니까? 네가 어떻게 했기에 구원받는다가 없어요. 그냥 우연히에요. 내가 너를 일방적으로 용서하리니. 용서한다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맞지요? 내가 너를 사하노라 했잖아요. 너에게 어떤 행동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겁니다. 우리가 갑자기 하나님 되는 겁니까? 아니면 반대로 하나님 되는 그것조차도 그게 악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거죠. 내가 스스로 나답게 되려는 그 자체를 완전히 포기 못하게 하는거에요. 그럴 필요가 없는데 그동안 안 해도 되는 짓을 해온거에요. 악마한테 속아서.
자, 여기에 요한복음 19장 34절 봅시다. 목 쉬겠다. 이게 하도 어려우니까 열심히 하려고 하니까. 요한복음 19장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34절 읽어보세요.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피와 물이 나왔지요. 그다음에 36절 다른 분이 읽어보세요.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자, 성경에 응하게 함이라. 이 말씀은 시편 34편에 나옵니다. 시편 34편에 19절부터 나오는데 한번 읽어볼께요.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제가 지금 시편 34편을 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십자가 이야기를 모른다 치고요. 우리는 전혀 거기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다고 치고 시편 우리가 구약성도 또는 유대인이 되가지고 시편 34편 19절 22절 딱 그대로 보잔 말이죠.
그대로 보게 되면 그 주어가 누구냐 하면 그 주어가 바로 16절에 나오는 하나님이에요. 여호와. 우리가 지금 유대인이라고 치고 우리가 지금 하나님을 안다고 치고 보게 되면 시편 34편 16절에 여호와의 얼굴은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거에요. 여호와께서. 그래서 지금 예수님 십자가도 모르고 유대인이라면 여호와께서 무슨 일을 하십니까? 무슨 일을 하느냐 하면은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누구 뼈를 보호하신다? 여호와 믿는 우리 뼈 그걸 우리의 관절을 보호하신다 이 말입니다 관절. 운동하다가 삐끗하는 관절. 눈길에 미끄러지는 뼈를 보호하심이여. 넘어졌는데 뭐 안 다쳤다 그런 말 아닙니까.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한다. 걸을 때 보니까 뼈는 금 안가고 근육이 좀 늘어났어 이런거에요. 뼈는 괜찮아요.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22절에 그렇게 하심으로서 그에게 피하는 자는 다 뭐를 받지 아니한다? 죄를 받지 아니한다. 죄가 없다가 되는 거에요. 지금 유대인 해석 있잖아요. 문자 그대로 문자적 해석 있잖아요. 아 이걸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런 생각 안 들어요? 지금 교회에서 성경 문자대로 봅시다 하는 사람들 이 대목 읽거든요. 저기 어떤 섬에 가면 한센병이라고 하지요. 문둥병 한센병 거기 보면 그 사람들 할 일 없어서 성경만 달달 외운답니다. 그래서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나는 안 믿습니다만은 어떤 사람은 성경을 다 외운대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도 많이 읽어서 한 40년 읽으면 다 외워지는 모양이에요.
자, 그렇게 외웠다 칩시다. 그렇다면 시편 34편 그 외운 그 분한테 이 본문은 무슨 뜻인지 물으면 뭡니까? 하나님께서 보호하사 우리 뼈를 보호하시고 우리 신체를 보호하시는 그 사람은 결국 그 사람은 죄를 용서 받은 사람입니다 라고 해석이 이 본문 그대로 나오겠지요? 그런데 그게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은 전제가 뭡니까? 우리는 하나님 여호와에 대해서 안다 모른다? 안다고 나오기 때문에 이렇게 성경이 엉터리로 나온거에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걸 완전히 전복시켜 버리는 거꾸로 뒤집는 겁니다. 알기 때문에 모른다는 거에요. 너희들은 하나님이 하나님을 깨는걸 상상도 못했지? 이렇게 나오는겁니다. 하나님이 오셔서 하나님을 깨는거에요. 그 하나님이 인간의 자아고 자기 스스로 자기 하나 지키기 위한 이미지에 불과하니까요. 왜냐 그건 필연적 관계니까. 부모와 자식 관계가 필연적 관계라고 생각 안 들겠어요? 자식 어디서 나왔어요? 부모. 부모 있어야 자식이 나오지. 필연적 코스네. 다들 그렇게 생각해요 다들.
그래서 마리아가 예수 잃을 때 엄마 입장에서 얼마나 슬프겠느냐 세상에 귀한 아들 잃어버려서. 아니요 그게 아니에요. 누가 엄마고 누가 아들이에요? 예수님이 엄마고 마리아가 아들이라니까요. 왜? 시작을 예수님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이 마리아보고 뭐라고 합니까? “여자여” 라고 하잖아요. 여자여. 그리고 그 어머니 역할을 누구한테 맡겼다? 복음을 알게 된 사도 요한한테 맡겨버리는거에요. 효도를 한다고요? 무슨 소리. 무슨 효도를 해요. 효도하는 사람이 엄마 버리고 3년동안 돌아다닙니까 그래. 효도라고 하는 것은 부모 모셔가지고 같이 대패질하고 목수질해야 효도지. 무슨 효도가 부모 버리고 돌아다니는게 무슨 효도입니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마태복음 9장에서 신랑이 신랑을 잃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슬퍼해야 돼요. 신랑을 잃어버릴 때 슬퍼한다는 말은 처음부터 우리는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하나님 여호와 잘 알고 하나님 믿는다고요? 하나님 보시기에 대단히 불량한 존재에요 우리가. 하나님 믿고 여호와 믿는게 대단히 불량한 존재에요. 왜냐 그게 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에게 신은 없습니다.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신은 없어요. 신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신을 믿는 거에요. 신이 없기 때문에 신을 믿는 겁니다.
