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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81112b 부산강의 : [시편]15(8편)-인간 없음자유게시판시편

20181112b 부산강의 : [시편]15(8편)-인간 없음
(강의:이근호 목사)

첫째 시간에 제가 시편 8편의 핵심은 사람 같은 사람은 없느냐고 던졌고 사람 같은 사람을 찾거나 만들어내는 과정은 전쟁이에요. 전쟁을 하게 되면 경계를 짓는 거예요. 책임질 사람과 책임지지 않을 사람 또는 내가 끝까지 구원할 사람과 구원하지 않을 내보내야 될 사람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전쟁이 이스라엘 외부와의 전쟁이라고 생각하겠지요. 외부 전쟁을 통해서 내부 전쟁을 유발시킵니다. 전쟁할 때 원리원칙이 나오지요. 전쟁하면서 이스라엘은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느냐 하면, 내 나라가 아니라 주님의 나라라는 쪽으로 변경이 일어나야 돼요.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식으로 하면, 주께서 복음으로 전쟁을 벌이면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주의 몸이다. 또는 내 인생이 아니고 주님의 인생이라는 변화가 일어나야 돼요.

내가 살아 있는 게 아니라 주와 함께 살아 있다는 조건 하에 지금 내가 살아 있는 것이다. 그 조건을 철폐시키면 안 돼요. 없애버리면 안 됩니다. 주님 자꾸 껄떡거리지 말고 나가세요, 라고 밀어버리면 내가 사는 게 돼요. 그러나 이미 죽으신 주님이 들어와 버리면 둘 다 살 수는 없어요. 주님이 살아 있으면 내가 죽든지 내가 살아 있다고 우기면 주님은 나한테 꺼지든지. 둘 중에 하나밖에 없어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전쟁에는 외부를 통해서 내부의 실정을 까발리는 겁니다. 이스라엘 주변에 많은 이방민족이 있잖아요. 그들이 들락날락하면서 치고받고 하면서 우리 자체에 변화를 유도하는 것, 그게 전쟁의 의미거든요. 나중에 전쟁에서 이기거나 패배할 때 이유가 있단 말이죠. 이유가 뭐냐? 원칙인데 그 원칙이 법이에요. 율법입니다. 전쟁을 통해서 율법이 정리가 된다. 또는 율법이 제자리 잡는다. 착상이 된다. 이렇게 보면 돼요.

홉니와 비느하스가 언약궤 앞장세워서 전쟁했는데 빼앗겼잖아요. 그리고 사울이 아말렉과 전쟁하기 전에 제사부터 했는데 그것이 잘못이었지요. 결국 사울 왕은 먼저 제사 드려서 잘려버립니다. 사무엘에게. 이것은 말로 아니라 바깥에 있는 전쟁을 통해서 내가 뭔가 세상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렇다면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것이 과연 성경이 공허한 걸까요? 아니면 실제적입니까? 실제적이죠. 전쟁이라 했지만 오늘날 다른 말로 하면, 경쟁이죠. 경쟁을 하려면 기대가 있고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뭔가 계획이 있겠죠. 이런 것 하나하나 모든 것이 경쟁심에서 유발된 겁니다. 남한테 안 지려고 힘을 더 모으기 위해서. 니체철학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기대해서 실제적으로 나서지 않더라도 은근히 그렇게 됐으면 좋겠네, 라는 그것조차도 율법에 의하면 이게 악이 됩니다. 부산강의 듣는 사람들에게 미리 이야기하지만 이번에 아가를 하는데 아가서를 하면서 미리 알아야 할 것은 사랑이 자기에게 악행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 아셔야 돼요.

부부끼리 서로 사랑 안 하면 좋은데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 순간 그 부부는 본인들이 감당 못할 부부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랑에는 끝이 없기 때문에. 그리움이 멀찍이 있을 때 그립다 하잖아요. 그거는 그리움 반도 안 간 거예요. 진짜 그리움은 옆에 보고 있어도 그리워요. 그립다는 것은 불만족이거든요. 못다 채워진 게 있어요. 간격이 있단 말이죠. 못다 채워지면 그 결핍으로 견딜 수 없는 거예요.

정말 사랑하면 눈에 보고 있어도 그립고 동침을 해도 그리워요. 그 넘어설 수 있는 간격, 아무리 인간이 몸으로 할 수 있는 걸 다 동원해도 그 사람을 내 안에 집어넣을 수 없다는 육적인 한계로 인하여 고통하고 있습니다. 고통스러운 거예요. 합궁을 해도 그립다니까. 그러니 사랑한 게 잘못이에요. 노래 가사 같다.

