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180928b 마가복음12장 35-37절(이중계약)-이 근호 목사
광주강의20180928b 마가복음12장 35-37절(이중계약)-이 근호 목사 쉬는 시간에 우리 김을수 집사님이 말씀하신 것을 다시 정리하게 되면, 보통 세상에 속해 있는 눈에 보이는 것을 현실로 보고 그 현실 속에 예수님이 오셨다. 이렇게 봐요. 그게 상식이고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렇게 보시지 않고, 이 세상이 눈에 보이는 그 전에 먼저 계약이 있었고, 계약에 따라서 철저하게 현실이 구성되었다고 보는 거예요. 그렇다면 눈에 보이는 이 현실은 뭐냐, 이중계약이니까,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쇠해야 됩니다. 쇠하고, 파괴되고, 불바다 되어야 하고, 계약이 완료되었으니까 그렇게 하고. 그 다음에 새로운 계약, 새 언약에 의해서 천국이 만들어집니다. 이 작업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신 거예요. 이 작업을 위해서. 오시면 그냥 오시면 되지, 인간을 왜 건드리느냐? 라고 하실 거예요. 그 건드리는 이유가 뭐냐, 아까 했지만, 중요한 것이니까 다시 설명을 드리면 계약상대자를 이스라엘 사람들은 본인으로 봤어요. 본인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자기들하고 계약을 맺었다. 출애굽기 19장에서 피를 뿌리면서 또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했는데. 그런데 이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이 이스라엘이 아니고 뭐냐 하면 ‘없는 이스라엘’이에요. 없는 이스라엘. 이 없는 이스라엘을 로마서 9장에서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렘넌트remnant, 남은 자인데, 없는 이스라엘에서 남은 자가 여기서 나오는 겁니다. 몇 명이 나오느냐? 몇 명이 아니고 단 한 명이 나와요. 그 단 한명이 바로 예수님 본인이십니다. 그 한명이 나올 때 예수님 안에 누가 들어 있느냐 하면, 오늘 본문에 다윗의 자손이라는 계약 내용이 예수님 안에 합류가 되어 있어요. 여기에 담기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다윗의 자손이 된다는 것은 존재로 되는 것이 아니고 어떤 기능이 있는데, 그 기능이 몇 절이냐면 36절입니다.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일을 시킵니다.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라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기능에 누가 등장합니까? 원수가 등장하죠. 원수라고 하는 것은 뱀이라고 해도 되고 악마라고 해도 되고 뭐라고 해도 좋아요. 뭐라고 해도 다 같은 거니까. 악마라는 이야기가 어디서 비로소 나타나느냐 하면은 없던 현실에서 등장할 때 악마도 같이 등장하는 거예요. 그러면 기존의 인간들 현실 속에 악마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 거예요. 인간들 현실 속에는 악마가 없습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악마, 이거는 나쁜 놈이에요. 나쁜 자. 인간들의 선악구조 속에서 생각하는 악마는 나쁜 놈이에요. 사람의 목을 휙휙 돌아가게 만들고, 뭐 수녀인데 악마가 되어 있고. ‘더 넌’이라는 최근의 영화에 보면 수녀원에 악마가 나옵니다. 시계바늘이 막 돌아가고 있고, 십자가는 삑삑 돌고, 흉측하고 괴물 같은 이런 악마는 주로 습기 찬 데, 음침한 데 있고, 낮에는 안 나타나요. 꼭 밤에 나타나요. 결국 이런 악마는 뭐냐, 인간 내부에 있는 무엇의 반영이냐 하면 알 수 없는 공포심의 반영이죠. 공포심의 반영을 말합니다. 공포심이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쫓기는 거예요. 쫓기는 것의 대표적인 증세가 뭡니까? 우울증이 아닙니까? 우울증 걸린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정서가 불안정해요. 눈을 보면 알 수가 있어요. 눈 같은 것을 보면 정서가 불안정해요. 눈을 못 봐요. 숨고 싶은 겁니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 지키고 싶다. 무엇을? 나를! 나를 지키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더 쫓기잖아요. 쫓기면 몇 개 양보하고 또 숨어들어가요. 