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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81207 울산천상우리교회특강-판결자유게시판요한복음

20181207 울산천상우리교회특강-판결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 제목은 ‘판결’입니다. 하나님께선 이미 인간에게 판결을 내렸어요. 그것이 요한복음 3장 18절, 19절이니까 강의 초반에 성경구절을 보겠습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우리에게 내려진 판결은 바뀌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판결의 대상으로 본다는 것이 어떤 의미냐 하면, 우리가 어떤 모션을 취한다든지 하나님 앞에 아양을 떤다는 것이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없는 데서부터 개시하고 시작하려고 하잖아요. 이 천상 동네에서 만약에 치킨 집을 한다면 내 가게가 없는 데서 가게가 시작된다는 말이죠. 학원을 한다고 해도 내 학원이 없는데 내 학원이 시작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학원을 시작하자마자 망했다고 판결을 미리 내려버리면 뭔가 시작하고자 하는 자의 의도는 시작하면서부터 좌절 대상이 돼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안 망하도록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우리가 이야기는 할 수 있단 말이죠. 이 동네에서 가게를 하는데 안 망하는 쪽으로 해볼게요, 라고 하면 성경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바뀌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에 대한 평가가 하나님 보시기에 전혀 바뀌지 않는 것, 확정적이 돼요.

이미 확정적이라는 사실이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우리에게 뭘 주느냐 하면, 안심을 가져다주는 거예요. 추가적인 나의 노력과 나의 시도와 행함이 다 부질없는 짓으로, 바뀌지 않으니까 이미 확정난 거예요.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확정적이에요. 내 쪽에서 상대방의 마음을 돌이켜보려는 그런 시도는 다 쓸데없는 시도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확정한 것을 받아버리면 하나님의 말씀과 연루된 사람이 돼요. 엮여버린 사람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장착이 되면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살고 어떤 모습으로 살던 간에 이미 확정된 겁니다. 어떤 확정이냐? 말씀이 확정된 그 테두리, 그 범주 안에 이미 우리가 들어와 버렸다는 데서 오는 확정. 그 확정이 우리에게 안심을 주죠.

안심을 한다는 것은 정서적으로 안정돼있다는 뜻입니다. 세월이 지나고 나이가 들어도 확정된 게 제공하는 그 안심을 우리가 그대로 누리면 되는 거죠. 그러니까 성경이라는 것이 지키려고 하면 불안정하지만 받아버리면, 지키려 하지 말고 그냥 수용해버리면 이처럼 편한 게 없습니다.

이걸 예수님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천국은 이미 너희 안에 있다고 이야기해요. 죽어서 가는 동네가 아니고. 내가 죽어서 좋은 데 골라서 가는 게 아니라 천국이 우리가 있는 자리를 통해서 구현한다, 또는 발현한다, 또는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겁니다. 드러낼 때 그 특징은 계속해서 안심이 되는 거예요. 오늘 제목을 안심으로 바꿔버릴까?

계속해서 어떤 세파나 풍파가 인다할지라도 인생에 굴곡이 아무리 요동친다하더라도 롤러코스트 탄다할지라도 주님의 판결을 받아버리면 이미 그 자체가 확정적이기 때문에 자기의 남은 인생에 대해서 그다지 고민하거나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네 자로 ‘기쁜 소식’이라 했고 두 자로 ‘복음’이라 전한 겁니다.

다시 설명합니다. 복음은 뭐냐 하면, 우리에게 내려진 바뀌지 않는 판결을 그냥 수용하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판결이란 말을 함으로써 새삼스럽게 우리 쪽에서 판결을 뒤집거나 바꾸거나 하는 그런 시도는 다 쓸데없는 것이라는 것조차도 우리가 받아들여야 돼요. 내 쪽에서 어떤 경건의 노력과 의로운 노력과 열심히 하나님께 충성을 하겠다는 그런 시도가 다 헛짓이라는 것조차 다 그냥 받아버리란 말이죠.

