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통 181109
안양20181012a야4장8절(관통)-이 근호
야고보서4장8절, 오늘 강의는 초반에 약간 정신 차려야 돼요. 초반이 많이 난해해요. 8절에 보면,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요 대목이 왜 어려우냐 하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죽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죽어요. 멀찍이 떨어져야 돼요. 멀찍이. 멀찍이 떨어져서 지킬 것은 지키고 순종할 건 순종하면 되는데 너무 가까이 가버리면 구약에는 죽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죽으라는 이야기에요. 죽음이 무서워서 가까이 안 오는 그런 행위는 하지 말라는 거예요. 끝장 보자는 이야기죠. 끝장 보자.
사람이 멀리서 펜팔 할 때는 얼굴을 안 보잖아요. 우리 시대에서는 펜팔 했어요. 그냥 글로 봐가지고 그래서 실패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니지만. 글만 보고 얼굴은 안 보고 자기가 혼자 상상하는 거예요. 이런 글 솜씨에 얼마나 멋있을까, 이렇게 하는데 막상 보게 되면 그 다음에는 대 실망이죠. 멀리 있을 때, 안 보일 때는 신을 상상하게 되어있어요. ‘내가 하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흡족케 하실까, 그래, 나는 하나님 만나길 잘했어. 하나님은 늘 은혜를 주셔서...’
제가 얼마 전에 영천 화복이라는 곳에 갔어요. 화복에 가면 우리나라에 초창기 기독교 교회가 있어요. 그 교회를 유적지로 해서 50억을 들여 가지고 경상북도 도지사가 예산으로 해서 옛날 예배당을 그대로 복원을 해놨습니다. 거기 가서 사진도 찍었지요. 남자석 여자석 따로 있어요. 그대로 칸막이로 해서. 칸막이가 있어가지고.
제가 설교단에 올라가봤어요. 남자석, 여자석 해가지고 보이겠는가 싶어서 보니까 다 보여요. 설교단에서는 다 보이는데. 남자와 여자는 서로 못 보게 했습니다. 이 칸막이. 칸막이가 있는 게 좋을까요? 없는 게 좋을까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이 칸막이가 뭐였느냐 하면, 이제부터 상당히 정신 좀 차려야 돼요. 어려워요. 이게 바로 율법이거든요. 칸막이가 율법입니다.
칸막이가 율법이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에 말씀대로 순종을 하게 되면 하나님 보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하나님께 복을 받는 게 중요하니까, 율법에 보면 뭐로 되어있어요? “O”하면 복이고, ‘NO.’하면 뭐가 됩니까? 저주가 되거든요. 칸막이에 그런 기능이 있다는 겁니다. 칸막이가 웨하스 과자로 생각하신다면 거기서 축복이 스며 나올 가능성도 있고, 저주가 스며 나올 가능성도 있고. 이스라엘은 도망치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율법에 의해서 이미 가두어졌기 때문에 도망칠 수가 없는 입장에 있어요.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운명은 ‘도’아니면 ‘모’에요. 축복 아니면 저주, 저주 아니면 축복, 어중간 한 건 용납이 안 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데 칸막이 있는 채로 함께 있는 그러한 상당히 난처한 처지에 있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세상 다른 민족은 하나님이 안 계시지요. 하나님은 안 계시고 자기들끼리 거기서 법을 만들고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살아가지요. 이 자체가 저주가 되고 이스라엘 백성은 이 저주에서 벗어나되 율법이라는 조건하에서 벗어났거든요. 하나님과의 자기의 어떤 칸막이 조건하에.
이 칸막이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가지고 옛 언약이라고 합니다. 옛 언약을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율법이지요.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함께 할 수가 없다. 이거 분명히 해야 돼요. 함께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칸막이를 통해서 애들이 먹는 과자, 웨하스같이 거기서 복이 스며나올지 저주가 스며나올지 그들이 하나님의 이 언약에 대한 취지를 알게 되면 복이 나오고 언약의 취지를 모르게 되면 이방민족과 동일하게 됩니다. 이방민족과.
사람이 이렇게 살다보면 잔소리하고 간섭받는 거 싫어하잖아요. 나, 내 마음대로 살래! 이렇게 하잖아요. 그건 이방민족에게는 늘 상 그래요.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아이고~ 뭐, 이제는 하나님도 귀찮고 집도 아파트도 하나 해놨겠다 이제는 뭐~ 하나님 다 잊어버리고 그냥 내 평소에 하고 싶은 대로 살래.’ 이리 나오면 갑자기 주변에서 농약이 날아온다든지 갑자기 집값이 내려가든지 해가지고 엉망진창이 된다든지 사고가 난다든지 이래가지고 빼도 박도 못하고 저주를 받는 거예요.