나와! 하면 안 나와요. 지금까지 자기가 양보한 자아의 전부기 때문에. 또 다가가면 또 도망칩니다. 또 도망쳐요. 한국 떠나서 자꾸 아프리카로 숨어 들어가는데, 못 찾아오도록 자꾸 기어들어가요. 지리산에 기어들어가고 태백산에 기어들어가고. 계속 기어들어가요. 저는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표현합니다. 신경조직을 건드리는 겁니다. 아픈 데를 건드리는 겁니다. 아픈 데를 감싸고 내빼기 바빠요. 끊임없이. 부부가 사이가 안 좋다. 추석날에 안 옵니다. 백퍼센트 안 옵니다. 곧 이혼직전이다. 절대로 안 오죠. 잡채하고 찜하고 애들 편으로 보내고 자기는 안 와요. 누구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있다고. 십자가마을보고 이야기 하는 거 아니에요. 제가 이 말을 왜 끄집어냈는지. 기독교교리하고 복음하고의 차이가 뭐냐 하면 기독교교리는 이게 지식이거든요. 나 여기 있고, 나는 터치 안하고 나는 그대로 있고 플러스알파(+α)하는 것처럼 지식 하나 추가해서 지식으로 확보하게 되면 구원 얻는다. 이게 기독교교리입니다. 왜냐하면 이 기독교교리를 몰랐을 때는 내가 80점짜리인데, 이 기독교교리를 알게 되면 20점 보태서 100점 만점이 되기 때문에 나에게 이익이 돼요. 몰랐을 때보다 알 때가 나에게 이득이 되고. 나는 그대로 있고 80점을 유지하면서 플러스(+) 새로운 20점을 추가해서 완벽을 기할 수 있는 이것이 기독교리입니다. 근데 복음은 뭐냐 하면 이 80점을 건드려요. 이걸 건드린다고요. 기독교교리는 자기 자신을 하나의 쟁반으로 삼고 기독교를 담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복음은 쟁반을, 접시를 깨트립니다. 우리 자신이 구원받을 자격도 없고, 천국 갈 자격도 없다는 것이 복음이에요. 복음은 뭘 건드리느냐 자아를 건드립니다. 그래서 복음은 걸림돌, 십자가에요.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너희들이 나를 내쳤다는 사실을 니가 수용할 수 있느냐, 니가 나를 미워해서 밀쳤다는 사실을 니가 그대로 수용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걸 수용한다면 구원이 되고, 수용을 못하면 구원이 안 되는 거예요. 나 때문에 피해를 본 그 피해자를 내 안의 중심으로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은 뭘 통해서 알 수가 있느냐 하면 오직 성령을 통해서 알 수가 있는데, 성령은 뭐냐 하면 이미 죽었다가 부활하신 그분의 영이잖아요. 성령이 오게 되면 십자가사건을 우리에게 되돌려주죠. 그렇게 되면 우리는 뭐가 돼요? 죄인+십자가 되어서 이게 A2가 되는 겁니다. 이게 천국 가는 겁니다. 우리의 면류관도 반납해버리고.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뭘 부르러 왔다고 했습니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했죠. 선언+( )뭡니까? 선언+(실천)이잖아요. 실천할 때에 죄인이라고 나선 자를 불러주는 것이 아니에요. 모든 인간은 의인입니다. 자기가 죄인이라고 이야기를 한 것도, 죄인이라고 이야기를 한 것 자체가 나의 의로운 요소가 돼버려요. 반성할 줄 아는 인간인 만큼 내가 반성하는 것을 모르는 인간보다 더 월등하게 괜찮은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 겁니다. 사람들이 교회 갈 때 죄인이 되려고 교회 가는 것이 아니에요. 지금보다 더 나은 의인이 되려고 가는 겁니다. 의인의 경쟁 장이에요. 의인의 배틀 장입니다. 회개하고 반성하고 난리도 아니에요. 왜 이런 짓을 합니까? 회개하고 반성함으로 말미암아 자꾸 곁눈질을 한다고요. 나는 저들과 같지 아니하고. 나는 저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만큼 된 것을 감사합니다. 마치 바리새인의 양성소에요. 바리새인의 양성소. 나는 저들과 같이 중이 되지 않고 목사고 되었다. 나는 저들과 같이 교회 안 다니는 것이 아니고 교회 다녔습니다. 자꾸 이렇게 자기 자신의 품위와 가치와 모든 역량을 다해서, 목사가 시키는 대로 다해서 역량을 높이는 수련장이 바로 교회입니다. 완전히 주짓수 하는 수련장 같아요. 주짓수 알아요? 브라질에서 시작이 됐는데 이번에 금메달을 땄죠. 사람 붙들고 안 놔주는 것. 요새 남자들에게서 그게 유행입니다. 왜냐하면 살 빼는데 그게 최고에요. 기독교 교리는 자기의 품위를 격상시키고 자기가 상상하기에 죄인이 아니라 지금보다 더 나은 의인을 만드는데 아주 적절하다고 생각해서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천주교 교리를 실천에 옮긴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청교도라고 해요. 