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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170강-창 44장 9-13절(베냐민 인질삼기)181226-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창세기

170강-창 44장 9-13절(베냐민 인질삼기)18122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3장 9-13절입니다. 구약성경 70페이지입니다.

창 44:9-13

“종들 중 뉘게서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우리 주의 종이 되리이다 그가 가로되 그러면 너희 말과 같이 하리라 그것이 뉘게서든지 발견되면 그는 우리 종이 될 것이요 너희에게는 책망이 없으리라 그들이 각각 급히 자루를 땅에 내려놓고 각기 푸니 그가 나이 많은 자에게서부터 시작하여 나이 적은 자에게까지 수탐하매 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된지라 그들이 옷을 찢고 각기 짐을 나귀에 싣고 성으로 돌아오니라.”

44장을 다 읽어야 되겠지만 방금 읽은 9절 이전의 내용은 요셉이 형들이 원하는 대로 양식을 각인의 자루에 가득 넣어서 보낸 것처럼 모션을 취합니다. 그런데 거기에다 점을 치는 은잔을 베냐민의 자루에 몰래 넣어놓고 거기에 돈도 함께 넣고 집에 가라고 보냅니다.

보내고 난 뒤에 요셉이 자기직원들을 따라 붙여서 그들에게 마치 몰랐던 일인 것을 새로 알았던 것처럼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뭐라고 하느냐? “너희가 어떻게 악으로 선을 갚느냐?”라고 시비조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 형들은 무슨 영문인지를 모르지요.

“우리가 돈 주고 양식 얻은 것밖에 없는데 우리가 주인에게 나쁜 짓을 했단 말입니까?”라고 하니까 요셉의 직원들이 요셉이 시키는 대로 “주인이 점치는 물건을 너희가 훔쳐갔잖아.”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7절에서 형들이 하는 말이, “우리는 결코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런 악심이 있었다면 전에 애굽에 왔을 때 양식과 함께 넣어 있던 돈을 도로 되가져 올 정도로 성의를 표하고 있는데 어떻게 당신의 물건을 도적질 하겠습니까?”라고 하면서 9절에 들어온 거예요. “종들 중 뉘게서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우리 주의 종이 되리이다.”

그렇게 된다 할지라도 우리가 다 감수할 정도로 우리는 결백합니다, 라고 자신만만하게 나옵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하는 말이, 조사해보면 될 것이 아니냐, 해서 나이 많은 순서부터 적은 순서까지 조사를 다 해보니까 그 은잔이 베냐민 자루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도둑질을 했다는 혐의를 쓰고 집에는 가지도 못하고 도로 요셉 앞에 끌려오는 대목입니다.

여기에서 형들은 철저하게 요셉이 생각하고 있는 그 세계관에 놀아나고 있는 겁니다. 요셉은 형들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갖고 노는 갑 질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러한 갑 질, 양식을 준다는 빌미 하에 갑 질을 해도 되느냐, 라고 요셉이 장난을 쳐도 좀 심하게 치고 있지 않느냐, 라고 생각할 텐데 지금 요셉이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은 뭐냐?

베냐민 빼돌리기입니다. 베냐민만 집중해서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베냐민에 대해서 형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그 확인하는 방법이 뭐냐? 지금 갑 질을 할 만한 위치에 있는 요셉이 권력을 동원해서 형들을 정신적으로 유린하고 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계시가 갖고 있는 취지가 분명치 않지요. 이런 겁니다. 지금 하나님의 관심사는 뭐냐? 예수님의 복음에 관심이 있어요. 마치 요셉이 베냐민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거기에 꽂혀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에 대해서, 십자가복음에 대해서 관심 있는 만큼이나 관심 있을 경우에만 비로소 하나님 나라에 넣어주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그런데 이 요셉의 형들은 요셉의 그런 취지를 모르고 나름대로의 자기세계관이 형성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자기세계관이라는 것이 과연 전체적인 권력으로 갑 질하는 앞에서 버틸 수 있는 성질의 것이냐를 따져봐야 됩니다. 평소에 인간들은 소소한 일상, 적은 소득, 짧은 사랑, 그런 작은 것들을 가지고 나름대로 버티면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쟁에 관한 역사를 보게 되면, 전쟁에 끌려오기 전의 젊은이들은 자기 고향에서 농부로, 또는 바닷가에서 어부로 단란한 가정을 꾸릴 후보이거나 이미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신혼살림을 막 시작한 사람들이에요. 자기만의 소소한 행복을 가지고, 나는 이것으로 족하다는 식으로 평생을 살려고 버텨보지만 그 국가이데올로기, 국가이념에 여지없이 허물어져 버리지요.

