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요한복음 18장 39절(무능성)181106b-이근호 목사
강남-요한복음 18장 39절(무능성)181106b-이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 합시다. 이 무능성에 뭐가 나오느냐? 복수심이 나오지요. 그러니까 일종의 예수님에 대한 복수에요. 우리는 한 사람의 우리는 당신같은 왕을 원하지 않았다. 당신같은 메시아를 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빌라도를 통해 그대로 자기의 속마음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겁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이.
지금은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을 이렇게 풀어줄려고 하나의 제안을 했지요.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렇게 했는데 이것은 빌라도가 굉장히 유한 책을 쓰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핑계에 불과합니다. 왜냐 하면 그냥 풀어줘도 돼요.
28절에 한번 봅시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했지요? 재판장이 누구에요? 본디오 빌라도 본인이잖아요. 그럼 그걸 선언하고 방면해야지. FREE 해서 방면해야 될텐데 주춤주춤하는 이유가 이게 뭐냐 하면은 관계망이라니까. 관계망은 서로가 서로를 속박하고 있는 입장에 있어요. 너 없이 나 없고 나 없이 너 없다는 겁니다.
부부가 둘이 싸우다 하나 죽으면 또 울기는 또 얼마나 운다구요. 아이구 이 무심한 당신 이러면서 운다고요. 무심하면 좀 잘해주지. 인간은 뭐든지 관계망 때문에 자기중심이기 때문에 판사조차도 매수합니다. 판사조차도. 판사는 심판하는 사람이죠. 그럼 뭡니까? 인간들은 심판주 메시아 또는 하나님을 뭐하고 싶다? 매수하고 싶은거에요. 내 편으로 돌리고 싶은 거에요. 뭘 해서?
찬양하고 선교하고 기도하고 교회 세우고 부흥시키고 이렇게해서 다른 사람은 심판하되 괜찮은 나한테는 심판하지 마세요 라고 지금 협박 다 하고 있는 겁니다. 신에게 압력을 행사하고 있는게 인간의 본심이에요. 왜그러냐 하면은 인간은 복수심에 자기의 무능을 감추기 위해서 또는 자기의 미흡된 인생 자기가 스스로 만족하는 인생에 대해서 그 책임을 다른 쪽으로 찾으려고 그 책임 추궁을 하고 싶어서 외부쪽 하나님이든 누구든 간에 그걸 자꾸 찾아서 시비걸려고 하는겁니다 인간은.
남자가 사업하다가 망하면 그만두는게 아니고 또 사업하고 또 사업하고 도박하는 사람이 도박 그만두는 것이 아니고 또 도박하는 것은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이 갖고있는 욕망의 구조를 욕망의 그 속성을 그냥 잘 보여주지요. 도박이 재미있어서 하는게 아니에요. 깎아진 내 자존심을 빨리 원상회복시키기 위해서 무리한 사업을 벌리고 무리수에 나서는 겁니다.
바깥에서 일이 잘못되었을 때 그 화를 집사람한테 풀고 가족들 자식들한테 푸는 이유가 뭔가 자기 내부에 어느 정도의 레벨 균형을 맞추려는 시도 때문에 그래요. 제가 좋게 이야기해서 그렇지 사람은 멧돼지라니까. 그냥 욕망에 쫓기고 충동에 쫓기는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대안은 뭐냐 하면 안정적인 죽음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굉장히 간단해요. 안정적인 죽음을 내가 보장해줄게.
주께서 보장해주는 것은 뭐냐 하면 살게 해줄께가 아니라 지금 사람은 살게 해줘봐야 내가 요구하는 레벨만큼 살게 해 달라고 또 닦달할게 분명하기 때문에 아예 안정적인 죽음을 보장해 주겠다는 겁니다. 안정적인 죽음이 왜 이게 복되고 감사하냐 하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그냥 죽음이 아니고 안정적인 죽음, 단 하나의 죽음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설명이 되요.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설명하게 되면 그만큼 안정적인게 없어요. 최고에요.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살려고 애 안 써도 돼요. 모든걸 알아 버렸으니까.
그게 제가 첫 번째 강의 시간에 제일 먼저 이야기한거잖아요. 성령이 오게 되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취지를 알게 되고 그 취지로 말미암아 하늘과 땅 모든걸 알게 되는 거에요. 하나님은 예수님 본인이 죽음, 본인의 죽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 세상은 천지는 창조되었다. 십자가를 사건을 드러내기 위해서 세상의 하늘과 땅과 하늘의 별과 모든 것은 다 만들어진거에요. 십자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십자가 지신 분이 주가 되신다는 것. 십자가지지 않으면 주가 아니에요. 십자가 그 죽음을 지셨기 때문에 비로소 그분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심판주가 되고 구원주가 되는 겁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그 예수님의 주 되심을 증거 하기 위해서 다 제조되고 만들어지고 창조된 겁니다 모든 것은.
자,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이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이제 약간은 어려운데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숨 안 쉬고 가만히 있는 것을 죽음이라고 하지 않아요. 예수님의 안정적인 죽음은 시체가 되어있는 그야말로 뻗어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 죽음은 행동하는 죽음이에요. 행동하는 죽음.
