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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강의20181026a 마가복음12장 38-13장 2절(지속의 혹)-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마가복음

광주강의20181026a 마가복음12장 38-13장 2절(지속의 혹)-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2장 38-44절 38절,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가라사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39절,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40절,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41절, 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42절,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43절,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절,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마가복음 13장 1-2절 1절,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몸이 있고, 예수님의 몸은 하나죠. 근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예수님의 몸에서 두 개의 종류의 몸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몸 있고 그 앞에 있는 몸을 빗금으로 치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의 실재성, 또는 말씀이 말씀답게 되기 위해서 새로운 몸을 상정하죠. 상정, 또는 설정하는 겁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몸을 가치가 돋보이게 해요. 내 몸과 다른 몸을 너희들도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몸과 다른 몸을. 그러면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하면,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 몸에서는 새로운 세계가 나옵니다. 새로운 세계의 전개. 만약에 예수님 배꼽 속에 뭔가 종이 같은 것이 있다면, 그걸 마술사가 입에서 색종이 뽑아내듯이 주님께서도 새로운 세계를 예수님 말씀을 통해서 이렇게 뽑아내는 거예요. 그러면 뽑아내기 전에 예수님의 세계는, 예수님이 뽑아내기 전에 예수님의 몸 안에 이렇게 담겨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그 세계를 알겠어요? 모르겠어요? 전혀 모르겠죠. 예수님이 나타나서는 그냥 너희들 사는 세계에 같이 살자는 식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타나서 내가 품고 있고 내가 소개할 이 세상은, 기존의 세상이 어떻게 된 세상인 것을 알려주는 것과 같이 병행해서 이게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세계가 이런 세계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반드시 이런 세계와 대치가 되는, 대척이 되는, 반대가 되는 세계를 예수님 말씀 속에서 이렇게 뽑아내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으면 그냥 인간들이 사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시면 우리 세계는 나쁘다, 좋지 않다고 우리가 그냥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근데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우리가 사는 세계는 엉망이야, 라고 이렇게 겸손을 떨지 말라 이 말이죠.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를 규정을 해도 주님께서 새삼스럽게 규정을 해야지, 겸손 떤다고 자기를 비루하게 만들고, 자기를 학대하고, 자기를 나쁘게 본다고 해서 ‘주님의 세상보기’하고 일치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렇게 자기 죄를 알고, 뭐 자기를 때리고, 나는 부족합니다, 라고 하는 이것은 주께서 보기에는 이거 오버하는 거예요. 이거는 연기부리고 있는 겁니다. 손도 안 댔는데 아프다고 혼자 뒹구는 거 있잖아요. 손도 대지 않았는데. 시작을 항상 예수님부터 시작해야지, 인간이 마중 나가면 안 돼요. 주님은 아마 이런 사람을 좋아할 거라고 내가 미리 연출을 벌이면 안 되는 겁니다. 그냥 평소에 제가 말씀한 것처럼 그냥 사시면 돼요. 내가 나에 대해서 규정하지 말고. “주님한테 매 맞기 전에 알아서 기자.” 이러지 말라는 말이죠. 그거는 주님에 대한 곡해에서 비롯된 겁니다. 너의 세계는 나쁘다고 이야기할 경우에도 예수님 쪽에서 먼저 그 이야기를 끄집어내야지, 주님은 거룩한 분이고 하나님이기 때문에 의당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 세계가 얼마나 개판이겠느냐, “주여, 저는 개판입니다. 