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80914a야4장1절(싸움)-이 근호
안양20180914a야4장1절(싸움)-이 근호
시작하겠습니다. 야고보서4장1절,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여러분, 성경보실 때에 해석이 의외로 간단해요. 너희 싸움이 어디서 나오느냐, 다툼이 어디서 나오느냐, 이렇게 하거든 지금 주님이 보시기에 우리가 싸우고 있다고 보시면 돼요. 해석이 굉장히 쉬워요. 니가 살인하지 말라. 무슨 뜻이다? 이미 우리가 살인하고 있는 겁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주님 보시기에 니가 얼마나 인격이 고매하냐 훌륭하냐를 보는 게 아니고 하나님 내가 너를 만들었다는 거예요. 내가 너희 몸을 만들었으니 너희 육을 만들었으니 너희가 어떻게 살아가고 어떻게 행동하는 것을 내가 뻔히 안다는 겁니다. 어떻게 아시는가 하면 그 몸이 처해있는 환경조차도 주님이 조성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지고 보면 위에서 보면, 주기도문 여러분이 외우시잖아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그 다음에 무슨 말입니까? 땅에서 이루어지지요. 무척 쉬워요. 하늘에 구름이 이동하잖아요. 땅에 반드시 그림자 생기는 겁니다. 이거 철학가도 몰라요. 과학자도 모릅니다. 세상에 어떤 것도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그대로 복사판이에요. 이 지상은 복사판으로 그대로 가는 겁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의논한 대로 그냥 가는 거예요.
이것을 제가 이렇게 한 번 적어보겠습니다. ‘말씀 앞에서 모든 것이 사라진다.’ 말씀 앞에서. 인대가 문제가 있어서 아프잖아요. 아프고 하지만, 말씀 앞에 서게 되면 아픈 나마저도 말씀 앞에서 그것이 나가 사라지고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내 몸의 인대가 나갔다 하는 그런 식으로 되어버립니다. 고민한다. 걱정한다. 특히 장래에 대해서 염려한다. 이건 아직도 자기가 안 사라져서 그래요.
말씀이 엄연히 있으면 말씀 앞에서 우리는 없는 거예요. 없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첫 번째 시험이 그거였어요.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 이리 되어있거든요. 말씀은 말씀 온 쪽으로 가버려요. 그런데 떡을 먹어버리면 떡을 먹는 모든 매사가 떡을 먹는 나에게 치중하게 되어있어요. 그럼 오늘 떡을 3개먹을까? 4개먹을까? 이것조차도 우리한테는 고민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우리가 하루에 살면서 여러 가지 걱정 고민되는 것은 염려되는 것은 두려워하는 것은 아직도 자기가 살아있어서 말씀을 가리기 때문에 그래요. 말씀을 대체하기 때문에 그래요. 교회 왔을 때 말씀을 딱 들을 때는 은혜 받는 현상이 어떤 현상이냐 하면, 교회가기 전에는 내 생각하다가 예배당 마치고 나서는 내 생각하지 않아야 그게 은혜 받는 겁니다.
이제 집에 가면 어떤 번거러움이 있더라도 그건 내가 고민할 문제가 아니지요. 걱정할 문제가 아니다 말이죠. 그것조차도 말씀의 체계 속에 이미 예비 된 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존재가 예비 된 거예요. 그런데 싸운다는 말은 뭐냐 하면, 그런 것을 염두에 두시고 4장을 다시 한 번 봅시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되어있지요. 왜 싸우지? 왜 싸움이 일어나지? 라고 지금 나무라시는 거예요. 추궁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알아야 되겠지요. 싸움이 왜 일어나는지.
싸움이란, 타인을 지배하기 위해서 싸움이 일어나는 겁니다. 지배하는. 남을 지배한다는 반대말이 뭐냐 하면 사랑이라는 겁니다. 사랑하는 사이에 싸웁니까? 안 싸우지요. 사랑하지 않는 관계에서는 필히 싸움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학교 다닐 때 째려보잖아요. 그게 일종의 지배에요. 남을 통제하는 겁니다. 왜 남을 통제하는가. 오늘 몇 분 안 오셨기 때문에 어렵게 가봅시다.
진짜 어렵게 갑니다. 나라는 것은 타인이 나를 바라보는 것을 보면서 나라는 것이 정립이 되는 겁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 거야, 보는 동시에 나라는 것이 부각이 돼요. 나라는 것이 부각이 됩니다. 드라마 볼 때는 나가 생각이 안나요. 드라마 보는데 누가 갑자기 들어올 때는 갑자기 옷매무새를 이렇게 하고 자기가 자아의식이 되거든요.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거기에 맞추어서 나라는 것을 이렇게 구성을 하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남을 왜 지배하느냐 하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무례하게 요구하게 되면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방어하는 기제가 돼요. 메카니즘. 방어하는 작용을 하게 됩니다. 자기가 자기를 방어하는 것은 그걸 한 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꿈이라는 거예요. 꿈은 왜 꾸느냐 하면 자기가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꿈은 평소에 자기가 자기를 방어하는 것. 사람이 이렇게 낮에 잠자지 않고 깨어있을 때는 그냥 고요하게 깨어있는 게 아니에요. 끊임없이 자기를 방어하면서 있습니다. 그 방어는 뭐냐 하면 남들이 요구하는 것이 내가 감당이 될까, 안 될까를 늘 측정하는 거예요. 쉴 새 없이. 차를 운전하는데 노란불이 왔다. 갈까 말까 갈까 말까. 이게 가도 되고 안가도 되고. 만약에 안 가게 되면 뒤차가 와서 갈 줄 알고 박을 수도 있고 가게 되면 경찰한테 걸릴 수도 있고.
