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81012a야4장6절(마귀대적)-이 근호
안양20181012a야4장6절(마귀대적)-이 근호
야고보서4장6절입니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찌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그리 되어있습니다. 방금 한 이야기 따지게 되면 복잡한 이야기가 많이 있는데 간단히 이야기하면 이겁니다.
‘당당하라’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고개를 들라’ 숙이고 살 필요 없다. 좀 더 신나게 이야기하면 이거에요. 뻔뻔하라. 대차라. 그런 뜻이지요. 뻔뻔하라. 대차라. 당당하라. 그럼 왜 그러냐 하면 세상은 마귀가 쥐고 있고, 우리는 그 마귀의 족쇄에서 마귀의 권세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은 사람하고 상대할 필요 없어요. 마귀하고 상대하고 마귀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마귀에게 눌려있는 사람은 당당 하라가 안되고 고개 들라가 안되고 뻔뻔 하라가 안돼요. 늘 조심해야 돼요. 조심해도 해결책 없어요. 하여튼 조심해도 쫓기고 또 쫓기고 쫓기는데 왜 그러느냐 하면 악마가 인간의 약점을 갖고 있습니다. 악마는 천사에요. 악마라고 하니까 얼굴이 시커멓게 생기고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냥 천사입니다. 천사인데, 예수님께 대들어요. 악마가 종교를 만들 때 하나님을 섬기라고 만들었어요. 누구는 제키는가 하면 예수님은 감춰버려요. 왜, 악마의 적은 예수님이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 찬양하세요.” “하나님 섬기세요.” 하면 마귀가 즐기고 좋아하는 거예요. 막 후원해 줍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 딱 나오면 악마는 안 그래도 시커먼 얼굴 더 시커머지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돌이거든요. 사람에게 버림받은 분이 메시아라면 사람에게 일체 희망이라는 게 없기 때문에 악마로서는 인간을 다룰 수 있고 지배할 수 있는 건더기가 날아가 버려요. 인간을 협박을 해줘야 돼요.
협박을 하려면 하나님 섬기는데 뭐하고 있느냐 빨리 이렇게 부추겨야 되는데 닦달내야 되거든요. “하나님이 당신을 창조했습니다. 당신을 지었습니다. 이제 죽으면 하나님을 만나는데 이런 식으로 살 거예요?” “이제는 모든 걸 버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자꾸 뒤에서 독촉을 하는 겁니다. 자꾸 밀어붙이지요. 떠밀 듯이 하고 하나님이 영광 되는 거 3가지가 있어요. 진.선.미에요. 진실하고 아름답고 선하고. 이 3가지를 가지고 계속 밀어붙입니다.
진선미는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BC500년경에 플라톤에서 나온 거예요. 플라톤이란 철학에서 나온 겁니다. BC500년에 헬라철학, 그리스철학이라 하는데 소크라테스 이후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쪽에서 나온 겁니다. 왜 나왔느냐 하면 그 당시 도시국가인데 도시국가가 매일 전쟁만 했어요. 그리스 시대에. 아테네 근처에 서쪽에 가면 그 쪽 도시들이 많거든요. 산이기 때문에 작은 소규모였어요. 싸움하니까 나중에 싸우다가 지쳐버렸어요. 환멸을 느낀 겁니다. 환멸을 느끼니까 그 때 나온 전쟁이 지겹다! 할까요.
남의 것을 잡는 이유는 노예 때문에 해요. 노예를 확보하기 위해서. 요새 말로 노동력 확보. 해외 근로자 확보하는 거예요. 그것처럼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전쟁을 하는데 하다 보니까 그냥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본인들도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말이죠. 그러니까 다들 지친 거예요. 지쳐가지고 국가가 어떻게 될 것인가가 우선시 됐던 것이 내가 어떻게 하면 행복할 것인가에 관심이 있었어요.
내가 어떻게 행복할 것인가, 출발점은 뭐냐 하면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 행복하다는 그 당시에는 다신이기 때문에 그리스, 헬라 신들이 있잖아요. 신이기 때문에. 전에는 신에게 제사를 드렸어요. 그걸 신탁이라 합니다. 신탁에서 무녀들이 이상한 마약을 섭취해가지고 오는 고객들에게 점을 쳐주는데 그 델포이 신탁의 현관문에 있는 글이 뭐냐 하면, 니 자신을 알라는 겁니다.
그걸 누가 인용했느냐 하면 소크라테스가 인용한 거 잘 아시지요. 니 자신을 알라. 니 자신을 알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 자신의 본질을 알아야 행복하다는 뜻이 아니고 신 앞에서 너는 너를 알라는 겁니다. 신 앞에 서거든.
여러분, 구약 성경에 이방민족들이 나오잖아요. 이방민족의 특징은 그 때는 민족국가를 하나로 봤으니까. 우리민족을 신이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의 본성의 보편성은 뭐냐 하면 결국 인간 속에 뭐가 있다는 말이에요? 누구나 신성의 보편성이 있다고 여러분이 아시면 돼요. 로마서1장21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이게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이방민족을 포괄해서 다 이야기하는 겁니다.