손들고 나옵니다.”라고 이렇게 자기 자신을 조작하지 말라 이 말이죠. 내가 생각하는 나의 죄와 주님이 생각하는 죄가 달라요. 내가 생각하는 죄는요, “나는 죄인이다.” 이걸 내가 미리 짐작해서, 여기에 맞추기 위해서 나는 죄인이라는 죄를 죄다 끄집어내는 방식을 사용하는 거예요. 인간들은 나는 이래서 죄인이라는 겁니다. 혼자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이 죄라고 할 때는, 예수님이 누구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죄라는 것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거예요. 우리가 이 정도하면 죄인일거라고 이렇게 아양을 떨 필요가 없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죄라고 생각하는 것을 아무리 연출을 해도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의 수고함에 대해서 하등의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 자신에게 니가 평하지 마라. 니는 니 자신을 평할 하등의 자격이 없다. 이겁니다. 평을 해도 주님이 평을 해야 돼요. 주님의 평은 너는 이렇다가 아니라 니가 이러한 것을 하기 때문에 너를 이렇다고 이야기하는 나는 이렇다는 겁니다. 그게 목적이 되어야 되지, 그게 목표거든요. 예수님은 예수님 본인이야기를 해요. 우리가 누군지를 이야기 안 한다 이 말이죠. 우리의 관심사는 나는 주님 보시기에 어떤 인간인가? 여기에 우리의 관심이 꽂혀있는데, 주님은 그거 알아서 뭐 할 건데? 어차피 피조물은 창조주를 증거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피조물이 이렇다고 그걸 독자적으로 규정하려고 피조물이 태어난 것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뭔가 이야기를 할 때에는, 다시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몸에는 새로운 세계를 품고 있는데, 이 새로운 세계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 새로운 세계가 아닌 세계는 어떤 세계냐를 예수님께서는 언급하시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한 말을 여러분들이 인정한다면, “나는 ~이다. 이 세상은 이렇다.”라는 것이 아무 의미 없습니다. 이 세상은 좋다, 나쁘다, 그런 것도 의미 없고, 이 세상은 멸망 한다 조차도 의미 없어요. 항상 의미는 뭐냐, 주께서 그렇게 하셨다가 중요한 겁니다. 어떤 인도네시아에 지진이 일어났잖아요. 주님께서 지진이 일어나게 하셨다. 얼른 들으면 정답 같은데 그 말 자체가 자동적으로 정답이 되는 것은 아니에요. 주께서 이렇게 하셨다, 라고 했을 때 그 어감이, 아무리 똑같은 단어로 문장을 만들어 똑같은 이야기를 할지라도 그게 같은 뜻이 아니에요. 이것을 참 주목해야 하는데, 언어는 의미에서 마감이 되는 것이 아니고, 종결되는 것이 아니고, 언어는 사건에서 종결되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봅시다. 아까 잡수신 것이 부추에다가 오징어를 넣은 부침개죠. 부추에다가 오징어를 넣어서 집사님께서 만드셨습니다. 그러면 배부른 사람은 어쩌라고? 뭐 어쩌라고? 수고하셨네. 근데 뭐 어쩌라고? 약간 중간쯤 배고픈 사람은, 야, 그거 맛있겠네. 한번 먹어볼까? 하죠. 아주 배고픈 사람은, 그게 부침개인지 부추인지 뭐든지 관계없이 먹고 싶어 하는 거예요. 같은 단어에 사건이 몇 가지가 일어나느냐 하면 세 가지 사건이 일어나는 거예요. 세 가지 사건. 사건이란 뉘앙스는 내가 미리 짐작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만약에 내가 어떤 것을 예상해버리면 이거는 사건이 아니고 뭐가 되느냐 하면, 나의 짐작한 의미가 돼버려요. 인간은 고집스럽게 자기에게 의미가 되는 것으로 자꾸 정신이 팔리는데, 주께서는 의미를 피해 가버립니다. 그래야 우리는 의미조차 없는 거예요. 처음부터 어렵게 해서 죄송합니다마는, 제가 한 이야기가 상당히 좀 어렵다 싶은데요, 그러면 쉽게 갈 타이밍이 왔죠. “십자가 앞에서 나는 죄인이다.” 맞는 말 같이 느껴지죠. 그러나 아까 사건을 그대로 동원해버리면, 자기가 나는 죄인이라는 사람에게는 “나는 이거 미리 알고 있는 사람이다. 어쩌라고?” 이래 되겠죠. 그리고 중간쯤 나는 죄인이고 의인일 수도 있는 사람에게는, “아! 내가 다시 한 번 죄인이구나. 나는 앞으로 건방떨면 안 되겠구나. 앞으로 잘난 체 하면 안 되겠구나.” 이래 되겠죠. 그리고 의인이고 싶은 사람에게는, “내가 생각한 것하고 주님이 생각한 것하고 다르구나.” 이렇게 되죠. 방금 세 가지의 사건이 일어났죠. 이 사건이라는 말을 일반 사건하고 다른 점에서 이걸 언표라고 해요. 언표. 잘 안 들어보셨죠. 언표라는 것은 없어요. 비-물질적이에요. 언표라고 하는 것은 그 분위기를 새롭게 드러내게 하는 단어의 기능을 언표라고 합니다. 분위기를. 그러면 십자가 앞에 나는 죄인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 나는 나를 잊었다. 이게 바로 주께서 원하는 진정한 죄인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주님께서 이야기한 것은 도로 어디로 가야 합니까?