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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서울의존강의20181012a 베드로전서2장 6-9절(버림받은 분)-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베드로전서

서울의존강의20181012a 베드로전서2장 6-9절(버림받은 분)-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2장 6-9 6절,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7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8절,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9절,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심이라 자, 시작하겠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6절에 보면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라고 되어 있죠. 구약에 나오는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라는 이 말씀, 이런 말씀 같은 경우는 이사야 28장 16절이라든지, 시편 118편 22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들을 보게 되면 항상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혼선을 일으키는 요소들이 많아요. 왜냐하면 모퉁이 돌을 어디에 두었느냐 하면 시온에 두었다고 되어있거든요. 시온 같은 것은 지정된 장소죠. 특정 공간입니다. 지정된 장소, 특정 공간은 이게 사람이 안 찾아가도 거기에 있겠죠. 찾아가도 거기에 있겠고 안 찾아가도 거기에 있겠고 늘 그 자리에 있겠죠. 움직이지 않고. 늘 그 자리에 있다. 이 ‘있다’가 늘 성립이 되는 겁니다. 구약에 보면 시온이라는 장소가 있는데, 그 장소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 아는 장소입니다. 시온, 예루살렘 성전의 남쪽을 시온, 또는 같은 장소라고 보면 돼요. 좁은 거니까. 그쪽이 시온인데, 그쪽에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었다고 했을 때에 그것과 여기 5절에 보면 “너희로 산돌같이....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런데 예수님은 돌이 아니죠. 사람이죠. 사람인데, 산돌이 예수님이고 예수님을 시온에 두었다고 하면, 지금 시온이 예루살렘이니까, 그럼 예루살렘에 가면 늘 예수님을 만나네요. 예수님이 거기서 뭐 환전소하십니까? 늘 거기서 만나네요. 시온에 두었다는 말이 왜 어려운 말이냐 하면은 다른 곳에는 예수님이 있다, 없다? 안 계시다로 이해될 수밖에 없어요. 시온에 돌을 두었는데, 딱 시온이다 이 말이죠. 텔아비브는 안 된다 이 말이죠. 뉴욕은 안 되고, 보스턴도 안 되고, 서울도 안 되고, 부산도 안 되고. 딱 시온에 두었다고 보는 겁니다. 그게 우리가 이야기하는 있음이에요. 있음. 인간이 사람하고 이야기를 할 때, 거기에 있다, 없다는 것은 늘 그 자리에 있는 거예요. 늘 그 자리에. 그럼 찾아가면 만나겠죠. 이게 인간 대 인간의 관계잖아요. 내가 어디에 니 시계를 두었다고 하면, 거기 찾아가면 내 시계가 있을 거라 이 말이죠. 근데 성경 구약에서 그런 이야기를 할 때, 예수님은 산돌인데 예루살렘에 두었다고 하면, 그러면 예수님은 거기에 늘 계시네요? 그렇죠. 그렇게 되겠죠. 구약을 자구적으로 믿는 사람들은. 자구적으로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은 지중해에 안 계시고 유럽에 안 계시고 시온에 있다 이 말이 됩니다. 그럼 예수님을 만나려면 예수님은 어떻게 생기고 또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자, 해석을 이런 식으로 하면 우리가 찾아가면 마치 만날 것처럼 하는데, 해답적으로, 근원적으로 보게 되면 뭐냐 하면 예수님 본인이 길이에요. 예수님이 길이거든요. 길인데 어떤 길이냐 하면 아무도 갈 수 없는 길이에요. 예수님은 길은 길인데 아무도 갈 수 없는 길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에 가셨다는 말은 예수님이 가셨구나가 아니라 예수님 빼놓고 어느 누구도 그 길을 갈 수가 없다. 결국 우리한테는 그 길은 없는 길이에요. 천국과 이 세상을 통하는 길은 우리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 그 길을 갔기 때문에.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그 길을 갈 수 없는 길이거든요. 근데 시온에 예수님이 계시다고 하니까 뭐 만나서 “예수님이 길이시네요.” 이러면 구원받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신약성경에서 전체적으로 이야기할 때는 예수님이 길이다. 아무도 갈 수 없다. 예수님께서 다녀감으로서 무엇을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은 하늘나라에 가고 싶어도 하늘나라에 길이 없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서 이야기를 해주는 겁니다. 구원받고 싶은 사람 다 소원이죠. 천국가고 싶어요. 그런데 뭐 길이 있어야죠. 없는데 뭐. 아예 하늘나라에 통하는 그쪽이 없어요.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기대를 갖게 되죠. 이래 한번 뚫어볼까, 이래 하면 해볼까, 이렇게 하는데, 예수님이 오시고 난 뒤에는 예수님 혼자만 갔어요. 왜냐하면 7절에 보면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됐잖아요.