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백한 사실 (마 25장 45-46) 대전- 106강
명백한 사실 (마 25장 45-46) 대전- 106강 이근호 2018년 11월 27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5: 45-46 (마 25: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마 25: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5장 45절부터 보겠습니다. 우리 성도한테 중요한 것은 실제로 하나님이 일을 어떻게 하느냐, 실제로 하나님이 일을 어떻게 하느냐, 그냥 하나님께서 계신다고 하는 것은 성도 아니라도 누구나 아는 상식이고요. 왜냐하면 신이 있을 때 이 세상의 창조가 풀리니까. 실제로 하나님은 일을 어떻게 하는가? 여기에 보면,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간다.” 이런 결과를 낳기 위해서 일하십니다. 한쪽은 영생으로, 한쪽은 영원한 벌에 들어가도록 일하십니다. 그러면 영벌이라는 곳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인데, 뭐 잘못한 게 있다는 거거든요. 근데 세상에서의 모든 기준은 뭐냐 하면 잘못했다, 잘했다는 것을 누가 판단하느냐 하면은 내가 판단합니다. 광주강의에서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만, 이 집은 tv가 없으니까, 근데 만약에 칠판만한 tv를 사왔다고 한다면, 벽에 걸기 위해서 그냥 걸면 쑥 내려가잖아요. 그럼 거치대를 먼저 뒤에 딱 해놓고, 거치대에 턱 얹어버리면 이건 안 내려가잖아요. 악마가 인간에게 거치대를 하나 만들어줬어요. 그게 뭐냐 하면 선과악의 지식이라는 거치대를 하나 만들어놨어요. 원래 창조할 때는 인간 속에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는 없는 건데, 뭘 하나 거치대로 만들었느냐 하면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이라는 거치대를 딱 해놓고 거기다가 인간의 모든 행동을, 악마가 집어넣어준 거치대에 준해서 옳고 그름을 전부 다 판단하도록 그렇게 인간들을 몰아세운 겁니다. 그러면 빼려면 뭘 빼야 돼요? 착하면 안 돼요. 뭘 빼야 돼요? 선과 악이라는 인식, 지식 자체, 악마가 집어넣은 것을, 그게 빠져야 되겠죠. 그걸 빼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럼 우리가 손 넣고 이걸 뺄 수 있습니까? 왜 못 빼느냐 하면은, 이 선과 악의 지식을 빼는 것을 인간은 뭐로 보느냐 하면은 선으로 봐요. 이게 모순되는 거죠. 선과 악을 빼는 것을 빼내자. 이것이 옳다. 이것을 선이라고 인간은 우기는 겁니다. 초반부터 좀 어렵죠. 이게 니체하고 불교에서 그런 이야기를 해요. 선과 악을 넘어서자. 그러면 아까 제가 첫째 시간 강의의 끝부분에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불신자의 특징은 홀로 산다고 했죠. 자, 보세요.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특징이 뭐냐, 스스로 시인해요. 혼자 사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선악과가 철폐 안 되면, 선악과를 주신 하나님의 지시를 받잖아요. 나는 선악과 따먹지 않아야 되는 제한을 받아요. 그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지시를 파괴시켜버린 겁니다. 파괴시켜버리고 내 안에 집어넣어버린 거예요. 그러면 선악과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있죠. 그러면 홀로 사는 것이 되죠. 홀로 사는 인간이 선이 되기 위해서 선악과를 빼버린다. 그러면 이런 결정도 결국은 뭡니까? 온리 유 only you. 오직 자기 혼자서 결정한 거죠. 결과를 예상합니다. 내가 빼고 남아 있는 그 결과는 뭐냐, 잘난 나가 되겠죠. 잘난 나. 드디어 선악에 휘둘리지 않는 잘난 나. 물론 그렇게 되는 것이 맞죠. 이 논리에 하자 없습니다. 자, 아주 보편적이고 유행되는 쉬운 논리를 해봅시다. 내가 여기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 율법에 보니까 나는 죄만 짓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나를 천국에 보내기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믿는다고 합시다. 믿게 되면, 그럼 천국 간 것은 누굽니까? 예수 믿은 내가 가죠. 그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기서도 혼자고 저기서도 내 자신을 포기하지 않은 나 자신을, 여기서 내 자신을 귀하게 여긴 그 귀함이 도중에 희석되지 아니하고, 소멸되지 않고 그대로 천국에 가서도 합격한 나 자신에게 자부심을 갖고 흐뭇하게 보는 거예요. 이게 이미 선악의 지식에서, 선악과에 의해서 홀로 된 인간들이 도저히 달라질 수 없는, 빼도 박도 못하는 본성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거 자체를 하려면 “나 구원 돼야 돼.” 구원되려는 나를 없애야 되겠죠. 천국가야 될 나를 없애야 되겠죠. 본인이 자살한다고 될 문제가 아닙니다. 나를 칼로 친다고 될 문제가 아니에요. 나를 칼로 친다는 것은 나를 없앰으로써 나를 거듭나게 하게 되면 나는 구원 받는다는, 나라는 의식은 여전히 살아있어요. 