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고, 너는 내 앞에서 죄인이라고 이야기하는 예수님 본인을 드러내시기 위해서만 그 말이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진정한 죄인 같으면 나는 죄인이다, 라는 이것도 잊어버려야 돼요. 나는 내가 뭐라고 할 어떠한 권리도 없는 겁니다. 어떠한 권리가 없어요. 죄인이라고 이야기하니까,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목사님 저는 이렇게 죄인인데, 목사님 보시기에 지금 이게 예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하는 그 의미와 맞는, 일치되는 죄인입니까?”라고 묻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잊지를 못하고 있어요. 여러분 이국종 교수 알아요? 장로님, 혹시 이국종 교수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들어봤죠. 중증외상센터장. 그 사람이 뭘 했느냐 하면, 갑자기 뜬 이유가 탈북 하다가 북한군에게 총에 맞아 죽을 뻔 했던 사람을 혼신의 힘을 다해서 살려냈잖아요. 그래서 유명한 사람이 됐습니다. 이국종 교수 기억나시죠. 그러면 그 사람은 누구한테 좋은 사람이 되겠어요? 탈북 하다가 총 맞아서 거의 죽게 된 북한군 그 사람이 이국종 교수를 좋아하겠죠. 왜? 그 사람 덕분에 자기의 목숨을 건졌으니까. 그러면 그 사람 앞에서(십자가 앞에서), 그 북한 군사가 나는 이렇다고 이야기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겠죠. 나는 이런 이익을 얻어야 돼, 나는 의미가 있어야 돼, 이런 것 자체가 없다 이 말이죠. 왜냐하면 그분 때문에 내가 살았기 때문에. 이국종 교수만 있다면 자기는 언제 어떻게 되도 자기는 상관없는 거예요. 왜? 죽은 자를 살렸기 때문에. 예수님의 나라가 그 나라에요. 예수님이 품고 있던 것이 풀려진 나라의 백성의 특징이 바로 이 특징이에요. 죄인이라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왜? 주님 관심 갖는데 바빠 가지고 자기 자신한테 관심이 없어요. 자기 자신한테 관심이 없으면 뭐가 관심이 없느냐 하면 남들이 자기한테 하는 평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또 나는 누구에 대해서 평을 하는데 관심이 없어요. 바로 우리 광주모임 성도님들처럼. 전혀 남들에 대해서 평을 안 하잖아요. 관심이 없어요. 이게 뭐 비비꼬는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람의 걱정근심이 어디서 나오는 거예요? 매일같이 자기 자신에 대해 평을 하기 때문에 나온 거예요. 자기 자신을 평하다보니까, 내가 어떻게 표현해야 되는가에 또 신경 쓴다 이 말이죠. 누굴 만나러 가는데 옷을 뭘 입고 나가야 하는지. 머리는 뭐 들깨머리인지, 깻잎머리인지. 하여튼 뭐든 게, 하루 온종일 자기 자신에게 관심이 다 있는 거예요. 자기 자신에 관심이 있다 보니까, 자기표현에 관심이 있다 보니까, 남들이 내 표현에 장단맞춰주지 않고 약간의 험담을 한다면 그걸 참을 수 없는 거죠. 괴로워서 못 견디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제가 수요일에 자기만의 세계라고 한 거예요. 자기만의 세계. 자기만의 세계가 된 것은 뭐냐 하면 나를 잊을 정도로 괜찮은 분을 못 만났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거예요. 나를 잊어버릴 정도로. 내가 지금 허름한지, 가난한지, 부한지, 똑똑한지, 가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내 인생이, 내 운명이, 미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런들 저런들 그런 것에 전혀 신경을 안 쓸 정도로 너무나 대단한 이국종 같은 사람. 그 분 아니었으면 나는 진즉에 죽었다는 것을, 온 느낌이 그 분 앞에 서면 늘 느껴지는 사람. 주일 낮에 설교대로 한다면 막달라 마리아 같은 사람(요20:15). 예수님이 물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야! 너는 누구를 찾느냐? 이 한 마디입니다. 누구를 찾느냐? 모든 인간은 자기를 찾아요. 하루도 쉬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을 관리하고 자기 자신을 찾습니다. 왜? 찾아서 잘 관리하고 다듬어야 남 앞에 내세울 수 있기 때문에. 물론 우리 광주가족들한테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겁니다. 언제 남 신경 쓴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배에서 나온 새로운 세계의 백성은 뭐냐 하면, “아무개야(막달라 마리아)! 너는 누구를 찾느냐? (너 말고 또 찾을 사람이 있재? 그쟈?)”라고 묻는 거예요. 너에게 너는 너 따위에 해당이 돼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가 어떻게 살든, 내가 몇 년을 더 살든, 내 형편이 어떻든 간에 상관이 없어요. 나는 내가 아는 것은 나를 잊게 만든 그 분이에요. 이국종교수. 오늘 제목을 이국종 교수라고 할까? 그분. 나라가 북한군 어떻게 할까에 신경 쓸 때 오직 저 사람, 이국종 교수는 무조건 살린다는 이유 때문에 그 비싼 장비를 다 동원해가지고 며칠 간 매달려서 7군데 이상 총상을 입은 죽어가는 탈북자를 살렸거든요. 이국종 교수 쳐보세요.