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의 하나님과 산 자의 하나님
http://hompy.sayclub.com/hompy.nwz?targetmsrl=20078551&pop=pop#위의 주소를 클릭 하시면 제 미니 홈피 안에 메뉴 우리교회 학생회 클릭하시면 글이 있습니다. 산 자의 하나님지난 시간에는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올무로 잡고자 그물을 쳤지만 예수님은 책잡히기는커녕 오히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태클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즉 인간들이 가만히 있고자 하는 예수님을 시비 걸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들에게 올무를 걸도록 유발케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믿음에서 나오는 모든 지혜와 예수님의 십자가 지혜와 충돌 하도록 예수님 쪽에서 빨리 날 건드려봐라 라는 식으로 그야말로 바리새인은 예수님에게 딱 걸려든 셈입니다.바리새인 뿐만 아닙니다. 사두개인 율법사 하여튼 인간들이 전통이라고 나름대로 손에 잡아든 모든 신앙 모든 신학을 예수님과 충돌을 해보니 다 사기였음을 들추어 내도록 예수님은 아주 낯설고 우발적인 실족케 하는 분으로써 천국을 증거하십니다. 좋은 감정으로 왔던 니고데모도 넘어지고, 나쁜 의도로 올무를 칠려든 자들도 한결같이 예수님이 인간의 죄성(선택적 믿음, 믿음 카면 대끼리 인 아브라함 자손, 거룩한 백성)을 고발하는 차원에서는 그들이 쥐고 있던 것들이 죄악인줄 모르고 끼억끼억 머리 내밀며 구원 받은 조건을 갖춘 자로써 예수님과 맞짱을 뜨게 됨으로(아무도 못알아보도록 그만큼 낮아지신 하나님이었다는 것임) 과연 그들의 구원성 선택성 거룩한백성됨이 그들의 믿음에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지금 이렇게 인간의 감추어진 죄성을 끝까지 추적해서 다 들추어 내시고 가장 잔인한 인간의 중심에 하나님과 같이 됨을 바로 하나님을 믿음으로 감추고,율법을 지킴으로써 감추이고, 이웃 사랑을 실천 함으로써 감추고, 그래서 예수님은 그 죄성을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폭로함으로 모든 인간의 믿음을 부정하고 자신의 믿음으로 카파르 덮어버리는 그 사랑을 수용하겠냐 라고 긍휼을 베푸실 때 과연 인간은 이런 자기 자존심 다 무너뜨리는 이 예수님의 믿음을 선물로 받을 수 있는가? 하는 점에 있어서 인간은 불가능 하다는 겁니다. 왜냐 하면 인간이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장 밑바닥에 천하디 천한 우리의 발길질에 채이고 짖밟혀진 사랑을 머리 되신 주(主)로 믿는 다는 것은 창세전에 예정한 그리스도의 형상이 아니고서는 불가능 하기 때문입니다.인간의 믿음과 예수님의 믿음의 싸움터가 바로 예루살렘 성을 중심으로 펼쳐짐으로 믿는 자가 믿음의 주를 핍박하고 죽임으로써 결국 그들은 죽음의 신이요 죽음의 근원인 믿음으로 끝까지 밀어붙이는 일관성을 보이나, 예수님은 그들 손에 잡혀 죽으심으로 모든 언약을 성취 하시고 죽음의 믿음 마저도 통하지 않는 자신의 믿음으로 다시 사셔서 그 다시 산 진짜베기 믿음을 선물로 주심으로 인간에게 발생할 수 없는 육에서 도출된 믿음이 아닌 살리는 영에게서 준 선물인 믿음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작업을 예수님이 직접 손수 일일이 시행 하시는 겁니다. 너무너무 낯설은 구원이요 찝찝한 구원입니다.(요 2: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자 이 예루살렘 성이 이토록 중요한 이유는 원수의 성문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이 원수의 성문을 직접 여심으로 모든 원수들이 바로 거짓 평화로 길들여 놓았기에 평화의 왕인 예수님이 왔어도 알지 못하여 그 평화가 직접 싸움을 걸고 태클을 걸며 실족하도록 다 넘어뜨리는 샬롬 왕(나로 인하여 넘어지지 않는 자는 복되도다)으로써 백성을 자신이 손수 직접 모으시고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십니다.그 사망 곧 원수의 성문은 바로 아브라함 이었고 이삭이었고 야곱이었듯이 그들을 산산히 조각내어버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되심으로 자신의 언약을 직접 손수 이루시고 원수 문제도 해결 하시는 겁니다. 원수된 교회가 원수된 예루살렘 성전을 예수님이 직접 머리교체 작업을 완성하심으로 그 거짓평화의 실체인 머리가 원수가 얼마나 하늘의 권세를 자신의 믿음으로 달성할려고 하는가를 가차없이 홀라당 까발려서 뱀의 머리를 치심으로 두 성전을 헐어버리겠끔 하시고 다시 세워지는 인간의 손으로 세워진 것이 아닌 자생적으로 세워진 죽음을 뚫고 선 그 성전만을 거룩, 의롭다, 평강의 왕, 복음,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성전 .... 