불교도 신이 있잖아요. 처음에 부처는 인간이었지만, 그 부처를 삼위일체로 만들었어요. 불교에서. 법신 이렇게 해가지고. 부처 자체에서 부처를 초월해서 삼위일체가 되는 거예요. 항상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의 정신의 극치는 뭐냐 하면 신이에요. 신인데, 그 모델을 누가 하느냐 하면 인간을 모델로 삼아서 신이 되는 겁니다. 인간의 모델.
나 닮은 신. 나는 부족하지만 나를 닮은 나의 모든 것을 채워주는 월등한 신. 이것은 불교도 마찬가지고 모든 종교가 마찬가지고 심지어 종교가 없는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종교가 없는 사람은 노골적으로 본인이 신이지요. 나 건드리지 마라. 술집에 술 먹는 사람들 보세요. 전부다 나 건드리지 말라고 술 먹잖아요.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요. 딸 시집 보내려하거든 남자 3가지 안하는 남자한테 보내야 한다. 술, 담배, 낚시 이 3가지만 안하면 된다.
술 먹으면 허세 허풍 늘고, 술 먹으면 술친구 만나고 술친구 보증 서 달라 이야기하고 그래서 집안 다 말아먹어요. 아예 술친구를 안 만나야 돼요. 술, 담배 친구를 안 만나야 되고 낚시는 뭐냐 하면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총각 때 취미를 이어가는 사람들. 스포츠 좋아하는 사람들 이런 거요. 그러면 안 되지요. 오토바이 타고 해가지고 과부될 일 있습니까. 안 되지요. 그런 총각이 없어서 문제지만.
모든 인간은 나를 건드리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섬기는 신이 자기를 건드리면 인간은 어떻게 할까요? 신을 바꿔버려요. 그래서 다신이에요. 그래서 신이 많아져요. 로마, 그리스 신화에 보면 신이 굉장히 많습니다. 인간과 신 사이에는 이건 하나의 교양이니까. 인간과 신 사이에는 어떠냐 하면 인간과 신 사이에 그냥 그대로 똑같이 가는 거예요. 인간이 인간을 다룰 때의 방식과 인간이 신을 다룰 때의 방식과 똑같아요. 그래서 그 인간 다룸을 표시한 것이 창세기 6장에 보면 신의 아들이 인간의 딸을 좋아해가지고 혼인했다고 나와 있어요. 이 대목은 사람들이 어떻게 해석할 엄두가 안 나는 거예요.
그런데 구약에서는 이 본문은 굉장히 쉬운 본문이에요. 구약 그 당시에는. 모세 당시에는. 왜냐하면 신의 아들은 주로 국가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요새는 재벌3세 급들 입니다. 모든 자연에서의 가뭄이나 태풍이나 이런 혜택에서 모면하려면 신에게 잘 보여야 되거든요. 그 신에게 잘 보이는 것은 위에 계급이 높을수록 신과 첫 번이 되는 겁니다. 그들의 자녀들이 신의 아들이에요. 그들의 자녀들이. 이건 따라하는 것은 천한 자들의 딸이에요. 옛날에는 계급화 되어가지고 신의 아들은 소위 고급진 아들은 고급진 집안끼리 결혼하고 아랫동네는 결혼 안 해도 되는데 여자들을 이렇게 함부로 결혼해가지고 자식들을 낳았다 말이죠.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그렇게 자식들을 낳게 되면 그 국가가 점점 더 인간 영웅 중심으로 나아겠지요. 영웅중심은 라멕이라 해서 방금 이야기한 것은 창세기6장이고 4장에 보면 가인의 족보가 나와요. 가인의 족보의 특징은 뭐냐 하면 눈에 보이는 인간이 마치 신의 노릇을 하는 겁니다. 백성들은 사람들은 신을 보고 싶어 하는데 자기가 노골적으로 신이라 이야기를 하지 않아요. 신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해요. 임금을. 왕을. 이제 다 풀렸지요. 신의 아들로 이야기한다고요.
지금도 아프리카나 미개한 민족이나 심지어 선진국도 마찬가지지만, 대통령이란 왕을 신의 아들로 치찮아요. 대표적인 것이 태국 아닙니까. 그리고 그것보다 약간 약하지만 일본 천왕, 영국은 뭐 별로 인정하지는 않지만. 태국 같은 곳은 왕의 말장난한다고 징역10년이에요. 존엄한 분이란 말이죠. 또 있네요. 북한 김정은. 우리가 이 땅에서 지금 50, 60 사는데 인생을 살아보면서 내 가정, 내 자식들 키우고 이것만 생각하는데 약간 범위를 넓혀보게 되면 세상이 구성이라는 게 어떻게 구성되어 있다 하는 것은 성경에 제가 이리 이야기하니까 또 로마 이야기하니까 그리스 이야기하니까 뭐 별로 변한 거 없지요.
세상 하나를 신이 주신 그러한 나라로 만들고 신이 있다고 염두에 두고 거기에 대한 흉내 내기. 모방하는 것으로 한 살 때부터 지금까지 죽 살고 있습니다. 죽 살고 있어요. 누가 나를 신이 지켜준다든지 이런 거. 그런데 진짜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가지고 추방될 때, 추방됐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모든 구성 체계 있잖아요. 인간이 편하게 친근하게 아무 반발 없이 받아들였던 이 정신사고 체계가 누가 이거 거짓말 한 거다 말이지요. 누가.