그게 뭐냐 하면, 노란 불이라 하는 것은 타인이에요. 타인의 현상이에요. 나한테 뭔가 요구를 하는 거예요. 노란불, 초록 불, 전부 다 외부에서 일어나는 게 전부 다 요구를 하는 거예요. 남편이 와서 밥 달라 전부 다 요구를 하는 거예요. 할 때 내 스스로 나를 보호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밥을 차려줘, 말아, 노란 불에 갈까 말까를 늘 이렇게 신경 쓸 수밖에 없어요.
과도한 자기 방어가 나중에 뭐로 되느냐 하면, 이게 한 자로 한이 맺히는 겁니다. 한이 맺혀요. 한이 맺혔기 때문에 이것은 타인이 요구하는 것을 내가 못 들어준다는 데서 오는 억압감이거든요. 억압이란 말이죠. 예를 들어서 시어머니가 며느리한테 몇 일 전부터 와가지고 전지지라고 할 때 지금 직장생활 하는데 전지지라고 할 때 뻔히 알면서도. 그게 “아이고, 바빠서 못 갑니다.” 순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러나 말은 말이고 막상 마음속에 남는 게 있어요. ‘시어머니가 내 뻔히 직장을 알면서 왜 그런 이야기했을까?’그만두라는 이야기였을까? 이건 내가 감당이 안 되는데. 나는 지금 직장을 다녀와 우리 가족이 보호가 되는데.’ 나 자체를 타인이 공격을 하니까 뭔가 한이 맺히겠지요.
한이 맺힐 때는 자기를 보호하는 자동적으로 이걸 풀어야 되겠지요. 이걸 푸는 게 뭐냐 하면 복수에요. 복수하는 거예요. 시어머니한테 전화 받고 난 뒤에 갑자기 남편한테 함부로 대하는 이유가 복수입니다. 복수는 어디서 나오느냐, 한이 맺힌 거예요. 그러면 현재 나를 유지하려면 타인이 계속해서 감당 안 되는 것을 요구하면 안 되겠지요. 그래서 타인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지배를 해야 되는 거예요.
그 지배가 뭐냐 하면 싸움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타인이 너무 강해서 복수가 제대로 안될 때는 그건 4자로 새벽기도라는 게 있어요. 쭈여! 쭈여! 믿씁니다. 한 맺혀서 그래요. 전부 다. 교회 가는 이유가 한 맺혀서 가는 거예요. 인간의 본능은 나를 보호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인간은 어디서 생겼다? 남들이 나한테 요구하는 대로 부흥을 해줬는데 갈수록 과도하게 밀어오는 거예요. 현재 내가 감당 안 되는.
인간은 자아가 형성되고 난 뒤에 지켜야 되는데 과도하게 들어오니까 억지로 맞춰주는데 스트레스는 계속 쌓이고, 안 풀면 내가 망가지고 폭발할 지경 같아요. 진짜 폭발해버리면 이건 자살이지요. 결국은 뭐냐 하면 타인과 싸워야 되는데 타인하고 못 싸우니까 누구하고 싸우느냐 내가 나하고 싸우는 거예요. 내가 나하고 매일 싸우는 겁니다.
근본적으로 문제가 뭐냐 하면, 제가 처리해 드릴게요. 말씀 앞에서 자기가 안 사라져서 그래요. 사라져야 되는데. 갈수록 생생해져 버렸어요. 교회 가서 성경공부를 하고 백날해도 내가 버티고 있는 이상은 지금은 고요하지만, 내일 돼서는 무슨 또 난리를 쳐서 나에게 한 맺힐 일이 또 생길는지 미리 당겨서 불안 불안한 겁니다.
사람이 자기가 사라지게 되면 내일도 없어지거든요. 그럼 내일 걱정은 미리 당겨서 할 필요가 없어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현장성’ 또는 ‘현재성’ 요게 무슨 특징이냐 하면, 말씀의 특징이에요. 말씀 속에 자기가 있는 사람은 내일을 걱정하지 말고, 내일 염려는 내일 할 것이고, 지금 주께서 말씀이 어떻게 나에게 현재 있게 하느냐, 현재 나를 나답게 있게 하느냐를 보는 겁니다.
인대가 아프잖아요. 그럼 지금 병원에 계시다. 그럼 병원에서 내 할 일은 뭐냐 하면 말씀이 계시는 우리 주님께서 나를 이 자리에 왜 있게 하셨느냐 그것만 생각하면 돼요. 아~ 주께서 있게 하셨구나! 그 순간 아픈 나는 없어지고 아파야 되는 역할이기 때문에 아~ 아프자. 그래. 나을 때까지 아프자. 그랬는데 돈은 얼마 들어가고 성경공부 참석 못하고, 추석은 어떻게 보내고, 이상한 엉뚱한 이단 섬기다가 걸렸잖아....., 그런 타인의 또 뒤 담화 걱정되고, 내가 지금 뒤 담화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온갖 생각을 다한다는 것. 이 자체가 결국은 자기가 자기를 관리하려고 하는 꼭 붙드는 거예요. 안 빼앗기려고. 남한테 흠집 안 나려고. 평생을 그리 살아갑니다. 평생을.