그 성전에 모든 인간의 의로움과 선함과 거룩함과 사랑과 믿음과 소망이 다 담겨진 그 성전에서 예수님은 홀로 치열한 전투를 벌리고 계십니다 마치 법궤 혼자 발이 달린양 블레셋 신상들의 목을 다 자르고 다니듯, 이제 예수님은 인간의 믿음을 다 자르고 다니십니다. 그 앞에 인간들이 펼치는 믿음은 오로지 바벨탑 사수 하늘을 향한 통로를 사수하기 위함이고 예수님은 그 하늘의 통로를 무너뜨리는 일을 하심으로 자신이 곧 통로이며 갈려면 날 밟고 가라고 십자가만 이 땅에 남겨두고 임무완수 하시고 올라가셨습니다.그 인간의 믿음과 예수님의 믿음의 대결 싸움이 1차 전 바리새인과의 대결에 이어 이제 사두개인과의 싸움에 예수님은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사람의 질문이란 모두다 죄에서 비롯 됩니다. 즉 모른다는 것은 결핍되어 있기에 그 결핍성을 채우고자 함이요 그 채움은 앎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결핍을 낳게 됩니다. (약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즉 어떤 인간도 왜 죽는지 모릅니다. 딱 한 분만 인간이 왜 죽어야 하는가를 보여주었고 그분은 그래서 죄인만 찾으러 지금도 돌아다니십니다.바리새인은 부활교리를 믿고 있는 반면에 사두개인은 부활을 믿지 않는 파당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바리새인들처럼 부활 교리를 믿는 다고 해서 부활이 되는 것은 아니었고, 부활 교리를 믿지 않는 다고 해서 부활에 미련을 버리는 것은 아니다는 것입니다.사두개인들이 부활을 믿지 않는 이유는 바리새인의 외식과 같은 차원이기에 결국 한 뿌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교훈을 삼가라 라고 하셨는데 그 누룩은 천국을 역으로 뒤엎어버리는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자들 이라는 겁니다. 그들의 누룩은 나쁜 죄가 아니라 바로 거룩하기 짝이 없는 의(義)입니다. 즉 주의 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만 똘똘 뭉쳐진 자들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그들의 의요 믿음이요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두개인은 성전의 실세권을 쥐고 있는 자들이었고 예수님을 죽이고자 모인 산헤드린 공회의 실권들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누구든지 알아볼만한 소경된 부정한 자의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거룩에 거룩, 의로움에 의로움, 경건에 경건, 사람들이 찾고 찾던 깨끗한 목사의 이미지를 다 갖춘 자들로써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유도하는 존경성을 두루두루 갖춘 자들입니다. 그런 의로움을 예수님은 누룩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누구든 알아챌수 있는 누룩이 아니라 예수님만이 심각하게 주의하라고 하신 누룩인 겁니다. 아무도 눈치 못챈 누룩이다는 겁니다.지금 부활 논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부활이 없다고 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의롭게 지켜온 율법이 부활 때문에 더럽게 될 수 있기에 부활에 대한 해석을 거부하고 전통적인 해석을 고수하던 자들입니다. 이래보면 서로 서로가 다 전통 지킨다고 다 우기는 셈이지요. 말이 전통이지 자기 의를 위해 사는 자들인 겁니다. 전통처럼 가장 자기를 가리우기 좋은 가장 거룩한 단어는 없겠죠.오늘 마태복음 22장 23-32절 내용은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한 질문입니다. (마 22:23) [부활에 대한 질문;막12:18-27,눅20:27-40] 『바로 그 날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다.』(마 22:24) 『`선생님, 모세는 형이 자식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형의 대를 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마 22:25) 『우리 이웃에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결혼하여 살다가 자식 없이 죽고 그 동생이 형수와 살게 되었습니다.』