왜냐? 안 바뀌니까. 바뀌지 않으니까. 판결이 바뀌지 않는 거예요. 너 하는 것 보고 바꿔줄게. 성경에 이런 것 없거든요. 너 하는 것 보고 지옥 갈 천국으로 옮겨줄게. 이런 게 성경엔 없어요. 그건 교회란 가게가 장난치는 겁니다. 인간 영혼을 마귀가 농락하는 거예요. 복음은 그런 게 아니에요. 바뀌는 게 없어요. 아무리 노력하고 울면서 통곡하면서 새벽제단을 쌓든 뭘 쌓든 간에 관계없이 한 결 같이 우리의 행동에 일체 대응 없이 확정적입니다.

그것을 요한복음 3장 18절, 19절에서는 벌써 심판을 받았다고 하는 거예요. 판결인데 그 판결은 벌써 심판을 받았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심판한다는 판결은 바뀌지 않는다. 확정적입니다. 안심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우리 속에 여러분과 제가 포함돼있지요. 우리는 심판을 받았다는 이 선언을 하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했지요. 그러면 우리는 일방적으로 심판받지요. 그 심판이 바로 내 일인 것으로 받으면 우리는 안심이 되는 겁니다.

중간에 뭐가 날아갔습니까?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는다는 종교적인 의욕과 노림수, 기대, 희망 이 모든 것은 다 삭제되지요. 다 날아갔지요. 이게 진즉에 날아가야 돼요. 믿는다는 것은 내가 생각한 하나님께 뭘 드린다는 게 믿는 게 아니고 하나님에게 나는 어떻게 비칠까, 어떻게 보고 계실까, 하나님의 안목에 도달하는 걸 말합니다. 그리고 그 도달한 것은 바뀌지 않는 겁니다. 확정적으로 우리는 심판받은 겁니다. 끽소리하지 말란 이야기에요.

지금 이것까지만 들으면 복음 모르는 사람들은 문 열고 막 나갈 거예요. 모든 사적인 희망과 구원의 여망은 삭제됐으니까, 없어졌으니까. 이상하다는 생각을 갖게 될 겁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요한복음 3장 18절, 19절에 분명히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다고 만약에 느껴진다면 평소에 하나님의 뜻을 우선한 게 아니고 어떻게 하나님에게 잘 보여서 내 미래가 잘 풀릴까, 라는 은근한 노림수를 아직 간직하고 있음이 티가 난 거예요.

하나님 믿는 것도 노동이잖아요. 사람이 노동하면 반드시 대가가 있어야 보람이 있지요. 하나님께 잘 보이고 믿음으로서 현재 내게 미흡한 것, 또는 만회해야 될 것, 보상받을 것, 그래서 지금부터 더 나은 삶을,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니까 섭섭하지 않게 하시는 분이니까 보상해주실 거라는 그런 기대를 갖고 있다면, 그건 요한복음 3장의 말씀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할 거예요. 니 누고? 네가 누군데 감히 성경이 하는 것에 대해서 은근히 외면하느냐고 추궁하실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물을 수 있겠지요. 이미 심판을 받았으면 우리가 개인적으로 챙길 수 있는 건 뭡니까? 약간 화는 안 내는 상태에서. 안심이 되는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안심이 된 상태에서 사적으로 챙길 건 뭐가 있느냐고 물으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판결의 장(field)이 된다는 겁니다. 말씀의 장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 찬 존재가 되는 겁니다.

전에는 악마의 마음으로 가득 찬 필드가, 영역이 됐다면 이제는 그 자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 찬 영역이 된 거예요. 말씀이 피조물이 된 겁니다. 이게 원래 하나님의 뜻이에요. 안심하라. 심판이란 그 말씀을 네 속에 내가 집어넣어줄게. 이게 하나님의 뜻이고 우리의 뜻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책임져주신다면 우리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이게 우리의 뜻이에요.

우리의 뜻은 항상 미완료로 이어지죠. 미완료는 바뀔 가능성을 노리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처음에 뭐라고 그랬습니까? 바뀌지 않지요. 내가 천국 가든 지옥 가든 주의 말씀은 바뀌지 않아야 돼요. 내가 천국 간다고 바뀌고 그러면 안 돼요.

하나님은 자기 말씀 위주거든요.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 위주란 말이죠. 말씀 위주기 때문에 말씀이 안 바뀌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감격해야 되고 고마워해야 되고 찬미해야 돼요. 말씀 덕분에 내가 어떻게 바뀌느냐, 이건 아예 제거, 지워버려야 돼요. 말씀 덕분에 내가 지옥 가는 것으로 천국 가는 것으로 바뀐다. 이런 의도, 이런 상상력은 하지 말아야 돼요.