사적으로 갖고 있던 작은 행복도 인도네시아의 해일처럼 거대한 해일 앞에서 아무 소용없습니다. 손님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밴드 연주하다가 일곱 명이 죽었잖아요. 색소폰 불다가, 기타 치다가 뒤에서 물이 덮쳐서 죽었다니까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세상에서 소소한 자기행복에 말려있으면 전체를 파악을 못하고 있는 거예요.

마치 학교 때 미술시간에 그림 그리는 요령을 가르쳐 주지요. 처음에 색을 바로 칠하지 말고 먼저 연필로 스케치를 하고 거기에 크레파스나 물감을 칠하라고 이야기하지요. 그러면 연필 가지고 희미하게 대충 먼저 그리고 색을 칠하면 처음에 그렸던 연필자국은 나중에 물감 밑에서 다 사라지지요.

국가이데올로기를 이념이라 해요. 국가관념, 전체적 관념을 이념, 또는 이데올로기라 합니다. 지금 창세기 44장, 그리고 그 전부터 계속 내내 내려오는 것은 뭐냐 하면, 가뭄 들었다는 거예요. 7년 풍년, 그리고 이어지는 7년 가뭄의 시기에 접어든 거예요. 가뭄에 접어든다는 말은, 이 가뭄 앞에서는 흑인도 백인도 소용없고, 애도 어른도 소용없어요.

그리고 국가권력조차 가뭄 앞에서는 맥을 못 추는 겁니다. 하물며 작은 행복에 매여 있는 이 야곱의 가족도 이 가뭄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너지지요. 지금 형들은 자기가 가뭄 속에 있다는 것은 느끼지만, 그래서 자기의 소소한 행복이 위협받는다는 생각은 본능상 갖고 있지만 어떤 연유에 의해서, 세계를 움직이는 어떤 원리에 의해서 이런 가뭄이 찾아온 것을 몰라요.

그 가뭄과 베냐민과의 생존여부와 관련성이 있다는 것은 더더구나 모르지요. 인도네시아의 해일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누가 알겠습니까? 사람들이 성경을 볼 때에는 그냥 빈 마음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소소한 나의 행복이라도 좀 보장해주세요.’라는, ‘더는 욕심내지 않겠습니다. 작은 행복이지만 그저 무탈하게 인생 조용하게 끝내주시기 바랍니다.’ 하는 작은 기대감가지고 하나님 앞에 잘 보이려고 성경보고, 잘 보이려고 기도하고, 잘 보이려고 헌금하는 거예요.

무슨 크리스마스 그런 것. 제가 유-튜브 강의에서 했어요. 12월 25일을 누가 정했는가? 교회가 정했잖아요. 그러니까 교회는 아예 하나님나라와 결별하려고 작정을 했다고. 하늘나라에, 성경에 크리스마스가 없거든요. 12월 25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걸 정했다는 말은, 이제는 하나님 따로 교회 따로 놀겠다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우리 교회만의 소소한 행복이 푹 잠겨서 재미있게 놀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교회단위대로, 국가는 국가단위대로, 가정은 가정단위대로 우리가 지금 누구의 희생과 누구의 은총과 누구의 은혜덕분에 살아가는가는 몰라요.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어떤 큰 권력이 해일처럼 밀어닥치면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요.

“살려만 주이소.” 형들은 우리의 보통 인간들의 일상의 모델이 되는 사람들이라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이 사람들이 양식을 사러 왔습니다. 배곯는 식솔들을 살리기 위해서 온 생존차원쯤으로 생각하는 일반인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런데 이 요셉은 그들이 원하는 아주 작은 소망을 그냥 들어주면 되잖아요. 왜 이렇게 약을 올리고 왜 이렇게 못살게 구는 겁니까?