아무리 수십억을 벌어줘도 소용없어요. 인간은 자기가 사라지지 않는 한 마귀는 귀신은 계속해서 찾아오는 겁니다. 계속해서 찾아와요. 교회 옮겨도 소용없어요. 끊임없이 찾아들어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데 하늘을 차단시켜 버렸어요.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는데 부산강의인데. 마귀가 어디 있습니까? 마귀를 볼 생각하지 마세요.
마귀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자에요. 존재는 하는데 우리가 여기 존재한다는 식으로는 존재하지 않아요. 이걸 더 쉽게 하면 보이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게 마귀에요. 그래서 우리는 마귀를 볼 생각을 하면 안돼요. 마귀를 만약에 보고자 하면 마귀를 자기가 변장해 버려요. 그리고 정 마귀를 보고 싶으면 제가 보여드릴게요.
왜냐 모든 인간은 마귀의 변신체입니다. 마귀가 모든 인간으로 변할 수가 있어요. 태연하게 대통령으로 변하고 장관으로 변하고 모든 인간은 마귀의 다양체로 보면 됩니다. 귀신들의 다양체. 그래서 이렇게 거리에 나가서 만나보면 귀신에 실려 있는 자동차 대하듯이 전부 다 길거리에 대할 거예요. 그들이 존재로서 마감되는 게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존재자를 실어 나르는 운반체로서 걸어 다니고 돌아다니고 있는 겁니다. 장사하고 지하철타고 그런 거예요.
모든 인간은 마귀가 노리고 있습니다. 다루고 있어요. 그래서 마귀를 보고 싶으면 사람을 보면 되고요. 몇 일 되면 또 추석되잖아요. 온갖 멀리 있던 마귀들 다 옵니다. 귀신들 다모여요. 고스톱치고 소주 한 잔 먹고 땡깡 치고 형님은 그러는 게 아닙니다. 그런 소리하고 온갖 소리 나오지요.
중요한 것은 마귀의 기능이 뭐냐 하는 거예요. 마귀가 보고 싶다 보다도 늘 보고 있으니까 하는 일이 뭐냐 하면, 제가 차양이란 말을 쓸 겁니다. 차양, 햇빛을 가리는 것. 이 인간 세계를 이게 고린도후서4장4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 신이 일종의 엄브렐라 우산같이 해가지고 인간으로 하여금 주님의 말씀을 못 보게 차양, 태양을 가리듯이 가려버리는 역할.
두껍게 가려버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인간이 아무리 성경 말씀을 율법을 가지고 특히 유대인들은 율법들 가지고 했잖아요. 유대인들이 아무리 뚫어도 이게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을 놓지를 않으니까 내가 나를 못 놓으니까 말씀을 백날 지켜봐야 아무리 올라가도 자기 세계 이외에는 달리 다른 세계를 꿈꿀 수 없어요.
천국도 자기 세계, 지옥도 자기 세계, 자기로부터 자기를 벗어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고 있으니 모든 걸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든, 예수든, 교회든, 십자가든 나를 위해서 있다 보니까 자기가 자기를 발목을 잡으니까 이게 두꺼운 차양 막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삼겹살이에요. 오늘 제목을 삼겹살로 할까.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그러다가 뭔가 하나 일 터져버리면 사람이 경직이 되고 마비가 되어버려요. 우짜노? 어떻게? 어쩔거나, 큰일 나서 절망하고.
사람이 절망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가 자기를 지키려는 식으로 살아왔다는 티를 내는 거예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로마서14장에 가볍게 나와 있잖아요. 가볍게. 정말 툭 던져져 나와 있는데 그 성경 말씀도 전혀 삼겹살 때문에 먹혀들지를 않는 겁니다. 말씀의 세계가 삼겹살 이 차양 막 때문에 안에 들어오지를 못하는 겁니다.
간단한 문제거든요. 주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예수를 믿어라. 이게 아니에요. 오늘 제목은 두 자입니다. ‘놔라’ 너에서 너를 놔버려라. 놔버려라. 어차피 지금까지 니가 니를 만드는 게 아닌데 왜 자꾸 오인하느냐. 오인은 뭐냐 사태를 잘못 파악하는 것을 오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서 사태를 잘못 파악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아는데 오류를 일으켜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오인과 오류를 수정해 줄 사람이 옆에 타인들이 없어요. 유일한 타인은 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와서 우리에게 타인으로 등장했을 때, 유대인이나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한테 잘 보이려고 이렇게 하면 됩니까? 저렇게 하면 됩니까? 아이고, 훌륭하십니다. 했다고요.
