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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비-현실 181207강의레위기

20181207a 울산강의-레위기 21장 : 비-현실적
(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21장 1절부터 7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고하여 이르라 백성 중의 죽은 자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려니와 골육지친인 부모나 자녀나 형제나 출가하지 아니한 처녀인 친자매로 인하여는 몸을 더럽힐 수 있느니라 제사장은 백성의 어른인즉 스스로 더럽혀 욕되게 하지 말지니라 제사장들은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갈게 하지 말며 그 수염 양편을 깎지 말며 살을 베지 말고 그 하나님께 대하여 거룩하고 그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 것이며 그들은 여호와의 화제 곧 그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는 자인즉 거룩할 것이라 그들은 기생이나 부정한 여인을 취하지 말 것이며 이혼 당한 여인을 취하지 말지니 이는 그가 여호와께 거룩함이니라”

여기에 제사장들에게, 라고 했는데 제사장 그룹은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있어요. 그것은 그들이 특수한 복장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마치 소방관들이 출동할 때 갑옷 비슷한 것을 입지요. 소방관 복장이 따로 있는 것처럼 제사장 복장이 따로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순수한 차이 남 또는 차이를 제사장을 앞장세워서 보여주는 겁니다.

제사장이 없다고 생각해보면, 고만고만한 사람들이에요. 너나 나나 똑같다고 하겠지요. 그런데 제사장이 눈에 띠는 복장으로 백성들 앞에 등장하게 되면, 뭐야 저 사람은?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신약에서 예수님이 독생자 되신 분이 하늘에서 이 땅에 왔다고 했을 때 유대인들은, 뭐야 너? 이렇게 되지요.

이게 믿음이에요. 믿음이란 고만고만한 사람들 모방하고 흉내 내며 따라가면 그게 인생사는 것이라는 그런 것을 나는 포기했다는 겁니다. 고만고만한 사람, 괜찮아 보이는 사람을 흉내 내고 그 사람처럼 살겠다는 그 삶 자체를 거기서 돌아섰다는 걸 의미합니다. 믿음이란 게. 눈에 확 띠는 어떤 특별한 존재, 그분에게 맹목적으로 따라가고 추종하고 그분에게 목을 매는 것, 만약에 그분이 살아 있다면 나 같은 건 죽어도 괜찮은 것, 그게 믿음이잖아요.

성경에서 믿음이라 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너를 없앨 수 있느냐, 그것도 기쁨으로. 아주 즐겨, 아주 다행이라는 마음으로 어떻게 하면 네 자신을 제거할 수 있느냐와 관련돼있어요. 교회 다닌다. 왜 다니느냐? 나를 키우기 위해서. 그거는 믿음이 아니에요. 그건 도 닦는 거고 절에 가는 겁니다.

제사장이 등장했다는 말은 제사장에게 일어나는 일과 평소에 네가 생각하는 그 차이, 그걸 무슨 차이라 했어요? 순수한 차이. 순수한 차이란 공통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고, 이런 게 아니고 완벽하게 다른 것, 철저하게 차이나는 것, 그런 게 있어야 돼요. 그런 게 있어야 미련 없이 나를 위한 내 인생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아까 레위기 21장 1~7절을 읽었는데 이 말을 요즘 말로 번역해서 달리 소개한다면 이렇습니다. 자기 자신만 챙기는 사람과는 만나지 말라. 이것과 똑같은 거예요.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사람과 상종하지 말라는 말과 같은 말이에요.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사람을 우리가 쉽게, 쉽게 만나는 이유는 나도 너 못지않게 내 자신만을 위해서 너 같은 인간을 만나준다. 이러거든요.

전부 다 누굴 만나든 누구와 대화하든 내가 나 챙기기 위해서 만나고 대화하거든요. 그러면 그건 제가 처음에 이야기한 고만고만한 사람 만나는 거예요. 보통 그걸 사람들은 인생살이 한다고 하거든요. 그런 인생살이 자체를 그만할래. 고만고만한 인생살이 이젠 지겹다. 그런 식으론 안 살래, 라고 그게 성립이 되려면 어떤 특정 분에게 아주 가볍게 맡길 수 있어야 돼요.

진주성에 논개 있지요. 논개가 어떻게 죽었습니까? 몸 바쳐서, 몸 바쳐서 죽었잖아요. 노래에 나오잖아요. 그 논개라는 사실은 결혼한 여자라는 설이 있는데, 관가의 기생인지 그건 딴 문제고, 하여튼 그런 여자에게 일본 장수를 껴안고 진주 남강에 떨어져 죽었거든요.

떨어지기 직전에 어떤 매파, 중매쟁이 할머니가 와서 아가씨, 내가 좋은데 시집보내줄까? 이러면 논개가 나한테 장가올 사람 있으니까 일본 장수와 죽는 것은 나중으로 미뤄야 되겠다는 생각하겠어요? 원피스 하나 맞춰줄까, 좋은 아파트 하나 사줄까? 이러면 갑자기 자기 하는 일을 그만둡니까?

