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적 세계관 181008
20181008a 부산강의 : [시편]14(7편)-언약적 세계관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7편 6절. “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사 내 대적들의 노를 막으시며 나를 위하여 깨소서 주께서 심판을 명하셨나이다”
성경을 보게 되면 어딜 봐도 비현실이에요. 고요한 사회생활에 무슨 심판을 명하시고,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시비 거는 느낌, 하나님께서 인간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나신 것처럼 느껴지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은 시편 7편 같은 내용들은 늘 그런 게 아니고 일시적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크게 잘못된 생각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여기 11절에 보면, “하나님은 의로우신 제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죠. 성격이 이상하죠. 사람도 한 번 화냈으면 그 다음엔 휴전하든지 쉴 만도 한데 하나님은 에브리데이에요. 매일같이 분노하시고 심판하셔요. 성경에서 이렇게 돼있으니까 사람은 성경을 외면합니다. 현실성이 뚝 떨어졌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거의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성경은 현실과 안 맞다. 왜냐하면 성경대로 살려고 덤벼들어보잔 말이죠. 성경대로 살려고 보는 순간 달라도 너무 다르니까 우리가 세상 살아가면서 갖고 있는 정서와 너무 다르잖아요. 지난 강의 제목에 정서가 들어갔지요(구조와 정서). 우리 정서와 너무 다르니까 외면하고 싶고, 또 한 가지는 구태여 성경에 집중하지 않더라도 사는데 아무 지장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것을 관행이라고 이야기했지요. 관습, 관행, 습성, 습속, 몸에 배였다는 말. 뭐가 몸에 배였냐 하면, 어느새 우리는 이 세상이 가져다주는 환경이, 외부 환경과 내부 환경이 교류가 돼버렸어요. 내 안에서 발생된 것과 외부의 것이 적응이 잘 되다보니까 세상 환경 자체로 사는데 충분하다, 모자람이 없다, 만족스럽다, 잘 적응했다. 그래서 고요하다.
어제 오후 설교에서 잠깐 언급했는데 이 점을,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잖아요. 창조하셨다, 끝. 그렇게 되는 겁니까? 창조하고 난 뒤에 뭔가 하나님 쪽에서 창조 잘됐다, 못됐다를 측정할 수 있는 어떤 형식을 하나 따로 추가해서 마지막으로 만든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안식일을 만들었거든요. 창세기 1장에서 2장 넘어가면서 모든 걸 다 이루시고 그 다음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돼있죠.
안식, 그냥 쉬시는 것. 그냥 쉬지 않고 다음에 일하기 위해서 쉬면 안 되겠지요. 그럼 안식이 안 되니까. 만족스런 상태의 지속이 안식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시고 자기 평가에 나서십니다. 내가 만든 것이 잘됐을까, 못됐을까 했을 때 그 평가를 어떤 식으로 측정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안식하시면 그건 누가 뭐래도 잘된 거예요.
그럼 오늘 본문처럼 전쟁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가 있다는 말은, 무슨 상태를 유지하려는 하나님 자체적인 정화활동이냐 하면, 하나님의 안식, 만족스런 상태를 지속하기 위해서 내부적으로 쉴 새 없이 전쟁과 심판이 계속해서 이어져야 되는 겁니다. 창조는 다 했어요. 창조 내부에 계속해서 뭔가 들썩거리고 아주 분주하고 그래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안식하셨다는 틀을 깨지 않으려는 하나님 자체적인 시도가 되는 겁니다.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인간세계는 복잡하지요. 혼란스럽고. 하나님은 안식하는데 인간들은 안식합니까? 안식하지 않지요. 인간이 안식하든 말든 상관없이 주님께서는 이 세상은 만족스런 안식 상태란 말이죠. 안식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이 땅에 필히 하나님에 의한 작용이 세상 속에 계속 일어나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한 걸 정리하게 되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변화와 갈등과 혼란과 혼선, 태풍, 화산폭발, 지진, 그리고 해일, 그리고 휘발유저장고에 불이 난다.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위함입니까? 하나님의 자기만족과 자기 안식을 위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참 이기주의죠. 정말 이기주의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밖에 몰라요. 그리고 피조물 보고 그걸 따르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만족만을 위하여 너희들이 있다는 것을 너희가 따라야 된다.
장기에 보면 상象이 있어요. 이게 코끼리죠. 그런데 코끼리를 문자로 얇은 판에 집어넣으니까 마음대로 부리잖아요. 그런데 장기판 상이 실제로 코끼리라면 장기판 다 부술 거예요. 그런데 실제 코끼리가 아니고 문자화해서 집어넣은 거죠. 그러니까 장기 두는 사람이 코끼리를 부리는 거죠. 그 다음에 말 마馬도 있지요. 포包도 있고 차車도 있고. 이걸 부리는 거예요. 일종에 가두는 거예요. 장기 알속에 코끼리와 말과 차의 기능을 묶어놓았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면 아담이라고 누가 이름을 지었습니까? 아담이 아담이라고 지었습니까? 인간이 인간 이름을 짓진 않지요. 중요한 문제입니다. 진짜 중요한 문제에요. 왜냐하면 이름을 지으실 때는 그만한 목적과 이유가 있단 말이죠. 젊은 사람이나 늙은 사람이나 내 인생 왜 이러나, 내 인생 어디로 흘러가느냐, 도대체 존재의 의미를 모르겠다. 특히 남자들 가을 되면 호르몬 작용 때문에 굉장히 쓸쓸해하고, 모르는 여자가 아름답다하고. 아무도 편지를 받아주세요.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아는 여자는 식상하기 때문에 모르는 여자는 다 아름다워요.
