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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순수 슬픔 181218강의요한복음

강남-요한복음 19장 25절(순수 슬픔)181218a-이근호 목사

요한복음 19장 25절부터 보겠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데” 네 사람이죠. 네 사람인데 전부 다 이름이 한결같이 마리아에요.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이야기를 그렇게 답답하게 십자가 위에 올라가셔서 불편한 자세에서 그렇게 힘들게 말씀하실까요. 평소에 식사 중에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 달릴 거 아시잖아요. 그럼 식사 중에 편하게 식사하시면서 ‘사도 요한아 너의 어머니다’ 이렇게 하시면 되는데 이게 십자가 위에서 그렇게 이야기하시는거에요.

그럼 우리가 알다시피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일으킨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다 이루었다’ 했으니까. 그럼 그 다 이룬 내용 속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자기 어머니 마리아를 자기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위탁하는 그 일도 다 이루심 안에 꼭 필수적으로 들어있어야 할 내용이기 때문에 십자가 달린 채 이야기 하신거에요.

그렇다면 십자가 이것은 신의 이야기냐 아니면 인간 예수의 이야기냐 하는 것을 살펴봐야 되요. 이 십자가라는 것은 신의 이야기냐 하나님 이야기냐 아니면 하나님 아닌 인간 예수에 관한 이야기냐를 이렇게 의도적으로 제가 이렇게 구분을 했습니다. 구분한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 이야기가 인간 예수 여기에 결합이 안 되기 때문에 그래요. 끊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이유가 있어요. 예수님의 자신의 하나님 됨을 의도적으로 인간이 알고 있는 신의 이야기를 피해서 인간 예수님으로서의 이야기를 하는 의도가 바로 신의 이야기와 이렇게 연결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겁니다. 인간 예수라고 했으니까 지금 여기 누가 있습니까? 어머니가 있지요. 어머니 마리아가 있지요. 천주교에서는 상당히 중요시 하는 대목입니다. 십자가에서 마리아가 언급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구원의 파트너로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구원의 파트너로서 반드시 들어가야 된다고 천주교는 우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를 부탁했다. 누구한테? 사도요한에게 부탁한거에요. 그러면 하나님의 이야기와 인간 예수의 이야기가 이렇게 저는 끊어졌다고 생각하는데 만약에 이어졌다고 한다면 이어질 수 있는 근거가 뭐냐 하면 이거에요. 예수님은 효심이 깊었다 이렇게 되요. 효심이 깊었다. 예수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하나님으로써 자기 일을 다 하면서까지 인간의 역할도 하나님께서 소홀히 하지 아니하시고, 인간으로서 어머니한테 효도를 해야 하는 그것까지 다 기억하시고 그걸 배려하셔서 사랑하는 제자에게 나 떠나고 난 뒤에 자기 어머니를 사도 요한에게, 사랑하는 제자에게 부탁했다는 겁니다.

그거는 뭐냐 하면 나는 어머니 아들로서 자식을 자기보다 먼저 목숨을 빼앗긴 아들을 보면서 어머니의 심정이 얼마나 큰 슬픔에 잠기겠는가. 그것을 아시고 그 어머니에게 자식으로서 할 도리를 끝까지 다 해줬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거는 하나님 이야기가 곧 사람 이야기가 되고 효심 이야기가 곧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되어 버려요. 그럼 이렇게 연결이 되어 버립니다. 역시 하나님도 효도하라고 했구나. 아니 하나님 자신이 효도했구나. 따라서 우리가 효도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의 일부다 그렇게 생각되는거에요. 세상에서는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걸 끊어버렸다. 이걸 끊는다는게 좀 억지가 아니냐 그렇게 생각하실텐데 여러분들 가나안 혼인잔치 때 마리아하고 예수님하고 대화의 호칭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자기 어머니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여자여.” ‘여자여’라고 했지요 어머니라고 안하고 여자여 라고 했지요. 그런데 여기서는 어머니라고 이야기한거죠. 여기에 호칭을 그렇게 한게 아니고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고 호칭은 하지 않지만 사도 요한이 새로운 아들이라고 이야기해서 자기가 아들인 것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 볼 수 있는데, 그 가나안 혼인잔치에서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는 말은 요한복음 2장에서 나오거든요.

이게 어머니와 아들관계는 어떤 관계냐 하면 이게 ‘육적 관계’입니다. 육적 관계. 육의 관계에요. 요한복음 4장에서 분명히 육으로 난 것은 육이거든요. 육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영으로 바뀌지는 않아요. 바뀔 수가 없어요. 예수님이 효심을 다한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 될 수는 없다 이 말이죠. 효심이라는 것은 인간의 육의 관계를 곤고히 하는겁니다. 그걸 계속 안끊고 이어가게 하는게 효심이잖아요. 효도잖아요. 그러나 그 육의 관계가 영의 관계로 전환될 수 있는 어떤 여지는 없어요.