다른 말로 하면 죽음만이 진정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죽음의 기세가 이 세상을 뒤덮고 있다 이 말이에요. 죽음의 기세가. 어느 모두 일어나는 것은 저주의 흔적이고 저주를 증명하기 위해서 벌어져야 될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오직 유일하게 행동하시는 주님의 행동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보통 우리가 움직이는 것을 행동한다고 하잖아요. 우리가 행동하는 것이 아니고 행동하시는 것은 이 땅에 행동하시는 것은 멧돼지도 아니고 코끼리도 아니에요. 오직 누구만 행동하느냐 하면 예수님만 행동해요. 예수님의 지시와 명령에 의해서 참새도 죽을 때 죽고 그리고 들풀도 자라날 때 자라나고 우리의 키도 한 자가 자랄 것이냐 아니면 자라지 말아야 될 것이냐 그것도 주님의 행동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 뜻대로 우리 마음대로 우리 생각대로 우리의 처지가 이렇게 가고 있는게 아니에요. 주님의 뜻에 의해서 우리가 이렇게 행동을 하고 우리의 처지가 이렇게 상관이 있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첫째 시간에 뭐라고 했냐 하면 예수님과의 ‘관계망’이라는 겁니다. 예수님 관계망. 그러면 그걸 왜 살아있다고 하지 않고 왜 죽어있다고 하느냐?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음에 적셨거든요. 이 말은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말과 동시에 내가 죽은게 아니고 네가 죽었다는 것을 분명히 명시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인간들이 살았다는 동네에 와서 이렇게 적시는거에요.
뭔가 퐁듀라고 해서 이렇게 적시는 것처럼. 아이스크림에 커피 얹으면 뭐 돼요? 아포가또 되지요. 주님의 죽음이 살아있는 우리 아이스크림에 적셔버리면 우리는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죽어 있는거에요. 그리고 그렇게 죽음이 와서 적시고 주님이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함으로서 유일하게 살아계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고 살아있기 때문에 유일하게 행동하시는 자격자고 혼자 움직이시는 분도 예수님만 홀로 움직이시는 거에요.
예수님이 살아있는 예수님이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지금 죽은 입장에서 오늘도 숨을 쉬고 있고 죽은 입장에서 그림 그리고 죽은 입장에서 놀러가고 그러는 겁니다. 피렌체나 괌도 사이판 죽은 자로 가는거에요. 비행기 탈 때부터 이미 죽었어. 내릴 때도 죽어있고. 애 키울 때도 죽어 있고 애 키우겠다는 개도 죽어 있고 모든 인간들은 주님이 와서 그 가치를 죽음이라는 그 가치를 완전히 도배를 해버린거에요. 덮어버린거에요.
먹물 가지고 이 세상에 확 뿌렸다고 보면 돼요. 살아있는 모든 거기에다가 죽음의 두께가 덮어버렸으니까 이미 우리는 모든 인간은 죽음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겁니다. 죽음 속에서. 제가 낮설교 할 때 율법의 세가지 이야기한게 있는데 하나는 율법이 와서 율법이 우리를 가둬둔다. 둘째는 뭐였던가요? 가두리 양식장 안에서 미꾸라지가 막 꿈틀거리죠. 몸부림치고 있다는 것은 왜 몸부림칩니까? 살려고 몸부림치잖아요.
살았으면 살려고 할 필요 없잖아요. 지금 죽음이 뒤에서 쫓아오는 거에요. 죽음이. 인간은 쫓기고 있는 중입니다. 어디에? 죽음에. 병원가서 조사 해가지고 더 살아야 할텐데. 말로는 아이고 나는 죽으면 그만이다. 말로만 그래. 연세가 많으면 점점 죽음에 발자국 소리가 크게 들리고 동생들이나 20대는 까불까불 몰라. 한창 몰라.
지금 SK가 이기는가 두산이 이기는가 거기에 정신 팔렸어. 한국시리즈 거기에 있어. 지금 1:1인데 빨리 누가 지금 4게임 이겨서 우승하느냐 우승 해봤자 죽은 놈이 트로피 올리고 있는데. 호날두가 몇 골 넣었고 메시가 몇 골 넣었고 죽은 놈이 축구 하고 있는데 죽은 놈이. 그래 봤자 82 돼가지고 신성일처럼 죽고. 그렇게 죽잖아요 결국은.
왜 나중에 와서 알 필요 있어요? 미리 당겨서 알면 탈납니까? ‘나’라는 이 존재가 어떤 누구의 손길에 의해서 누구의 일관적인 일관성있는 행위에 의해서 나는 언제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10대라서 몰라야 됩니까? 유치원생이라서 몰라야 돼요? 미리 알아야 돼요. 우리 울산에 계신 황권사님은 손자를 키울 때 3살 때 4살 때부터 키웠어요. “너는 죄인이다. 우리는 다 죄인이다. 죽을 수밖에 없다.” 시편 51편 이렇게 해가지고 애한테 그렇게 했어요. 좀 무시무시한 이야기지만.
방금 제가 인간은 죽었다 하는데 이걸 달리 이야기 하면 뭐냐 하면 무능성입니다 ‘무능성’. 무능함이에요. 인간은 무능하기 위해서 태어난거에요. 그래서 무능해도 괜찮아요. 아니 무능해야만해요. 마땅한 무능함이 마땅함입니다. 무능함이 당연함이에요. 우리의 기도 우리의 헌금 우리의 전도 안 받습니다.
왜? 무능한걸 왜 받아요? 무능함을 왜 받습니까? 무능한게. 다만 우리는 이렇게 움직이고 하는 이유가 무능함이 무능함이라는 것을 계속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반응을 유발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본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반응을 유발할 수밖에 없는 그런 자극되는 사건들이 사태가 계속해서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겁니다. 울기도 하고 좀 잘 되면 웃기도 하고.
