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요한복음 18장 33절(두개의 세상)181016b-이근호 목사
강남-요한복음 18장 33절(두개의 세상)181016b-이근호 목사
방금 쉬는 쉬간에 중요한 질문 나왔습니다. 신앙의 고백을 하고 싶어도 사회생활 할 경우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 뜻이죠. ‘사회’라는 것은 뭐냐 하면 ‘타자’에요 남이에요 남. 내가 있으면 내 주위에 포진하는 것이 타자 아닙니까. 타자가 있으면 남이 있으면 반드시 거기에 결과가 뭐냐? ‘나’를 더욱더 응축하게 되어 있어요.
나를 정신 차려서 지키지 아니하면 저 타인에게 밀리거나 그쪽에 꿀리거나 꿀림당함을 하거나 그 사람한테 사기를 당하거나 속임을 당하거나 손해볼 수가 있어요. 타인이 있다는 것은 자동적으로 누구를 발생시키느냐 하면 나를 또 새롭게 타인에 맞추어서 나를 발생시키게 되는 겁니다.
혼자 살 때는 혼자 산 속에 살 때는 옷 아무거나 입어도 되요. 그러나 혼자 사는 사람이 사돈 만나서 상견례할 때에 산에서 나무캐던 옷 입고 가게 되면 자식들 욕보이잖아요. 신경 쓴다고 옷 뭘 입어야 되나. 옷 몇 벌 되지도 않는데. 그게 뭐냐 하면 새로운 내가 요청 아니한 타인 앞에서 전에 내가 기대했던 타인 말고 갈아치기한 새로운 타인 앞에서 나는 새로운 자아가 되는 거에요.
요청하지 않는 타인의 대표적인 경우가 어떤 경우일까요? 전화 갑자기 와가지고 “차주 되시죠? 차 좀 빼주세요” 이거. 정말 요청 안 한 타인이에요. 그 사람하고 전화 받고 난 뒤에 “요새 날씨 좋지요? 그렇지요?” 뭐 그런 이야기 안합니다. “예~” 하고 후딱 말 빨리 끊고 빨리 차 빼주고 빨리 남남으로 돌아서야 돼요. ‘난입’
나 혼자 사는 인생에 난데없이 뛰어드는 그런 타인은 나의 현재 구축된 자아의 완곡을 자아의 체계를 혼선을 일으킵니다. 혼돈을 일으켜요. 이게 드라마에서 뭐냐 하면 이걸 ‘출생의 비밀’이라고 해요 출생의 비밀. 숨바꼭질이라는 드라마 화장품 회사 물려받는데 갑자기 들어와가지고 뼈대 없는 것들이 들어와가지고 갑자기 자기 딸 되잖아요. 출생의 비밀 이런거. 그래서 인생 꼬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인간으로서 예수님 걷어치우고 하나님 걷어치우고 교회 그런거 다 걷어치우고 인간의 소망은 뭐냐 하면 날 좀 건드리지 마라. 제발 날 좀 건드리지 마라에요. 이걸 가정에서는 뭐냐 잔소리 하지 마라와 똑같은 거거든요. 제발 잔소리 없이 한번 살아보면 좋겠다. 내가 잔소리 하고 싶어서 하나. 하는 꼬라지 보니까 안 할 수가 없어 이렇게 하거든요. 오고가는 대화가. 대화가 그렇잖아요.
남편들의 소원은 제발 여자가 잔소리 안했으면 좋겠고 여자들의 소원은 잔소리 안하게 만드는게 소원이고 둘 다 사고가 안 맞아요. 이게 남편과 아내가 하나가 아니고 타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영원한 타인이에요. 그러면 왜 사느냐? 경제적 이유 때문에 살아요. 경제적 이유 아니면 같이 살 이유 전혀 없습니다. 정은 애초에 날아갔고 각방은 애초부터 각방 쓰고. 경제적 이유, 자식, 결혼식 때 손잡고 들어가는 그 이유 때문에 살아요.
그러니까 이게 인간은 교회 왜 가느냐? 날 좀 덜 건드리라고. 신이시여 날 좀 건드리지 말라고 미리 아부하고 뇌물 바치기 위해서 가는 거에요. 나 자신이 내가 생각하고 구상한 내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미리 약치기 위해서 교회 가는 거에요. 내 가정 건드리지 말고 내 자식 건드리지 말고 내 인생 건드리지 말라고. 개판이지 진짜 개판이지 교회가 개판되는 거에요.
그럼 성경은 뭐라고 이야기 하느냐. 인간들이 자기 정성으로 살아가는 것을 우리보다 더 열심히 더 철저하고 완벽하게 하나님 말씀으로 지키려는 집단이 있어요. 그게 바로 유대나라입니다. 유대나라. 이 유대나라 이야기를 성경에 예수님과 매치시키는 이유가 뭘까요?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 했거든요.
너희들이 아무리 착해도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뭐냐 하면 인간의 인류 역사상 가장 스스로 구원 받기 위해서 또는 다른 말로 하면 나 구원받기 위해서 내 개인적 구원론이죠. 구원론 하나 붙들고 최정점에 이르렀던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에요. 그 뒤에 교회가 아무리 따라가도 못 따라가요. 청교도? 청교도 홍교도 못 따라갑니다. 아무리 해도 못 따라가요. 최고입니다 그들은. 철저에 철저를 기한거에요. 안식일 지키는 것도 무려 세세하게 다 따져서 지키는 겁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그것은 다 뽑아내서 하는 거에요.
그러나 그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그러니까 100m 10초대라면 10.2까지 온게 바리새인이에요. 바리새인보다 더 빨리 달리지 아니하면 어디 못 간다? 9초대에 못 뛴다. 우사인 볼트처럼 못 뛴다 이 말이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빨리 달리는 이 토끼. 그런데 느림보 거북이가 100m 2년 5개원 걸리는 느림보가 무슨 빽 믿고 이렇게 천국에 왔느냐? 여기에 낙타를 넣어주는 그 바늘구멍이 있기 때문에 그런거에요.