그래 아파트에 살고 나중에 일본 장수 껴안고 뛰어내려야지. 이러진 않는단 말이죠. 눈에 보이는 게 없지요. 안중근 의사도 마찬가지고. 안중근 의사한텐 이토 히로부미 죽이는 것이 자기 믿음의 행함이잖아요.

성도가 됐을 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네가 알아서 대충 인생 살라고 하지 않았어요. 특출한 사람을 눈앞에 제시합니다. 너와 그 사람과의 순수한 차이를 네가 목격하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사장에게 특별히 하나님의 율법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순수한 차이를 위해서 제사장은 자유가 없어요. 왜 자유가 없느냐 하면, 복장으로 완전히 뒤집어씌웠으니까. 복장을 보게 되면 이렇습니다. 모자를 이렇게 썼거든요. 가는 실로 만든 관을 썼고, 머리에 금으로 만든 머리띠를 해요. ‘하나님의 성결’이라는 금테를 둘렀어요. 옷을 입는데 에봇입니다. 어깨에다 호마노라는 보석에 여섯 지파의 이름을 새겨요. 양어깨니까 열두 지파의 이름을 새깁니다.

소방관이 옷 입는 이유는 뭡니까? 자기 몸을 화염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죠. 그런데 제사장 복장은 뭘 보호하기 위함인지 모르겠어요. 여기에 보석이 한 줄에 네 개씩 총 열두 개에 금테를 둘렀습니다. 여기에다 열두 지파 이름을 씁니다. 이걸 판결 흉패라고 해요. 에봇을 입었으니까 에봇 띠가 있고 앞에 앞치마 같은 에봇 겉옷을 입습니다. 에봇 밑에 속옷을 입고. 밑에 보면 금방울 달려있고 석류 달려있고. 금방울 하나, 석류 하나 번갈아가면서 달아놓고. 떨어지면 안 되니까 금사슬로 돼있고, 금 사슬 매는 금 고리 있고.

이게 제사장 복장입니다. 아까 소방관 복장은 화염으로부터 보호한다 했지요. 제사장 복장을 보세요. 모습이 다른 사람보다 특이하죠. 다른 사람들은 이런 복장 안 한단 말입니다. 평상복입지요. 특히 어깨에 열두 지파 이름이 있고 앞에도 열두 지파가 들어간 것은, 제사장이 속한 레위 지파를 빼놓고 모든 열두 지파가 어디로 이동했습니까? 가슴팍으로 어깻죽지로 완전히 이동했지요. 그러면 한 사람 몸에 열두 지파가 같이 결합돼있는 겁니다.

만약에 제사장이 하나님의 법을 어긴다. 그러면 제사장 개인에게만 추궁당하는 게 아니에요. 제사장을 홀로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열두 지파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여기 오늘 본문에는 백성의 어른이라 돼있는데 짊어지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백성 입장에서 봅시다. 제사장 복장을 보니까 그 사람 가슴팍, 어깨를 보니까 누구 이름이 있어요? 내 이름이에요. 내 지파 이름, 소속 이름이 그쪽으로 날아가서 그쪽에 다 걸쳐있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뭐냐 하면, 내가 날 위해 산다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답변해보세요. 의미가 없어요. 중지해야 돼요.

아까 그랬잖아요. 자길 위해 사는 사람과 상종하지 말라고. 그건 이스라엘 아니라고. 당신 이름이 부착된 곳에 가란 말이에요. 부착된 그를 위해 살아라. 당신 이름이 어디 부착돼있는가? 제사장. 그럼 제사장을 위해서 사는 것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오늘 강의에서 중요한 두 가지 문제를 풀어야 돼요. 하나는 벌써 이야기했습니다. 첫째는 나의 운명과 제사장 운명의 관계는? 두 번째는 정말 어려워요. 제사장에 붙어있는 것 누가 만들었어요? 하늘에서 막 떨어졌습니까? 여자들의 수놓고 하여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들었잖아요. 그건 인공물이죠. 인공물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올 수 있느냐? 인간이 만든 물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을 뽑아낼 수 있느냐는 문제에요.

인공물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일이 나오느냐? 첫째는 나의 운명과 제사장의 운명의 관계는? 두 번째, 제사장 복장에 부착된 인간이 만든 것에서 어떻게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나올 수 있느냐, 그 과정은 어떠냐? 이 두 가지에요. 이 두 가지를 오늘 되던 안 되든 풀어야 됩니다.

