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81012b야4장8절(관통)-이 근호
안양20181012b야4장8절(관통)-이 근호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두 번째 시간은 첫 째 시간보다 더 난해합니다. 왜냐 하면 사람은 없고 관계망만 있어요. 사람은 왜 없느냐 결국은 몇십년 있으면 없어져요. 새로운 애는 있어도 없어진다고요. 홍해에서 건너온 이스라엘 백성 다 없어졌습니다. 나중에 약속의 땅에 갈 때는 두 사람밖에 없었지요. 여호수아와 갈렙 그 외에는 다 없어요. 그러니 인간은 없음입니다.
안양 땅에 사람들 많이 있잖아요. 나중에 다시 보아라. 다 없어질 것이다. 성경 말씀에 그런 게 나와요. 없어질 사람입니다. 없어질 사람이니까 없다고 해도 관계없습니다. 그러면 뭐가 남아 있느냐 예를 들어서 서울에 아파트가 있잖아요. 만약에 폭탄을 맞았다고 생각해봅시다. 폭탄을 맞으면 건물을 없어져도 뭐가 남아 있느냐 비로소 건물에 가려져 있었던 도로망만 달랑 남지요. 이게 관계망, 다른 말로 하면 연결망만 남아요.
제가 첫 째 강의할 때 이스라엘을 관계할 때 율법으로 뚫는다고 했잖아요. 뚫는다고 할 때 다 이걸 생각해서 이야기를 한 겁니다. 사람은 없으되, 뚫어놓은 율법은 영원하리라. 말씀은 영원하거든요. 이사야40장 말씀처럼. 우리는 관심사가 뭐냐 하면 이 주님의 율법에 영원하다는 말씀에 영원하다는 여기에 관심은 두지 않고 잠시 보이는 사람들이 저 사람은 모르는 사람, 이 사람은 아는 사람. 자꾸 사람들에게 관심 있고 그리고 거울 앞에 비치는 나에게 관심을 두고 살아요. 평생 동안.
이것은 뭐냐 하면 우리의 생각에 지평선을 넓혀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 공간적 지평선을 넓힐 필요가 있고 그건 해외에 놀러 가면 되고요, 시간적 지평선이 더 중요해요. 시간적 지평선을 넓히되 어디까지 넓히느냐 하면 죽음의 넘어 까지 시간의 지평선을 넓히는 겁니다. 죽음의 넘어 까지.
그게 바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하시고 그 다음에 가까이 하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게 뭐냐 하면 마음을 낮추라. 되어있지요. 하나님을 가까이하되, 어떻게 만난다? 마음을 낮추면 된다. 하나님 가까이. 마음 낮추기. 두 가지를 다 이루신 분이 계셔요.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포기하시고 낮아졌는데 어디까지 낮아졌느냐 하면 빈민굴 정도 낮아졌습니까? 아니면 고시원에 갈 정도로 낮아졌습니까? 어디까지 낮아졌습니까? 죽기까지 가셨지요. 죽기까지. 죽음이라 하는 것은 없어짐이거든요. 있었는데 내가 없어질 때까지 낮아지는 겁니다. 조금이라도 내가 있으면 있는 만큼 더 낮아질 것이 생겨버려요. 내가 항상 있으면 인간은 모든 세상 돌아가는 것을 내 이익중심으로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조만한 양이 있어도 항상 그것 자체가 응축이 되는 겁니다. 사람은 크면 클수록 실속 없다고 하고 작으면 뭐라고 합니까? 작은 고추가 맵다고 하지요. 당차다. 하는 거예요. 몸뚱이는 작아도 할 것은 다한다. 그런 취지잖아요. 그만큼 밀도가 높은 거예요. 몸뚱이는 작아도 할 건 다한다 하는 것처럼 사람이 크나 작으나 조금이라도 자기 게 있으면 여기서부터 욕심이라 하는 것은 덩치와 관계없이 욕심은 덩치와 비례하지 않습니다. 덩치는 작아도 욕심은 세상 모든 걸 가지려하거든요.
여러분, 마음을 낮춘다고 해서 가난하게 되는 게 마음을 낮추는 게 아닙니다. 가난하다고 욕심이 사라지는 게 아니거든요. 욕심이 응축되겠지요. 오히려 복수심이 더욱 강렬해지는 겁니다. 지난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지만, 지난 수요일도 그렇게 이야기했지요. 사람들은 자기를 피해자로 보는 경향이 있다고 했습니다. 뭐 별 한 것도 없는데 자꾸 내가 뭔가 손해 봤다. 자기가 피해자라고 의식하니까 뭐를 기대하게 되느냐 하면 “신이시여, 보상 안 해줍니까?” 신보고 보상해 놔라 하는 거예요.
내 인생을 동탄에 갔다가 이리 둘러봤다. 뭐 자꾸 뭔가 피해를 본 느낌이 들고 손해를 되게 많이 본 느낌이 들고, 하나님께서 도와준다면 보상이라도 좀 이렇게 응답해줬으면 하는 그런 생각이 들지요. 그게 왜냐 하면 성경을 볼 때 복음은 끝장인데, 끝장 보는 식으로 신앙을 하지 않아서 그래요.
끝장을 보는 것을 제가 간단하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죽은 나와 죽어가는 나, 이 둘 사이에서 십자가 복음이 나를 관통해버리면 죽어가는 나는 아니에요. 이미 죽은 나가 됩니다. 여기에 대한 성경구절은 로마서6장 2절, 갈라디아서2장20절 잘 나와 있어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나니, 이 말씀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제가 관통이란 말을 한 겁니다.