너 구원받았나? 네 구원 받았습니다.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왔구나. 이렇게 되는거에요.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역할’이에요 역할. 이게 역할이에요. 주님이 살아 있어서 사람은 일체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여 주시고 하나님이 살아 계셨으면 하는 일마다 사람이 하지 못하는 일만 그 기능을 분양하는 거에요 분양. 분양 아줌마들 좋아하죠 분양. 분양해주는 거에요 분양. 자기꺼 아니에요. 본점과 지점 관계에요.
분양을 해주게 되면 기능을 분배 받아요. 이 기능 분배를 가지고 성경에서는 이걸 뭐라고 하느냐? 이걸 ‘은사’라고 합니다 은사. 이게 은사에요. 끊어지지 않습니다. 이미 택배로 왔기 때문에 반납이 안돼요. 은사에요 은사. 그 은사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이거에요. 내 힘으로 또는 다른 말로 하면 내 것으로, 같은 말로 하면 내 힘으로 안 되는 일 이겁니다.
신앙이란 뭐냐 하면 생각해 보세요. 내 힘으로 안 되는게 뭔가를 한번 찾아보세요. 내 힘으로 안됐던 것. 처음에는 기적을 원할거에요 기적. 하지만 나중에 보면 내 힘으로 안 되는게 없어져요. 모든게 내 힘으로 다 안 됐던거에요. 왜냐? 밥먹는 것도 은혜고 모든게 은혜 아닌게 없어요.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것이 햇빛 공기 그리고 걸음걸이 그리고 사건 막아주시고 이렇게 키운 이 모든 것이 내가 한게 아무것도 없어요.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내가 뭘 더 원하지 말고 주신 것을 더 찾으라고요. 그렇게 찾을게 있다는 인식자체가 은사입니다. 그걸 어려운 말로 할까요? 전에는 예수님 안 찾을 때는 안 믿을 때는 누가 주체? 주체 말고 쉬운 말로 누가 ‘나’였어요? 내가 나였어요. 내가 나였는데 내가 나 이기 때문에 그때는 죄가 뭐냐 하면 ‘내 것 지키기’에요. 내 것 지키고 내 것 키우기. 내 것 지키기. 나 천당 가기. 전부다 출발이 나부터 출발했거든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나를 죽이시고 주께서 기능을 하게 되면 나는 죽었지만 주님은 살아 계시잖아요. 주님은 살아계셔서 우리에게 뭘 준다? 은사를 주려면 은사 받는 그 자가 주님 보시기에 ‘너’라고 지칭되는 은사 주는 사람이 만들어져서 거기에 은사가 주어지는 거에요. 은사가 너라는 주님의 언약 상대자를 만들어 내요. 그 기능이 살아있으니까 누가 살아 있어요? 성도가 살아 있는거에요.
성도가 살아 있는 것은 목숨이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기능이 살아 있어요. 그래서 성도가 만약에 늙어가지고 몸이 없어진다. 그러면 기능은 죽어요? 살아요? 몸은 죽어도 기능은 살아 있으니까 이 기능에 부합되게 이 몸이 새로운 유니폼으로 바뀝니다. 옷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장막으로 새로운 몸으로 갈아입게 되요. 고린도후서 5장에. 이게 주님의 프로젝트입니다. 이게 주님의 계획입니다. 말씀의 계획이에요. 그렇게 보시고 사도 편지를 쭉 보세요. 이해 안 되는게 어디 있어요. 다 이해되는 거에요.
다시 정리하면 나보다 우선 되는 것이 뭐라고요? 기능, 은사고. 기능보다 우선되는 것이 뭐다? 지금 주님 살아계시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나를 왜 핍박하느냐? 누구십니까?!” 이렇게. 주님이 살아 있어서 우리에게 사도 바울로 하여금 “너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라.” 무슨 재주로? 안돼요. 사도가 될 재주가 사울에게는 없습니다.
그럼 뭐냐? 날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가게 되면 그 은사가 이방인을 구원을 위한 필요한 은사를 주께서 필요할 때마다 주시는거에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은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는 바둑도 잘 두고 장기도 잘 두고 그런 말이 아니고 주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는 모자람 없이 다 채워주셨다. 그래서 지금 일어난 일이 주님보시기에 완료된 주께서 원하는 그 일이 되는거에요. 30배 60배 100배 그런 뜻이에요.
그냥 우리를 사용할 때 그냥 사용하게 되면 우리 나오는 은사가 뭐냐 하면 내 힘으로 안됐다. 내가 율법 지킴으로 안 되었다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십자가 기능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근거해서 나온 기능인 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예수님의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게 되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우리가 이것을 이 계시를 못 받는다 해서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십자가 안’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성령의 은사를 못 따라간다 해서 그걸 뭐라고 하느냐 ‘성령 안’이라고 하는거에요.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의 찾아옴을 우리 힘으로 못 벗어날 수 없다고 해서 뭐라고 하느냐 ‘예수 안’에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는거에요. 왜?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점점 갈수록 더욱더 죄인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과 우리 관계가 죄인을 구원하신 주님의 그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는 누구 의 아니에요? 나의 의는 아니지요.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의 의 안에서 우리는 종이 되어서 그때부터 우리는 뭐가 되느냐? 의의 종이 되는 겁니다. 로마서 6장에. 조건이 있어요. 로마서 6장 1절. 반드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됩니다. 언제 죽을까요? 9월달에 죽을까요? 10달에 죽을까요? 아니에요. 주님의 은사한테는 시간이 인물로 바뀌었기 때문에 주님이라는 인물이 살아있는 한 우리는 항상 현재 진행형이에요.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사는 겁니다.
자, 그 이야기 계속 해 봅시다.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산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그러면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산다는 이 말은 문자 그대로 한다면 우리는 날마다 연기해야 되요. 저녁 먹고 난 뒤에 잘란다. 죽자. 윽 하는데 성경에서 이제부터 여러분들한테 좀 사과해야 되는데 어렵게 하겠어요. 할 수 없어요. 지금부터는 좀 어려워요. 이게 어느 정도로 어려우냐. 그 오늘 본문과 관련되어 있어요. 제가 일부러 이렇게 한 것이 아니고.