첫 번째는 뭐냐 하면, 다시 이야기해요. 고만고만한 사람이 있으면 어떤 생각을 하느냐 하면, 내가 여기 있다, 있다. 너는 여기 있다, 있다. 둘 다 있다가 되겠지요. 고만고만하니까 인생사는 게 그렇고 그런 거니까 너는 네 인생 살아. 하나도 안 부러워. 나는 내 인생 살 거야. 전혀 부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가치를 위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제사장이 등장했는데 복장에 내 소속, 내 이름이 그 사람의 가슴팍에 있다. 그 사람의 어깨에 있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과연 진짜 있는 것이냐, 아니면 소멸되기 위해서 있는 것인지 따져봐야 돼요. 내 이름을 가져간 저분은 창대하고 그분이 크고 클 때마다 나는 어떻게 됩니까? 있으나마나한 존재로 전락하는 거예요.

신약성경에 사도바울의 편지들이 나오잖아요. 여러분들이 사도바울의 편지를 한 번쯤은 읽어보셨지요. 교회 다닌 세월이 몇 년입니까? 한 번쯤은 읽어봤잖아요. 한 마디로 그 편지에서 우리에게 하는 이야기가 뭐였던가요? 예수님을 되게 부각하지요. 사도바울이 편지에서 만유의 주시고,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고 이렇게 쭉 나오는데 결국 그 말은 지금 우리에게 뭘 알라는 겁니까?

예를 들어서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고 재산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라는 이 말이거든요. 도대체 뭘 손 놓으란 이야기입니까? (자기를 부인하라) 그렇지요. 마태복음 16장,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는 천국에 못 가요. 그러면 사도바울이 말하는 편지는 뭐냐 하면, 쥐고 있어도 소용없는 걸 왜 쥐고 있느냐는 거예요.

내 몸이 있잖아요. 그거는 놓아버리라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놓고 난 뒤에 아무것도 없으면 나만 손해잖아요, 라고 나오겠지요. 갑자기 40억짜리 복권이 당첨됐다. 그런데 친구가 와서 복권 당첨된 줄도 모르고 돈 만원 빌려달라고 했다. 옛날 같으면 안 빌려줘요. 그런데 40억 있는 사람이 돈 만원이 무슨 대수겠어요. 그래, 아니 그냥 줄게. 기마이 쓰고 은행에 당첨금 찾으러 갔을 때 지난 주 복권이라고 하면 돈 만원만 날아갔잖아요.

지금 교회 다니는 사람들 문제가 뭐냐 하면, 예수를 믿는다고 주장하고 싶은데 예수님 재림하시고 예수 믿으면 용서받는다고 했는데 안 그러면 나만 등신되잖아요. 그러면 요령을 부려야 되지요. 어떻게 합니까? 발 하는 교회에 걸치고 발 하는 세상에 걸치고. 예수님 재림도 안 하고 천국 없으면 발 빼면 되니까. 몰빵할 필요는 없다 이 말입니다. 오랜만에 고상한 용어 나오지요.

교회 가니까 고만고만한 사람들이에요. 믿음 좋은 줄 알고 복음 이야기하니까 완전히 욕만 얻어먹었어요. 교회 다녀도 복음 모르는 건 마찬가지네. 나와 똑같네. 이래서 우리는 벌써 안심이 되는 거예요. 그들이 전혀 부럽지 않아요. 지도 복음 모르고 나도 복음 모르는 건 마찬가지니까.

부럽진 않은데 문제는 고만고만한 인간에 만약에 제사장이 떴다. 제사장 복장을 하고 여기 새순교회에 떴다고 한다면 우린 그분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완전히 돈키호테지 뭐. 저거 미친 것 아니야. 제사장 복장하고 오면 기가 막힐 일이란 말이죠. 복장이 왜 그래. 연예인인가, 각설이인가? 이러겠지요.

2018년엔 그런데 만약에 레위기를 줬던 기원전 1400 얼마에 제사장 떴다 하면, 아저씨 미쳤어요? 이렇게 이야기하겠어요? 못하지요. 그 현장으로 갑시다. 우리가 그 현장으로 가야 돼요. 우리가 너무 성급하게 구약에서 발을 너무 빨리 빼버렸어. 구약의 복음을 충실하게 적시고 신약으로 와야 되는데 구약 안 적시고 처음부터 신약에 들어가 버렸어요. 1학년 안 거치고 2학년으로 막 들어가 버렸어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제사장 특이한 사람이에요. 고만고만한 사람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선 안 믿는 사람들에겐 우스꽝스런 사람이에요.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너희들 공연하나? 사실은 예배가 공연과 똑같은 거잖아요. 어떤 경우에? 효과가 없을 때는. 하나님이 주와 함께 있는 효과가 없을 때는 여러분 예배시간에 공연 본 겁니다. 목사 하나 쇼하는 공연 보신 거예요.