그것은 뭐냐 하면, 자기를 놓지 않은 상태에서 주님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고 시도한 겁니다. 그런 점이 있잖아요. 복음을 어떻게 하면 소유할 수 있습니까? 구원은 어떻게 하면 소유할 수 있습니까? 천국은 어떻게 갈 수 있습니까? 그런 질문들이 자기가 자기를 안 놓으려고 하는 그런 삼겹살 밑에 차양 대 밑에 인간의 본심을 그대로 노출한 겁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게 되면 마태복음10장을 보면 아주 간단해요. 니가 발목이 하나 나가더라도 나머지로 지옥 불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낫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여러분, 그 말씀 들어본 기억나십니까? 마태복음10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28절을 제가 한 번 읽어볼게요. 읽어보고 혹시 여러분이 이 성경 가운데 이런 경험이 있거든 딱 순간이다 보시면 돼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쉽게 말해서 이혼에 대해서 걱정하지 말라, 이 말이에요. 확 다가오지요. 실감나지요. 애가 세월호에 빠져죽어도 신경 쓰지 말라는 말입니다.
마태복음10장28절,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그 다음에 뭡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서 그게 잘못 생각한 거죠. 자기가 누군지 잘못 생각해가지고 떨어도 너무 떤 거예요. 그동안. 평생을 벌벌벌 떨면서. 잠이 오지 않습니다. 뭐 잠이 안 오는 건 할 수 없지만. 잠이 안 오면 드라마 보면 되지요. 강의 들으면 잠이 옵니다. 그런 간증하는 사람 많습니다.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이 말씀은 우리 강의 처음에 이야기했어요. 성경말씀 해석은 간단해요. 지옥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니 그 몸 가지고 지옥 간다는 이야기에요. 해석 참 쉽지요. 지옥 이야기 나오거든 지금 니가 가고 있다고 보시면 돼요. 니가 두려워한다는 말은 지금 니가 두려워하고 있다고 보시면 돼요. 그게 말씀만 살아있고 그 앞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말씀이 말씀되기 위해서 우리를 만들어놨거든요. 이게 믿음 아닙니까.
내가 믿는 예수를 내가 예수 믿는다는 그 나의 결심을 안 믿는 거예요. 참 쉽지요 잉. 정말 쉬워요. 두 번 다시 내 믿음으로 지긋 지긋한 내 믿음 쥐는데 다시 돌아가지 마세요. 악마가 계속 예수님 시험한 그 대목가지고 계속 시험하는 거예요. 니 떡으로 먹어야 산다고 계속 인간에게 평소에 인간이 스스로 자기한테 못 벗어나고 자기한테 발목 잡혔다는 걸 뻔히 알기 때문에. 누가? 존재하지 않는 존재자가. 마귀가 그렇게 했어요.
우리는 마귀 나와! 단칼에 죽이려고 하는데 마귀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자이기 때문에 우리의 싸움의 상대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존재하고 있고 저쪽은 영물이잖아요. 잡힙니까? 이게. 그리고 마귀를 이겨도 문제가 돼요. 마귀를 이기면 이겼다는 내가 나를 또 붙잡게 돼요. 요번에 사도행전 수련회에서 했잖아요. 사도행전에서 보면 악귀가 사도바울에서 뭐라고 평합니까?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니는 누구냐? 그러니까 예수님에 의해서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은.
성령 받은 사람이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악귀도 알아요. 지금 내가 다룰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스게와의 일곱 아들은 이건 성령도 안 받아놓고 눈에 보이는 존재자를 존재 본인이 다루려고 한 거예요. 내가 눈에 보이는 나를 이 존재자를 존재자인 내가 다루어서 나를 천국 보내놓고 시도하는 모든 교회의 프로그램들 그거 바알종교잖아요.
자기를 학대하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자기를 칼로 찌르면서 850:1로 엘리야와 붙을 때 그들이 하는 짓거리를 보세요. 뭐했습니까? 신이시여! 우리의 응답을 이 자학을 들어주소서. 우리는 이렇게 스스로 괴로워하면서 신의 은혜를 기다립니다. 이건 같은 인간들끼리 은혜 받아요. 같은 존재들끼리 은혜 받는다고요. 누구 하나 간증하게 되면 눈물 막 흘리지요. 같은 존재자거든요. 존재자 아닌 존재자는 기껏 아무 상관도 없어요.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공감을 들으면 동감이 되고 찔찔 울고 하지만, 뭐 운다고 천당 가는 것도 아니고. 그동안 은혜 받았다는 그 자체가 오인에서 비롯된 겁니다. 오해에요. 사격선수가 자기 표적 판에다가 쏴야 되는데 엉뚱한데다 쏴놓으면 그 쪽 점수에 다 보태준다고요. 우리 일상생활에서 이렇게 오인에 대해서 아주 적절한 예가 뭐냐 하면 나를 속이는 저울을 사고 싶어요. 몸무게 달 때마다 5Kg빼주는 기분은 괜찮아요. 기분은 은혜 받은 거 같아. 5Kg빠지니까. 소원이 5Kg 빠지는 게 소원인데 빠졌으니까. 그런데 어떤 아줌마가 “어? 아줌마 이거 저울 고장 났네요. 5Kg빠졌네요.” 이렇게 되어버리면 기분은 좋았지만 살쪘다 하는 것은 변동이 없습니다.
우리는 기분 상 우리에게 은혜라는 것을 굉장히 이렇게 주입을 하는데 결국 거기서 싸움이 멈춥니까? 아니지요. 내가 은혜 받았다고 하는데 누가 은혜 안 받았다고 해요. 또 타인의 평가에 대해서 또 예민하게 작용합니다. 주님과의 관련된 문제에 왜 타인의 눈치를 살펴야 됩니까? 언제 그렇게 눈치봐가지고 천당 갔습니까? 뭔가 참 우리 자신을 그동안 경상도 말로 질을 잘못 들였다 하는 겁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잘못 키운 거예요.
