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181123b 마가복음13장 3-8절(사설예수)-이 근호 목사
광주강의20181123b 마가복음13장 3-8절(사설예수)-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3장 계속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새 언약을 이루시게 되면, 그 이루신 그 여파로 인하여 세상은 새 언약과 옛 언약으로 구분됩니다. 새 언약과 옛 언약을 합하면 그게 성경이죠. 말씀이거든요. 그래서 세상은 말씀대로 된 거예요. 말씀대로 되는데, 그 절차 그 진행상태에서 옛 언약이 먼저 있었고 새 언약에서 모든 게 마감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새 언약을 이루실 분으로서 옛 언약의 구조 속을 지금 통과하는 중입니다. 통과하는 중일 때, 예수님은 모든 사태를 아시고, 제자들은 알아요? 몰라요? 몰랐어야 되죠. 이게 중요해요. 모르는 게 아니고 몰랐어야 되는 겁니다. 무지가 평화를 가져다주는 거예요. 무지하게 만드는 그 조치를 하는 거예요. 무지하게 만드는 조치. 근데 인간은 악착같이 안 무지하려고 해요. 알려고 하는 겁니다. 인간의 그 안다는 것은 본인이 똑똑하다고 해서 아는 것이 아니에요. 주어진 상황의 경우에 대해서 적응하려는 본성이 있기 때문에 아는 겁니다. 뭘 알아야 대책을 세울 것이 아닙니까? 주어진 경우를 통해서 다음 경우가 가리어진다. 인간의 매일의 삶이 이래요. 높은 산에서 기도하면서, 저는 주님 구름타고 오시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고 있는데, 집에서 전화와가지고 손님 왔다고 빨리 가게로 오라고 하잖아요. 자, 예수님이 재림하는 것은 나중경우죠. 지금 가게에 물건 사러 손님 온 것은 어떤 경우입니까? 지금의 경우죠. 지금 경우가 뭘 가립니까? 나중의 경우를 가려버리죠. 우리의 일상의 삶이 늘 그래요. 그러면 그 손님을 냉대해야 될까요? 친절하게 해야 될까요? 친절하게 해야 되죠. 친절하려면 뭘 알아야 친절 할 게 아닙니까? “이거는 신상입니다.” 이렇게 뭔가 알아야 되죠. 안다는 것으로 인하여 내가 나를 살리는데 있어서 나는 절대로 나를 포기 안 해요. 왜? 나는 내 코앞에 있는 것에 대해서는 나는 전문가고 알고 있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되지, 무지의 사람으로 우리 스스로 넘어갈 수 있는 방식, 방법이 없습니다. 내가 바보라고 할지라도 바보라는 것을 알게 됐잖아요. 그러니까 자기의 앎에서 무지로 넘어갈 수가 없어요. 이게 소크라테스의 한계입니다. 인간은 무지를 아는 것이 진리라고 했는데, 그 과정에 대해서 소크라테스는 전혀 대책이 없습니다. 무지를 알기 위해서 계속 무지를 알고 있어야 되니까, 이거는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죠. 뭘 모르는지 알기 위해서 계속 알아야 되니까. 일단 아는 것은 아는 거고. 무지에서 아는 것은 빼고 나머지 여분의 것이 무지하다. 이런 계산이 나와야 되거든요. 그런데 주님은 니가 무지하기 때문에, 니가 이런 거 이런 것을 알고 있다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 뒤에 나오는 다른 경우가 지금 내가 있음으로 인해서 가리어진다니까요. 그러면 안 가리어지는 경우는 어떤 경우가 확 나오겠습니까? 주어진 경우에 방해받지 않고, 주님이 생각하는 그 다음의 다른 경우가 확 들어오겠어요? 어떤 경우? 이거는 한 경우밖에 없습니다. 내가 죽어서 뼈가 되게 되면, 꼼짝도 못하면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객관적이 되죠. 객관적이 되는데 조건이 있어요. 누가 죽어야 된다? 내 주관이 쓸모가 없어져야 돼요. 내 주관이.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하면 주님의 하신 일이 보이기 위해서 우리보고 요구하는 것은 ‘일찍’, 또 다른 말로 하면 ‘미리’ 죽으면 돼요. 미리 죽으면 된다. 죽어도 좋아. 미리 죽으면 돼요. 미리. 날마다 미리 죽으면 돼요. 그 방법을 알려드릴까요? 내가 하는 모든 일이 결국은 나를 죽게 하는 일이라고 인정하는 겁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이. 내가 살고자 하는 모든 일이 결국은 나를 죽게 하는 이유가 되었다고 인정하는 거예요. 이러한 생각이 틀린 생각이 아닌 이유는, 물론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나오지만, 예수님께서 가신 길이 어떤 길이냐 하면은 사는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잔을 마실 때 살기 위해서 잔을 마신 것이 아니잖아요. 그 잔은 달콤한 잔이 아니에요. 나의 쓴잔을 먹는데, 너희들도 내가 마시는 이 쓴잔을 먹을 수 있느냐고 묻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자살선동이에요. 자살선동. “나 이거 먹고 죽을 테니까 따라 죽을래?”라고 묻는 겁니다. 주님께서 내가 잔을 마시는데 너희도 결국은 마시게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하는 겁니다. 