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강-창 43장 27-34절(베냐민의 개입)181219-이 근호 목사
169강-창 43장 27-34절(베냐민의 개입)18121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3장 27-34절입니다. 구약성경 69페이지입니다.
창 43:27-34
“요셉이 그들의 안부를 물으며 가로되 너희 아버지 너희가 말하던 그 노인이 안녕하시냐 지금까지 생존하셨느냐 그들이 대답하되 주의 종 우리 아비가 평안하고 지금까지 생존하였나이다 하고 머리 숙여 절하더라 요셉이 눈을 들어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 가로되 너희가 내게 말하던 너희 작은 동생이 이냐 그가 또 가로되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 요셉이 아우를 인하여 마음이 타는듯 하므로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얼굴을 씻고 나와서 그 정을 억제하고 음식을 차리라 하매 그들이 요셉에게 따로 하고 그 형제들에게 따로 하고 배식하는 애굽 사람에게도 따로 하니 애굽 사람은 히브리 사람과 같이 먹으면 부정을 입음이었더라 그들이 요셉의 앞에 앉되 그 장유의 차서대로 앉히운바 되니 그들이 서로 이상히 여겼더라 요셉이 자기 식물로 그들에게 주되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오배나 주매 그들이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더라.”
기어이 베냐민을 빼내는데 성공했습니다. 그 과정이 창세기 43장에 길게 나열되어 있는데 우리보기에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길게 나열한 것같이 느껴지고, 이것은 생략해도 되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그 생략할 만한 내용이 뭐냐 하면, 돈 문제였습니다.
그들이 시므온을 볼모로 잡히고 양식 들고 전에 자기들이 치렀던 돈도 도로 받아서 아버지에게 오면서 그들이 늘 걱정했던 것은 뭐냐? 값을 정당하게 치르고 양식을 사면 당당한데 그렇지 않고 돈도 되돌려 받고 양식도 얻었으니까 이것이 또 하나의 우리를 괴롭히는 빌미가 되지 않을까, 하는 그 점이 형제들에게 굉장히 걱정이 된 거지요.
그래서 그들이 요셉에게 다시 양식을 사러가면서 제일먼저 한 것은 뭐냐 하면, 구구절절 자신들의 결백을 이야기합니다. “사실은 우리가 돈을 훔친 것이 아니고 행정이 잘못되었는지 양식꾸러미를 열어보니까 우리가 지불했던 그 돈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걱정스럽습니다.”라고 하니까 요셉의 청지기가 이렇게 말합니다.
“아저씨들, 그것 때문에 걱정하지 마세요. 그 돈은 우리가 그냥 드린 겁니다. 그리고 그 돈은 이미 받은 것으로 치겠습니다.”라고 나온 거예요. 그러고 난 뒤에 그동안 볼모잡았던 시므온을 다시 형제들과 합류시켰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등장해서 자기 아버지죠, 노인의 안부를 묻는 대목에 우리가 도달했습니다.
자, 이 대목에서 성경이 길게 이야기하는 것은 형들이 여전히 요셉에게는 이질적 존재가 된다는 겁니다. 이질적 존재가 된다는 것은, 요셉이 원하는 것은 베냐민이 나 같은 꼴이 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갖고 있는 거예요. 요셉은 어떤 일관성을 찾고 있는데 그 일관성, 동질이라 하는데, 처음자리의 일관성을 요셉은 계속해서 살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이 전에 있었던 그 상황에 베냐민도 같은 신세, 같은 운명, 같은 처지에 있었거든요. 동일한 구조에 있었다는 말이지요. 동일한 구조에 있을 때에 요셉 본인은 형들에게 미움 받아서 팔렸거든요. 그런데 그 동일한 구조에서도 베냐민은 어떤 처지에 있었을까, 라는 것을 제일먼저 궁금해 했었습니다.