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분이 유일한 길이라면,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은 예수님이 길이라면 어떤 사람도 길은 있다, 없다? 없지요. 길이라고 하는 사람을 밀어버렸으니까. 길이라고 한 것을 밀어버렸으니까 예수님이 건축자의 버림받은 돌이 되죠. 버림받았다는 말은 누가 버렸다는 말입니까? 인간 쪽에서 버린 거죠. “에이, 쓸데없어.” 인간 쪽에서 버린 그 돌이 하나님의 시온의 돌이고, 그리고 하늘나라에 가는 유일한 통로가 된다면, 이미 인간 쪽에서는 그 길에 대해서 취할 태도는 다 취해버린 거예요. “나는 그 길을 인정하지 못하겠어.”하고 버렸잖아요. 그럼 인간은 예수님을 버림으로서 인간은 천국 가는 길이 있다, 없다? 천국 못 가죠. 못 가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천국 갈 수 없다를, 7절에 보면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천국 갈 길이 없음을 믿는 자가 보배 같다는 거예요. 천국 못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자가 믿는 자라는 겁니다. 그러면 반대로 “그래도 천국 갈 수 있는 길이 있을 걸.”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그건 믿지 않는 자에요. 뭘 믿으라는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에게 버림받은 분이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시온의 돌이라는 것을, 생명의 길이라는 것을 믿으라고 하는 이 말은 인간은 천국 못 간다는 존재라는 것을 수긍한 자만이 진정한 믿는 자가 되는 겁니다. 진정한 믿는 자가 돼요. 그러면 믿음이 믿음대로 계속 유지되려면 무슨 원칙이 계속 유지되어야 하느냐 하면 인간에게는 갈 수 없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길이 없는 거예요. 인간에게 천국의 길이라는 것은 아예 주어진 적이 없고, 그건 없음을 확신하는 겁니다. 인간에게 이런 확신이 있어줘야, 예수님이 어떤 분이냐 하면 우리에게 버림받은 분이라는 인식을 믿는 자만이 알게 돼요. 믿는 자만이.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나한테 친절을 베풀다가 내가 화가 나서 그 사람을 밀었다. 그 사람이 넘어졌다. 넘어져 삐져서 밖에 나갔다. 그러면 그 사람이 밖에 쭉 나가서 있는데, 어떤 사람이 물어요. “저 사람 어떤 사람이고?” “나한테 버림받은 사람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그 사람에게 그 전에 무슨 일이 있었어?” “몰라.” 모르는 것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죠. “예수님이 누군지 몰라.” 이거하고, “예수님이 누구지? 인간에게 버림받은 사람.” 이거하고는 완전히 하늘과 땅 차이죠.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사건이 있잖아요. 사건. 사람에게 버림받았다는 그 사건, 그 사건에 유의미, 의미가 있음을,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우리가 인정해야 된다 이 말이죠. 버림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강의 시간에 왜 그렇게 그걸 강조하느냐 하면은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버림받은 분으로 나오죠. 그러면 여기 예수님이 있고 여기에 우리가 있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버림받게 했을 때는,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버렸다는 말이 돼요. 예수님이 우리를 버린 거예요. 모든 인간은 예수님에 의해서 버림받은 겁니다. 마치 이 세상이 내 세상이라고 여기니까, 내 세상에서 추방시키니까 추방된 사람이 버림받은 사람처럼 여겨지지만 만약에 반대로 예수님의 세계가 진리의 세계라면 우리는 뭡니까? 진리의 세계를 언급해도 우리는 그걸 매몰차게 안 받는다고 하고 내쫓아버리는 것이 되죠. 그러면 누가 누구한테 버림받은 거예요. 천국에서 우리 인간 세계가 버림받은 것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믿는 자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내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입장에서 나 자신을 다시 보는 사람이 믿는 자에요. “아, 우리가 철딱서니 없이 까불다가 주님한테 버림받았구나.”라는 것을 아는 사람. 그렇게 알게 되면 예수님이 중요하겠어요? 내가 중요하겠어요? 예수님이 더 중요하죠. 바로 그런 자가 신자가 되는 거예요. 맨날 찔찔 짜면서 예수님이 나한테 해준 것이 뭐가 있어요? 우리 인생이 왜 이리 꼬입니까? 이러면 그건 예수님의 입장이 아니에요. 내 입장에서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생각했던 거예요.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찡찡거리고 짜증내고 하는 그 자체가 뭐냐 버림받아도 합당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얼마나 내가 나만 생각했기에, 얼마나 주님 보시기에 칠칠맞겠느냐, 주님 생각 안 하고 자기생각만 하니까, 저런 인간은 천국에 안 들어가는 것이 당연하지, 라는 예수님의 생각을 우리가 공유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자신에 대해서 변명이나 지 잘난 체를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예수님 입장이라면. 