그러면 예수님과 그 마리아의 관계는 뭐냐 하면은 반대로 생각을 해야됩니다. 어머니가 누구냐 하면은 예수님이고 아들이 누구냐 하면은 바로 마리아에요. 왜냐하면 어머니가 아들을 보호하니까요. 보호자의 관계입니다. 부모 자식과의 관계가 아니고 보호자의 관계에요. 마리아가 울어야 될 것은 육적인 인식에서 귀한 내 아들 잃었다고 울으면 안되고 자신의 보호자를 상실한거에요. 자신의 보호자를. 그 보호자를 상실한 것에 대해서 그 보호를 자기가 했던 보호를 사도 요한에게 부탁한겁니다. 사랑하는 제자에게 부탁한거에요.

그러면 그렇다고 치더라도 이렇게 신의 관계, 인간의 엄마와 아들의 관계가 신의 관계와 끊어졌다고 그렇게 강변할 필요까지 뭐가 있겠느냐 무리한 게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는데 요한복음 내내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라는 그 개념 자체가 인간들이 아는 하나님의 개념 자체를 철저하게 예수님은 지금 거부하고 있습니다.

너희들 하나님은 맞는데 너희들이 문제다 정도가 아니에요. 너희들이 뭔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과 내 아버지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하나님이고 더 심하게 주님이 더 심하게 요한복음 8장에서 이야기했듯이 ‘너희 아비는 악마’라고 했습니다. 악마에요. 그러면 하나님의 관계란 너희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관계는 이것은 하나님을 너희들이 인정 안한다가 아니라 너희들이 하나님을 굳게 잡고 그걸 인정하는 이유는 그 출발선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바로 혈육관계에서 나왔어요 ‘혈육관계’. 혈육관계. 로마서 1장 21절인가 거기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좀 어렵지요? 좀 어려워도 여러분 참아내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1장 21절에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라고 되어 있지요. 제가 질문 던져 보겠어요. 하나님을 아는데 몇 살부터 알아요? 하나님을. 하나님을 몇 살부터 아는 겁니까? 아이고 하나님한테 기도해요. 그걸 몇 살부터 그렇게 하나님한테 기도하고 하나님을 인지를 갖고 그렇게 하나님의 표상을 가지고 그렇게 하느냐 말이죠. 갓난아이가 젖 먹을 때부터 젖 먹으라고 하면 맘마맘마. 맘마가 잠깐만. 기도하고 이렇게 기도하고 젖을 먹습니까?

인간은 날 때부터 하나님을 안다고 했잖아요. 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 아니에요. 인간의 혈육관계에서 형성된 유사 이미지인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뭐로 보느냐 하면은 자기를 지켜주는 보호자로 보는데 그 보호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부모에요. 이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라는 울타리 속에 태어났고 점차 부모라는 울타리 속에서 자아가 형성되면서 그 부모의 울타리를 자아가 스스로 독립을 느끼면서 부모의 울타리를 대체하는 이미지로서 신의 이미지를 드디어 형성하게 되는겁니다.

그러면 왜 계속 부모로 가지 왜 부모라는 울타리를 독립하느냐. 그것은 아이가 점점 크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부모의 부재를 느껴요. 부재. 부모가 없을 때를 느낀다고요. 처음부터는 부모 없으면 난리나지요. 이미 그 인간이라는 것은 태어나면서 짐승처럼 곧바로 독립되는게 아니에요. 지금 자궁 안에 있는 그 느낌이 오랫동안 계속 가고 있는겁니다. 적어도 1년 이상은 자궁인지 아닌지 구분 안 될 정도로 계속 갑니다. 여기는 엄마의 몸이 곧 자기 몸이에요. 자기 몸이 따로 있는게 아니에요.

그러다가 엄마가 없으면 자기도 없는 존재가 되고 그러나 엄마 따로 나 따로가 되는 것은 시각적으로 어떻게 이게 돼요. ‘본다’가 형성될 때 무엇을 본다가 형성될 때 보게 되면 여기 뭐가 떠오릅니까? 영상이 떠오르겠지요 영상. 보통 아이는 어릴 때 보는 것은 엄마를 보고 아빠를 봐요. 처음에는 아빠보다 엄마를 먼저 보지요. 엄마 태에서 나왔으니까 엄마를 보지요. 엄마 보니까 보이는게 엄마잖아요. 엄마하고 자기하고 한 몸이에요. 엄마 시장가면 난리입니다.