왜냐하면 이 말이 틀린 말이 아니고 구약 때 율법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개인구원이 아니고 하나님의 율법으로 그들을 뚫어놨거든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출애굽기20장과 24장에 보면 언약을 세울 때에 양푼에다가 피를 담아가지고 먹어라 해서 온 피를 골고루 뿌렸다고요. 희생제물의 수혜자가 공동체가 되는 겁니다. 개인이 아니고 “아! 나 피 두 방울 튀었다.” 이런 게 아니에요.
피가 양이 얼마나 나한테 많이 튀었냐가 아니라 이 피의 주인공이 누구냐, 희생의 주인공이 누구냐 하는 거예요.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닌 거예요. 사도바울도 아니고 베드로도 아닌 거예요. 오직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대장질하면 안돼요. 관통했으니까.
요번 교재에 보면 강강수월래 하지요. 강강수월래가 우리나라의 전래놀이인데 특징이 뭐냐, 주인공이 없어요. 그냥 손에 손잡고 에요. 빙빙 돌고 노래만 불러요. 아가 뜻이 뭐냐, 노래 중에 노래에요. 그래서 아가 가사만 내용만 해버리면 좀 맛이 없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적당한 노래를 틀어줘 볼까,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노래 틀어주면 주부가요교실이 되어버려요. 남자라는 이유 때문에... 주부가요 된다고요. 그건 그 때 주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고. 내가 지금 걱정할 일이 아니고요.
죽은 나라면 이야기한다면 아무도 안 믿지요. 그 말을 안 믿는 이유가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이 함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이 함께 있을 때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안 보이고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있거든요.
그래서 나는 죽었다는 말은 뭐냐, 본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라는 뜻에서 나는 죽었다 이야기하는데, 옆에 남편분이나 “나는 죽었어!” “보니 죽기는 성질도 안 죽었는데. 왜 이래? 니 지금 나이 몇 살이고? 너는 똑같아.” “아니야, 나는 주님과 함께 있어.” “주님 있으면 보여줘.” 하거든요. 비가시적인 것과 가시적인 것의 연결고리가 뭐냐 희생입니다.
희생제물을 통해서 비가시적인 분이 가시적으로 위계 가식을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 보이는 인간을 위계적으로 말이 어렵지요. 위계적으로 계급을 지을 때 위에 있는 우열권을 가지고 우리를 통제한다는 뜻입니다.
모르드개는 옥에 갇혔고 에스더는 훌쩍 울고 기도를 할지언정 그 아하수에로왕은 밤에 잠이 안와가지고 옛날 지나간 실록 왕정의 일기장을 보고 있도록 누가 했어요? 주님이 그렇게 했어요. 왜? 모든 영광은 모든 결과는 원인과 결과를 주님이 혼자 다 독차지하기 위해서 일을 그렇게 벌이시고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그 사실을 증거 하는 사람이에요. 인생을 통해서. “나 안했다. 나 안했어. 내 기도발 때문에 한 게 아니야. 주님이 그렇게 했어.” 이리 하는 거예요.
기도하는 것도 기도해서 된 게 아니고 주님의 기도로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내가 기도하라 하는 이유는 내 기도하고 주님의 기도하고 한 번 견주어봐라. 우리 기도가 얼마나 세상 적이고 욕심내고 있는지를. 비교하면서 죄인을 더욱 죄인 되게 하기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신 거예요. 모든 말씀은. 모든 말씀은 율법적 기능을 가지고 바늘로 기능을 뚫는 겁니다.
이와 나왔으니 잠깐 정리하고 가실게요. 모든 말씀은 처음부터 새 언약이 아니고 옛 언약이 있었지요. 옛 언약 있고 그 다음 새 언약이잖아요. 옛 언약이 율법이지요. 율법은 우리를 저주케 하잖아요. 오늘날 신약의 사도바울의 명령이나, 사도바울의 명령이 아니고 주님의 명령입니다. 모든 명령은 요 노선을 그대로 가지고와요. 말씀이 딱 오잖아요. 먹는 거 입는 거로 족한 줄 알라. 딱 율법적 기능을 가지고 쑤셔댑니다. 바늘 딱 들어가요. 바늘 들어가면 여기서 졸지에 우리가 뭐가 됩니까? 죄인 되지요.
죄인은 뭐냐 하면 이미 죽은 거예요. 옛날 고대에 죽은 자를, 여러분 장례를 치루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죽은 자의 장례를 왜 치룹니까? 그동안 정 때문에 좋은데 가시라고 노자돈 하라고 좀 주고 이렇게 장례를 치루는 거예요? 후손들이 조상을 장례를 치루는 이유가 장례를 거창하게 치루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죽은 자를 그냥 놔둬버리면 고대인들에게 죽은 자의 영이 있는데, 육이 있는데, 육 + 영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육은 죽었잖아요. 그러면 문제는 영은? 이게 통제가 안 된다 이 말이에요.
죽어놓고 자식들 아파트 자고 있는데 들어와 가지고 “야들 잘 있느냐?” 영이 덤벼들면, 영이 귀신이거든요. 덤벼들면 이건 육으로 있을 때는 아버지 효심 뭐 향 피우고 하겠는데 귀신 되면 이건 기겁을 하는 거예요. 아버지 돌아가셨잖아요. 왜 이러세요? 그것도 술한잔 먹고 술한잔 먹은 귀신 돼가지고 왜 이러십니까? 하면 기겁을 할 거다 말이죠.
만약에 지금 지난 8월말에 우리 어머니 돌아가셨는데 만약에 제가 자고 있는데 야들아, 띵동 해가지고 그동안 보고 싶었지. 보고 싶었겠어요? 보고 싶겠어요? 대전 현충원에 다 안장했는데 두 번 다시 깨어나지 말라고 가루로 만들어가지고 조립하기 힘들게 그렇게 했는데 에스겔도 아니고 그렇게 했는데, “얘들아! 잘 있었나?” 오게 되면 와~ 반가운 게 아닙니다. 기절하지요.