청교도. 나는 청교도라고 해서 얼굴이 퍼런색인줄 알았어요. 이게 청교도인줄 알았어요. 퓨리탄Puritan 순수한 자, 순수한 자 평가를 누가 내립니까? 본인이 내리는 거예요. 보다 더 순수하게, 보다 더 철저하게 남한테 해 입히지 않고. 조금만 잘못하면, 일본말로 스미마셍すみません, 스미마셍! 스미마셍! 일본여자들이 깎듯이 하잖아요. 요새 제가 일본노래 하나 생각하고 있어요. ‘연인이여(고이비또요)’라는 노래인데, 아가서 준비하면서 그거 분석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히트해서 우리나라 나훈아가 부르고 했어요. 전에도 이야기했는데 아가서가 여자가 아니고 여인이 되고, 여인에서 여성성으로 바뀌어요. 그래서 아가서에는 여자가 없어요. 왜냐하면 아가서에 나오는 이 여자는 젊은 여자입니다. 젊은 여자로 이게 고정될 수가 없어요. 어떤 젊은 여자도 나이가 들게 되어 있잖아요. 그러면 솔로몬이 젊은 여자를 사랑했다는 말은, 만약에 그 여자가 늙으면 어떻게 돼요? 사랑 안 할 수가 있어요. 그러면 사랑이 유지되려면 그 여자는 젊은 여자로 계속 확정이 되어야 하잖아요. 그렇다면 젊은 여자는 실존하는 것이 아니고 솔로몬 마음속에 하나의 연인, 또는 여인으로 남아있어야 돼요. 여인으로 남아있는 이것에 대해서 솔로몬 자기는 안 늙습니까? 그러니까 남자, 여자가 없어지고 남성성, 여성성으로 바뀌면서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과 관련되어 있는, 이렇게 한번 풀어보려고 제가 지금 반을 썼어요. 거기다가 더 구체적인 것을 해서 넣을 텐데. 결국 사랑이라는 것은 없는 거예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자기사랑밖에 없는데, 자기이미지의 확대, 자기가 되고 싶은 여성성을 남성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여성은 자기가 되고 싶은 남성성을 사랑이라고 하면서 일방적으로 그렇게 굳히는 겁니다. 자기를 위한 사랑이죠. 아가서에서는 그것은 관계가 없는 겁니다. 이것도 오늘 본문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 하면, 그걸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할게요. 여러분이 알기 쉽게 정리하게 되면 이미 악마를 통해서, 죄를 통해서 인간은 갇혀있는 거예요. 갇혀있다면 예수님께서 언약을 맺을 때 이스라엘은 없어요. 없는 이스라엘을 갇혀있는 여기에서 구합니다. 이 죄인을 가져와가지고 의인 만든 결과물이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이 작업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자기는 오지 않고 낚싯줄 던져가지고, “야! 너 천국 와!” 이렇게 되면 안 돼요. 예수님께서 어디 속에 들어와야 하느냐 하면 갇힌 이 속에 들어와야 돼요. 이 속에 들어오면서 생긴 계약이 뭐냐 하면 바로 두 번째 계약이에요. 이중계약에서 두 번째 계약이에요. 두 번째 계약. 첫 번째 계약이 뭐였습니까? 창세전의 계약이죠. 창세전의 계약 말고 지상에서 일어나는 두 번째 계약, 두 번째 계약을 실시합니다. 두 번째 계약이 뭐냐 하면 바로 피와 살로 맺어진 언약이죠. 내 살을 먹어라. 내 피를 마셔라. 이게 하나님이 세운 새 언약입니다. 그런데 그 대상자가 누구냐? 없어요. 열두 제자 다 도망가 버립니다. 열두 제자의 특징은 예수님께서 선택을 했잖아요. 근데 선택에 담긴 취지가, 가장 잘 나타나있는 취지가 뭐냐 하면 그중의 하나는 가룟 유다를 주께서 선택한 거예요. 가룟 유다를 선택함으로 말미암아 가룟 유다(1명) 말고 나머지기 제자들(11명)은 어디에 다 종속되느냐 하면은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말미암아 열두 제자 자체가 완전히 다 우르르 무너지게 되는 구조를 주님께서 만드시는 거예요. 가룟 유다하고 언약을 맺을, 가룟 유다는 사탄인데, 사탄하고 언약을 맺을 일이 없지 않습니까? 다시 한 번 정리해봅시다. 자, 악마는 뭐냐, 인간들이 만나는 악마는 주로 언제 나타나고? 주로 밤에 나타나고. 장소는 어디에 나타난다? 물가, 음침한데, 그러니까 집 지을 때 방수시설 잘 해야 된다니까요. 뒤에 수맥 흐르는지 살피잖아요. 인간이 만든 악마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나에게 손해를 입히는 거예요. 나에게 손해를 입히는 것은 악마가 돼요. 이게 인간이 악마에게 갇혀있는 꼴입니다. “악마란 나에게 손해를 입히는 것.” 이렇게 보는 겁니다. 갇혀있기 때문에. 누구한테? 