‘언약의 중첩’입니다. 언약의 중첩이라 할 때는 뭐냐 하면 다른 쉬운 말로 하면 ‘개념의 중첩’이에요. 개념의 중첩이라 하는 말이 뭐냐 하면 이 세상에서 인간들이 언어를 통용하지요. 언어를 통용한다는 것은 언어에 의미가 실려서 통용하는거에요 개념상. 인간이 소통하는 의미 있고 자, 오늘 본문 18장 36절 한번 읽어 보세요. 36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닌데 맞지요? 주님의 나라하고 이 세상하고 평화롭습니까? 싸운다고 되어 있어요? 여기 36절에. 싸운다고 되어 있지요. 그러면 통용되는 개념 의미가 서로 대치된다는 말이죠. 다르다는 말이죠. 거기까지 이해되시죠? 인간들이 평소에 인간들 간에 언어 쓸 때에 ‘죽는다’는 개념이 무슨 개념입니까? 숨 끊어지는걸 죽는다고 하잖아요. 그렇죠? 이 개념을 주님의 나라는 안 받아준다 이 말입니다.
숨 끊어지는 것을 죽는 것으로 보지 않아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죽는 것으로 본다 이 말이에요. 하나님의 언약이 성립되지 않는 것을 죽는다는 것으로 보는 겁니다. 살아도 죽은거에요 인간은. 왜? 언약 관계가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의 살과 피가 내통하지 않으면 그건 죽은거에요.
그 어려운 이야기가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엄청나게 나와 있습니다. ‘주님 어디로 갑니까? 도마한테 간다. 왜 가십니까? 도마가 죽었느니라. 죽었으니까 우리도 죽으러 가자.’ 그 죽은게 아니야. 주님께서는 그 죽음을 말한게 아니거든요. 예수를 믿지않는게 죽은것이라고 보는 거에요.
요한복음 11장에서. 마르다 마리아가 마중을 나와서 되지도 않는 소리 했잖아요. 예 마지막 때에 다시 부활. 마지막 때에 부활해서 사는 것은 이 인간 세상에서 무엇을 기준으로 하느냐 하면 자기 몸을 기준으로 해서 그런거에요 자기 몸. 인간의 자기 몸을 기준으로 해서 내 몸이 펄펄 살아 있으면 살아있다. 내 몸이 싸늘하게 되면 죽었다 이렇게 보잖아요. 그러나 너희 오빠는 안 그렇다는 거에요. 오빠는 죽었더라도 예수 안에서 살아있다는 거에요. 왜? 오빠는 예수를 믿으니까. ‘믿는다’는 은사가 있으니까.
예수님의 몸은 어떤 거냐? 우리 몸은 죽으면 죽은거지만 예수님의 몸은 죽었다는 그 자체가 예수님 안에서 이게 관계가 제대로 주의 뜻대로 죽었기 때문에 제대로 산 관계.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살았다’가 되는 거에요. 예수님이 죽어도 산 관계 되는 거에요. 그것을 역사 속에서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했지만. 모든 복음의 근거는요 교회 부흥이나 인간성 좋게 되는거 아니에요. 근거는 뭐냐?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으니..’ 모든 신약의 근거가 되야 돼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
문재인 대통령이 프랑스 갔다 그게 근거가 되면 안돼요. 문재인 대통령이 프랑스 갔다 뉴스에 나오지요. 문재인 대통령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살아서 멀쩡하게 돌아다니니까 살은 것으로 보이지요? 문재인 대통령 살았다는 것을 어디에 근거해서 했습니까? 예수님이 죽었다 부활에 근거하지 않고 내가 살아서 내 눈으로 지금 목격하게 되니까 내가 살아있는 것처럼 나를 기준으로 해서 볼 때 나고 살고 당신도 살아 있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대표적인 것이 사랑이라는 건데 이번에 아가서 할 건데요. 참 정말 아가서 너무 깊어서 내가 혼절할 정도에요. 너무도 내용이 깊어요. 엄두가 안 날 정도로 깊은데 그냥 뭐 주신 은혜대로 하겠습니다마는 ‘사랑’이라 할 때에 내가 나를 사랑할 때 절대로 내가 사랑하는 것을 타인이 모르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내가 일방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요.
나도 내가 나를 모르는걸. 이거 있잖아요. 타타타. 나도 내 마음 모르는데. 내가 사랑한다는 것을 남한테 알아달라고 강요하지 마세요. 네 몸은 네 몸이고 내 몸은 내 몸이에요. 왜 다르냐 하면 내가 살아온 경력이 다르고 네가 살아온 경력이 달라요. 경력은 뭐가 되느냐 하면 우리의 두뇌 속에 기억으로 쫙 되어 있고 그 기억은 순간순간 지금의 나의 자아의 내용물로 툭 튀어 나온단 말이죠.
여러분 꿈 속에 뭐 나오든가요? 왜 부부가 같은 잠을 자도 같은 꿈을 안 꿉니까? 고등학교 다른데 나왔거든. 고등학교가 다른데 나왔거든 고등학교가. 살던 동네 풍경이 달라요. 그런데 꿈만 다른게 아니고 말 하나 내뱉을 때 말 하나 그냥 개념이 아닙니다. 과거 역사가 총 동원해서 거기 실려서 딱 튀어 나와요.
내가 너 사랑한다. 남편이 이야기하면 여자가 어쩌라고. 사랑하는 꼬라지하고는 설거지도 안 해놓고 뭘 사랑한다고. 이 말은 뭐냐? 내가 너를 내가 경상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경상도 사람은 사랑한다는 말하지 않는데 내가 용기내서 했다는 말은 이 남자는 뭐냐 하면 경상도 남자는 절대로 자존심 강해서 부인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를 전제로 해서 이걸 내가 이 힘든 결정을 하고 너한테 사랑했다는 거에요.