그 효과가 뭐겠어요? 지금 2번 이야기하는 겁니다. 인간이 만든 건물 여기서 인간이 만든 성경책을 펴고 인간이 만든 찬송가로 노래 불렀어요. 전부 다 인공적이에요, 인위적이에요. 이거나 그 당시 제사장 복장이나 다 인위적이에요. 인간이 만든 거예요. 하나님의 손이 나와서 만든 게 아니에요. 인간 손으로 자기가 만든 거예요. 카메라 설치부터 해서 전부 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 일의 효과를 무슨 근거로 제시될 수 있느냐는 거예요. 은혜 받았다는데 그 은혜 받은 메커니즘을 설명해보란 말이죠. 찬송가 부르는데 은혜 받았어요. 그러면 찬송가 어느 가사에 그리고 솔이에요, 미에요. 어디서 은혜 받았어요? 도미솔도~ 여기서 은혜 받았어요? 파라시도 레파~ 거기서 은혜 받았어요? 정확하게 이야기해요. 어디서 은혜 받았어요?

그리고 그게 정확하게 예를 들어서 도미파솔에 은혜 받았다면 그 다음에 도미파솔 할 때로 똑같은 효과가 나와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지난 번 도미파솔에 은혜 받았는데 오늘 도미파솔에 왜 은혜 못 받는데요? 은혜가 안 되는 이유가 뭡니까? 지금 은혜가 안 된다면 지난 번 은혜 받았다는 것도 구라일 수 있고 위선일 수 있어요. 착각일 수 있단 말이죠. 정확하게 어떻게 해서 거기서 은혜란 하나님의 작용이 되는지 이걸 밝혀야 되지 않겠습니까.

완전히 이 복장하면 또라이 되는 겁니다. 돈키호테 알지요. 풍차를 적인 줄 알고 싸움 벌이는 그 돈키호테. 세르반테스의 작품으로 판초와 같이. 미친 인간이거든요. 제사장이. 요새도 미친 짓하는 사람 있어요. 교황이라든지. 미사라는 공연에 보면 이상한 복장, 평범한 복장 안 하지요. 신부들 나와서 흔들기 하고. 시각, 청각, 심지어 성당에서는 후각도 동원해요. 향을 피우고. 청각은 2층에서 저임금에 시달리는 수녀들 찬송가 부르고. 제가 결혼식에 참석한다고 명동성당에 가본 적 있어요.

교회라는 걸 해놓고 예배라는 공연, 매주 돌아오는 지루한 공연, 따분한 상투적인 공연. 마음은 콩밭에 있고. 오늘도 교회 왔으니까 이번 주 나쁜 일 안 생기는 이마에 부적 붙이는 식으로 출석 도장 찍는 식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것, 이게 고만고만한 교회들이에요. 우리가 눈으로 보는 걸 배우잖아요. 다들 그래요. 신기한 것도 없고 기적도 없고 은혜도 없고. 참석 안 하면 험담한다고 그것 의식해서 나와 주고.

이러한 의식들이 결국은 뭐냐 하면, 내 인생은 나 아니고서는 나를 관리해줄 사람이 따로 없음을 과감하게 행동으로 큰소리치는 불신앙이에요. 평범하게 사는 게 불신앙이 돼버린 거예요. 아는 사람 안면만 생각하지 그저 같이 살아 있다는 인간만 염두에 두고 의식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신약에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것은 이거거든요. 예수님이 살아 있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살아 있는 게 살아 있는 것인가, 네가 살아 있는 게 살아 있는 것인지 둘 중에 분명히 하라는 거예요. 니가 살아 있으면 예수님은 없는 존재고, 예수님이 살아 있으면 나는 눈에 보인다는 이유 때문에 없어져야 소멸돼야 마땅한 가상존재가 되는 겁니다.

가상존재를 붙들고 살아가는 거예요. 가상남편, 가상아내, 가상자식, 모든 걱정과 염려는 소멸되는 것 때문에 생기는 거예요. 있어도 아무 의미 없는 것, 없어진다고 해도 그건 너무나 마땅하고 나이 90되면 다 죽잖아요. 없어지는 것에 연연하고 거기에 울고불고 짜증내고 분노하고 기뻐하고 좋아하고 교만하고 그것 때문에 좌절하고. 아줌마들 만나면 그런 이야기로 세월 다 보내고. 도대체 우리 자신들이 뭐예요?

차이난다는 것은 현격한 차이나요. 나는 어떻게 되도 상관없다는 현격한 차이에요. 주님이 살아계신다면 나는 오늘 죽어도 상관없어요. 괜찮아요, 라고 주님의 가치와 나의 가치가 현격한 차이, 순수한 차이 그것 때문에 제사장이 제시된 거예요. 지금 1번도 아직 안 했습니다. 들어가지도 않았어요.

제사장의 특징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자유가 없습니다. 왜 복장으로 뒤집어씌웠으니까. 만약에 살아 있는 사람에게 석고를 뒤집어씌워보세요. 완전히 동작 그만이죠. 그대로 굳어버리죠. 제사장은 자유가 없어요. 1절 봅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고하여 이르라 백성 중의 죽은 자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려니와”라는 말씀의 석고로 완전히 굳어져버렸어요.