남들이 요구하는 나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헛짓 한 겁니다. 주의 말씀 앞에서 몸을 죽이는 자를 안 두려워하면 되는데 우리는 남이 살아있는 것을 정상으로 보고 내가 죽으면 나는 그들보다 못하니까 실패한 것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이건 우리가 어른이라서 그런 것도 아니고 어릴 때 중학교 때 학급에 생각해 보세요. 초등학교 때나, 고등학교 때 생각해 보세요. 그 때부터 우리는 옆자리하고 얼마나 비교들을 해댔습니까. 특히 성적 나올 때. 옆에 애 보려고. 전부 다 자기거만 성적보고.
새로 도시락해가지고 갑자기 소시지 막 싸오면 우리는 아주 경상도 말로 신기, 모르지요? 신기라는 말은 바다에서 나오는 풀. 간장 넣어가지고 그걸 도시락 반찬하고. 김치 싸가는 날은 조심해야 돼요. 버스타면 국물이 줄줄 흘러내리니까. 같은 옆에 있어도 반찬이 신기, 돈 좀 생기면 닥광 넣고. 저쪽에는 계란 후라이 탁 올려놓고. 소시지 딱 할 때, 사는 동네가 완전히 달라요. 표정 보니까 다 그렇게 사셨네. 벌써 어릴 때부터 타인과 비교를 통해서 자기 위치를 정했던 것이 바로 우리의 자아입니다. 마귀가 그렇게 했어요. 타인의 평가가 니 평가라는 겁니다.
성경 말씀이 뭐라고 하는지 우리는 신경도 안 썼지요.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가족이 어떻게 보느냐 했어요. 이제는 그런 오인과 오류에서 벗어날 때 됐잖아요. 자, 그러면 여기서 오늘 본문에서 싸우지 말라 하는데 우리도 안 싸우고 싶어요.
그럼 안 싸우려면 어떻게 되는가, 이제 그걸 말씀드리겠습니다. 복습해가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싸움이 일어나는 것은 남을 뭐한다? 지배하려고 했지요. 일종의 통제지요. 타인을 의식해서 타인 앞에 굴하지 않기 위해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지배하기 위해서 격렬한 싸움을 벌입니다. “니 나한테 왜 욕했어?” “니 나한테 왜 손찌검하는 거야?” 이런 싸움. 심지어 폭력적인 싸움도 되지요. 싸움 또는 다툼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럼 아까 후딱 지나가면서 이야기했는데. 지배의 반대말이 뭐라고 했습니까? 사랑이지요. 사랑에 대해서 로마서4장5절에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여기에 보면 일을 아니할찌라도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보호하기 위해서 인간은 노동하게 되어있고 노동하는 그것이 바로 노동한 당사자가 나고 그래서 나는 가치 있다고 했는데 남들이 그걸 공격하니까 내 보호하는 입장에서 나를 지키기 때문에 우리는 싸울 수밖에 없어요. 나를 위해서 싸움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보면 뭐냐 하면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않은 자를 어떻게 하신다? 의롭다 하지요. 이게 진정한 타인이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이게 바로 존재하지 않는 존재자의 음성이라면. 우리는 그동안 존재한 음성만 듣고 왔어요. 모든 인간들은 귀신이 들린 상태기 때문에 그 배후에는 악마가 있거든요. 귀신은 악마의 졸개를 귀신이라 해요.
그들이 내뱉는 건 뭐냐 하면 니가 일을 한만큼 니가 가치 있고 니는 훌륭한 존재가 된다는 식으로 타인의 입을 통해서 가족이란 입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속 주입시켜 왔던 겁니다. 심지어 유대인들도 율법을 통해서 심지어 오늘날 교회 목사를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들도 전부 다 귀신들린 자들이거든요.
“성도라면 이 정도 되어야지. 교인이라면 이 정도 되어야 교인답지. 성경에 성령의 열매는 폼으로 있는 줄 아나, 이거 지키라고 있는 거야. 안 지켜도 된다는 것은 그건 이단들이 하는 짓이야.” 이런 식으로 하면서 계속해서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관리해야 되고 계속 붙들고 있어야 되고 발목 잡아야 된다는 것을 계속해서 주입시켜 왔어요.
그런데 로마서4장에 뭡니까? 4장 4절에 보면, 이런 자들에게는 삯을 뭐로 여기지 않는다?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그 다음에 뭡니까? 빚으로 여기니까 빚이 뭐냐 하면 우리 속에 있는 빚이 빚을 가지고 크게 쓰겠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빚을 가지고 이게 뭐냐 하면, ‘양심’이라는 거예요.
악마가 우리를 다루는 방법은 양심을 통해서 다룹니다. “니 양심상 그리 해야 되겠어? 니는 왜 니 가족을 돌보지 않아? 양심상. 니 가족인데 니 동생을 왜 이렇게 미워해? 니 동생 죽었으면 좋겠어?” 이런 식으로. 제가 만약에 예를 들어서 여러분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거예요. 어떻게? “당신이 왜 나한테 이렇게 했어?” 하면서 그냥 시비 걸면서 보냈을 때에 아무 관련 없는 사람들은 잘못 보냈구나! 하는데 혹시나 나쁜 마음이 있는 사람은 “어떻게 아셨어요?” 누가 하나 날아 올 거란 말이죠. 바로 악마가 인간을 다루는 방법입니다. 이게.