그러면 차라리 그 사람이 죽었으면 좋겠다. 죽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죽으면 두 번 다시 못 본다는 그리움이 더욱 더 배가 되지요. 눈앞에 봐도 그립고 그리움을 참을 수 없어서 죽어라 해도 두 번 다시 못 본다는 것 때문에 고통스럽고. 인간에게 주어진 사랑이란 것은 사랑만 형벌이 아니고 모든 게 형벌입니다. 인간은 완벽한 완전한 사랑을 행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에게 큰 아픔을 줘요.

그러면 사랑은 지가 하고 싶어 합니까, 생기는 겁니까? 생기는 거죠. 이게 미치는 거예요. 내가 하고 싶어 것 같으면 사랑을 그만두면 돼요. 그런데 그만두는 것은 아예 사랑이 아니죠. 그냥 장난친 거죠. 내 것 만들어보겠다고 수작을 부린 것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랑을 없애기 위해서 다른 사랑을 찾아요. 이 사랑을 하게 되면 저 사랑을 잊을까 싶어서. 그래서 잊어질 사랑이라면 애초부터 사랑이 아니죠. 미치는 거예요.

대타로 사랑한다고 잊어질 사랑이라면 그건 첫사랑도 아니에요. 장난친 거고. 정말 사랑은 그 사람 말고 백 명을 사랑해도 그 사람보다 못한 아내 후보감밖에 안 돼요. 조약한 조잡한 대용물밖에 안 돼요. 그 사람에게 이쪽 사랑하면 할수록 허한 감정은 점점 더 커져요. 그럼 어쩌라고? 죽어야 되지요. 그럼 죽을 때까지? 아니. 이미 죽었어.

그러니까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것은, 제가 언젠가 그런 강의했는데, 죽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걸 어제 낮 설교에서 했지요. 인간이 사는 것은 내 죽음을 내레이션하기 위해 산다고.

사랑을 하게 되면 세상에 그동안 이건 실제적이다, 이건 분명히 있다 하는 모든 것도 공허하게 돼요.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사랑 자체가 공허해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이 밥 먹여 주냐고 욕하지만 사랑에 빠진 사람한테는 밥이 공허해요. 밥 먹을 때 숟가락으로 국물 뜨면 국물에 그 사람의 얼굴이 보이는 거예요.

제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지금 나와 같이 사는 사람 말고 다른 사람이 보이면 괜찮지만 국물에 자기 남편 얼굴 보이면 어쩌라고? 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워진다면 사랑이 스톱이 돼야 되는데 사랑엔 스톱이 없어요. 죽어야 멈추는 병이에요. 그런데 아가서에 보면 사랑이 나와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 사랑은 없는 사랑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걸 수련회 때 강의하고자 합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사랑 앞에 인간은 어떻게 없어진다? 내가 죽어야 하잖아요. 그러면 해답은 나왔어요. 내가 있기에 나의 망상으로 나의 이미지로 나의 허깨비로 등장한 것이 밥보다 더 중요한 사랑, 돈보다 더 중요한 사랑이 나오는 겁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우리한테 골머리가 되는 거예요.

제대로 우리가 복음을 알면 죽는 사람을 오히려 출감한다고 생각해서 부러워해야 돼요. “아이고, 형님. 좋겠습니다. 감옥에서 고생하다가 이제 출감하네요.” 물론 복음을 아는 조건 하에 그동안 나는 이미 죽은 자로 주의 일을 하기 위해서 살아 있다는 사람에게만 출감이지, 그것도 모르는 사람한테는 “죽음아, 가라.”

신성일이 부산영화제에서 한 소리 있잖아요. “암세포를 이길 겁니다.” 일주일도 안 돼서 죽었어요. 암세포가 얼마나 웃겠습니까. 죽을 때까지 자기 자신을 못 놓았다는 거예요. 이게 신성일 본인의 결정적인 오류였어요. 인생 잘못 산 거예요. 자기 자신을 못 놓은 거예요. 그걸 말 달리 하게 되면, 여러분은 놨습니까? 생존의 나를 놓았습니까? 그걸 놔야지요. 안 놓으면 천국 못 가니까 놔야 돼요. 놓을 때 내가 하지 말고 그분이 강제로 교체시키면 되는 겁니다.

그게 히브리서 2장에 나옵니다. 6절에,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잠간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지금 우리가 보려는 시편 8편을 그대로 인용하지요.

그런데 히브리서 2장에서 핵심을 뭐로 하느냐 하면, 여기 나오는 그분이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시는 분, 인자라고 지칭되는 그분이 누구냐 하면, 이 땅의 사람이 아니라는 게 핵심이에요. 이 땅에 인간 같은 인간 없다는 게 핵심이에요. 이건 누굴 이야기하느냐 하면, 아예 물어요. 8절 끝에 보면,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 6절에 나오네요. “오직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이렇게 나온다고요.