배후에 어떤 존재가 이걸 사기를 친 거예요. 신이 있고, 신이 우리 민족을 키웠고, 우리가 태어난 것도 신의 뜻이고. 이 모든 이야기가 이건 부담 없이 받아들였는데 부담 없이 받아들인 이 자체가 뭔가 지금 우리가 진짜 놓치고 있는 거예요. 가짜한테 속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이걸 성경에서 보니까 진실이 등장하지요. 악마가 그동안 꾸준히 인간을 속여 온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그 악마를 대적하라 할 때에, 첫 번째 등장하는, 어쩌면 제일 중요한 이야기인데 지금 하겠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악마를 대적할 때에 개인으로 대적하면 안돼요. 개인으로. 집단으로 대적해야 돼요. 집단. 교회 자체가 집단이기 때문에. 이걸 지금까지 어떻게 가르쳤냐 하면 “니 개인이 신앙력으로 이겨라.” 이렇게 가르친 거예요.
악마를 개인이 달려들면 웃기는 이야기에요. 모든 개인은 이미 악마한테 이미 지게 되어있어요. 다윗이 골리앗과 붙을 때, 다윗은 결코 혼자 이긴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긴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 단체가 있어요. 자기 집단이 있다 말이죠. 개인이 집단화 될 때는 개인 + 개인 모은다고 집단 되는 게 아닙니다. 개인이 죽어야 집단 돼요.
왜냐하면 집단은 인간들이 우리 팀 모아라 해서 집단이 아니고 주께서 따로 모아놓은 집단이 있어요. 그게 교회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같이 모은다고 힘이 생기는 게 아니에요. 그건 악마가 되게 좋아하는 거예요. 자, 다 오셨으니까 다시 하겠습니다.
악마를 대적하는 것은 개인이 대적하는 게 아니고 집단이 대적하는 겁니다. 제일 중요한 거예요. 오늘 강의에서. 내 이름으로 악마야 물러가라. 안 물러갑니다. 이미 개인으로 구원받는 것은 악마가 그동안 가짜 구원으로 계속 세뇌시킨 가짜 구원이었습니다. 내 개인이 구원받는 것은. 우리의 구원은 개인 구원이 아니고 집단구원입니다.
개인구원이 집단구원으로 가려면 개인의 가치는 날아가 버려야 돼요. 내 훌륭해서 내 구원받고 내 믿음 좋아서 구원 받는 거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소속이 되어야 돼요. 그 소속이. 이건 신약뿐만 아니고 구약 내내 이야기해왔던 겁니다. 구약 내내. 이스라엘이 되지 아니하면 구원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집단입니다. 개인이 아니에요.
야곱이 자식이 몇 명입니까? 12명이지요. 12지파인데 집단 됐지요. 야곱에게 구원의 체계를 준 게 아니고 야곱의 자식들에게 이 집단에게 하나님께서 뭐냐 하면 내 택하신 아들이라고 한 거예요. 아들들이 아니고 아들이라고 한 거예요. 아들이라 할 때는 이게 집단적 개념이에요. 집단적 개념.
그동안 우리는 내 개인이 악마를 이기려고 대적하려고 덤벼들었다 말이죠. 백전백패지요. 개인 같으면 뭘 유지해야 돼요? 개인의 가치, 개인의 의미, 개인이 살고 싶은 생존의 바램, 희망 이거 다 있잖아요. 이건 악마의 밥입니다. 그거 아무 소용없어요. 개인에서 집단 되려면 여기서 이미 집단화 시킨 구성, 집단을 집단으로 구성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되는데 그 힘을 로마서4장에서는 은혜라고 합니다.
이 은혜가 나 개인에게 오게 되면 개인의 자격으로 이 집단, 교회에 가는 것이 아니고 “너, 원래부터 이 집단의 일원이었어.” 라는 소식과 더불어서 개인의 모든 가치와 개인의 의미는 사라지고 죽고, 이미 집단된 것을 눈뜨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겁니다. 그게 구원이에요. 내가 기도해서 내가 응답받는 그런 건 성경에는 없어요. 반드시 성경의 기도는 집단기도입니다. 이게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성도들의 기도가 제단한테 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 성도라 하는 것은 개인을 성도라 하지 않습니다. 144000이란 집단의 숫자로서 성도를 표시한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가 이야기하는 게 딱 마귀가 전달해준 그것만 그대로 발설하고 있어요. 마귀가 전달해준 것만. 마귀가 목사한테 가가지고. “야, 고객들 지 잘난 체하고 싶어 환장했다.” 목사부터 계속해서 “이렇게 하시면 당신은 훌륭한 신자 됩니다.” 하고 계속 알려주는 거예요.
은혜라는 것은 항상 처음 태어났다는 그 기쁨에 만끽되어야 됩니다. 그러면 자, 개인에서 집단으로 가게 되면 우리는 죽었다고 그러는데 죽었다 하면 숨 쉬지 말라는 말입니까. 송장되라는 말인가, 이런 뜻인데 성경에서 개인이 죽었다는 말은 개인을 그려보겠어요.