이 땅에서 자살을 먼저 선행해서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럼 이 땅은 어떤 땅이다? 이 땅은 죽이게 돼있는 곳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걸 총괄해서 죽는 거예요. 이 세상이라는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예수님이 죽지 아니하면 이 세상이 죽을 수밖에 없는 속성이 있다는 것이 이게 안 나타나요. 죽음의 땅에서 주님은 제대로 죽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죽으신 거예요. 근데 우리는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된 죽음을 모르는 채 죽어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언약이라는 것이 우리한테는 와 닿지 않기 때문에. 아까 첫째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언약대신에 우리 내면 속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이성이 있죠. 이성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이성은 아는 것은 알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이렇게 구분 짓는 것이 이성이거든요.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나한테 이익된 것은 원하고 내가 이익이 안 된다 싶은 것은 갖다버리는 것이 이성이 아닙니까? 그 이성의 구분에 의해서 배척받고 쓸모없다고 결정 난 사람이 누굽니까? 바로 예수님이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이 예수 믿는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라니까요. 예수를 버린 그 인간의 이성을 우리가 그대로 간주하고 있는 입장에서, 우리가 저 사람들은 예수를 버렸지만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 구라도... 김구라도 아니고. 어디 그런 구라고 있어요. 그건 거짓말이에요. 우리가 믿는 예수라고 하는 것은 나한테 이익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예수를 믿는 거예요. 그래서 나를 영원히 천국으로 보내줄 거라는 노림수, 어떤 실익을, 실제 이익을 노리면서 믿는 예수에요. 백퍼센트 가짜죠. 그건 마귀죠. 마귀. 오늘 뉴스에 보니까 네덜란드에서 어떤 행사가 있었습니다. 어떤 행사냐 하면은 산타클로스 비슷한 그러한 이름을 가진 그 사람이 원래 산타클로스의 원조랍니다. 그 사람의 생일이 12월 5일이에요. 25일이 아니고. 그 사람과 같은 동료들이 굴뚝을 통해서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그런 신부의 일을 했어요. 다만 현재 산타클로스와의 차이점이 있다면, 이게 북쪽이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해서 루돌프가 없다는 그거 하나에요. 그러면 아이들 입장에서 그 산타클로스가 선물을 주겠다고 한다면 아이들이 싫어합니까? 싫어해요? 안 싫어하잖아요. 근데 선물 안 주고 십자가나 이렇게 하면은 애들이 좋아합니까? “내가 먼저 죽는데 너도 따라 죽자!” 이러면 걔들이 엄마한테 신고하고 난리가 날 거예요. 주님은 죽자고 내 손목을 잡는 분이에요. 산타클로스할아버지 아니에요. 실제적인 이익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니까요. 왜냐하면 어떤 이익을 얻겠다든지, 구원을 받겠다고 하는 것은 다 어디서 나온 발상입니까? 우리가 못 빠져나오는 데서 나온 발상이거든요. 말을 계속해봐야 복잡만 해지고, 간단하게 하면 이렇습니다. 집이 불이 났다. 3층 건물인데 완전히 불이 났어요. 1,2,3층이 다 불이 났으면, 옥상으로 올라가야 합니까? 집밖으로 나가야 됩니까? 어느 쪽이에요? 집 전체가 불이 났잖아요. 그러면 어디로 가야 삽니까? 집안에 들어가면 안 돼요. 집밖으로 나와야 하죠. 집밖으로 나와야 된다고요. 근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집밖을 허락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인간은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몰라요. 하나님께서 만든 이 창조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만든 창조세계기 때문에, 창조주의 일부가 된 우리가, 부분이 되는 우리가 창조세계 밖으로 나가는 그런 여지를 준 적이 없어요. 이 세상에 같이 망하라고 준 겁니다. 망해야 삽니다. 망해야 살아요. 망할 때 이유를 알고 망해야 살아요. 근데 망할 때 그냥 망하면 지옥 되거든요.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불로 태우잖아요. 이 3층 건물을 불태우잖아요. 