시편에서 증거한 핵심 내용은 뭐냐? 그 뒤에 8절, 9절에 보면,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여기에 핵심이에요. 그러니 이것이 히브리서 2장을 보지 않고 시편 8편을 보면서 난 이렇게 돼야지, 라는 그런 기대감 발상 자체가 히브리서에 보면 잘못된 거예요. 너 자체는 시편에서 나가! 시편에 나오는 인자, 사람이라 하는 것은 우리 보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예수님을 보고 한다고. 예수님을 겨냥해서 다윗이 시편을, 하나님의 계시를 우리 앞에 펼치신 겁니다.

여기 천사가 등장해요. 9절에 보면,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히브리서 2장에서 핵심되는 주제는 예수님 묘사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분이라고 묘사함으로서 천사들의 누구한테 복종하느냐 하면, 사람한테 복종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에게 복종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냥 복종하는 게 아니고 시편 8편과 연관시켰어요. 그럼 예수님을 뜯어보면 그 안에 시편 8편에 하나님이 하셔야 될 일, 해야 될 주의 일이 포함돼있어요. 첫째 시간에도 이야기했잖아요. 우리는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우리 안에 스며들었단 말이죠. 그렇지 않으면 천사들이 성도들에게 복종할 필요가 없어요. 천사들은 말씀이 완성되는 상태에서 복종하게 돼있어요.

천사가 어디가 못나서 우리한테 복종합니까? 왜 우리를 도와줘요. 껍데기 외피 보고 도와주는 게 아니에요. 신성일은 물론 인물 잘 생겼어요. 많은 사람은 거기에 복종할 거예요. 그러나 천사는 신성일에게 복종하지 않습니다. 껍데기를 보는 게 아니고 고등학교 어디 나왔는지 보는 게 아니고 시편 8편이 완성된 상태인가 그걸 보고 천사가 복종하지 말래도 복종하고 도와주지 말래도 도와줘요. 천사는 곧이곧대로 살아가는 존재물이에요.

천사한테 유도리를 요구하면 안 됩니다. 천사한테 감히 협박 공갈치면 안 돼요. 천사는 하나님 말씀의 완성에 대해서는 복종하는 그런 속성을 지니고 이 땅에 만들어진 피조물이에요. 쉽게 말해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생각하면 천사가 안 도와주려야 안 도와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의 일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이여 도와주소서. 성령님이여 도와주소서. 천사여 도와 달라 하니까 이건 번지수를 잘못 계산한 거예요.

주님은 내 일 안 도와줍니다. 내 안에 있는 말씀이 만개되도록 내 안에 적용된 말씀이 바깥으로 전개되고 확장되고 확대되는 일에 우리를 쓰시는 거죠. 주의 증인 노릇할 때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겁니다.

그럼 이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천사들이 예수님께 복종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시편 8편을 어떤 식으로 완성시켰는지 그것만 찾으면 되겠죠. 예수님께서 시편 8편의 완성을 자기 백성에게 집어넣게 돼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완성시킨 시편 8편이 이제는 우리 안에도 있는 거예요. 시편 8편이 살아 있다는 조건 하에 우리도 살아 있는 겁니다. 시편 1편이 살아 있는 조건 하에 우리가 살아 있는 거예요.

말씀이 살아 있는 조건 하에 우리가 살아 있고 좁은 문으로 가라, 넓은 길로 가지 말라는 그 기능이 살아 있는 조건 하에 우리가 살아 있는 거예요. 말씀이 나오니까 꼰대 아니라도 터져 나올 수밖에 없지요. 지적질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말씀이 있으니까. 없으면 그런 소리 하겠어요? 있으니까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그렇다면 이 시편 8편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은 무슨 일을 하느냐 하면, 히브리서 2장 9절에 보니까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시편 8편을 할 때 예수님이 살아 있는 채로 하는 게 아니고 시편 8편에 의하면 예수님을 어디에 집어넣어서 이루게 했다? 잠간 동안 죽음과 고난에 하나님이 집어넣게 하고, 여기에 천사들이 도와줬어요. 주님을 고난과 죽음에 집어넣음으로써 드디어 예수님이 시편 8편의 완성된 인자에 합당한 존재로서 등장한 겁니다.