왜 장례를 하느냐 하면 제발 갔으면 오지 말라는 뜻으로 장례를 거창하게 원 없이 진짜 두 번 다시 못 오게 보내드리는 거예요. 그것도 보냈나 안 보냈나 걱정이 되어가지고 또 삼오에다가 한 번 또 확정지어요. 그게 모자라가지고 49제해가지고 두 번 다시 오기만 해라. 전기 철조망을 두 번 쳐가지고 오기만 해봐라. 이리 하는 거예요.
죽었으면 이제 볼일 보지 맙시다. 하고 보내버리는 거예요. 남편 일찍 죽었다고 그리워하지만 죽은 남편 오면 제일 먼저 기절할거죠. 그래서 죽은 자를 장례를 할 때 떠나보내면 섭섭합니다. 뭐냐 하면 장례를 크게 치러주게 되면 이 영적세계에서는 육적세계하고, 옛날 사람 이야기에요. 지금. 성경이야기 아니고.
받아먹은 게 있으면 그만큼 토해내는 게 있다고 보는 거예요. 장례를 잘해주게 되면 이 죽은 분들이 후손들에게 하는 사업이나 가정행복에서 이게 공동체로 후원한다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후원해요. 그리고 이 가정뿐만 아니고 돌아가신 분을 옛날에는 밀집으로 계곡사이에 산 이에 자기들 공동체를 이루었거든요. 이 집안에 죽은 자의 큰 느티나무를 심어가지고 죽은 자들은 이 느티나무에서 1년에 한 번씩 영혼을 달래줘야 돼요. 노인들 누가 가셨던지 선거철 앞두고 국회의원 후보감들 막걸리 주문해가지고 돼지고기 편육해가지고 이렇게 해서 인사하러오지요. 한 번씩 죽은 사람한테 인사하러 오는 거예요. 그저 잘 해주셔가지고 우리 공동체 번영회 잘되게 해주옵소서. 야쿠르트에 독타지 않는 그런 사건 일어나지 않게 친하게 잘 지내게 해달라고. 이렇게 해드리는 거예요.
죽은 사람에게 장례를 치루는 이유를 알겠지요. 이게 뭐냐 자기의 살아있는 인간은 좀 삽시다. 마음 편하게. 그러니까 모든 인간의 문화라 하는 것은 인간은 자기중심이에요. 그래서 자연과 극히 문화를 대립시킵니다. 대립시켜서 자연의 것은 자연에 돌려보내고 우리는 우리끼리 하는 요구할 때 여기에 희생제물을 바치는 거예요. 희생제물이라든지 추수감사절을 드리는 거예요. 요 문화가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창세기4장에 가인의 후예들입니다.
가인의 후예들이 그 사람들이 종교를 만들어가지고 계속 죽은 조상들이 집합한 곳을 신의 세계라 보고 거기다가 정기적으로 제사와 예배를 드리는 거예요. 문화의 일종이니까. 이유가 뭐냐 하면 제발 우리가 성과 했던 이 문화와 문명을 좀 손대지 말고 좀 훼손하지 말고 잘 되게 해달라는 거예요. 전부 다.
왜 그러느냐 하면 조상보고 너희들 하면 안 되지만, 당신들은 이미 죽었고 우리는 아직도 살고 있잖아. 산 사람은 좀 살자. 숨이나 좀 트자. 이런 마음으로 이 자연세계의 일부를 죽은 자의 세계로 따로 할당을 해가지고 자연의 일부로 죽은 자의 일부로 같이 할당해서 거기서 잘 되게 해주면 죽은 자가 자연을 잘되게 해가지고 농사도 잘 되게 하고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돌아다니면서 수렵할 때는 희생제물이 없어요. 그냥 바친 사냥꾼 중에서 주지만 정착해서 농사 짓기 부터는 희생을 드리는 걸 했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신은 야생 신에서 그걸 야생이라 하는데, 야생과 문화의 대립인데요. 야생 때는 모든 자연에 떠도는 들소 같은 것도 그냥 들소가 아닙니다. 들소가 아니고 신이 우리에게 사냥감 잘 맞도록 사냥감이 일종에 우리를 딸이라고 본다면 하나의 사위처럼 고기를 제공하기 위해서 내 눈 앞에 사슴이 뛰어 노는 거예요.
그래서 고기 주셔서 감사하다고 잡을 건 잡되 사냥고기를 나머지 가지고 또 드리는 거예요. 잡혀주셔서 고맙습니다. 신이시여. 모든 움직이는 것은 생동이 있고 생동은 영이 있고 그 영은 보이지 않는 신령한 곳에서 우리 같이 살려고 하는 거예요. 같이.
그런데 그건 뭐냐 하면 수렵 그러니까 쫓아다니면서 살 때였고, 정착해서 살 때는 제발 우리 거 손대지 말라고 우리 울타리 들어오지 말라고 할 때는 “에라, 우리가 받은 것 중에서 우리가 성의를 다해서 죽음까지 우리가 가축을 야생을 잡는 게 아니고 가축 중에 잡아요. 소나 양을. 가축 중에서 잡아서 우리의 정성을 받으시고 쓸데없이 더 달라고 하지 마시고 제때 복이나 주시라고 그렇게 문화 지키기 위주로 나간 겁니다. 얼마나 이기주의입니까. 종교라는 게 이정도로 이기주의에요. 기독교, 불교 다 만찬지지로 이렇게 이기주의에요.