자, 그렇게 되면 어떤 분이 이렇게 물을거에요. 이렇게 무능하고 무식한데 주님께서 그러면 알아서 다 하면 될텐데 왜 우리를 이렇게 사용하십니까? 관계망으로 우리를 가지고 사용하십니까? 이렇게 하는게 그것은 우리 인간을 위함이 아니에요. 무엇을 위함이냐 하면은 도대체 천국은 어떤 나라냐 하는겁니다. 천국이 어떤 나라냐?
이 땅을 가지고 천국을 설명하려면 이 땅을 가지고 천국을 설명하려고 해요 지금 주님께서. 왜 이 땅을 가지고 천국을 설명하려고 하느냐 하면 이 땅은 지옥으로 가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 우리가 살아서 눈에 보이니까 한국 땅에 있으니까 오래가는 줄 알겠지요. 하지만 성경에 의하면 성경은 예언의 책이에요. 예언이 뭡니까? 너는 모르지만 나는 안다는게 예언 아닙니까? 그렇지요? 적어볼까요?
너는 뭐하지만? 모르지만. 우리는 어디에 해당 돼요? 모르는 쪽에 해당 돼요. 너는 모르지만 누구는 안다? 주님은 알지요. 믿음은 뭐에요? “나는 모른다”가 믿음의 시작이 돼야지요. 나는 무식하고 무능해서 나는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은 압니다. 따라서 나는 무식하고 무능하지만 나는 모든 것을 주님께 일임하고 맡기겠습니다. 이 맡기는게 신뢰 아닙니까? 맡기는게 믿음 아닙니까?
부부 주례 같은거 보게 되면 이런게 나와요. 부부는 서로 신뢰하라 이렇게 하는데 그게 말이 안돼요. 신뢰하면요 신뢰는 신뢰를 받는 쪽과 신뢰를 맡긴 쪽 둘 중에 그렇게 나뉘지 서로 신뢰하는 법은 없어요. 서로 신뢰하는 법은 없습니다. 나는 목사님을 신뢰하고 싶은데 목사님이 저는 목사님 신뢰합니다. 하면 갑자기 책임감 오잖아요. 그렇잖아요. 나한테 덤탱이를 씌우나? 너 고생하고 나 편하자. 머리 들이밀면서 일단 맡길게. 아휴 나한테 맡기지 마세요. 내 머리 맡아주세요. 이렇게 나오면 티격태격 싸울뿐인거에요.
맡기려면 둘 다 맡기면 안돼요. 한쪽이 한쪽을 그냥 받아줘야 돼요. 한쪽을 받아줘야 된다고요. 부부에서는 그걸 누가 하느냐 하면은 약한 자 여자 쪽에서 그걸 해요. 그래서 괴테의 파우스트가 있잖아요. 그 마지막 대목이 뭐냐 하면 “모든 것은 비유니 여성성이 우리를 구원하리라”. ‘여성성’. 여자가 아닙니다. 여성성.
여성성이 뭐냐? 창세기 3장 보니까 그냥 사모하는 겁니다. 맡기는 것. 맡길 때 무엇이 탈락되겠습니까? 무엇이 없어져야 되겠어요? 나는 내가 나는 나를 믿는다가 나는 나를 소망한다 나는 나를 사랑한다 이 모든 것 믿음 소망 사랑이 나한테는 사라져야 되지요. 그래서 나의 믿음 나의 소망 나의 사랑은 이건 지옥갑니다.
이것을 주님께서는 사건을 통해서 이걸 전부 다 뜯어내지요. 다 뜯어내는데 정작 주님이 있는 사람은 그걸 뜯어낼 때 비로소 진짜 십자가 지신 하나님이 나타날 것이고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그걸 뜯어내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럼 뜯어내는 것을 가만있겠습니까? 강력하게 거부하겠습니까? 강력하게 거부하겠지요.
왜? 자기가 공들여서 믿음 소망 사랑 채웠으니까 거기에 필요한 신학이 뭐냐 하면 ‘개혁주의 신학’이 필요한거에요. 개혁주의 신학은 뭐냐 하면은 바로 개혁주의 신학은 “믿을 놈은 나밖에 없다”는 것이 개혁주의 신학이에요. 제가 아까 식사하다가 들은 이야기인데 로이드존스 목사님이라고 개혁주의 청교도에서 유명한 목사에요.
그 목사가 그 목사의 책 로마서 강해 에베소서 강해 산상설교 많이 나왔거든요. 많이 나왔는데 그 사람이 죽을 때 놀라운 고백을 했다는거에요. 확실한지는 모르겠습니다. 놀라운 고백이 뭐냐 하면은 바로 이 성화한다는 것 지금까지 개혁주의 신학은 전부다 사기다 사기. 사기고 오직 뭐밖에 없다? 십자가 뿐이라는 거에요.
꼭 허운석 선교사 같애. 실컷 다 해놓고 돌아갈 때 “주여 내가 헛짓했군요. 아마존 선교도 다 헛짓이고 내가 무슨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오직 아무쓸데 없는 인간을 십자가 피로 구원했는데 이 간단한 길을 놔두고 얼마나 돌아왔는지..” 저보고 직접한 이야기에요. 제가 증인입니다. “얼마나 돌아왔는지..”
얼마나 많이 돌아왔어요. 왜 이렇게 십자가를 거부하고 안 듣느냐 하면 살고 싶고 이왕 사는거 하나님 보시기에 근사하게 괜찮은 존재로 살고싶어 하는거에요. 다시 말해서 판사를 내 종교적인 스킬 테크닉으로 매수를 하는 겁니다. 이래도 날 지옥 보낼거에요? 라고 지금 도전하는 거에요. 이렇게 내가 참하게 살고 열심히 하는데 아마 양심 있으면 나를 천국 보낼거야 라고 도전하는 거에요.