악마한테. 악마는 인간이 만들어낸 악마인데, 악마는 인간에게 보이지도 않고 없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악마는 언제 나타나는가, 예수님께서 갇힌 이 속에 들어올 때 드디어 악마는 자기의 본색을 못 이기고 마중을 나오죠. 마중 나오는 것은 적대하려고 나오지를 않아요. 광야에서 시험하잖아요. 예수님을 시험했죠. 그리고 마태복음 8장에서 귀신들린 청년한테 갔을 때에 악마가 먼저 예수님한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29절에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인데 우리를 멸망시키려고 일찍 왔습니까?” 악마는 예수님이 등장하는 현장에서만 등장해요. 이걸 사도바울이 이야기를 해요. 복음이 전파되는 현장에 악마가 감지가 된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악마가 감지가 돼요. 그럼 아까 사탄은 빼고 가룟 유다가 예수님한테 뭘 했습니까? 배신했죠. 예수님을 팔아먹었잖아요. 그러면 처음에 가룟 유다는 뭐였습니까? 예수님의 제자였죠. 회계를 맡았으니까 임원들 중의 하나로 고위간부에요. 예수님에게 선택을 받았는데 배신했다? 그러면 악마가 여기서 등장한다면, 악마가 하는 일은 뭐냐 하면 결국은 배신하는 거예요. 달리 이야기해서 나에게 손해를 입히는 자가 악마가 아니라 예수님을 배신하는 그 경향이 바로 악마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을 배신하는 그 경향이 악마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강원도 골짜기에 살아서 복음들은 적도 없고 한 번도 예수를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뭐도 없습니까? 배신하는 것도 못 느끼고 그냥 살다 죽는 거죠. 뭐. 마귀에 속했다는 것도 자기가 모르고 살죠. 다시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현장에 오게 되면 이 세상에 있는 유대인들이 마중을 나갈 것이고, 유대인들보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너희 아비=악마라고 했죠.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 이 악마가 유대인에게서 만들어낸 것이 뭐냐 하면 종교라는 것을 만들었어요. 종교의 특징은 인간의 행함으로써 실천을 하게 되면 어디에 이릅니까? 거룩과 경건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치는 곳이 바로 종교가 되는 겁니다. 처음에 강의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모든 실천은 누구의 것이다? 주님의 것이고. 우리는 해서는 왜 안 되느냐 하면, 우리는 그냥 마땅히 죽어야 될 운명이에요. 다만 성도나 성도 아닌 자나 다 죽지만, 성도의 특징은 뭐냐 죽어가면서 하나님이 선언하신 것, 하나님이 언약하신 것, 하나님이 계약하신 것, 하나님이 실천하신 것을 알면서 죽는다는 사실. 그 점이 성도와 성도 아닌 자와의 차이입니다. 그걸 알면서 죽는 거예요. 성도됐다고 수입이 늘어나고 출세하고 뭐 그런 것 없어요. 자, 갇혀있는 이 악마의 세계에 예수님께서 들어왔습니다. 그럼 여기에 군데군데 파열음이 생깁니다. 파열음이라는 것은 음이 깨지는 겁니다. 질서가 혼돈되고, 이걸 수요설교에서는 소동이라고 했죠. 소동하면 마태복음 2장에 동방박사가 왔을 때에 예루살렘에 있던 헤롯의 소동을 생각하면 돼요. 가만히 있는 도시였어요. 괜찮게 돌아가요. 누가 봐도, 제 3자가 봐도 예루살렘은 안정되어 있습니다. 안정되어 있는데, 난데없이 별을 따라온 동방박사가, 그냥 베들레헴으로 갈 수도 있는 문제에요. 베들레헴으로 갈 수도 있는데, 별이 사라졌어요. 그러니까 별이 어디에 갔는가를 묻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왔고, 예루살렘에서 소동이 일어났고, 소동의 해결책으로 제시한 것이 뭐였어요? 헤롯이 동방박사와 그리고 누굴 죽입니까? 아기예수님과 그 가족을 전부다 살해하려고 했죠. 이게 바로 예수님이 존재로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야기된, 새롭게 벌어진 소동이라는 말이죠. 일종의 파장이 일어난 거예요. 잔잔한 호수가, 대부분 잔잔해요. 그런데 어린애가 돌을 탁 던지는 순간, 딴 데는 조용해요. 근데 돌을 던진 그 부분만 파동이 일어나죠. 여기에 이 세상의 영적인 본색이 다 드러난다 이 말입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복음을 아는 우리는 그냥 복음 알았다고 입 다물고 있어요. 