여자의 말 내가 경상도 여자야? 그건 너의 과거고 나의 과거는 입만 열면 무조건 사랑한다는 나는 그 동네 사람이다. 뭐 별난거 했다고 티를 내고. 사고가 달라요. 그 다르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결혼하게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음을 누누이 절실하게 알게 하는 겁니다. 님아 강 건너지 마라. 강 안 건너면 또 싸울려고. 남이 강 건넌다는데 지가 왜 붙들고 난리에요. 주께서 건나가게 하시는데.
‘사랑’이라는 이 단어처럼 너무나 일방적인 단어가 없어요. 사랑에 담겨 있는 것은 뭐냐? 그 인생이 자기 인생이 그 과거가 자기를 키우기 위해서 살았잖아요 그러면 “나 당신을 사랑해” 이 말은 내가 나 이만큼 키운 것에 기여한 것처럼 너는 무조건 내 뜻에 따라서 너는 내 인생의 부속품이 되어 다오 이 말을 짧게 이야기해서 두자로 ‘사랑.’
너는 내 소유물이 되어서 내 과거를 빛나게 하는데 기여하라. 제가 너무 길게 이야기 했지요? 간단하게 하면 사랑. 춘향전 사랑대목에 이런 대목이 있어요. 이리 오너라 앞태를 보자. 저리가라 뒷태를 보자. 어화둥둥 업고 놀자. 업고 놀자. 그런데 거기 보면 춘향이가 이도령을 업지요. 아니 이도령이 춘향이를 업잖아요. 그런데 업는데 문제는 춘향이는 이도령을 업지 않는다는 거에요. 왜? 지는 다른 방식으로 하거든요. 수청들 수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방식이 달라요 방식이.
그런데 그 방식을 이해해 주느냐? 인간은 절대로 남을 이해 못하는 존재입니다. 남을 이해하겠다는 것은 자기한테 되지도 않는 능력을 발휘하는 것과 똑같은 소리에요. 그거 강요하지 마세요. 그러면 어떻게 살아요? 주께서 붙여준 대로 사시면 되요. 더 할 생각하지 마시고 더 기대하지 말고 더 희망 갖지 마세요. 주신 것만 감사하면 되는 겁니다.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인간들 인간이라고 하지 말고 내가 타인을 상대할 때 동원했던 개념과 의미들이 쫙 깔려 있어요. 따라서 이 세상에 종교라는 것 기독교 종교라는 것은 뭐냐 하면 나는 멀쩡하고 이 타인의 자리에 누구를 집어넣습니까? 예수님 하나님 삼위일체 다 집어넣어요. 평소에 자기가 남을 다루었던 방식대로 예수님 하나님을 다 담아 버려요.
포로이드는 프로이드 이론이 뭐냐 하면은 라캉 이론도 마찬가지지만 자아와 주체 사이가 벌어졌단 말이죠. 나는 되고싶은게 있는데 현재는 자기가 현실적으로 안 되니까 이 되고싶은 것을 뭐로 메꾸느냐 하면은 자기보다 능력이 많고 전능한 어떤 타인을 동원시켜서 내가 한 일 플러스 알파를 해서 내가 되고 싶은 욕망을 이루겠다 이렇게 설명을 해요.
이게 의식적으로 이렇게 하지만 이건 어디서 한다? 이거는 ‘무의식’ 세계에서 그렇게 된다는 거에요 무의식 세계에서. 이게 충동으로 나타나요. 이성적으로 따지면 알겠지만 이성말고 욱하는거 있잖아요. 용수철처럼 눌린게 있다고요. 아버지 생신날 자식이 아버지 애먹입니까? 어머니 생신날 어머니 애먹입니까? 자식이. 아들 생일할 때 아버지가 잔소리 별로 안하지요? 그 다음날로 미룬거에요. 오늘까지 봐준다. 봐준다. 오늘 참는다 이런식이에요. 참는다는 말은 사라진다? 안 사라진다? 오히려 저축이 되는거에요. 다음에 걸릴 때 한 번 보자. 한 번에 팍 터지는 겁니다. 얼마 전에 경험했지요?
평소의 이미지 감정, 여자가 시댁에 갔다 오고 내내 참지요. 남자가 처갓집에 갔다 오고 내내 참아요. 오늘 좋은 날이니까 참고 그냥 지나가자. 참아요. 처갓집에서 사위는요 역사가 달라요. 살아온 내력이 달라요. 전통과 의식이라든지 인생관이 달라요. 시댁은 여자한테 가문과 전통이 달라요. 다른 동네라고요. 다른 동네. 지금 애 보고 살지 시댁보고 시댁 돈 많은 경우는 할 수 없지만 참지만. 뭐든지 돈 많은 때는 모든 것이 잠잠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자아와 주체 사이 안 되니까 여기다가 어떤 아버지 역할하는게 들어가는 거에요. 왜 아버지 역할이냐 하면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그 가정에서 절대자이기 때문에. 엄마도 아버지한테 꼼짝 못했다 이 말이죠. 물론 어머니가 더 쎈 집안은 어머니가 역할을 하겠지요. 그처럼 아버지 역할하는 사람 있다가 성인이 되고 난 뒤에 자기가 되고 싶은 승진이라든지 돈벌이가 안 될 때는 자기 현재 형편은 자아인데 되고 싶은 주체, 주체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사회에서 남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것 이게 주체에요.
사회에서 나를 어떻게 불러줬으면 내가 기뻐하겠다는 것. 남들이 그 직장 과장 같으면 과장답게 과장 짓을 하는 것을 부장 쪽에서 요구하는 것. 그러나 실력은 일처리 못하고 사무정리도 못하면서 자리는 과장이다. 낙하산으로. 그럴 때는 이 자아와 주체 사이 가는거에요. 어딜 가느냐? 영락교회 가야지요. 주여 아버지 불러야 되는 거에요 이게. 내가 나는 벌써 마음은 저기 벌써 승진 내 마음은 우리 애 공부 잘하고 아파트 좋은 차 타는데 가 있는데 형편이 꼬라지가 어려운 꼬라지죠.