우리의 이론 같으면 불태우면 집밖으로 나가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인간의 이성에는 이 세상 바깥이 없어요. 이 세상이 인간보다 더 커요. 더 넓고. 더 깊고. 숨을 구석이 없다니까요. 숨을 구석이. 참 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숨을 구석이 없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미리 무너지면 돼요. 미리 자기 자신을, 불 심판이 오기 전에 불 받았다고 미리 죽으면 된다니까요. 미리 죽으면 돼요. 미리. 모차르트의 오페라에 ‘돈 조반니’라는 오페라가 있는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바람둥이거든요. 바람둥이인데 그 사람은 여자와 사랑을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여자를 연구한 사람이에요. 사랑한다면 그 여자를 끝까지 사랑해야 하는데 그게 아니고 연구한 사람이기 때문에, 연구재료꺼리가 없어지면 딱 버립니다. 자꾸 버려요. 돈 조반니 오페라가 못된 바람둥이 남자가 자꾸 여자를 버리는 것이 줄거리에요. 계속 버립니다. 버리는데, 마지막에 어떤 여자를 버리죠. 마지막 버린 여자의 아버지가 이 남자를 저녁식사에 초대를 했어요. 자기 딸한테 잘해주라고 초대를 했는데, 이 남자는 사랑하기 위해서 사는 남자가 아니고, 여자가 나 같은 여자가 있는지를 그것 찾기 위해서였기 때문에, 근데 그 여자들은 항상 그 시대의 관습과 도덕에 대해서 헤어날 수가 없는 거예요. 그게 짜증이 나는 거예요. 자기처럼 자유롭기를 바라는데 여자들이 겁을 내서 자유롭지 않은 거예요. 모차르트의 그 시대가 19세기거든요. 19세기에 있어서의, 옛날 구세대와 뭔가 날카롭게 해방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풍부하게 부풀어 나온 겁니다. 구태의연한 그런 전통이나 관습을 타파해야 된다는 그것을 강하게 풍기게 하기 위해서 만든 작품이에요. 그래서 여자아버지가 여자를 버리니까 결투를 신청했거든요. 젊은 남자가 간단하게 그 늙은 남자를 죽이죠. 아버지를 죽입니다. 죽여 놓고 초청을 해요. 저녁식사를 초대받았으면 관행상 또 저녁식사를 대접하는 거예요. 내일저녁식사 할 테니까 오라고 죽은 사람보고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그 죽은 아버지가 저녁식사에 응해요. 유령이 된 거예요. 귀신이 된 거예요. 귀신이 돼가지고 손목을 잡고 “가자!”하고 끌어당깁니다. 근데 그 주인공은 손을 놔도 되는데 안 놓습니다. 왜냐하면 “지옥의 불구덩이가 가장 안식처다.” 이렇게 주장하면서. 참회하라! 난 참회할 것 없다. 이게 바로 19세기에 개인주의가 드디어 등장하는 거예요. 각자 각자가 자기 인생관 자기 현실관이 따로 있거든요. 옛날에는 공적이 우선이었습니다. 공적. 공적이라고 하는 것은 국가도 공적이지만 가정도 공적이고 전통이 살아있어요. 나라는 사적보다 공적이 우선이 시대였습니다. 옛날에. 조선시대도 물론이고요. 최근까지도 그랬어요. 근데 지금 예를 들어서, 제가 방탄소년단을 보고 놀란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이슬람 소녀들이 머리에 뭐 보자기 덮어썼잖아요. 덮어쓰고 방탄소년단 팬들이 다 된 거예요. 방탄소년단 가사 보신 적이 있어요? 페이크 러브Fake Love, 또는 DNA라는 그런 노래들을 들어보게 되면,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꾸려간다는 겁니다. 내 인생은. 근데 방탄소년단을 누가 좋아합니까? 50대가 좋아합니까? 60대가 좋아합니까? 중학교 1학년부터 해가지고 6학년, 5학년.. 점점 내려가죠. 그러니까 걔들의 사고방식이 뭐냐 하면 돈조반니에요. 누가 그렇게 그걸 키웠습니까? 애들 줘 패는 교무과장이 없어서 그래요. 애들을 귀하게 키운 거예요. 귀하게 키우니까, 부모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자기들이 어릴 때 간섭받고 살았잖아요. 간섭받고 살았으니까, 이제 자기는 자식들을 건전한 육체와 건전한 정신과 사고방식을 가지고 거기다가 플러스하면 이제는 제대로 된 자유를 행사할 거라고 착각을 한 겁니다. 근데 부모들이 나는 자유가 없다는 생각, 나는 이렇게 힘들게 했다는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뭘 잊어버리느냐 하면은 인간은 자동적으로 이렇게 윤리적 도덕적인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거예요. 이게 얻어맞아서 생긴 거거든요. 왜? 사적보다 뭘 우선한다? 공적. 공적이란 게 뭡니까? 남을 배려하는 거잖아요. 요새 젊은 애들은 뭐가 없습니까? 타인이 없어요. 남이 없어요. 남이 없다니까요. 남은 무조건 나한테 간섭하는 사람이에요. 꼰대에요. 전부 다 무조건. 내가 뭘 해도 일체 나한테 간섭하면, 집안 식구도 공적이잖아요. 집안 식구든 누구든 나에게 원하는 대로 해줘야지 나한테 간섭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이거는 벌써 112나 119를 부르려고 손가락이 핸드폰에 올라가있다니까요. 동영상 찍으려고 벌써 준비가 되어있고. “니는 태어날 때부터 벌써 사람도 아니야.”