내가 어떻게 팔자 피느냐에 관심두면 안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관심 둬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런 인간으로 확정적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안심해도 되는 거예요. 이래도 주의 말씀으로 움직이는 사람, 저래도 주의 말씀으로 움직인다면 우리가 더 무슨 소원이 있으리오. 그러한 태도,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굉장히 간단하지요. 무엇으로 바꾸느냐 하면, 나 잘되기 위해서 하나님은 말씀을 어떻게 하고, 복음을 어떻게 깊이 아느냐,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것은 항상 시작은, 내가 바뀌기 위해서 내가 잘되기 위해서 좋은 쪽으로 잘되기 위해서 나는 뭘 해야 되느냐? 그렇게 생각하는 그 자리가 완전히 묵사발된 거죠.

내가 시도한 그 자리에 말씀이 들어온 거죠. 안 바뀌는 말씀이 확정적으로 들어와 버렸으니까 우리는 안심해도 된단 말이죠. 내 욕심만 없으면 안심해도 돼요. 그러나 내 욕심이 만약에 살아 있다면 우리는 원래 의도의 노림수가 좌절된다는 분노 때문에 안심은커녕 하나님과 바이바이 하고 싶어 해요. 나, 더 이상 당신과 안 논다고 될 겁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게 되면 애들한테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온다고 부모들이 이야기해요. 그럴 때 오든 말든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애들은 없습니다. 혼자서 시나리오를 생각하게 돼요. 크리스마스가 25일이니까 24일 밤에 온다니까 20일 쯤부터 착한 일만 골라서 해야 되지요. 어지간히 패도 안 울어야 되고 울면 안 된다니까 안 울도록 노력하고. 그게 뭐냐 하면, 뭘 얻는다는 걸 기대해서 내 쪽에서 수정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날 교인들은? 똑같은 거예요. 천국 가는 사람은 이런 짓은 해선 안 되지. 이 생각이나 산타클로스 할아버지한테 원하는 선물 받기 위해서 자기 관리나 절제에 나서는 어린애나 다를 바가 뭐가 있어요? 똑같지요. 그러나 이건 항상 불안정한 거예요. 정서적으로 불안정하고 인생을 아무리 살려고 성경지식을 많이 갖고 있어도 신학을 해도 불안정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노림수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겨냥해서 뭔가 노리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걸 이해했다 치고. 1회전은 마감됐어요. 2회전은 뭐냐? 하나님이 심판을 확정지었다는 증거를 우리에게 보여주소서. 이게 2회전입니다. 인간이 어떤 시도를 해도 하나님이 안 받고 이미 이 세상을 심판하기로 판결을 내린 것은, 너희들이 아무리 겸손을 떨고 경건을 해도 일체 그런 것은 개 무시해버리고 판결은 바뀌지 않는다고 확정지어진 최종적인 증거가 뭐냐?

그것이 요한복음 3장 18절에 나옵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이건 이렇게 설명됩니다.

이게 인간 세상인데 우리들 세계지요. 우리들 세계는 고만고만한 인간들만 있어요. 여기에 누굴 투입시켰습니까? 독생자의 이름이니까 예수님이죠. 독생자 예수님을 여기다 투입시켰습니다. 투입이 안 됐다고 칩시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안 왔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뭐냐 하면, 미완료 상태에 있어요. 지금 우리가 힘들게 살지만 하나님 나라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노력 여하에 따라서 자기의 결심 여하에 따라서, 그리고 행동을 얼마나 조신하게 조심스럽게 경건하게 사느냐에 따라서 현재 우리의 형편은 언제든지 얼마든지 바뀔 가능성이 있다고 미완료적 상태에 있어요.

여기에 우리들 나름대로의 세계에 뭐가 있냐 하면, 심판 기준이 있는데 그 기준은 사람들, 우리들에서 나왔어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해가 안 될 거예요. 심판의 기준이 우리가 평소에 잘했다, 못했다는 선과 악의 기준이 우리들에서 나왔다는 말은 얼른 이해하기는 힘들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들 가운데 선한 사람도 있고, 의인도 있고, 도인도 있고, 지혜자도 많고, 목사도 있고, 장로도 있고, 신부도 있고, 중도 있잖아요.