이 남은 이 빈 공백을 뭐로 채우겠습니까? 두 자지요. ‘간구.’ ‘간절한 기도.’ 과부의 기도를 간절한 기도를 주님께서는 배척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러한 어린애 같은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소문난 교회 가가지고 간구하는 거에요 간구. 간절한 기도 하고 있는 거에요. 간절한 기도라고 하는 것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느냐 하면 나의 몸에서부터 시작 되지요. 나의 몸은 뭐로 무장되어 있다고 했습니까?
내가 남들과의 관계에서 의미와 이미 확증된 개념들이 있겠지요. 그러면 기도할 때 기도 문장들 한번 적어 보세요. 주여 아버지 삼위일체 어린아이부터 쫙 해볼 때 그 모든 단어 다 어디서 나온 단어 입니까? 이 모든 단어를 사도 바울은 이걸 가지고 한가지로 이야기 합니다. 이게 어디서 나왔다? 요한복음에서는 ‘육’에서 나온 거에요. 모든 것이.
사람들은 저보고 그럼 육에서 나오는 기도 하지 말고 영에서 기도하면 되지 않습니까? 육의 기도 이제 그만하고 육은 죽었으니까 이제 영으로 기도하면 되지 않습니까 하는데 육이라는 것을 아는게 영이에요. 영은 주님 몫이지 우리 몫이 아니라고요.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이 짓 하면 되요 이 짓. 이 짓하면 된다고요.
예를 들면 지난 5월달에 은혜 받았습니다. 은혜 받아가지고 나는 누가 뭐래도 신자라고 확증했습니다. 이게 벌써 10월달 되면 벌써 이게 뭐로 변했습니까? 이 영이 뭐로 변했습니까? 육으로 변했어요. 왜냐? 우리는 매일같이 나를 자아가 여기에다가 자아의 것으로 소유하기 때문에 그래요. 이러다가 10월에 마지막날 되면 벌써 은혜받은거 10월 마지막날 되게 되면 또 이게 육으로 변했어요.
그게 왜 그러느냐 하면 성령께서 그렇게 하게 하셔요. 왜?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가 못하는 것을 해냈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몸에서는 계속해서 육을 영으로 바꾸고 육을 영으로 바꾸는 그것이 바로 의의 언약의 완성이거든요. 그 발동기, 그 트랜스, 죄를 영으로 바꾸어 주는 그 완성된 제사가 예수님의 고유 기능입니다. 우리는 그 기능을 위해서 이 세상에 나와서 육의 육으로 밖에 살 수 없어요. 육이 육으로 살 수밖에 없다고요.
뭘 해도 왜냐하면 아무리 은혜 받아도 몇 분만 지나면 육으로 변해요. 나 은혜 받았다! 이러고 있다고요. 죽은 자아가 또 다시 죽은 자아가 주님 주신 은혜를 내 소유화시키기 위해서 또 옛날에 기억된 나를 또 갖다가 붙이는거에요. 그러면 주님께서 또 어떤 사태를 일으켜요. 사태를 일으켜 가지고 다시 해봅시다.
내 자아가 있으면 그 다음에 뭐가 생긴다 했습니까? 내 안에 자아가 생기면 자동적으로 내안에 뭐가 생기겠습니까? 아까 했지요. ‘자아’가 생기면 뭐가 생깁니까? ‘주체’가 생기겠죠. 여기 미흡함, 미흡함을 메꾸기 위해서 기대 그다음에 소망이 자동적으로 따라옵니다. 이 미흡함 기대 소망이 이런 것이 자동적으로 따라오죠.
따라와 가지고 주님 지금까지 은혜 주신 것은 감사한데 더 이상 우리 딸 신랑감이나 맺어주면 더는 내가 소원이 없겠습니다. 또 이렇게 너 죽인다 해도 소용없어요. 내 딸 시집가는거 보고 눈 감겠습니다 이렇게 나온다고요. 그래서 주님께서 노아의 언약 때 뭐라고 했습니까? 사람들이 하는 일이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먹고 마시고 이럴 때 주께서 갑자기 나타나죠. 그렇다면 이 사람 논리에 의하면 주님께서 재림을 언제까지 미뤄야 됩니까? 자기 딸 결혼식 이후로 재림이 와야 돼요.
왜 그러냐하면 내 자아 때문에. 이미 은혜 받은 내가 또 다시 자아감이 생기는 육이 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이 세상에 성도치고 자아가 없는 사람이 있어요 없어요? 모든 성도는 자아감에 무장되어 있습니다. 신자 불신자 똑같아요. 전부 다 자기 밖에 몰라요. 그런데 신자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이것 때문에 누가 돌아 가셨다? 십자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이미 망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거에요. 이미 망했기 때문에 뭔들 못합니까? 사람이 한번 망하지 두 번 망합니까? 이미 주님 보시기에 망하는 자에게 성령의 은사를 줬잖아요. 망했기 때문에 준거에요 망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나같은 인간을 위해서 죽었다 살아났기 때문에 너는 죽을 인간밖에 안 되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성령을 줬잖아요. 그렇지요? 뭐 가능성보고 준거 아니지요? 같이 죽었단 말이죠 둘 중에 한사람 죽어야 되지 않습니까. 주님이 죽었으니까.
그 다음에 한번 봅시다. 37절 한번 봅시다.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지금 중첩되어 있으니까. 언약 중첩을 이야기 할까 말까 주저 하는데 어려워서요. 그냥 넘어가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못 참겠다 해야되겠다.
‘언약 중첩’이 뭐냐 하면은 아까 이야기한 그거에요. 우리 인간을 만들어 놓고 이걸 새로운 피조물 안에 뜯어보면 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 언약이 중첩되어 있어요. 구약이 있고 신약이 있는거에요. 구약대로 해서 우리에게 뭐가 주어진다? 이 말 지키지 않으면 뭘 받는다? 지키지 않으면 저주받지요? 지키는 자는 복을 받지요?