자유가 없다는 말은 곧 분발이 소용없다. 분발이란 말 아시죠. 분발해. 열심히 해봐. 노력해봐. 이게 분발이잖아요. 제사장한테는 분발이라는 것이 통하지 않습니다. 완전히 굳어져버렸는데 무슨 분발이 돼요. 성도에는 너는 이미 죽었고 네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말은 분발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서 오늘날 제사장이 누구라고 이야기합니까? 우리 성도잖아요. 그러면 우리 선배가 누구에요? 선배가 바로 레위기 21장의 제사장들이에요. 대대로 내려오는 제사장들. 아까 복장 봤지요. 판결 흉패, 에봇 이것 하나하나 율법이라는 석고를 뒤집어썼다고 보세요. 자기가 폼 내려고 집에서 옷 해 입었습니까? 아니거든요. 폼 낼 복장이 아니잖아요.

사실은 이런 복장은 남들에겐 주제넘은 건방진 복장이에요. 왜냐하면 자기 옷에는 자기 이름만 써야지 왜 남의 이름을 쓰고 평생을 살아갑니까? 물론 50세까지만 하지만. 50세 되면 은퇴합니다. 이렇게 남의 이름을 짊어지고 남이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그 사람의 운명을 제사장 이름으로 빼앗아 와서 네 운명은 내 손에 나 하기 나름이야, 하고 강제로 전환시킨 거거든요. 그렇게 하는 이유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에 대해서 미련을 끊으란 말이죠. 너는 그런 구조로 돼있는 게 아니란 말이죠.

제사장에게 이런 복장을 주신 것은 제사장에서 펼쳐 나갈 새로운 세계관 때문에 그래요. 성령이 임하면 세상 보는 눈이 확 달라집니다. 세계관이 달라요. 고만고만한 게 아닙니다. 아마 고만고만한 건 다 지옥이라고 보일 거예요. 세상 자체가. 부러운 것도 없고 재미난 것도 없고 신나는 일도 없어요. 반대로 이야기해서 좌절될 일도 없고 실망스러울 일도 없고 머리 싸매고 고민할 일도 없어요. 좋은 것도 없고 울 일도 없고 웃을 일도 없어요. 새로운 세계관에서는.

왜냐하면 내가 소속된 세계는 이 세상에는 없기 때문에 이 세상에 인간들이 만든 세계에는 없어요. 사실 인간들이 만든 세계란 말이 어폐가 있습니다만 인간들이 만들었다고 우기는 그 세계에는 새로운 세계는 없습니다. 인간들이 구성했다는 문명세계에는 없어요.

지금까지 한 걸 정리해보면, 첫째, 새로운 복장은 새로운 세계관을 표현한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 네가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말은 바로 천국 백성이 된다는 거예요. 옷을 걸친다는 것은 그냥 몸에다 옷을 걸친 게 아니고 옷이 새로운 몸을 스스로 내재적으로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리스도 옷이, 성령이죠. 성령이 오게 되면 내가 기존에 내 몸에서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산다는 그 세계관이 소멸되고 주님이 준비해놓은 세계관으로 전환돼요. 사람 자체가 달라진다니까요. 더 정확하게 말해서 사람 자체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미련을 갖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에 보면 사나죽으나 누구 것이다? 주의 것이다.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말씀을 내가 외움으로서 내가 이 세상에서 출세한다는 노림수를 갖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몸이 암에 걸렸는데 내가 무슨 고백을 하면 암에서 나을까? 옳지.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고백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착하다고 해서 지금 병든 암에서 기적적으로 낫게 될 것이다, 라는 생각은 갖지 마세요.

새로운 복장은 새로운 세계관을 표현한다는 것은 기존에 몸에다 하나님이 이야기한 제사장 복장을 입히는 겁니다. 그러면 몸+복장, 몸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본인이 만들었습니까? 하나님 것이죠. 복장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인간이 만든 인공부착물이죠. 우리도 옷 입었잖아요. 옷 안에는 주께서 만든 몸이 있습니다.

원래 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돼있어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시선을 어디에 둔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에 두는 거예요. 그러면 내 몸을 안 보게 되지요. 하나님 영광을 위한 소모용 몸이 되는 거예요. 죄를 짓기 전에는. 아담이 죄를 짓기 전에는 그랬어요. 그런데 아담이 죄를 지은 후에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통로가 묵사발 됐잖아요. 완전히 훼손시켰잖아요.

하나님 영광으로 가는 길을 잘라놨으니 누구한테 관심이 있는 거예요? 자기에게 관심 있지요. 이건 뭐냐 하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태어나면서부터 우리는 이미 비-정상 존재에요. 우리가 미친 거예요. 우리가 돌은 인간이에요. 고만고만하니까 고만고만하면 다 정상인 줄 아는데 정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같은 인간들끼리 비교해선 정상이 아니란 걸 모르잖아요. 그래서 돈키호테 같은 사람, 이상한 복장을 한 제사장을 앞장세운 거예요. 그걸 순수한 차이, 공통점이 없어요. 완전히 단절된 차이에요. 그 제사장을 보면서 하나님이 합니다. 백성들아, 저 제사장 어떻게 대우할래? 그러면 우리가 그 사람을 특별히, 천하보다 중요한 내가 있는데 왜 저 사람한테 신경 써야 됩니까? 그 사람 옷 한 번 봐라. 보니까 거기에 내 소속이 있고 내 이름이 있거든요.