라는 것을 아무도 가르쳐준 적이 없어요. 그 아이 자신들에게 니가 어떤 존재라는 것을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부모자신의 자투리, 우상처럼 그렇게 자식을 생각했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못다 한 한을 자식한테는 대물려 주지 않겠다. 이렇게 된 거예요. 출발점이 애는 0에서부터 시작을 하는데 그 애를 보는 엄마는 어느 정도 공적인 것을 아는 65에서부터 출발을 하는 거예요. 65에서부터 출발하니까, 애는 내 몸에서 태어났으니까 애가 태어날 때부터 65에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한 거예요. 거기다가 자유를 주게 되면 자기가 상실했던 것, 자기가 결핍했던 것 없이 애들은 이제는 부족함이 없이 만족하면서 행복하게 살겠지, 라고 이렇게 요구하는 겁니다. 애가 부모입니까? 부모가 애에요? 우리시대 때 부모한테 얻어맞을 때의 느낌은 참담함입니다. 부모한테 맞을 때, 선생님한테 맞을 때 무슨 느낌이냐 하면 “무너질 수밖에 없는가?”라는 겁니다. 내가 누구한테 얻어맞는다는 것은 무슨 뜻이에요? 나보다 더 센 영역이 있다는 뜻이죠. 그게 무슨 영역이냐, 공적영역이죠. 공적영역. 길에 담배꽁초 버리면 안 되고 침 뱉으면 안 돼요. 왜? 거리는 공적거리거든요. 자기 개인집이 아니죠. 길거리의 꽁초 다 누가 버린 거예요? 담배 안 피우는 사람이 버렸습니까? 그럼 담배 피운다는 것은 뭐냐, 간섭하지 마라. 내 돈 내고 내가 담배 피운다고 하거든요. 보세요. 뭘 뺀 거예요? 인간이 사적존재 되기 이전에 이미 준비된 공적영역이 있음을 전혀 지금 모르고 있는 거예요. 공적영역에서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 안 하고 있고. 그냥 나는 나다 부터해서 자꾸 나임을 고집부리는 거예요. 고집을. 그러면 이것이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이렇게 물으니까 주님께서 아까 이야기했죠. 그들이 해결할 수 없는 지경임을 더욱더, 지금 구약체제라고 했죠. 새 언약이 생겨버리면 졸지에 세상이 아니고 뭐다? 구약체제가 돼버려요. 그래야 새 언약과 대조가 되니까. 구약체제에서는 뭐냐 하면 6절에 봅시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7절,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8절,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 이 재난에서 하나님이나 자기백성들이 면제가 될까요? 같이 재난을 받을까요? 어떻게 됩니까? 같이 재난 받으라 이 말입니다. 고생하라 이 말입니다. 무너져라 이 말입니다. 무너지되 너는 알고 무너지고 그래서 구원받고, 모르고 무너진 자는 지옥 간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 예수님한테 기도해가지고 힘 길러서 편안하게 살고자 하는 그 심보자체가 아주 더러운 심보에요. 그게. 그게 자기 자신이 우상화되었기 때문에 나온 심보거든요. 주님 사랑합니다. 이 말을 분해해보세요. 무슨 뜻일까요? 나만이라도 편안하게 살게 하옵소서. 그거라니까요. 제발 나만이라도 편안히, 탈 없이, 경제가 나쁘더라도 나는 경제가 안 나쁘고, 날씨가 춥더라도 우리 집은 안 춥고. 이런 식으로. 주께서 하는 공적인 영역이 없고, 자기만 잘 되면 오케이지 않습니까? 그것 채워달라고 사적인 예수를 찾는 겁니다. 오늘 제목은 ‘사적인 예수’입니다. 공적인 예수가 아니고 사적인 예수에요. 개인적인 예수라니까요. 개인적인 예수. 그런데 주님께서 지금 이 예언을 하시는 것은 사적으로 니만 빼줄게, 라는 이게 아니거든요. 이거는. 자신에게 냉혹해야 돼요. 제발 니가 성도라면 성도답게 니 자신에게 냉정하고 냉혹해야 돼요. 우리 자신에게. 우리가 숨 쉬고 사는 것을 과분하게 여겨야 돼요. 목포에 있는 줄서서 사는 빵, 코롬방제과 빵 감사했습니다. 제가 설교시간에 늘 하죠. 감사와 고마움이 없으면 이거는 성령의 일이 아니다. 감사와 고마움. 근데 인간들은 지가 기준을 만들어요. “이거 이상 되면 감사하고 이거 안 되면 나는 미워할 거야.” 기준을 정하지 마라.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더 내려가게 해요. “이거 내려가면 화낼 거야.” 화내는 데까지 집어넣어버려요. 자기 자신에게 냉혹해야 돼요. 그리고 이런 재난과 지진. 우리 정신 차리라고 주신 거예요. 니 주제파악 하라고 주신 거예요. 지진에서 못 삽니다. 기근 들면 못 삽니다. 그래. 그게 너야! 살지 마라. 그래. 니는 내 뜻대로 살아있는 것이지, 니 뜻을 내가 맞춰준다고 니를 살려주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근데 제자들은 지금 어느 때입니까? 라고 묻는 취지가 뭐예요? 어떻게 지가 피할 길을 생각하는 겁니다. “봐 주소~ 우리 자신을 봐 주소~” 이런 식으로. “주님하고 우리 아는 사이 아닙니까? 절에 다니는 사람은 멸망해도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잘 돼야죠.” 