요한복음 3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기 때문에, 성령을 받게 되면 나는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의식 자체가 이게 영이 아니고 육이에요. 육에서 못 벗어나고 그 사이에서 뺑뺑이 돌고 순환하는 겁니다.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도 인간은 자기 자신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도망칠 수 없어요. 도망 못 칩니다. 그러면 성경은 뭐라고 하느냐, 성경은 우리하고 이야기를 안 하죠. 성경은 뭐냐, 예수님하고 이야기한 겁니다. 자, 이걸 그림으로 그리면 첫째 시간에 언급했듯이,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준 거잖아요. 그렇죠. 근데 성경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이고 죽어 마땅해요. 율법은 저주받기 때문에.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배제시키고, 여기 성경대로 합당한 사람을 하나님 쪽에서 보내버립니다. 그분이 누구냐, 예수님이에요. 그러면 성경은 누구를 증거 하느냐 하면은 예수님 이야기하라고 한 것이 성경이에요.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사이의 그 이야기가 성경입니다. 성경은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기 위해서 준 성경이에요. 죽은 자는 귀도 이미 죽고, 눈도 이미 죽고, 코도 죽고, 다 죽었기 때문에 성경을 전혀 알아듣지 못합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를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를 못해요. 모릅니다. 아무것도 몰라요. 이 말은 성경이 인간구원이 목적이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 구원의 목적이 아니다. 성경은 인간을 구원하라고 준 목적이 아니에요. 그럼 목적이 뭐냐, 예수님을 주 되심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성경을 준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하죠. 예수님의 주 되심, 하나님의 오른편에 있는 거예요. 예수님 혼자 잘나라고 성경주신 겁니다. 근데 이 주가 뭐냐 하면, 예수님의 활동으로서 이 주가 두 가지의 기능으로 나타나요. 뭐냐 하면 구원주도 되고 심판주도 되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 보면 46절에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는데, 그 조건이 뭐냐 하면 45절에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이 지극히 작은 자에게 안 한 것이 곧, 그 다음 두 글자가 뭡니까? “내게”죠. 내게. 나에게. 내게 안 한 거예요.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러니까 천국 가는 사람은 예수님에게 한 것, 그게 기준이 되어서 천국가고. 지옥 가는 사람, 영원한 벌에 들어가는 사람은 예수님한테 안 했다는 것 때문에 지옥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 자리에 교회를 집어넣으면 안 됩니다. 내 자식, 내 가정을 집어넣으면 안 돼요. 자식한테 잘해준다고 천당 가고, 인물 좋다고 천당 가고 그런 거 없어요. 애들 노래 있잖아요. 돈으로도 못가요. ⯄에다가 못가요가 붙어요. ⯄에 계속 바꿔치기 하면 돼요. 돈으로도 못가요. 맘 착해도 못가요. 어여뻐도 못가요. 공부 잘해서도 못가요. 어떻게 해도 못가요. 왜냐하면 못 간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성경이 있기 때문에. 아, 내가 가서는 그 천국이 망치겠구나, 하는 것을. 그게 천국이에요. 내가 가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내가 가서는 안 된다. 그러면 목사님, 천국 간 사람도 있잖아요? 그 사람은 두 번 창조됐거든요. 두 번 창조돼서 간 거예요. 현재 나는 아니고, 내가 다른 내가 돼서 간 거예요. 그래서 이 악마는 뭐냐 하면, 뭘 거부하느냐 하면 인간의 두 번 창조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기를 쓰고 안 해요. 왜냐하면 인간이 악마가 기독교나, 천주교라는 종교를 만들어도, 그 종교에서의 두 번 창조는 뭐냐 하면 내가 두 번 태어난 것을 이야기하죠. 그러나 나는 두 번 태어나지 않아요. 두 번 태어난다는 것은 뭐냐 하면 나는 못가니까, 나로 태어난 나는 죽고 예수님의 것으로 태어나야 돼요. 예수님의 것으로. 듣든지 말든지 모르겠다. 지금 성경의 논리를 따라가야 됩니다. 내가 지금 어떻게 구원받을까를 자꾸 염두에 두고 하면 안 돼요. 악마의 이야기를 했을 때 나하고 상관없다고 이야기하지 마세요. 악마의 이야기를 할 때 현재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이 악마의 생각과 이퀄(=)이 될 수 있다고 늘 생각해야 됩니다. 악마가 관여한 자가 누구냐 하면 아담입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누구의 후손이냐 하면 아담의 후손이에요. 