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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서울의존강의20181109b 베드로전서2장 10-13절(예언자)-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베드로전서

서울의존강의20181109b 베드로전서2장 10-13절(예언자)-이 근호 목사 첫째 시간의 말씀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려냈으면 주님의 기능이 있고, 그 기능을 위해서 계속 우리를 살려낸다는 그것이 예언자라는 말씀이라고 이렇게 여러분들이 정리를 했을 거예요. 근데 그렇게 정리를 했다면, 그 정리는 어설프기 짝이 없는 정리입니다. 왜냐하면 12절을 한번 보세요.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이래 되어 있죠.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의 기능으로, 예언자로 예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한다고 하니까, “그럼 우리가 할 일은 딱 나왔네요. 뭐 선하게 살면 되겠네요.”라고 한다 이 말이죠.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바로 유대인들이 그 당시에 예수님을 생각한 것하고 똑같아요.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선한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 이 땅에 택한 백성이다. 이제 바르게 살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신다.” 이 사고방식하고 다를 바가 없이 똑같아요. 그렇게 내가 예언자로서 바르게 살면 된다고 했을 때, 우리가 뭘 놓쳤느냐 하면은, 예언이라는 것이 이게 말이잖아요. 말. 또는 말씀이죠. 말씀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새로움이 창조되는 거예요. 새로움이. 선한 일, 이거 밀어붙이는 거예요. 선한 일이 아니고 새로운 선한 일이 되는 거예요. 이걸 놓치면 안 돼요. 우리가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에 와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언대로, 예언이란 말씀이다. 그럼 우리가 말씀을 지키게 되면 선한 일이 되고, 그러면 하나님의 기능을 제대로 완수하게 되니까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지, 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거는 잘못된 겁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선함 말고, 예상도 못한 “그게 선한 거야?!”라고 하는, 그런 예상 못한 새로운 선함이 예언의 기능으로서 이게 도출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예언의 기능으로서. 그렇게 되려면 우리는 우리가 익히 아는 그런 선함을 포기를 해야 돼요.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예언자라고 한다면, 성도가 예언자 맞아요. 신약의 예수님 기능 자체가 예언의 기능이고, 그 성령의 기능이 우리한테 왔으니까 예언자가 맞는데, 그 예언자 기능을 하면서 우리가 익히 아는 선행은 선행이 아닙니다. 아니고, 예수님이 지금 일하면서 새롭게 만들어내는 새로운 선행이 우리를 통해서 창조되도록 조치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와중에서 누가 죽었는가요? 우리 자신들의 자기부인, 자기부정이 계속해서 유발되고 연발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오늘 착한 일 했다. 그게 부정되어야 해요. 그거는 예상하고 익히 아는 그러한 선행입니다. 그 선행은 예언된 선행이 안 돼요. 그건 창조적인 요소가 빠져있어요. 선이 아닌데도, 아, 이거마저 선이었구나! 라고 새롭게 창조되는 거예요. 새로운 일이 있어야 돼요. 새로운 일이. 자, 그럼 새로운 일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내시는가? 아까 샌드위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여기 우리 몸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백성이 아니었는데 백성이 되게 하신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여기에 들어오십니다. 예수님께서 들어오신다고 할 때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원칙이 있어요. 그 원칙이 무슨 원칙이냐 하면 새 언약 원칙입니다. 그 새 언약 원칙이라고 하는 것은 기존의 인간들의 율법적 기능을 완전히 무시하는 그 바탕위에 새 언약이 나왔습니다. 쉽게 하겠어요. 예수님의 새 언약은 뭐냐 하면 피와 살을 먹는 거잖아요. 피와 살을 먹는 거. 평소에 인간들이 피와 살을 먹습니까? 안 먹죠. 그러니까 예수님의 새 언약은 그 방식이 어떻습니까? 새로운 거예요. 인간이 기존에 해왔던 그 방식을 완전히 인정하지 않는 방식이에요. 어제까지 나는 착한 일 했다. 그러면 오늘의 예언은 뭐냐 어제까지 착한 일 한 그 착함을 주께서는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날마다 우리의 착함을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우리는 뭘 포기해야 돼요? 내 착한 것이 이틀치, 사흘치 계속 간다는 그걸 인정해야 돼요? 그걸 포기해야 돼요? 