예수님을 버리게 된 속성인데 뭘 잘난 체를 하겠어요. 잘난 체 안 하겠죠.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버릴 때에, 인생 조져놨을 때에 우리가 불평하겠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동의하겠습니까? 나 같은 인간은 주님을 버릴 정도로 그렇게 질 낮은 인간이라면, 주님이 내 인생 내 뜻대로 안 해주고 완전히 엉망을 만들 때 우리는 거기에 동의하겠습니까? 아니면 불평을 하겠습니까? 동의하죠. 동의하잖아? 그지. 그게 성도의 삶이잖아요. 그게 감사한 거잖아요. 누가 나를 알 수 있겠어요? 주님 아니면 내가 어떤 존재라는 것을 누가 알겠어요? 그래서 신앙생활하면서, 신앙생활이고 뭐고 인생 살면서 어떤 불평이나, 불평보다 더 무서운 것이 불안이거든요. 불평은 뭐 좀 손해 봤다고 불평하는 거지만, 이 불안은 넉넉해도 불안하거든요. 불안이 더 무서운 거거든요. 너무 넉넉해도. 인도네시아 해변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면 인도네시아 해변가에 사는 사람들은 이렇게 따뜻한 경치가 있더라도 늘 불안하죠. 거기다가 과학자들이 틀려가지고, 이거는 대수롭지 않다고 하다가 이천 명이 죽어버렸잖아요. 피하지도 안했어요. 인간의 과학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것이 들통이 났어요. 인간의 과학도 믿을 것이 못 됐어요. 과학자 당신은 왜 예측 못했는가? 라고 하니까, 그렇게 급작스럽게 온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이렇게 말했어요. 과학은 옛날에 했던 것을 되풀이 했다는 그 조건하에 예측하는데, 땅이 올라와서 해일이 나는 경우는 있었지만 땅이 푹 꺼져서 해일이 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과학자 책임이 아니죠. 처음이라는데 어떻게 해요? 처음이라는데. 초범인데 봐줍시다. 초범이잖아요. 초범인데 이천 명이 죽었어요. 과학자 말 듣다가 피신하지도 못하고. 대수롭지 않다는데 뭐. 근데 문제는 우리의 매일의 삶이 초범이라는 겁니다. 10월 10, 11, 12, 13... 매일의 삶이 초범이라는 거예요. 이게 처음이라는 겁니다. 매일 매일이 처음이에요. 어제했던 것 오늘 못 써먹습니다. 며칠 전에 했던 것 어제 못 써먹고. 지금까지 한 것을 간추리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아예 내치고 버린다 할지라도, 우리 뜻대로 안 되고 엉망이 된다 할지라도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 쪽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을 내친 전력이 있기 때문에. 그런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주님 쪽에서 우리 뜻대로 안 해준다고 해서 우리 입이 당나귀처럼 나올 수 있는 어떤 권한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살려준 것만도 고맙게 여기세요. 이게 신앙의 기본이잖아요. 뭐 했다고 살아왔습니까? 뭐 잘났다고 살아왔습니까? 뭐 살만큼 잘한 짓이 있습니까? 없잖아요. 근데 버리신 분이 우리를 매일같이 살려내고 있으니까, 여기서는 우리의 착함이라든지 우리의 애씀과 주님에 대한 충성이 내가 사는 것하고는 상관없음을 우리가 파악해야 되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한테 잘 보이려고 애를 쓴 그 대가로, 그 열심과 그 공로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그것을 우리는 받아줘야 해요. 애가 뛰어놀고 예쁘게 잘 크는 것은 그만큼 주께 충성했기 때문에 준 보상이 아닙니다. 아무 상관이 없어요. 전혀 상관없습니다. 혹시 애가 감기 걸렸을 때, “하나님! 왜 저를 버리십니까?” 이러지 마세요. 그럴 때 지금까지 건강하게 해주고 살게 해 준 것 그것은 안 버린 것이 되잖아요. 그러나 우리가 인생 어떻게 살든지 간에 우리 인생의 총합은 예수님을 버리는 쪽으로 결론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우리의 어떤 인생을 살든, 험하게 살든, 착하게 살든, 편안하게 살든 간에, 어떤 인생이든 모아놓으면 그것은 그 자리에는 예수님이 필히 추방될 수밖에 없는 원칙이 그 안에 작용하고 있습니다. 마치 백인들 식구가 한 여섯 명이 되는데 흑인 하나가 거기에 입양되었다. 1살 때 입양되었는데 나이가 14세, 15세, 16세.. 쭉 자라잖아요. 같은 형제자매간에 그만큼 16년, 17년이 흘렀으니까, 근데 피부색이 까만 것이 하얗게 됩니까? 그렇지 않죠. 그러면 같은 형제인데, 왜 아빠엄마가 백인인데 흑인이 있어? 라고 어떤 이웃이 물으면, 다시 과거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거든요. 입양했다는 과거. 근데 우리네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열심히 살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도 항상 주님께서는 우리의 과거를 문제 삼는 거예요. 니 출발지가 하나님을, 예수님을 버릴 수밖에 없는 그런 성질을 가지고 줄곧 살아왔는데, 그 살아온 것은 니가 노력해서 살아온 것이 아니고, 버려진 분 예수님이 도리어 너희들을 계속 살려내고 있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왜 자기를 버린 분이 살려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계시는 그 성전은 인간에 의해서 하나님이 버림받았다는 그 원칙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유지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래요. 