우리가 그런 요셉에게 “왜 당신은 그렇게 형들을 괴롭힙니까?”라고 하면 요셉은 이렇게 이야기할 거예요. “이게 힘의 위력이다.” 이게 힘의 위력이에요. 다시 말해서 인간들이 소소한 자기만의 작은 행복을 가지고 ‘이것만으로 족합니다.’하고 겸손 떨지만 사실은 그것은 엄청난 힘의 복속되어 있다, 종속되어 있고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구원이라 하는 것은 바로 거기서 빼내주는 거예요. 그런데 형들은 빼내진다는 생각보다도 이 대로만 살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거예요. 교회 오는 사람들의 기본 마음가짐이 ‘살려주세요.’라는 거거든요. 그런데 이 강단에 사도들이나 사도바울이나 예수님이 섰다면 “죽어도 부활이 있잖아.”라는 식의 설교를 하는 거예요. 죽어도 상관없잖아, 라는 식으로 설교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이 갑 질에서부터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기 때문에 그래요. 목숨가지고 협박하고 공갈치고 있는 것이 누구냐 하면, 악마에요. 마귀가 그 짓하고 있다고요. 히브리서 2장 11절에서 15절에 보면 나와요. 죽기가 무서워서 종노릇한다고. 종이란 노예거든요. 죽는 것이 무서워서 죽음의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거예요.

거기에 대처하는 인간 나름대로의 대처방식이 뭐냐 하면, “살려만 주이소”에요. 살려만 주세요. 제가 지난 오후설교에서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죽으면 죽으리라, 그렇게 나와도 급한 일 나오면 핸들 확 꺾어버린다고요. 인간의 타고난 본성입니다. 하나님이고 예수고 복음이고 십자가고 없어요.

“아이고,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일단은 숨 쉬고 살고보자는 식으로 휙 꺾어버려요. 인간은 자기본성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동안 수십 년 교회 다니면서 알았던 그 복음, 신학, 그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 소용없어요. 어제가 크리스마스라 신나게 놀았지만 오늘은 크리스마스 아니거든요.

복음 알아도 하루만 지나면 다시 원상복귀 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니 형들에게 형들이 원하는 소원대로 들어줘버리면 그 사람은 영원히 악마의 종이 되는 거예요. 그걸 누가 아느냐? 요셉이 알고, 그걸 누가 아시느냐? 주님이 아시는 거예요. 주님이 자기백성 빼내는데 실패할 분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정작 주의 백성이라는 사람들은 이대로 좋사오니, 라고 버티기에 들어가는 겁니다. 따라서 요셉이 형들에게 가서 자꾸 테스트를 하는 것은, 형들로 하여금 반항 아닌 반항을 하는 속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폭로시키는 겁니다. 우리 보기에 요셉이 참 못됐어요. 못됐지만 궁지에 몰아넣어서 기어이 반발, 반항이 어떤 성질로 나타나는가를 보편화시키는 겁니다.

어렵지요. 쉽게 말하면, 사람은 그냥 좋은 것이 좋다고 누구나 안 건드리면 다 점잖아요. 좋은 말 하는데 당연히 점잖지 성내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음주 운전하는 차 세워서 “기분 좋아서 술 자셨으니까 조심해서 운전하시고 집에 가서 편히 주무세요.” 하면 어떤 운전다도 인간성 다 좋아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조심조심 몰아서 집에 가겠습니다.” 이렇게 합니다.

그런데 “부세요. 더, 더!” 하면 화내요. 자기가 술 먹은 것은 생각도 안하고 화를 낸다 그 말이지요. 건드리면 화내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내 것 건드리면 반항하게 되어 있다고요. 그 본색을 요셉은 강제적으로 끄집어내는 겁니다. “반항해라. 그런데 반항할 수 있는 힘이 너한테는 없다. 왜? 이미 가뭄이 들었다.”

그리고 네가 양식 사러 온 나라가 애굽나라라는 말이지요. 형들이 요셉이 예뻐서 굽실거리는 것이 아닙니다. 양식 갖고 있다는 그 소유성, 그 전체성, 그 절대적 권력, 자기목숨 줄이거나 동아줄 같은 것, 그게 있기 때문에 한껏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는 거예요. 요셉의 형들이 사는 곳이 풍년 들었다 치면 그렇게 굴욕적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아무리 잘난체를 해도 권력 앞에서는, 큰 힘 앞에서는 비굴한 존재가 되는 거예요. 요셉은 말합니다. “형들이여, 당신들은 그렇게 살아왔잖아요.” 지금 그렇게 살아가고 있고 또 그렇게 살아왔다는 거예요. 아무리 스스로 자기의 자존감을 내세워도 양식 떨어지면 천하에 비겁한 자가 되어버립니다.