사흘 간다, 나흘 간다, 이걸 인정하면 안 되겠죠. 그러면 선행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한 성과가 아니고 이건 우연적인 사건이 되는 겁니다. 선이라고 하는 것은 우연적 사건이에요. 우연한 사건이에요. 우연한 사건의 특징이 뭐냐 하면 예상 못한 사건이거든요. 예상 못했다는 것은 내가 은근히 기대하거나 내가 노렸던 사건이 아닌 것이죠. 그렇다면 이거는 우리의 행함과 관계가 없어요. “나는 오늘 착한 일 해야지.”라고 하는 것과 전혀 상관이 없어요. 하다보니까 그것이 주님께 영광이 되는, 이거는 마치 그 일을 하면서도 내가 깜짝 놀랄 정도로. “어떻게 내가 그 일을 하게 되었지?” 행사한 본인도 “이건 내가 한 게 아니야.”라고 설레발을 칠 정도의 일. 그럴 때 그 공로가 누구한테 돌아가겠습니까? 주님의 일하심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주님이 주신 기능은 주님 쪽으로 공로가 돌아가는 조건 하에 준 거예요. 주님이 주신 기능가지고, 자기가 어른 행세하고 자기가 모든 영광을 중간에 가로채라고 주신 기능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 이름으로 착한 일 해봐야 그건 착한 일이 아니고, 사실은 도둑질 한 거예요. 그러면 이 이야기를 쉽게 한다면 이렇습니다. 모든 있음을 없다고 잊어버리는 거예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농촌에 봉사를 갔잖아요. 갔다 왔잖아요. 그러면 그 봉사한 것을 잊어버리세요. 남편이 바쁜데도 아내를 도와서 애 봐줄 테니 하루쯤 아내는 놀게 하고 자기는 노는 날 안 쉬고 하루 종일 애를 봤다. 누가 봐도 참 착한 남편이라고 하겠죠. 그렇게 하시되 그거는 선행이 아닙니다. 뭐가 선행이냐 하면 그 다음날 그 사실을 잊어버릴 때, 그게 선행이 되는 거예요. 왜? 나와 결부가 안 되어 있으니까. 내가 여기 있음과 결부가 안 되어 있으니까. 주님께서 유발하신 사건이에요. 주님께서 애보라고 했고, 주님께서 애를 제때에 잠 잘 자게 했고, 전부 다 주님께서 한 걸로 하려면 그 현장에서 결국 나는 제3자로 빠져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그게 내가 한 일이 돼버리면 이건 새로운 일이 아니에요. 내가 했던 행세를 그냥, 내가 잘하고 있었던 나의 테크닉을 또다시 써먹었을 뿐이지, 이거는 본인한테 전혀 새롭지 않은 일이 돼버렸어요. 애를 일주일동안 봤다면, 일주일동안 보면서 월요일에 애를 본 것, 화요일에 애를 본 것, 일주일 내내 새롭게 느껴져야 돼요. 새롭게. 그걸 만약 옆에서 카메라로 쭉 찍는다면 월요일에 애를 본 것, 화요일에 애를 본 것이 남들 보기에는 똑같이 보인다 해도, 본인은 날마다 그것을 새롭게 느껴야 됩니다. 새롭게 느끼려면 지나간 것은 잊어야 돼요? 안 잊어야 돼요? 그걸 완전히 잊고 부정해버려야 되죠. 이 말이 통째로 되려면 주님께서 이 세상을 주도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돼요. 매트리스가 하나 있는데 그 안에서 애가 논다고 합시다. 그냥 혼자 놀면 놀긴 놀아도 약간 재미가 없어요. 근데 아빠 엄마가 양쪽 붙잡고 매트리스를 기우뚱기우뚱하게 흔들면 애가 재미있다고 깔깔깔 대죠. “또 해줘! 또 해줘!” 이렇게 하죠. 왜 그러냐 하면 평평하다고 여겼던 이 매트리스가 요동치고 있잖아요. 주님께서는 똑같은 날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장담할게요. 똑같은 날을 주신 적이 없어요. 그런데 인간은 왜 그날이 그날이라고 생각을 하느냐 하면은, 인간이 자기한테 맞추기 위해서 동일한 날로 일방적으로 그렇게 규정을 해버린 것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것을 형식화라고 하는데, 그것이 자기 일을 도모하는데 합리적이고 편리하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는 동일하게 생각을 하는 거예요. 똑같은 해는 뜬 적이 없는데 우리는 똑같은 해가 떴다고 우기는 겁니다. 그러니까 뭡니까? 본인한테 본인이 새로운 것을 느낍니까? 못 느낍니까? 전혀 못 느껴요. 사는 게 지겨워요. 주께서는 지금 매트리스 흔들 듯이 요동치고 있는데, “아휴! 사는 것 재미 하나도 없다.” 이러고 있거든요. “뭐, 특별한 일을 해볼까?” 이러고 있다고요. 주께서 이끄시고 인도하는 이 세계창조, 이 세상을 주께서 창조를 하셨는데, 그 창조하실 때 그 바탕이 뭐냐 하면 주님의 십자가 희생에서 나온 거예요. 골로새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서 세상은 만들어졌거든요. 자, 지금까지 한 것을 여러분들이 다 아시는지 복습해봅시다. 골로새서 1장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서 세상이, 세계가 거기서 나온 거예요. 창조의 바탕은 뭐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의 바탕위에 세상이 창조된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흐르는 유일한 원리는 뭐냐 하면 예수님의 희생에 있죠. 왜냐하면 모든 세상은 그리스도로 통일되기 때문에. 피 흘림으로 의롭게 되는 거예요. 전부 다 희생이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세계에서 희생이 유일한 기준이라면 이 땅에서 무엇이 선이겠습니까? 주님의 희생을 이해하면 그게 선이 되고, 주님의 희생을 모르게 되면 악이 되겠죠. 그러면 희생을 외면한다, 희생을 모른다는 말은 결국 이 세상을 꾸려나가는 데에 있어서 내가 누구를 의지한다는 말입니까? 주님의 희생을 도외시했고 안 봤으면, 그러면 이 세상은 무슨 원리에 의해서 나를 계속 이 땅에서 살게 하겠다는 겁니까? 이것은 나의 열성과 노력과 나의 조심스러움 나의 윤리와 나의 도덕이겠죠. 