천국은 인간은 하나님을 배신했다는 그 요소로 구성되어 있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님의 보좌는 어린양의 보좌라고 해요. 어린양하면 어감이 어떻습니까? 어린양 하면 희생물, 죄 때문에 희생되었던 그 제물이 어린양이에요. 예수님의 별명이 뭐냐, 어린양이에요. 그러면 예수님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나는 사람에게 당했다는 그러한 흔적과 그런 근거가 예수님 안에 계속 지니고 있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장 7절에 보면 “그를 찌른 자도 볼 것이요”라고 되어 있다고요. 그를 찌른 자.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도마가 예수님한테 “당신이 예수님 맞습니까?” 라고 할 때에, “스승님 맞습니까?” 라고 할 때에 예수님께서 보여준 것이 뭐예요? “자, 인물 봐라!” 뭐 이랬습니까? 어디를 봤습니까? 손에 못자국과 옆구리 창자국을 보여줬잖아요. 창자국, 못자국을 보여준 거예요. 그 창자국. 못자국이 어디에 나있는 겁니까? 예수님이 부활했던 그 부활체에 나있는 거죠. 그 부활체에. 예수님께서 부활해서 찾아왔으니까. 부활체에 뭐가 있다? 창자국이 그대로 있고 못자국이 그대로 있다는 것은 뭘 뜻합니까? 예수님의 부활의 세계는 인간에게 버림받았다는 요소를 절대로 삭제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믿는 사람은 뭐냐 하면 “저는 개입니다. 저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라는 생각이 계속 쭉 영원토록 이어질 때, 그게 바로 천국이에요. 그 천국을 지금 살아있을 때, 죽기 전에 이 세상에 있을 때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교회에서나, 시장통로에서나,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늘 그게 살아있는 거예요. 지금 우리 가정을 살려내신 분이 사실은 우리 죄 때문에 우리에게 싫어버린 바 되신 분이 살리고 있다고. 그래서 우리는 콩 내놔라 팥 내놔라 하는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을. 그러면 그 가정은 천국이 되는 겁니다. 뭐, 온 식구 교회 나와서 고마워라 임마누엘~~ 등록한다고 해서 그 가정이 천국가정이 아닙니다. 아이가 성적표를 들고 와서 “엄마 나 수학시험 쳤는데 빵점 맞았어.” “빵점 맞은 너 같은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대신 돌아가셨단다.” 엄마하고 딸하고의 대화가 이렇게 된다면, 주변에 있는 낯선 사람들이 희한한 가정이라고 할 거예요. 애가 공부 안 했으면 나무라든지 해야 되는데, 뭐 공부 안 했다고 하니까 “공부 안 했다고 해서 섭섭하지만 공부 안 한 너 같은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대신 죽었어. 니가 공부 잘 했으면 얼마나 교만하겠느냐? 주께서 낮추고 낮춰 이제는 빵점까지 낮추고, 마이너스까지 내려가지 않고 빵점까지 낮춰서 니 마음을 교만하지 않게 하신 것을 주께 감사드려라.”라고, 이렇게 진정성 있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어요. 물론 신앙 티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겠지만.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죠. 자, 진도 나가 봅시다. 지금까지 한 것 여러분들이 아시겠죠. 예수님이 버림받았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 버리고 그냥 우리끼리 산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 없는 곳에 사는 거예요. 예수님 없는 곳이 뭡니까? 지옥이잖아요. 우리가 아예 지옥을 좋아해요. 우리는 천국을 싫어합니다. 나 때문에 누가 희생되었다는 그것이 우리의 약점인양 그렇게 여기고 있어요. 나 같이 완벽한 사람한테 어떤 사람이 내 다리 내놔라 하면 좋겠습니까? 전설의 고향처럼. 내 다리 내놔라 하면 안 좋잖아요. 내 약점을 쥐고 있는 분이 우리 집에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은 나한테는 큰 부담이 되잖아요. 왜? 나의 완벽함과 잘남을 누가 자꾸 질책하면 죽이고 싶을 거예요. 어떤 사람이 결혼하기 전에 전혀 남자의 과거를 모르고 아주 대단한 사람으로, 멋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결혼을 했다면, 왕진진하고 낸시랭인가, 만약에 그 대단한 사람하고 사는 친구 분이 “야, 니 잘난 체 하지 마! 니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내가 알고 있다.”라고 한다면, 입 막기 위해서 봉투 좀 줘야 되죠. “쉿! 가만히 있어. 다른 사람들은 내가 대단한 존재로 알고 있어. 하지 마! 니 다시 발설하면 흙에 파묻히는 수가 있어.” 이렇게 협박할 수도 있겠죠. 내 약점이 남한테 노출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근데 천국은 반대에요. “영원히 약점을 가진 사람이 되어라. 니가 끽소리 못하도록. 세상이 너를 칭찬한다 할지라도 너는 세상 앞에서 부끄러운 죄인인 것을 오히려 감사히 여기는 사람이 되어라.” “주님은 제가 버렸습니다. 내 인생, 내 설계, 내가 주인공이 된 세상을 설계하여서 주님은 아무 짝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우리가 믿었습니다.”하는 그런 식의, “내가 예수를 밀쳐내고 버렸습니다.”하는 자가, 이게 신자가 되는 거예요. 희한하죠. 이게 신자에요. 