우리가 보는 시편 8편을 설계도에요. 시편 8편대로 살면 돼요. 우리는 일종에 하늘나라의 인공지능이라 보면 됩니다. 중국에서 인공지능 앵커가 나타났어요. 표정도 어색하지 않고 앵커 잘합니다. 원고를 컴퓨터에 집어넣은 그대로 이야기해요. 해설하는 사람이, 이 앵커는 휴식도 없고 화장실도 안 가고 태업이나 반발도 없고 월급도 없고 스물네 시간 잠도 자지 않고 앵커 일 한다는 거예요. 꼭 우리를 닮았어요. 우리는 잘잘 때도 시편 8편. 낮에도 시편 8편, 항상 시편 8편. 다른 말로 하면, 천사가 우리를 도와주는 게 되는 겁니다.

그건 조금 있다 더 하고요. 다시 시편 8편 2절에 보면, 주의 대적이 나오잖아요. 아까 한 것 기억나지요. 전쟁이란 어떻다? 무엇이 이스라엘이냐 테두리 지을 때 반드시 이스라엘 아닌 쪽과 전쟁을 붙여서 여기서 전쟁의 원칙, 하나님의 율법이 이스라엘 속에 실제적으로 현실화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공허하게 보지 않아요. 왜냐하면 자기 역사기 때문에. 오늘날 교인들은 성경 보면서 공허하다 하지만 실제로 성도도 매일같이 당하는 전쟁과 경쟁 속에서 주님이 원하는 것은 바로 넓은 길로 가지 말라. 좁은 길로 가라는 것처럼 모든 성경말씀, 네가 반석 위에 집을 지어라. 모든 성경말씀과 관련되어서 우리에게 실제라고 들이닥치게 한 거예요.

조건이 있지요. 나를 위한 내 인생이 아니고 주을 위한 인생이란 그런 조건만 된다면 그것이 얼마든지 공허한 게 아니고 실제적인데 우리는 성경 들을 때뿐이고 또 내 인생과 내 가족만 남아요. 그래서 시편 8편 2절에 전쟁할 때 맞장 뜨는 사람이 있어요.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무슨 말인지 앞뒤가 전혀 연결이 안 되지요.

연결이 안 될 때는 이렇게 생각하면 연결이 돼요. 젖먹이와 어린아이를 결과물로 보자. 젖먹이한테 칼 쥐어주고 나가라는 게 아니고 걷지도 못하는 어린아이에게 갑옷 입히고 창 들고 싸우라는 게 아니고 전쟁의 부산물로 뭔가 전쟁은 벌어지는데 계속 뭔가 생산되는 것이 뭐냐 하면, 젖먹이와 어린아이가 되는 거예요.

건방지고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산다는 이런 인간을 주님께서 이스라엘로 간주하시고 거기에다 전쟁을 유발시키면 이렇게 건방지고 내 인생만 챙기고 자길 알아달라고 살던 인간이 주께서 이루시는 일을 경과해보니까 그들이 뭐가 됐어요? 젖먹이와 어린아이가 돼버렸어요. 이건 철저하게 종속되고 예속되는 존재다.

젖먹이와 어린아이는 누가 일으켜주지 않으면 일어서질 못해요. 젖을 지가 알아서 먹습니까? 젖먹이잖아요. 누가 먹여줘야 되잖아요. 어린아이가 스스로 힘으로 밥을 떠먹을 수 있고 돈을 벌 수 있습니까? 보호자가 있고 후견자가 있잖아요. 이게 그들에게 준 뭐가 돋보이느냐 하면, 권능이 돋보이는 거예요. 하나님의 권능이 돋보이려면 그동안 하나님의 권능을 훼방하고 방해했던 세력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네 인생 네가 알아서 살아라. 이게 내 가정과 나에게 주신 오늘의 은혜를 사람들이 다 가리고 있는 겁니다.

어제 열한 시 넘어서 메시지를 주고받았는데 제가 알던 분인데 답변을 해줬어요. 저한테 뭐가 불만이냐 하면, 사람이 예수 믿고 새사람 되어서 하는 일을 왜 목사님은 그걸 공격하십니까? 그런 쪽으로 이해한 분이었어요. 물론 내가 그런 뜻이 아닌지 알지만 그런 분과 중재하려고 애쓰다보니까 그쪽을 이해해줘야 되지 않겠느냐. 목사님이 너무 복음만 이야기하지 말고 평소에 사람들이 예수 믿고 새사람 되려고 바르게 살려고 애쓰는 그것도 좀 감안해서 그 가치를 너무 묵사발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말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했지요. 저는 사람을 전부 다 죽었다고 간주해봅니다. 사람이 죽으면 사라져요. 사라지면 그 사람 뒤에 남는 게 있지요. 하나님의 은혜가 남아있다고. 그 은혜를 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주님의 은혜를 누가 가리고 있어요? 살아서 잘났다고 펄펄 뛰는 그 인간이 그 존재가 복음을 가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전쟁인 거예요. 날 알아달라는 거예요. 못 알아주겠다는 거예요, 저는.