이게 육인데요, 아담의 후손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나라는 것이, 현재 있는 이 몸, 이 몸에서 난 내가 성립이 돼요. 이게 아담의 후손의 특징입니다. 이 몸에서만 내가 나와요. 예수님의 몸에서 내가 나온다는 것은 상상도 못한 겁니다. 아주 쉽게 이야기할게요. 여러분들이 의아한 눈치를 보여서. 한 분 빼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죠. 죽었습니다. 죽고 난 뒤에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예수님이 죽음으로서 모든 인간이 죽은 거죠. 죽은 거예요. 자꾸 다시 살 생각하지 마세요. 죽었는데 누구만 살아났습니까? 예수님만 살아났죠. 그럼 산몸은 예수님 몸에만 해당이 되고 나머지기는 해당이 안 돼요. 다 죽었으니까. 예수님의 몸에서 누가, 죽은 자에게 성령이 찾아온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몸이 돼요. 내 몸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리고 내 몸이 예수님의 몸이 되어서 그냥 부활될 때, 일단 내 몸의 모든 것은 날아가 버려야 돼요. 내 몸, 행함 이런 모든 것은 의미 없습니다. 무의미합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무의미해요.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내 죽음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거예요. 인생의 모든 활동은. 백날 해봐야 죽어요. 죽었는데도 저녁 먹으로 가고, 죽었는데도 뭐 공부하는 거예요. 해봐야 안 살아나요. 그게. 해봐야 성경공부 한 나, 저녁 먹은 나, 죽어요. 언제 죽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죽어요. 이 강아지 해봐야 늙어죽어요. 주인이 안다가 미끄러져서 죽을 수도 있고. 강아지 선배처럼 그렇게 될 수도 있는 문제고. 지난번 강아지가 그렇게 됐죠. 지금 기독교교리라는 것은 다 잊으세요. 기독교교리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마귀가 “당신 귀합니다. 당신 천국 보내줄 테니까 우리가 시키는 대로 하세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입시생 프로모션이라고 해요. 입시생 프로모션. 갑자기 이걸 제목으로 하고 싶어요. 맞춤합격을 해주겠다는 거예요. 맞춤합격. 여러분들이 교회에 온 이유가 뭐냐, 죽어서 천당 가려는 거잖아요. 자기 가고, 자기가 좋아하는 자식들 다 데려다가 천당 보내고. 거기 가서 뭐 할 건데? 천국 가서 거기에 또 텐트하나 쳐요. 해가지고, 다른 옆집 302동이 오면 안 돼. 내 새끼하고, 우리 남편 봐줬다. 내 새끼, 내 남편하고 이래 우리끼리 살아요. 우리끼리. 뭐 버너도 가져가고, 뭐 천국 가서 야영할 일이 있습니까? 인간들이 세상에서 살다보니까 세상에서 만들어낸 그 모든 체제가 기껏 눈에 보이는 것, 아까 첫째 시간에 했던 눈에 보이는 그것만 담아요. 그래서 목사들이 설교할 때 뭡니까? “하늘나라에 맨션아파트 있잖아.” 천국에서 맨션아파트에 산다는 겁니다. 거기가면 산다는 거예요. 안 삽니다. 두 번 태어났다는 것은 뭐냐 하면 한 번은 죽었다는 것을 기정사실화시켜요. 제가 이런 말을 하게 되면 사람들이 안 좋아해요. 왜냐하면 제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정말로 사흘 만에 살아났기 때문에 그래요. 진짜로요. 사도행전에 사도들의 설교를 조사해보면 그들이 외치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고요. “예수님이 죽었다고 살아났습니다.” 뭐, 민주주의니, 우리나라 발전이니, 뭐 이런 거 하나도 없어요. 그냥 예수님이야기에요. 죽었다가 살아났다. 그럼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은 너무나 사실적이죠. 너무나 사실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안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실적과 경계되는 사실적인 것이 있어요. 뭐냐 하면 내 몸은 살아있다. 거울 앞에 내 몸은 살아있다. 사실적이거든요. 이 두 개의 사실적인 것에 있어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한쪽을 죽여야 돼요. 예수를 죽여야 내가 살아요. 이 사실을 완강하게 거부해줘야 내가 산다는 이게 정당화되는 느낌이 들어요. 만약에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이 사실 같으면 나는 지금 죽어야 돼요. 더 살 이유도 없어요. 날 위해서 사는 내 인생은 없어져야 마땅합니다. 없어져야 마땅한데 질질 끈다는 것은 내가 아마도 전생에 보이스피싱 주모자 같아요. 거짓말인데도 불구하고, 거짓인줄 알면서도, 내 구라에 넘어가서 그 덕분에 내가 좀 더 이유도 없이 그냥 살아보자는 이게 내가 믿고 싶은 사실이다. 이래 나와는 겁니다. 복음이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에 모두가 싫어해요. 너무나 명백하거든요.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이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에 모두가 싫어해요. 