그게 아까 이야기한 뭐냐 하면 그게 하나님 나라가 아니에요. 지금 하나님 나라를 몰라요 사람들이. 그건 누구 나라냐 하면 자기 나라에요 자기 나라. 무능한 인간 그 무능성을 기념한, 인간인 자기가 무능하다는 생각을 안 하고 유능하고 천국 갈만한 그런 자격이 된다는 기념하는 나라는 지옥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사람을 어디 보내느냐 하면은 지옥 보내는 곳이에요. 지옥 보내는데 교회 안 다니는 사람은 내가 천국 갈까 지옥 갈까 고민하지요. 그런데 교회 온 사람은 고민도 없어. 지옥가면서도 내가 천국 간다 착각하게 만들어요. 제발 나를 박살내달라고 교인들이 그렇게 요청하지 않는 한 그 교회는 지옥가는 교회입니다. 나는 밟아주고 나를 조져주세요. 나는 내가 자꾸 살고싶어 하고 내가 이왕 사는거 괜찮은 존재이고 싶어하는데 이건 내 힘으로 못 고치니까 목사님이 좀 말씀으로 잘근잘근 씹어주시옵소서 이렇게 나와야 돼요.
예를 들면 우리 서머나 교회 우리 잘난 교회인데 좀 목사님 오셔가지고 이게 어디 이런 이단들이 있어 욕 좀 해달라고 아직도 저를 안 부르고 있는데. 잘근잘근 씹어달라고 그렇게 안 해요. 우리가 얼마나 훌륭한 목사님 설교 듣고 훌륭한 교회 유일한 한국에서 희망적인 교회인데 이러고 있단 말이죠.
다시 이야기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천국을 소개하는데 지옥밖에 없는 곳에서 천국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천국은 나의 세계가 되면 안돼요. 예수님이 말씀대로 살았잖아요. 그럼 천국은 무슨 세계냐 하면 말씀의 세계입니다. 말씀의 세계라고 하는 것은 언약의 세계지요 언약. 언약의 담당자 언약을 이룰 때 두 사람이 이뤘습니까? 세 사람이 이뤘습니까? 세 사람이 의기투합해서 이뤘습니까? 누가 이뤘습니까? 제자들 다 떠났지요?
십자가에서 올라가신 십자가 옆에 두 사람 있지만 십자가에서 다 이뤘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 혼자만의 공로입니다. 그렇죠? 그래서 저는 예수님만이 뭐 한다? 예수님만이 행동하는 거에요. 예수님만이 십자가에 죽었다가 예수님만이 살아나신거에요. 우리도 살아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만이 살아있어요. 우리는 우리가 살아있는게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계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살아있을 때 우리는 그 관계망에 의해서 예수 안에서 살아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 껍데기 있잖아 껍데기 껍질. 껍질은 벗어버려야 돼요. 암에 걸리든지 뭐에 걸리든지 빨리 벗어버리고 새로운 옷을 유니폼으로 갈아입어야 돼요 우리는. 그래 또 성격 급하다고 자살하고 번개탄 피우지 말고. 그거는 우리가 지퍼 잠그고 지퍼 열고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에요. 내가 스스로 빨리 천국에 가겠다는 것은 뭐냐 하면 아직도 내가 나를 위한 행위가 남아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이에요.
죽이는 것도 주님의 행위가 와서 죽여야 되고 참새도 죽고 사는 것도 주님의 행동이듯이 살아가는 것도 주님 뜻대로 계속 살려줘야 사는거에요.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세요. 살아있는 우리가 이 땅에서 죽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고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좀 이상스럽게 생각해야 됩니다. 이상하다. 나같은 경우 더 살 이유가 없는데 살아있지? 오히려 의아해 해야 되고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고마움과 함께 어떤 책임감같은 것을 느껴야 돼요.
아이고 살아있으니 오늘도 보너스로 줬는데 살아있는 것 가지고 뭘 하지? 뭐해서 살아있는 값을 하지? 라고 생각을 해봐야 됩니다. 이렇게 되게 되면 뭐냐 하면 기본이 죽음이고 덤이 살아있음이니까 남하고 비교할 이유가 없지요. 남하고 경쟁할 이유가 없지요. 경쟁이라고 하는 것은 복수심에서 나왔잖아요. 너한테는 안 진다 이렇게 하는데 남하고 경쟁할 복수할 일이 없지요.
제가 아까 그랬잖아요. 멧돼지하고 싸우지 말라고. 그게 정신 있어요? 정신 없는 것하고 싸워서 뭐 할건데요? 멧돼지한테 유혹받을 필요도 없고요. 멧돼지하고 비교할 필요도 없고 멪돼지하고 경쟁할 필요도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멧돼지거든요. 그런데 죽은 멧돼지에요. 죽어 있는 멧돼지이기 때문에 펄펄 뛰는 멧돼지하고 차이가 나요.
왜? 죽은 사람은 이미 죽은 것을 나타내기만 하면 되는거에요. “너 따라와봐.” “응 안 따라가.” “너 날 이겨봐.” “아니 안 이겨.” “왜? 비겁하구나.” “그래 나 비겁보다 더 심한거 해.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무능해.” 이런 식으로. 마귀는 자꾸 우리를 유혹해요. “네가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I can do it”. 뭐 자꾸 유혹해서 우리고 하여금 붕 뜨게 만들어요.