개인이 있지요. 개인 안에 집단성이 안에 들어있어요. 집단성은 살아있고 개인은 집단성이 부각되다 보니까 이 개인은 존재 의미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전에 이걸 이야기했지요. 우리를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운반체’ 성도는 운반체에요. 본인의 가치를 전달하는 게 아닙니다. 본인만 있으면 본인의 가치만 내세울 수밖에 없지요. 성도 아니지요. 그건 도 닦는 사람이에요. 나 이렇게 살았다고 지 자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안되지요.
우리의 의는 안 받습니다. 주님의 의를 받아요. 따라서 우리가 운반해야 될 운반체는 우리의 의가 아닙니다. 나 말고 나보다 못난 사람도 천국 보내는 그런 집단적으로 보편적으로 다 적용되는 주님의 의의 운반체입니다. 그래서 이 운반체라는 말이 편하지만 더 알기 쉽게 이야기하면 성도는 뭐냐 하면 택배기사에요.
택배기사의 특징이 뭐냐, 바람이 부나 눈이 오나 날씨가 추우나 상관없이 내 물건 아닌 것을 누구에게 전하라고 하는 그 임무에 대해서는 주님이 양보도 없고 봐주는 것도 없습니다. 이 핑계 저 핑계대지 마세요. 뭐 집안이 어려워서, 뭐 남편이 방해해서 되지도 않는 소리 하지마세요. 반드시 택배기사는 이 물건이 내 물건이 아니고 주께서 십자가로 피로 흘린 물건이기 때문에 우리는 운반체거든요. 택배기사 직원이다 말이죠.
반드시 택한 백성에게 같은 집단 일원이지요. 나는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걸 전달해야 됩니다. 그런데 배달사고 나면 안돼요.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전하라는 것을 그 물건을 전해야 되지 내가 만든 것을 가지고 전하면 안돼요. 간증집회 상당히 주의해야 됩니다. 나를 본받으라 하면 안돼요. 왜냐, 또 개인으로 돌아섰기 때문에.
그러면 이 택배기사에 대해서 이걸 악마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가만두겠습니까? 방해 놓겠습니까? 온갖 방해를 다 놓는 거예요. 방해 놓을 때 뭐냐 하면 “니 개인의 가치를 놓치지 말라.” 이걸 모토로 끌어낸 겁니다. “니 그러면 망가져.” 마귀가 제일 크게 협박하는 모토가 뭐냐 하면, “이리 살다 망신살 당하면 어쩌려고?” 이런 것. 이 망신살이 인간 개인에게 평생을 따라다니면서 악마가 주는 협박성 개념입니다.
인간은 왜 사느냐 망신 안당하려고 사는 거예요. 망신이란 말은 뭐냐 하면 개인이 개인으로서 자기의식이 아주 응축이 되어있을 경우에 망신이 더욱 더 깊어져요. 나 여기 있고 외부가 뭐냐 하면 타인이 있어요. 나는 타인에 둘러싸인 거예요. 그러면 나를 지키면 지킬수록 타인의 눈은 더욱 강렬하게 내가 요청하는 오류를 범한 거예요. 요청한 모순관계에 있는 거예요. 내가 나에 대해서 더욱 더 절실하게 내 것을 간직하게 되면 타인의 존재가 강렬하게 더 의식이 돼요.
‘야, 이거 자랑해야 되는데.’ 아들 미국 가서 성공했다 하면 이거 자랑 못하면 속이 열불 나서 안돼요. 나기 때문에 이때는 뭐냐, 작은 교회 다니는 것보다 큰 교회 다니는 게 유리해요. 왜냐하면 우리 아들 미국 가서 변호사 됐다. 이걸 큰 교회에 크게 퍼드리면 영향력이 크잖아요. 이걸 개척교회 2, 3명, 5명 있는 교회에 해봐야 이건 티도 안 나. 그런데 단점은 뭐냐 하면 망신살 되었을 때에 큰 교회가 불리해요. 이건 망신살이 너무 유명하기 때문에 빨리 작은 교회로 숨어들어가야 돼요. 큰 교회에서는 뒷자리 왔다 갔다 해야 돼요.
개인이 개인을 계속 쥐고 있는 한 이건 악마의 꼬임에 더욱 깊이 함정에 계속 빠지고 있는 겁니다. 조마조마할 수밖에 없어요. 계속 잘되어야 되고 못되면 망신살이 뻗은 거죠. 자기 아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연예인들이 왜 마약하고 연예인들이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아갑니까? 인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인기가 떨어질까 싶어서. 처음부터 인기 없었다고 생각해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인기 맛을 봤다가 그게 없어지니까 나는 이제 무슨 낙으로 사나. 그런다 말이죠.