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한 사람인지. 도대체 나 같은 것을 살려낸다는 것 자체가 나로서는 의아해해야 합니다. 이게 성도로서 정상이에요. 주님, 나 같은 것을 비싼 의료장비까지 동원해서 왜 저를 살려냅니까? 오히려 의아해해야 돼요. 제가 의아해해야 한다는 말은,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살려내는 방식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나를 살릴 때는 뭐냐, 남들 앞에 그럴싸한 존재로 살려내는 거예요. 나를 잊는다는 것하고는 정반대에요. 나를 좀 알아달라는 식의, 그것이 내 자신에게 모델이 되는 겁니다. 이상적인 내 모습이 돼요. 그런데 정작 나를 구원했던 예수님은 뭡니까? 그것마저 사치라는 사실. 그것마저 내가 엉터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거예요. 내가 이 정도 되면 괜찮겠다는 그러한 인식마저 이것은 터무니없는 망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나에게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을 정도로. 아무것도 나에게서 모를 정도로. 내가 누구냐 라고 규정할 필요조차도 없는 그런 존재. 나에 대해서는. 그러다보니까 나의 소망과 기대자체가 이게 무의미해지는 겁니다. 오늘 강의 준비하면서 제가 먼저 묻고자 하는 질문이 있었어요. 우리는 무엇에 울고 무엇에 웃느냐? 이런 질문을 하고 싶었어요. 우리는 평소에 무엇에 울고 무엇에 웃습니까? 어떤 상황이 되면 울고 어떤 상황이 되면 웃습니까? 그러면 어떤 이런, 이런 상황들이 되면 좋겠다고 하겠죠. 부추전이 오는 상황이 오면 좋겠다. 뭐 이런 것. 이것 자체가 아직도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관심을 쏟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오게 되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세상 것에 울고 웃지 말고 예수님에게 울고 예수님에게 웃어야 된다, 라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정리할 때에, 그런데 이 정리는 잘못된 관리입니다. 그러지 말고 그냥 우실 때 울고 웃을 때 웃으면 돼요. 왜? 울라고 우는 일이 생겼고 웃으라고 웃을 일이 생겼는데, 그게 뭐가 탓할 문제입니까? 그게 뭐가 문제가 돼요. 주님 보시기에 이런 인간 원하시잖아요? 그죠? 라고, 자기한테 신경 쓴다는 자체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에요. 이게 뭐냐 하면 주님은 이런 사람을 원한다고 설정해놓고 그 다음에 거기에 맞춰나가려고 하는 겁니다. 맞춰나가려고. 제가 만약에 막장드라마 작가라고 했을 때, 저는 이런 것을 생각해보거든요. 막장에 막장을 보여주리라. 어차피 막장이니까. 준재벌집 아들하고 어떤 여자하고 사귀는 씬scene부터 출발해요. 만원버스를 타고 내려서 허겁지겁 면접을 보러가다가 건물 앞에서 어떤 남자하고 부딪혀서 커피를 다 쏟았는데, 남자가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어!” 해가지고 서로 싸우는데, 여자는 남자를 팔 꺾어놓고 싸웠는데, 근데 그게 바로 재벌집의 아들이었다. 시작을 그렇게 해요. 근데 그 아들이 갑자기 아무것도 아닌 집의 아가씨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 말이죠. 근데 어떻게, 어떻게 해서 이 아가씨가 회사에 들어와서, 어려운 회사였는데 회사를 다 일으켜서 둘이 마지막에는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결혼할 때 반드시 남아있는 게 있어요. 결혼을 하는데, 그 시어머니 입장에서 며느리잖아요. 며느리가 아니고 자기 딸이라면? 그리고 아들이 사실은 자기 아들이 아니고 고아원에서 데려온 아들이고, 진짜 찾고 있었던 딸은 이 며느리가 딸이었다면? 이렇게 할 때 시청자는 아무도 예상 못하겠죠. 물론 예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뻔할 뻔자다. 여기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다 예상하겠죠. 이게 뭐냐 하면 며느리가 아니고 딸이 될 때, 이 여자주인공은 내가 나에 대해서 어떻게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여지가 더는 없죠. 그렇잖아요. 며느리를 해야 될지, 딸을 해야 될지, 어머니라고 해야 하는지, 엄마라고 해야 하는지, 자기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더 이상 손 댈 게 없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주께서 만들어낸 우리 인생의 반전입니다. 주의 품 안에 있는 새로운 세계의 구성원이에요. 백성이에요. 내가 더 이상 나에게 손 댈 건더기가 전혀 없게 만들어요. “예수님은 거룩한 분이다. 우리는 거기에 맞춰드려야지. 이렇게 하면 주님의 백성이 되겠습니까? 주님의 아들이 되겠습니까? 딸이 되겠습니까?” 이렇게 자기가 자기를 조절할 때에, 이것은 오늘 본문 전체의 성경 내용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제가 지금 계속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냥 사시라는 말이 그냥 하는 투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죄인이라고 하니까 막 죄인이 되려고, 없는 죄 막 찾아내가지고 세밀한 것까지 예민하게 하는 그런 짓도 하지 마세요. 