이런 식으로 계속 버티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 6절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고” 그 다음에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미혹이죠. 많은 사람을 유혹한다는 것은, 이미 사람이 죽겠다고 하는 사람은 유혹이 안 되죠. 만약에 자살을 하려고 4명이 모여 있다. 그러면 펜션 주인이 그걸 알고, “여러분, 번개탄 치우고 자살 안 하면 내가 빵 줄게. 뭐 코롬방인가 그 빵 줄게.” 이러면 자살 안 합니까? 그게 죽으려고 하는 사람에게 유혹꺼리가 됩니까? 빵 몇 개가? 뭐 5억이나 주면 몰라도. 되겠어요? 안 되죠. 주님께서는 우리를 살릴 수 있는 어떠한 유혹꺼리도 제공할 마음이 일체 없습니다. 그런 마음이 없어요. 그런데 가짜예수는 뭘 합니까? “힘들죠? 여러분 위로받아야 마땅하죠? 제가 위로해줄게요. 누가 위로해줍니까? 여러분!” 꼭 윤복희 같아요. 맨날 위로받으려고 교회 가잖아요. “주여,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왔습니다.” “그래. 내가 위로해줄게.” 가스펠송에 유명한 이런 노래가 있어요.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라는 노래가 있죠. 여러분 생각 안 납니까? 요새 제가 강의 준비한다고요 노래 많이 모아놓습니다.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약하고 피곤한 이 몸을 폭풍우 흑암 속에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이게 외국사람이 작곡했죠. 근데 꼭 우리나라 사람이 작곡한 것 같아요. 가락이 청승맞고 하는데. 이게 뭐냐 하면 고난과 역경 속에서 주님 제 손을 잡아달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다른 이름으로 오는 가짜예수에요. 그게 미혹한다니까요. 가짜예수라니까요. 뭐 손잡아 줄 것이 있어요? 재난을 중지시키면 되죠. 기근이 안 들면 되잖아요. 하나님이 나를 도와줄 생각하지 말고 중간에다가 십자가를 한번 집어넣어보세요. 아버지가 아들을 어떻게 다루었습니까? 쓴잔을 마시라고 했죠. 이제 우리는 그 쓴잔을 마시는 것을 영광으로 아세요. 그 쓴잔 마시는 것. 마태복음 15장 1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지 않는 것은 다 뽑아낸다. 지금 주님은 솎아내는 작업에 나섰습니다. 왜냐하면 이게 새 언약이 완성됐기 때문에. 제가 아까 첫째시간에 뭐라고 했던가요? 더 이상 우리가 해결할 문제는 없죠. 이미 끝난 상황이에요. 이 모든 것이 끝난 상황이기 때문에 나중에 끝에 가서 무너지지 말고 미리 기분 좋게 무너지면 돼요. 기분 좋게 나한테 기근이 오시면 되고 나한테 지진이 오시면 되고. 그냥 모든 게 무너지면 돼요. 그러나 그걸 요청할 수 없죠. 자, 다시 건물이야기 해봅시다. 3층 건물에 불이 났습니다. 하나님이 일부러 불 질렀어요. 왜? 다 태워 없어지라고. 그래서 베드로전서 3장 20절에 보면 옛날에는 물로써, 건물이 있으면 물이 잠기겠죠. 방주가 동동 떠다니면서 8명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8명 살았지만 지금은 불로써 건물을 다 태워버려요. 불로 다 태우니까, 옛날에는 방주라는 것이 있어가지고 건물밖에 하나의 구조물이 있었죠. 옛날에는 방주가 있어가지고 물로 해도 따로 어떤 공간이 있었어요. 이 공간은 어디냐면 바로 거대한 더 큰 건물의 영역 속에서 방주가 있는 거예요. 왜? 방주는 사람 손으로 만들 수 있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이 새로 만드시는 그것은,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어떤 것도 아니에요. 마지막 때에 불심판에서는. 사람 손으로 짓지 아니한 성전이에요. 그러면 사람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은 의도적으로, 성전이 예수님 몸을 이야기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몸. 예수님의 몸이 성전이라면 그 성전의 기능은 어떤 기능이겠어요?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거부하고 거절하는 기능을 하겠죠. 비록 내가 건전해보이고 경건해 보이는 일조차도 주께서 그걸 받아주겠습니까? 거부하겠습니까? 그걸 거부하는 거예요. 그걸 거부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에 헌금하라, 기도하라, 찬양하라, 내가 받는다고 했잖아, 라고 하는데, 그걸 받는 것은 뭘 받느냐 하면 바로 성령 안에서 받죠. 성령 안에서. 이 성령 안에서 받는다는 말을 사람들이 오해해가지고, 내가 여기 있는데, 자아가 여기 있는데, 이게 주님께서 찬양과 기도를 받으려면 조건이 성령 받으라고 했으니까, 나라는 여기에다가 뭘 이렇게 합니까? 성령이 오는 거예요. 여기 지금 TV가 있는데, TV를 세우려고 하면 TV의 거치대를 하나 또 만들어야겠죠. 거치대를 만들고 TV를 걸어놔야 되지 않습니까? 그처럼 제대로 주의 말씀을 지키려면, 전에는 내 힘으로 안 됐는데 일단 성령, 성령이 거치대에요. 