친구, 애인사이, 부부사이, 아무리 해도 자기 손해나는 일이 생기면요, 나오는 것은 오직 배신밖에 안 나와요. 여기서 형들은 무슨 사실을 알아야 되느냐 하면, 사는 것이 정상이 아니고 지금 안 죽은 것을 이상스럽게 생각하는 발상을 해 볼 필요가 있어요. 가뭄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가뭄이 안 들었다는 것을 좀 낯설게 보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지금 살고자 하니 악마의 종이 되잖아요. 그런데 발상을 바꿔보세요. ‘내가 안 살아도 되는데.’라고 생각을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뭐가 생기느냐 하면, 비로소 사람이 사는 이유가 생기고 의미가 발생돼요. 그냥 사는 것이 당연하고, 살아야 당연하다고 하면 그것은 아무런 이미도 없고 이유도 없어요.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냥 짐승 사는 것과 똑같이 된다 그 말이지요. 요셉이 형들에게 테스트를 하는 이유는 제가 아까도 이야기했습니다. 형들이 아무리 양식을 얻어서 살고자 해봐도 현재 상황 자체가 거대한 권력이념, 애굽에 갇혀 있고, 그리고 밥 먹고 살아야 된다는 너무나 당연해보이지만 이것이 거대사고방식이거든요, 여기에 갇혀 있을 때에 인간이 어느 정도로 비굴하게 되는지, 자기가 하는 말도 자기가 책임지지 못하고 나중에는 본인의 말도 본인이 부정해야 될 정도로 나약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형들에게 깨우치고 있는 겁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올 때에는 요셉처럼 와요. 요셉처럼 온다는 것은 늘 테스트를 한다는 거예요. 늘 테스트를 하는데 어떤 차원에서 테스트를 하느냐? 우리 자신이 거대권력 앞에서 꼼짝 달싹도 못하는 가련한 처지에 놓여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만드는 테스트를 하나님은 하시는 겁니다.

이런 테스트를 통해서 주께서 찾아오시는데 그 찾아오시는 그것을 통해서 무슨 결과가 생기느냐? 새로운 노선이 주님에 의해서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세요. 그동안 형들은 형들이 사는 방식을 고집했습니다. 이것이 내 인생의 노선이라고 우기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그 노선이 궁지에 몰려버리면 그 노선 가지고는 대책이 없지요. 그냥 비굴해지는 것밖에 없어요.

다시 말씀드리면, 전체 앞에서 나는 내가 갖고 있다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는 거예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순박하게 촌에서 농사짓는 사람, 저 독일에서 2차 대전 일으켜서 “너 군대에 와” 하면 군대 가서 개죽음 당하는 거예요. 농사지어서 우리 가족끼리 행복하게 살겠다는 소소한 개인적인 꿈은 순식간에 다 날라 가버리는 겁니다. 그게 권력의 힘이에요.

요셉이 형들에게 찾아와도 마찬가지에요. 양식을 갖고 있던 애굽의 힘이 형들이 희망하는 작은 행복마저 무참하게 짓밟을 수 있다는 것을 지금 계속해서 형들에게 압박해 오는 겁니다. 당신들이 양식 얻고 집에 가서 맛있게 먹겠다는 그것에 대해서 요셉이 그냥 두지 않고 “다시 돌아와!” 일부러 자루에 은잔을 집어넣는 모함을 해서 집에 못 가게 만들고 다시 요셉 근처로 오게, 요셉의 힘의 권한 밖으로 못나가게 만들어버려요.

요셉이 형들에게 뭘 주느냐 하면, 형들에게 그들이 생각하는 목숨의 유지, 목숨을 주고자 함이 아니라 요셉은 복음을 주고자 하는 겁니다. 이 복음은 뭐냐 하면, 형들에게 새로운 노선을 발견케 하는 거예요. 새로운 노선에 들어오게 하는 겁니다.

그 노선이 뭐냐 하면, 형들에게 버림받은 요셉이 긴긴 인생을 살면서 만들어진 노선이에요. 요셉이 만든 것은 아니지요. 요셉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꿈에 의해서 만들어진 그 노선에 지금 형들을 편입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면 그 노선은 어떤 노선이냐? 그 노선은 언약의 노선이고 하나님의 약속안의 노선이고, 그것은 신약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 됨의 철저함.

하나님의 아들 됨에 대해서는 가뭄 들면 그저 빌고, 풍족하면 까불고, 그렇게 우왕좌왕하는 그것이 아닙니다. 철저함이라 하는 것은 어떤 환경,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하나님의 아들 됨에 대해서는 하자 없게 하는 그 원리가 적용되는 노선, 그것이 지금 요셉이 형들에게 다가가는, 세상을 다루는 원리입니다.