이게 바로 이 세상에서 주님께서 이야기하는 선이겠어요? 악이겠어요? 이게 악인 거예요. 왜? 주님의 십자가 희생을 고려하지 않고, 그것을 삽입하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희생을 왜 외면할 수밖에 없는가? 그거는 내 인생을 누구 인생이라고? 내 인생을 내 인생이라고 이야기를 했거든요. 나만 잘되면 돼요. 내가 편하고 내가 칭찬받고 내가 성공하면 그걸로 돼요. 더 바라면 죄가 됩니다. “바램은 죄가 될 테니까” 김동규의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내가 잘 되고 나 편하고 내 가정 잘 되고 내 소원대로 되면 더는 소원이 없다는 거예요. 이게 성경입니까? 이게 성경이 아니잖아요. 이게 진리입니까? 이게 진리가 아니죠. 누가 인간을 이렇게 만들었어요? 자기 행복이 복이 아니거든요. 자기 행복은 저주다 이 말이죠. 왜? 뭐가 빠졌습니까? 내 행복을 추구하라고 내가 이 땅에 살아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희생과 연관 지으라고 이 땅에 태어났다 이 말이죠. 근데 자꾸 마귀는 니만 잘 되면 돼! 니 가족만 행복하면 돼! 자꾸 우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 가서 무슨 기도합니까? 주님께 십자가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우리 집구석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거예요. 맨날 기도하는 게 우리 집구석 잘 되게 해달라는 거예요. 우리 집구석 망하게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주께서 답답해서, 주님 계시 가운데에서 응답하겠죠. “왜 망하면 안 되는데?” 주님께서 이렇게 나옵니다. “기도 좀 그만 치워라. 내가 시끄럽다. 내가 시끄러워서 못 듣겠는데, 기도 잠깐만 멈춰봐라.” 내가 더러워서 못 듣겠다고 하는 이게 이사야 1장에 나온 거예요. 니가 가져온 모든 것을 안 받겠다는 거예요. “니 말만 하지 말고 내 말 좀 들어라. 니 하고 싶은 말만 자꾸 쏟아내지 말고 내 말 좀 들으라. 왜 니 가정이 행복해야 하는지 이유를 대봐라.” 언약도 아니고 세상의 구성원리도 아니에요. 왜 그걸 주장하느냐 하면은, 그동안 새로운 것을 없애버렸어요. 주님은 날마다 새로운데, 사람은 자기 소원이 있기 때문에 그 새로운 것이 들어오면 전부 다 잘라가지고 다 버려버렸어요. 그걸 전부 다 밀어내고, 내가 익숙한 것,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 이거는 내 기쁨이다 하는 그것만 골라서 그것만 챙겨가지고, 이것이 유지되도록, 이것이 하자가 없도록 이렇게 보호해달라고 요청하는 겁니다. 이 보호라는 말이 나왔는데, 세상에서 많이 통용하는 사랑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 “날 보호해주오.”에요. “날 보호해주오!” 사랑이라는 말을 정확히 말해서 나를 보호해달라는 거예요. 누구를 보호해달라고요? 나. 날. 나를. 그러니까 사랑이 어디서 나온 거예요? 내가 잘 되는 것이 사랑이라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통념되고 있는 이 사랑이라는 게. 사랑~사랑~ 누가 말했나? 사랑은 지가 말했다고요. 자기 보호해달라는 거예요. 여자가 남자하고 선 볼 때, “취미가 뭡니까?” 그런 구시렁구시렁 다 치워버리고, 그 밑바탕에는 뭐냐 하면 “당신이 나를 지켜줄 수 있어요?” 딱 한 마디로 요약이 돼요. “당신이 나를 지켜줄 수 있습니까?” 그것도 헌신적으로. “내 인생을 위해서 당신 인생 포기할 수 있습니까?” 그 뜻이라 이 말이죠. 여자 쪽에서 그렇게 나오니까, 남자가 그 현장에서 그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서 무슨 말을 못하겠어요? 무슨 거짓말을 못하겠습니까? 거짓말 하죠. “이 몸 바쳐서 당신 지켜드리겠습니다.” 결혼하고 난 뒤에는 지 친구하고 놀러 다니기 바쁘죠. 여자 혼자 놔두고 지는 놀러 다니기 바쁘죠. 그것가지고 또 “당신은 결혼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이야기하더니 결혼해놓고 왜 그러냐?”라고 하면, “왜 자꾸 과거를 들춰내느냐 애까지 있는데.” 이런 식으로 넘어가자고 이렇게 나오죠. 결국 여자가 남자한테 지켜달라고 결혼했지만, 남자한테 버림받았을 때 여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자기통장 챙기는 것밖에는 할 게 없어요. 너는 죽도록 돈 벌어 와라. 나는 내 통장에다 꼬박꼬박 넣겠다는 것이죠. 결국은 뭐냐, 내가 나를 지키는 방법밖에 없어요. 내가 나를. 어떤 경우라도 여자든 남자든 자기를, 나라는 것을 포기를 못했죠. 세상에 돌아가는 모든 것을 나, 너로 정립시키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합리화라고 합니다. 합리화적인 사고방식, 정돈된 사고방식, 안정된 사고방식이라고 해요. 그래서 여자들끼리 하는 계모임이나 동창모임에 가서 하는 이야기가 뭐냐, 니는 어느 정도로 안정되어 있느냐, 어느 정도로 챙겼느냐, 그 이야기 쭉 하는 거예요. 거기서 뭐 예수그리스도이야기를 끄집어내면 큰일 납니다. “나 우리교회에서 집사로서 인정받는다.” 이게 뭐냐 하면 자기중심이에요. 보호를 받는 거예요. “우리 목사님은 나를 좋아해서 천당 가는데 내가 천당 안 가면 누가 천당 가느냐고 한다.” 전부 다 자기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겁니다. 자, 그런 입장에서의 선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은 내가 편하고 내가 잘 되는 것을 이미 선이라고 규정을 해버렸어요. 