이 정도하면 살겠다고 생각했는데 주변에 일어나는 벌어지는 사태가 그냥 언약 없이 못 살도록 사람들을 궁지로 몰아넣는 작용을 주께서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자체가 복이 될 수도 있고 함께 없으면 저주 받는데 다만, 함께 있음으로 말미암아 복고 저주가 어디서부터 결정되느냐는 그 정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민족과 차이 나게 그걸 아는 거예요.
복과 저주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 정도는 알아요. 예레미야에 보면 내일 죽기 때문에 오늘 마음대로 살자. 지 맘대로 사는 그러한 투가 저주받는 투라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그래도 하나님과 함께 있어서 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얻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여기까지는 어려운 게 없어요.
그럼 뭐가 어려우냐 하면 인간은 율법을 못 지킨다는 거예요. 이게 어려워요. 왜냐하면 율법이라 하는 것을 이제부터 한 5분간 정신 차리면 됩니다. 율법은 뭐로 환원되느냐 하면 말로 환원됩니다. 말로 돼요. 말 또는 문자. 하나님의 말이 율법이에요. 방금 제가 누구 말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에 율법을 못 지키게 되어있어요. 출제위원이 교무부장이 아니에요. 출제위원이 따로 있다니까요. 그 분이 문제 출제하고 우리보고 맞추라고 했기 때문에. 지키라고 하기 때문에. 출제하신 분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가 못 지킵니다. 지킬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지킬 수도 없는데 지키라고 이 율법을 줬다. 이건 무슨 뜻이냐 하면, 어렵지만 쉽게 가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민족하고 같은 인간이기에 똑같아요. 어떤 법이 있고, 말이 있고, 법이 있으면 이걸 지키려고 덤벼듭니다. 지켜야지! 십계명 지켜야지! 암~ 지켜야지. 탐내지 마라. 살인하지 마라, 해야지. 지키려고 덤벼들거든요.
그런데 말씀과 법은 어떠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관통을 해요. 관통. 뚫어버려요. 구멍을 내고 이걸 작대기가지고 차고 들어오는 거예요. 말씀이 우리 속에 차고 들어오면 지키려고 하는 나에게 제일 본질 되는 그 자리에 텅하니 어떤 터널, 구멍이 생겨버립니다. 뻥하니 뚫리지요. 종이로 이렇게 사람 모양을 해놓고 날카로운 작대기가지고 이 종이로 만든 사람을 인형을 한 번 쫙 꿰어보자 말이죠. 쫙 꿰어보면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뭐가 되느냐 하면 죄인이 되면서 죄인 되게 하신 그 기준이 뭐냐 하면 주어진 말씀이 인간을 관통해서 이건 하나의 꼬치가 되지요. 일본요리의 하나의 꼬치가 되지요. 오뎅. 어묵꽂이가 되는 거예요. 어묵꽂이가.
그러니 그동안 우리가 성경 말씀보고 교회에서 성경말씀 지키자고 하는 게 얼마나 잘못된 거예요. 이게 근원적인 사고방식 출발자체가 이게 터무니없이 우리는 잘못 살아온 거예요. 우리는 어떤 신약의 착각이 있었느냐 하면, 신약의 사도바울의 명령이나 성경이 이만큼 두꺼우니까 지키려고 들춰본다 말이죠.
그렇게 되면 이것 안했더니만 내가 몸이 아프잖아. 아~ 이거 했더니만 봐라. 성적 올랐잖아. 계속해서 그 말씀을 그 잔소리는 나보고 순종할 수 있다고 여기고 준 그거라고 생각했지 말씀이 관통한다는 생각은 못하는 거예요. 그러면 관통하는 것과 말씀 지키는 것과 차이점이 뭐냐, 하나님을 멀찍이 떼고 있을 때는 지킨 게 돼요. 하나님을 멀찍이 떼고 있을 때는.