그걸 흔한 보편적인 공식에 의하면 “내가 천국 가는데 아무것도 한 게 없다.” 이게 우리가 흔히 아는 공식이 그 공식입니다. 내가 천국 가는데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이것을 적극적으로 이야기하면 아무것도 안 한 게 아니고 오히려 예수님을 내가 쫓아냈다가 되겠죠. 자, 그러면 이걸 제가 이야기하면서 그로 인하여 우리가 예수님 없는 세계를 꿈꾸고 있다는 우리의 본성이 들통 났고 그렇다면 오히려 주님이 우리를 버리심이 되는데, 우리를 주님이 버릴 때 뭘 버림을 당했는가, 그 이야기를 해봅시다. 좀 더 진도를 나가서 우리가 주님 앞에 버림받을 때 어떤 것을 버림받았는가? 우리의 약간의 자존심, 명예, 뭐 그런 것을 버림받은 거예요? 뭐 어떤 것을 버림받았습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과 공간을 다 버림받았어요. 시간과 공간을 처음에 강의할 때 했죠. 시온에 산돌이 있다고. 이런 인식, 이런 개념, 있다고 하는 것은 공간적으로 어떤 특정 지점에 늘 그 자리에 있다는 이런 인식 자체가 버려져야 될 인식이에요. 우리가 아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에요.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흘러가는 것, 공간이라고 하는 것은 특정지점에 거기 있는 것. 거기에 있고 시간이 흘러간다는 이걸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걸 파악하는 조건으로 나는 아직도 살아있다고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어떤 특정시간이나 특정 공간으로 주님께서 이야기를 하시되, 우리가 아는 그 뜻이 그 뜻이 아니라면 바로 우리는 주님 앞에 버림받은 거예요. 주님께서 이야기한 그 말씀, 이사야나 시편의 말씀에 대해서 우리가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된다는 것.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될 때 그 자체가 이미 우리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몽땅 다 버림받은 거예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 그러면 예를 들어서 2003년도에, 15년 전이죠. 2003년 7월 4일에 그 자리에서 어떤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나에게 친한 친구라고 할 때에, 우리가 버림받으면 뭐도 버림받은 거예요? 2003년 7월 4일에 친구 만났다는 이 기억도, 이거는 버림받아야 마땅한 추억에 불과한 겁니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내가 알고 있는 엮인 시간과 공간은 다 버림받은 거예요. 그걸 어떻게 아느냐 하면은 주님께서 이 말씀을 딱 하실 때에, 예를 들면 여기 7절에 보면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이거는 시편 118편 22절에 나온 말씀인데, 그 말씀을 딱 봤다고 합시다. 자 이 말씀을 보고, 여기가 만약에 신학교라면, 교수가 있다면, 제가 만약에 교수라면, “여러분 가운데서, 학생들 가운데서, 또는 전도사님들 가운데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손들어보세요.”라고 이렇게 하게 되면 사람들은 피식 웃을 수도 있어요. 근데 고지식한 전도사가 “교수님!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그래, 전도사님이 한번 이야기해보세요.” “건축자들이 건축하는데 돌이 안 맞는다고 해서, 건축 짓는데 돌이 필요 없다고 해서 그 돌을 버렸습니다. 버렸는데 그 돌이 옆에 있는 신축건물의 모퉁이 돌이 되었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교수가 “하나님께서 건축업자를 위한 계시를 주셨네요? 건축업자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인 시편 말씀이 건축업자, 이런 업자가 있다는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계시를 주셨습니까?”라고 물으면, 전도사님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뭐, 그러네요.”라고 하겠죠. 왜? 방금 설명한 것이 그거잖아요. 건축자가 집 짓다가 돌이 이건 안 맞는 거예요. 안 맞으니까 쓸데없다고 버렸잖아요. 쓸데없는 그 돌을 다른 업자가 건축할 때 모퉁이 돌로 세웠다. 그래서? 끝. 그래서 뭐? 그게 무슨 뜻인데?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농부인데 씨를 뿌렸다. 그래서 뭐? 이게 우리가 아는 시간과 공간이잖아요. 농사가 씨 뿌리는 거잖아요. 씨 안 뿌리는데 무슨 농사가 됩니까? 씨 뿌리는데 돌밭에 뿌려졌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런데 옥토에 뿌렸는데 열매 맺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 빤한 이야기. 뭐가 그렇게 어려워요? 어부가 고기를 잡는데 나쁜 고기 좋은 고기를 그물로 잡아가지고 상품가치가 있는 좋은 고기는 그물로 잡고 나머지기는 다시 바다에 버렸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게 무슨 뜻이냐 이 말이죠. 뜻을 모른다니까요. 왜? 버림받은 자는, 예수님은 우리에게 버림받았고, 우리가 버렸고,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를 버린 입장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버린 입장에서는 예수님이야기, 하나님이야기가 버림받은 우리는 알아듣지를 못해요.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하나의 예를 들게요. 