지키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어요. 모든 율법을 항상 지켜야 돼요. 오후 5시에 지켰는데 오후 5시15분에 어기면 안돼요. 늘 24시간 늘 지켜야 되고 그것도 한두개가 아니라 모든 율법을 늘 지켜야돼요. 탐내도 안돼요. 왜? 십계명에 탐내지 말라고 했으니까 탐내면 안돼요. 오른손이 범죄하면 찍어 버려야 돼요. 남을거 없어 다 찍고 나면 남을거 없다니까요.
그러니까 구약 있고 구약 적용시키고 신약 올라갈 때 구약과 신약 올라갈 때 우리 힘으로 못 올라갑니다. 여기에 뭐냐? 십자가의 ‘반복성’이 주어지죠. 십자가의 피의 완성으로 말미암아 구약의 저주 받은 인간을 신약에 의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어서 하나님의 의인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언약 중첩’이에요. 말은 굉장히 멋있어 보이지만 간단하지요?
언약 중첩을 그럼 쉽게 하지 왜 그렇게 어렵게 하느냐? 지금 사람들이 언약 중첩을 이중 중첩으로 보지 않고 언약 하나를 짤라냈어요. 지금 신약시대라는 거에요. 이걸 짤라버리니까 지금 완전 도살되어 버렸어요.
목사님 저는 죄지을 줄 몰라요 이러고 있다고요. 성경 한번 들이대 볼까? 먹을거 입을걸로 족한줄 알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 이 말부터 한번 들이대볼까요? 분을 품되 언제까지 품지 마라? 해지도록 품지 말라고 했지요? 시계 딱 보고 노을 한번 보세요. 해 지는가 한번 보란 말이죠. 발꿈치 들고. 그때까지 품으면 안돼요. 무슨 그것도 한두개가 아니라니까요. 늘 다 지켜라 늘 다 지켜야 돼요. 뭐 저것 빼고 자시고 고르고 할 거 없어요 이거는 쉽고 저것은 어렵고 없어요.
자기 자식을 자기 자식이나 아비나 남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한 자는 하늘나라를 못 들어가요 그게. 천국을 못 간다고요.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 못가요. 천국 못 간다는 구절이 왜 그렇게 많은지요. 천국 가다 다 걸렸어요. 누가 누구를 사기치다 걸리거든 고소하지 마라. 이거 참 어려운 이야기 아닙니까? 고린도전서 6장에. 더 어려운거 해볼까요? 아내 된 자들이여 이거 참 어렵다. 남편 된 자들이여 아내 사랑하기를 중간에 거두절미하고 목숨 바쳐라는 거에요. 미쳤어요!!미쳤어요!! 목숨 바치게. 이 귀한 목숨을 왜 그런 점점 늙어가는 그 여자를 위해 왜 바칩니까?!
성경 어느 말씀도 못 지키는 것을 계속해서 죽을 때까지 계속 들이밀게 하기 위해서 주신 말씀이에요. 하나 지켰다고 매직으로 내 성경에서 이거 하나 빼자 이런거 없어요. 분명히 지켰는데 15년 뒤에 보면 그거 또 어겼어요. 이거는 소싯적에 지켰다고 했는데 25년 뒤에 보니까 어기고 있다 말이죠. 아까 이야기 했지요. 성질나면 욱 올라온다고. 참고 참았는데 욱하니까 다 튀어나오잖아요. 그동안 참아야 하느니라 이거는 형제 우애 자비 참아야해 해놓고 나중에 형제 우애 돈 앞에서 다 튀어 나오죠.
구약 빼고 신약으로 갑시다 안돼요. 이제는 구약도 언약에 중첩이 되어서 복음입니다. 구약도 복음 되었어요. 복음으로 다시 거꾸로 구약의 율법을 복음적으로 해석해야 돼요. 복음적으로 해석해야 돼요.
자, 그 다음에 보겠습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아까 왕 개념 들었지요? 배웠지요? 두 개입니다. 인간과 인간으로 통하는 왕 개념 있고 주님의 나라의 왕 개념은 무엇과 끊어져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왕 개념과 완전히 끊어져 있지요? 그래서 주께서는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이렇게 하니까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주님은 일방적이에요.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이렇게 했어요. 진리가 무엇이냐. 아까 그 쉬는 시간에 했는데 다시 하겠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고 했을 때 예수님이 답변했습니까? 답변 안 했습니까? 답변을 했어요? 안 했어요? 안 했지요. 왜 안 하느냐? 질문은 인간이 하는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씨 뿌리는 자는 주님이지 인간이 씨 뿌리는게 아니거든요. 여기 뿌려주세요 여기 뿌려주세요. 이런거 없어요.
너는 뿌린 대로 지옥갈 놈은 지옥 가고 천국 갈 놈은 천국 가고 그 결정은 주님이 하시는거지 나는 좋은 밭 되어야지 해가지고 스스로 자기 가슴 막 이렇게 개풀 뜯어 먹는 소리하고 농사짓는 것처럼 하고 이런거 없어요. 목사들이 그 설교할 때 뭐라고 합니까? 여러분 마음 바꿉시다. 뭘 우리의 마음을 바꿔요? 떡 줄 놈 생각도 안하는데 자기가 김칫국 마시는 것처럼 된다 말이죠.
내 안에 뭐가 있는지는 내 안에 이만한 돌이 장애물이 있는지 내가 가시덤불 있는지 그건 내 소관 아닙니다. 아무리 구원받고 싶어도 내 안에 가시덤불을 발생시키게 되면 우리는 열매를 맺지를 못하고 지옥가야 돼요. 지옥가는 것에 대해서 섭섭하게 여기지마세요. 이미 우리는 육이 되었기 때문에 육은 죽은 자거든요. 이미 죽은 자기 때문에 죽은 자가 섭섭해한다는 말이 말이 안돼요. 어떻게 쓰실 것만 육으로 만든 것부터 쓰실거고 육으로 만들어서 어떻게 어떤 은사를 집어넣을거냐도 주님의 고유 권한이지 내가 뭐 이과가고 문과가고 내가 선택할 문제 아닙니다. 그냥 사시면 주께서 그날그날 숙제 주실거예요. 맞게 은사 주실거예요.