주께서 일으키는 사건의 일부지, 내가 이해하는 의미의 일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냥 산다는 자체가 주님이 일으키는 사건이어야 해요. 그렇게 될 때 이 사건의 목표는 “예수님이 누구신가?”입니다. “너는 누구를 찾는가? 너는 누구를 찾지? 너 생각하지 않고 너는 누구를 찾는 거야? 니 주제파악 못하고 누구를 찾는 거야?” 이리 묻는 거거든요. “니 주제에 감히 나를 찾아?”라는 말씀을 안 하시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니가 어떠냐가 아니라 찾고 있는 분이 누구냐고 묻는 겁니다. 그게 신앙의 끝이잖아요. 신앙의 완판이에요. 자기 자신을 생각 안 하는 신앙보다 더 좋은 신앙이 어디에 있어요. “주여, 믿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라고, 매일같이 이런 것 묻지 마시고, 그냥 북한 탈영병이 이국종 찾는 것처럼 나를 안 찾는 거예요. 나를. 근사한 나를 안 찾는 거예요. 이쯤해서 여러분들이 이해한다고 치고, 강의를 다시 해봅시다. 예수님께서 오셨다. 우리의 상식은 예수님이 계시면 다른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이건 생각하지 말라고 했죠. 예수님께서 오셔서 말씀을 하실 때, 예수님 품고 있던 새 세상, 두자로 하면 천국이죠. 천국을 끄집어냅니다. 천국을 끄집어내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이 세상은 악하다, 이 세상은 지옥이다, 라고 하는 이 의사를 반영해주지 않습니다. 이건 자기가 뭔가 자기한테 의미가 있어가지고, 믿음이 좋아지라고 하는 조작된 연출이거든요.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주님께서 새삼스럽게 새로운 세계, 천국과 반대되는 속성의 세계를 새롭게 끄집어내요. 새롭게 끄집어낼 때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예수님이 천국이야기와 병행해서 새롭게 끄집어내는 이 세계에 주목을 하라 이 말입니다. 우리가 여기에 맞추어주려고 하지 마시고, 맞추어주려고 하지 마세요. 부탁해요~~ 우리가 주의 말씀에 맞춰 들어가려고 하지 마세요. 제가 지금까지 교회에서 보게 되면, 왜 자꾸 그런 모습이 많이 보이는지, 제가 심히 좀 답답해요. 맞추려고 하는데, 맞추려고 해봤자 그것은 자기 자신을 못 잊습니다. 그러면 주께서 새롭게 제시한 나라가 어떤 나라냐 하면, 38절 봅시다.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가라사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39절,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이래 되어 있죠.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이렇게 규정하니까, 제자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추종한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거리에 나가서 누굴 보느냐 하면은 시장에서 문안 받는 자와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자들과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와 판결이 중한 자들을 이렇게 보겠죠. 그렇죠. 계속 이렇게 볼 게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남한테 이렇게 규정했다고 해서 본인도 주님과 똑같은 뜻으로 규정할 수 있는 자신감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걸 컵이라고 했다고 해서 나도 그렇게 생각을 같이 한다고 생각하시면 큰 오산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은, 예를 들어서 “이 컵은 하얗게 생겨서 나쁜 컵이다.”라고 하면 “저도 그렇게 봅니다. 이 컵에 있는 물 마셔서 배탈이 나서 이 컵이 기분 나쁩니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예수님하고 내 생각하고 똑같습니까? 아니죠.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가 이 컵을 욕하면 이 컵과 우리는 일치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겁니다. 주님께서 누굴 욕하면 덩달아 같이 욕을 한다고요. 욕을 해버리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우리가 누구 편이 된다? 주님과 같은 쪽에 서 있다고 착각들을 하는데, 예수님 쏙 빼놓고 나머지기는 주님 편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새로운 나라와 결부해서 새로운 백성을 만들어내야지, 없는 데서 만들어내야지, 주님께서는 있는 것을 백성으로 받아주지 않아요. 죄인들을 오라고 한다고 해서, “저 죄인입니다.”라고 한다고 해서 안 받아줍니다. 내가 생각한 죄인이 따로 있고 니가 스스로 생각한 죄인이 따로 있어요. 