우리 가정 무슨 종교 믿느냐, 말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구원은 새 이스라엘 보편 적에 해당되지 우리 가정 잘되라고 기독교준 게 아니거든요. 어느 정도 우리 의식 가운데 계속 나는 살아있기에 더 살아야겠다는 그런 비 복음적인 것이 아직도 육으로 계속 나오는 겁니다. 그래가지고는 백날 낮춰봐야 안 낮춰져요. 낮추는 것이 오히려 교만이에요. 낮추는 시늉을 한다는 것이 뭐냐 열배 스무배 더 반대급부 아까 보상, 피해 입은 거 회복, 이런 걸 노리면서 일부러 희생하고 싶지도 않지만 스스로 희생하는 연기, 연출을 꾸미고 있는 거예요. 평소에 주님 죄송합니다. 믿씁니다. 거기에 쌍시옷이 왜 들어가는지. 쭈여! 이러고. 그래도 잘되면 그레이쎄이 욕하고. 항상 자기 위주입니다. 자기 위주. 공동체 위주가 아니고.
자, 공동체는 뭐냐 하면 이스라엘은 이미 죽은 자에요. 이미 죽은 자를 왜 죽은 자냐 중간에 중심됨은 살고자하는 걸 뭐로 뚫어놨습니까? 율법으로 꼬챙이처럼 다 뚫어놔 버렸어요. 이미 저주받은 자가 무슨 짓을 해도 저주에요. 살려고 노력해도 결과는 뻔해요. 저주로 끝납니다. 이걸 딱 뚫어놨어요. 그러니까 이 짐승의 피는 용서고 축복이 주는 피거든요.
이스라엘은 바로 제사를 통해서 복 받은 민족입니다. 문제는 사무엘 다음에 그 다음 왕인 사울 왕에 가면 이 제사가 뭐가 되느냐 하면 이게 형식화되고 말아요. 형식화. 형식화라는 것은 일종의 이미 뭐가 되느냐 하면 문화가 된 겁니다. 맨날 요새 이야기하지만 교회가 문화센터 된 것처럼. 교회는 구경거리에요. 쇼하고 있어요. 우리는 관람이에요. 나중에 끝나고 난 뒤에 관람용 내면 그만이에요.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 예배가.
예배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요한복음4장에서 예배는 그것이 아니라고. 아하수에로왕이 밤중에 자기는 갇혀있는데 밤중에 잠이 안와서 옛날 왕궁의 일기장을 보게 하신 그 하나님의 활동 덕분에 지금 모드드개가 풀려나온 것처럼 주님의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인 주님의 활동의 결과로서 혜택을 나는 입고 있다. 이 관계가 믿음이잖아요. 이게 예배다 말이죠. 예배.
일은 주님이 벌려놓고 그 결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동의한 게 그게 예배에요. 오늘도 아침에는 맛있는 만두를 먹었습니다. 아침부터 만두 먹는 사람 없지만 하여튼 주께서 만두 주셔서 그냥 공짜로 먹었습니다. 그게 오늘 드린 예배에요. 그게. 천주교 신자처럼 마리아상 해놓고 묵주 하나 딱 걸어놓고 비는 라틴어 할 줄 모르면서 라틴어 하는 이런 게 예배가 아니고 오늘 예배 끝. 5분 만에 끝. 이게 아니고 또 큐티한다고 큐티 나무라지는 않겠습니다. 성경공부라 생각하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평소에 눈만 뜨고 모든 것이 나 몰래 하는 주님의 행위가 내가 하나의 결과로서 이렇게 주어졌습니다. 라는 그 연결망. 오늘 또 제목 바뀌었다. 연결망이다. 어느 거 할지 모르겠다.
하나의 연결망. 관통된 연결망만 남으면 돼요. 결국 우리는 여기에 아이스케키 하드 있잖아요. 하드의 꼬챙이. 여름이 되면 어떻게 됩니까? 아이스케키는 다 녹아도 뭐는 안 녹아요? 작대기는 안 녹잖아요. 그 작대기가 연결망이에요. 그게 언약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내가 율법을 믿고 십자가를 믿는다 생각하지 말고 십자가가 들이닥쳐 가지고 십자가가 찾아와서 나는 십자가의 묻은 콩고물이라고 생각하시라는 말이지요.
발상의 전환,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주인공은 안보이지만, 살아계시는데 그 분은 영원히 살아계셔야 되고 나는 잠시 등장인물로 등장했다가 빠지면 되는 겁니다. 어릴 때 봤던 영화, TV 없으니까 영화 봤잖아요. 영화 보면 영화 필름도 안 좋아요. 영사기에 비가 막 와요. 비가. 거기에 보면 꼭 누가 나오느냐 하면 허장강 나오거든요. 허준호 아버지지요. 허장강 나오면 벌써 관객들 알아요. 이 사람 역할이 뭔가 허장강하고 독고성이라. 독해요. 독고성. 악인 또 있어요. 좋은 사람은 기억 안 나고 나쁜 사람만 기억나고.
허장강 딱 나오면 뭐냐 하면 그 사람은 악한 역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이 있어줘야 영화가 부정적인 면이 살아나요. 그러면 허장강은 뭐예요? 그러면 허장강은 나쁜 사람입니까? 지는 하고 출연료 챙기면 되잖아요. 할 때 전 국민이 빨리 죽으라고 소원한 사람이 있어요. 거기 못된 사람 나오지요. 일본 사람...., 그거 죽으라고 했거든요. 진짜 죽었어요. 그 사람. 그 역할을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거예요. 얼마나 우리가 못돼 먹었으면 아직 안 죽었는데 주님은 우리를 뭐로 본다? 죽은 자로 보는 거예요. 아이스께끼에요. 우리는 죽은 강도고, 세리에요. 창녀에요. 죽은 자로 보는 거예요. 죽은 자로.
그러면 오늘 본문 봅시다. 야고보서4장8절,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주 앞에서 뭘 낮춰라? 니 마음을 낮춰라. 어디까지? 죽는 척 아니에요. 죽는 척 하면 안 돼요. 어디까지? 진짜 나 자신을 알아야 돼요. 진짜 죽었구나! 죽는 척이 아니고 진짜 죽은 거예요.