제가 어릴 때 잔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설교 때도 많이 했지만, 우리 할아버지가 취미가 잔소리하는 게 취미기 때문에. 나뿐만 아니고 온 자식들마다 앉아가지고 지긋지긋했어요. 잔소리를 많이 했다 말이죠. 심지어 할아버지는 어느 정도로 잔소리가 심하냐 하면 지금 잠자고 있는데도 와서 불구하고 잔소리를 해요. 자고 있는데. 물론 자는척했지요. 물론 내가 알아챘지요. 자는척해도 잠자는 꼬라지 봐라! 이런 식으로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잔소리고 말씀이라 하는 것은 개체와 개체사이에 떨어져 있을 때나 성립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잔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고 “아이고, 춥겠다. 추운데 홑이불 차면 안 되지.” 덮어주잖아요. 창세기9장의 셈과 야벳이 뒷걸음쳐서 덮어주듯이. 노아의 하체를.
이렇게 덮어줄 때는 이건 지키라는 말이 아니에요. “니가 이래서는 안 돼!” 라고 그걸 사랑으로 덮어주는 거예요. 그래서 율법의 완성은 뭐라고 합니까? 로마서13장9장에서.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뭐 하지 마라, 뭐 하지 마라, 마라, 마라, 하지만 모든 완성은 뭐냐 하면 사랑이라. 구약의 노아의 언약으로 본다면 덮어주는 거예요. 율법으로 덮어준다는 말은 뭐냐, 지키라는 말이 아니고 율법으로 우리의 몸을 관통해버리는 겁니다. 이게 로마서3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율법으로 우리에게 뭘 덮어주느냐 하면 애초부터 니는 아담의 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내가 준 율법은 너는 지킬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로 우리를 덮어줘요. 쉽게 말해서 지키지 말라는 뜻이에요. 지키지 말라는 겁니다. 마귀는 지키라고 하겠지요. 주님은 지키지 말라. 다만, 조건은 뭐냐 그냥 안 지켜버리면 만약에 어머니가 밤중에 이불로 덮어줬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났다. 어머니는 저기 계시고 나는 여기 있어서 또 역시 개체가 떨어져 있잖아요.
그러나 주님께서 관통하시는 이 율법은 율법 자체의 이 작대기 안에 스스로 이게 발열해요. 완성을 향하여 율법 자체가 자진해서 완성의 레벨을 여기서 만들어냅니다. 오뎅꼬지처럼 관통해놓고 관통한 상태에서 율법이 품고 있는 그 최종의 완성을 사랑이라 하는 건데 완성을 여기서 하나님께서 실시를 해버립니다.
실시를 해버리면 뚫고 왔다. 옛 언약, 완성했다, 새 언약. 옛 언약 + 새 언약이 우리 몸이라는 것을 하나의 시료. 실험의 시료로 두고서 율법의 저주가 무엇인지, 그리고 저주를 율법을 스스로 극복해서 어떻게 사랑으로 그걸 완성해내는지 둘 다를 한꺼번에 보여주는 하나의 과정을 통해서 보여주는 자기 증인으로 삼는 거예요. 나중에 한 분 오시면 다시 이야기하겠는데 이 이야기가 들어보면 어려운 거 없는데 왜 자꾸 어렵다 하느냐 어느 대목이 어렵냐 하면 이 대목이 어려워요.
방금 한 것은 문장으로 적으면 어려운 것을 알 수 있어요. ‘말이 시작되므로 죄가 시작된다.’ 말이 또는 말씀이 또는 법이 말이 시작됨으로서 뭐가 시작되는가, 죄가 시작되는 거예요. 이걸 감수해야 돼요. 이걸 받아들여야 돼요. 말이 말씀이 율법이 시작되는 곳에 없는 죄가 더욱더 개시가 되는 겁니다. 시작되는 겁니다.
이걸 누가 싫어하느냐 하면 바로 악마에게 매여 있는 사로잡혀 있는 인간들이 바로 이 죄에 대해서 아주 예민한 반응을 아주 극렬한 반응을 저항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악마는 뭘 집어넣느냐 하면 선과 악의 기준을 집어넣었거든요. 선과 악의 기준을 집어넣어놓고 외부에서 말씀의 활동 말고 니 내부에 선과 악을 니가 스스로 결정하라고 하는 겁니다.