물론 여러분들한테는 해당되지 않지만 여러분은 늘 인생을 실패해서 해당되지 않는데 혹시 여러분들 중에 성공했다. 내가 성공했다. 취직을 하다니 체육관 이런 것. 아 내가 이런걸 하다니. 이렇게 되면 결국 그건 뭡니까? 이왕 하는거 잘 해봐? 보란 듯이. 갑자기 죽은 사람이 행동을 하려고 해. 행동은 주님이 알아서 하면 되는데.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세요. 뭘 하느냐를 생각하지 말고 그 현장에서 주께서 그 순간에 뭘 시키느냐 그것만 생각하세요. 딴 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세요. 저 사람을 만날까 안 만날까 생각하지 마세요. 만나게 한 것도 주님의 뜻이고 만나서 뭘 할건가 주님이 다 시켜줘요. 미리 프로젝트 짜지 말고 미리 계획하지 마세요.
오늘 애 성적표 오는 날인데 몽둥이 준비하고 들어오기만 해봐라. 내가 공부해라 학원가라 해도 안 가고 게임이나 하더니. 미리 예상하지 마세요. 실제 예상하더라도 성령을 입은 사람은 애 딱 들어오게 되면 때릴려고 예상했는데 애 보는 순간 저절로 내가 날라가버리고 “밥 뭇나?” 그 순간 내 예상과 다른 반응이 나한테 탁 튀어 나와요.
그런데 때릴려고 공부 못하면 죽일려고 하는데 “엄마 나 다리 아파요.” 이렇게 하면 “아이고 내새끼 다리 아파?” 이렇게 갑자기 반전이 일어나요 반전이. 꿀물 타주고 뭐 난리도 아니야. 그때 한순간 한순간을 뭘로 돌리라? 말씀의 행함으로 돌리는 것이 이미 시작된 천국이다 이 말이죠. 천국은 죽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벌써 여기서 이미 실시가 된거에요.
그게 무엇을 하라 하든지 가라하면 가고 오라면 오는 것처럼 그때 무슨 일을 할 것인지 주께서 주관하도록 하세요. 포도주가 떨어졌다. 포도주를 어디서 만드느냐? 주님의 지시가 물 길어오너라 여섯 동이. 여섯 동이 물 길어오너라. 제가 이스라엘 갔는데 가나안 지방에 갔거든요. 가자마자 골목에 그림을 이쁘게 여섯 동이 물동이를 딱 그려놨어요. 못 찾아올까 싶어서.
물동이 여섯 동이를 가져갔다 이 말이죠. 물동이 여섯 동이 가져갔다는 것은 제자들이나 그리고 마리아나 거기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은 손을 떼는거에요. 손을 떼라고 순간순간 우리보고 먼저 손을 떼는것부터 해야돼요. 손을 떼야돼요. 그다음에 물에서 포도주를 되든 말든 이것은 주님 소관인데 주님 소관인데요. 우리는 뭘 하느냐? 물 가지고 포도주 되기를 바라잖아요. 그거는 주님의 기적의 취지가 아닙니다. 물이 포도주가 된다는 것은 그 순간 손님들에게 포도주를 대접하는 것밖에 안돼요.
예수님은 물과 포도주를 통해서 뭘 이야기 하느냐 하면 자신의 존재가 포도주처럼 새언약을 이룬다는 것을 인간들이 요구하는 것에 겹쳐서 예수님 본인만의 의미를 거기다가 실은 거에요. 이게 괴테가 말한 “모든 것이 비유다.” 내가 존재하는 것이 실체가 아니고 꿈이고 꿈에 불과한데 이 꿈이 보통 꿈이 아니고 주님의 의미가 담겨있는 때에 우리가 ‘나’란 인간이 의미있는 인간으로 실체로 변한다.
그래서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우리가 비로소 관계, 보이지 않는 관계가 느껴지는 거에요. 내가 있으라고 내가 있는게 아니고 주님과 나 사이에 관계가 이미 이어져 있음을 드러내라고 우리로 하여금 계속 이 땅에 살게 하시는겁니다. 그 관계가 뭐냐? 천국에도 지속되는 천국에도 이어지는 관계가 되는 거에요.
다시 한번 정리해 봅시다. 제가 ‘안정적인 죽음’이라고 했지요. 안정적인 죽음은 이 죽음이 모든 일어난 일을 다 설명이 될 때에 비로소 안정적인 죽음이 돼요. 안정적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면 이렇게 해석하고 저러면 저렇게 해석하는 것이 안정적이 아니에요. 그렇잖아요.
어떤 성경 구절을 설명하고 어떤 설교를 강의하고 뭘 하더라도 항상 뭐냐 하면 내가 어떻게 된다가 아니라 이미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 예수님이 어디서 돌아가셨습니까? 우리가 그토록 귀히 여기고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바로 이 세상에서 그 분이 오셨는데 갈 때는 떠날 때는 뭐로 됐다? 죽음으로 떠나신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서 없으신 분으로 이 땅에 오신 겁니다. 노란색 파란색 있지만 예수님 나타났다가 사라졌을 때 그 노란색 원피스와 처음부터 노란색 원피스는 차이가 있어요. 뭔가 파란색이었고 녹색이었는데 결국은 변화되어서 노란색 되었다면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겠습니까? 그냥 우리가 사는 것 하고 다녀가신 것과 달라요. 다녀가심으로서 전에 오시기 전에 알던 내가 다녀가시고 난 뒤에 내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뀌게 되는 겁니다.
그게 예수님의 액션이고 예수님의 행동이고 예수님의 결과물이 되는거에요 우리가. 따라서 우리가 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내가 되는 것은 무능한 것이고 무식한 것이고 예수님이 성령이 오셔주심으로써 나는 이제부터 나를 위해가 아니라 예수님과 나 사이에 어떤 관계망으로 이어져 있음을 그걸 증거하기 위해서 지금도 주님은 우리를 하루하루 생명을 연장시켜주시고 살게 하시는 겁니다.