제가 그런 예를 들었어요. 노래에 이런 노래 있잖아요.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그런 노래 있지요. 밤만 되면 가스관 올라가지고 도둑질하는 아빠를 향하여 아들이 무슨 노래 부르겠습니까? 아빠 힘내세요 가스관 잡다가 놓치지 말고 힘내세요. 왜냐하면 이게 자기 가족 구성원이라고 하는 것은 그 안에 통용될 때는 본인들이 살 생존 본인들의 삶을 위해서 선과 악이 자기들끼리 새롭게 규칙이 만들어져요.
아빠가 도둑질 하든말든 아빠가 도둑질해서 내가 스마트폰 구입할 수 있다면 아빠 힘내세요 할 수밖에 없어요. 목사님 너무 과격한 예를 들었습니다. 그건 나쁜 짓이잖아요. 그러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요 아파트 두 채가 나쁜 짓이에요. 나쁜 짓이라고 하는데 나쁜 짓이라고 하는 것을 범주를 확장시켜 보세요. 지하철 만원 지하철에서 아무리 바르게 서 있으려 하더라고 저쪽에서 밀면 밀어서 저쪽에서 옆에 있는 여자 손대게 마련이에요 미니까.
한번 부도나면 아무리 건실하고 뭐 잠언서에 보면 열심히 노력하는 자는 부자 된다고요? IMF 할 때 열심히 노력 안 해서 망했습니까? 치킨집 사장이 하루에 16시간씩 일하는데 망했어요? 우리나라 창업 75%가 망합니다. 폐업률이 75%에요. 왜? 열심히 안 해서 그래요? 열심히 해서 그래요. 열심히 해서 그래요. 어떤 기준에서? 자기 딴에. 자기 딴에 열심히 했어요 자기 딴에. 자기 딴에는 열심히 해서 직원 5명 데리고 열심히 했어요. 직원 5명 왜 구합니까? 자기 혼자 하지. 그런데 자기 역량에는 5명이랑 하는 것이 열심입니다. 왜냐? 그거 혼자서 다 못하니까. 인간의 역량이거든요.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 착한 일하고 나쁜 일 구분 어떻게 하느냐? 일단 남자 키가 180이상. 척추가 곧아야 돼요. 왜? 그래야 무거운걸 들 수 있기 때문에. 무거운걸 들어야 그 사람은 직장에서 일 많이 한다는 에너지 필요한 에너지를 제공한다고 해서 살아남으니까 살아남은 이 사람 식구가 세 식구라면 이 사람은 직장에서 척추가 곧아서 들고 하는 일, 이거 잘해서 가족들이 살았으니까 생존=뭡니까? 생존=착한 일 되는 거에요. 이게 ‘자본주의’입니다.
자본주의는 돈=뭐가 된다? 착한 일. 자본주의 사회에서 좋은 아버지가 뭡니까? 자식에게 잔소리 하는 아버지는 안 좋아요. 명절날 모여서 자식들에게 야 너 돈 필요한거 없니? 이런 아버지가 제일 좋은 아버지에요. 잔소리 하는 아버지는 안 좋아요. 돈을 줘야 아버지에요. 누가 제일 좋은 시아버지 입니까? 며느리한테 용돈 안 받고 오히려 며느리한테 용돈 주는 시아버지 자랑스러운 한국인이에요. 최고입니다.
누가 좋은 하나님입니까? 부자 되게 하는 하나님이 최고 좋은 하나님이에요. 이게 어디서 나왔어요? 자아, 나라는 것이 계속해서 모든 것을 나부터 출발해서 그래요 나부터. 나는 어디에 속했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 싫어하는 이 세상에 속했거든요. 이 세상의 일부가 나에요. 나로부터 출발하는데 주님께서는 여기다가 완전히 직격탄으로 십자가로 해서 나는 죽으러 왔다. 너희는 살려고 하는 그 동네에 나는 죽으러 왔다. 자, 누가 진리냐 이 말이죠.
빌라도가 말합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죽은 놈은 그런거 묻는게 아니야. 성경에서는 반드시 질문을 해도 하나님부터 찾아가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모든 의미는 저쪽 바깥세상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의미를 제공함으로서 그 의미가 새로운 피조물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진리가 무엇이냐 해가지고 주님께서 삐져서 이야기 안 한게 아니고 처음부터 너는 질문할 대상자를 잘못 고른거에요. 질문을 해도 주님이 질문합니다. 왜? 주님이 씨 뿌리는 분이기 때문에. 빌라도가 씨를 뿌리는게 아니에요.
그럼 빌라도의 역할은 뭐냐? 이중 계약, 중첩 계약에 있어서 빌라도의 역할은 바로 저주를 유발하는 기능을 해야돼요. 진리 안에서 예수님은 모든게 진리인데 진리 안에서 빌라도나 바리새인들이 해야 될 역할은 저주를 더욱 더 저주되게 하는 겁니다. 그들의 역할을 잘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안 믿는 사람들이 욕하고 할 때 그거 대들지 마세요. 자꾸 그 사람 보지말고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거에요.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다 했으니” 로마서 14장이죠. 나는 믿음 있다 해놓고 이런 이야기 하면 안 되는데 갑자기 혼란스러운 이야기 나올 수도 있겠는데 여기에 보면 로마서 12장 19절에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누구한테 있습니까? 예수님한테 있지요.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왜 원수를 갚으려고 하느냐 하면 내가 주님이 주신 ‘기능자’라는 생각을 잊어버리고 내가 또 ‘자아’가 또 구축되어 버려요. 내가 이 정도로 믿음 좋고 내가 이정도로 주의 일을 많이 하고 있는데 나를 무시해? 이렇게 되어 버리면 갑자기 기능인에서 독자적인 존재로 또 돌변했어요. 사실은 그게 육이지만 사실 우리는 매일 그렇게 살지만. 매일 그렇게 사는 것 하고 지적하는 것하고 달라요. 우리가 그렇게 사는 것은 할 수 없지만 지적은 받아야죠. 그래야 성경말씀이 한번 말씀이 아니고 두고두고 계속해서 이 말씀 봐야돼요. 두고두고두고두고두고 계속해서 이 말씀이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다 계속해서 그걸 봐야 된다 이 말이죠.