정말 안 믿는 사람들에게 복음 강의하고 설교하면, 어설픈 연기자들 같아요. 어설픈 연기자들의 특징이 뭐냐 배우들이 눈의 시선을 안 봅니다. 전부 다 시선을 회피해버려요. 고함 더 질러버리죠. 나중에는 시끄럽다고 난리에요. 설교내용은 거론 안 하고 시끄럽다고 난리에요. 목사가 설교 잘하겠다. 그 말은 설교 잘 하고 난 뒤에 그 다음 순간 내가 살아남아야겠다는 의도가 강렬하게 거기에 담길 수가 있어요. 죽어도 좋아가 아니라 설교 잘하는 목사로 내내 유지되어야 되겠다는 그 생각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럼 목사님 우리보고 어쩌라는 말입니까? 이 말이에요. 성경대로입니다. 살아있더라도 죽은 자로 살아있으면 돼요. 죽음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이 되는 겁니다. 죽음을 위하여.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하고 똑같아요. 아까 했죠? 세상 사람들은 뭐라고요? 죽음치다꺼리 하면서 살아가죠. 결국 아무리 붙잡아도 내 몸은 자꾸 내 손에서 빠져나가고, 내가 의도한 것이 없이 죽음 쪽으로 달려 나가고 있고, 더 살아야 돼! 더 살아야 돼! 바짓가랑이 붙들어도 또 매일같이 젊음과 청춘은 내 몸에서 빠져나가고. 점점 더 허리 아프고 기침 나고 마스크하고. 점점 더 이래하다가 우에 할고? 하루하루가 달라요. 하루하루가 다르고 점점 더 기력이 없어지고. 또 그걸 감추려고 하고.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하지만 우리의 죽음은 일상의 우리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합체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달려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죽음은 성공이죠. 십자가와 관련되어 있는 죽음이니까 성공작이 돼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어렴풋이 죽는다는 것을 알지만, 그때는 그때 문제고. 지금은 죽을 때까지, 죽는 그 순간까지 나는 영천에 집지어놓고 헬스하고, 신성일처럼, 불과 사흘 전에 웃통 벗고 헬스기계하면서 근육 만져보라고 했어요. 그게 MBC다큐멘터리로 찍어놓은 것이 있다니까요. 죽고 난 뒤에 두 방송에서 나왔어요. 하나는 KBS인지 SBS인지 모르겠지만. 근육 만져보라고 했는데 사흘 만에 죽었어요. 안 죽으려고 한 인간은 죽고, 죽으려고 한 인간은 골골대면서 계속 살아서 전국노래자랑하고 있고.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시편에서인가, 그때 니가 봐라. 니 옆에 있는 사람 다 죽어있다. 언젠가는 다 없어져요. 강아지도 죽고, 그 모든 게 죽어요. 미리 알아야 돼요. 이걸. 죽는다는 이것을 기정사실화시키고, 기정사실에서 ‘기정’을 빼버리고 그냥 ‘사실’이에요. 내가 죽는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둘 다 사실인데 왜 한쪽은 영생이 사실이고 한쪽은 지옥이 사실이냐 이 말이죠. 왜? 한쪽은 지옥 가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냐 이 말이죠. 그것은 양쪽 다 예수님이 안 놓치고 활동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은 지옥 가는 사람은 자기 뜻이 아니에요. 지옥 가는 것은 치밀하고 열성 있는 주님의 간곡함으로 지옥 가는 거예요. 주께서 지옥 가는 사람을 기어이 지옥가게 하셔요. 우리가 이걸 믿으셔야 돼요. 지옥 가는 사람을 그렇게 부러워하지 마세요. 그 사람의 큰소리치는 것을 그렇게 부러워하지 마시고, 큰소리치면서 그 사람은 죽어가고 있고 지옥가고 있어요. 그러니까 지옥가기 전에 마음껏 큰소리쳐라 이 말이죠. 이재명이든 누가 됐든. “나는 안 했다. 나는 김부선하고 안 잤다.” 마음대로 큰소리쳐라. 치되, 그 소리하면서 지옥가고 있어요. 주께서 그렇게 몰아넣어요. 얼마나 고맙습니까? 김정일이 그렇게 욕하지 마세요. 지옥가고 있는 중인데. 그렇게 배후에서 누가 역사하고 있습니까? 주님이 역사하고 있는 겁니다. 주님이. 그러면 우리도, 예수님이 우리도 이렇게 천국 가도록 몰아넣지 않습니까? 라고 하실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은 안 보이시는 분입니다. 안 보이는 거예요. 융털돌기라고 있거든요. 식도라든지 장에. 우리 내부의 융털돌기를 쫙 펴버리면 테니스코트만큼의 면적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융털돌기의 면적이 전부 다 외부와 접촉이 되어 있거든요. 인간 자체가 테니스코트라면 죽음에 딱 맞닿아있어요. 마치 우리가 밖에 나가면 미세먼지와 맞닿아있는 것처럼. 늘 죽음에 맞닿아있어요.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방금 지옥 가는 사람들도 자기 뜻대로 지옥 가는 게 아니고, 천국 가는 사람들도 자기 뜻대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주님과 코인사하고 있는 중이라고 보면 돼요. 코인사가 뭡니까? 아빠엄마가 자식들 예뻐할 때 코를 맞대고 막 부비면서 하죠. 그야말로 코가 맞대고 있죠. 딱 맞대고 있는 거예요. 이쪽 테니스코트, 천국은 저쪽 테니스코트 이래 있는 거예요. 이것이 이미 주께서 정확히 인도하죠. 그러면 시간의 흐름, 변화라는 것은 무의미한 거예요. 이걸 지워버립시다. 그러면 정지된 것으로 봐요. 정지된 것. 스톱이 된 거예요. 이런 눈이 있어야 믿음이에요. 