내 지파, 내 가문, 내 이름이 왜 거기에 있지? 하나님이 이야기합니다. 난 너와 상대 안 한다. 이제부터는 제사장과 상대하겠다. 나와 상대 안 하고 제사장과 상대함을 믿는 사람, 이 사람은 더 이상 자기의 타락된 범죄한 비정상적인 몸에서 풍겨 나오는 세계관에 대해서 자기가 접어버립니다. 그걸 정답으로 인정 안 해요.

인간의 몸에서 나오는 세계관을 향하여 구약 전도서에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헛되다고 이야기하죠. 믿음이란 것은 설치고 싸대고 열심히 하는 그것 아니죠. 주여, 이 몸이 태어날 때부터 환자라는 것을 수긍해야 돼요.

요즘 아침드라마에 아주 고집 센 57 먹은 남잔데 치매 걸렸어요. 제목이 그렇게 가부장적이고 고리타분한 사람입니다. 그걸 보면서 제가 느꼈어요. 치매 걸린 가부적인 사람이 본인을 정상으로 여기겠습니까, 비정상으로 여기겠습니까? 정상으로 여기는 거예요. 꼭 오늘날 우리와 똑같아요.

왜 정상으로 여겼을까요? 울산시내에 누가 없기 때문에? 돈키호테 같은 제사장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고만고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측정할 기준 자체가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았어요.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갑시다, 라고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거예요. 한 달 월급 얼마에요? 전부 이런 거 물어요. 아파트 사놨는데 요새 아파트 값 좀 올랐습니까? 그런 거나 묻는다고. 장사하는데 장사 좀 안 되죠? 차 언제 바꿨어요? 그런 이야기한다고요. 요새 시어머니와 잘 사십니까? 애 취직은, 결혼했습니까?

그런 이야기를 모아 놓으면 뭐냐 하면, 잘 삽시다. 우리 잘 살아봅시다. 그 이야기에요. 이건 아까 이야기한 분발이죠. 제사장은 분발이 없지요. 자유도 없으니까. 그런데 자유도 없고 분발이 없는 제사장 복장에는 바로 구원돼야 될 열두 지파 이름이 온통 거기에다 집중돼있다는 사실, 거기 다 모아져 있어요. 다른 데는 없어요.

제사장 이름이 있는데 따로 지도 제사장 흉내 낸다고 드르륵 박아봐야 그것 소용없습니다. 안 통합니다. 인정 안 합니다. 제사장이 백성들의 어른이 되고 싶어서 복장을 그렇게 했습니까? 아니잖아요. 그러면 지금 제사장은 복장에 눌려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하나님이 주신 복장이란 율법에 눌려 사는 사람. 이제는 하나님의 일에 중심부가 되는 거예요.

따라서 제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새로운 세계관과 그 세계관에 부합되는 어떤 규칙이라든지 철칙 같은 것, 원리가 나올 때 이게 제사장에게만 나온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제사장 복장에 열두 지파 이름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공히 백성들에게도 적용되고 요구되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라고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21장 1절에 보게 되면, 제일 먼저 제사장에게 요구되는 게 뭐였든가요? 장례식에 가서 몸을 더럽히지 말라는 겁니다. 장례식에 예외는 있어요. 제사장의 가족들, 골육지친인 부모나 자녀나 형제나 출가하지 아니한 처녀인 친자매로 인하여는 갈 수 있지만 그 외에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장례식에서 하나님의 취지는 뭐냐 하면, 기존에 인간의 몸, 타락한 비정상적인 몸에서 가장 걱정되고 무서운 공포는 뭐였습니까? 살아 있다고 의식할 때 가장 그런 일이 안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그 일이 뭐겠어요? (죽음) 그렇지요. 죽음이죠. 그러니까 첫 번째는 뭐냐 하면, 죽음보다 더 진지한 게 바로 제사장 율법이에요.

보통 인간에게는 가장 무서운 게 죽음이에요. 왜냐하면 죽음 모든 가치의 끝이니까. 내가 가졌던 모든 것이 있다할지라도 내가 죽으면 모든 것이 다 쓰레기 돼버리니까. 내 것이 안 되잖아요. 죽으면 내 것이 안 된다는 것이 한탄스럽다는 말은 평소에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간다? 어떤 조건 하에 가치를 부여하느냐? 내 것이 될 때만 사는 행복과 보람을 느끼는 식으로 인생을 살아온 거예요.