무능함과 무식함을 분명히 하고 거기에 근거해서 예수님이 지금 홀로 살아있음을 증거하라고요. 그리고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은 주께서 살아계심을 증명하기 위해서 일어난 일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의 삶을 통해서 주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사나 죽으나 영광 주께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이 그 뜻이에요. 내가 값을 주고 산 것이 되었으니 이제는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 하라. 뭘 먹어도 개고기를 먹든 뭘 먹어도 우리는 죽은 자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음식 먹게 하는 겁니다.
실제로 그런 것은 얼마든지 실습이 가능해요. 해외 놀러갔다. 해외 놀러가면서 다음부터 시작되는 것이 무엇이냐. 우리의 관계망이 시작돼요. 올 때 올케한테 선물 뭐 사주지? 이렇게 되거든요. 또는 갔다 왔는데 갔다 오면서 사진을 얼마나 찍어야 되고 동영상은 얼마나 찍어야 되지? 갔다 오면서 또 태풍 불면 안 되는데. 돈도 없는데 태풍 오면 못 오면 안되는데. 가족들 걱정할텐데 이렇게 하지요?
이게 뭐냐 하면 이미 그전에 형성된 나의 관계망을 신나는 해외 놀러가서 놀러가본 적 있어요? 가면서 벌써 예수님 생각은 없고 벌써 새로운 세계를 체험할 질적으로 멋있게 된 그런 내 모습을 괜찮게 변모된 내 모습을 자랑거리가 넘쳐나는 내 모습을 그리워하면서 돌아오는 거에요. 그런데 태풍 불었다. 아 이거 초라하게 되어버렸어요 완전히. 사이판에 갔는데 태풍 불었는데 못 온다. 돈 다 떨어져간다.
그럴 때 그게 뭐냐 하면 살아계신 주님의 은혜죠. 뭘 하느냐 하면 바로 출감체험. 출감이 뭡니까? ‘출감’. 감옥에 갇혔다가 이제는 다 복역 끝나고 자유롭게 되는거잖아요. 이 세상에서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 것을 체험케 되는거에요. 사이판에 가서. 아 죽을 수도 있구나 에다가 그다음에 뭐냐 하면 아 내가 죽어 있어야 내가 살 자격이 없어야 비로소 주님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되는구나.
하나님의 관계망을 인간이 관계망을 방해 놨거든 가렸잖아요.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 다시 봅시다. 인간들은 뭐냐 하면은 본디오 빌라도 여기 있고 그다음에 유대인들 있지요. 유대인들에 누가 섞여 있습니까? 피고로써. 예수님 섞여있지요. 인간들 보기에는 사람 있고 저쪽 유대인 사람 있고 사람 있다고 본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전부 다 있음 있음 있음이죠. 주님은 있다가 없어져버리는 거에요. 있다가 없어져 버린다 이 말이죠.
바로 그 역할을 그 기능을 주님께서 바로 살아계셔서 그 사명과 임무를 준거에요. 같이 있다고 해서 같이 갈 인간이 죽어서 같이 갈 사람들의 종류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땅에 살게 하는거에요. 사이판에 갖다놔도 벌벌 떨면서 이제 죽었다 돈도 없고 왜 갑자기 태풍이 와서 신은 너무 하시다. 이러고 있는 사람과 사이판에 놀러갔는데 오랜만에 곗돈 모아서 놀러 갔는데 이거는 정말 태풍 불어가지고 죽다 살아났다.
죽다 살아난게 아니고 처음부터 우리는 주님 생각하게 되면 죽여주는 것이 오히려 다행스러운 것이고 왜? 출감이니까. 출감 뜻이 뭐에요? 우리가 여기 사는 것은 죄의 복역 때문에 살아간다 이 말이잖아요. 출감은 감옥소에서 나오는 거잖아요. 죽는 것이 신나는 해방의 순간이라는 사실을 사이판에 가서 그 은혜를 듬뿍 받아오시라 이 말입니다.
보통 말할 때 뭐라고 합니까? 보통 좋을 때 뭐라고 합니까? 좋아 그 다음에 뭡니까? 죽겠다 하잖아요 좋아 죽겠다. 배부를 때 뭐라고 합니까? 배불러 죽겠다 하잖아요. 죽으세요 배불러서. 라면 무한리필해가지고. 배불러 죽으라고. 나는 맛이 없어서 못 먹겠다. 라면 냄새나서 나중에는. 오늘 지하 부대찌개 가서 라면 무한리필 거기 가서 먹었거든요. 라면 몇 개 먹었어요? 네 명이. 8개. 두 개 더 달라고 해서 욕 얻어먹었지만. 염치가 있어야지 이런 식으로. 실컷 살다 죽으세요.
주의 뜻은 이겁니다. “야 이 인간아 죽어라” 이게 주의 뜻이에요 이게. 교인들 교회 왔잖아요. “야 이 인간아 이 멧돼지야 죽어라” 이게 복음이에요 이게. 기쁜 소식으로 들려줘야 돼요 이게. 살려고 하니까 사단난거에요. 살려고 하니까 악마가 달려들어서 사는게 힘들어 죽어요. 이것도 죽는거구나. 마귀가 달려들어서 힘들어 죽어요.