왜? 미흡함을 신이라는 이름으로 전지전능이란 이름으로 그걸 땜빵을 했거든요. 그게 바로 신조라는 거고 그게 바로 신앙이라는 그게 교리라는 겁니다 교리. 교리 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조 있잖아요. 하이델베르크 신조 그거 마귀가 만든거에요. 삼위일체 마귀가 만든거라니까 삼위일체가. 삼위일체 알고 십자가 버리잖아요. 희한하죠. 삼위일체는요. 삼위일체는 너희 알아라고 가르치는거거든요.
자, 아까 배웠습니다. 가르친다는 것은 어떤 타자가 있고 타자가 우리를 지시와 명령으로 가르치는 거죠. 이 말은 뭐냐? 가르친다는 것은 뭘 알아야 되요? 알면 괜찮게 된다는 대상이 있다는 거거든요. 몰라서 그렇게 알게만 되면 정말 멋진 신의 백성이 되는 대상이 바로 우리들 자신이라고 본인이 우기는 거에요. 미흡해서 그렇지 근원적으로 아주 망가지지는 않았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가르쳐도 안 된다 이건 뭐냐? 근원적으로 망가진거죠. 주님께서는 가르친게 아니에요. 제자들을 3년동안 가르친게 아니에요. 네가 가르쳐도 안 되는 존재인 것을 그걸 이야기하신거에요. 네가 3년동안 나 따라다니고 배워도 소용없다는 것을 그걸 알게 하신거에요.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아무도 거기에 합세하면 안 됩니다.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뜻이 갈라디아서 6장 15절에 나는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말은 그 나는 자랑거리가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하는거에요.
이것은 뭐냐 하면 나는 슬픔이라는 것이 이게 내 운명에 딱 맞다는 겁니다. 슬픔이라는게. 나는 늘 슬퍼해야돼요. 시작을 슬픔부터 시작해야돼요. 끊어졌으니까 슬퍼해야 마땅하죠. 그래서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기존의 제자들 도우라고 준 십자가가 아니라 기존에 전혀 없는 기존 세계에 주님이 끼어든게 아니고 주님의 십자가는 그 주님의 십자가 나름대로의 새로운 세계를 새롭게 만들어내는게 십자가입니다. 어떤 누구도 거기에 예상치 못한 새로운 세계가 십자가에서 나왔어요 십자가에서.
그 십자가에서 내용이 뭐라고 했습니까? 저 마리아를 네가 보호해라는 것 . 십자가 안에 보호한다는 기능이 담겨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책 제목이 뭐 낮게? 뭐라고 하는지 잊어버렸다. 더 낮게인가? 몽골에 선교사인데 책 제목이 낮게라고 하는거 아! 내려놓기(내려놓음). 내려놓기 내려놓기 그 다음 책이 더 내려놓기 있는 모양인데. 빌립보서 2장 그 말씀 그것 가지고 이야기하는데 그게 정답이 아니에요. 우리가 마음을 내려놓는게 아니고 십자가가 올라오는 거죠. 십자가가 올라오는 겁니다.
동남아 순회공연하는 가수가 무대에 어떻게 올라옵니까? 무대가 중앙에 올라오잖아요. 동남아 순회공연할 때. 무대가 올라오듯이 우리가 내려갈 수가 없어요. 우리가 신인데 신이 절대자인데 뭘 내려가요. 우리는 양보 못합니다. 내가 절대자 되는 것이 그게 우리의 나의 이상체가 되었어요 ‘이상체’. 우리가 그걸 ‘상징적 존재’라고 하거든요. 이상체에요. 가장 이상적이 되었어요. 나에게 잔소리 했던 그 잔소리의 완성체. 그게 우리 신이고 바로 그게 못되어서 오늘도 계속해서 추구하고 있어요. 그걸 이번 주일 낮 설교에 ‘자아 돌려막기’라고 했잖아요. 자아 돌려막기.
진정한 완벽한 존재되기 위해서 이것도 해보다가 저것도 해보다가 치킨집하다가 망하고 홍탁집하다가 망하고 그것도 해보고 딴 사업해가지고 또 무슨 사업? 콩나물사업해서 사기 당하고 또 이거는 친구니까 너한테만 알려준다. 뭐 이 사업하려고 빚내가지고 또 망하고 왜 그렇게 사기를 당하느냐 하면은 완전한 나, 신같은 내가 정말 만족스러운 나 정말 신다워 하는 그 만족이 미흡이 없이 계속해서 추구하고 시도하고 있는거에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이미 정체는 탄로났잖아요 이미 우리는. 우리는 슬픔의 아들이에요. 베노니라니까 베노니. 베냐민 아니고 베노니에요. 베냐민은 우리 외손녀 이름이고. 베노니 슬픔의 아들이에요. 라헬이 야곱의 본처 아닙니까. 그 베들레헴에서 애들 2살 죽을 때 통곡하는 사람 이름이 뭡니까? 라헬이죠. 라헬이 통곡할 때 예수님과 같은 공동체 이스라엘이 되는 거에요.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 태어난 그 십자가 사건 때문에 동참할 때만 우리는 구원받는 겁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