성령을 받고 난 뒤에 성령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받겠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성령에 대한 오해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의해서 주신 영이잖아요. 그럼 성령 안에서는, 성령은 물건이 아니고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은, 내가 죽었다. 근데 누구 때문에 죽었다고요? 너 때문에 죽었다는 말이 맞고, 더 구체적으로 하면 너의 의도와 생각과 너의 행함 때문에 돌아가신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아까 첫째시간에 했죠. 유대인들은 구약에 속하죠. 그들이 망한 이유는 우상숭배죠. 우상숭배가 생각으로만 우상숭배입니까? 그게 행동으로, 말로 나오겠어요? 행동으로, 말로 나오겠죠. 예수님이 여기 있고 유대인이 여기 있는데 예수님이 그냥 꼴까닥하고 돌아가셨습니까? 뭔가 조치를 했잖아요. 그들이 조치를 할 때에 그들이 어떤 특수한 집단에서만 그렇게 했습니까? 아니면 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거들었습니까? 빌라도가 사람들이 모였을 때에 이 사람을 살리기를 원해요? 바라바를 원합니까? 바라바는 강도거든요. 여러분을 해코지하는 바라바를 원합니까? 라고 할 때에 백성들은 뭘 선택했어요? 바라바를 선택했죠. 바라바가 좋다는 말이 아니에요. 예수보다는 낫다 이 말 아닙니까? 그죠. 바라바 키워서 뭐 할 건데요. 바라바가 좋다는 말이 아니라니까요. 아무리 바라바가 싫어도 바라바는 우리 쪽에서 납득이 되지만, 주님은 주님의 행동과 그 모든 말은 인간의 이성이 소화할 수가 없는 거예요. 감당이 안 되는 거예요. 감당이 안 되면 내 우상 작업에 차질이 일어나죠. 감당 안 되는 그 분이 와버리면 주도권이 바뀌잖아요. 내가 하는 모든 일의 가치와 내 의미를 찾을 길이 없습니다. 내 자존심과 명예를. 그 작업을 그대로 누굴 통해서 한다? 성령이 오게 되면 그 작업을 우리한테 그걸 하는 거예요. 우리는 그냥 성령 안에서 날마다 있으나마나한 존재로 없애버리는 겁니다. 세리와 창기가 구원받는 이유는 사람들이 그들을 전부 다 필요 없는 존재로 간주했기 때문에 그래요. 이 공적 상황이 아무 쓸모없다고 본 겁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순교자들이 나오죠. 왜 순교합니까? 왜 그렇게 목 베이고 왜 그렇게 미움을 받습니까? 현 다수의 사람들이 예수 믿는 복음을 세상 끝 날까지 좋아하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그 순교자들이 자기가 죽는 것이 본인의 소원이 아니에요. “나는 순교하는 것이 취미에요.”라고 하면서 손들고 하는 이런 게 아니라니까요. 그거는 외부에서 가만히 있어도, 주께서 어떻게 합니까? 그들로 하여금 복음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들을 미워하게 되고 밉상 받게 하도록 조치가 일어나요.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구약 때는 방주라는 따로 영역이 있었잖아요. 근데 신약에는 실제적인, 자연적인 영역이 없어요. 지리산 기도원에 가도 소용이 없어요. 바위야 나를 덮어라 해도 다 찾아냅니다. 도대체 숨을 곳이 없습니다. 피할 곳이 없어요. 주님의 그 진노 앞에서. 그러면 거기에 새롭게 만든 방주 같은 기능은 그게 어디냐, 라는 것의 논조를 지금 전하는 겁니다. 성경에 보게 되면 성령 안이라고 되어 있고, 지난주일 낮 설교에는 예수 안이라고 되어 있죠. 예수 안과 성령 안은 번지수가 도대체 몇 번지입니까? 무슨 길 몇 번지 그런 것 없죠. 성령 안, 예수 안이 이게 어디에 있습니까? 모르겠죠. 그래서 사도바울의 편지가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이 되는 내용들이 아닙니다. 신학이라는 게, 그래서 신학이 구원을 방해해요. 납득을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성령 안, 예수 안을 하려면, 이게 이 세상의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가 안 되잖아요. 근데 인간의 이성은 세상을 뭐로 보느냐 하면, 인간이 자기가 여기 있으니까 세상을 있음으로 본다고요. 있음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로 보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 안, 예수 안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니가 이스라엘의 스승으로서 그것도 모르냐고 해서, 이걸 뭐로 보느냐 하면 있음에 대해서 바람, 왔다가 가버린 바람이죠. 이거는 다른 말로 하면 그냥 우발적인사건이 되는 겁니다. 베드로가 고넬료 전도 못해서 환장을 했습니까? 아니죠. 고넬료가 어디에 사는 사람인지도 모르죠. 제가 여러분들을 만날 때 여러분의 성이 뭔지도 모르죠. 키가 얼마나 우뚝 큰지도 모르고, 딸 하나 있는지도 모르죠. 아무것도 모르죠. 자, 지금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하면 오늘날 방주가 어디에 있는지 그걸 찾는 겁니다. 