제 딸이 질문 했는가 누가 질문했는지 모르겠어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죽은 자와 죽어가는 자가 있어요. 사람들은 죽었다 하면 안 믿어요. 왜냐하면 비가시적인 존재를 결부해서 이해하지 않고 자꾸 눈에 보이는 것만 해가지고 “어? 니가 좀 늙어가네. 곧 죽겠네.” 죽은 자를 줄곧 죽어가는 자로 오해하고 있어요. 그 오해하는 본인이 뭐냐 하면 자기를 자꾸 죽어가는 자로 인식하고 있는 거예요. 죽어가는 자.
죽어가는 자가 있으니까 그 다음에 무서운 결과가 나와요. 죽어가니까 뭘 대비해야 됩니까? 천국 갈 대비해야 되잖아요. 어디가야 돼요? 교회가야 돼요. 이 구조가 잘못된 거예요. 이게 성경구조가 아니에요. 죽어가니까 나중에 이 땅에서는 고생하지만 죽어서는 좋은데 가야지. 그러면 교회 와서 목사 말 들어야지. 내라 하는 거 다 내고 십일조 내고 뭐 다 내야지. 이리 되는 거예요.
그러면 두 번째 뭐가 문제냐 하면 죽은 자가 아니고 죽어가는 자로 간주하잖아요. 성경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고 이미 죽은 자로 보신다니까요. 아~ 이 연사는 외칩니다. 물 마셔야 돼요. 왜 교회를 보이스피싱이라 하고 사기집단이라고 제가 왜 하느냐 하면 여기에 십자가에 근거 때문에 제가 이렇게 외치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죽어가는 자가 아닙니다. 죽은 자고. 이건 그냥 현상이에요. 현상. 죽었기 때문에 서서히 늙어가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낮춰봤자 인간은 죽어가는 게 천당 가려고 마음을 낮춰봤자 야고보서4장 마음을 낮춰라, 주여 마음을 낮췄습니다. 낮춰봤자 응집이 된다니까. 키 작아도 응집이 이 안에 다 들어있어요. 살아야지! 살아야지! 뭐로 사는데? 말씀 지켜서 살아야지! 이러면 신을 멀찍이 보는 거예요. 신이 그 사람한테 온 적이 없어요. 온 적이 없으니까 자꾸 상상하는 겁니다. 이케요? 저케요? 이거 바치면 돼요? 저거 바치면 돼요? 자꾸 이렇게 하는 거예요.
목적은 신의 영광. 무슨 소리? 신의 무슨 영광이에요? 자기 살라하는 거죠. 그런데 아까 로마서3장 보셨지요. 율법이 관통한 것은 우리로 꿱 하는 소리도 못하게 만들었어요. 완전히 큰 나무로 우리의 중앙지점을 살려하는 중앙지점을 그냥 꽂아버린 거예요. 지렁이를 그냥 건드리면 꼼지락 꼼지락 꿈틀거리잖아요. 꿈틀대지도 못할 정도로 꿱! 완전히 찍어버리는 거예요.
전봇대 같은 것으로. 찍어버리면 차라리 편해요. 왜? 주께서 아하수에로왕을 밤에 잠을 못 자게 만들어가지고 그렇게 하듯이 지금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다른 변수들이 연결 연결되어서 지금 이 집까지 꾸몄잖아요. 이건 예상도 못한 거예요. 다른 변수들. 이런 예는 한두 가지 아닙니다. 아들 낳을까 했다가 딸을 낳고. 딸을 낳을까 생각했다가 아들 나오고. 이것은 세상 모든 일이 내 마음대로 안돼요.
6시 되면 남편 퇴근할까 여겼는데 6시 반에 사고 나서 죽었다. 이렇게 되면 뭐예요? 그럼. 이건 기절할 겁니다. “내 남편은 왜? 저 나쁜 짓 한 남자는 살고. 왜 내 남편은?” 이렇게 될 거예요. 그래서 대구강의 본문이 이거였습니다. 새가 죽는 줄 모르고 평소에 하는 대로 늘 가다보니까 그물에 걸린 거예요. 그리고 너희 인생도 새하고 똑같다는 겁니다. 성경에 있어도 우리는 귀담아 듣지도 않아요. 그런데 귀담아 듣던 말든 하나님께서는 아하수에로왕의 옛날 궁정일기를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대로 우리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파동을 보냅니다. 변수를 보내지요.
그러면 살아있는 내가 예상한 일과 보이지 않는 주께서 활동한 일과 이게 어긋나게 되어있습니다. 어긋나는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건 내가 아무리 꼬마라도 생각한 온 세계를 다 풀만한 생각을 갖고 있는 게 인간입니다.
얼마 전에 스티븐 호킹이라는 물리학자 있지요. 착해도 지옥 간 불신자에요. 계속 살아있으면서 신은 없다 그 소리 한 사람인데. 그 사람이 제시하는 복음은 뭐냐 하면 꼭 불교 같아요. 이렇게 이야기해요. 신이 있어서 우주를 만들었다면 인간은 신보다 더 위대하다. 왜? 그 우주를 이미지화시켜서 내 머릿속에 담으니까. 우리가 갖고 있는 이 두뇌가 신보다 더 크다. 이런 소리 한 사람이에요.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아무리 뭐가 일어나도 인간은 그걸 생각하고 그것까지 예상하고 그것까지 뛰어서 뭔가 기대한다는 자체가 일어난 사태보다 더 위대하지 아니한가, 그걸 믿는 종교에요. 그 사람은.