날마다 주님께서 새롭게 만들어주셔야 되는 겁니다. 만들어주기 때문에, 그 만들어주는 그 대상을 주님께서 이렇게 펼쳐주게 되면, 바로 이 이야기가 특정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바로 여기서 우리는 수용을 해야 됩니다. 받아줘야 돼요. 우리는 전에 이 성경을 보게 되면, “나쁜 사람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사람들!” 바로 이렇게 흥분해가지고, “이 착하고 거룩한 분을 이들이 오해를 해서 죽였구나!”하고 길길이 날뛰잖아요. 그렇게 흥분해서 주님을 이렇게 도와주면, 주님이 우리를 보시면서 니 나하고 한패라고 하겠어요? 그렇게 해줍니까? 안 해줍니다. 괜히 우리가 주님한테 좋게 보이려고 설쳐대는 거예요. 그리고 제가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여기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과 긴 옷을 입고 다니면서 시장에서 문안 받는 이런 사람들이 등장한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긴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 시장에서 문안 받는 사람이 어릴 때부터 우리 가족 어렵다고 늘 용돈주고 장난감 사주고 책받침, 참고서 다 사주던 어질고 착한 우리 삼촌이라면 어떻게 할 겁니까? 나에게 너무 잘해주고. 정말 나한테는 이국종 같은 분인데, 주님보시기에는 저 인간은 긴 옷을 입고 다니고 폼 재고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좋아한다고,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중간에 붕 뜨죠. 어느 편을 들어야 할지. 이게 뭐냐 하면 나와 결부된 것은 좋게 보는 우리의 못된 습성 때문에 이러한 의미의 충돌이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을 제대로 보셔야 돼요. 주님이 욕한다고 같이 편들어서 욕한다고 한패 먹는 것이 아니거든요. 자, 그러면 우리가 계속 진도를 나가면서 해야 될 것은 뭐겠습니까? 왜 주님께서는 이들을 이렇게 공격하느냐 하는 그 이유를 알아야 되겠죠. 주님의 몸에서 뭐가 나온다고 했습니까? 새 세계가 나오죠. 인간의 몸에서는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헌 세계가 나오겠죠. 인간의 몸에서는 헌 세계가. 인간이 어떤 일을 해도 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어요. 나름대로의 정당성이 있다고요. 인간이 행동할 때. 정신병자 같으면 막무가내로 이야기를 하겠지만, 그렇지 않고 우리가 스스로 서로를 보기에 당신은 참 정상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당신의 행동이나 말하는 것은 다 그것에 합당한 이유가 있어서 행동한 것이라는 것을 서로서로 인정해주겠다는 뜻이에요. 정상적으로 보는 거예요. 정상적으로. 이 모든 것이. 그럼 정상적으로 볼 때, 인간이 원하는 것이 뭐냐 하면 이것이 주님 보시기에 헌 세계지만, 이 ‘헌’자를 빼면 뭡니까? 이 세계잖아요. 이 세상. 이 세상을 너무 크게 생각하지 말고, 가정주부 같으면 뭡니까? 가정이에요. 가정. 기업인 같으면 회사겠죠. 학교, 교회, 이런 단체들. 그들의 세계입니다. 이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이바지하고 노력하는 이것이 뭐가 나쁩니까? 자식들 키우기 위해서 시장, 난전에 나가서 감이라든지, 고구마 이만 원, 밤 한 되 오천 원 팔거든요. 오늘 아침에 여수 교문시장에 갔다 왔거든요. 갔을 때 제가 봤어요. 아침부터 나와서 저렇게 애쓰는데 저거 뭐하려고 하느냐, 그게 나의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는 그런 행위들이에요. 나의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는 것. 그러면 나의 세계라는 것이, 가정이라든지 회사라든지 여기에 이렇게 최선을 다하잖아요. 근데 나의 세계라는 것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욕망에서 나왔고, 이 욕망의 밑이 어디냐 하면 에너지의 흐름입니다. 에너지의 흐름의 속성이 뭐냐 하면 지속이에요. 지속. 지속이라는 것은 하는 것대로 끊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연달아 이어짐이 하나의 욕망의 속성으로 자리 잡고 있는 거예요.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할 때 이유가 있잖아요. “왜 당신은 우산을 씁니까?”라고 하면, “지금 비가 오기 때문에 우산을 씁니다.”라고 하잖아요. 그럼 주님 보시기에 비 올 때 우산을 쓰면 구원받습니까? 어떻습니까? 비 올 때 우산을 쓰면 구원받습니까? 안 받죠. 그러면 비 오는데 우산을 안 쓰면 그것은 조현병, 미친놈이에요. 그건 정신병자죠. 그럼 비 올 때 인간들의 세계에서의 합의된 의사가 뭡니까? 합의된 정상은 뭐냐 하면 비 올 때는 우산을 쓰는 거예요. 그럼 우산을 만들어내야 되겠죠. 그럼 우산을 만들어내는 공장이 있어야 되겠죠. 우산공장 사장, 간장공장 공장장은, 뭐 비슷하게 우산공장 사장은 왜 우산을 만듭니까? 자기 가족을 위하고자 하는 욕망의 지속 때문에 그런 거예요. 지속이라고 하는 것은 이게 딱딱 끊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지속이라고 하는 것은 에너지의 흐름이에요. 