남 잘 되는 것, 괜히 속이 배알틀리고 그러지 마세요. 모든 것은 정숙하고 고요해요. 스톱이 되어 있어요. 내일도 무슨 일이 있는데 잘 안되면 어떻게 하지, 너무 초조하면 안 돼요. 내일이라는 변화가 아예 없습니다. 그냥 변화 융털돌기라니까. 또 하나의. 내일가면 내일의 주님이 또 계시잖아요. 내일의 주님은 또 뜹니다. 내일의 해가 뜨는 정도가 아니에요. 내일을 관장하고 하나도 자기의 능력에서 빠져나감이 없이 철저하게 관리하시는 내일의 주님이 또 내일의 해를 뜨게 만들었어요. 주님하고 코인사하는 것, 그게 믿음입니다. 주님은 밀쳐내도 코인사에요. 주님은 떠밀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천국 갈 사람은 꼭 천국가야 하고, 지옥 갈 사람은 꼭 지옥가야 되는 아주 세밀한 일을 하시기 때문에, 멀찍이 떨어질 리도 없고 떨어질 필요도 없고 떨어지지도 않아요. 우리가 눈에 보이는 인간들만 자꾸 얼쩡거리니까, 그 움직이는 존재가 다인 줄 아는데, 보이지 않는 분이 딱 붙어있다는 것이 오늘 본문이야기입니다. 이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누구한테 한 것이다? 나한테 한 것이다. 소자를 치워버리세요. 지극히 작은 자를 치워버리면 곧바로 직접 맞닿은 것은, 주님과 맞닿은 채로 살아가는 겁니다. 더 이상 뭐가 필요합니까? 이게 최고 아닙니까? 내가 정지되었다는 것. 그럼 정지되었으면, 우리가 보통 정지되었으면 정지된 상태가 어떤 상태가 정지된 상태에요? 죽은 상태죠. 죽은 상태에 있는, 죽은 상태는 뭐 째도 가만히 있어요. 진작 그리 살지. 진즉에. 째도 고소 같은 것 하지 말고. 돈 좀 사기 쳐도 그만 가만히 있지. 진즉에 그렇게 살면 되잖아요. 호들갑은 왜 그리 호들갑을 떨고 있어요. 마치 살아있는 척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나 안 죽었다 이 말이거든요. 주식 좀 내려가니까 호들갑을 떨어. 펀드 좀 내려가니까 호들갑을 떨어. 신한은행에 전화해서 펀드 몇 퍼센트 떨어졌는지 아주 호들갑을 떨어. 땅 사놓은 것, 땅값 올라간 것, 119부동산 알아봐가지고 호들갑을 떨어요. 주님보기에, 주님 눈으로 보세요. 아예 우리 눈을 빼가지고, 주님의 눈동자로 갈아치웁시다. 눈으로 보세요. 우리는 뭘 해도 그 자리에서 제자리 뛰기에 불과합니다. 그 확정된 운명의 밭에서, 어떤 사람은 가라지, 어떤 사람은 알곡, 재배작물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가라지와 알곡 그 외에는 없어요. 주께서 이렇게 절대로 자기의 결정에서 못 벗어나도록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사실, 명백한 사실입니다. 명백한 사실이에요. 믿읍시다, 라고 하는 말도 잘못이에요. 왜? 죽었으니까. 다시 이야기합니다. 정지된 것은 죽은 겁니다. 그러면 제가 이렇게 펜을 들게 하신 것은 주께서 들게 하신 거예요. 놓는 것은 주께서 놓게 하신 거예요. 눈을 깜빡이게 하신 것도 주께서 깜빡이게 하신 거예요. 주님의 코인사에요. 다 그렇게 하신 거예요. 묵시라고 하는 겁니다. 이 역사는 다 죽은 거예요. 역사 인식도 죽은 거고. 자, 그러면 이렇게 아시고, 지금까지 한 것은 주의 눈동자로 바꿔치기 한 거예요. 그럼 주의 눈동자 빼버리고 인간의 눈동자로 다시 바꿔치기 해봅시다. 아까 인간의 눈동자는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의 몸이라고 했죠. 자, 아담의 몸에 달린 눈으로 집어넣습니다. 그렇게 했을 때, 아담의 몸은 홀로서기 하는 거예요. 홀로서기하게 되면 지금 혼자 자기 자신이 홀로 살아남은 거죠. 홀로 살아남은 거예요. 가인의 예를 들면 가인이 아벨을 죽일 때, 죽은 자가 아벨입니까? 가인입니까? 분명히 아벨은 죽고 가인은 살아남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뭐냐 하면 아벨은 하나님과 살아있고 가인은 죽은 자가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지옥 가는 사람들은 뭘 나타나느냐 하면은 내가 나를 살리기 위해서 온갖 노력한 그것을 유감없이, 평생 죽을 때까지, 눈감을 때까지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들을 주님 앞에서 다 드러내면서 발악을 해야 되고, 분통을 해야 되고, 격분을 해야 되고, 짜증을 내야 되는 거예요. 살아가면서. 모든 것을 다 해야 돼요. 신자도 마찬가지죠. 신자는 다만 그러한 모든 것이 주께서 허용하신, 우리가 죽어 마땅함을 알리기 위해서 마귀 짓했다는 것을, 그들은 믿음이오니까 아는 거고. 다시 이야기합시다. 성도는 뭐냐 하면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니고, 홀로 있지 않고 겹쳐있는 거예요. 주님이 함께 있는 것이 성도에요. 물론 예수님이 코인사로 주도권을 쥐고. 그런데 불신자는 뭐냐 하면 눈에 보이는 것이 다에요. 거울 앞에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보입니까? 안 보이잖아요. 우리도 안 보이지만 우리는 알아요. 왜 아느냐? 묻지 마세요. 그것은 성령께서 알게 하시니까. 나는 홀로 있지 않다. 주님이 간섭하고 지켜보고 있다. 아는데, 불신자는 그게 안 된다니까요. 그게 안 되거든요. 그러면 거울 보면 나잖아요. 내가 거기에 살아있다 이 말이죠. 살기 위해서 뭔가 해야 돼요. 직장을 다니든지, 뭐 어떤 노력을 하든지, 땅을 파든지, 시위를 하든지, 사기를 치든지, 뭘 해야 돼요. 하는데, 그 하는 모습이 뭐냐 하면은 아까 처음 강의할 때 이야기한 거치대가 있죠. 뭘 걸어놓는 것. 