주님을 사랑하잖아요. 사랑하는 것도 너한테 악행이죠. 아까 사랑도 악행이라 했으니까. 원래 공동체에서 전쟁할 때 외부에서 와서 내부에서 전쟁을 벌이면 징벌이 있어요. 그게 추방입니다. 하나님이 개입할 때 결과가 뭐냐? 내가 사랑하기로 작정한 데서 추방시키는 것이 가장 무서운 형벌이에요. 네는 내 보호망 속의 대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요한복음 10장처럼 너는 내 양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에요. 이것보다 무서운 이야기 없어요. 피 흘리고 괴물 나오고 이게 무섭지 않아요. 주님으로부터 너는 내 양이 아니라는 그게 제일 무서워요. 그 반대로 가장 기쁜 소식은 뭡니까? 너는 내 양이라는 된다면 우리가 거지 되도 노숙자 되도 괜찮아요. 우린 아무 상관없어요. 너는 내 양이라는 것, 그것조차도 주님께 예속되고 종속된 그 모습으로 죽어도 괜찮아요.

따라서 추방된 게 제일 무서운 형벌인데 그게 창세기 4장에 나옵니다. 아벨 죽인 형벌이 뭐였습니까? “내 동네에서 나가. 꺼져!” 이거거든요. 내 공동체에서 나가. 이게 제일 무서워요. 물론 목사님 교회는 알아서 나갔지만. 복음 듣기 싫어서 나가버린 거예요. 쉽게 말해서 내가 머물 동네가 아니라는 겁니다. 우에 그렇게 잘 아는지. 이게 영이 다르다는 거예요. 고상하게 포장해서 영이 다른 게 아니고 내가 관심 두고 복음 있는 성도가 관심 두는 것에 관심이 없는 거예요.

성도와 주님이 관심 두는 것은 인자거든요. 인자가 어떻게 됩니까? 인자가 그냥 받습니까? 뭔가 고난과 죽음을 경유했기 때문에 획득한 거잖아요. 그럼 우리는 인간도 아닌 게 시편 8편 속의 그리스도와 하나 되려면 반드시 뭘 경유해야 돼요? 고난과 죽음을 유발하는 체험을 해야 돼요. 그걸 본인이 알아서 하겠다고요? 턱도 없는 소리.

누가 알아서 합니까? 우리를 젖먹이처럼 먹이시고 키우시는 주님께서 시편 8편에 목표를 정해놓고 천사가 와서 우리로 하여금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가게 하시는 거예요. 우리의 의도가 아닙니다. 그래야 악마에 장악된 이 세상이라는 테두리에서 노는 동네에서 다른 동네로 분리가 가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빠져나올 때 우리가 어떻게 힘써야 됩니까, 라고 물으면 우리가 힘쓸게 없어요. 왜냐하면 권능이니까. 우리에게 나왔으면 권능이라 하지 않아요. 우리는 그냥 실력이지 권능이 아니거든요. 하나님이 힘을 우리에게 주실 때 권능이에요.

어제 낮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예수의 흔적은 뭐냐 하면, 큰 구멍 같은데 거기다 뭘 집어넣느냐? 그동안 이 세상에 살면서 성도가 세상과 경쟁하고 비교할 수 있는 거리 있잖아요. 너는 경제적으로 수입이 얼마다, 건강한가, 건강하지 않느냐, 정치적으로 누구 편이냐, 더 나아가서 나는 평생 동안 악하게 살았다, 선하게 살았다, 그 선악의 기준을 구멍 속에 다 집어넣어요. 그런 조건이 다 없다면 더 이상 남과 비교할 건더기가 없지요. 여지가 없잖아요.

그럼 뭐만 자랑하겠어요? 쓰레기통만 내가 이런 것 때문에 마귀한테 시달렸다는 쓰레기통이라 할 수 있고 그걸 태워버려요. 소각장을 들고 다니는 거예요. 이게 십자가만 자랑하는 거예요. 니 눈앞에 십자가 안 보이나, 이 말이에요. 그동안 나를 힘들게 조건들, 인간들과 경쟁하기 위해서 내건 조건들, 힘자랑하기 위해서 내건 조건들을 다 소각시킨 그걸 들고 나설 때 그걸 바로 예수님이 시범해 보이신 거예요.