그런데 어떤 ‘본다’에서 거울을 본다고 합시다. 거울을 보게 되면 거기에 엄마 모습이 아니고 자기 모습이 보이겠지요. 자기 모습이 보이면서 자아가 여기서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하는겁니다. 자아가 형성됩니다. 쟤 누구지? 거울 앞에. 쟤 누구야? 그러면서 어떤 오해가 있는데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면서 저것이 내 모습이라고 보는거에요. 내 모습이라고.

그런데 내 모습이라고 보는 순간 거울에 비친 그 자기 모습과 자기를 일치화시키는 이런 오인을 범해요 오인. 이런 실수를 범해버려요. 거울에 비친 그 모습을 ‘라캉의 상상’이라고 하는데 거울 단계에서 보는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지금 인간이 어떻게 신의 형상을 어릴 때부터 유아 때부터 어떻게 형성되는가 그 이야기 제가 해드리는겁니다.

처음에는 부모가 만약에 신이라면 부모가 신이에요. 보호자니까. 그런데 어느날 자기가 자기 자신이 따로 존재한다는걸 알지요. 그러면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인지 제가 설명하면서도 하여튼 되는대로 해봅시다. 나와 부모 특히 어머니죠 어머니. 부모 하지말고 어머니라고 씁시다. 나와 어머니의 사이가 무슨 관계냐 하면은 ‘이자관계’에요. 이자관계. 두 사람 관계거든요. 이걸 이자관계라고 합니다.

두 사람 사이에 어머니가 자기를 대신하는 거에요. 그런데 어느날 나를 아는 순간 저 분이 나의 어머니라고 느끼는 순간 이미 자기는 따로 독립되어 있는 겁니다. 두자관계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면 어머니라는 것도 필요없어요. 그 어머니가 나의 전부에요. 그러니까 자기가 독립되어 있으면 자기가 뭐가 되느냐 하면 내가 어머니를 보는 입장이 되는 겁니다. 전에는 엄마 안에서 엄마를 느꼈는데 이제는 내가 엄마를 보는 입장이 되요.

보는 입장이 된다면 여기는 뭐가 되느냐 하면은 나와 이자관계, 나와 엄마 사이에 중간 매개체를 집어넣는데 매개체가 뭐냐? 본인이 나를 집어넣어서 나를 중심으로 엄마를 이해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엄마가 시장갔다하면 엄마 시장갔어? 엄마 시장가면 곧 오겠네. 이렇게 된다니까요. 지금 여기 매개라는 말 또 나왔는데 이게 무슨 취지냐 하면은 엄마가 시장갔는데 엄마가 시장간게 그게 뭐가 오인이고 잘못된 것이냐 이야기할건데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엄마가 시장갔어? 그러면 나는 컴퓨터게임 좀 해볼까? 잔소리 안 할 찬스인데.

이거는 어떤 관계냐 하면은요 이것은 적어도 중학교 정도 되어야 되는 관계거든요. 엄마가 시장갔는데 엄마 시장갔으니까 곧 오겠네 하는 것은 아직 저항력 시대에요. 아주 독립을 해도 덜 독립을 한거에요.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네. 시장갔으니까 좀 기다리면 오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계속해서 ‘엄마 시장갔네’ 에다가 그걸 기다리는 겁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은 엄마 시장갔다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자기의 소망을 중간에 매개로 중간 매개체로 집어 넣는거에요.

그런데 엄마 시장갔다 찬스다 컴퓨터 게임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 중간 여기에 뭐가 들어가느냐 컴퓨터 좋아하는 나를 따로 집어넣어요. 이게 무슨 관계냐? 이게 삼자 관계에요 삼자 관계. 나와 엄마사이에 ‘나’라는게 있는데 이제는 엄마는 빠이빠이 이제는 나 하고싶은 대로 가는 겁니다. 왜 이렇게 되느냐 하면은 엄마의 부재가 이게 부재가 당연스러운 것이란걸 아는 순간 부재를 대체할만한 것을 집어넣은 것이 바로 신의 개념이에요. 부재를 대체하는 신 개념. 부재를 대체하려면 부재는 없음이거든요. 없음은 미흡이거든요. 미흡인데 여기 미흡을 대체할만한 완전체 절대체 절대적인 것 완벽한 것. 그러면 내가 어릴 때 엄마와 함께 있을 때 절대적인 그 개념을 이미지를 신으로 대체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엄마가 집 나가면서 곶감 선반위에 올려놨는데 그거 손님 줄거니까 먹지마라 하는거에요. 먹지마라. 미흡이죠. 먹고 싶은데 내가 싫어하는걸 저 선반 위에 오리고기 있으니까 먹지마라 하면 나는 오리고기 아예 싫어하니까 그건 미흡의 대상이 안돼요. 그런데 내가 진짜 좋아하는 곶감을 얹어 놨으니까 미흡한거죠. 그러면 엄마가 시장간 틈을 타서 내가 곶감을 손댄다는 것은 뭘 뜻하느냐 하면은 곶감을 먹고 만족스러운 내 모습을 그리죠.