우리가 행동할 때 자꾸 살려고 하는 것하고 또 괜찮게 이왕 사는 것 잘났다는 소리 들으려고 행동하고 멋있게 행동하려고 하니까 이게 계속해서 나한테 스트레스가 되는 거에요. 잘 들으세요. 어떤 사태가 일어나게 되면 좀 못 나라 이 말이죠. 이참에 내가 이렇게 무식하나. 이렇게 부모 효도도 못하는 무능한 자식이었나를 실감나게 하라고 그 기회 준거에요. 자꾸 욕심부리면 거기에 악마가 더욱 더 침범해요.
얼마나 믿음이 좋았으면 그래 기독교 영화를 제일 먼저 보나. 나는 믿음으로 살겠다는 티를 다 내고 있어. 말씀이 완성되는 현장이 하나님의 천국입니다. 그 말씀 완성에서는 누구만 살아있느냐? 예수님만 살아있고 참새 보고 물어보세요. 참새 너 살아있다 하면은 참새가 짹짹짹짹 하면서 나는 살아 있기는 살아있지만 나는 예수님 때문에 살아있을거야 이런 어려운 이야기 할거에요.
그 어려운 이야기가 사도 바울 편지에 쫙 깔려있거든요. 우리가 의롭게 되고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어디 안에? ‘예수 안’에 ‘언약 안’에서만, 언약이 살아 있는 조건하에서만 우리는 그 안에서 영원히 산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언약이 현실화 되고 구체화 되는 것이 바로 천국의 영광이에요. 복락이에요. 보석같이 되고.
우리가 예수님의 신부가 되는 것도 우리 뜻이 아니고 언약의 안에 있는 내포되어 있는 내용물이고 내용이 그래요. 주는 신랑이고 너희는 신부다 이사야 62장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거기에 보면 신랑이 신부를 찾아오듯이 아가 같은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지요. 아가는 여기서 제가 말 못합니다. 너무 야해요. 너무 야해서.
그래서 지금 점점 자신감이 위축되고 축소되고 있습니다. 그 야한 것을 그대로 이야기해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지 고민 중에 있습니다만은 그건 그때 그 말씀의 현장에서 주께서 하라 하시면 해야지요. 나는 야하지않는 목사다 이것도 안되거든요. 내 행동을 내가 결정하면 안되거든요. 너는 실컷 야해라 하면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고 할 수밖에 없어요.
자, 오늘 본문을 한번 정리하고 19장 넘어 가겠습니다. 뭐냐 하면 인간은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밀쳤다는 사실 그리고 그런 본성이 작용한다는 것 그리고 예수님은 그걸 의도했다는 거에요. 너는 나와 같이 살수 없어 나를 밀어내. 본디오 빌라도가 마지막 기회를 줬건만 그 기회마저 인간들이 이구동성으로 우리는 차라리 강도를 살리는 한이 있더라도 저 사람은 우리한테 필요치 않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원하는 메시아는 저 스타일이 아니고 저 타입이 아니고 저 내용이 아닙니다. 우리의 메시아는 우리의 가치를 알아주는 우리가 유식하며 유능한 사람 율법 지켰다는 가치를 알아주는 그런 메시아를 원합니다 라는 티를 팍팍 낸거에요. 이게 오늘날 교회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그래요. 뭐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마지막에 자기가 회개했다는데. 십자가만 빼고 몽땅 모든게 거짓말이라는 것을 회개했지만 죽기 전에 미리 안하고 죽을 때 그런 소리 해가지고.
나의 가치와 나의 쓸모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러면 안돼요. 이미 나는 죽었다는 것을 확인하라고 주께서는 홀로 살아서 우리로 하여금 계속 우리를 이 땅에 어떤 곳이든 굴리는거에요. 이것도 할 수 있어? 이것도 할 수 있어? 아 저런 더러운 짓을... 까불지마 해! 계속해서 우리를 그러한 일을 하게 하시는거에요. 네가 복권해서 한 40억 얻을 수 있어? 그 더러운 짓을. 해! 부자 돼! 이런 식으로.
우리가 예상하든 예상하지 않든 계속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는 일을 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주님의 왕되심에 착복된 백성이 왕과 더불어 똑같은 그러한 체험을 당해야 돼요 우리가. 똑같은 체험. 예수님이 당했던 것처럼 우리가 배척을 당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는 즐겨야 돼요. 감사해야 됩니다. 복이라는게 그게 복이에요.
자기의 무능성을 실감나게 고개 끄덕이면서 이제야 내가 자인합니다 웃으면서 그걸 받아들이는게 복이에요. 무능하고 살 가치도 없는데 계속 살려 주시고 은혜를 주신 것은 다 주의 은혜라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자, 19장 약간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19장.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이렇게 나오지요? 이걸 보고 또 감정이입이 되가지고 불쌍하다 우리 주님 채찍 맞으면 얼마나 아프겠는가. ‘Passion of the Christ’ 라는 영화 있지요? 폭력영화 같아요. 예수님을 아주 폭력적으로 해서 억지로 인간의 동정심을 유발하는 그런 영화처럼 느껴졌어요. 제가 그 영화를 두 번 봤나 그런데.
예수님이 아팠을 때에 같이 안됐다고 울면 상당히 나는 수상한 신자이냐 의심될 수밖에 없어요. 왜냐 하면 예수님 아픈 것이 가슴 아프다면 가슴 아프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 저리 비켜요! 예수님 맞는 채찍 제가 대신 맞겠습니다” 라고 의인으로 자처하면서 나설 가능성이 있어요. 이게 악마 아닙니까? 이게 악마거든요.