사도행전 때 했는데, 사도행전에서 제가 핵심으로 내세운 것이 뭐냐 하면 사도들의 설교입니다. 사도들의 설교가 뭐였습니까? 그때 참석하셨으니까 기억이 납니까? 사도들의 설교의 요지가 뭐였습니까?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죠.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있다. 살아났다는 말은 보통 어떻게 이해합니까? 내가 살아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살아계시잖아요. 그분 어디계십니까? 살아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지만 굉장히 간단해요. 예수님이 살아계시죠. 근데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이냐 하면 사람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그 예수님이 살아 있잖아요. 예수님이 살아있든지 내가 살아있든지 둘 중에 하나를 해야 해요. 예수님이 살아있으면 우리는 뭐다? 우리는 죽었고. 우리가 살아있으면 예수님은 죽은 분이에요. 왜냐하면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한쪽이 한쪽을 죽였기 때문에 둘 다 살아있다는 개념 안에 둘 다 써먹을 수는 없어요. 예수님이 살아있으면 예수님이 사는 방식으로 우리는 안 살아있고, 우리가 사는 방식 같으면 예수님이 안 살아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거는 뭐냐, 사도의 설교는 바로 예수님이 살아있는 그 층, 새 공간과 인간이 살아있다고 말하는 현실공간과 이렇게 층이 몇 개다? 두 개다 이 말입니다. 층이 두 개에요. 하나는 영이고 하나는 육이에요. 영에서 육은 갈 수가 없어요. 아까 했잖아요. 땅에서 하늘로 가는 길은 없다고. 십자가가 완전히 끊어놔 버렸어요. 교회가 소용이 없어요. 교회 30년, 40년, 50년 다녀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배당 짓고 하는 것 아무 소용없어요. 목동에 유명한 교회 많이 있데요. 제자들 교회도 있고. 소용없습니다. 괜히 해본 짓이에요. 괜히 해본 거예요. 그게. 예배당 지어놓고 거기 출석하면 천당 가는 것처럼. 그렇게 느끼고 싶어서 해보는 거예요. 여기 신월동 사거리도 교회들 있잖아요. 행복한 교회도 있고. 바로 옆에도 중부교회도 있고. 소용없어요. 요가학원하고 같다고 보면 돼요. 요가학원하고. 건물 지어놓고 여러분들 유익이 되도록 가르치는 거예요. “여러분 이거 원하잖아요. 이거 채워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길이 없는데 뭐. 길이 없어서 못 가요. 길이 있으면 여기로 가시면 된다고 하면 되는데, 아예 길이 없다니까요. 아니 예수님이 길이라고 했잖아요. 예수님이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 그거는 예수님이야기잖아요. 그거는 예수님이야기죠. 예수님이야기의 특징은 우리는 알아듣는다? 못 알아듣는다? 못 알아듣는 거예요. 못 알아들으면 이거는 거짓으로 진리를 위장할 길밖에 없죠. 거짓인데 마치 알아들은 냥, 행세하는 그 사기밖에 내놓을 게 없어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래도 목사님 천국 간 사람이 있잖아요? 있죠. 있는데, 간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바로 어떤 식으로든 내 식으로는 천국에 갈 수 없었다는 것을 믿는 거예요. 예수님을 붙들면 된다고 하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붙드는 쪽이 아니고 버리는 쪽이잖아요. 붙드는 쪽이 아니라 버리는 쪽이다 이 말이죠. 저는 화투를 잘 모르는데요, 피사리는 별로 안 좋다고 합니다. 화투치는 사람의 견해에 의하면. 광이에요. 1월광, 3월광, 8월광, 비광, 똥광, 뭐 광이 좋다 이 말이죠. 그럼 화투를 쥐고 있다 이 말이죠. 광이 들어오면 신나죠. 광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광을 뽑기 위해서는 뭐 하나를 내보내야 하잖아요. 예수님을 뽑아서 내보는 거예요. 왜냐하면 가짜 예수는 채용하고, “야, 이거 광땡이네!” 진짜 예수는 피사리로 여길 수밖에 없는 속성을 우리가 지니고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고 잘하면 되지! 이게 안 돼요. 예수 믿고 잘하는 것은 뭐냐 하면 가짜 예수만 자꾸 손에 모으는 것이 되는 거예요. 교회 충성하고, 목사 섬기고, 선교회비 내고, 청소하고, 십일조 꼬박 내고, 애들 선도해서 하나님 믿으라고 하고, 사도신경 다 외우고. 이게 다 가짜들입니다. 길이 없다는 데 참. 길이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주님이 살아있는 순간 우리는 죽은 거예요. 죽은 놈은 죽을 수밖에 없는데, 죽은 자가 몸부림쳐봐야 죽은 것 외에는 나올 것이 없는데 어떻게 살아요. 죽은 인간이 몸부림친다고 삽니까? 성도의 특징은 뭐냐 하면 내 쪽에서는 죽었는데 왜 살려냅니까? 이 말이에요. 나는 백날 해봐야 죽은 것밖엔 없는데 왜 주님께서 이런 나를 살려내십니까? 하는 거예요. 이런 나를 왜 살려내십니까? 베드로전서에서 구약의 이사야하고 시편을 계속 집어넣는다고요. 그러나 백날 집어넣고 백날해도 이사야, 시편본문 그대로 보게 되면 아무 의미가 나올 수가 없어요. 8절 봅시다.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이거 뭐 어디 군화신어야 되겠네요. 자칫하면 발톱 나가겠어요. 그러면 돌 없는 곳으로 피해가면 되죠. 하나님께서 니 가는 길에 이만한 바위를, 거친 바위를 니 앞에 딱 꽂아 놨다 이 말이거든요. 그러면 이게 포크 레인 운전하는 사람들은 생각할 거예요. ‘내가 지난 어제 작업하는데 어디 큰 돌이 있다고 했는데, 아, 그 돌이야기구나.’ 