아주 건방 떨었어. 몸만 아픈 게 아니고 마음 정신 다 아파요. 곧 죽어도 죽는 이유를 몰라요. 과학자가 뭐 그런 거에 관심 있겠어요. 왜 관심이 없느냐 하면 남들이 으샤 으샤 해 주니까. 노벨상 받았는데 아깝다느니, 뭐 위대한 천재니 하니까 막 거기에 뽕 간 거예요. 자기가. 오늘 본문대로 하면 뭡니까? 마음을 안 높이고 싶어도 주위에서 들쑤셔요. 점점 더 높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보겠습니다. 정리해 보겠습니다. 높은 자 반대말은 낮은 자지요. 자, 주님은 어디서 기다립니까? 주님은 높은 2층에서 기다립니까? 낮은 자리 1층에서 기다립니까? 오늘 본문대로 하면 낮은 쪽에서 하나님이 기다리지요. 아까 첫 째 시간에 했지요. 하나님을 상상하지 마라고요. 우리 사람들 코 앞에 등장한 하나님을 보라고요. 다른 하나님은 없어요. 다 가짜에요. 다 우상이고. 인간이 만든 거고.
낮은 데서 기다리는데. 그러면 낮아지면 되지 않겠느냐. 문제는 주님이 낮아짐이 어느 정도냐 말이지요. 주님은 죽었어요. 주님의 이 땅의 마지막 모습은 죽음입니다. 왜냐 부활할 때 아무도 본 적이 없거든요. 부활되고 난 뒤에는 고 몇 몇 사람이 봤지만, 부활할 과정에 대해서는 아무도 본 사람이 없어요. 이건 처음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기 예수님이 임신해서 태어날 때는 누가 봤습니까? 옆에 요셉이 봤고 마리아가 봤잖아요. 예수님이 태어날 때는 다 봤지만, 돌아가실 때는 아무도 못 봤어요.
죽고 무덤 닫아버렸으니까. 어떤 공작에 의해서 주섬, 주섬 옷 갈아입고 다시없어졌는지 그 두꺼운 문을 어떻게 밀어 제쳤는지 거기 CCTV달 줄은 몰랐지요. 그 때는. 닫아도 소용없어요. 죽은 자가 일어나겠다는데. 이게 귀신 곡할 노릇이에요. 죽은 자가 일어나는 것을 흑백 CCTV로 보세요. 본다고 봅시다. 이게 믿어집니까?
예수님이 죽은 데서 살아난 것이 안 믿어지잖아요. 그런데 성령이 와서 우리보고 뭐냐 하면 그 분이 지금 살아있고 지금 부지런히 활동을 쉬지 않고 활동하고 있음을 믿으라고 성령을 주신 거예요. 그러니 나의 활동이나 나의 예상, 기대는 개코도 아무 소용없어요. 아무 소용없습니다. 문을 열 때 주께서 힘을 주셔서 열게 하신 거예요. 나는 지금 문을 연다. 비비빅! 로봇처럼 하지 않고, 평소대로 하잖아요.
평소대로 하는데, 어! 근육 나갔다. 못 열지요. 이 말은 평소에 문 열 때 내 착해서 문 열었다고 하지 말고 주께서 주신 힘 가지고 문 열었다고 모든 게 주님이 개입했다고 믿어라 이 말입니다. 모든 게. 그리고 늙어가고 주름살 있다고 너무 서러워하지 마세요. 원래 죽은 자기 때문에 마음껏 늙음을 증명합시다.
나는 죽어간다고 증명하지 말고 죽었다고 증명하는 거예요. 그러면 죽은 자의 낮아짐은 더 낮아질 필요 있어요? 없어요? 이 십자가 죽음이 제일 마지막 밑바닥인데 뭐를 더 낮출 필요가 있어요. 그냥 막 살지요. 이게 마음 낮추는 거예요. 조심스럽게 살고 자기 절제하고 관리해서 사는 게 낮아짐이 아니고 뭐든지 감사한 마음으로 사는 게 낮아짐이에요.
만약에 죽어가는 자가 조심스럽게 살게 되면 이 사람은 절대로 감사할 수 없습니다. 조심하기 때문에 선을 택하고 뭐를 버리겠어요? 나름대로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한다고 조심하겠지요. 이렇게 선과 악을 해놓고 나머지 뭘 기대하느냐 보상을 기대하고 자기가 얻고자 하는 바를 예상하고 고대하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이들이 보이스피싱에 걸리는 겁니다.
어떤 분이 보이스피싱에 걸려가지고 돈 날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자꾸 남의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 사람이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어요. 그런데 제가 수요일에 이야기한 것은 어떤 딸은 14억 날렸지요. 14억 날린 이유가 무엇 때문에 날렸다고 했습니까? 효심 때문에. 효심 때문에 날린 거예요.
그냥 가만히 놔뒀으면 아버지 어떻게 살든지 가만히 놔둬버렸으면 14억 자기하고 남동생하고 7억씩 돌아옵니다. 괜히 아버지 이리 살면 안돼요. 착하게 살아야지요. 하다가 아버지 패서 삐져서 14억 다른 사람 다 줘버렸어요. 제보자에 진짜 있었던 일이에요.
그러니까 딸 같으면 시집갔으면 지나 잘하세요. 효심부리지 말고. 그런데 딸들이 특히 둘째딸은 안 그래요. 꼭 맏딸이 그래요. 맏딸이 온 집안에 친정집안 책임은 온 수고와 짐은 지가 다 짊어져가지고. 시가집 돌봐야 되지 친정집 돌봐야 되지. 맏딸 티 다 내고 있어요.