그게 뭐라고 했습니까? 선과 악이죠. 그러면 인간이 살아남아야 하겠다고 하면서 선과 악을 행할 때, 결과적으로 뭐냐 하면 내가 사는데 유리하면 선이고 내가 사는데 불리하면 악이 되는 겁니다. 참 웃기죠. 웃기는 이야기에요. 지금 강아지가 얼마나 잘 듣는지. 아이고, 강아지야 고맙다. 예수님께서 아이들을 본받으라. 아이들처럼 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못 간다고 했어요. 그냥 본받으라는 정도가 아닙니다. 어린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갈 수가 없다고 되어 있어요. 어린아이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후회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두 살 애들 후회 막 하던가요? 아니, 세 돌 아이들까지 후회 안 해요. 아까 이야기했던, 우유 약간 뜨거우니까 놓으면 되는데, 진짜 놓으면 돼요. 근데 막 던진다니까요. 그냥 땅바닥에 내쳐요. 무슨 감각이 먼저냐 하면은 “이거 먹으면 안 돼!” 이게 더 강하지, 그 뒤에 미래가 어떻게 되고 하는 그것은 몰라요. 본성적으로 내치거든요. 그래서 엄마가 나무라잖아요. 그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어린아이의 특징은 후회가 없습니다. 그리고 기회를 잡지 않아요. 어린아이의 특징은 기회를 잡지 않습니다. “다음에 잘할게. 다음에 할 때는 내가 많이 해야지.” 이게 없어요. 기회도 없고 후회도 하지 않아요. 그냥 뭐냐 하면 즉흥적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어린아이는 시간과 거래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시간과 거래하지 않아요. 청소년쯤 되면, 엄마가 뭐라고 하면 “다음에 잘할게.” 이렇게 하거든요. 근데 이미 어린애가 아니에요. 지금 지가 살겠다는 것이 언어로 표현된 것입니다. 근데 의도되면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 즉흥적인데, 그럼 어린애같이 되려면 기회를 얻겠다든지 후회한다는 이것이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죠. 다시 말해서 기회를 줘봐야 소용이 없고 후회해도 소용이 없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고 하니까 갑자기 어떤 노래가 생각이 나는데. 후회해도 소용이 없어요. 그럼 기회도 소용이 없다는 말은 뭐냐 하면 시간을 끝까지 가본들 내 운명은 내 손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살고자 하는 노력하고는 전혀 무관하다. 그런 뜻이죠. 다른 말로 하면 “선과 악에서 선을 버리고 악을 택하겠다고 애쓴 그 모든 노력이, 절대로 나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었구나!”라는 것을 미리 당겨서 아는 거예요. 미리 당겨서. 주님의 성령에 의해서 인간은 다시 태어나면 어린아이로 태어납니다. 어린아이로 태어남이 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태어난 거예요. 예수님의 죽음을 버리고 부활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음 속에서 부활된 거예요. 그러니까 그 부활의 질이, 본질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공로가 담겨있는 채로 부활될 때, 이게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몸은 부활로 남아있지만 이미 영으로 부활된 거예요. 그걸 가지고 요한계시록 20장에서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첫째부활이라고 하는 겁니다. 제가 벌써 또 부활이라고 하면, 성경에는 부활 아니라고 하는데 부활했다고 하면 이단이라고 하는데, 첫째부활. 요한계시록 20장 5절에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부활이라” 6절, “이 첫째부활에 참여한 자는 복이 있고”라고 되어 있죠. 그 첫째부활이 있다는 것은 무슨 부활도 있다? 둘째부활이 있고. 첫째사망이 있다면 둘째사망도 있고. 둘째사망은 영원한 지옥에 가는 것이 둘째사망이에요. 첫째, 둘째 이것을 마귀가 싫어한다고 했죠. 왜냐하면 마귀는 인간을 아담의 자손으로 만들었으면 마귀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어요. “끝까지 너는 사람으로 살아라 이 말입니다. 니 몸은 하나뿐이라고, 니가 주어진 이 몸이 전부라고, 거기에 너는 모든 승부를 걸어야 된다.”라고 그렇게 계속해서 가르치는 거예요. 그 가르침이 그냥 가르침이 아니고 우리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르침이에요. 거기서 나온 노래가 뿜뿜~~이에요. 계속 뿜어져 나와요. 방탄 소년단이 왜 좋아요? 그냥 좋아요. 그냥 뿜어져 나오는 거예요. 그냥 뿜어져 나와요. 뿜어져 나온다는 것은 뭐가 나온다? 선악논리가 뿜어져 나와요. 선과 악.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내가 선한 것은 내가 사는데 유리한 것이고. 단지 생존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이왕 살아있으면 멋있게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산다, 잘 산다, 남이 부러움을 살 정도로 잘 사는 것까지 다 포함해서 여기 산다에 포함시킨 겁니다. 