이 사람들이 이렇다고 판결을 내리면 우리들은 그 사람의,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강의 중에 묻는 것도 강의니까. 우리가 그 사람 말에 추종합니까, 아니면 참조합니까? 둘 중에 하나에요. 어떤 훌륭하다고 자부하는 사람, 또는 목사가 이야기할 때 그 사람을 추종합니까, 아니면 참조합니까? 참조하지요. 왜냐하면 어떤 인간도 자기 외에는 추종하지 않는 속성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북한의 김정은에 고개 숙이는 신하들이 김정은 추종하는 거예요, 김정은을 참조합니까? 참조를 하지요. 자칫 대항하면 죽는 수가 있기 때문에 지 목숨 살기 위해서 예예 해주는 거지요. 어떤 인간도 자식이 부모 말 듣는 것도 마찬가지고 애인 사이도 마찬가지고 모든 인간은 나에게 날아오는 모든 의미를 본인이 종합하기 위해서 참조하는 거예요.

그럼 내가 최종 선하다, 악하다, 또는 내가 정당하다, 부당하다는 판결을 누가 내립니까? 내가 내리는 거예요. 그럼 여기서 2652만 4642명이 살고 있다면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은 몇 가지겠어요? 26,524,642가지. 한 사람마다 기준이 다 달라요. 형제간에 다 다릅니다. 부부간에 판단 기준이 다 달라요.

판단 기준이 다 다른데 어디서 이것이 분명해지느냐 하면, 어떤 사람이 검찰청에 가서 고개 숙이고 사진들 찍고, 국정농단 하셨습니까? 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이럴 때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을 욕하지만 그 사람 부인이나 자식들은 세상을 욕할 거란 말이죠. 너희들이 우리 사정을 알아? 각자 인간은 남의 사정을 몰라요. 남의 사연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끄집어낼 때 긴 그림자가 있어요. 인생이란 긴 그림자인데 사람마다 그림자 길이가 다르고 전부 다 색깔이 다르고 굴곡이 다 달라요. 과거에 살았던 자기가 체험했고 체험에서 나온 기억이 현재 자기에 담겨서 거기서 선과 악, 다른 말로 정당성과 부당함을 본인이 결정하는 기준이 된 거예요. 사람마다 다 달라요.

남자가 연애할 때 맞다고 생각하지만 뭐 하나 일이 터지면 안 맞는 이유가 뭐냐 하면, 그 사람이 아이큐가 낮아서 그런 게 아니라 살아온 인생이, 자기 내부에 자리 잡은 인생의 사연들이 각각 달라서 그래요. 우리 집에선 이러면 안 되는데. 아니 우리 집에선 오히려 자랑인데. 서로 다른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서로 달라요. 직장이 다르면 경험했던 체험도 다르고.

제가 지금 이야기하고 강조하는 건 뭐냐 하면, 모든 사람이 살아온 이력이 다르기 때문에 지금 나는 정당하다, 나는 부당하다는 결정 기준도 사람마다 같은 경우가 하나도 없다는 걸 강조하는 거예요. 2500만이 선과 악의 기준이 다르다면 2500만이 믿는 예수가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르지요.

주님께서 은혜 주셨다고 하면, 다른 사람은 그건 행운이야. 은혜 받은 게 아니야. 받은 것으로 지옥 갈 수도 있어. 이렇게 누가 나쁘게 평할 수도 있고. 뭐 대수롭지 무심한 일인데 옆에서 은혜 받았다고 오히려 외부에서 과도하게 나를 칭찬 못해서 환장해서 높여줄 수도 있는 문제고. 사람이 살아가는 인생이 다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같은 게 하나도 없어요.

분명히 여기서 제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2500만이 아니라 75억~80억(현재 세계인구수)이 있다 할지라도 공통점은 딱 하나 있어요.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항상 자신은 늘 정당한 부분이 있다. 이겁니다.

교도소에 가나 누구한테 욕을 먹으나 항상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격려하고 용기를 부어주는 밑천이 뭐냐 하면, 그래도 나한테는 아직도 열두 척의 배가 남아있는 거예요. 아직도 나는 정당하다. 내가 천사 같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에요.