매일같이 “니 나한테 왜 그랬어?” “니 하나님한테 왜 그랬어?” 우리 양심에다가 계속 노크하는 거예요. ‘그래, 내가 뭔가 잘못됐을 때 죄를 지어서 그렀구나!’ 계속해서 선과 악의 구조에서 늪에 더욱 빠지도록 아주 질식하도록 모가지 들고 완전히 머리 들고 완전히 선악구조에다가 확 집어넣는 거예요. “앞으로는 잘해!” 이렇게 하거든요. “앞으로는 잘해! 앞으로는 개선해서 니 인간 개선해야 돼. 잘해야 구원받아!” 라고 집어넣거든요.
그러면 앞으로라는 말이 뭐냐, 아까 이야기한 현장성이 깨져버려요. 지금은 못하지만 내일은 잘할게요. 이 자체가 미리 내일에 일어날 일을 말씀에 의해서 일어날 일을 말씀을 끊어버리고 내가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 ‘내일은 반드시 말씀을 잘 듣는 내가 될게.’ 라고 자기 자신을 미리 조작해버린다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그냥 놓으면 되는데. 하루 하루 계속해서 개목 줄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악마가 내 양심에다가 밧줄을 해가지고 계속 끌어당기면 우리는 개를 강제로 끌면 개가 발이 네 개잖아요. 네 개가 앞에 버티면요, 그 땅에 흔적 남습니다.
안 끌려가려고 그러는데 끌어가는 개장사는 힘이 더 세니까 강제로 끌고 가보면 나중에 손톱 발톱자국이 남지요. 손톱 발톱 자국이 흔히 말하는 우리네 인생입니다. 우리의 지나온 인생이 억지로 끌려가는 마귀한테 끌려가는 개 발톱이고 손톱자국이에요. 참, 이게 도저히 언제까지 속을 거예요?
이게 교회가도 마찬가지에요. 교회가면 목사가 목줄을 끌고. “지난번에 약조하신 헌금 안 냈잖아요. 떼어먹을 거예요?” 뭐 이런 식으로. 와~ 이건 뭐 “지난번에 주일학교 교사 한다고 해놓고 왜 그냥 벗어냅니까? 처음 맡았으면 12월달까지 해줘야지요.” 이렇거든요. 예레미야에 12월 달까지 해준다는 게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말씀이 안 나오잖아요.
말씀은 뭐냐, 내일 일은 니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 이게 말씀이에요. 목사가 교인들에게 교사할 때 임명장을 준다고요. 요번 12월 달까지 족쇄처럼 돼요. 그러면 이 임명장이 어디에 삽입이 되느냐, 내 양심에 삽입이 돼요. 새겨져요. 그러면 이것은 내 자존심을 걸고 12월 달까지 해준다는 거예요. 이게 뭐예요? 이게 신앙입니까?
타인이 나에게 걸어준 족쇄를 나는 마치 훈장 탄 양 자랑거리인양 그것밖에 내세울게 없어서 남한테 인정받으려고 하는 그런 것으로 우리는 지금 길들여져 있는 거예요. 철저하게 길들여져 있는 겁니다. 로마서4장에서 뭐냐 하면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 )로 여기지 아니하고 ( ) 가 뭐냐 하면 그게 은혜거든요.
은혜가 들어온다는 것은 주님의 행함이 우리 속에 중심부로 들어온다는 거예요. 주님의 행함이. 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은혜라는 말이 왜 안 되느냐 하면 그냥 은혜 받아보면 마귀가 또 시비 걸어요. “니 지난번에 은혜 받아 놓고 왜 행동을 이렇게 하노?” 또 이런다고요. 은혜를 또 하나의 아우라 또는 분위기 이런 척을 해가지고 왔다가 없어지는 것이 은혜인줄 자꾸 오해를 하게 만들어요.
그러나 주님의 행함이 들어오게 되면 마귀가 우리를 절개해서 보려고 하니 그 안에 주님이 들어 있잖아요. 주님의 행함이 다 이루었다 가 들어 있잖아요. 할 말이 없는 거예요. 시비를 걸려면 누구한테 시비를 걸어야 돼요? 지금 껍데기는 우리보고 시비를 걸어야 되는데 우리 안에 누가 들어있는가 하면 주님의 행함이 있으니까 주님의 행함은 이미 악마를 이겼잖아요. 악마는 그 앞에서 패배가 된다고요. 진 사람이 이긴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이게 중심이 됐으니까 이해 못하고 껍데기 변두리가지고 자꾸 시비를 거는 거예요.
“더 열심히 해야지.” 진짜 예수님이 안 들어있는 사람은 거기에 또 말려든다고요. ‘그래, 더 열심히 해야지.’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증거 해야 될 게 뭐냐 하면, 주님을 증거 하는 게 아니고 내가 이만큼 성실함을 증거 하는 식으로 천국가려고 시도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개 목줄.