이렇게 하지만, 포크 레인 운전하는 사람이 아니고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을 하는 사람은 언제 병원 한 가운데서 이만한 돌을 만납니까? 주님께서 언제 돌을 했습니까? 반석들을 언제 깔아놨습니까? 그렇다면 간호사가 ‘아, 이게 진짜 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인생 꼬이는 그걸 이야기하는 모양이다. 남자친구하고 헤어진 이걸 반석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지가 또 지 맘대로 생각하는 거예요. 지가 지 맘대로. 여기에 돌이라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십자가에요. 십자가인데 십자가의 특징은 뭐냐, 십자가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십자가를 준 게 아니에요. 한번 봅시다. 십자가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이 십자가가 아니에요.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부적이 아닙니다. 부적은 갖다가 붙이면 돼요. 여긴 교회니까 부적붙이면 안 되고, 부적을 붙였다 치고, 이상한 붉은 글자 있잖아요. 내가 가면 붉은 글자가 나와서 내 목덜미를 잡습니까? 그렇지 않죠. 부적을 붙여놔도 나는 안 다치잖아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으면 우리는 늘 안 다칩니까? 부적 같은 십자가는 안 다치잖아요. 십자가 믿으면 되니까. 부적은 붙이면 되니까. 나는 멀쩡하게 있잖아요. 근데 진짜 예수님이 찾아온 십자가는 내 인생 자체가, 예수님을 나한테 쓸데없는 거친 돌로 볼 수밖에 없는, 원리원칙이 통하는 인생으로서 자기 인생을 파악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지난 낮 설교했죠. 자기 육체를 위해서 심는 자는 썩어진 것을 거두죠. 근데 어떤 인간도 자기가 썩었다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무슨 썩은 존재가 이렇게 이뻐!”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고소영이 썩었어요? 유명한 탤런트가 썩었습니까? 한지민이 썩었어요? 썩어도 뭐 그렇게 이쁘게 썩었나? 소지섭이 썩었어요. 뭐 그렇게 키 큰 것도 썩은 것이 있나? 송재원이라는 유명한 일본순회공연 하고 온, 썩었나요? 어떤 인간도 자기가 썩었다는 생각을 안 해보죠. 썩었다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제 요양병원에 들어갈 때, 내가 약간 썩었나? 이제는 맛이 갔지. 맛이 갔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그 사람은 치매가 아닙니다. 이미 치매 걸리면 맛이 간 것도 몰라요. 지금 우리의 상태가 그런 상태에요. 악마에 휩쓸려서 이미 정신이 갔는데도 불구하고, 정신이 완전히 엉망진창인데도 나름대로의 자기 자신을 좋게 보는, 악마의 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지금 우리 상태가 그 정도로 썩었습니다. 썩은 것은 주께서 안 받습니다. 천국에서 받지를 않아요. 그런데 평생 살아온 것이 뭐냐 하면 썩을 수밖에 없는 것에 충성하면서 살아왔어요. 이걸 자기 헌신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자기 헌신 말고 뭐가 있어요. 자기 자존심과 자기 명예와 자기 이름에 헌신하는 것. 하루하루 하는 것이 전부 다 내가 이렇게 훌륭하다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아주 희생적인 자기 헌신을 하고 있잖아요. 자식 키우는 것도 마찬가지고. 모든 것이 자기 헌신이다 이 말이죠. 자기 헌신의 결과가 뭐라고 했습니까? 썩었다. 그러면 안 썩으려면 뭘 포기해야 합니까? 자기 헌신을 포기해야 하잖아요. 내가 나를 위하지 않으면 나는 누구를 위하라는 말인가? 대책 없죠. 주님을 위해서라고? 나를 놔두고? 미쳤어요? 주님한테 헌신해도 결국은 그 수익은, 이득은 누구한테 돌아와야 해요? 나한테 돌아오는 조건 같으면 내가 주님을 섬길게. 이게 우리 인간이 타고난 거예요.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인간은 타고날 때부터 썩음을 향하여 질주하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어떤 데에도 영생은 없습니다. 그러면 영생이 있는 자의 특징은 뭐냐, 지가 썩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 썩은 인간을 통해서 영을 끄집어내는 솜씨가 주님 솜씨라는 거예요. 이거는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죠. 주님을 버렸는데 천국 간다. 이게 누구 솜씨냐 하면 내 솜씨가 아니고 주님의 솜씨에요. 이걸 베드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 머릿돌이 되었다. 이걸 믿는 자가 천국 간다.” 이렇게 설명하는 거예요. 제가 방금 빨리 했는데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앞뒤를 아시겠습니까? 썩었다고 하는 데에서는 솜씨가 나올 수가 없고, 썩은 자가 천당 가는 것은 주님의 솜씨죠. 주님의 솜씨를 오늘 본문에서는 뭐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니가 구원받는 것은 니 솜씨가 아니고, 이사야나 시편의 말씀을 주님께서 니한테 적용시킨 그 결과가 뭐냐, 버림받았지만 오히려 버린 자를 구원하시는, 주님의 솜씨로 니가 구원 받았다는 것을, 그것을 믿는 자가 된다는 것이 곧 성도다 이 말입니다. 그게 주님의 일방적인 작품이기 때문에. 주님의 솜씨거든요. 