예수님이 이 땅에 왔을 때 얼마나 주위에서 평가가 다양했고 얼마나 치밀하고 날카롭게 차갑게 다가왔습니까. 죄인들과 밥 먹으면 밥 먹는다고 난리고, 금식 안 한다고 시비 걸고, 안식일에 병 고치니까 안식일 어겼다고 이야기하고. 하는 족족 사단의 짓이고 악마의 짓이라고 귀신의 대장 짓이라고 그렇게 욕을 얻어먹었잖아요. 견디다 못한 제자들도 예수님과 결별했잖아요.

제자들 모습이 정말 그들의 거쳐야 될 필수코스를 거친 겁니다. 사실은 우리도 그 코스를 매일같이 겪는다고 보면 돼요. 나, 주님 싫어. 이러려고 예수 믿었나. 그 코스. 벌써 우리가 그런 생각한다는 자체가 세상이 주는 조건을 못 벗어난 거예요. 그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없어요. 없을 땐 권능이 임해야 되지요. 그 권능이 속 시원한 권능이죠.

권능 받는 건 좋지만 너무 외롭지 않느냐고 하는데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외롭지 않아요. 47절에.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저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을 이스라엘이라 해요. 어떤 테두리라 해요. 너는 내 양이라 이 말입니다. 너는 내 관리 하에 있는 사람이고 내 책임 하에 창세전부터 사랑받기로 작정된 사람이라고 넣는 거예요. 나다나엘이 외롭습니까, 지금? 나다나엘은 권능과 함께 있어요. 나다나엘은 지금 무엇에 놀라느냐 하면, 내가 기도해서 갈 수 없는 나라를 주께서 내가 기도하기 이전부터 권능으로 나를 안다고 하신 그 힘에 푹 빠져서 사는 거예요.

세상에 이것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습니까. 복권 당첨됐다고 복? 그 돈 다 떨어져요. 돈 떨어지면 다시 맹탕 됩니다. 또 허전하고 쓸쓸하고 없어요. 그 권능을 누가 방해했습니까? 내가 방해했지요. 누가 따라가려고? 악마 쳐놓은 그 조건 있잖아요. 같은 인간이니까 우리 패라는 거예요. 아니에요. 우리 패 아니에요. 주께서 강제로 두 패로 나누는 겁니다.

사람 같은 사람과 사람 아닌 사람으로 두 패를 나누는 거예요. 어떻게? 예수님을 보내십니다. 예수 체험되지 아니하면 예수 편이 아니거든요. 그럼 예수님은 어떻게 살았는가? 하루하루 죽음의 길로 고난의 길로 가셨단 말이죠. 우리는 죽기 싫은데 고난 받기 싫은데. 염려하지 마세요. 권능이 오실 거예요. 권능이 오게 되면 우리로 하여금 세상 자체가 세상의 평가나 경쟁 자체가 시답지 않고 시시하게 느껴질 겁니다. 참 웃기네.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그걸 제가 지난 낮 설교에 예수의 흔적이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예수의 흔적만 남기고 나머진 망치로 다 쳐버린다 하지 않습니까. 튀어나온 것. 주님의 관심은 그게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그래서 뭐만 자랑한다 했던가요?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시죠.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자랑할 것과 자랑하지 않을 것도 분간 못하고 지킬 것과 지키지 못할 것도 분간 못하는 겁니다.

시편 8편 계속 해봅시다. 젖먹이와 어린아이로 뭘 세운다? 결과물이라는 증거는 젖먹이와 어린아이가 있는데 시편 8편에선 이런 결과를 낳는 걸 뭐라 했습니까? 권능을, 그 다음에 뭐라고 돼있습니까? 세운다, 에요. “저 능력 봐. 자랑할 만하잖아.” 주님께서 자랑하고 싶은 거예요. 저 봐. 저 사람들 마귀한테 속해서 경쟁하고 자랑질하고 기분 좋다 또는 절망한다.

놀이동산 롤러코스트 타듯 인생 그렇게 살아야 되는데, 저 봐. 꼭 어린아이 같잖아. 젖먹이 같잖아. 지적질 해도 젖먹이로 지적질 하는 건 괜찮아. 주님의 젖만 바라보고 살잖아. 젖먹이가 젖을 먹고 만족스러워서 엄마 얼굴 쳐다보는 그 관계 그 연결로 살아가잖아. 어떻게 인간으로서 저런 인간이 나올 수 있는가. 봐라. 하나님의 하신 일의 권능을. 이 놀라운 위력을 봐라 이 말입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고린도전서에 나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교인들끼리 재판하고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어려운 일을 너무 쉽게 이야기했어요. 그것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아유, 쉽다. 결혼했는데 고민이에요. 갈라서라. 아유, 쉬워요.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라. 아유, 쉬워요. 여자가 사십이 다 됐는데 좋은 사람 하나님이 중매시켜줬으면 좋겠습니다. 결혼? 혼자 살거든 주의 뜻인 줄 알고 혼자 살아. 결혼하면 네가 고생이야. 말을 너무 쉽게 해버려요. 나 봐. 결혼 안 했잖아. 이런 식으로.