악이라고 하는 것은 비-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해코지하고 나를 보호하는데 지장이 된다면 그걸 악이라고 규정하는 겁니다. 이 말을 오늘 강의대로 하면 이게 전혀 새로울 게 없어요. 이게 문제에요. 그냥 새로움을 자기 엉덩이로 눌러앉아버렸어요. 주께서는 늘 매일같이 새로운데, 왜 우리는 새로운 줄을 모르느냐, 이미 선과 악을 내 중심으로 확정지어놓았기 때문에 주님의 선이, 주님의 일하심이 완전히 나한테 짓밟혀버린 거예요. 완전히 짓밟혀서 우리가 주님이 하신 일을 훼방질하고 반발하고 공격하고 있는 중입니다. 자, 그러한 육적인 입장에서 12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이것을 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의 뭐냐 하면은, ‘그래. 나는 이정도 가치 있어. 내가 선을 행하게 되면 나로 인하여 주께 영광이 되는 거야.’ 백이면 백이 다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뭐가 잘못된 거예요? 해석이 잘못된 거예요. 유대인들의 해석하고 똑같이 된 거예요. 그 선한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내가 날마다 새로운 다른 내가 되어야 해요. 내가. 내가 새로운 내가 되려면 고체가 되면 안 되고 액체가 되어야 해요. 기체가 되면 너무 많이 날아가니까. 액체가 되어야 해요. 액체가 되어가지고 주께서 나를 주물럭거릴 때마다 나는 늘 변형이 될 각오를 하고 있어야 됩니다. 변형이 될 각오가. 주께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설거지하다가 그릇을 깼다. 주께서 깨게 하신 거예요. 오늘 컨셉은 그릇을 깨는 컨셉이에요. 덜렁거리는 컨셉이에요. 덜렁거리다 깨진 거예요.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게 새로운 일이 되면 그게 뭐가 된다? 그게 선행이 되는 겁니다. 선행한다고 집에 있는 그릇 다 부수지 말고. 내 자신이 내 자신을 붙들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 그것이 주께서 원하는 선행이에요. 그 선행을 보고 다른 사람이 주께 영광을 돌린다니까요. “저 사람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기 자신을 고려하지 않는 삶을 사는구나.” 이게 바로 선행입니다. 선행의 주체는 바로 주님이에요. 우리는 그 선행에 의해서 매트리스 흔들리듯이 흔들리는 거예요. 동일한 내가 되면 안 돼요. 똑같은 내가 되면 안 됩니다. 그거는 인형이지 사람 사는 것이 아니에요. 오늘도 주님께서 나를 어떤 식으로 바꿔줄 것인가? 예를 들어봅시다. 아침에 일어났다. 밥 먹었다. 다 했다. 출근했고 퇴근해서 집에 갔다. 그 다음날도 똑같이 그렇게 했다. 내가 보기에는 똑같은 일인데, 그 가운데서 뭘 찾아내야 하느냐 하면 똑같으면서 똑같지 않는, 아침 먹을 때 젓가락을 앞에 놨는데 오늘은 옆에 놓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어제의 날이 아니죠. 어제는 이렇게 되어 있었는데 오늘은 이렇게 되어 있으니까. 같은 젓가락을 놓았더라도 어제는 나란히 놓았는데 오늘은 비뚤게 놓았다. 이게 벌써 다른 날이죠. 이런 게 뭐냐 하면 이런 것을 통해서 주께서 이렇게 놓게 했고 저렇게 놓게 하는 이 모든 것이, 이 모든 사고방식, 이건 미친 것이 아닙니다. 정신병자 아니에요. 모든 것이 주께서 오늘 하루 일과를, 스케줄을 갖고 노신다는 것을 표현할 때, 그게 자기가 보기에나 다른 사람이 보기에나 지금 주님이 살아있음을 증거 하는 중입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이 하루하루가. 실제로 그런 경험이 많아요. 같은 버스를 타도 전에는 종점이 가깝기 때문에 늘 자리를 잡았는데, 오늘은 보니까 어떤 할아버지가 내 자리에 앉았다. ‘에이, 안 비키나?’라고 속으로 이러지 마시고,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인생지루하지 않도록.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전에는 버스에서 내릴 때 카드 찍고 내렸는데, 오늘은 딴 생각하다가, 그것도 복음 생각하다가 못 찍고 내렸다. 그래서 약간의 돈이 더 나가게 되었다. 재밌지 않습니까? 변화가 일어나니까. 아, 내가 나를 붙들고 갈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나를 붙드신 분이 따로 존재하는 겁니다. 그분이 매일같이 나에게 어떤 새로운 일을 창출하는데, 그 일은 내 인생이 아니고 주님께서 만들어가는 주님의 새로운 인생. 내가 예상 못한 새로운 인생이 되는 거예요. 옆에서 누가 뭐라고 하든, “백날 니가 그렇게 해도 내가 보기에는 똑같아.”라고 아무리 해도, 다른 사람 말을 듣지 말라고 했어요. 그 사람은 있다? 없다? 그 사람은 얼마 안 가서 죽을 사람이니까, 있지도 않는 인간 말을 듣지 마세요. 오늘 강의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의 말도 듣지 말라는 것. 심지어 부부라도, 남편은 아내 말 듣지 말고 아내는 남편 말 듣지 마세요. 자식은 부모 말 듣지 말고 부모는 자식 말 듣지 말고. 아무 말도 듣지 마세요. 왜? 어차피 다 죽을 사람이에요. 나도 죽을 사람이고. 나도 죽을 사람이니까 남한테 과도하게 간섭하지 말고 잔소리 하지 마세요. 나도 언제 죽을지 몰라요. 이렇게 하다가 오늘밤에 주께서 “니 오늘 새로운 일 보여줄까? 교통사고!” 이렇게 해서 죽을 수도 있어요. 교통사고로 죽는 것도 이건 내가 애통하거나 애 닳을 일도 아니에요. 왜냐하면 평소에 주께서 늘 새로움을 창조하듯이, 이번에는 깜짝 놀랄만한 일, 죽음이라는 것을 해가지고 아예 천국에 보내버리는 일을 하시더라도 이거는 내 권한 밖입니다. 