그래서 나의 일은 없고 주님의 일만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죽었기 때문에. 사도의 설교가 뭐냐 하면 주께서 죽었다가 살아났죠. 죽을 때에 주님이 자살했습니까? 아니죠. 온 인류가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살았다 했을 때는 자동적으로 모든 인류는 이미 죽은 거예요. 고린도후서 5장 15절,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음으로서 모든 인간이 다 죽은 거예요. 따라서 믿는다는 것은 내가 실시하는 것이 아니고, 믿는다는 것은 결과적 생산물이에요. 믿는다는 게. 이 결과적 생산물을 두자로 하면 은사, 다른 말로 하면 이게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되는 겁니다. 선물에 대해서 우리가 더 보태고 빼고 할 게 있겠어요? 없겠어요? 선물은 선물 값을 고스란히 그대로 노출시켜야 되는 겁니다. 그게 가장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거예요. 백퍼센트 선물이에요. 우리 인생으로 돌아가 봅시다. 우리 인생이 과거에 동창생을 만나고 하는 그런 게 있었잖아요. 그런 것들은 다 주님 살아있음으로 해서 한꺼번에 밀물에 쓸려 내려가요. 아무 의미 없어요. 과거에 잘난 것, 과거에 에베레스트 산 등반한 것, 거기 왜 올라갑니까? 산소도 희박한데. 산소 많은데 놔두고 왜 올라가는지 모르겠어요. 산이 있기에 간다고요? 산이 있어서 간다면 바다는 왜 안 뛰어 들어가요? 바다도 있는데 바다에 뛰어 들어가지. 뭐든지 있으면 다 기어들어갈 것이 아닙니까? 연못이 있으매 연못에 빠집니다. 뭐 이런 거 있잖아요. 물귀신 되는 것. 무슨 핑계될 것이 없어가지고 그런 핑계를 대요. 자기 살아있다는 것을 존재증명하기 위해서 산에 올라가는 겁니다. 왜 그리 감추는지, 아니면 무식한건지. 아마 감출 거예요. 나 이만큼 잘났다 해서 산에 올라가는 겁니다. 저 뒷산에 가봐야 안 알아주거든요. 사실은 50미터 뒷산에 올라가도 되는데 안 알아주거든요. 그게 돈이 안 되고. 산소통 없이 올라가야 그게 돈이 된다 이 말이죠. 그 돈 가지고 내가 안 죽었다고 우기는 겁니다. 주님 보시기에 이미 죽은 자인데, 나는 아직 더 살고 싶다는 거예요. 주님만 살아있으면 돼요. 왜냐하면 주님만 살아있으면 우리는 삽니다. 요한복음 1장 한번 봅시다. 신앙이 되게 간단하죠. 들어보니까. 그죠. 뭐 내가 하겠다는 자체가 신앙에 방해되잖아요. 하겠다는 자체가. 여기 요한복음 1장 3절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믿습니까? 이거 뭐 북한의 김정은이든 트럼프든 누가 지었어요? 모든 만물은 누가 지었어요? 코끼리고 퓨마고 누가 지었어요? 예수님이 지었어요. 4절,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이 빛이라” 그러면 성도는 뭐냐, 주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빛이 되어서 들어오면 우리는 졸지에 그 빛 때문에 어두움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뭐냐 하면 이거에요. 풍등이에요. 풍등. 우리는 날아다니는 풍등에 불과합니다. 풍등, 애들이 하는 것 문방구에서 팔잖아요. 안에 등 들어있고 비닐로 된 것. 날아다니는 풍등. 여러분들은 신월동 풍등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 어두움밖에 없는 인간에다가 예수님이 뭘 집어넣어요? 생명을 집어넣게 되고 그렇게 되면 빛이 돼요. 빛의 자녀가 돼요. 그 빛은 우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빛이라고 우기면 어떻게 됩니까? 뭐가 죽어요? 예수님의 빛 되심이 가리어지겠죠. 그래서 이런 말씀을 주는 거예요. “말씀 똑바로 봐라!” 말씀 똑바로 보게 되면, 누가 우리를 구원하는가?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해요. 모든 말씀은 누가 지킵니까? 예수님이 지키는 거예요. 내가 지킨다고 하면 예수님의 공로를 가리는 것이 돼요. 그리고 우리가 말씀을 지키겠다고 하는 의도가 있어요. 내 가치와 내 자존심과 내가 더 살고 싶어서 예수 믿어요. 이것도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을 가리는 것이 돼요. 우리가 살라고 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내 맘대로 살았고, 내 맘대로 사는 것을 주께서 계속 살려주니까 계속 사는 거예요. 아무리 살고 싶어도 차 타다가 이만한 타이어가 트럭에서 떨어져서 정면으로 날아오면 죽어버립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인과관계를 우리가 다 알 수 없어요. 그 일이 일어난 원인의 변수가 한 두 개가 아닙니다. 우리가 파악을 못해요. 이거만 하고 첫째시간을 마칩시다. 우리는 그냥 당하면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우리는 당하면 당할 수밖에 없어요. 뭘 살았어요? 우리는 그냥 당한 거죠. 하늘의 별을 따지도 않고 하늘의 달도 따지도 않았어요. 그냥 당하면 당하는 겁니다. 죄용서 받으면 그것도 당한 거고, 용서 안 해주면 그것도 당한 거예요.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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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16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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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