이것은 베냐민을 다른 형제들과 특별하게 특화시키는데 그 이유가, 베냐민이 죽었던 요셉인 자신을 대신해서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전에 자기가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는 그 이유 때문에 형들에게 미움 받아서 팔려갔듯이 이제는 재차 그런 사태가 또 동생에게 일어나지 않았는가를 걱정하고 있는 겁니다.
요셉은 이렇게 보면서, 베냐민 자기 아우가 멀쩡하게 있었다는 것이 제일 먼저 반가웠습니다. 30절, 31절에 보면 “요셉이 아우를 인하여 마음이 타는듯 하므로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얼굴을 씻고 나와서 그 정을 억제하고 음식을 차리라 하매.” 이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형제들을 순서대로 죽 앉혔습니다. 자, 이런 점에 대해서 33절 끝에 형들이 뭐라고 하느냐? “이상히 여겼더라.”라고 되어 있어요.
이게 바로 오늘 설교의 핵심이 되는 겁니다. 동일한 상황에 대해서 형들이 이상하게 여겼다는 것에 대해서 요셉은 그것이 순조롭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상하지요. 이 말은 뭐냐? 베냐민은 중립이고요, 형들의 사고방식과 요셉의 사고방식이 같지 않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형들의 관습은 뭐냐? 정의로움과 복수개념으로 점철되어 있는, 그것으로 가득 차 있는 현실관이었습니다. 우리가 돈을 지불하고 정당한 양식을 받아야 될 텐데 돈을 멀쩡하게 되가져왔기 때문에 우리가 만나는 저 양식 파는 분이 우리에게 가혹한 처벌을 내리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는 그 사고방식이 상식화되어 있는 세계, 그것은 정의로움과 복수개념으로 가득 차 있는 세계에요.
그러나 형제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이지만 요셉 보기에는 매사가 아주 순조로운 거예요. 순조롭다는 것은 뭐냐 하면, 너희들이 어떤 짓을 해도 괜찮고, 어떤 잘잘못과 상관없는 새로운 세계를 요셉이 지금 지니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요셉의 생각과 형들의 생각의 차이를 두는 이유가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 믿고, 하지만 기존의 너는 어디에 지금 두 발을 딛고 있는가를 보는 거예요.
그것은 ‘나는 제대로 살고 바르게 살게 되면 나는 정의로운 사람이 되고, 거기에 대한 처벌은 줄어들 것이고, 오히려 나에게 복이 올 것이다.’라는 그것이 형들의 세상관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거예요. 그런 세상관의 입장에서 주님의 계시와 함께 있던 요셉의 모든 행동들을 보게 되면 내 쪽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안하고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해요. 오늘 본문처럼. ‘참 이상하네.’
자꾸 생각하는 것이 뭐냐 하면, “우리가 돈을 도로 가져온 것은 내 잘못 아닙니다. 우리는 정당하게 행동했습니다.” 즉 ‘정당합니다.’와 ‘정당하지 않습니다.’의 어떤 나름의 대비를 해야만 겨우겨우 살아가는 세상이라고 여기는 그 세상. 요셉이 전에는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요셉이 새롭게 경험하고 체험한 세상은 그게 바로 가짜라는 겁니다.
어렵게 이야기할게요. 요셉은 두 개의 자아를 발견했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 가짜요셉과 진짜요셉을 발견한 겁니다. 진짜 요셉은 베냐민이에요. 가짜 요셉은 옛날의 형들 같은 사고방식이 가짜요셉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있으면서 그 하나님의 주특기는 뭐냐?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몸이 하나밖에 없으면 이게 가짜라는 생각을 못합니다. 가짜라는 생각을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뭐냐? 나름대로 정당해야 된다는 그것만이 유일하게 우리의 삶의 목표가 되어버린 거예요. 조금이라도 정당해야 천국 간다. 여기서 더 나쁜 짓을 하면 지옥 간다.