스스로 결정해서, 스스로 결정하게 되면 인간은 악을 싫어하고 선을 좋아합니다. 악을 싫어하고 선을 좋아하기 때문에 인간의 삶이라 하는 것은 피폐해지기 시작하고 그 다음부터는 스트레스 또는 정신병자로 되어가는 거예요. 악에 대한 책임을 져야 된다는 거예요. 누구한테 책임지는 것도 없어요. 하여튼 절에 가든 교회 안 나가던 관계없이 인간은 악에 대해서 굉장히 민감합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 안 나간다고 신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자기 내부에 이미 하나님만 알고 있는 선악과를 악마가 하나님만 아는 데서 덜렁 들어가지고 그 요소를 들어가지고 선악과나무를 악마가 인간 내부에다가 집어넣은 거예요. 피조물인 인간이면서도 뭘 감당해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만이 아시는 선악을 감당하려니 이 평생에 이런 수모가 어디 있어요.
나는 하나님 안 믿는다. 예수 안 믿는다. 아무리 큰 소리쳐도 술 먹고 비틀거리면서 들어와서 마누라~ 미안하다! 미안하다는 말은 무슨 뜻이에요? 그게. 내가 지금 내 행동 봐도 약간 좀 이건 선한 모습이 아니다 하는 것을 본인이 안다는 것이 본인의 트라우마가 되는 거예요. 인간은. 모든 행동이 다 그래요. 아무리 악해도 극단의 악을 즐겁게 할 수 없다는 그것이 인간의 괴로움이에요. 그러면서도 악을 알면서 누가 하느냐, 악이 새로운 자극제가 되고 악이 새로운 쾌감을 준비해 놓은 것처럼 여깁니다. 극단적인 쾌락을 향하여 악 쪽으로 갑니다. 가놓고는 또 후회하지요. 울면서 후회하네. 나오는 유명한 노래. 울면서 후회하는 거예요. 울면서. 후회 안하는 인간 나와 보라고 그래요.
처음에는 큰 소리 치다가도 술 한 잔 들어가면 전부다 여보, 마누라! 미안해. 해놓고 뭐 잘못 했는 줄도 모르고 미안해가지고 아침 눈 깨면 또 해장국 끓여줘 하고. 남자들 술 먹고 와가지고 자는 아들 입에 뺨에 뽀뽀하고 자는 아들 다 깨워놓고, 지는 기분 좋아 싱글벙글 웃으면서 오늘 한 잔 했다. 누가 하라 했어. 지가 비틀거리면서 하는 그 몰골 보면 지가 스스로 양심에 가책이 된다 이 말입니다. 이런 모습 보여줘서 미안하다 그런 뜻이거든요. 미안하면 그런 짓 안하면 될 거 아닙니까. 아니에요.
마귀가 그걸 가만 둡니까. 더 인생을 즐겁게 살기위해서 해놓고 돌아서서 또 울고 후회하고. 후회와 슬픔과 걱정 근심으로 계속 점철되는 인생, 이게 뭐냐 하면 인간 속에 악마가 선과 악을 서로 합치될 수 없는 걸 집어넣어가지고 완전히 내부가 엉망진창으로 비비꼬이는 거예요.
말이 시작됐다는 말은 이제 이해하기 쉬울 거예요. 죄가 시작됐다는 말은 앞에 뭘 집어넣어요. 가만히 있어라. 니가 죄인된 것에 대해서 지금 정상적으로 청구하고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가만히 있어. 하나님 말씀 자체가 죄인 되게 하는 거니까 나를 훌륭하게 만드는 게 아니에요. 그건 기존 교회에서 다 그렇게 마귀 자식들이 그렇게 가르치고.
말이 시작됐다는 말은 죄가 되게 하는 이 작업에 나섰다는 자체가 니 행운이야! 이런 뜻이에요. 니가. 왜냐하면 뭘 해도 죄기 때문에 내가 내 인생에 대해서 손을 놓을 수 있는 찬스가 온 거예요. 어차피 죄니까. 나에 대해서 그냥 손을 놓으란 말이죠. 그냥 막 사는 거예요. 짬뽕 먹던지 뭘 먹던지. 삼계탕 먹던지. 그냥 아무 의미가 없다니까요. 그게.
뭐를 선택하든 간에 축복과 저주는 우리는 상관없어요. 왜? 우리를 뚫어 논 그 율법이 축복과 저주를 발휘하는데 결국은 그 저주와 축복이라는 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무엇이 저주며, 무엇이 축복인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 몸을 관통해서 스스로 활동을 하시거든요. 스스로 활동한다고요.