개 목줄하고 우리는 가기 싫어. 왜냐 하면 여기서 더 열심히 해버리면 생활이 어려워져. 교회에서 교육관 짓는데 돈 내놔라. 돈 내고 싶은데 이러면 또 생활이 균형이 밸런스가 안 되는 게 이젠 너무 목돈 나갈 게 많아서. 그래서 또 버틴다고. 버티면 또 뭐냐, 버텼기 때문에 돈은 안 냈지만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을까봐 벌벌 떨고 있어요. 이게 길들여져 있어서 그래요. 선과 악 사이에 길들여져 있어서 그래요.
한 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빚의 반대말이 뭐라고 했습니까? 은혜지요. 그러면 은혜가 와야 은혜가 오는 거예요. 은혜 오기 전에는 우리에게 뭐가 있었다? 빚이 있었지요. 빚은 내가 감당할 수 있으면 빚이 있을 리가 없지요. 감당 안 된다는 거예요. 이미 하나님은 말씀으로 오실 때는 뭘 알아요. 우리 자신이 채무자라는 것을. 그리고 영원히 변제할 수 없는 채무자인 걸. 선과 악 율법에 대해서 채무자라는 걸. 빚지고 산다는 것을 이미 알고 은혜를 주시는 거예요.
그럼 주님께서 찾아올 때는 그냥 잘 있나? 안부 물으려고 오신 게 아니에요. 이 빚을 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까? 탕감해버리면 안되지요. 그러면 제로가 돼버리잖아요. 제로가 아니고 여기 로마서4장에서는 놀라운 사실은 무죄가 아니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의가 된다 이 말이죠.
의인이 아니고, 의가 된다는 말은 의인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주님하고 또 타인이 되는데 나는 의인이고 주님 의인이고 타인관계가 성립되는데, 의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 안에 주님의 의가 담겨버리면 담기는 걸로 끊어지는 게 아니고 담겨준 주님과 연결되어있다. 끊어질 수 없는 연결고리가 있다 말이죠.
만약에 집사님하고 악수하면 악수하고 놔야 하는데 붙들고 안 놓는 거예요. 이게 의의 관계에요. 의는 소유용이 아니고 둘 사이에 연결된 연결고리를 가지고 의라고 합니다. 이로서 너로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를 이루자고 했잖아요. 세례 받을 때, 세례요한이 “아이고~ 저 같은 주제에 어떻게 세례를 줍니까?” 하니까 “우리가 이렇게 해서 의를 이루자.” 되어있어요.
의를 이룬다는 것은 내 잘났다가 아니라 못난 우리와 잘난 주님사이에 그 관계가 의라는 겁니다. 소유용이 아닙니다. 선악적인 구조에서는 소유용이 돼요. 착하면 착한 게 있어서 착한 걸 소유했다는 이유 때문에 나는 착한 사람이 되지만, 선악구조가 아니고 처음에 인간 만든 생명구조에서는 관계가 더 중요해요. 소유가 아니고 관계라니까요.
집사님이 만약에 붙들었는데 안 놓는다. 집에 갈 때까지 안 놓는다. 그러면 오늘 서울강의도 못해. 이렇게 붙들고 있기 때문에 악마가 노리는 것이 뭐냐 하면 그 관계를 어떻게든 자르려고 관계를 떼려고 시도하겠지요. 그래서 아까 차양, 햇빛가리는 그건 뭐냐 그리스도의 복음의 광채를 비추지 못하게 만드는 뜻이에요.
악마는 귀신입니다. 악마는 지혜로워요. 뱀같이 지혜로워서 무엇을 끊으면 된다는 것을 알아요. 이 세상에 장로, 목사, 권사들 보내가지고 그 관계만 끊는 거예요. 복음의 관계를. 열심히 해가지고 그 관계를 끊게 만들어요. 교인수가 100명, 교인수가 여러분의 교회입니다. 또 우리의. 의라는 것은 소유격이잖아요. 여러분교회니까 여러분이 책임져야지요. 꼭 소유를 안겨줘요. 계속해서 우리에게 집중시킵니다.
우리 아들 잘 났고 우리 딸 잘 났고 우리 남편, 우리 아내 잘 났고 항상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소유로 살라고 독촉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하느냐, 주님께서는 마귀가 그렇게 못 달려들도록 날 파리가 못 달려들도록 해주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주의 방법은 그게 아니에요.
성도하고 주님하고, 중국에 보면 산에 보면 다리가 많이 있잖아요. 관광지 많이 모집하잖아요. 흔들다리해지고 이 다리가 하나님의 의다 말이죠. 그러면 이렇게 됐으면 마귀가 오지 않아야 되는데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마귀를 보내가지고 계속 건드리게 만들어요. 흔들다리. 환란과 핍박과 곤고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아픈 것이나 계속 흔들게 만들어요.
왜 마귀가 이렇게 해야 되느냐, 이걸 안하게 되면 인간 본인이 내가 주님을 이런 관계라고 이걸 나라고 규정을 해버리면 또 나가 여기서 계속해서 나에 대해서 집중하게 돼요. 이것을 자꾸 내가 확인하려해요. 확인은 누가 하느냐 하면 타인이 확인해요. 주님이 나의 신앙에서 확인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를 위해서 주님이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자기 숙제로서 죄인을 구원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엄청난 말을 해서 미안합니다.