아무리 내가 나쁘고 인간 말종이고 개차반이고 짐승보다 못하다고 욕을 한다 할지라도 그래도 내 안에는 내 양심에 비추어서 정당한 요소는 늘 있다는 점, 그 정당한 요소를 의지해서 그걸 믿고, 그게 자기한테 기쁜 소식이거든요. 그걸 믿고 버티면서 인간은 살아갑니다.

제가 주일 오후에 그런 설교했잖아요. 노인들이 살아가는 것이 악에 바쳐서 살아간다고. 모든 인간은 나름대로 악에 바쳐 살아가요. 욕하지 마. 나 보고 죽으라고 하지 마. 나 이렇게 정당하고 바르게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는 사람이야. 네가 네 기준에서 남을 함부로 폄훼하지 마.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알아. 모르면서 남의 일이라고 함부로 이야기하지 마. 그런 격분과 울분의 토대가 늘 우리 안에 울렁거리고 있는 거예요.

지금까지 제가 모든 인간은 절대적인 기준은 없고 자기가 세상을 나름대로 보고 있지요. 쌍둥이라도 마찬가지에요. 이런 이야기할 때 조건을 하나 걸었지요. 어떤 조건 하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했어요? 독생자 예수님이 개입하기 전에는. 독생자 예수님이 개입하기 전에는 전부 다 나름대로 정당한 부분이 있어요.

내가 대략 정당하다면 그건 교만하다는 소릴 듣잖아요. 그게 아니고 내가 아무리 인생 밑바닥을 살고 사람 열댓 명 죽인 연쇄살인범이라 할지라도 내 속에는 아직도 약간이나마 내가 살 권리와 이유는 있다는 거예요. 너무 몰아세우지 말라는 거예요. 인생을. 네가 날 뭘 안다고 몰아세우느냐.

그런데 오늘 요한복음 3장 18절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심판의 증거가 뭐라 해요? 너희들이 어떤 소릴 해도 이미 심판 받기로 확정됐다는 것은 어디에 기준해서 그러느냐는 거예요. 주님께서 한 사람씩 불러서 너 어떻게 큰소리쳤어, 네가 어떻게 잘난 척했어? 이걸 심사한 게 아니에요. 우리 인간이 겸손을 떨든 교만하다고 외치든 아직도 정당함이 있다고 하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오직 한 분을 집어넣어요. 예수님을 집어넣고 예수님의 오심을 안 받아들이면 심판을 이미 받은 것이 되는 거죠.

그럼 정리해봅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이미 이 세상은 심판 받기로 이미 심판을 받은 상태란 것을 통보해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거예요. 그리고 그 심판은 달라진다, 안 달라진다? 안 달라지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구원이란 언감생심 애초부터 해당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구원, 천국, 영생이란 게.

그럼 영생이란 게 어디 있는가? 잠시 이쪽을 보시기 바랍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죠. 여러분 이해했지요. 그러면 영생이 없다는 것은 조건이 뭡니까?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사는 게 아니죠. 영생이 없다는 것은 무슨 요소가 빠져있다는 말이에요? 유일하신 하나님, 이 하나님은 예수님의 아버지를 말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이 아니고.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그리스도가 빠져버리면 뭐예요? 빠져버리면 영생이 없는 거죠. 지옥이죠. 그럼 이게 들어와 버리면 그게 영생이고 천국이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단 말은 이 세상에 누가 떴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이 등장했지요. 예수님이 등장해서 만약에 우리 마음까지 쳐들어온다면 그건 곧 뭐가 되는 거예요, 그 자리가? 영생의 자리가 되겠지요.

그래서 성경은 영생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이미 심판 받은 우리에게 누가 찾아오는 거예요? 예수님이 찾아오는 거예요.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게 아닙니다. 내가 예수를 붙드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인간이 뭘 붙들 때는 다 노림수가 있어서 그런 거예요. 만약에 예수님을 믿게 되고 붙들 게 되면 뭐가 작용하느냐 하면, 봐 나 인간 개차반이지만 예수 믿는 착한 일은 했잖아, 라고 내가 전적으로 망가진 건 아니었었어. 내가 예수 믿는 여력은 아직도 배 열두 척은 남아있구나. 아직도 자기가 바뀔 가능성을 노리는 겁니다.