그러면 죄가 시작됐으니까 죄가 많아질 게 아니겠습니까? 성경 안 보면 괜찮은 사람인데 성경 보는 순간 어느 구절하나 지킬 수 없다는 걸 알지요. 원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제비를 뽑는 것은 매 순간 선택하는 것은 우리가 할 짓이지만, 일의 작정은 누구다? 여호와가 작정하지요.
이걸 보면서 대번에 무슨 생각 듭니까? 그러면 작정한 게 있다면 우리보고 이 아슬한 선택을 강요했느냐 말이지요. 주님께서 주신 취지를 나의 취지로 번뜩 받아들이기가 힘들어요. 우리가. 굉장히 힘들다고요. 모든 매사가 그래요. 하나님 자기 좋아라고 만든 책이에요.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는 항상 가시덤불 같은 느낌이 들어요. 오늘도 이거 어긴 게 아닌가. 이렇게 할 때 기도한 번 하고 일을 또 벌여야 되는가. 모든 성경을 지키려하니까 이거 채이고 저거 채이고 이거 자빠지고 저거 넘어지고 이건 또 안했다고 요번 주 고생시키는 건 아닌가. 자꾸 걱정, 염려 온다 말이죠.
우리 인간 자체가 잘못됐기 때문에 거기서 굉장히 우리가 아슬아슬해요. 그래서 그게 믿음이 없는 거고, 믿음이 있는 사람은 일의 시작을 하나님이 말을 출제를 주님이 출제를 한 거예요. 우리가 문제 내고 우리가 지킨 적 없어요. 시작하신 분이 죄 되게 하신 거예요. 우리보고 죄인 되게 하셨다 말이죠. 죄인 되게 하셨다면 율법 못 지키면 뭐가 나옵니까? 저주 나오지요. 그 저주를 그냥 받아들이자 이 말이죠. 살아가는 것도 저주라. 아무리 착하게 해도 그게 저주다.
한 번 적어볼게요. 이 말이 얼마나 기분 좋은 말인지. 평소에 안 해보겠지만. ‘뭘 해도 나는 저주다.’ 라는 요 문장. 요 문장이 율법에 합치되는 문장입니다. 내 능력으로서는 이 고백이 안 나오게 되어있어요. “나는 저주 받는 게 싫어!” 이게 우리의 본성이에요. 모든 게 만사형통해야지. 교회 가려하는 이유가 만사형통하러 가지 나는 뭘 해도 저주받게 되어있어. 이거 고백하려고 교회 안 갔습니다. 하는 게 우리의 강렬한 반발이거든요.
그런데 이 율법가지고 확 쑤셔버리면 뭘 해도 저주다. 할 때 이게 뭐냐 하면 내가 하고 싶은 말과 원래 율법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이런 차이가 있음을 그 차이를 우리가 감지하게 됩니다. 뭘 해도 저주다. 하는 게 로마서3장이야기입니다. 두 번 이야기합니다. 찾아봅시다. 로마서3장19절,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율법으로 하여금 의롭다 할 사람 없고 율법으로 이미 온 사람은 율법을 어기면 저주아래 있어요. 저주아래 있다는 걸 알게 하려 함이라. 라는 것이 로마서3장19절에 나오잖아요. 전에는 뭐냐 하면 로마서3장 성경책에만 이렇게 얌잖게 앉아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활동하면서 내 입을 통해서 나온다는 것은 이 문자가 이 말씀이 나를 구멍을 내고 구멍 낸 상태에서 우리 입을 통해서 아주 다행스럽다는 식으로 세상에 내가 이런 고백을 다 할 수 있다니 감격스러운 마음으로서 “나, 뭘 해도 저주야.” 그리 하는 겁니다.
이걸 그대로 결혼식에 하게 되면, 결혼식 하객들 다 저주받은 사람들이에요. 신랑, 신부 저주 받고 주례한 사람 저주받았습니다. 주례자가 아주 웃으면서 이야기해요. “오늘 이렇게 저주 받은 식을 하게 되어서 상당히 취지가 좋습니다. 애기 낳으면 애기도 저주받을 거예요.” 주례 끝. 이게 상상이 안 되지요. 그것도 웃으면서 아주 다행스럽다는 식으로 어찌! 어찌! 이걸 알았을까 하는 그런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이게 바로 프리덤 자유입니다.
이걸 남한테 떠들 필요 없어요. 미친 사람 취급받으니까. 아~ 언제 내가 성경 말씀을 내 입에서 그것도 기쁨으로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이렇게 문자로 박혀있는 말씀인데 입에서 삶을 통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