우리는 비겁자되길 싫어하는 거에요. 벌써 비겁한데. 우리는 비겁하는 것이 우리의 본질인데 나의 본질을 의도적으로 아주 고상하게 아주 품위있게 바꾸려고 하는거에요. 마치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우리가 거둘 수 있는 그러한 자격이 있는 것처럼 악마가 우리에게 그렇게 사주를 시키는거에요. 어떤 의미에서 ‘Passion of the Christ’ 는 마귀가 만든 영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 돼요.
주님의 고통에 체험하자고. 체험을 유도해서 이 땅에서 고통 받고 순교하는 신자 되자고. 아까 순교 나왔잖아요. 사도 바울 영화도 나는 기대를 안 하고싶어. 혹시 우리 동네에서 하면 내가 보기는 보겠는데. 저는 보면 또 숙제같은게 있어 가지고 또 요약을 해요 또. 요약을 해야되는데. 또 순교라는 말 나오니까 아이고 이 영화도 잘못됐구나 느끼는데 우리는 순교하면 안돼요. 순교는 한분의 행동으로 끝났어요. 왜 우리가 순교해야돼요? 우리는 밥 잘 먹고 라면 무한리필하는 그게 순교입니다.
왜냐?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못남과 무능함과 나의 욕심이 까발려 지는 것 그게 주님의 순교만 드러내는 주께 영광이 되는 순교에요. 나의 잘남을 드러내는 순교는 필요치않습니다 주님의 나라에. 우리는 지금 하늘나라 가야 돼요. 천국가야 돼요. 이 세상은 저희들끼리 레이싱하는 곳이 아닙니다. 누가 잘났는가. 천국은 천국의 원리가 있어요. 작동 원리가 있다고요. 예수님의 ‘다 이루심’이에요. 그뿐이에요.
다 이루시고 행동하시는 것도 주님 혼자 행동하시는 거에요. 채찍맞고 가시면류관 썼다. 나도 채찍 맞겠어요. 어차피 안 죽을만큼 때리니까 죽겠다 싶으면 안 때릴거 아닙니까. 안 죽을만큼 맞고 가시 면류관 따끔하겠지요. 안티푸라민 왜 있습니까? 하고 안티푸라민 바르면 돼요. 간접 광고는 아닙니다.
인간은요 고통을 당하면 당할 의사가 있는 인간이에요. 이정도로 자기 의에 대해서는 한 의 하는 인간들입니다. 우리가 무능하기 때문에 우리가 하지 못하는 것을 하셔서 그것으로 우리를 구원하신거에요.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은 ‘제가 뭘 하겠습니까’ 라는 말로서 영광을 돌려야지요. 그게 천국이잖아요 천국이.
“아이고 주님 고생했다.” 고생 맛도 못 봤구나. 자기가 아픈게 고생이겠어요? 자기 자식이 아픈게 고생이겠습니까? 사람이 죽는게 아파요? 남 죽는게 아파요? 남 죽는게 아파요. 지가 살아남는게 아파요. 왜냐하면 예를 들면 이런겁니다. 수능시험 치는 학생이 안타까워요. 밖에서 엿 갖다붙이고 기도하는 엄마가 안타까워요? 엄마가 더 안타까워요. 수능가면 정신없어요 지금. 6번 풀어야지 7번 풀어야지 정신없어요.
그러니까 괜히 감정이입을 상상해서 자기한테 감정이입 시키는거에요. 암환자가 걱정됩니까? 옆에 있는 사람이 더 걱정됩니까? 옆에 있는 사람이 더 걱정 돼요. 고통을 줘요. 죽은 사람이 울어요? 산 사람이 울어요? 산 사람이 울어요. 죽은 사람은 죽었다고 좋다고. 예수님의 고통을 내가 대신 가져가려고 생각하지마세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예수님께 보답할 생각하지마세요. 성령은 보답용으로 준게 아닙니다. 보답이 안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주신겁니다. 보답하는 순간 우리는 악마의 유혹에 빠졌어요. 빨리 빠져나와야 돼요.
주님한테 효도할 필요없어요. 주님 앞에 충성할 필요없습니다. 사랑 소망 믿음 우리는 할 필요없어요. 주께서 택배로 다 보낼거에요. 안 오면 어떡해요? 안 오면 지옥가야죠 뭐. 어차피 내가 못할 것을 가지고 날 구원할거 같으면 주님 주신 믿음 소망 사랑이 안 오면 지옥 가야돼요. 그럼 온다는걸 어떻게 압니까? 오게 되면 내가 내 믿음 소망 사랑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는 것을 아주 신나게 믿지요. 신나게 감사하죠.
그럼 감사하면 어떻게 됩니까? 의탁하지요. 맡기지요. 의지하지요. 그냥 썩은 소나무가 건재한 소나무에 기대듯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가라 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그냥 맡기는거에요. 내 주변에 나 아는 사람이 어떤 일이 일어나도 주께서 알아서 일으킨 주님의 행동으로 일으켰기 때문에 나는 못합니다. 나는 할 수 있는게 없습니다. 알아서 해주세요 하고 내 배 째라 하고 있는거에요. 뭐 할 수 있어요?
그래야 내가 못난 사람 되기 때문에. 그 딕 훼밀리 밴드가 한 노래 있잖아요. “해도 저문 밤하늘에” 그 노래 있지요? “나는 못난이” 캠프 가서 손뼉치면서 부르잖아요. 기타치면서. 주께서 못난이를 죄인을 탕자를 건져줬다는 이 사실을 이 사실에 늘 감사하면서 삽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의미를 성령을 통해서 깨닫게 하옵소서. 십자가 앞장 세워서 일하시는데 그 앞에서 우리가 무능한 자가 됨을 알게 됨을 주께 영광이 된다는 사실을 또한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