그걸 보면 안 유명한 인터넷 이름 쳐도 뜨지도 않는 이런 공포에 사람들보다 아주 편하지요. 묻혀 사는 사람이 그렇게 좋아요. 남편이 유명인사 돼가지고 검찰청해가지고 모자 눌러쓰고 이래가지고 별로 안 좋아요. 검찰청 백날 왔다 갔다 해도 신문기자 한명 안 오는 게 좋아요. 개인은 몸이 하나이기 때문에 항상 악마로부터 몸을 중심으로 해서 너 개인의 가치에 대해서 악마가 계속 독려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아무리 촌에서 박혀 살아도 일가친척 몇 명은 되잖아요. 그러니까 그 사이에서 뭐가 있습니까? 나름 망신살이라는 게 있어요. 집안 대소사하게 되면 또 소문 돌면 안 되잖아요. 니 얼마나 못났으면 장가를 못 갔으면 필리핀 여자하고 결혼했나. 이렇게 그런 것도 촌에 가면 이게 망신살이 될 수 있어요. 우리 집안이 뼈대 있는 집안인데 이래가지고. 이 소리 촌사람 들으면 또 욕하겠다마는. 어쨌든 간에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화를 낸다는 자체가 이미 자의식에 너무 빠져있다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를 감당이 안돼요. 내가 나에 대해서 감당이 안돼요. 하루 왼 종일 24시간 직장에서나 집에서나 항상 자기만 생각하고 있어요. 자기만. 이것은 남한테 뭐냐 하면 내거 어떻게 남한테 잘 보일까 하는데 주님은 뭡니까? 니 거가 아니고 니 안에 니가 만든 거 말고 주님이 집어넣은 게 있어요. 우리는 운반체고 택배기사다 말이지요.
운반체니까 이걸 누가 아느냐 하면 악마가 알고 있어요. 그래서 여기에 7절 봅시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되어있지요. 마귀를 대적하라 할 때 제가 강의 처음 할 때 뭐라고 그랬습니까? 당당 하라. 그 다음에 뭐라고 그랬지요? 고개를 들라. 좀 낯짝 두꺼워라. 이런 뜻이거든요. 이게 뭐냐 하면 나는 그냥 택배기사에요.
지금 중요한 것은 내가 안 중요하거든요. 지금까지 결론내리면 나는 하등 내가 안 중요하다는 생각을 견지해야 돼요. 그게 마귀를 대적하는 방법입니다. 나는 하등 중요하지 않아요. 자, 내가 안 중요하다면 나와 관련된 사람들 안 중요하겠지요. 내 자식 안 중요해요. 내 남편, 내 아내 안 중요해요. 내 교회, 내 직장 안 중요해요. 내 인생 안 중요해요. 내 과거 권력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택배회사 기사기 때문에 그거 뭐 택배 받는 사람이 아저씨 고향 어디에요? 이런 거 안 묻겠지만, 애가 몇 명입니까? 도와주려고 하면 몰라도 그거 안 묻잖아요. 물건 봅시다. 이리 하잖아요. 우리 집에 오는 택배기사는 얼굴도 안 봐요. 문 툭툭 두드리고 앞에 보면 택배 와있어요. 왔다 갔어. 물건 보니까. 툭툭 두드려 놓고.
우리가 그렇게 나를 귀신처럼 여겨야 됩니다. 나를 산송장처럼, 나는 죽은 존재가 되어야 돼요. 그래야 악마가 주먹으로 때려도 이게 허공을 때리는 거예요. 나를 때리는 것이 마치 허공을 때리는 것처럼 되어야 돼요. 우리는 남이 주는 시선에 아프면 안돼요. 야, 오늘 참 어려운 걸 요구한다. 제가. 아프면 안돼요. 남이 욕하는 거, 뒤 담화 듣고 그걸 잠 못 들면 안돼요. 그건 평소에 내 역할을 지금 안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운반체인데도 불구하고 택배회사 기사인데 불구하고 지가 뭐 공장장인 줄 착각하는 거. 하나님은 내 인간성보고 구원하는 것처럼 자꾸 그런 착각을 하는데 마귀가 온 인간을 다룰 때 바로 그 방식을 사용하는 겁니다.
그건 지금까지 죽 이야기했지요. 인간에게는 누가 있다? 신이 있다. 신의 모습은 누굴 모델로 했다? 우리 자신을 모델로 삼았다. 마치 인간이 인간을 다루듯이 우리는 하나님을 다른 사람 다루듯이 다른 사람과 관계하듯이 하나님의 신을 그런 식으로 관계했는데 그게 뭐냐 하면 로마, 그리스 신화였고 구약 성경에 나오는 구약의 이방민족이라 했지요.
그러나 구약에서의 하나님에게서 보시는 것은 죄인이 아니고 집단이 돼요. 집단. 이스라엘은 집단이에요. 집단의 이름으로 그들은 출애굽기19장 너희는 거룩한 내 백성이에요. 백성. 죄인 아니지요. 백성이지요. 백성이란 개념은 복수개념이에요. 다수개념이에요. 개인개념 아닙니다. 내 백성이라. 내 백성.
예수님도 이야기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왔다. 이스라엘 중에서 그 빠진 부분을, 빠진 대목을 보충하러 왔다는 겁니다. 참, 야고보서4장 7절에 이 마귀이야기 안 나왔으면 정말 우리는 계속 속을 뻔 했잖아요. 내 훌륭하면 천당 가는 줄 알고. 내 훌륭함에 전력을 다하고 평생을 내 훌륭한데다가 투자를 다한 거예요.
기도해놓고 하나님 기도했습니다. 또 티내고. 헌금해놓고 잘 보세요. 카메라 찍었지요. 헌금했습니다. 나, 전도 5명했습니다. 계속 자기관리와 자기 완벽함, 자기 충실, 완전한 자아 만들기, 그러니 뭐 마귀의 밥이지요. 밥.