그러니까 죽음을 자꾸 뒤로 미룹니다. 죽음을 나중 일로 여겨요. 쉽게 말해서 죽음과 삶을 나누고 있다는 게 인간의 문제입니다. 사는 것 속에 죽음이 들어와 있다는 생각을 안 하고 죽음은 남의 이야기고 먼 이야기고 나한테 해당 안 되는 이야기고 지금은 집중해서 어떻게 밥 먹고 살아남는가가 중요한 일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런데 그러한 의식이 어디서 나왔는가? 범죄 한 우리 몸에서 나왔어요. 방금 이야기한 대로 몸에서 죽기 싫다가 나오지요. 그럼 우리가 걸치고 있는 옷들은 어떤 이유 때문에 어떤 의미를 갖고 옷들을 입고 거기다 부착물을 답니까? 그 이야기를 연결시켜보면, 나 안 죽었어, 나 팔팔해, 당당하게 살아 있단 말이야. 그것을 뽐내고 자랑이 담겨있는 복장을 우리가 선택해서 취득합니다.

흔히들 친구들 만나서 입은 옷을 보고, 노티 난다. 그러면 그 옷 입습니까? 노티가 뭐예요? 너는 죽음에 가까운 옷을 입었다는 말 아닙니까. 그런데 옷을 입었는데 20년은 젊어 보인다. 그러면 어떻게 돼요? 그 옷을 안 맞더라도 포기 못하지요. 내 몸을 줄여야지 하면서. 기어이 20년 당기고, 마치 쇠붙이가 지남철에 억지로 안 끌려가는 것처럼 뭔가 우리 인생사는 자체가 억지 같아. 애써서 내 속에 죽음 없다는 것을 가장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죽음에 쫓기듯이.

그런데 제사장 복장은 나는 이미 죽었음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복장입니다. 아까 소방관 예를 들면 소방관이 평소에 두꺼운 갑옷 같은 옷을 입고 식사하면 안 되겠지요. 식사란 먹고 살려고 하는 건데 방해되잖아요. 그런데 만약에 소방관 옷을 입고 식사한다는 말은, 너희들 보기에는 그냥 식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지금 불속에서 식사하는 중이다, 라는 것을 은연 중 보여주는 겁니다.

따라서 제사장 복장은 하나님과의 만남이란 곧 하나님이 준비한 처절한 심판과 저주와 지옥불과 죽음을 전제로 해서 나는 너희들을 만난다는 이야기입니다. 만날 때 유일하게 하나님이 인정하고 하나님이 용서하는 것은 무슨 복장? 제사장 복장밖에 없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 인생을 포기하고 제사장 인생에 우리는 모든 걸 몰빵해야 됩니다. 예수님께 모든 걸 맡겨야 돼요.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하나님 아버지라는 사는 방법을 유일하게 갖고 계신 분이거든요. 영생이란 누굴 아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를 보내신 예수님을 아는 게 영생이에요.

영생이 없는 게 아닙니다. 분명히 있는데 사람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안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자기 자신에 치중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그래요. 나를 포기 못하기 때문에 그래요. 다른 말로 하면 믿는데 누굴 믿느냐? 주님을 믿지 않고 믿어요? 사나죽으나 나를 믿고 나는 사나죽으나 나의 것이에요.

모든 사도바울의 편지에 예수님 다 빼버리고 거기다 뭘 집어넣습니까? 나를 집어넣고 전부 보는 거예요. 성경 말씀에 주님 자리 오리세요. 나란 글자를 집어넣으세요. 우린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실제로요. 하루하루 일과가 그래요. 그래서 고만고만한 사람들과 대화가 그렇게 잘 통하는 거예요. 과연 주님의 말씀과 대화가 되는지는 10분 뒤에 봅시다.

한윤범gblayer('gblayer4', 'hanyb', '한윤범', 'hanyb26@hanmail.net', '', '1', './program');(IP:125.♡.150.1)

18-12-11 10:25

20181207b 울산강의-레위기 21장 : 비-현실적
(강의:이근호 목사)

첫째 시간에 제가 문제를 제기했지요. 어떻게 나의 운명을 제사장이 몽땅 다 가져가느냐? 그 과정은 어떻게 되느냐는 것과 두 번째는 인공물이 만든 부착물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의 효과를 내는지 그 문제거든요. 그 문제를 오늘 본문과 해결돼야 된다고 생각했지요. 해결되는 결론을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제목이기도 해요. 비-현실(성)입니다. 비-현실성을 붙잡아야 돼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운명을 제사장이 가져간다. 그런 이야기를 듣는 우리는 현실에 속해요. 나 자신이 제사장을 통해서 어떻게 좋게 달라질 것을 기대하고 그렇게 된다면 아낌없이 바칠 용의가 돼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우리가 섞여버리면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세상은 나로 인하여 계속해서 비-현실이 아니고 현실이 돼버려요. 비-현실은 현실에 없는 겁니다. 있는 데서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할 수 없어요. 없는 것은 없는 거고 있는 것만 있지요. 있는 것 속에는 없는 것은 없어야 되지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제사장 있어도 결국 망한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저 제사장이 우리한테 어떤 이득을 줄까를 늘 현실성 있는 결과를 잡으려고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비-현실을 잡아야 되는데 자꾸 현실을 이루려고 현실을 유지하고 그걸 발전시키려고 키우려고 애를 쓴 겁니다.