그런데 요셉입장은 그게 아니고, 그 따위 사고방식 그게 지옥 가는 거예요. 정말 인생의 성공이라 하는 것은 악마로부터 벗어날 때 인생성공입니다. 악마에게 발목 쥔 것이 뭐냐 하면, 훌륭해야 되고, 착해야 되고, 선해야 된다는 것, 그래서 지금 있는 너의 가치가 계속 개선된다는 겁니다. 왜? 하나밖에 없는 네 몸을 갖고 있기에 그렇다는 거예요.
그 비슷한 취지가 아까 불렀던 찬송가에 나옵니다. 아마 이 찬송가가 1904년도에 작곡한 것인데요. 이 찬송가 지은 지가 백년이 넘지요. 114년 동안 이 찬송가가 사람들에게 구라를 친 거예요.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하잖아요. 이 ‘너’가 하나밖에 없는 ‘나’일 경우에는 이게 은혜가 돼요.
그런데 내가 가짜라면, 이게 버릴 패라면 지금 엉뚱한 것을 쥐고 있는 거예요. 이게 마귀의 장난에 우리가 속아 넘어 간 거예요. 놓아야 될 것을 못 놓고 지켜달라는 거예요. 왜? 다른 자아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셉이 베냐민을 만나는 것은 진짜 나와 가짜 내가 만나서 교체를 하게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베냐민은 아무것도 한 게 없기 때문에. 아버지의 사랑, 그 사랑도 자기 사랑이 아니지요, 잃어버린 요셉을 대신해서 듬뿍 받는 사랑 안에서 아무 업적이나 실적도 없이 멍청하게 그냥 산거예요. 전에 아브라함언약 할 때, 이삭을 통해서 자기자신이 아브람이 아니고 아브라함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이삭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부활이라고 하거든요. 가짜가 죽고 진짜가 부활되는 이것이 일관된 하나님의 언약인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 꽂혀야 되느냐 하면, 가짜 나에 미련두지 말고 진짜 자아에 꽂혀야 됩니다. 진짜 자아는 누가 만들었느냐?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주께서 따로 준비해 두신 거예요. 그래서 여호와 이레에요.
이걸 쉬운 말로, 꽃은 꽃병이 있을 때 똑바로 섭니다. 꽃병이 없어버리면 꽃은 테이블에서 쓰러져야 돼요. 쓰러진다고 하니 생각나는 것이, 김 종환의 2절에 보면, 너무나 쓰러져서 피곤해서 잠이 들었다는 대목이 나와요. 그 노래가 30년 전에 나왔는데 그 노래 듣고 너무나 동감했던 것이, 직장생활 하는 사람이나 사업하는 사람이나 특징이 뭐냐? 집에 오게 되면 쓰러져 잠을 자는 거예요.
하나밖에 없는, 놓지도 못하는 이 몸뚱이, 이 몸뚱아리, 개 같으면 사료나 주지요. 내가 나를 안 살리면 안 되니까, 이걸 살리려고 하니까 내 몸이 얼마나 피곤한지. 아무 다른 짓도 못해요. 집에 오면 tv 켤 힘도 없어서 그냥 쓰러져 잠이 드는 거예요. 그것도 매일같이. 아프니까 청춘이라고요? 그러면 40대나 50대도 청춘이겠네요.
매일같이 아파요. 아침에는 그냥 나가는 것이 아니고 기어나가지요. 기어나갔다가 진 다 빼고 돌아와서 컨디션, 그거 먹어도 안 되고, 박카스 먹어도 안 되고, 그냥 쓰러져 자는 거지요. 왜 쓰러지는가? 꽂을 데가 없으니까. 꽃병이 없어요. 성경 골로새서 3장 3절이 있습니다. 이런 대목이 나와요.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성도라면요, 성도라면 관심사가 어디에 꽂혀야 되느냐 하면, 하늘나라 금고에 꽂혀야 돼요. 그 금고의 비밀번호 아세요? 십자가입니다. 잘 외워놓으세요. 십자가를 가지고 그 금고를 열면 그 안에 진짜 나를 미리 여호와이레, 준비해서 보관을 해놓았어요.