밥이나 먹여주는 것은 교도소에서도 살죠. 그게 아니고 보란 듯이 사는 거예요. 그걸 선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빌딩을 갖고 있는 재벌이 있다고 합시다. 재벌3세고 한 20대인데, 까불락 거리기가 한량이 없다 이 말이죠. 걔에게 친구들이 있잖아요. 재벌3세이면 친구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많다 이 말이죠. 술집에 가서 돈 한 천만 원씩 날리고 쓴다 이 말이죠. 그러면서도 이 재벌3세가 뭡니까? “너희들은 나로 인하여 산다.”라고 보죠. 갑질 하는 거죠. 너희들은 나로 인하여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너희들은 나를 부러워하면서 사는 거예요. 나를 부러워하면서. 이렇게 살고 싶은 거예요. 쉽게 말해서 “을이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고 갑으로 사는 것이 사는 것이다.” 이 말이죠. 상대적으로. 그러니까 우리는 자꾸 상대를 찾을 수밖에 없고 상대를 만날 수밖에 없어요. 한 20년간 적금 넣어서 아파트 한 25평짜리 샀는데, 오랜만에 여고동창생을 만났는데 자기 집에 놀러 오래요. 이번에 100평짜리 아파트 샀는데 놀러 오래요. 4분의 1밖에 안 돼요. 그리고 하는 말이 “나 이렇게 살아.”라고 하는 순간, 그렇게 못 사는 나는 살아도 시시하게 사는 것이 돼요. 제대로 안 사는 것이 돼버려요. 제대로 안 사는 것이 됐다고요. 그래서 제대로 살려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보다 망해버린 친구를 만나야 그나마도 숨을 쉬는 거예요. ‘아, 그래도 사는 게 맞긴 맞구나.’ 우리는 만날 인간이 이렇게 살아요. 그냥. 이렇게 산다고요. ‘이만하게 사는 것도 우리 부모가 날 위해서 얼마나 기도를 해줬다고.’ 그러니까 교회 다녀도 소용이 없어요. 교회 다니면서 기도한 내용이 뭐냐 하면 잘 살게 해달라고 기도한 거예요. 잘 살게 해달라고. 우리 아버지가 교회에 목돈으로 헌금한 것도, 선교헌금 많이 낸 것도 잘 살라고 선교헌금 낸 거예요. 전부 다 마귀한테 속아 넘어 간 거예요. 내가 설치지 않으면 나는 못 산다는 것이 원리 아닙니까? 그러면 거기서 나오는 법칙이 있어요. 살아있는 내가 더 사는 것, 이 보편적인 법칙이 오늘날 뭐냐 하면 과학이라고 하는 겁니다. 과학(지식). 모든 과학지식은 진보 때문에 그래요. 진보. 발전. 이걸 진화라고 하죠. 원래 진화라는 단어는 없어요. 진화라는 단어는 없는데 진화라는 단어를 너무 많이 써요. 원래 다윈이 말하는 것은 진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변화를 이야기한 겁니다. 어떻게 달라질지는 모르잖아요. 그냥 변화한다. 모든 동식물은 변화한다고 했지 진화한다고 안 했는데, 앞에 ‘진’자를 넣어버리면 변화해도 좋게 달라진다고 인간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이기적인 유전자’를 썼던 리처드 도킨스도 마찬가지고. 진화한다는 거예요. 진화하는 것이 아니에요. 변화하는 거예요. 사람들은 변하죠.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변하죠. 늙어죽죠. 진화론 공부 많이 하면 뭐합니까? 늙어죽는데. 지가 박사 되고 의학박사가 되면 뭐합니까? 늙어죽는데. 죽음이 사실이에요? 과학이 사실입니까? 죽는 게 사실이에요. 너무나 명백해요. 너무나 명백하다고요. 이렇게 고함치면 고함지르지 말라고 하는데, 고함지르고 안 지르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너무나 명백하다니까. 움직여봐야 소용이 없어요. 사는데 유리해요. 사는데 유리하면 또 착각한다니까요. 어제보다 더 살았구나! 어제보다 더 산 게 아니고 주께서 더 살게 하신 거죠. 주께서. 왜? 주의 공로를 자꾸 마귀한테 속아가지고 내 공로로 전환시키니까. 주께서 원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어요. 감사하는 거예요. 범사에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겁니다. 죽으라고 하는 것이 자살하라고 하는 말이 아니에요. 자살하나 안 하나 그건 의미 없고. 자살해도 주의 뜻이 되어야 하니까. 감사하라는 말이죠. 죽더라도 살더라도,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 되는 것을 감사하라. 주께서 아이고, 내 새끼하면서 코 비비는 코인사 하는 것을 감사하라 이 말이죠. 감사하려면 나는 늘 주님이 살아계셔야 돼요. 주님이 살아있고, 나는 사나 안 사나 그거 의미 없어야 돼요. 주님이 살아있다는 내 증거로 주님이 살아있는 거예요. 내가 잘났다는 증거로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자, 그러면 영생 얻는 것은 주님의 덕분으로 치자. 왜? 주님의 생명으로 얻었으니까. 그러면 벌은 왜 받습니까? 라고 할 때에, 원래 영벌은요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에요. 여기 요한계시록 20장 10절에 보면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라고 되어 있거든요. 거기에 마귀가 불과 유황불에 들어가요. 근데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누가 들어가느냐 하면, 8절에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사망이라”라고 되어 있거든요. 