흐름이라고 하는 것은 플럭스flux라는 것인데, ‘끊어짐이 없이 연이어’라는 뜻입니다. 애들을 보세요. 애들이 놀 때, 장난감가지고 놀다가 장난감이 없으면 그 다음에는 죽어버립니까? 아니죠. 장난감가지고 놀다가 휙 치워버리고 다른 것, 서랍을 뒤지죠. 이게 에너지의 흐름, 내 욕망의 지속성이라니까요. 지속성. 사람은 가만히 있지를 않습니다. 여수 검은 모래 해변을 구경했습니다. 가만히 있습니까? 왔다 갔다 하죠. 자꾸 가만히 있지를 않고 움직인다고요. 이 에너지의 흐름, 욕망, 에너지의 흐름이 이렇게 흐르잖아요. 그런데 이것에 혹(혹뿔, 혹의 방언 경상도 사투리)이 났다. 혹이 났을 때 이것을 가지고 자아라고 합니다. 이게 서기관들이에요. 이게 긴 옷을 입는 겁니다. 상석에 앉는 사람이고 시장에서 문안을 받는 거예요. 오늘 제목은 혹부리입니다. 혹부리 영감. 또 가다보면 혹이 있어요. 이 같은 혹끼리 나중에 보면 둘이 동창생이에요. 또 혹이 옆집에 사는 이웃이에요. 작은 혹은 어릴 때 제자에요. “쌤요~~” “아이고, 이 녀석 많이 컸다.” 이래 되는 거예요. 전부 혹이에요. 밑에는 뭐가 흐릅니까? 에너지의 흐름, 이걸 가지고 성경에서는 육이라고 하는 거예요. 육. 육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계속 이어갑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혹이 난 이 하나를, 나라고 하는 이 자체를 주님께서는 공격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육을 공격하는데, 인간들은 육이라고 보지 않고 독자적으로 불거진 나 자신이, “주님, 제가 어떻게 할까요?” 이래 나오는 거예요. 자기한테 관심이 있어요. 자기를 잊지를 못해요. 자기 자신을 잊지를 못해요. 부산 일가족 살인사건을 보면 여자 친구의 아빠, 엄마, 할머니, 사귀었던 전 여자친구, 다 죽여 버렸어요. 그리고 지도 자살해버렸고. 왜 죽였는가? 결혼은 안 했지만 사위라고 봐줬는데, 여자 친구가 “나 이러려면 너하고 못 살아. 헤어지자.”라고 하니까, 거기에 격분해서 그 여자 친구 가족을 다 죽였어요. 여러분들이 배웠으니까 그대로 여기에다가 적용해봅시다. 그 청년은 무엇을 생각했느냐 하면은 혹을, 독자적으로 자기 의미를 포기를 못한 거예요. 그냥 불룩 튀어나온 혹에 불과한데, 이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보는 거예요. 이게. 4명 죽이고 자살한 32살 먹은 청년이 4살 때부터 그 집안 식구를 죽이려고 미리 사전에 계획한 적이 있습니까? 없죠. 그 사람이 군에 안 가고 칼만 갈아서 32살 되면 나는 사람 죽일 거라고 미리 예상했습니까? 없죠. 분출된 에너지라니까요. 분출된 에너지. 하나의 사건, 아까 언표라고 했잖아요. 하나의 사건이 되기 위해서는 갖가지 변수가 이게 복합적으로 다 집어넣어진 거예요. 니만 안 만났으면 내가 32살 때 내가 자살을 안 한다. 너를 만나서, 너를 만났더라도 좋게 지내면, 헤어지자고 말만 안 했어도 내가 니 집안 식구 안 죽인다. 근데 헤어지자는 말을 하게 했다 이 말이죠. 그게 여자 혹이에요. 나도 처음부터 헤어지자는 말을 안 하고 싶었는데, 니 하는 꼬라지를 보니까, 그때 술 한자 먹고 헤어지자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보세요. 어느 것 하나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있어요? 없어요? 모든 매사가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여자 친구를 밀친다, 밀치는 것하고 칼 들고 죽이는 것하고는 다르죠. 그러면 밀치지 말고, 뺨 때리지 말고 칼 들고 다 죽이겠다는 그러한, 두뇌에 피가 역류해 올라가서 갖가지 갖고 있던 과거정보를 종합해가지고, 나는 도저히 죽이지 않으면 못 참겠다는 것이 나오려면 그 청년에게 그 전에 얼마나 많은 조각난 경험들이 집대성되어야 했겠어요? 과거에 주고받던 그 모든 것이 하나같이 낭비입니까? 낭비 아니에요? 하나같이 이게 사라져요? 안 사라져요? 집대성되었으니까 안 사라지죠. 그 안 사라지는 것이 모여서 뭐냐 하면 사람들을 죽인 겁니다. 그리고 지도 죽었어요. 자, 4명 죽었죠. 지금 좋은 예에요. 좋은 예. 자기까지 5명 죽었어요. 자, 화장을 해가지고, 화장하면 어디로 갑니까? 흙이 되죠. 에너지 아닙니까? 잠깐 흙으로 와서, 약간 나를 왜 안 알아주느냐고 까불고 설치다가, 도로 어디로 가요? 도로 죽죠. 김윤식이라는 사람을 알아요? 김윤식. 서울대학교 교수, 문학평론가. 나이 82세, 오늘 죽었거든요. 우리나라 최고 평론가에요. 이어령보다 더 유명한 사람이죠. 이어령 선배쯤 되는 사람이죠. 이 사람이 숙환(오랫동안 앓은 병)으로 죽었다고 하는데, 죽으면 어디로 가느냐 하면 화장터로 가서 화장을 하겠죠. 그렇죠. 김윤식씨는 훈장 받은 사람이에요. 상을 많이 받은 사람이에요. 학문적으로 굉장히 많은 상을 받았어요. 그런데 아까 32살 청년은 상은커녕 여자 친구 가족 다 죽이고 지도 자살했죠. 근데 둘 다 어디로 가요? 둘 다 어디로 갑니까? 물질로 가죠. 물질이 뭐냐 하면, 땅에 이렇게 흙, 먼지가 있으면, 바람 불면 이쪽에 있는 먼지가, 흙이 저쪽으로 옮겨지죠. 옮겨지면 바람에 날려서 저쪽 에베레스트 히말라야로 가겠죠. 히말라야로 가면 등산하는 사람이 올라가다가 눈사태가 나가지고 거기에 또 묻히겠죠. 묻혀서 복합이 돼가지고 화산이나 지진이 되어서 또 나오겠죠. 그래서 그게 어디에 섞이느냐 하면 식량에 섞여서 그 식량을 어떤 아줌마가 먹고 애를 낳겠죠. 애를 낳으면 그 애 안에 뭐가 있습니까? 