그 원리 앞에 형들이 지금 놀아나고 있어요. 철저하게 놀아나는 겁니다. 그 놀아나는 목표가 뭐냐? 요셉은 어디서 그 포인트를 잡느냐? 내 동생 베냐민 잘 있느냐, 가 포인트가 됩니다. 요셉은 베냐민이 전의 요셉처럼 그렇게 서러운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니고 제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동생으로서 대우받는지, 온통 관심이 베냐민에게 있는 거예요.

베냐민을 잡아두려고 하는 겁니다. 베냐민을 빼돌리려고 하는 거예요. 오늘 제목이 ‘베냐민 인질삼기’잖아요. 그런데 안 빼앗기려고 하니까 요셉 입장에서는 억지로 모함해서 베냐민을 그냥 빼돌릴 수밖에 없어요.

자, 요셉이 자기가 염두에 두고 집중하는 베냐민을 빼돌렸을 때에 그 빼돌린 사건을 통해서 다른 형들이 요셉이 베냐민을 극진히 아끼는 마음만큼이나 과연 형들도 요셉처럼 극진히 아끼는 마음이 있는지를 확인해 보려고 의도적으로 은잔을 베냐민의 자루에 집어넣은 겁니다.

자, 이것은 오늘날 신약에 와서 똑같이 적용됩니다. 언약의 원리는 반복해서 완성됨이기 때문에 그렇지요. 하나님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모든 관심사가 다 예수님 안에서 통일되게 하심이에요.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얻는데다 하나님은 모든 힘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

그리고 악마는 모든 힘을 오직 그것을 저지하는데 소모했어요.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얻는 그것을 저지하는데 악마는 혼신의 힘을 다합니다. 악마가 인간에게 그동안 양육하고 교육했던 것은 뭐냐 하면, 행함으로 네가 구원받는다는 말입니다. 선행은 믿음도 소망도 다 행함으로 나와요. 행함으로 나온 믿음 소망 사랑으로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네 구원은 네가 알아서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요셉의 입장에서는, 형들이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에요. 베냐민에 대해서 형들은, 요셉이 동생 베냐민을 생각하는 만큼이나 같이 생각하고 있느냐는 그 여부를 보는 거예요. 그게 구원의 노선입니다. 그렇게 되면 요셉 입장에서는 형들의 행함이나 형들의 목숨 같은 것은 아예 받지도 않아요.

이념과 신앙의 차이점은 뭐냐? 이념이라 하는 것은 죽기 싫어서, 죽지 않기 위해서,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 매달리든지 노력하는 그것이 이념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죽음을 경유한 자만이 내 비칠 수 있는 것이 신앙입니다. 더 쉽게 말씀드리면, 살아야 되겠다는 의지의 반대말이 뭐냐? 죽어야 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기어이 살아야 되겠다는 의지의 반대말은, ‘의미 없다’에요. 이미 죽었다는 겁니다. 이미 죽은 놈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러니까 형들은 베냐민만 봐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베냐민을 이용해서 양식을 얻어서 어떻게 밥 먹고 사느냐, 또 아까 창세기 44장에서 10절까지 본 것처럼, “우리는 나쁜 짓 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돈도 도로 가져왔잖아요. 이정도면 우리가 주인님의 은잔을 훔칠 의사가 없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이러쿵저러쿵, “이러니까 우리는 정당하고, 우리는 결백합니다. 우리의 순수한 마음은 결코 당신을 해코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해봤자 요셉의 관심사는 형들이 얼마나 착하고 훌륭하냐를 보는 것이 아니고 내가 아끼는 베냐민에 대해서 너도 같이 나와 동일한 마음으로 볼 수 있느냐를 보는 거예요.

형들이 요셉의 베냐민을 보는 것처럼 형들이 베냐민을 볼 수 있는 마음이 어떻게 들겠습니까? 들지 않지요. 그러니까 현재 요셉이 형들을 뺑뺑이 돌리는 겁니다. 한번 잃어버려 봐야 돼요. 잃어버림. 가장 귀한 것을 잃어버려보라는 겁니다. 지금 요셉의 형들은 식겁하고 있어요.