그럴 때 인간이 사는 목적과 이유를 묻기 전에 나에 대해서 하나님을 나를 뭐라고 부르는지부터 알아야 됩니다. 나를 사람으로 불러주잖아요. 아담으로 불러준다고요. 아담으로 불러준다면 하나님의 게임 판에 우리는 이미 인간으로 장기 알 같은 기능을 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하는 것은 단순히 쉽게 하기 위해서 하는 건 아니고 구약성경에 욥기가 바로 이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영이 존재지요. 하나님과 천사니까. 악한 영 악마와의 내기에서 욥은 장기 알처럼 다뤄지고 있습니다. 욥을 장기 알로 봅시다. 욥을 옮기죠. 아픈 데로 옮기고, 자식 열 명 죽이는 쪽으로 옮기고, 모든 재산 다 날아가는 쪽으로 옮기고, 아내까지 자기를 원망하는 쪽으로 옮기고. 이렇게 하나님께서 욥을 장기 알로 다룰 때 욥이 자기 위상을 모르고 내가 그냥 죽고 싶다고 이야기해요.
이것은 욥이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이 지어준 이름이거든요. 하나님의 기능 안에 본인이 갇혀있다는 생각을 못하고 자기 인생을 자기가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자살하면 벗어날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하는 거예요. 차라리 이럴 거면 태어나지 말았으면. 자꾸 자기가 장기 알이란 생각을 못하고 장기 알에서 족쇄에서 스스로 벗어나려고 하는 거예요. 장기 알 상, 코끼리가 기호에서 벗어나면 장기 안 됩니다. 코끼리가 장기판을 밟아버리는데 장기가 되겠습니까?
인간은 못 벗어나는 게 인간이에요. 피조물이니까. 벗어날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규정한 그 규정에서 못 벗어납니다. 욥이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욥기를 통해서 인간에 대해서 인간이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 백성들이 모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욥기가 성경에 포함돼있어요. 욥기를 통해서 나라는 것은 홀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것, 나의 의미나 나의 가치란 것은 내가 스스로 노력하고 생각해서 밝혀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욥이 발악을 해요. 자기가 너무 힘드니까. 하나님이 왔다 갔다 해서 힘드니까. 그때 욥 주위에 같은 장기 알이 등장해요. 세 개의 장기 알이 들어갑니다. 친구들이죠. 친구들이 욥과 부지런히 대화를 합니다. 이 대화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을 따로 논다는 사실. 참 이걸 알면 인간에 대해서 거의 다 알았다고 할 수 있어요.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타인과 하나가 안 된다는 사실, 이것 아시면 여러분 인생에 대해서 거반 다 안 거예요.
부부? 부부 같은 소리하고 있네. 동거인이죠. 절대로 하나 될 수 없어요. 자식이요? 내 몸에서 태어났다고 내 것? 아닙니다. 인간은 혼자 태어나서 혼자 가는 거예요. 인생이란 것은. 아무도 같이 나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내 생각을 공유할 수도 없어요. 제가 수련회 때문에 아가서를 계속 공부하고 있는데 내가 내린 결론은, 사랑은 없다, 에요. 사랑은 없는데 사랑은 착오라 했어요. 루소가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이 누굴 사랑한다는 것은 본인이 했던 착오에 불과하다. 본인의 생리작용이 남에게 상상력을 부여해서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한다고 착오를 일으킨 거예요. 착오는 고장 난 거죠. 내 몸이 고장이 일어나서 저 사람을 사랑한다고 한 겁니다. 루소니까 세상적인 안목이에요. 계속 공부하는 중입니다만 성경에서 아가는 이게 하나가 돼요. 그 메커니즘을 살펴보고 있는 중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해도 사랑은 착오에요. 왜냐하면 자기가 건재하기 때문에. 30년, 40년, 50년 살아도 어젯밤에 나를 욕하거나 약간만 싫은 소리해도 우리는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아무리 상대가 과거에 많이 해줬다 해도 내 가치를 훼손할 경우에는 달려들게 돼있어요. 마치 개한테 돌 던지면 덤벼드는 것처럼. 우리는 나를 건드리면 누구에게든지 덤벼드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그걸 참는다고 언제까지 참아지진 않아요. 모든 참는 것은 무의식으로 가고 무의식이 의식을 지배하게 돼있어요. 정신과 의사들은 이야기하죠. 인간 행동의 90%가 무의식이라고. 그리고 무의식을 쪼개보면 거기에 과거라는 것이 흐르고 있다고. 과거에서 내가 의식, 참아야 됐기 때문에 양보했던 그것들이 없는 게 아니고 깊은 지하창고에 다 모이는 겁니다. 서양엔 포도주 오크 통 같은 게 있지요. 미국이라면 차 수리에 필요한 기구들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