그렇다면 제가 첫째 시간에 말씀드린 게 있지요.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죽음이죠. 그렇다면 현실에선 죽음이 끝자락이에요. 현실의 한계점이고 경계선입니다. 죽으면 허무하고 아무것도 아니란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과연 그럴까? 죽음 뒤에 모든 것이 허사고 아무것도 아니고 과연 그럴까?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우리 현실에서는 죽음이 가장 진지하지만 죽음보다 더 진지한 것, 죽음조차도 시시한 일이 되는 그 무엇, 그것이 제사장을 통해서 뿜어져 나와요. 그게 나오게 돼있습니다. 그게 비-현실적인 관련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그거지요.

여러분 아는 이야기하겠습니다. 제사장이 그런 복장을 하고 무슨 일을 하는 겁니까? 제사 드리지요. 제사는 반복, 죽음을 집어넣고, 원료가 죽음이고 결과물이 생명 또는 죄 사함이 나오는 거예요. 공장에다 죄를 집어넣으니까 제품이 죄 사함이 나오고, 죽음을 집어넣으니까 영생이 나오는 거예요. 생명이 나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도저히 제 명(목숨)을 가지고 같이 동거할 수 없는 입장이에요. 그걸 하나님께서 제사장을 통해서 강조하는 겁니다. 너, 나 만나면 죽어. 이거거든요.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하나님 만나면 죽습니다. 그런데 안 죽는 사람이 있어요. 불속에 들어가면 타죽지요. 그런데 불속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있어요. 소방관 갑옷을 입고 살아남았잖아요.

제사장 복장에 무슨 요소가 있단 말입니까? 죽어 마땅한 것도 살릴 수 있는 요소가 제사장 복장에 장착돼있다 이 말이에요. 그게 제사장의 효과입니다. 그 제사장 효과에 대해서 궁금합니까? 궁금하면 우리는 산 채로 다른 말로 하면, 현실감각으론 다가설 수 없어요. 현실적으로 살아 있는 채로 다가가게 되면 살아 있는 나를 더 살리고 싶은 인간의 생존 욕구가 작용되기 때문에 이건 비-현실이 아니고 현실 속에서 계속 진행되는 연속에 불과하거든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과감하게 희생제물 죽을 때 자기가 산 자로 여기면 안 돼요. 희생제물아 너 죽고 나 대신 살자. 이건 안 되고 너 죽을 때 나도 같이 죽은 놈이란 인식으로 동참해야 됩니다. 그게 안수라는 거예요. 안수가 현실과 비-현실의 융합이에요. 양에게 안수한다. 어떤 사람이 죄 지었을 땐 죄 지은 사람이 안수를 해요. 어린양을 가져와서 할 때 제사장이 안수하세요, 안수하게 되면 전가라 하지요.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부탁한다, 양아. 옮겨지는 거죠.

이게 신약에 오면 세례와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이 물속에 들어갔다? 이건 의인이 죄인 속에 합류하는 거예요. 의인이지만 하나님 앞에선 죄인으로 다뤄지는 거예요. 반대로 예수님과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 우리는 분명히 죄인인데 이제부터 의인으로 다뤄지는 겁니다.

그럼 세례 자체, 안수 자체에서 어떤 효과가 있느냐 하면, 모든 현실적인 마감을 언도하고 선언해버려요. 현실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상이 아니고 비정상이란 사실을 선언하는 효과가 비-현실에서만 울려퍼지는 보이스, 음성입니다. 내가 정상이 아니란 것, 나는 환자에 불과하고 환자기 때문에 죽어도 아까울 게 없다는 그 보이스, 영적 음성, 그게 비-현실이 나타나는 효과에요.

아까 제가 메커니즘을 언급했는데 철저한 메커니즘을 조사하라. 제가 그런 운을 뗐기 때문에 이렇게 해서 영생을 얻는구나. 그걸 보고 싶어 하죠. 그러나 어느 순간에 현실적 경계선에서는 그걸 관찰, 조사하고자 탐색해서 내 지식으로 확보하고자 하는 의도 자체도 거기서 그만, 우리가 주저앉아야 됩니다. 그 다음부턴 어떻게 하느냐? 맡겨야 되지요.

주님이 실제로 비-현실적 효과를 제공하는 경우에만 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떼쓴다고 비-현실로 넘어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비-현실에서 이미 구원받은 효과가 영적 음성이 뭐라고 했습니까? 나 정상 아니야. 나 원래 하나님이 만든 창조물 아니야. 아름답지도 않고 쇠해야 돼. 나는 죄인이야, 라는 그러한 확인이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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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