왜 식겁하느냐? 유대를 대표로 하는 여러 형들은 지금 고향에 계신 아버지에게 장담했습니다. 뭐라고 장담했느냐? 하나님은 바르게 사는 사람 편에서 도와주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게 세상을 모르는 거예요. 세상은 바르게 사는 사람이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었는가, 거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구원받는 사람이에요.

사람들은 뭔가 자기가 내세울 것이 있으면 꼭 무엇과 결부를 시키느냐 하면, 내가 열심히 하고 바르게 하고 정직하게 한 것과 현재 자기의 결과를 연결시켜요. 바르게 살고 정직하게살고 훌륭하게 했기 때문에 이 정도 복을 누릴만한 자격자가 됩니다, 라고 자기 자신을 내세우거든요. 이게 요셉의 형들이 현재 갖고 있는 위치입니다.

그런데 인도네시아 해일가운데서 도둑놈만 다 죽었습니까? 죽은 사람 가운데 기독교신자가 없겠어요? 베들레헴의 두 살 밑의 애들 죽은 그 부모들은 통곡했는데 애들이 태어나면서 무슨 죄가 있다고 하나님이 다 죽이십니까? 자기 아들의 죽음, 두 살 아래의 사내아기들의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과 결부되어 있는 공동체가 라헬, 이스라엘, 참된 새로운 이스라엘의 본질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재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 돈이 중요하다, 목숨이 중요하다 하지만 악마로부터 교육을 받은 우리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뭐냐? 자기정당성이에요. 자기정당성. 사람이 자살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자기정당성이 있다고 우기기 때문에 자살하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려서,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정당성을 키우겠다는 것이 뜻이 아닙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복음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관심 갖고 있는 것이 이제부터는 너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 되어라, 이 작업에 주께서는 나서시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아주 마구마구 반항하지요. 저항합니다. 아주 극렬하게 버팁니다. 이것 없으면 못산다고. 그럴 때는 주님이 어떻게 하느냐? 우리의 정당성을 가지고 장난질을 쳐버려요. 테스트를 해버립니다. 그 정당성이 아무런 의미가 없고 아무 쓸데가 없는 것이라는 것을 본인이 느끼게 하는 일들을 일으킵니다. 인생을 통해서.

나 열심히 살았고, 정직하고, 훌륭하고, 조심스럽게 살았고, 남에게 해코지 않고 살았다는 이것이 내 존재의 이유가 아니라는 것, 나 잘났다는 자랑질을 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복음을 증거 하라고 태어났다는 것의 그 안목을 아는 사람만이 철저하게 확정됨 아들 됨의 안목입니다.

요셉은 자기가 버림받았지요. 가장 소중한 것 다 잃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잃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꿈의 계시가 그동안 잃었다고 아까워할 것 같은 그것보다도 훨씬 더 소중하게 애굽을 움직이고, 자연세계를 움직이고, 가뭄을 움직이고, 풍년을 움직이고, 흉년을 움직여서 형들에게 내가 느꼈던 이 언약의 진수를 그들에게 공급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나를 사용했다는 것을 요셉은 알지요.

그 핵심은 뭐냐? 베냐민이 잘 있느냐. 자기의 동생 베냐민은 오늘 이 본문에서, 이 시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냥 소박하게 살면 행복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무지함을 가만두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예수님 십자가 보다 나의 행복을 우선시 하는 이 타고난 본성을 여지없이 좌절시켜 주시고 하나님의 아들 되는 코스로 이끌어주시니 이 모든 것이 십자가에서 하는 능력인 것을 깨닫게 해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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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09 자유게시판 8강-엡 1장 15-18(사도의 기도)190106-이 근호 목사 에베소서 최고관리자 19-01-07
17,108 자유게시판 218강-여호수아 11장 6~9절(병거와 말 뒷발)20190106-이 근호 목사 여호수아 최고관리자 19-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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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06 자유게시판 171강-창 44장 30-34절(유다의 희생)190102-이 근호 목사 창세기 최고관리자 19-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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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02 자유게시판 광주강의20181228a 마가복음13장 9-13절(자기 조롱)-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19-01-01
17,101 자유게시판 7강-엡 1장 13-14(구원상태)181230-이 근호 목사 에베소서 최고관리자 18-12-31
17,100 자유게시판 217강-여호수아 10장 40~43절(더불어)20181230-이 근호 목사 여호수아 최고관리자 18-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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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람 ➜ 자유게시판 170강-창 44장 9-13절(베냐민 인질삼기)181226-이 근호 목사 창세기 최고관리자 18-12-27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