그렇게 돼버리면 그 사람에게 예수란 뭐냐 하면, 자기 팔자 고치기 위해서 은근히 노렸던 하늘에서 오신 분을 고대한 게 돼요. 그게 바로 유대인들이 했던 겁니다. 메시아 오게 되면 믿기만 하면 영생 얻는다. 그런 시도를 한 겁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그 자체가 우리가 심판 받아도 마땅하다는 거예요.

그럼 여러분이 잘 이해했는지 제가 확인해보겠습니다. 아까 예수님이 개입하기 전에는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나는 자신은 늘 항상 정당한 부분이 있다고 여겼지요. 만약에 예수님이 와버리면 내가 정당한 부분이 있다, 없다는 여부가 아무 짝에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안심 놓고 수긍하고 인정하면 되는 거예요.

나한테는 전혀 정당한 것이 없고 몽땅 부당한 것이고, 부당함은 내가 의도적으로 악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세상 자체가 부당하고 옳지 않기 때문에 그냥 통째로 부당한 거예요. 그게 바로 19절에 나옵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빛 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어두움이죠. 여러분, 낮에 이 동네가 어둡다고 생각합니까, 밝다고 생각합니까? 밝다고 생각하지요. 밤이 왔잖아요. 밤에 이 동네가 어둡습니까, 밝습니까? 어둡지요. 그럼 이 동네가 어두워요, 밝아요? 빛이에요, 어두움이에요? (어두움) 그러면 낮에도 이 동네는 어두움이다. 그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재벌 됐다? 지옥 가요. 건강하다? 지옥 갑니다. 출세했다? 지옥 가요. 시험에 합격했다? 지옥 갑니다. 전부 다 어두움이에요. 어두움뿐이에요. 빛은 없어요. 어두움에 빛이 온 거지 빛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어두움인 줄 몰랐는가? 빛이 왔다는 사실을 모르니까 자기는 빛도 아닌 게 어두움이 빛인 것처럼 서로가 서로를 격려해주고 속인 거예요. 속고 속이는 세상.

그러면 목사님, 문제는 이 세상이 이렇게 되도 그걸 모르고 있던 우리 자신의 인지, 그게 문제네요. 주님께서 일을 해도 그걸 모른다 하면 모른 자가 지옥 가는 세상이네요. 왜냐하면 수긍이 안 되니까, 동의가 안 되니까 우리한테 문제가 있네요. 우리한테 있는 문제를 어떻게 우리가 알 수 있고 다시 눈이 완전히 빛과 어두움을 알 수 있는 마음으로 달라질 수 있는 어떤 방법은 없겠습니까, 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일어나야 됩니다.

그것 이해하라 하면 욕 얻어먹어요. 어두움, 끝. 끝났어. 바뀌지 않는 확정 난 안심하라. 그럼 지옥 가는 걸 안심하란 말인가? 이건 너무 불안하지 않습니까. 로마서 7장 11절과 13절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떤 식으로 어두움을 깨닫는 거예요. 빛을 깨닫기보다도 자기 자신이 어둡다는 것을 인지해야 됩니다. 그래도 어두움은 바뀌지 않아요. 신앙생활, 교회 백날 다녀도 바뀌지 않아요.

내가 안 바뀌어야 돼요. 왜냐하면 내가 안 바뀌어야 주님의 영생이 계속 우리한테 장착하게 돼있습니다. 만약에 내가 달라져버리면 무엇에 위반돼요? 너는 바뀌지 않는다는 원칙이 틀려먹은 게 되지요. 말 어렵다. 만약에 예수 믿고 새 인간 돼버리면 무슨 원칙에 위배되는 거예요. 바뀌지 않는다는 원칙에서 내가 바뀌었지, 하나님 말씀보다 내가 더 세지. 이렇게 된단 말이죠. 바뀌지 말아야 돼요.