왜 쉽게 하느냐 하면, 당연하기 때문에. 사도 바울님, 돈 많은데 어디다 투자하면 됩니까? 요새 부동산도 안 되고.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해라. 네 집에 돈 없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라. 말을 너무 쉽게 해버려요.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 뜻과 같이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어린아이에게 자기를 키우고 보호자 되시고 자기를 인정해주는 주님 외에는, 어린아이에게 돈 만 원짜리 지폐라든지 금붙이는 아무 의미 없습니다. 금으로 구원받는 것 아니잖아요.

참 저도 말을 좀 쉽게 한 셈이 됐는데 어린아이와 젖먹이처럼 사는데 밖에 나가면 이왕이면 랜드로버 타는 어린아이, 벤츠 타는 젖먹이 또 이러고 싶거든요. 그러면 작은 자 안에서 또 경쟁이 시작되는 거죠. 그럴 때는 주께서 더 권능을 입히시죠. 수난과 고난과 죽음이 가까이 있다는 걸 깨닫게 해서 낮아지고 더 낮추는 겁니다. 상관없잖아요. 네가 그런 것 없더라도 네 신분과 네 위상과는 상관없다는 거예요.

제가 보기에 오늘날 성도들의 제일 큰 문제점은 뭐냐 하면, 자기의 신분의 얼마나 귀한 줄을 모르고 살아간다는 게 안타까워요. 얼마나 큰 걸 얻고 얼마나 많은 걸 얻고 얼마나 누리게 했는데 너무 세상이 탐이 나서 그 고귀한 가치를 버리지 말아야 할 걸 엉뚱하게 쓰레기통에 버리고 외면하고 살아가는 모습으로 질질 눈물 흘리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안타깝다 이 말이죠.

3절을 봅시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갑자기 해와 달 이야기하다가 왜 인자와 결부시키느냐 하면, 해와 달보다 사람이 더 귀하다 이 말이죠. 꽃보다 사람이 더 아름답다는 노래…….

그 사람은 우리를 말하는 게 아니고 주님의 권능에 의해서 생긴 주님의 권능이 여기서 작열하는 인간, 주님의 인공지능(오늘 제목 후보), 해와 달보다 위대한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면서 얻어낸 생산물이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보기에는 아주 초라하고 대수롭지 않고 남들 보기에도 그렇지만 우리 자신도 그렇게 봐요.

평생 뭐했노. 바닷가 갯바위에 앉아서. 자꾸 자기 자신을 외로운 존재로 간주하는데 주의 일이 작열하는 곳이에요. 외로워도 괜찮아. 왜? 우리가 외로워도 그게 주의 백성이라는 권능으로 덧입혀진 그러한 인식으로 살아가셔야 돼요. 나는 몸이 아파서 골골댄다. 골골대더라도 그 자체가 주의 권능으로 생각하자 말이죠. 넌 그 짓하다 죽어.

5절에 보면,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잠시 못하게 하셨다. 천사보다 낮아지게 했다. 고난 받고 죽으니까 천사보다 못하잖아요.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주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예수님께서 성전세를 내실 때 과학적으로 따지면 이해 안 되는 것이 한둘이 아닙니다. 성전세를 어디서 끄집어냈습니까? 그냥 주머니에서 내주면 되는데, 물고기가 하나 왔는데 입을 열어보니까 많지도 않아 딱 성전세 액수만큼만 있는 거예요. 요새 마술사들이 하는 마술 같아. 카드에 사인해놓고 여기 당신이 사인한 카드가 있습니다, 하고 내놓는 거예요. 미리 예정됐고 미리 작정됐다는 사실 미리 예정되고 작정된 그 계획이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 속에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계획, 주님의 작정 때문에 우리는 요 모양, 요 꼴로 필히 살아가야 돼요. 왜냐하면 인생이 나를 위한 인생, 잘 나라고 보낸 인생이 아니잖아요. 주님과 겸하여 있지 않습니까? 주님이 주님답기 위해서 최적화된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 내려서 우리로 하여금 이 인생을 살게 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우리가 알 수 없는 변수의 작용이에요.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닙니다. 그렇게 잘못하도록 유도한 변수는 수천 가지, 수만 가지가 있습니다. 어디 것 하나라도 빠지면 지금 내가 잘못했다는 이야기가 안 나오는 다른 상황이 벌어졌어요. 그 상황은 일일이 인간의 지능으로 다 헤아릴 수 있습니까.