마귀를 어떻게 이깁니까? 공포라는 거, 겁이 난다는 거, 전부다 뭐냐 하면 이게 귀신이 들려서 그래요. 완전히 죽은 귀신 되면 이미 죽었잖아요. 죽었는데 더 죽을 리는 없지 않습니까. 팔팔한 산 낙지가 되어서 그래요. 진짜 소금 쳐서 주께서 죽여야지요.
그러면 4장 7절에 보면 마귀가 현존하고 있다는 그 이야기하는데, 소위 교회 몇십년 다녀도 상당히 우리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뭐냐 하면 마귀가 살아있다는 겁니다. 뭐 모르는 사람 누가 있겠어요. 교회 다니는 사람 다 알지요. 아예 안 다니는 사람도 알아요. 마귀 살아있다. 어디에? 어떻게? 마귀 살아있다며? 마귀 살아있는지 언제 봤어? 또 어디에 나타나는데? 혼자 새벽 막차 끊겨서 혼자서 걸어올 때, 조용한 길을 걸어올 때 마귀가 처벅 처벅 따라오고 뒤돌아보면 없어지고 이런 거. 드라마에 보면 그런 거. 꼭 범인은 모자를 써. 모자를 쓰고 따라오잖아요. 그거 마귀입니까?
마귀한테 쫓기고 하는 것은 그것은 뭐냐 하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내 인생을 내가 지키겠다는 백성개념이 아니고 나 개념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잡귀신, 군대귀신 지가 불러 모은 거와 똑같아요. 내 생각하고 집에 있으면 그 집에 띵동~ 해가지고 잡귀신 한 열대마리 벌써 들어와 있어요. 내 생각에 몰두해가지고.
그러면 그 귀신을 우리가 어떻게 대적하고 물리칠 수 있는가, 그럼 마귀 만남의 반대말이 뭐냐, “당신을 보면 경탄이 일어납니다.” 내가 아니고 마귀에 대해서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당신을 보게 되면 경탄이 일어난다. 이 말은 뭐냐 하면 같은 백성을 만나서 그 사람이 은혜 받은 걸 생각한다면 마귀가 살아있는 것보다도 더 월등하게 주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또 다시 확인하게 되면 어느새 마귀는 어두운 그림자는 그 집에서 없어져요.
성도가 와가지고 나 이렇게 복음도 모르고 나 이렇게 엉터리로 살았는데 복음을 알고 난 뒤에는 “아휴~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하다니!” 듣는 순간 집에 들어왔던 열대마리 나갔어요. 왜? 나로부터 떠난 이야기잖아요. 내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내 이야기가 아니란 말이죠.
뭐가 경탄스럽냐 하면, 성도가 실제로 있다는 것이 경탄스럽고 감탄할 일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성도가 십자가 피로 모든 죄를 용서받아서 다 이루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 생겼다는 그 자체가 더 이상 내 인생에 구애받을 필요 없다. 오늘 죽어도 낙원에 간다는 그 기쁨으로 산다는 이런 사람이 있어버리면 성경 말씀 자체가 살아있기 때문에, 성도 자체가 살아있기 때문에, 마귀는 뭐냐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악마는 인간의 약점을 알고 있고, 주님은 악마의 약점을 알고 있어요. 그럼 우리는 주님 편에 섰기 때문에 악마가 내 약점을 개인적인 약점을 막 쑤실 때에도 우리는 고개를 들어야 돼요. 당당해야 돼요. “아휴~ 지적 잘하시네요. 아이구 옳은 소리만 다하지.” 이러면서도 싱글 싱글 웃어야 된다니까요. “아휴~ 나는 매일같이 망신살 당하는데 어떻게 알았어요?” 이런 거. 마귀가 “아이씨! 재미없어.” 협박이 통하지 않는.
나 자신을 보면서 감탄이 일어나는 거지요. 어떻게 나 같은 인간을 다, 아까 집사님이 말씀했잖아요. “주님, 실수하신 거 아니에요? 어떻게 나 같은 걸 구원하시다니. 실수하신 거 아니에요? 저, 뭐했다고 구원하십니까?” 야고보서에 나오는 하나님은 기존의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하나님이에요. 그냥 주님이라 보시면 돼요. 그리 알면 쉬워요. 야고보서의 하나님.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게 아니고 마귀의 대적자는 예수님입니다. 왜냐하면 악마는 계속 인간들을 자기 종으로 부리듯이 숨었고, 품었고, 예수님은 품었는데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받고 성공함으로 십자가로서 빠져나갔잖아요. 빠져나가신 분에 의해서 백성이 됐다는 말은 악마가 더 이상 그 인간을 다룰 수 있는 어떤 허점이나 약점을 가질 수 없어요.