이것은 악마의 권세나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 이런 것에 전혀 손 타지 않는 곳에 집어넣어놨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그것을 보고 있는 나는 뭐냐? 나는 가짜지요. 진짜가 있는데 가짜는 좀 망가지면 안 됩니까? 마태복음에 혼인잔치 이야기가 나옵니다. 혼인잔치에 음식이 가득하다 했어요.
그런데 오늘날 성도라고 우기면서 왜 라면 퉁퉁 불어터진 것 가지고 불평하고, 왜 쓰레기통 뒤져가면서 그것 먹고 살려고 “주여, 더 주옵소서, 주시옵소서.” 해 가면서, 새벽기도하고 금요철야 기도하면서, 왜 버릴 패에다가 그렇게 집착하고 미련을 갖는 겁니다. 그것은 이전 찬송가 432장 때문에 그래요.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이거 114년 속았으면 이제는 여기서 좀 자유로울 수 있어야 돼요. 이거 비슷한 노래가 “You raise me up” 우리를 주께서 높은 산에 두게 한다는 겁니다. 모든 가스펠송, 모든 찬송가가 가만 보면 하나님의 일을 몰라요. 언약을 몰라요. 언약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부활이라는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부활은 뭐냐 하면, 가짜 죽이고 주께서 진짜 만드는 것이 제시된 것이 부활이잖아요. 지금 요셉 이야기부터 부활, 재림이야기가 다 나오는 거예요. 어떻게 구원받는가? 지금 구원문제에 멈추면 안 됩니다. 죄용서, 구원문제에 멈추면 안 되고 주님의 스케줄이 다 되어 있어요. 요셉의 그 긴긴 인생 그 안에 십자가, 부활, 재림이 다 들어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지금 형들은 당황스러워하거든요. 요셉은 느긋합니다.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놀리고 있어요. 놀리고 있는데 베냐민을 볼 때 진짜 하나님이 꽃병에 꽂아 놓은, 다시는 고생할 필요 없는……, 국무총리가 고생을 안 하는 것이 아니에요, 베냐민이 고생을 안 하는 거예요.
베냐민, 가짜 나 때문에 횡재한 자가 베냐민이에요. 베냐민이 나에요. 왜? 같은 라헬에서 나온 형제들이니까. 라헬이라는 엄마 밑에 바꿔치기 할 두 개의 모델이 언약에 의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하나는 버릴 패, 또 하는 버릴 패에 의해서 얻어진 새로운 자아상.
요셉이 베냐민을 보면서 울었던 것은, 내가 나를 만난 거예요. 왜? 같은 엄마소속이니까. 우리가 같은 주님 믿잖아요. 같은 주님 믿으면 그 주님이 준비한 두 개의 자아상도 우리가 수긍해야지요. 인정해야 됩니다. 참, 뭔가 지키려고 하니까 가짜신앙으로 들통 다 나잖아요.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개 밑에 거하라.”
안 그래도 돼요. 버릴 패니까.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아무 때나 어디서나 우리를 버리십니다. 버리고 다시 찾는 그런 경우는 딱 하나의 주체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언약에 속해서 이 땅에 왔기 때문에 죽이시고 다시 찾으십니다.
그러나 아담은 이미 창세기 3장에서, 너는 이미 죽은 존재에요. 아담은 흙이라는 말이지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 했잖아요. 그것은 예수님에게는 해당되지 않아요. 우리가 지금 만지고 있는 이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에요. 따라서 우리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일관성에 비춰서 마땅한 겁니다.
요셉이 국무총리 되었다고요? 요셉은 언약적 입장에서 형들이 팔아넘겼을 때 야곱의 말이 맞아요. 야곱에 있어서 요셉은 이미 죽은 자입니다. 저는 많은 주석이나 책을 봤고 특히 주석책보다 더 많은 설교를 들었어요. 그 설교가 뭐냐 하면, 요셉이 고생한 뒤에 낙을 얻었다는 그 테마로 이야기해요.