만약에 남편과 선 볼 때 차를 놓쳤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 다방이 아니고 다른 다방이라면? 온갖 변수를 능히 만들어낼 수 있어요. 그러나 이 변수, 저 변수 중요한 것은 지금의 남편을 주님이 몰아넣었다고 보면 돼요. 그것도 주님의 권능이죠. 권능인데 그 성질은 뭐냐? 고난과 역경과 결국은 너 만나서 나 죽는다는 죽음이죠. 죽음과 고난과 역경을 통해서 주님이 이 땅에서 하신 그것을 계속 우리 인생을 통해서 복제를 하는 거예요. 똑같은 걸 복사해버려요.

고난주고, 고난주고 아무나 와도 고난주고, 고난주고. 꼭 붕어빵 하는 것처럼 밀가루반죽에 앙꼬 넣고 돌려버리고, 밀가루반죽에 앙꼬 넣고 돌려버리고. 똑같은 것, 예수님의 공생애 고난과 십자가 가는 길을 우리에게 그대로 복제해서 집어넣어버린 겁니다. 그런 작용이 일어날 때 우리는 바로 그리스도의 권능에 속했다, 주의 백성으로서 마무리 복종하는 그러한 위상으로 존재하는 사람이라고 보면 돼요.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봅시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이걸로 설명 끝내겠습니다. 인격, 인물을 시편 8편 마지막에선 인물이 뭐로 바뀌었습니까? 이름이죠. 왜 바뀌어야 되냐 하면, 인물은 시간적으로 한 장소에 제한돼있어요. 주의 이름은 시간과 공간을 벗어났을 때 효과 있는 게 이름이에요.

예수를 만나면 구원받을 것이라는 게 아니에요. 주의 이름을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을 구원을 얻으리라. 인물로 있으면 존재가 되고 이름은 뭘 유포하느냐? 사건들을 발산시킵니다. 주의 이름으로 벌어진 사건이죠. 인물로 있을 때는 내가 그분에게 다가가야 돼요. 지금 비행기 타고 팔레스타인, 이스라엘로 가야 돼요.

그러나 이름은 공간적인 제한을 두지 않고 사건이기 때문에 주님의 이름이 한국 땅에 있는 나에게 사건을 유발시키면 권능을 행사하면 우리는 어젯밤에 이렇게 생긴 주님을 만났다는 게 아니라 완성된 주의 이름으로 내 이름이 삭제되는 기쁨을 누립니다. 내 인생이 지워진 내 인생이라는 게 없다는 것, 주의 인생이 엎어져서 주의 이름으로 소속된 예속된 사건의 일부가 되죠. 내가 살아가는 게. 내가 존재하는 것이 주께서 일으킨 사건의 일부가 돼요.

그렇게 되면 우리가 남 앞에 교인들 앞에서 주의 이름으로 나서야 되지요. 그게 로마서에 나오잖아요. 무엇을 하든지 주의 이름으로 하라. 이게 예수님 마태복음, 마가복음에 쭉 나오는 이야기에요. 선지자 이름으로 하면 선지자 상을 받고, 주의 이름으로 하면 주님의 사람이 되는 거예요. 내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 모이면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 이름을 외치는 곳에 함께 있겠다는 약속이 주의 이름 안에 이미 포함이 돼있어요.

그동안 주의 이름을 누가 방해했어요? 내 이름이 방해한 거예요. 내 인생이 방해했고, 내가 유발한 사건이라고 우겨서 방해한 거예요. 그런데 주의 이름이 사건으로 권능이 오게 되면, 내가 고난 받아야 되고 내가 이 땅에 힘들게 살아야 될 이유가 있구나. 이게 전쟁이구나. 주의 이름과 내 이름의 전쟁, 나 잘났다는 것이냐, 아니면 주님의 공로가 우월한가의 전쟁을 나를 앞장세워서 세상에 내보내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인자가 가신 그 길을 우리로 같이 가게 함으로써 날마다 주님이 주신 권능의 고마움이 되고 우리는 그 결과로 날마다 젖먹이와 어린아이 같은 좀 뻔뻔스럽지만 이미 우리는 주님한테 맡겨놨기 때문에 살아도 그만이고 죽어도 그만이고 주님께서 끝까지 보장한다는 그 기쁨 안에서 믿음 안에서 그 포근함 안에서 권능 안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시편 8편이 움직인다는 것을 우리가 감지하게 주시옵소서. 그동안 내 인생이라고 여겼던 것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때마다 주께서 깨우쳐서 네 인생은 없다고 일러주시는 그 복을 늘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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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16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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