내가 거기에 대해서 관여할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이 이야기가 바로 마태복음 6장에 나온 이야기에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마라. 그거는 이방인들이, 내 백성 아닌 자들이 하도록 내버려둬라. 그 사람들은 그러다가 자기 가는 길도 모르고 가는데, 너희는 예언자란 말이죠. 예언자라면, 뭐 말만 잘한다고 예언자가 아니고, 이 몸 자체가 예언에 요동치는 그러한 몸으로서 주께서 친히 다루고 있거든요. 너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마라. 그 나라 그 의를 구하라. 다시 말해서 그 나라의 의에서 지금 너를 조종하고 있음을 니가 인정하라.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뭡니까? 내일 염려는 내일 오거든 그때 하고, 내일 오지도 않는, 올지 안 올지 니가 주제넘게 하지 말고, 오늘 하루치만 살아라. 살다 잠들면 그건 죽음이거든요. 왜? 잠들면 내가 내 몸을 관리 못하니까. 내가 내 몸을 관리 못한다고 하면 일단 그거는 죽은 자와 똑같은 거예요. 여러분, 죽은 사람 얼굴 본적이 있어요? 그분이 잠잘 때 얼굴하고 똑같아요. 우리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얼굴 보니까 지금 주무시는지, 죽었는지 분간이 안 돼요. 똑같아요. 그러니까 우리 어머니는 평소에 매일같이 밤에 죽었어요. 제가 그걸 몰랐던 거죠. 목사면서도. 이제는 알았죠. 내가 매일 죽는다는 사실을. 사도바울처럼 내가 매일같이 죽는 거예요. 죽고, 또 주님의 기능이 있으면, 있을 것 같으면, 주님이 맡길 일이 있을 것 같으면 내일아침에 또 깨울 거고. 깨워서 주님께서 또 매트리스 흔들어서 요동칠 것이고. 그게 바로 평소에 주님께서 아버지께 하셨던 일과였습니다. 그게 유일한 선행이에요. 그럴 때만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자기부정, 자기부인이 계속 깔리는 겁니다. 12절까지를 다시 한 번 정리한다면, 주님에 의해서 예언자 집단이 되었어요. 예언자 집단이라고 할 때, 예언자 집단이 할 일은 예수님을 선전하는 것이고 광고하는 것인데, 그것은 내가 알아서 하는 게 아니라 주께서 기능으로 살리고, 니는 죽든 말든 기능만 살아야 돼요. 그 기능이 뭐냐, 주께서 계속 너를 가지고 활발하게 움직여나간다는 것입니다. 그거죠. 특히 시장에서 장사하신 분들은 저걸 많이 느낍니다. 늘 왔던 단골 또 오겠지 하면 딴 데로 빠지는 수가 있고, 저 사람은 안 올 거겠지 하면 들어올 수가 있고. 매 순간이 은혜의 순간입니다. 매 순간이 주님이 살아있음을 체험할 수 있는 순간입니다. 왜냐하면 손님은 지 맘대로 오거든요. 실컷 다 보고 둘러보고 온다고 해놓고 여덟 시간째 안 보이는 사람이 있어요. 신앙생활이 이렇게 되면, 자, 신앙생활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신앙생활 없죠. 신앙생활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믿음 소망 사랑 없죠. 본인의 몸을 본인이 관리하는데, 이거 뭐할 건데? 주님의 믿음이 들어오고, 주님의 소망이 들어오고, 주님의 사랑이 들어와서 그게 하나의 은사, 기능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내가 나를 관리하게 되면 그걸 가로막는 셈이 돼버려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저 믿음 좋습니다. 저 소망 있습니다. 제가 주님 사랑합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어요.” 이게 바로 악이에요. 이게 백성 아닌 자의 모습이에요. 자기 자신을 자기가 관리하려고. 관리라는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관리할 때 누굴 참조하는지 알아요? 남들이 뭐라고 하느냐, 귀 기울이면서 관리해요. 죽은 자의 말을 들어서 뭐 할 건데? “내가 어떻게 해주면 좋겠어?” “내가 이렇게 해줄게.” 자꾸 남들한테 의견을 구해요. 그러면 그 사람은 누구한테 매여 사는 사람이에요? 같이 죽을 수밖에 없는 허약한, 아무 권한도 없는 인간들에게 평생 이용당하기만 하면서 살아갑니다. 참, 부부라는 것이 주님의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기회의 장이 될 수가 있어요. 처음에 결혼할 때는 서로서로가 말을 잘 듣고 하려고 애를 씁니다. 좋은 가정이 되려고. 그거 부질없는 짓을 한 거예요. 인간은 혼자 산다는 것을 몇 년 지나야 깨닫겠습니까? 그 도를 언제 터득할 거예요? 니는 니 따로 나는 나 따로 사는 거예요. 이제 와서 그 말을 꼭 해야 되겠습니까? 따로따로에요. 따로따로라고요. 처음부터 따로 살면 되는데 괜히 기대했다가 실망만 했잖아요. 그리고 욕하고. 욕할 것도 없고 실망할 것도 없어요. 지는 지 인생 나는 내 인생 따로 사는 거예요. 살아온 환경이 다 다르기 때문에. 살아온 머릿속의 기억이 다 다르기 때문에. 백날해도 안 고쳐집니다. 고쳐지는 것이 이상해요. 고쳐지면 그거는 또 다른 대륙지표 밑에 해양지표가 되어서 지진이 일어나요. 그냥 하던 대로 하세요. 괜히 나한테 잘해주려고 하지 말고. 뭐래도 잘해주면 뭔가 혐의가 있어요. ‘바깥에 나가서 뭐 잘못한 것이 있나? 왜 나한테 잘해주지.’ 그냥 하던 대로 해요. 어떤 계약 같은 것이 있어야 돼요. 뭐냐, 나는 니 할 일에 간섭 안 할 테니까 니도 내 할 일에 간섭하지 마라. 처음부터 부부는 부부가 아니었더랬습니다. 왜? 모든 인간은 인간이 아니었었으니까. 자, 13절을 봅시다.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해서 순복하되” 제 말이 그 말이에요. 이거 인간이 세웠습니까? 주님이 세웠습니까? 이거 인간을 통해서 누가 세웠어요? 주님이 세우신 거예요. 데모하지 마라 이 말입니다. 제가 응용문제를 한번 낼게요. 파키스탄 여자입니다. 파키스탄 여자인데 일하러 나갔어요. 