이제는 그거 아닌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고생 뒤에 낙이 오는 것이 아니에요. 고생 속에 낙이 와요. 고생과 역경 속에 둘러싸이지 않으면 낙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고생과 역경 속에서 비로소 낙을 발견합니다. 왜냐하면 기존의 나를 쥐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고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
제발 버릴 패는 버리세요. 어떻게 버리는가?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너무 선하지 마시고 너무 착하지 마시고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마세요. 사람이 뭔가 잘하려고 한다면 그 잘했던 일에 대해서는 못 놔요. 왜? 너무 성과가 크니까. 참, 내 자식이 그 어려운데 취직했다. 대단하지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못 놓는 거예요.
“재수 좋아서 아는 문제 나왔겠지요.” 이렇게 넘기면 되는 거예요. “엄마, 나 또 성적 올랐어.” “선생님도 참 운 없다. 네가 알아맞히는 문제만 냈으니 너에게 다 걸렸구나.” 이렇게 넘겨야 된다 이 말이지요. “내 자식 최고다. 내 아들 최고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남들이 “애들 공부 잘하대요.” “내 아들이에요.” 할 때 그 나, 나를 놓지를 못해요.
내가 버릴 패가 아니라 음식쓰레기의 구정물에 손 넣는 것과 똑같은 짓을 하는 거예요. “그 자식이 내 자식이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정리가 필요한데요. 형들은 요셉이 하는 일을 굉장히 이상스럽게 여겼다 했지요. 형들에게는 두 개의 자아가 없어요. 자기 몸이 전부입니다.
따라서 아버지가 요셉을 사랑하니까 형들이 굉장히 기분 나빴잖아요. 기분 나빴으니까 어떤 대책을 내놓는다는 것이 요셉을 자기 눈앞에서 사라지게 만드는 겁니다. 요셉이야기 처음에 나오는 거지요. 그렇다면 이것을 어디에 적용시키느냐? 예수님에 대해서 밀어내고, ‘내가 중요하지 예수 당신이 더 중요하지 않아.’라고 밀어냈던 그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을 하나님께서는 형들을 통해서 미리 앞당겨서 보여준 거예요.
형과 요셉, 베냐민, 아버지, 이러한 하나의 세팅된 연극 같은 겁니다. 이게 이스라엘 역사부터 저 마지막 십자가까지 굴러갔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등장인물의 역할이 어울리면서 십자가까지 완성이 되고 십자가 이후에 그 세팅된 것이 우리 맘속에 확 들어왔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우리는 어느 편이냐 하면, 형들의 사고방식이 우리와 똑같은 거예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벌이고 예수님이 벌인 일에 대해서 우리는 굉장히 이상스럽게 생각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우리는 그렇게 생각 안하는데요.’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
그러나 복음을 전하게 되면 ‘우리가 그러면 어떻게 행하라는 말인가?’라고 내가 어떻게 행해서 현재 내가 붙들고 있는 나, 하나밖에 없는 자아가 어떤 괜찮은 결과를 도출할 것인가, 또는 결과를 품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그 자체가 요셉의 형들이고요, 그 형들의 모든 사고방식, 그게 중요해서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그들의 사고방식은 자기정당성이에요.
이 땅에서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게 되면 복이 오고 나쁘게 살게 되면 벌을 받는다는 선악구조에 완전히 매여 있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렇게 매여 있는데 어떻게 이들이 구원을 받는가? 그들의 사고방식이 정의와 복수개념, 보복개념으로 무장되어서 ‘날 건드리면 죽인다.’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 사랑을 빼앗아가는 것이 나의 적이 되기 때문에 그들은 요셉을 야곱 입장에서, 아버지입장에서 볼 때 그냥 죽여 버린 거지요.