성도가 만약에 온 몸에 참기름을 발랐다고 봅시다. 그러면 손을 잡으면 이게 미끄러진다니까. 어떻게 잡아서 흔들어서 이걸 괴롭혀야 될 텐데 미끌미끌해. 시비 걸어서 앞다리, 뒷다리 걸어서 넘겨야 되는데 성도는 말하기를 나는 이미 죽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안 죽어봤지요? 만약에 의사가 아픈데 실수해가지고 죽었다고 칩시다. 자기는 잠시 잠을 잤는데 의사가 성질 급해서 따로 게임한다고 프로야구 본다고 정신나가가지고 그만 숨을 안 쉬니까 1분 안 쉬니까 죽었다 해가지고 그런 의사 없지만. 요새 의사는 기계가하기 때문에 없지만. 옛날처럼 그냥 죽었다 합시다.
죽었는데 자고 일어나니까 관이 되어있다 말이지요. 그래서 두드려가지고 옛날에 그런 사람 많았어요. 관에서 깨어난 사람 많거든요. 깨어났다 칩시다. 이미 죽음을 경험했잖아요. 요새도 그런 게 있어요. 수면내시경 같은 게 있어요. 이미 죽었어요. 죽고 난 뒤에 다시 깨어난 거예요. 깨어났을 때, 본인이 본인 인생 살아가는 게 아닙니다. 세상에서의 졸도해서 살아나면 또 꾸역꾸역 내 인생 살아야 돼요.
또 얼마 대출 받아야 되고, 이거 몇 평입니까 물어야 되고, 집이 지금 빚이 얼마고 은행 빚이 얼마고 계산해서 여기 올 수 있겠다. 합칩시다. 할 수 있는데, 이미 죽은 자 입장에서는 그 모든 그 사람의 하루, 하루 일과 스케줄을 죽였다가 살려준 택배기사 직원이기 때문에 회사 차원에서 사장님이 사는 형편을 알아서 조종해줘요.
중요한 것은 물건이 중요하기 때문에 어떤 때는 거지로 살아야 되고, 어떤 때는 부자로 살아야 돼요. 왜냐하면 물건이 중요하지 내가 얼마나 잘 살았느냐, 못 살았느냐 라는 것은 구원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이야기거든요. 있는 형편이 죽었는데 주께서 다시 살려서 이 자리에 오게 하셨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제가 말을 이렇게 하니까 지금 눈치가 목사님 우리가 무슨 재주로 그렇게 삽니까? 하는 눈치인 줄 아는데, 이건 우리 재주가 아니고요, 마태복음13장을 한 번 봅시다. 우리 재주 같으면 이거 성경공부 할 필요 없어요. 우리가 못합니다. 38절,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마귀 나오지요. 마귀가 지금 뭘 뿌렸지요. 그 다음에 19절,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 말은 뭐냐 하면 씨 뿌리는 사람이 뭘 뿌리느냐 하면 말씀을 뿌려요. 씨를 말씀이라 예수님이 말씀하셨거든요.
말씀을 뿌릴 때에 다른 인간들은 등신 같아요. 인간들은 돈이 중요하지, 말씀 안 중요해요. 그런데 누가 눈치가 빠르냐 하면 악마가 눈치가 빨라요. 그래서 말씀이 뿌려지면 돈은 안 건드려요. 건강도 안 건드려요. 집안도 행복하라고 놀러가라고 하는데 딱 뭐를 건드리느냐 하면 예수님의 복음에 대해서는 건드려버려요. 그걸 “니 들은 적 없다. 들은 적 없는 거야.” 하고 우리 머리에서 우리 뇌리에서, 마음에서 말씀을 빼앗아 간다는 말은 악마가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이건 인간선이 아닌 악마 선에서 이미 다 알고 있어요.
예수님께서 이걸 하나님이 하신 게 아니고 예수님이 이야기했거든요. 결국 예수님이 이 말씀하시고 이 세상에서 버림받아서 쫓겨났잖아요. 그럼 예수님이 한 것은 때가 되매 말씀에 응하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 죽었잖아요.
그러면 이 전 세상에 교회, 성당, 이 세상 자체에 대해서 악마가 무엇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은 악마가 알고 있어요. 그게 뭡니까? 십자가입니다. 교회부흥이 아닙니다. 예배당 짓기 아니에요. 교인들 은혜 받고 교인들 부자 되는 게 아니에요.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십자가를 기를 쓰고 속아내려고 하지요. 십자가 아는 교인들 속아내 버리고 십자가 아는 사람을 이단으로 취급하는 이유가 십자가 해버리면 교회 안 된다는 거예요. 너무 부정적이라는 겁니다.
부정적이고 교회 안 된다는 것은 무엇에 근거하느냐하면 바로 개인의 가치, 망신살 안 당하려고 하는데 있어서 이게 십자가와 매치가 안 된다고 해서 악마가 그렇게 협박하는 거예요. 십자가를 알면 개인의 가치가 완전히 없는데 니 그래도 좋으냐고 악마가 계속 들이미는 겁니다.
그런데 성도는 개인이 아니고 뭐냐, 백성이에요. 어떤 백성이냐 하면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새로운 집단의 기초가 뭐냐, 십자가에요.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죄 용서에요. 이걸 목사가 받아들이려면 목사가 뭘 포기해야 하느냐 목회를 포기해야 돼요.
“교회 안 돼도 좋으니까 주여, 이 죄인을 받아주시기만 하면 교회 날아가도 저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이 정도 되어야 그 십자가 아는 목사에요. 십자가 이용해서 교회하려고 하는 그건 마귀의 종입니다. 교인들 확보하려는 그 수작들입니다. 이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하면 굉장히 좋아해요. 그런데 그들이 복음을 알아서 좋아하는 게 아닙니다.