자기는 예수 믿는 것을 숨겼어요. 숨겼는데, 일하는 아줌마들끼리 일하다가, “이 컵은 신성한 컵이기 때문에 알라신에게 기도하고 먹자.”라고 했을 때에, 예수 믿는 여자 입에서 무심코 튀어나왔어요. “미쳤나! 이건 그냥 컵이지. 알라신하고 무슨 관계가 있어?”라고 이랬다가 고발이 들어가서 사형직전까지 갔어요. 그래서 계속해서 파키스탄 대법원에 항고해서 사형은 면했어요. 그 여자가 이태리에 적극적으로 망명 신청했는데, 이태리에서 받아주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 파키스탄 지역에서 그 여자를 망명 보내면 우리는 시위하겠다고 해서, 파키스탄 정부에서 망명 보내지 않을 테니까 시위하지 말라고 해서 타협이 된 거예요. 자, 그런데 이 파키스탄 여자가 예수를 믿는데, 무심코 튀어나와서 알라신을 모독했답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들 같으면 어떻게 했겠어요? 오늘 본문 13절과도 적용을 한번 시켜보세요. 아까 강의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우선 알라신을 믿는 사람이 있어요? 없어요? 사람이 있어요? 없어요? 사람이 없어요. 들을 필요가 없죠. 그래서 “알라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알라 그거 마귀지 그게 뭐냐?”라고 이야기했을 때에, 이거는 어제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오늘 이야기했다면, 어제하고 또 다른 나에게 새롭게 주께서 주신 기능으로 다루었죠. 그러니까 그 여자 분은 사실은 대법원에 상고할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만약에 제가 상고할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 그 여자 분이 하는 말이 “어이, 이 목사 나는 재미로 했다.” 재미로 하면 돼요. 살려고 하지 않고, “알라 이거 귀신들린 것이 어디까지 까부는가 보자.”라고 재미로 했다면 괜찮아요. “대법원 판사 이 똑똑한 인간들이 뭐라고 판결을 내리는가 한번 보자.” 그게 궁금해서, 이왕 사는 거 재미로 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재미로 살아요. 어차피 이 세상에 살 이유가 없어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늘 밤에 잠들면 그게 죽은 거니까. 내일 되면 내일의 살아계신 주님께서 내일의 일을 주면 그 다음에 재미로 대법원에 상고하는 거예요. 재미로. 판사가 뭐라고 하는지 재미로 듣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재미로 파키스탄 국민들과 당국에서 뭐라고 하는지 재미로 하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파키스탄 여자라면 자기 말 한마디에, 자기 말 한마디가 아니라 주의 말이죠. 주의 말 한 마디에 세상이 들썩거리는 그 요동. 그 요동 자체를 누가 조작한 겁니까? 누가? 주님이 조작하신 거죠. 순복 안 할 리가 없죠. 순복해야죠. 주님이 조작했으니까. “물러가라 대법원! 파키스탄 죽어라!” 뭐 이럴 필요가 없어요. “그거 참 재밌네.”라고 순복하면 돼요. “내가 눈물을 머금고..” 이럴 필요 없고. 눈물을 머금으면 신자 아니죠. “내가 참 더러워서.. 하나님이 살려줄 거야.” 이런 식으로 대법원에 상고하면 안 돼요. 그럼 그건 뭡니까? 하나님을 빙자해서 누가 더 살라고 한다? 내가 더 살라고 하는데, 그거는 살 권한이 없어요. 왜냐하면 사명이 살아야 하고 주의 복음이 살아야 하지, 내가 살면 안 됩니다. 만약에 내가 살라고 하면 누구한테 쫓긴다? 아까 들었잖아요? 선악을 가지고 마귀한테 쫓기는 거예요. “니가 이번에 이렇게 착했으면 대법원에서 망명 통과되어 니는 살았는데.” 계속해서 마귀가 뒤에서 쫓아오는 거예요. “그래, 다음에 할 때는 내가 겸손하게 해가지고, 알라신에게 잘못했습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뭐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자기가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조정하는 것, 그거는 주의 백성이 아니죠. 그러니까 13절의 말씀은 11절, 12절하고 통하는 겁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계속 반복하고 있어요. 빨리 이야기했지만 다시 천천히 해보면 예수 믿는데, 안 들키고 싶은데 무심코 들켰어요. 그러면 그 들키도록 한 그 변수가 있을 게 아닙니까? 하필 오늘 아침에 일 안 나가려고 하다가 일을 나갔다. 일 안 나가고 싶은데, 아줌마들이 일 나가는데 같이 섞이게 한 분이 누굽니까? 발걸음을 인도하신 분이 누구에요? 주님이잖아요. 모든 시작을 주님부터 시작했잖아요. 오늘 일과에 매트리스 요동치는 거. “아이고, 재밌다. 오늘 니 이런 재미한번 해볼래? 니 알라 신 욕해가지고 감옥소에 갇히는 그런 거 재밌겠지? 그거 내가 해볼게. 가만히 있어봐. 내가 시켜줄게.” 이래가지고 주께서 그걸 시켜준 거예요. 어차피 알라신 믿는 인간은 없어요. 인간은 나이 들면 다 죽어요. 아니, 죽은 인간 말 들을 필요 없는데 왜 들어요. 근데 거기서 뭐가 들어와요? 협박이 들어오잖아요. 협박이 뭐로 들어오겠습니까? 어떤 협박이 들어옵니까? 죽는다! 죽는다! 아닙니까? 근데 주님이 어떻게 됐습니까? 주님이 죽었죠. 이거 영광스럽잖아요. 주님이 알라신 믿는 사람들의 음성을 통해서, 주님의 음성이 아니고 알라신을 믿는 음성을 통해서 뭡니까? 너는 죽는다가 되는 거예요. 이게 내가 원했던 거잖아요. 어차피 오늘밤에 잠잘 때 죽기 때문에. 그러니까 오늘밤만 버티면 되는 거예요. 오늘 안 죽여도 오늘밤에 죽으니까. 교도소에 있다가 다음날에 눈뜨면 그건 누가 살려준 거예요? 교도소장이 살려준 게 아니잖아요. 