이게 뭐냐? 절대적으로 만족스러운 상태, 이게 ‘신’의 개념이에요. 왜? 내가 원하는 욕망을 내가 충분히 보호해주고 지켜주니까 이래서 신 개념이 생성되는거에요. 그런데 시장갔다와가지고 엄마가 패버리는거에요. 이게 어릴 때부터 말 안듣고 누구 닮아서 말 안듣나 줘패지요. 패면 엄마는 뭐가 됩니까? 엄마는 뭐가 돼요? 엄마는 악마가 되는거에요. 왜? 악마와 신과는 같은 계열에 속하죠. 같은 동네 존재에요. 나의 만족을 방해하는 악마가 되고 나의 어릴 때 그 있는 그대로 만족을 유지하면 신이 되는 거에요. 하나님 되는겁니다.

악마같은 엄마가 갑자기 성질을 내고 회초리를 들 때에 애들은 ‘엄마 나 실망했어’ 이렇게 나오지요. 실망하면서 여기서 뭘 하느냐 아까 이야기했던 결핍을 느낍니다. 결핍을 느끼면서 무엇을 요구하느냐 하면은 결핍에서 신이 되었기 때문에 결핍에서 신이 되려면 뭔가 충족되어야 되지요. 충족되는데 여기 동원되는 것이 뭐냐 하면 이거에요. ‘영웅’ 다른 말로 하면 ‘초인’. 초인, 영웅. 이게 바로 매개가 되는 겁니다. 이게 누구냐 바로 ‘나’입니다. 이게 나에요.

신을 믿는 내가 신이 되는 거에요. 어떤 식으로? 나는 영웅이고 나는 나에게 초인이 되고. 이게 무슨 세계냐 하면 애들이 많이 보는 동화의 세계. 동화의 세계입니다. 백설공주. 아무리 가난하지만 밤 12시되기 전에 왔어. 신발을 잃어버렸어. 그런데 진짜 못생긴 왕자가 아니에요. 못생긴 왕자가 아니고 박보검 왕자. 박보검 왕자가 와가지고 왕자가 신발 들고 이 신발 들고왔을 때 자기는 누가 되느냐 하면은 송혜교가 돼요. 졸지에.

신데렐라 동화가 그거잖아요. 백설공주가 그거잖아요. 역시 왕자 등장하잖아요. 백설공주한테. 초인 자기가 어떤 여자보다 이쁜 여자가 될 것이다 또는 남자는 내가 어떤 남자보다 힘세고 제일 돈 많고 부자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그런 남자가 되가지고 내가 남자가 될거야. 이게 바로 남성이 꿈꾸는 이게 바로 ‘신’이에요. 인간이 신을 믿는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분명히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하나님 된 나’에서 나를 닮은 하나님이 나오는 거에요. 인간이 신을 제거하고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 관계가 어디서 나왔어요? 부모와 자식 관계. 어머니와 아들 관계에서 나온거에요. 그걸 잃어버렸을 때 어머니가 그 아들보고 얼마나 슬프겠어요.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그 아들 있음으로서 자기가 어릴 때 동화의 세계에서 엄마가 되도 어떤 엄마가 되겠어요? 초인적인 엄마, 영웅적인 엄마가 되는거에요. 아빠 같으면 영웅적인 아빠 초인적인 아빠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 올 때 신은 어떤 개념의 신입니까? 초인적인 신, 나를 초인되게 하는 신, 나를 영웅되게 하는 신. 내가 원한 신이지요? 라고 노크하면서 교회 들어온다니까요. 내가 원하는 신. 어릴 때 내가 꿈꾸던 그 하나님이 하나님 맞지요? 라고 들어오는 거에요.

그 하나님에게는 뭐가 없습니까? 슬픔이라는게 있을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완벽한 분이기 때문에 하자라든지 패배라든지 죽음이라든지 실패라든지 좌절이라든지 잃어버림, 상실 이런 요소는 하나님에게는 이거는 해당될 수 없다고 여기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신들로 쫙 깔려 있는 이 세상에 완전히 그 신을 작살내는, 박살내는, ‘슬픔을 아는 신’으로 와버려요. 연결 안돼요. 신의 개념과 인간 예수의 개념은 전혀 연결 안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모든 말씀을 이루는 그 십자가 상에서 누가 보호자입니까? 누가 어머니 역할해요? 마리아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마리아의 어머니 역할을 하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아들같은 존재지요. 진정으로 우리가 슬퍼해야 될 것은 내가 원하는 신이 못 되서 슬퍼하는 것이 아니고 보호자가 이 못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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