있는데, 주님께서 실천력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냥 입 다물고 있는데, 조용히 살고 싶었는데, 주께서 어떤 정황이나 사태를 일으키니까, 이게 우리 눈앞에 악마가 나타나가지고 막 공격을 해대고 핍박을 해대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내가 일부러 야기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이 상황을 주께서 실천력으로 조작해내는 겁니다. 근데 그들이 우리 성도한테 하는 말이 이거예요. “니 뭐 잘났느냐?” 이거에요. 악마: “너 잘났어?” 천국백성: “누가 뭐래?” 악마: “서로 존중해야지. 우리 인간은 평등하니까. 지금 민주주의 사회잖아.” 인권용어 사용하겠죠. 그러면 천국백성 쪽에서 하는 말은 뭡니까? “누가 뭐래?” 주께서 잘라내는데, 주께서 처리하거든요. 이제 구분한다고요.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은 일부러 성도가 나서서 케이크 자르듯이 한다고 오해를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자기들이 알아서 자기들의 본색을 드러낸 거예요. 어떤 발작을 일으킨다고나 할까? 그냥 설교를 했는데 허리끈 쥐고 탁 잡아당기면서 갑자기 그쪽에서 어떤 분노가 격발이 되어서 화를 내는 거예요. 우리는 주님의 실천이야기밖엔 안 했는데. 그렇게 하면 방종이 된다니, 악을 조장한다느니... 우리는 누가 뭐래? 하죠. 무슨 방종을 하고 악을 조장한다고 그러는지. 막살면 안 된다고 하는데, 도대체 뭘 걱정하는지. 주께서 상황과 사태를 만들어줘요. 왜 그러냐 하면은요,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성도는 있어도 없는 자고 죽어도 산자가 되기 때문에, 산자가 된다는 것은 어려우니까 지워버리고, 이미 성도는 있어도 없는 자에요. 투명인간입니다. 욕을 해도 내 내부를 통과해버려요. “뭐래?” 이런 식으로. 특히 이 말은 충청도 말이 좋아요. “왜 그래유?” 성도는 배알도 없고 자존감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이거 키워서 뭐할 건데요? 시장에 내다팔까요? 아무것도 없어요. 이걸 두자로 하면 “뭐래?” “뭐 어쨌다고?” 그래서 제가 이걸 지난 낮 설교에서 두자로 했죠. 등신. 제발 등신같이 살아라. 등신같이 사는 것이 그냥 최고에요. 예민하고, 민감하면 우울증 걸린다니까요. 우울증은 신경전달을 건드리는 거예요. 자꾸 아야! 하니까, 아프지 않으려고 도망치는 거예요. 그럼 그 사람은 또 다른 상황이 오면 또 아야! 하고 도망치고. 계속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예민하고 민감해요. 누가 나를 욕을 안 하는가? 누가 나를 험담하지 않는가? 뒷담화하지 않는가? 자꾸 이렇게 하니까, 마귀는 계속해서 니가 좀 철저하게 하지! 니가 반성하면 될 거 아니냐, 니가 회개하면 될 게 아니냐, 맨날 반성해라, 회개하라, 순수해야 돼, 뭐 어떻고, 어떻고, 니가 그동안 행동을 개차반처럼 해서 그렇다고 하는데, 우리는 이미 없는 자에요. 우리는 이 세상에 이미 없는 자고, 다중현실이라니까요. 우리는 이 현실에 없는 자고 주안에서 있는 자에요. 그러니까 책임을 져도 주님이 책임지지 주제넘게 내가 책임질 문제가 아니다 이 말이죠. “너 등신이야?” “잘 봤네!” 이러면 끝나는 문제죠. 제가 참 은혜를 받았어요. 지금까지 평생을 등신으로 살았다는 그 말을 듣고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맞아요. 평생을 등신같이 산거예요. 등신같이 산 그것이 바로 모델Model, 이게 성도의 모델이 아닙니까? 세상에! 이렇게 되고 싶어도 못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이렇게 되고 싶어도. 등신의 특징은 없는 거예요. 소유가 없는 겁니다. 복음으로 교회를 한번 해 보겠다? 그거는 안 됩니다. 복음으로 교회하겠다는 그거는 용인될 수 없는 거예요. 왜? 등신이었다가 갑자기 괜찮은 사람 되고자 하는 시도밖엔 안 돼요. 교회가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교회는 하나의 결과물이고 복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거예요. 주님의 실천력이 구원하는 겁니다. 자, 성도는 없는 겁니다. 이 없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이것이 오늘 본문에는 다윗의 자손이에요. 