그렇게 요셉이 팔려간 것인데 그렇다면 우리 자신이 자신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기가 하나님 보시기에 이질적인 것을 모르고 자꾸 착각하기를 ‘하나님 생각과 내 생각이 동질’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이렇게 밀어내는 분이 계셔요. 밀어내는 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요셉이거든요.
말을 쉽게 하기 위해서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질문할 테니까 속으로 답변해보세요. 허공 속을 헤엄치는 것이 수월합니까, 아니면 물속을 헤엄치는 것이 수월합니까? 수영은 잘 모르겠지만 이것은 분명히 허공이 수월할 거예요. 그러면 물속을 헤엄치는 것이 수월합니까, 낙엽 속을 헤엄치는 것이 수월합니까? 말할 것도 없이 낙엽 속에서가 힘들겠지요.
요셉은 버림받았으니까 허공 속을 살았겠다고 하지만 요셉이 갔던 그 길은 마치 낙엽이 이만큼 쌓인 속에서 억지로 앞을 트기 위해서 운동화로 밀어내듯이 헤치면서 가는데 얼마나 장애요소가 많겠습니까?
주님이 가신 길은, 우리가 허공이라고 여겼던 것이 사실은 허공이 아니라 기어이 천국 가지 말라고 인간들을 큰 힘으로 밀어냈던 그 힘을,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예수님 홀로 그 낙엽 같은, 인간이 도저히 뚫을 수 없는 것을 몸소 뚫으면서 나아가신 거예요.
나가신 그 분이 성령으로 올 때는 어떤 모습인가? 나가시면서 그 신체성이 온 군데가 다 망가졌어요. 피 묻은 신체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올 때 어떤 모습으로 찾아오느냐? 성령으로 찾아올 때, 성령은 십자가지신 분의 영이니까요, 십자가로 온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형들은 경험도 못한, 체험도 못한, 곧 요셉이기 때문에 온갖 시련과 버림받음과 실망과 좌절, 이것을 몸에 품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찾아와요.
그러면 우리는 처음에 의아해 합니다. “주님은 왜 이렇게 망가졌습니까? 왜 그렇게 주께서 피를 흘리시는 거예요?” 십자가로 찾아오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십자가지신 주님을 증거 하거든요. “가짜인 그것을 버리고 내 십자가에 근거해서 너를 다시 새로운 사람으로 부활시키기 위해서 내가 너에게 찾아온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새로운 자아는 어디에 있느냐? 죽은 이 몸뚱이가 아니라 다른 몸, 예수님이 이 땅에서 상처받은 그 몸, 십자가에 달렸던, 창 자국 난 그 몸, 그 몸의 영광성으로 새로운 몸으로 탈바꿈 됩니다.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아까 했지요. 바꿔치기 하는 것이 주님의 주특기라고요.
이것을 요셉은 어떻게 알고 있었느냐 하면, 하나님이 자기에게 꿈을 줄 때, 그리고 나중에 국무총리가 될 때 사법고시 합격해서 총리가 된 것이 아닙니다. 꿈에서 시작한 그것도 꿈이거든요. 시작도 꿈이고 마감도 꿈이에요. 콘크리트도 꿈이고 마감재도 꿈이고, 꿈속에서 사는 거예요. 하나님의 꿈이 하나님의 실재하심, 일하심이라는 말이지요.
그 일하심속에서 자기는 평탄하게 살아왔습니까? 그렇지 않거든요. 온갖 고생을 다 한 거예요. 이것은 하나님의 주신 꿈 때문에 벌어져야 될 특수한 경로를 지금 혼자서 갔고, 형들 입장에서는 버림받은 자, 아버지 입장에서는 죽은 자로서 생고생을 다 하면서 국무총리까지 된 겁니다. 그 뒷받침은 하나님의 계시, 꿈에 의해서 된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면 그 혜택을 아버지와 형들과 베냐민에게 줄 때 과연 그들은 나처럼 고생을 해야 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뒤에 나오지만 그들은 고생 아닌 고생을 해요. 그 고생은 요셉처럼 실제로 감옥에 갇힌다거나 그런 고생은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힘든 고생은 자신의 인생관이 바뀌는 거예요.
