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출 19:10-15 (하나님의 거룩성)
하나님의 거룩성2004년 11월 21일 본문 말씀; 출애굽기 19:10-15
19:1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케 하며 그들로 옷을 빨고19:11 예비하여 제 삼일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제 삼일에 나 여호와가 온 백성의 목전에 시내산에 강림할 것임이니19:12 너는 백성을 위하여 사면으로 지경을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지경을 범하지 말찌니 산을 범하는 자는 정녕 죽임을 당할 것이라19:13 손을 그에게 댐이 없이 그런 자는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거나 살에 쐬어 죽임을 당하리니 짐승이나 사람을 무론하고 살지 못하리라 나팔을 길게 불거든 산 앞에 이를 것이니라 하라19:14 모세가 산에서 내려 백성에게 이르러 백성으로 성결케 하니 그들이 자기 옷을 빨더라19:15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예비하여 제 삼일을 기다리고 여인을 가까이 말라 하니라
사람들이 하나님을 불러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진해서 인간들 속에 등장하시겠답니다. 그동안 이 인간 사회는 하나님을 허용하지 않고 지내왔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은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하늘 나라에서 조용히 지내면 되고 우리 더러운 인간들은 이 땅에서 그냥 살면 된다는 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하나님께 인간 세계에 침투하시겠답니다. 그렇게 되니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과연 거룩한 하나님과 인간들이 정상적으로 만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오직 '죽음'만이 있을 뿐이라는 점을 명백히 합니다.
사실 인간들은 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술 안주거리 정도밖에 취급하지 않습니다. 가볍게 여깁니다. 있어도 그만도 없어도 그만인 존재로 간주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을 본 사람들이 없으니 그럴 만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도저히 그럴 수 없습니다.
인간들은 비로소 하나님 앞에서 죽음의 진면목을 마주한 것입니다. 자신은 마땅히 죽어야 됨을 알게 된 것입니다. 죽어야 될 존재로서 서는 자신은 오직 두렵고 떨림으로만 하나님과 마주 설 수 밖에 없습니다.
히브리서 12:18-24에 보면, "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만한 불 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그 어떤 세상적인 요구사항도 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저 장엄한 두려움 외에는 모든 것도 비현실적 사실에 불과합니다. 죽음 외에는 아무 것도 현실일 수가 없습니다. 그저 환상의 조작에 해당됩니다. 거룩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는 사실읗 분명히 합니다.
이런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 인간임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보고 싶어 초청해서 생긴 현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통고해서 등장하신 것입니다. 이제부터 이스라엘 백성은 왜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시작하게 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을 얼마든지, 언제든지 이 인간 세상을 벌해버려도 무방합니다. 하지만 그 무서움은 오직 자기 백성들에게는 구원을 위한 무서움으로 나타내십니다. 이사야 6:1-6에 보면, "웃시야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 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에게 하나님을 역시 무서운 하나님으로 등장했습니다. 이사야는 얼굴이 하얗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자리에게 충분히 이사야를 죽여도 이사야는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 무서움은 곧 무서운 제단 불의 사용으로 이어지는데 그 제단 불은 이사야의 죄를 제거하는 식으로 움직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제거하시는데도 여전히 엄청난 무서움이 동원되고 그 무서움을 기반으로 해야한다는 원칙은 변동이 없다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무서움을 제단 위의 제물이 대신 받아낸다는 원칙을 준수해야 나올 수 있는 결과입니다.
이 하나님의 무서움은 신약에서 전혀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즉 '깊은 희생적 사랑의 강도'로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무서움 하나님은 신약 때 와서 인간들로부터 형편없는 대우를 받고 도리어 죽임을 당하는 분으로 등장됩니다. 왜 그래야 하느냐 하면, '은혜 위에 은혜'로 하나님은 계시하시기 때문입니다.
쓴 약을 달콤한 당위정으로 둘러싸서 쉽게 먹을 수 있도록 한 것처럼, 예수님의 움직임 하나 하나에는 하나님의 무서움이 다 담겨있고 서려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하나님의 무서움을 대신 희생당함이라는 일관적 정신 속으로 계속 쓸어넣고 계십니다.
급기야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노의 진면목을 대신해서 다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고 저주받으신 것입니다. 이러한 희생은 하나님의 무서움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해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더 이상 하나님의 거룩에서 나오는 저주가 전달되지 않도록 자신이 차단막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인간이 받을 수 있는 모든 수모와 받기 위해서 철저하게 약한 모습을 보이십니다. 사람들로부터 주저없이 뺨을 맞으시고 옷 벗김을 당하는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사정없는 채찍에 노출된 육체를 맡겼습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평소에 인생이 힘든다는 이유만으로 사정없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원망의 소리를 퍼붓는 그 교만함을 들추어내기 위해 인간의 그 어떤 수모보다 더 낮은 위치에서 인생을 살아가시는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로서 그 어떤 인간도 예수님 앞에서 죄인 아니다고 할자가 없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움은 다 예수님이 당한 고통의 몫으로 되돌아오는 겁니다. 이로서 구약 때의 무서운 하나님의 무서움 못지 않고 신약 때의 희생적 사랑의 깊이가 더 충격적으로 성도에게 다가오게 됩니다.
사도는 이 복음을 증거하는 자들인데 이들의 인생은 어떠하겠습니까? 고린도전서 4:9-13에 보면,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 땅에서 쓰레기 같은 취급을 받으면서 살아가므로서 하나님의 희생적 복음 원칙은 계속 우리들에게 전달됩니다. 과연 사도들이 억지로 이 길을 갔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복음의 세계 안에 들어가 있기에 복음이 주는 기쁨이 이러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좌절하지 않게 합니다.
억지가 아니라 예수님의 자비하심에 감격하면서 그 길을 간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힘든 인생살이로 해서 하나님께 원망한 것을 용서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