알라가 살려준 게 아니고 주님이 살려줬잖아요. 어차피 인간은 재밌게 살자는 게 전도서의 내용입니다. 어차피 재밌게 살자는 거예요. 참 이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처럼, 뭐 동화이야기 같지만. 이런 응용문제가 나와야 과연 우리가 정리한 게 제대로 정리한 것인가, 이게 파악이 돼요. 자, 그럼 또 예를 들겠습니다. 내가 파키스탄 여잔데, 몰래 전도 받아 예수님을 믿는데, 이야기를 하려고 하다가 안 했다. 그날의 컨셉은 이야기를 하려고 하다가 안 하는 컨셉이에요. “주여,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순교를 해야 되는데. 맨날 입으로는 죽어서 천당 가는 게 제일 낫다고 하면서도 제가 비겁합니다. 제가 참 비겁하게 주님을 섬겼습니다.” 자, 비겁, 비겁하다고 누가 뒤에서 이렇게 윽박지른 거예요? 누가 강요하는 겁니까? 마귀가 그러잖아요. 마귀가 그런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뭐라고 해석을 하느냐 하면 “니가 순교해도 마땅한데 니가 신자야? 니가 거기서 이야기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왔는데 니가 입을 다물었어? 니는 신자 아니지? 그치?”라고 하면서 마귀가 계속 윽박을 가한다면,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벌벌 떤다면, 결국 그 이야기는 뭡니까? 조심스럽게 살면, 조심스럽다는 그 성과로, 그 공적으로 주께서 천국에 넣어줄 수도 있겠다. 이래 되겠죠. 요한계시록 2장 10절,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이 말씀을 우리보고 지키라고 한 거예요? 아니면 주의 기능입니까? 어떻습니까? 주의 기능이죠. 주의 기능입니다. 호텔 뷔페에서 배터지게 먹는 것도 환난이에요. 이 세상사는 것 자체가 환난이에요. 그런데 이걸 지키려고 한다면 환난을 연출해야 돼요. 어떤 알라신 믿는 여자가 와가지고 “니 예수 믿어? 알라신을 믿어? 예수 초상을 밟아라!” 자꾸 뭐든지 연출을 하려고 해요. 연출은 누구 몫이냐 하면, 연출은 우리 몫이 아니고 예수님이 친히 하실 몫이에요. 다시 정리해봅시다. 이 세상은 지금 누가 활동하고 있어요? 주님이 활동하죠. 그럼 우리는 뭐만 받았어요? 주님의 그 활동하심을 받는 그 기능만 받지요. 우리가 주님께 받은 기능을 꺾고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왜? 주님은 우리를 쥐고 있기 때문에. 따라서 우리가 어디에 박혀있든지 간에 그건 주께서 하실 일이에요. 그래야 내가 고정된 내가 안 되고 매일같이 요동치는 내가 되는 겁니다. 요동치는 자아. 요동치는 나. 요동치는 나라는 말이죠. 이게 주께서 요동치기 때문에 내가 요동치는 거예요. 우리는 요동치는 것을 싫어해서 매일같이 똑같은 스케줄로 내가 임의로 조정해나가요. 스케줄을. 오늘은 이거 했다. 자꾸 내가 했다, 내가 했다는 것으로 나가요. 아침에 설거지 하고 내가 이불개고 자꾸 내가 했다가 되는데, 내가 하는데 만약에 바빠서 틀어졌다고 하면, 그 틀어진 것을 뭐로 보느냐 하면 일종의 내가 죄악을 행한 것으로 여겨가지고 거기에 대한 벌칙을 간구하게 돼요. “주여, 오늘도 어떤 벌칙을 내리실 겁니까? 살려주옵소서.” 이건 뭐, 자기를 위한 세상밖에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일곱 귀신이 다 쳐들어오는 거예요. “쟤 갖고 노니까 재밌다. 그지?” 계속 추적해가지고 계속 양심에 호소하게 되고 괴롭히는 거예요. 자식이 괴롭히고 남편이 괴롭히고 아내가 괴롭히고 집안이 욕하고. 여러분, 신자가 뭐냐를 한번 생각해보세요. 내가 신자가 되는 것이 신자가 아닙니다. 이미 주께서 신자 되게 하셨기 때문에 주의 성령을 보내시고 주의 기능이 되게 하셨어요. 그 다음부터는 니가 니 인생 만들기 위해서, 니가 너에 대해서 손을 떼라. 내가 살아 있잖아. 니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살아 있잖아. 내가 알아서 만들어줄게. 만들어주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스타가 되는 거예요. 방탄소년단 되는 거예요. 방탄소년단인지 방패소년단인지가 되는데. 우리는 뭐냐 하면 그래가지고는 길이 안 보여요. 주님가신 십자가의 길이 안 보인다고요. 그렇잖아요. 아니, 잘난 것이 보이는데, 배부를 때 이게 언제 주님께서 이 땅에서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이 보입니까? 나는 잘 살고 있으니까. 아, 잘 살아도 내일 되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이고. 주님의 스케줄에 있으면 그대로 따라야지 어떻게 하겠어요? 오늘은 오늘로 감사해야지. 범사에 감사해야지. 이런 마음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주기도문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사실은 일용할 양식만 줘도 우리한테는 고맙다는 거예요. 오늘 살게 하셔서 일용할 양식만 주신 것도 감사하니, 그저 우리가 할 것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거예요. 우리의 모든 허접한 것을 용서해주신 그 주님의 용서하심. 그걸 용서해달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는 뭔가 움직이면 선악구조 안에 쫓겨 다니기 때문에 내가 스스로 판단해요. 나는 오늘 착해서 뿌듯하다. 나는 오늘 못나서 절망스럽다. 