원수를 갚는 다는 말은 이미 우리가 뭘 내고 있다? 화를 내고 있다는 겁니다. 오늘 이거 하고 마치겠습니다 이 이야기로. 화를 내고 있을 때 인간은 이거는 수련회 할건데 미리 해봅시다. 인간은 인간이 다룰 수 없는게 있어요. 그게 뭐냐 ‘충동’입니다. 화 나는 것을 나는 화 안 난다 화 안 난다 화를 참아야돼. 이런다고 화가 안 나는게 아니에요. 누가 화가 난다 누가 사랑스럽다 누가 밉다든지 이것은 인간이 자아가 손댈 수 없는 영역이에요.
그래서 왜 그러냐 하면 ‘자아’라는 것이 의식에서 남과 만날 때 자아거든요. 오늘 여러분 좋은거 배웠지요? 자아는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고 남이 있을 때 그걸 남들을 의식해서 내가 옷을 이렇게 느끼는거에요. 배고플 때는 그냥 배고픔만 느낄 뿐이지 누가 배고프냐? “저요”하고 손 든단 말이죠. 나 이전에 뭐가 있다? 의식 이전에 뭐가 있어요? 무의식에서는 충동이 있어요. 충동은 몸의 차원이에요. 몸은 나에게 물어보지 않습니다.
여러분 의사들이 반사 신경할 때 앉혀놓고 무릎을 탁 치게 되면 이렇게 발아 들려라 해서 들리는거 아니잖아요. 그냥 들리죠. 우리는 90%가 몸의 익힘 과거 역사의 몸의 익힌 반사에 의해서 행동하게 되어 있어요. 반사에 의해서. 어떤 여자가 아름답다 할 때는 분명히 자기 어머니와 닮았다든지 자기가 좋았던 기억을 거기에다가 엎쳐서 좋게 보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모든 인간은 보수적이란 말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보수적입니다. 한번 했던 관행을 그대로 가는게 있어요. 한번 좋았던 사람은 어지간히 나쁜 짓 해도 그 사람을 보호하려고 해요. 보호하려고 해요. 특히 자식 같은 경우 어지간히 잘못해도 음주운전해도 감싸려고 합니다. 너는 자식 안 키우나!! 이렇게 해가지고 손대지마라. 내 자식 잘했다. 너 몇 대 맞았어? 두 대 맞았어. 너는 몇 대 때렸어? 5대. 잘했어 잘했어 내 새끼 잘했어. 보수적입니다. 모든 인간은 보수적이에요. 자기가 자기 스스로 본능상 자기 지킵니다.
무엇을 지키는가? 홀로 살 때 필요한 것들을 지켜요. 남 없어도 나 혼자 버틸 수 있는 역량 키우는데 그걸 보수적으로 지키는 겁니다. 인간이 참 못 됐어요. ‘천상천하 유아독존’ 그야말로 ‘마귀’에요 마귀. 자기 밖에 몰라요. 맨날 ‘건드리지 마라’ 하거든요. 그런데 사랑이 나와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이 사랑을 의식해서 받아가지고 뭐냐 하면 ‘나를 위한 사랑.’ 이 사랑이 나를 위한 사랑이 되어 버립니다 나를 위한 사랑.
제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이거에요 시간 다 됐으니까. 이 세상은 나 위해서 존재할 때만 좋은 세상이에요. 모든 인간은 다. 이 세상 돌아가는 것이 나를 위할 때만 이 세상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충분하게 죄를 지어야 돼요. 내가 생각 못한 깊이 있는 죄를 우리가 인식해야 됩니다. 이왕 구원받았는데 뭐. 이왕 망한 사람은 두 번 다시 안 망하거든요. 이미 망했기 때문에 우리는 뭐든지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자기 힘으로 바깥에 못 나오고 구원받지 못하고 스스로 구원받으려고 한다며 여기에 누가 기다리냐 하면 여기에 악마가 우리를 그 다음부터 힘들게 만들어요. 오늘 너 죄 5개 지었어. 착한일 6개 해야 된다. 너 때문에 눈물 흘린 사람이 7명이였다. 네가 7명의 눈물을 너 혼자 다 흘려야 돼. 안 그러면 네가 돈으로 갚아주든지. 너 때문에 자식이 망쳤으니까 네가 책임져야지. 책임감 회개 반성 이게 악마가 인간을 구원을 차단하는 주특기입니다 방식이에요.
우리에게도 그게 먹혀들어갑니다 우리에게도. 유혹같은 경우 우리도 먹혀들지요. 그런데 그렇게 예수님께서 악마가 그렇게 하게 함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성도는 더욱 더 신자 되게 만들어요. 주께서 악마로 하여금 이 세상을 지배하게 함으로써 성도로 하여금 더욱 더 성도되게 하고 성도인 척 하는 인간들은 기어이 주님 총 겨누고 주님을 떠날 수밖에 없게 만들어요. 왜? 그것이 바로 마음의 밭이 그랬어야 되니까 마음의 밭이.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은 진리라든지 주께서 하셨다 하는 이것이 우리 죄 속에서 오늘 보았던 요한복음 18장 이 내용이 매일같이 이것이 반복해서 반복해서 우리를 통해서 은사로 발산되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이 살아서 우리 몸을 통해서 나타나는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주님 아니면 내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죄인 입장에서 죄인의 괴수 입장에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허투로 말씀 주신게 아니고 그냥 취소될 말씀도 아니고 비현실화된 말씀도 아니고 실제 이 세상에 지금도 작용하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주님과 우리 사이에서 주님의 일방적인 찾아오심과 이끌어주심과 일 시켜주심이 우리를 통해서 더욱더 예수님 살아있음을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