구원이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라니까요. 이런 의식의 발상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내 구원이 아니고 주님이 좋아라 해서 주님이 구원하는 거예요. 내 좋아라고 주님이 있는 게 아닙니다. 주님 자기 좋아라고 예수님을 믿게 하신 거예요. 따라서 요한복음10장 이야기해봅시다. 목자는 누굴 알고, 양을 안다잖아요. 그 뒤에 나온 말이 목자가 양을 아는 그 순간부터 어떤 권세도 어떤 위기도 내 품에서 양을 뺏을 자가 없다. 라는 것이 말씀이지요.
말씀이 말씀되기 위해서 내 쪽에서 주님을 믿는 그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 마귀로 하여금 계속 쑤시게 만드는 겁니다. 우리의 육이라는 것은 결국은 육적요소가 발생되거든요. 세상에 나가면 남하고 또 비교를 해야 돼요. 니만 믿음 좋으냐 나도 믿음 좋다고 또 비교하게 된다 말이죠.
아까 타인은 뭐라고 했습니까? 각자 안에 뭐가 들어있다? 귀신이 들어있지요. 그 타인들이 전부 다 움직이는 악마의 졸개들로 보면 돼요. 좀비지요. 전부 달려드는 거예요. 추석 때 전은 제대로 했어? 추석 때 용돈 얼마 가지고 간 거야? 봉투에. 이런 식으로. 죽 했고 우리는 그들과 그렇게 의사소통이 잘 되는 이유가 우리도 그들과 똑같이 살아가거든요. 똑같이.
그렇게 설득이 되고 납득이 돼요. 드라마 보면서 같이 살고. 장미희는 아프면 안 돼! 장미희 아프면 나는 드라마 안 볼 거야. 드라마를 그렇게 많이 본답니다. 왜냐하면 장미희 때문에. 이쁜 거는 이쁜 거죠. 장미희가 이쁘나, 예수님이 이쁘나 지금..., 대화 상대가 아니잖아요.
제가 주일날 그런 설교했잖아요. 유치원에 난동부리는 사람 들었지요. 난동부리면 바깥에 뭐가 튀어나옵니까? 애들이 다 튀어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애들이 유치원에 가서 왜 튀어나오는가 하면 “저 안에 뭐 있어요.” 라고 고자질하는 것처럼. 우리로 하여금 육의 열매가 튀어나오는 것은 우리 안에 누가 있다? 십자가가 있는 거예요.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바깥에 뜯겨나갈 것들이 우리 평생을 통해서 다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매일같이 떨어져 나갈 것들이.
그러면 ‘내가 육의 열매를 또 만들어야지.’ 이러면 또 뭐가 옵니까? 다시 나에게 치중하게 돼요. 집중하게 되어버려요. 뜯어져나가면 그것도 주께서 자기 숙제한다고 이런 것들을 면면들을 보이는 거죠. 주님의 자기 일이다. 말씀의 일이에요. 말씀되게 하는 일인데, 그걸 자꾸 우리 책임으로 가져오면 안돼요. 우리는 책임 못 집니다.
우리는 존재 없는 존재자가 아니고 그냥 존재자에요. 그럼 존재 없는 존재자할 때, 지금 다루어지고 농락당하고 있는 입장인데 지가 주인이 아니잖아요. 주인이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나를 관리합니까. 나를 관리한다는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그래서 성령이 오신 거예요. 또, 또 다른 주인 없다 말이죠.
다시 야고보서4장 돌아가 봅시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서 나오느냐, 이거 이야기했다고 그 다음날 이거 본 사람이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안 싸울게요. 안 싸울게요. 그래서 내가 싸웠더니만 우리 애한테 성적 내려갔구나! 야고보서4장도 못 지키고 내가 앞으로 안 싸워야지. ‘앞으로 안 싸워야지.’가 아니라 있다가 더 심한 싸움이 이제는 계속 일어날 겁니다. 그것도 세밀하게. 이건 싸움 아닌데 하는 것도 싸움이에요.
“이거 더 드세요.” “아이고, 많이 먹었습니다.” “아니, 드시라니까.” 이것도 싸움이잖아요. 하는 것마다 싸움 아닌 게 없어요. 그럼 오늘 해석은 뭐냐, 싸워라. 싸워라. 이제는 싸움 아닌 것도 싸움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라. 이게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그 이유가 여기 뭐냐 하면, 바로 니가 싸우는 이유가 욕심 때문에 그렇다고 되어있어요. 욕심 때문에. 그럼 욕심 때문에 있다는 말은요, 사실은 우리 인간 입장에서는 하나마나에요. “니 욕심 있다.” 라는 말은 니가 그 욕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자기를 오인해가지고 욕심 있다 하니까 욕심을 지 힘으로 뺄 수 있겠어요? 못 뺍니다. 그러니까 또 마귀에 넘어간 거예요. 빠지지도 않는데 지가 빼려고 하니까 점점 자기는 어떻게 됩니까? 곤궁에 빠지는 거예요. 딜레마에 빠지는 거예요. 빠지면 더 빠지게 되어있어요. 아~~ 나는 안 돼! 나는 천당 못가. 이리 되는 겁니다. 이게 전부 다 속임수라 보시면 돼요. 우리가 세상사는 것이 속임수에 푹 젖어서 살아가고 있어요.
그래서 이거는 은혜를 주지 아니하면 우리는 도저히 마귀의 손에서 못 빠져나옵니다. 일단 10분 쉬고 빠져나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