로마서 7장 11절에,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라고 돼있어요. 계명과 인간이 만날 때 인간은 뭘 못 보느냐 하면, 성경을 볼 때 뭘 못 보느냐 하면, 성경말씀을 내가 이해하고 의미를 찾아서 살아야지, 하는 그런 성급함이 우선해서 먼저 나오기 때문에 죄가 이 성경을 줬다는 생각을 못하는 거예요. 성경을 죄가 다룬다는 사실을 생각을 못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성경을 볼 때 누가 갑자기 반응을 나타내느냐 하면, 내 속에 있는 죄가 이 성경에 대해서 마중을 나가요. 마중 나가서 이 말씀을 내가 지키려고 애를 씁니다. 지켜서 뭐하게? 지키면 안 지킬 때보다 달라지고 바뀌는 것을 희망으로 삼아서 교회 다니고 성경 보고 난 뒤에 새사람 됐네, 라는 뉘앙스를 획득하기 위한 어떤 시도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그게 아니고 말씀을 보는 순간 내 속에 있는 죄가, 내 속에 있는 죄가 작용한다는 것은, 내가 셉니까, 죄가 셉니까? 어느 것이 강해요? 죄가 더 세다는 거예요. 죄가 더 세서 우리로 하여금 날이면 날마다 점점 더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죽는 것은 안 바뀌었어요.

우리는 태어나면서 4,5살 어린아이한테 물어보세요. 요새 이란 예능프로에서 아이와 육십 된 노인과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이가 아주 당돌하게 이야기를 잘해요. 무슨 이야기하다가 ….

죄와 우리가 대화를 하게 되면 우리는 죄가 없다고 여기거든요. 왜냐하면 정당한 부분이 있으니까. 우리는 성경을 볼 때 착한 것 총동원해서 보거든요. 그러면 뭘 의식하지 못합니까? 나보다 내 속에 죄가 작열하는 걸 모르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뭡니까? 우리는 70, 80, 90 되면서 죽지요.

내가 만약에 어린애와 이야기하는 전원책이라면, 너 인간은 왜 죽는다고 생각하느냐? 이렇게 질문할 거예요. 혹시 교실에서 그런 이야기하면 교사 잘립니까? 묻는 건 괜찮지요. 정답을 이야기하면 잘리겠지만. 애들아, 사람이 나이 들면 뭐가 돼? 할아버지, 할머니 돼요. 할아버지, 할머니 되면 어떻게 돼? 죽어요. 그러면 처음부터 태어날 때부터 안 죽는 사람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그럼 왜 태어나고 왜 죽지? 엄마한테 물어보고.

처음부터 죄는 살고자 하는 의욕보다 더 강했어요. 아무리 살고자 해도 우리는 죽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죽기 위해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어디서 안심하느냐 하면, 이미 우리가 죽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러면 그처럼 세상 보는 게 안심되는 게 없어요. 이미 죽었잖아요. 어차피 죽을 거잖아요. 뭐 안 죽을 거예요? 그 나이로 스톱시킬 거예요? 어차피 죽잖아요.

어차피 죽을 것, 미리 당겨서 생각해보는 거예요. 98, 90이라든지 62, 어차피 죽었다고 생각해봅시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잠시 사흘 만에 부활해서 땅에 묻기 전에 세상 바람 쐬려고 새벽 2시 46분에 관 열고 잠시 돌아다니는 귀신이라고 생각합시다. 세상 살 마음 필요 없지요. 되게 안심될 거예요. 이미 안 바뀌니까.

죄가 있다는 것은 어떤 몸부림 쳐도 이미 너는 죽어야 됨을 확정짓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무슨 자리냐 하면, 선과 악의 자리가 아니고 죽음의 자리에요. 처음부터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죄는 왕 노릇하는 죽음의 자리에요. 죽음의 자리인데 왜 죽느냐 하면, 로마서 6장에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거든요.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라면, “죄의 삯은 사망” 이 문장을 담는 그릇이 우리 몸이 돼요. 우리의 인생이 되는 겁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우린 죽어야 돼요. 그런데 은사, 선물이죠. 예수님께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것을 선물로 우리 몸에 줬다면 이건 바뀌지 않아요. 그런데 로마서 6장 23절에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고 하나님의 은사, 선물은 영생이죠.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은 우리의 공로, 우리의 행함과 관계없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에게 영생이죠. 그러면 우리는 무슨 영역이 되느냐 하면, 죽음도 알리는 영역과 그 다음에 영생이 안착하는 공간, 필드, 영역이 되는 거예요. 우리는 영생의 운반체가 되는 겁니다.