이 다윗의 자손의 특징은 현재는 없으나 미래에는 있다가 됩니다. 35절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쌔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뇨” 36절,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 그렇게 해놓고 37절 봅시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더라”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한번 써볼게요. 다윗이 먼저입니까? 자손이 먼저입니까? 다윗이 과거라면 자손은 미래죠. 다윗이 있을 때에 자손이 있었다? 없었다? 없었어요. 다윗이 있다면, 이게 있음이 되면 자손은 없음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걸 바꿔버립니다.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 있음이 주인이잖아요. 주인. 주인이 있어야 그 후손, 후손, 자손들이 있으니까. 자손 이전에, 원래 본성을 가진 조상이 먼저 있고 자손이 있기 마련이잖아요. 다윗이 조상이고 주님이 그 자손이라면, 어떻게 다윗이 자기 뒤에 자손, 새끼 낳고, 새끼 낳고... 하는 그 자손을 보고 주라고 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냥 주가 되면 다윗은 뭐가 돼요? 자손이 돼버리고. 누구는? 보이지 않는 분은 뭐가 돼요? 주가 되잖아요. 어떻게 먼저 계신 분이 나중에 올 수 있느냐를 답변해보라고 예수님께서 질문을 던진 거예요. 예수님께서 질문하신 것이 처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질문하신 것이 최초에요. 제가 알기에는. 틀리면 할 수 없지만. 제가 알기에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보고 먼저 질문하신 것이 마가복음에서는 이게 처음이 아닌가, 그렇게 봐요. 먼저 도전하신 거예요. 이야기해봐라. 지금 우리한테 질문을 던진 것이 아니고 그 당시 유대인들한테 질문을 던진 거라고 보게 되면 그 사람들은 답변을 못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거든요. 누가? 본인들이. 아브라함에게 준 언약, 약속이 그 결과물이 후대에 이스라엘, 현재 유대나라 자손이 되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살아계신 것이 확실하다. 확실하게 주님은 살아있다. 왜? 우리가 살아있으니까. 주님의 약속이 살아있고 약속이 살아있으니까 메시야가 오는 게 맞다.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를 한 겁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니까. 아브라함과 자손사이는 무슨 관계에 있습니까? 혈통관계에 있죠. 혈통관계라는 말은 선조가 먼저 있고 자식은 나중입니다. 혈통적으로는. 할아버지가 먼저 있고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가 먼저 있어야 자식이 있지. 어떻게 아버지가 자식보고 “할아버지요!” 이렇게 하는 것은 진짜 등신 되는 거예요. 그런 바보가 어디에 있겠어요? 너희들의 말이 맞다면, 이게 하나님의 언약이고 계획이라면, 그렇다면 어떻게 다윗이 자기 후손보고 먼저 계신 선조라고, 주라고 이야기를 했느냐? 그 내력을, 메커니즘을 납득 있게 설명해보라고 하니까 그들이 뭐라고 합니까? 그들이 나중에 답변을 할 수가 없습니다. 37절에 보면 “백성들이 즐겁게 듣더라” 이래 되어 있지만, 답변은 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면 우리는 답변을 해야죠. 답변을 해야 됩니다. 이게 뭐냐 하면 처음에 이중현실, 이중계약 또는 다중현실. 계약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뭐가 나온다고 했습니까? 현실이죠.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이 계획한대로, 그대로 첫날부터 칠일 때까지 이 현실이라는 것이 창조되었습니다. 만들어졌어요. 계약이 먼저 있고 현실이 있죠. 그러면 현실에 속한 사람은 현실을 통해서 어디를 찾아가야 합니까? 계약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인가를 찾아가야 하잖아요. 찾아가야 하는데, 악마가 개입해서 이것을 끊어놨어요. 끊어놓으니까 누가 찾아와야 합니까? 이 현실이라는 것이 어떤 계약에 의해서 현실이 되었는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 현실 속에 삽입이 된 겁니다. 