주님께서 두 사람을 만나게 해요. 두 사람이 만나게 되면 두 사람이니까 둘이 되잖아요. 둘인데, 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로 인정하는 공유적인 영역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겁니다. 둘이 마음 맞춰서 만나버리면 이거는 1이 있고 1이 있고 1이 있으면 이거는 3이 돼버려요. 카페에 가서 모이자. 그러면 1이 되려면 이 1을 0으로 만들어버려야 되고 이 1도 0으로 만들어버려야 되고 이 1도 0으로 만들어버려야 되고. 이 1을 0으로 만들어버리시는 그 분이 새롭게 등장하는 1이 되는 거예요. 그게 주 안에서 서로 사랑하라, 교제하라는 말이에요. 주 안에서. 그게 로마서에 나옵니다.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제가 말씀드릴게요. 누구든지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죠. 이야기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성령께서 은사를 주게 되면 서로를 만나게 해주신다는 거예요. 성령에 의해서 만나게 해줘요. 성령에 의해서 만나게 해주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게 되느냐 하면, 1의 자격으로 만나지를 않아요. 0의 자격으로, 저쪽도 0의 자격으로 나와서 만나게 한다 이 말이죠. 마태복음에도 나오지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말은,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결국은 뭡니까? 내 이름을 거기서 상실해야 된다는 겁니다. 주님 앞에서 상실한 거예요. 다시 말해서 거기서 내가 죽어버린 거예요. 주님 때문에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끼리 모일 때, 그 공간이 새롭게 마련된 즉흥적인, 우발적인 새로운 방주가 되는 거예요. 예수 안이 된다 이 말이죠. 예수 안. 설명한 제가 더 어려워요. 그러면 목사님 만나면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만날 수 있는 인간이 없어요. 왜냐하면 즉흥적이라니까요. 자, 오늘 만났잖아요. 근데 내일되면 내가 0이 아니고 1로 돌아다니는데요. 1로. 1이 되가지고 돌아다니는데요. 아까 사건이라고 했죠. 사건은 우발적이고 즉흥적이죠. 그러면 성도의 몸이 귀하다. 성도는 주님과 함께 있다. 단발성이라니까요. 이게 1회용이에요. 모였잖아요. 그러다 내일되면 그 중에 누가 변질될지 장담 못하고 내가 변질될지 장담 못해요. 그러면 이 작업을 누가 해야 됩니까? 우리가 해야 됩니까? 주님 쪽에서 해야 됩니까? 주님 쪽에서 해야 되죠.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그걸 이야기합니다. 일단 우리를 우상화합니다. 우상화. 일단 이 자체로 하여금 우리가 할 게 있다? 없다? 그냥 막살면 돼요. 막사는 게 내가 우상이에요. 막사는 게. 평소에 살아가는 것이 나보다 더 귀한 것이 없어요. 남 걱정 그거는 좀 여유 있을 때나 하지, 그러나 곧장 내 생각으로 되돌아와요. 남 걱정하다가 곧장 내 생각으로. 항상 내 생각하게 되면, 그 다음에 뭐냐 하면 나뿐이죠. 나뿐인데 나를 내가 지키기 위해서 여기서 이익이냐 손실이냐를 따지고, 그 다음에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그 다음에 선해야 되고, 의로워야 되고, 내가 만약에 죄를 짓게 되면 나에게 손실이 온다고 생각하겠죠. 이게 뭐냐 하면 선악과 따먹은 티를 그대로 보여주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었을 때 악마가 아담에게 제시한 것이 니가 뭐처럼 된다고 했습니까? 니가 신처럼 되리라 했잖아요. 그런데 이 자체가 우리가 우상이 되는 기쁜 소식이 되는 거예요. 왜? 이게 바로 구약 말씀대로 됐잖아요. 이런 신기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구약 말씀을 지키려고 하니까 우리가 이거 뭐 말씀인지 동화인지 이래 되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자체가 구약대로 그대로 살아가고,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이 누굴 낳고 죽었죠. 지금 그 절차대로 우리도 못 빠져나가고 그대로 가는 거예요. 그리고 마지막에 이 3층 건물이 어떻게 됩니까? 홀라당 불에 태워지죠. 우리는 이미 상황이 종료됐어요. 그것도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죽게 되어 있고, 우리가 죽고 난 뒤에 몇 년이 있어서 불이 오든지 그거는 주께서 불로 싸질러버리도록 이미 확정된 입장입니다. 이미 확정된 입장이 뭐냐, 모든 것은 말씀에 의해서 세팅화 된 거예요. 그 말씀을 둘로 나눴습니다. 하나는 구약적 상황이고 한쪽은 신약적 상황인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지심으로 현재 우리의 모습은 어디에 놓여있다. 