죄의 운반체 되었다고 선물 받아서 졸지에 이미 죽기 전에 영생을 뿜어내는 기능이 발휘되는 거예요. 영생이 막 뿜어져 나와요. 이미 죽었다고 치니까 살아가는 것도 영생을 발현하기 위해서 천상 동네에서 사는 거예요. 영생을 뿜어내기 위해서. 그걸 누가 하느냐 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들어왔기 때문에 영생이 되는 겁니다.

독생자가 오시고 난 뒤에 요한복음 3장에서 십자가에 죽으심을 이야기했다고요. 읽지는 않았지만 요한복음 13절부터.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했잖아요. 그 모습은 사실은 우리 몸을 사용해서 그 기능을 되풀이하는 거예요. 너는 백날 살려고 해도 너는 죽어. 하지만 네가 아무리 죽고자 해도 너는 살아. 왜? 죽음을 다뤘던 네 몸을 이젠 은사로 영생이 있음을, 천국이 있음을 알려주는 몸으로 너를 활용하고 사용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천국 가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강의를 마칠 텐데 처음부터 다시 합시다. 오늘 제목은 판결이라 했어요. 일방적인 판결입니다. 사람의 판결은 내가 행한 것에 대해서 판결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잘못된 겁니다. 판결은 일방적으로 이미 주께서 확정했어요. 그리고 인간에게 한 판결은 바뀐다, 안 바뀐다? 안 바뀌는 거예요. 어떤 조건 하에? 안 바뀌는 말씀이 우리 안에 장착되는 하에 우리의 운명은 말씀과 따라서 말씀을 증거하기 위해서 말씀이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영생을 얻을 수밖에 없어요.

이건 내가 부인하고 거부한다고 될 문제가 아닙니다. 날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가 뭐지, 주님이 오신 의미가 뭐지,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피로 죄 사함 받는다는 의미가 뭐지? 이것이 생각 안 나려야 안 날 수 없게 해요. 왜냐하면 내 몸을 주님이 주관해서 그래요. 만약에 내 몸을 내가 주관하면 우리는 노림수를 갖고 있어요.

주님이여, 성경 가운데 어느 대목 보면 천당 갑니까? 노림수가 있는데 주님께선 우리를 완전히 개 무시해서 네가 뭘 노리는 게 아니고 이미 넌 죽은 자라 어떤 노림수라 해도 죄를 못 이겨요. 그런데 거기에다 주께서 자기가 규정지은 죄와 예수님이 스스로 규정지은 부활과 매치되는 현장으로 만들어버리니까 죽을 죄인이 주님의 공로로 영생을 얻는구나, 라고 앞에 있는 죽음과 뒤에 있는 영생이 둘 다 아울러서 내 몸에서 터져 나오는 겁니다. 뿜뿜 계속 뿜어져 나오는 거예요.

나, 영생 받았다가 아니라 앞에 먼저 뭐가 붙어야 돼요. 나는 뭘 해도 지옥 가야 될 인간이 예수님의 피의 공로로 영생 얻었다. 이렇게 짜이는 거예요. 앞에는 지옥, 뒤에는 천국. 이렇게 짜인 것이 우리 몸에 장착되어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하신 일만 증거하는 사람, 그것이 바로 새로 만들어진 성도입니다.

진짜 성도라면 우리는 안심해도 됩니다. 왜냐하면 내 몸을 내가 주관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주님이 주관하기 때문에 이 땅에서 어떠한 굴곡진 인생을 살고 남들 손가락질 당하면서 너 까불다가 망했다, 사업 부도났다, 어떤 욕을 하고 봐라 네 건강 잃었으니까 지옥 간다 온갖 모함을 한다할지라도 이미 심판 받은 자의 입에서나 나올 이야기에요.

그렇게 하세요. 나도 그것 알거든. 옛날에 그렇게 그런 줄 알았거든. 그렇게 생각했거든. 그런데 주께서 죄를 전달할 때 나를 사용한 것처럼 이제는 하나님의 영생을 증거하기 위해서 나에게 선물을 주셨고 나에게 찾아왔다는 것, 우리가 고백할 것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령이 임하면 땅 끝까지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 했사온데 저희는 지금까지 내 잘남을 증거하지 않았습니까, 내 믿음을 증거하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이러한 못난 우리를 주께서 영생 증거하는 용도로 쓰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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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16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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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