어떤 인생관이냐 하면, ‘내가 나를 지킬만한 가치가 있다.’에서 ‘내가 나를 갖고 있으면 있을수록 나에게 악마의 시험만 더할 뿐’이라는 인생관으로 바꿔지는 것. 이것은 요셉이 형들을 정신적으로 장악하지 않고서는 형들에게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 안에 계시는 예수의 마음이 우리 마음을 장악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밖에 없는 내 패를 놓을 의사는 전혀 없습니다.
부활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금고에 분명히 성도 있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다시 재림하십니다. 재림이라는 것은 창세기 마지막에 영광스런 요셉과 아버지와 다 만나는 거예요. 이걸 재림이라 볼 수 있는데, ‘아, 죽었던 내 아들이 이렇게 잘 되었구나.’ 그게 재림이거든요. 그렇게 다 있습니다.
있는데 문제는 우리의 능력으로서는 고생은 할지언정 나의 가치를 놓을 마음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정말 아무리 수십 년 복음을 전해도 안 되는 이유가 있어요. 부활 믿는다, 해요. 재림 믿고 십자가 믿어요. 하지만 그 믿는 내가 가짜라는 생각은 도저히 못하겠다는 거예요. 왜? 성령이 안 왔기 때문에.
성령이 안 왔기 때문에, 평생 동안 내가 수고해서 얻은 이 몸, 이 몸을 놓는다는 것, 이것은 도박보다 더 심한, 그래서 있을 수가 없는 거지요. 그래서 우리 믿음을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못 버리겠다고 믿는 믿음은 믿음이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가짜를 믿는 믿음, 가짜에서 나온 믿음이 믿음도 아니고요.
주께서 그냥 따로 마련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믿음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지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진짜 성령을 받아서 믿는 사람은 우리의 몸을 버릴 때 어떻게 버려야 되느냐 하면, 가짜인 것을 날마다 고백하면서 편하게 버려야 돼요.
그리고 버리는 이유를 알아야 돼요. 형들의 사고방식에서 내 힘으로서는 도저히 못 빠져 나갔다는 겁니다. 악마의 손아귀에서 어느 누구도 못 빠져 나가요. 그런데 성령이 와서 이미 빠져나간 분과 연결시켜 준 거예요. 그게 성령입니다. 성령으로 연결시켜 주니까 지금 요셉처럼 느긋한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
늘 안 잘해도 되고, 애쓰지 않아도 되고, 그렇게 이 땅에서 성공 안 해도 되고. 그 옛사람을 우리가 붙들 필요가 없거든요. 옛사람을 우리가 알잖아요. 나 밖에 모른다는 것. ‘그 나밖에 모르는 철딱서니 없는 것을 우리가 구경은 하자.’ 하고 어차피 버릴 패기 때문에 ‘그래, 난 이기주의야.’ 하고 당당하게 이야기하면 되거든요.
어차피 나는 아니거든요. 나는 가짜거든요. 가짜자존심 건드렸다고 길길이 뛰고, 가짜 건드렸다고 점 하나 붙이고 복수할거야, 그런 불신앙적인 모습을 우리가 느긋한 마음으로 이제는 어떤 타이밍이냐 하면, 구경하는 타이밍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주님의 금고 안에 있기 때문에.
마음 같아서는 오늘 제목을 ‘하나님의 금고’라고 하고 싶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어느 대목에서 속았는지 왜 속았는지, 자진해서 왜 속을 수밖에 없었는지, 이제는 속았음을 아는 신앙이 되게 하옵소서. 얼마나 지독하게 가짜의 가치에 연연했습니까? 음식쓰레기 뒤집고 버릴 것에 대해서 집착하고, 그것 때문에 울었고, 그것 때문에 웃었던 철딱서니 없는 저희들, 이제는 제대로 성경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