전에는 교회하고 자기 집 두 살림을 하다가 이제는 교회는 손 놔도 되겠다는 거예요. 이제는 내 집 관리, 내 자식 관리만 하면 된다는 거예요. 내 노후를 위해서 빌딩 사놨는데 이제 빌딩의 임대료만 관리하고 그것만 기도하는 거예요. 이쪽 교회 귀신이 아닌데, 저그 집구석 귀신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것도 개인적이잖아요. 그것도 개인적이라. 야! 헌금도 안 해도 된다. 이게 전부 다 자기 집만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 집만. 여러분 앞에 눈치도 없이 과감하게 이야기했습니다.
마귀가 바보가 아니에요. 인간이 교회라는 게 짐스러우면 어디 도피하는 줄 알아요? 그 도피안에 보면 또 자기가 개인이 절대화되어있습니다. 나라는 개인이 절대화되어있어요. 다른 방식으로 절대화되어있어요. 남편들이 나이 많아서 이제 낚시하러 가잖아요. 낚시 놓을 때, 집에서는 천덕꾸러기입니다. 청소할 때, “궁딩이 비켜라. 이 인간 나가지도 않고 친구도 없나.” 그럼 투덜거리면서 나가는데.
만약에 그 사람이 취미라 하면 낚시터에 가면 그 부인한테 설움 받던 거 거기가 아예 신나. 특히 등산을 좋아한다 하면 등산할 때 지가 제일 빨리 하고 “아이고, 어르신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신다.” 하면 이러면 또 기분 좋아. 특히 아주머니들 등산가서 운동하러 가는 게 아니에요. 가면서 살 빼는 게 아닙니다. 술 먹고 내려와요. 낮술 먹고. 지하철 이렇게 가보세요. 술 먹고 등산복입고 얼마나 많이 탄다고요. 그게 바로 마귀의 세상입니다.
항상 자기 개인밖에 몰라요. 악마가 말씀이라는 복음 그 말씀을 제키는데, 그럼 성도는 개인을 이야기하지 마라 했는데 또 나오는 질문은 “성도는 개인적으로 자기를 어떻게 관리해야 됩니까?” 라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지요. 그걸 위해서 뭐가 있느냐 하면 바로 요한복음4장에 보면 사마리아여인이 나와요.
사마리아여인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기 안에 우물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우물이 어떤 우물이냐 하면 목마르지 않는 우물이에요. 목마르지 않는 우물을 세자로 이야기하면 ‘새롭다’ 성도는 매일 삶이 새로워요. 그릇에 물을 반을 떠놓으면 손을 안대면 아침에도 반이 있잖아요. 저녁에도 반이 있잖아요. 만약에 저녁에 보니까 수면이 좀 올라왔다면 이거 진짜 신기한 일이지요. 우리에게 주는 은혜가 주님에 의해서 조금씩 수면이 올라가요. 우리가 보기에 똑같다고 보는데 주님은 똑같은 걸 가지고 새로운 것을 생산해 내는 솜씨를 발휘해버립니다. 똑같은 사람이 아니에요. 늘 새로운 삶이 되도록 하는 겁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물 길러왔다가 그 사마리아 여인이 그 다음부터는 메시아를 증거 하는 사람이 된 이유가 본인 뜻이 아니에요. 주께서 택배회사에서 택배 할 물건을 업그래이드 시켜주는 겁니다. 늘. 늘 어제보다 더 예쁘게. 더 참하게. 그리고 그렇게 하다 보면 참한 것을 전하는 본인의 전달하는 요것이 전에 보다 훨씬 더 많은 보람을 느끼는 거예요.
더 쉽게 말해서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당연한 걸로 여겼는데 가면 갈수록 이 세상에서 살려준다는 것만 해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살려주시는 것만 해도. 때로는 전쟁영화보고 난 뒤에 아~ 전쟁할 때 먹을 것도 없고 내가 전쟁하지도 않았는데 남이 벌려가지고 고생은 내가 하고 하는데 막상 영화관밖에 나와 보세요. 영화관에는 쏘고 시끄럽지요.
퉁퉁 퉁탕탕! 고지를 점령하려하는데 밖에 나오면 벌써 맥도날드 햄버거냄새 확 나면서 2층에 내려오면. 얼마나 고요하고 평화롭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평소에 맥도날드 냄새 안 좋은 줄 아는데 영화보고 전쟁 실컷 2시간동안 전쟁 상태에 완전히 정신이 빠졌다가 나오게 되면 평화라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지. 이게 새롭잖아요. 이 은혜가 얼마나 새로운지요.
나중에는 그 정도가 아닙니다. 죄인인데도 불구하고 살려주시는 그 은혜가 늘 새롭게 일어나게 되어있어요. 그게 바로 제2의, 제3의, 제4의 사마리아 여인이에요. 안에 우물이 가만히 있지를 않아요. 그런데 우물이 나 즐기라고 있는 게 아니고 퍼다 남한테 전달하라고 남한테 택배로 우물을 전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우물을 만든 겁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