신구약적 모습에 다 놓여있는 거예요. 구약적 입장에서 우리가 추궁을 당한다 이 말입니다. “니 우상 맞잖아?” “예!”하면 끝나는 문제에요. “아멘!” “나 우상입니다.” 이래 살면 되는 거예요. 그걸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겠어요? 성령 받은 사람뿐이에요. 우상이 무슨 구원을 받겠어요? 안 되잖아요. 내가 기대하고 내가 희망하는 것은 내가 우상이다, 라는 그런 규정에 의해서 전부 다 종결되었어요. 내 구원에 대해서 내가 걱정할 필요가 있다? 없다?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내 모습 자체가 말씀의 완성된 그 모습이기 때문에. 내가 있는 이 모습이 말씀의 완성된 내 모습이거든요. 이 말이 오해의 소지가 어찌 없겠습니까? 그러면 가만히 있어도 구원받겠습니까? 라고 또 나오겠고. 아무것도 안 해도 주의 말씀대로 모든 게 다, 마귀도, 안 믿는 사람도, 지옥 가는 사람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만들어졌다면, 그러면 더 해도 소용이 없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했다면 뭐 설친다고 더 위하는 것도 아니고, 안 설친다고 덜 위하는 것도 아니고, 그 자체로 살면 그리스도가 알아서 영광 받게 될 거니까, 내가 할 건 없네요? 그럼 주님께 영광 돌리라는 말은 빈말이겠네요? 뭐 뒤에서 막 구시렁구시렁 튀어나오겠죠. 언약의 완성이라는 것을 놓치면 안 돼요. 이 모든 것이 나를 위함이 아니에요. 방금 구시렁구시렁 대는 것이 뭐냐, 내 신체는, 내 미래는,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됩니까? 전부 다 구시렁거리는 것이 어디서 나온 거예요? 바로 나에서 나왔죠. 나에서 나왔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나에서 나왔다는 이 사실에 어떤 관점이 필요 하느냐 하면, 주 예수님 안에서, 언약의 완성됨 안에서 보게 되면 이래야 된다는 거예요. 뭐가 나옵니까? 감사가 나온다는 거예요. 구시렁댄다는 말은 불평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불평한 자는 어디에 가겠어요? 지옥불에 들어가죠. 감사한 자는 어디에 가겠습니까? 영원히 감사할거니까, 인간 자체가 영원히 감사할 조건이 맞춰지니까 어디에 가겠습니까? 천국에 가는 거예요. 그냥 감사하다가 불평하면 이거는 천국가도 쫓겨나요. 불평하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천국가면 재미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재미없으면 가지마라는 거예요. 가지 마! 이 사람들은 뭐냐 하면 자기재미, 자기즐거움을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얼마나 행복하냐를 생각하는 거예요. 이 사람들은. 근데 천국 가는 사람은 자기는 우상에 불과해요. 세리와 창기와 강도와 똑같아요. 자기는 평생 나밖에 몰랐어요. 근데 오늘밤에 어디에 간다? 낙원에 간다. 여기서 저절로 뭐가 생깁니까? 뭐 감사할 말 말고 뭐 할 말이 없죠. 감사할 말 외에는. 애 잘 키워보려고 애쓰는 것, 그거 뭐 우상이니까 해야죠. 내 자식이니까 해야죠. 근데 그 애가 말을 안 듣는다. 불평? 아니에요. 내가 우상이고 우상에서 태어났으니까 우상대로 사는 것이 정상이죠. 또 감사하죠. 감사한데, 그 애가 누구 꼬여서 때리고 밀쳐서 죽였다. 다시 또 불평하죠. 휙 다시 오죠. “잘 죽였습니다. 잘 들켰습니다.” 또 다시 감사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악마는 항상 위에서 보는 관점을 차단하려고 합니다. 이 세상 신이 위에서 못 보게 해요. 십자가 안에서 우리 자신과 세상을 한꺼번에 보는 안목을 못 보게 그렇게 조치를 하는 겁니다. 이미 천국에 도달된 사람은 나올 것은 뭐 밖에 없습니까? 고마움과 감사 외에는 아무것도 나올 게 없어요.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면서, 그 다음에 9절 봅시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를 인하여 너희가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저희에게 증거 되려 함이라” 이게 뭐에요? “너희가 나중에 이렇게 될지라도 오히려 너희가 거기에 대해서 감사하게 될 것이다.” “주여, 내가 주의 증인이군요. 나의 증인이 아니라 주의 증인이 되게 하셨군요. 그리고 그것이 말씀대로 진행되었다는, 새 언약에서 다 이루었다는 그런 취지 안에 이미 놓여있었군요.”라는 감사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끝으로 말씀드리는 것은, 이 자기우상화에 철저 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속이지 말게 하옵소서. 우리 자신을 조작하지 말게 하옵시고, 위장하지 말게 하옵소서. 우리 자신이 죽어 마땅함을 깨닫고 사는 것은 주의 이름을 위해서 살림 받고 있음을 인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