죽었던 물질이, 에너지가 묻혀서 있겠죠. 그 애는 자라 혹이 나서 세상에 돌아다니겠죠. 이게 바로 육의 세계에요. 이게 과학적으로 에너지 세계 아닙니까? 사람들이 뭘 오해를 하느냐 하면은, 나만의 세계가 있을 수 있다는 그게 근원적인 오해에요. 거기다가 주님이 오시니까, “주님, 저 어때요?” 뭐 죄인 돼야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저, 죄인입니다.”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십자가에서 난 죄인입니다.” 어디서 폼 잡고 있어요? 주님께서 우리보고 뭐 하라는 것이 없어요. 해봤자, 혹이 폼 내는, 지가 지 스스로 폼 재는 것밖엔 안 돼요. 이 혹, 주께서는 아예 기대를 안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인간들이 이렇게 망친 것을, 망치게 한 이 세상 모든 전체의 변화가 인간 전체를 망치게 했다고 결론 지우고, 예수님 자신이 뭐가 되느냐 하면은 육이 되신 겁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 죽으심이에요. 자, 다시 해볼게요.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세상이 뭐가 되느냐 하면은 무덤이 되어야 하는 거예요. 세상 자체가. 웃고, 즐기고, 기쁘고, 슬프고 하는 이 모든 자체가 무덤이 되려면, 이걸 무덤화시키고 무덤으로 규정하려면 여기에 누가 끼어들어야 합니까? 누가 끼어들어야 하죠? 바로 예수님이 무덤에 들어가셔야 되죠. 그리고 이 들어가시는 무덤은 나중에 보면 무슨 무덤이냐 하면 빈 무덤이 되는 겁니다. 빈 무덤. 무덤인데 어떤 무덤? 빈 무덤 되죠. 그러니까 이 세상 자체가, 세상이 세상이라고 여기는 자체가 이게 헛방이죠. 잘못된 의미를 부여한 거예요. 세상은 뭐냐 하면 그냥 육이에요. 그냥 저주의 세계에요. 세상 자체가 죽음이라는 겁니다. 무덤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의미를 새로 부여하는 거예요. 의미를. 내가 아는 세상은 너희들이 까불락, 까불락 하는 세상이 아니고, 무덤 자체가 들썩거리는 그것과 비교해서 예수님은 새로운 천국을 자기 몸을 통해서 구성해내는 겁니다. 말씀을 통해서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러면 그렇게 만들어낸다면, 그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라고 물으면, 제가 첫 번째 강의에서 수십 번 이야기를 한 거예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별반 관심 없는 사람이에요. 인간이 나한테 관심이 없으면 누구한테 관심을 두라는 말입니까? 라고 하신다면, 그걸 왜 저한테 묻습니까? 막달라 마리아한테 물어보세요. “막달라 마리아! 당신은 어떤 여자입니까?” “관심 없어요.” “막달라 마리아 당신은 누굴 찾습니까?” “예수님 찾아요.” 내가 어떤 여자이며 어떤 존재라고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질문이에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질문. 예수님이 어떤 분이냐? 바로 그것이 천국백성입니다. 주님께서 원하는 나라는 이거에요. 예수님한테 꽂힌 사람이에요. 예수님이 누구이시냐에 꽂힌 사람. 자, 이거 비교하고 첫째시간을 마치겠습니다. ‘자기를 살리신 분만 기억한다.’ 자기를 살리신 분만 기억한다고 할 때에, 자기를 살리신 분만 기억하는 것, 이것은 바로 천국이죠. 이것은 뭐냐 나를 기억하지 않는다. 우리의 과거라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죽음으로 다 집어넣기 때문에, 이미 죽었던 과거에요. 내가 그걸 끄집어내도 소용이 없어요. 이미 주님께서 쓰레기통에 다 집어넣었어요. 이유가 뭐냐 하면 나라는 자체가 내 것이 아니고, 누구 것이냐 하면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 모르는 눈치인데, 예수님께서 이야기를 끄집어낼 때 자기 백성을 새로 만드시는 거예요. 나하고 타협하고 의논하는 것이 아니고 새로 만들어내는데, 그 새로 만들어내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우리가 혹처럼 나타나도 이거는 없는 과거에요. 자꾸 없애요. 어제를 없애고, 오늘 되면 또 어제를 없애는 거예요. 과거에 대해서 끄집어낼 이유가 없어요. 과거에 대해서. 과거에 뭐 교도소를 7번, 8번 왔다 갔다 했는지, 뭐 부부싸움해서 접시가 몇 개 깨졌는지, 그게 다 주님한테는 무덤속의 과거로 다 없어진다니까요. 거기에 비해서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이냐 하면 바로 나를 기억하는 세상이에요. “제가 어떻게 하면 천당 갈 수 있습니까?” 이걸 기억하는 세계. 이걸 기억하세요.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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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16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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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