그래가지고 또 하게 되면 노인네는 어린애거든요. 그냥 놔두면 아침 먹는 둥 마는 둥 점심은 노인정에서 먹고 저녁에는 먹는 둥하면 될 건데 살면 편한데 “아버님, 어머님, 이리하면 안 됩니다. 제가 밑반찬 해왔습니다.” 먹어보니 맛있거든요. 그 다음에 뭐하냐 하면 은근히 또 기대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우리 귀여운 딸 하다가 이년이 왜 안 오느냐 이리 돼요. 갑자기 한두 번 빠지면 이년이 아버지를 무시하고. 괜히 붕 띄워났어. 괜히 사람을 높여놔 가지고. 아버지, 엄마고 없어요. 이 땅에 아무도 없는데. 그냥 가만히 놔두는 게 제일 편해요. 각자 인생사는 게 최고다 말이죠.
자꾸 딸이고 뭐고 효심을 이용하게 돼요. 효심을 이용하게 되고 기대고 지는 편하고 그 모든 무거운 짐을 딸에게 아들에게 다 짊어져요. 노인정에서 10원뺑이 고스톱 치다 돈 잃은 것까지 복수해달라고 그 친구 고자질하고 다한다고요. 질을 잘못 들여놓은 거예요. 질을.
여러분, 자식들 키울 때 어떻습니까? 다들 키워봤지요. 어떻든가요. 여기 오늘 야고보서4장 말씀하고 한 번 비춰보세요. 여기 애통하고 울라고 했잖아요. 애 줘패가지고 애통하고 울도록 해야 되지 않습니까. 요새 젊은 애들 그렇게 키웁니까? 애통하고 울어야 돼요. 그런데 뭡니까? 항상 울까 싶어서 엄마가 먼저 “그래, 뭐 해줄꼬?” 붕붕붕붕~ 올려놔가지고.
학교에서 조금만 뭐하고 학교 안다닌다고 하고. 선생님이 조금 화내면 뛰어가서 112에 신고하고. 그게 학교입니까. 왜 부모가 자식들을 붕붕 띄우고 데도 않는 효심을 부려가지고 일찍 폐암 죽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내가 살아 있잖아요. 내가 살아있으면 나만 살면 안 되잖아요. 내가 공들인 것도 같이 살아있어야 돼요. 남편과 자식들도. 함께 살아야 돼요. 그래서 천국가도 내 요것이 나의 세계가 돼요. 나의 세계가 단체로 가야 돼요. 천국을.
지가 먼저 교회 나가서 하고 그 다음에 등산하는 남편 꼬셔가지고 교회 나와서 천당 가자고 하는 거예요. 이게 주님 영광이 아닙니다. 당신들이 없으면 내가 살아도 사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당신들이 없으면. 내 두뇌의 기억 속에 나 혼자 있으면 천국가도 못 살겠다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심심한 천국이라 합니다. 정막한 천국.
사는 것이 주고받고, 주고받고 하는 이게 뭐냐 하면 내가 중심이 된 연결망, 내가 중심이 된 관통, 내 생각을 상대방에게 주고 그 상대방을 끌고 올 때는 집어넣은 거기다가 장착시킨 내 생각가지고 그걸 근거로 낚시 닐 돌리듯이 남편이고 자식이고 내 맘대로 내 쪽으로 끌어당기려한다 말이지요. 내가 니를 위해서 공들인 게 얼마인데. 이걸 그냥 달릴 수는 없고 본전이나 찾아야겠다. 해가지고 잡아당겨서 맨날 하는 소리가 내가 얼마나 니를 키웠는데! 뭐 어떻게 했는데! 니가 그리 나오나. 그러면 자식이 나중에 결혼해도 독립을 못해요.
조금만 하면 기대어 들어오고 딱 와가지고 뭐 고기 집 한다 해가지고 고기 집 챙기지도 않고 계속 있고, 이게 노는 건지 연예인인지 분간도 안 되어가지고 계속해서 노끈장사 하는 아버지 밑에 하고 백씨부인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운전면허 떨어지면서 있는 체 해가지고 왕자표 크레파스 머리 해가지고 살림남에 나오는 광산김씨 보면 일상에 있던 그대로를 연출 없이 그대로 보여줘요. 우리가 그렇게 살아간다고요. 전부 다 뭐냐 하면 죽어가면서도 나는 살아있어. 를 자기 증명하는 거예요. 자기 생존을 증명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눈에 보이는 대로 그냥 보이는 대로 사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대로니까 가시적이지요.
가시적으로부터 어디를 간다? 천국 간다. 보이지 않는 곳에 가니까 이건 뭐냐 하면 미약한, 그야말로 아무 근거 없는 보장될 수 없는 점선으로 그냥 막연한 기대와 희망으로만 여기 어설프게 엮여져 있는 거예요. 이게 믿음입니까? 전혀 믿음이 아니지요. 뭐 십자가 믿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누구를 위한 십자가인지 몰라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주님 쪽에서 이미 여기서 기다려요. 주님이 십자가 지고. 성령이 십자가니까요. 십자가가 눈에 보인다 했거든요. 예수님의 죽으심. 죽으심이니까. 아까 다시 해봅시다. 죽은 자를 그 다음에 장례 치러서 그 다음에 살아있는 사람에게 죽은 자가 해코지 하면 안 되기 때문에 장례를 거창하게 치루면 주는 자에게 복을 준다. 이게 장례잖아요.
주님께서는 다시 살아계신 분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한테 옵니다. 주님이. 오게 되면 이미 죽은 분이 죽은 분으로 인하여 한 번 A(죽은 자.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B(눈에 보이지 않는 부활의 세계)갔다가 성령이 왔잖아요. 그러면 성령은 어디까지 책임진다는 말입니까?
부활의 세계까지 책임지시는 분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뭐냐 하면 죽어가는 자가 아니라 이미 죽었다고 확정 난 입장에서 여기 군포에서 사는 거예요. 이미 죽은 자에서 사는 거예요. 언제 죽어도 괜찮은 거예요. 차라리 소원이 뭐냐, 오늘밤에 데려가면 좋겠어. 살아봤자 별 볼일도 없고. 재미있는 것도 없고, 나 있으면 오히려 걱정하는 사람 더 많고 남한테 피해 입히고.