그러면 현실이 몇 개가 되느냐 하면 기존의 현실이 있고, 이거는 망해야 될 현실이 있고, 예수님하고 아버지하고 모든 것을 완료했을 때 새롭게 생기는 현실, 천국이죠. 천국과 지옥이죠. 그것이 이 세상 현실 속에 같이 겹쳐져 있는 거예요. 중복되어 있는 겁니다. 같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미 우리는 죽었고 하나님 안에 살아있다고 이렇게 골로새서 3장 3절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죽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있기 때문에 내가 살아있다고 이야기를 해요. 나라고 하는 것은 이미 죽었어요. 죽었는데 그리스도가 살아있는 나는 A2에 해당이 되는 겁니다. 내가 생각한 A1이 아니고, A1은 뭐냐 하면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고 내가 관리해야 될 나에요. 그러면서 우리는 점점 더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A2는 이미 우리가 죽었을 때, 미래잖아요. 그 미래로부터 출발한 거예요. 그 미래로부터 출발하니까, 그 미래가 그냥 시간상 미래가 아니고 갇힌 현실이 두 겹으로, 현실1을 현실2가 포위하고 있는 형국이에요. 현실1에는 뭐가 있느냐 시간이 흐르고 있는데, 인간의 시간인데 과거에서부터 현재를 거쳐서 미래로 가는 이 현실에 있다면, 현실2는 뭐냐 하면 영원한 현실입니다. 묵시. 현실1은 역사가 되지만 현실2는 역사의 반대말 묵시에요. 이런 예가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나오죠. 변화산에 올라갔는데 거기에 엘리야 나오고 모세도 나오죠. 모세는 B.C1440년, 엘리야는 B,C800년, 무려 600년의 선후배의 관계인데, 그리고 예수님, 여기에 세 제자, 이 모든 것이 같은 공간이 되는 겁니다. 같은 공간, 같은 현실이 돼요. 거기에서 아브라함도 만나고 이삭도 만나고 야곱도 만나고. 그럼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도 만나는가? 그거는 없어요. 왜냐하면 성경에 나올 때는 그리스도와 관련된 기능, 성경에 나오는 이름들은 그들의 이름이 아니고 예수님의 기능을 보여주는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아브라함은 없어요. 아브람이었죠. 아브람이 죽고 난 뒤에 아브라함이 된 겁니다. 이삭은 원래 없는 인간이고요. 야곱은 없고 야곱이 뭐가 됩니까? 이스라엘이 되죠. 천국에서 소개하는 이름은, 명단은 뭐냐 하면 전부다 복음과 관련된 기능을 했던 사람들의 이름이었어요. 복음과 관련이 된.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사랑해서 우리를 사랑해요. 죄인을 사랑하지 않습니까? 복음을 위해서 내가 여기에, 복음을 참여하는 명분하에 우리를 사랑하는 겁니다. 창세전부터.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한 것도 복음을 사랑해서입니다. 복음을 사랑해서. 현실에 감겨져있는 겁니다. 실례지만 신이가 나이가 몇 살이죠? 26살이죠. 스물여섯인데 반대로 육십 둘이라고 해봅시다. 아니면 팔십 둘이라고 해봅시다. 이미 아버지 엄마가 다 돌아가셨다고 쳐봅시다. 그러면 82살이면 살아온 81년이 남아있을까요? 안 남아있을까요? 단 하루만 남아있어요. 81년이 다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러면 87살이라면, 86년은 다 날아가 버렸습니다. 살아온 것이 아무리 길다 할지라도 현재 남아있는 것은 주님의 포위된 현실2에서 허락한 것이에요. 복음을 위해서 허락한 단 하루만 남아있습니다. 일용할 양식만 남아있어요. 일용할 양식에 머물지 않는 것이 바로 시험든 거예요. 그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에게 시험 들지 않게 해달라는 말은, 하나님이 바깥에서 우리를 보는 안목에서 빗나가지 않게 하옵소서. 거기서 얼굴 돌리지 않게 하옵소서. 이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오늘 하루에 충실했느냐 이거만 하면 돼요. 내일 일의 염려는 내일 주께서 과제와 숙제가 있을 것이니까, 오늘 미리 땡겨서 내일 것까지 염려한다는 것은 마치 내가 내일까지 산다는 그러한 보장이어야 하는데, 그러한 보장은 주님의 영역이기 때문에 우리가 보장할 수 없어요. 지금 이 환경, 이모 따라온 이 환경이 주께서 허락한 환경이에요. 복음을 위해서 살라는 말이죠.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제발 뭐가 되어라? 죄인으로 살아라. 두자로 하면 등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는 말이죠. 