둘째사망, 지옥불에 가요. 그럼 여기서 살인자, 믿지 아니하는 자들, 흉악한 자들, 살인자들, 행음자들과 술객들, 우상숭배자들, 거짓말 하는 자들은 어떤 자들이냐 하면, 이거는 특정인물이 아니고, 아까 이야기한 주님께서 영벌에 집어넣기 위해서 마귀 말 외에는 절대로 안 믿는 자들로 그렇게 만든 겁니다. 말이 어렵죠. 사도바울이 사도된 것은 본인의 실력이 아니고 환경 탓이에요. 환경이 사도로 하여금 그렇게 몰아세운 겁니다. 사도바울이 다메섹에 내려갈 때 ‘이쯤 되면 예수님이 오실 텐데.’ 이랬습니까? 그냥 찾아왔잖아요. 우리가 성령 받을 때 ‘이쯤 와서는 성령 받아야 되는데.’ 이랬습니까? 그냥 찾아와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한꺼번에 다 믿어진 거예요. 한꺼번에. 한꺼번에 믿어진 거예요. 이거 빼고 저거는 다음번에 믿고 이런 거 없어요. 아까 했잖아요. 기회가 주어진다든지, 후회한다든지 이거는 성도한테 있을 수 없다고요. 이거는 어린애 같은 심정이 아니에요. 선악을 유지하게 되면 자꾸 후회가 된다니까요. “다음에 잘할 걸, 잘할 걸.” “다음에 믿을 걸.” 믿는 것도 우리 힘 같으면 믿으면 되는데, 우리 힘으로 믿은 게 아니기 때문에 후회될 건덕지도 없어요. 그냥 어린애에요. 어린애는 부모한테 태어나서 어린애된 거예요. 태어날 때 어린애부터 있잖아요. 주님이 두 번째 창조하신 거예요. 생명으로 창조하신 거예요. 주께서 우리 어머니고 주께서 우리 아버지라는 말이죠. 우린 주님의 패밀리고. 그래서 주님과 우리는 하나가 되는 거예요. 내 힘이 아니에요. 하나 되신 주님이 그로 하여금 그 일을 하도록 하신 거예요. 어린아이들은 좀 뻔뻔스러워요. 던져놓고 나 몰라라 하면 끝나버려요. 무슨 일 안 한 것처럼. 세상이 돌아가는 것은 결국엔 영벌과 영생밖에 없는데, 이것은 바로 오늘 본문에 의하면 이 작은 자한테, 그러니까 성령 받은 자에요. 이 작은 자, 성도한테 하지 않은 것이 곧 나한테 하지 않은 것이다. 이래 되어 있어요. 여기서 지난주일 낮 설교할 때 제가 끝부분에 한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속임수라고 했죠. 마귀는 속이는 자에요. 마귀는 우리를 계속 속였습니다. 마귀는 우리가 겁나서 그런 것이 아니고 주님이 하신 것을 차단시키기 위해서, “제발 십자가에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그딴 이야기는 하지 마라. 살아있는 것은 우리가 살아있지 주님은 벌써 죽었다.” 계속해서, 매일, 매순간 일상생활 하는데 계속 가로막아요. “니가 노력 안 하면, 니가 취직 안 하면 니는 굶어죽어.” 계속 우리를 죽음에 궁지로 몰아넣고 한다 이 말이죠. 이게 속임수인데, 주님의 속임수는 뭐냐, 악마한테 속아주면서 악마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 주님의 속임수에요. 지극히 작은 자, 우리 보기에 지극히 작은 자가 별 대단치도 않아요. 근데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어요. 마귀가. 왜냐하면 이 성도가 지 잘났다고 해서 경쟁하는 사람 같으면 건드려도 괜찮아요. 그런데 이 성도의 특징은 뭐냐 하면 본인이 아무것도 아니래. 본인이 아무것도 아닌데 주께서 아무것도 아닌 자로 다시 태어나서 살게 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주님을 거론함에도 불구하고, 근데 마귀가 아무것도 아니니까 까불지 말라고 건드려버린 거예요. 이거는 폭탄을 건드려버린 거예요. 폭탄을. 지옥 가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자기들 기준해서 대단해보인 사람은 우대해주고 대수롭지 않는 사람은 무시하거든요. 근데 이 성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복음 외에는 스스로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에, 누가 봐도 건드릴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처럼, 그렇게 함부로 누가 건드려도 그냥 다 자빠지고 엎어지는, 아무 힘도 없고 대들지 못하는 그러한 미미한 존재처럼 간주하는데, 의도적으로 주께서 이 성도를 미끼로 세상에 내세운 거예요. 미끼로. 걸려들라고. 그래서 천국은, 가서 천국이 아니라 이미 천국인 것처럼. 지옥도 꼭 죽어봐야 지옥이 아니고.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곧 지옥입니다. 악마가 십자가복음 못 들게 만들고, 계속 잘하면 잘될 수 있다고 변화를 독려해요. 악마가 하는 일은 뭐냐 하면 우리가 잘되도록 계속 격려해주는 일을 악마가 해요. 잘 될 거야~ 잘 될 거야~ 라는 노래 있잖아요. 잘 풀리는 집처럼. 잘 될 거라고 자꾸 격려해주고, 독려해주고, 엎어지면 용기를 부여하고. 악마가 하는 유명한 표어가 있어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이게 악마가 이야기한 거예요. 하나님의 표어는 뭐냐, 하나님은 스스로 돕지 않는 자를 스스로 돕지 못하도록 돕는다. 이게 주님의 표어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게 정지되어 있고, 죽은 모습이고, 운명이 확정되어 있다는 그 안목. 주님의 눈동자가 우리의 눈동자를 바꿔치기 해서, 그런 안목으로 어두운 세계를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