그러니까 내 몸이 떠날 때까지 내 몸이 분리될 때까지 하고 싶은 거 다하고 살아야지. 어쩔 수 없이. 물론 너무 막 가면 안 되고요. 막 살면 안 되고 요번에 짬뽕, 다음에는 칼국수, 다음에는 삼계탕, 그걸 이미 죽었기 때문에 일체 우리한테는 책임을 묻지 않거든요. 니 왜 이렇게 했어? 니 왜 저렇게 했어? 묻지 않아요.
“니 이렇게 하면 매매한다.” “니 그러면 벌준다.” 이게 겁이 안 나는 거예요. 그래봤자 죽기보다 더 하겠습니까. 그런데 이미 주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죽으면 천국이고, 살아있어도 천국의 혜택을 입는 거고, 뭐 이래도 좋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뭘 보상을 해주요. 보상을 다해줬는데. 죽어서 살리는 것보다 더 큰 보상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죄를 용서했다는데 그보다 더 큰 보상이 어디 있어요. 저주는 없고 정죄함은 없나니. 영생으로 이끄는 힘이 있다는데 뭘 더해줘요.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신약 성도 야고보서1장 1절, 흩어져있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있는 뭐라고 합니까?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지요. 이 구약 때 원리를 신약 때 그대로 완성된 채 집어넣겠다는 취지거든요. 그래서 야고보서에요. 야고보서는 구약의 율법이야기 다 이야기해요. 해놓고 그걸 우리에다가 관통으로 집어넣어버립니다.
집어넣어놓고 우리 입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나는 살아가고 있다.” 가 아니라 “나에게 이 말씀이 역시 죽기까지 낮추는구나!” 라는 야고보서4장의 말씀이 문자로만 있는 게 아니고 입으로 토해 나오게 하는 거예요. 관통됐으니까 뚫렸으니까 이 입으로 관통해서 내가 어떻게 잘났다가 아니라 “뭐 죽어도 그것도 복인데.” 라는 말이 서슴없이 나오는 거예요.
그럼 다른 사람이 미쳐나? 하겠지요. “보이지 않는 주께서 살아계셔서 나로 하여금 그런 일이 발생시키시네. 나도 이게 말릴 수 없어. 어쩔 수 없어.” 모르드개가 감옥에 있는데 풀려나왔어. 왜 풀려나왔는가? 나도 몰라. 왜 풀려나왔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주께서 그 왕을 일기장 보게 해서 공로를 인정해가지고 풀려나와서 말 태워가지고 온 사람들에게 이 사람 훌륭한 사람이라고 이렇게 해준 것은 이건 행운이지요. 예상 못한 겁니다. 왠 떡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도 나 같은 인간이 천국에 가서 영원복락을 누린다는 것은 이건 생각도 못한 겁니다. 그리고 지금은 형제, 남편, 아내, 자식 헤어진다 할지라도 그 모르는 새로운 공동체, 내가 미처 몰랐던 이 공동체를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 동거하며 살게 해줬다는 거. 사람도 바꿔봐야 돼요. 이거 뭐 늘 보던 사람 말고. 한 번 바꿔보는 거예요.
그 때는 여자도 없고 남자도 없어요. 그냥 천사와 같이 모르는 사람들과 같이 영원히 사는 겁니다. 알던 사람들은 교회에서 많이 봤잖아요. 그 사람들은 지옥가라 하고.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이렇게 훌륭하다는 게 아니고 또 내가 천당 간다는 게 아니라 주께서 나를 지금도 이렇게 계속해서 이끄시고 있음을 주님 살아있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주시고 성령을 주신 거예요.
이제 마지막으로 그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번 아가서를 이렇게 하게 되지만, 오늘 강의를 정리했다고 보면 되는데. 아가서에 보면 여자하고 남자 나오잖아요. 사실은 이 사람은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아가서에서 아름답다할 때는 그 자체가 종결형입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늙음이 없어요.
처음에 이 세상에서 여자와 결혼할 때는 참 아름다웠지요. 그런데 애기 낳고 아랫배 주름살하고 아이 먹을 때 같이 먹고, 잠자다 보니까 점점 몸매가 붓고 스트레스 받는다고, 애들 때문에 우울증 많이 걸려요. 우리교회에도 그런 분들 있는 거 같은데. 애 때문에 짜증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게 이물질이잖아요. 구더기 같으면 떼어 내면 되는데 이건 내 몸이라. 내 몸인데 평소에 내가 아가씨 때 했던 그 행동을 용납을 안 해요. 에~~ 하고 울고, 잘 때는 좀 자거라 말이죠. 남 잘 때 나 좀 편하게. 안자요. 잘 때 안자고 안잘 때 자버리고. 밥 먹을 때 밥 달라하고 동창생들하고 백화점에 가지도 못해. 애 안고 어딜 갑니까. 수유도 해야 되니까.
그러니까 사람은 그러다보면 망가지잖아요. 아가서는 안 망가져요. 그래서 아가서의 어려운 점은 아름답다는 것이 이게 늙지 않기 때문에 아름다운 건지, 그게 모호한 거예요. 그 자체가 아름다운 건지. 그건 그 때 돼봐야 내가 살아서 그 때 또 강의할 수 있어야지 나오지 지금은 미리 아무리 특별해도 이건 이야기 안 해줍니다. 안 보이는 주님이 살아있어서 그의 결과물이 오늘날 나의 이렇게 자유로운 삶이라는 걸 증거 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음을 낮춰라, 낮춰라, 해봤자 그 자체가 교만인 것을 예전에는 왜 몰랐습니까? 낮춘다는 것은 자기를 죽은 자로 간주하고 덤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주께서 진정 살려내고 있다는 것을 마음껏 자랑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