(마 22:26) 『그러나 둘째도 자식 없이 죽었고 세째에서 일곱째까지 모두 그렇게 되었으며』(마 22:27) 『끝내는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마 22:28) 『이렇게 일곱 형제가 모두 한 여자와 살았으니 부활 때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현대인의 성경)사두개인들은 율법의 모순이 있으면 절대 안되기에 부활을 인정 못하는 것입니다. 자 그럼 바리새파 사람들은 부활을 제대로 안 것입니까? 바리새인의 부활관의 영향을 받은 마르다는 예수님 자신이 부활 이심에 대해 전혀 말귀를 못알아듣고 자꾸 자기자신의 삶과 죽음 자신의 생명과 연관된 인생의 끝에 죽었다가 다시 사는 부활만을 고수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이 순간 너의 눈 앞에 있는 자가 부활이다. 즉 [예수=부활]이다 라고 이야기 하니 문법상 안 맞다고, 예 주님이 부활인 것을 믿쑵니다 믿고말고요 라고 말을 하지만 부활이신 예수님은 도저히 믿지 않는 자들로 말미암아 우십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예수=>부활]인 자신들의 믿음을 이끌어 내는데 성공하면서 쓸데없이 나사로를 살려내게 된 겁니다. 예수=부활 임을 알게 할려고 일부러 3일동안 지체해서 나사로가 죽기를 바란양 늦게 갔더니만 살려내라고 따지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너무 무리한 가르침이었을까요? 정작 예수님 자신이 죽었다가 다시 부활되기 위해 이 땅에 온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부활인 예수님인 초점을 다 놓치고, 기여이 자기 부활 신앙을 주장함으로 결국 부활신앙을 가진 내가 부활이 있음을 믿기에 당신은 내 오빠를 살려내어야 함이 마땅하다는 것을 밀어 붙입니다. 결국 예수=>부활 그러니 우리들도 부활 시켜야 해? 누구처럼? 나사로처럼 ! 알겠나요? 그래야 하나님 답죠 메시야 답죠 구원자 답죠 그리스도 답죠. 이것이 누룩 입니다.예수님의 눈물은 바로 이런 인간들의 믿음 때문에 발생된 눈물입니다. 안 믿은 것이 아니라 너무너무 믿음들이 너무 좋아서 흘리는 민망하여 쪽팔려서 흘리시는 눈물입니다. 한결같이 지성이면 감천이다는 겁니다.(니 믿음 내 믿음 크로스 합채) 예루살렘 성을 보고 우시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평화에 대해 알지 못하고 평화로 자기자신들을 완벽하게 페인트칠 한 예루살렘 성을 보고 우시는 겁니다. 너무너무 기특하기 짝이 없도록 평화롭기 짝이 없는 메시야를 맞이하기 위한 만발의 준비를 빈틈없이 해둔 예루살렘 성을 보고 우시는 겁니다.바로 그런 대끼리 믿음들의 대표성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과 한 판 뜨시는 겁니다. 그 사두개인에게 답변 하시기를 너희는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전혀 알지 못하고 오해 하는 구나 라고 답변하시면서 부활 때에는 장가도 시집도 안간단다. (쓸데없는 걱정 미리 했구나 아이구 민망혀라)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하나님이 말슴 하시길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한 말슴을 안 읽어봤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 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로써 사두개인이 놀라서 대답을 못하고 라운드는 종이 울립니다.즉 사두개인들이나 우리나 항상 지금 삶의 연장으로써 천국을 오해한다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자신들의 삶의 토대로써 천국에 머리를 들이밀고자 하는 것은 결국 사두개인이든 바리새인이든 누구든 다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보고 듣고 말하고 한 것이 다 이 땅의 것이기에 이 땅에서 길들여진 것을 가지고 천국도 정복할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이 죽음의 소산물이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혼인도 바로 예수님(언약 안에서=산 자)과 한 몸 됨을 증거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인 그림자 이거늘 부활이신 예수님과 한 몸은커녕 독자적인 땅의 삶의 연장을 바라보고 있는 그것이 바로 누룩이요 죽은자의 특징이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에게 한 일방적인 약속을 지금 성취하러 오신 예수님이 바로 산 자로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요 이삭의 하나님 안에 거하며 야곱의 하나님으로서 원수의 성문을 열고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시는 예수님 자신을 말하는 것이 부활 이거늘 사람들은 각자의 유익에 맞는 맞춤형 눈높이 부활을 하나식 손에 쥐머쥐고 있는 이것은 마치 믿음도 예수님을 말하고자 함이거늘 각자 자기의 믿음을 자기 프리스타일로 맞춤형 믿음을 쥐고있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믿음] 이라고 하니 돌아버리는 거지요. 