맨날 평소에 마귀한테 쫓겼던 그 행세를 그대로 품고 가기 때문에, 주께서 주님의 기능을 가지고 계속 새로운 사태를 해서 결국은 내가 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 더 이상 선과 악이라는 악마가 심어준 그 구조에서 니가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 거기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매일같이 확인시켜줍니다. 그 일을 위해서 13절에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14절, “혹은 악행 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해서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어떻게 하라? 순복하라 이 말입니다. 순복하라. 어차피 세상은 주님 손에서 노니까. 그런다고 해서 이 왕이나 이런 사람들이 천당 가는 것이 아니에요. 지금 천국, 지옥은 판정이 끝났어요. 천국, 지옥은 판정이 끝나버렸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아는 자는 천국이고, 그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은 지옥이에요. 그 다음에 나머지기 모든 일들은 뭐냐, 주께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그 속에 쑥 집어넣는 겁니다. 왜 집어넣느냐, 주님가신 길이 그 길이기 때문에. 주님이 이 지옥 같은 세상의 길을 가셨잖아요. 너도 그걸 반복해서 가게 하시는 거예요. 내가 갔던 경험을 니도 한번 경험해보라는 거죠. 주님께서 어디에 쫓기고 어디에 휘둘렸는지를. 니가 지금 휘둘리고 쫓기는 경험을 똑같이 경험한 거예요. 생뚱맞게 우리 혼자 고생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주님도 똑같은 시험을 받은 거예요. “니가 이 잔을 마실 수 있느냐” 그것도 주님께서 우리가 당한 시험을 그대로 보여줬죠.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이 내게서 떠나게 하옵소서.” 그게 우리가 죄인 된 평소의 모습이 그렇잖아요. 그렇지만 그 다음이 뭡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오늘 강의의 결론입니다. 내 뜻은 알아요. 내 뜻은 내 위주로 살아서 알아요. 하지만 이러면 내 영광이지 주의 영광이 안 되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게 바로 우리가 그 누구한테도 구애받지 않는. 오늘 죽으면 그만이고. 누가 간섭하면 니가 뭔데? 이러면 되고. 어떤 누구한테도 구애받을 필요가 없어요. 주님 살아계심만 증거 하면 되는 겁니다. “나보고 탓하지 마! 주님이 살아계셔서 주님이 알아서 했어.” “니 그거 너무 뻔뻔한 변명이 아니야?” 아니죠. 내가 못난 자로 인정하면서 그런 소리하니까 그건 주의 뜻이죠. 주의 뜻은 나를 못난 자로, 나를 부인하게 만드는 작업을 하거든요. 이거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했죠. 주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잖아요. 그 말씀을 우리가 못 지켜요. 우리가 못 지키니까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매일의 삶을 통해서 그걸 지키게 하시는 거예요. 실컷 착한일 해놓고 내가 한 게 아니다. 실컷 나쁜 짓 해놓고 어쩔 수 없었어. 이렇게 해서 계속해서 어떤 경우라도 지 잘났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관여한 일인 것을 증거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도가 가는 길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현실에 대해서, 왕의 모든 제도에 대해서 순복할까요? 말까요? 이건 당연히 순복해야 되죠. 정치적 이슈를 내세우지 마세요. 태극기나 촛불 같은 것을 참여하지 마세요. 어떤 목사 더러우니까 물러가라고 그런 소리하지 마세요. 물러가고 안하고는 주께서 알아서 하실 거예요. “그러면 목사님. 일반교인은 목사가 다스려도 주의 종 목사는 주님께서 다 해줍니까?” 그런 뜻이 아니고 죽은 놈으로 보라 이 말이죠. 저것도 주의 허락이 아니면 강단에서 설교 못 할 게 아닙니까? 주의 뜻대로 되도 않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면 돼요. 그러다 “목사님. 그거는 지옥 갈 소리인데요?”라고 하게 된다면, 목사가 “이게 감히 주의 종에게! 베드로전서 2장 13절에 인간에 세운 제도에 순복하라고 했는데 당신은 이 말씀을 어깁니까?”라고 나온다면, “나도 내 맘대로 순복하는 겁니다.” 이러면 끝나는 문제 아닙니까? 나도 내 마음대로 순복해서, 이게 내 뜻이 아니고 내 속에 성령께서 당신 그거 엉터리 설교라고 하라고 했다는 이것도 내 뜻이라고 하면 되잖아요. 누구한테 구애받습니까? 도대체 무엇에 겁내요? 겁내지 말고, 지금껏 겁내고 살았는데, 오늘부로 겁 없이, 눈에 봬는 사람 없이 삽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리 생각해도 주님 살아계셔서 우리의 발걸음과 우리의 호흡과 우리의 모든 행동까지 다 주관하는데, 그동안 누구를 의지했고 누구 말을 따랐습니까? 이제는 주님만 살아있음을 증거 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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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16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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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