예수님의 믿음을 보고 정작 자신의 죽은 믿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또 따라 하겠다는 모방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인간은 마땅히 죽어있는 자임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믿어줬으니 부활까지 책임지라는 식의 오기와 신념을 믿음으로 간직하는 차라리 부활 자체가 없는 식의 저마다의 자기 삶의 토대에서 나온 해석으로 예수님에게 당연성을 주장하니 이것 자체가 죽은자들의 모습이 아닌가 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창세전에도 하나님 안에 있었고(생명책) 지금도 생명 안에 있는 자들을 찾아 다니시면서, 죽음이 성전 안을 다 장악한 그 죽은 자의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서. 성문 밖에서 죽임을 당하심으로 마치 죽은 자와 방불한 자로 여김을 받도록 해골의 언덕 골고다에 지옥 속에 쳐 넣었지만 모든 인간의 허물을 극복하신 산 자의 하나님인 자신의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신 겁니다. 이제 율법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자기 삶의 관리를 자기가 하겠습니까? 새생명의 삶? 성화된 삶? 또다른 자기 믿음으로 자기 의를 추구하는 누룩입니다.(롬 6: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그래서 자기를 빼 버리고(부인) 예수님을 집어 넣는 이유가 산 자는 예수님 뿐이다는 겁니다.(롬 6: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롬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 7: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이제 부활이 예수님 이시다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또 나의 부활을 따로 챙기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까? 고전 15장의 부활은 예수님을 말하기 위함이지 부활될 우리의 부활을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히려 자신이 날마다 죽노라 라고 죽음을 부활 장 속에 집어 넣습니다. 죽은 자와 방불한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안에서 산 자 이고 마지막 아담 살려주는 영인 산 자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말하고자 부활을 증거합니다. 자 자기의 현재적 삶을 토대로 한 새생명의 삶이나 성화된 삶을 연장하는 차원의 부활론이 대세를 이루는 죽은 자의 하나님을 외치는 이 시점에서 예수님이 곧 부활이요 산 자의 하나님 이심을 믿는 다는 것은 인간으로써는 불가능 하기에 날마다 죽고 날마다 새로 믿음을 선물로 받아야, 예수님의 믿음이 찾아오셔야 하기에 예수님이 친히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겁니다. 이것이 누룩인 죽은 자의 하나님과 부활이신 예수님인 산 자의 하나님의 차이점입니다.예수님 ! 너무나 민망하셔서 우신 그 예수님을 아무도 부활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다 자기 부활 자기 믿음 챙기기 급급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버린 돌 취급 했습니다. 이런 죄인된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믿음이 아니면 그저 자기 믿음만 고수하며 자기가 이웃이 될려고 두루돌아다녓을 겁니다. 그러나 이런 원수인 우리의 이웃이 되어준 그 십자가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산 자의 하나님 한 번 못보고 죽은 자들 속에서 살아있는 척 하며 그 자체로 죽은 것도 모르고 지냈을 불쌍한 우리 자신을 보고 우시는 성령의 탄식을 들을 수 있도록 우리의 어두운 귀를 열어주소서 제발 들을 귀를 주시 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