내가 해서 이 정도가 된 것이 아니고 주께서 허락하셔서 된 거예요. 주께서 허락하셔서. 아까 경제활동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모든 것이 타이밍이라고 했죠. 환율이 높고 낮고, 미국의 경상수지와 관련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그것을 인간은 알 수가 없어요. 베네수엘라를 보세요. 석유 값이 내려가서 저렇게 됐잖아요. 그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 아니에요. 베네수엘라 사람들이. 얼마나 물가가 높았으면 비빔밥 먹으러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값이 인플레이션이 됐잖아요. 그러니까 이거는 그들이 나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주신 타이밍에 말려든 거예요. 타이밍. 이거는 누가 나빠서 가난한 게 아니에요. 죄지어서 가난한 게 아니고, 부자가 되는 것도 전부다 타이밍입니다. 그때 그 시대에 타이밍에 맞춰서 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실을 모르는 부자가 천국에 가기가 힘들죠. 교만하니까. 마치 자기가 잘나서 이만큼 부자가 되었다고 착각을 하니까. 죄인으로 살라는 이 말은 주께서는 뭘 구해요. 주님께서 구인광고를 냈는데, 주님의 계약에서 나와 계약할 사람을 구하는 구인광고를 냈는데 조건이 뭐냐 하면 죄인인 사람이에요. 근데 아무도 없어요. 모든 인간은 자기를 변명하고 자기를 정당화하기 때문에, 전부다 나름 의인이에요. 지금 나는 잘났는데 하나님이 안받쳐줘서 그렇다고 전부다 남 탓, 하나님 탓, 조상 탓, 다 세상 탓하고 자기는 여전히 의인이고 양심이 살아있다고 우기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이래도 니가 의인이야?”라고 사태를 일으키죠. 내 뜻대로 안 되게 하시는 겁니다. 그 뜻이 뭐냐 하면 미래에서 오신 우리의 모델,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모습에 니가 동의하느냐를 묻는 거예요. 우리는 기겁하죠. 지금 출세하려고 애쓰는데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라고 하면 누가 하겠습니까? 밀어내죠. 그게 바로 배신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악마의 정신에 완전히 젖어있다는 사실을, 내 것 손해나게 하고 내 자존심과 명예를 훼손시킬 때는 강력하게 밀어버립니다. 밀고 우리는 복음이 없는 곳으로 도망치죠. 숨어버립니다. 지리산에 가든지 어디로 가든지 숨어버리고 도망칩니다. 도망치면 거기에서 뭐가 조금이라도 남아있겠어요? 도망치면 내 것이 남아있겠죠. 보통 젊은 사람들이 이혼하기 직전에 자식들보고 뭐라고 합니까? “야야, 우리 아빠 안 보는 곳으로 도망쳐서 우리끼리 살자.”라고 하잖아요. 우리끼리. 자식이 무슨 죄가 있다고 자식은 왜 데려갑니까? 내 거다 이 말이죠. 내 거다. 내가 낳은 자식이니까. “아빠 잊어버리고 우리끼리 살자.” 내 것이다. 반드시 내 것이 있어요. 내 것이 다치게 되면 우리는 와락 격분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십자가는 내 것이라는 신경조직을 기어이 건드려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니가 바로 악마에 속했다는 사실을 예수님의 복음으로서 들추어주는 겁니다. 이게 바로 계약이에요. 들추어주는데, 어떻게 들추어주는가, 피를 앞장세워서 가는 거예요. 니는 피 없이는 안 돼! 너의 행함과 철저함과 완벽함으로 안 돼! 이 피가 필요한 이유는 너는 내가 다 봐주고 있기 때문에. 봐준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니 행함과 더러움을 내가 다 눈감고 아닌 척 해준다는 이 말이 아닙니까? 그냥 계속 봐주는데 피를 보고, 피 때문에, 피를 증거 하기 위해서 너를 봐주고 있고, 너는 하잘 것 없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계속 성령을 통해서 밀어붙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사람은 나의 기억이 쓰레기의 기억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 사람 속에 피가 안착되었다는 시그널, 신호가 되는 겁니다. 나는 뭘 해도 쓰레기다. 뭘 해도. 그동안 쓰레기가 안 되려고 얼마나 내뺐습니까? “아니 되옵니다.” 계속 밀어내는 거예요. “이것까지는 안 됩니다.” 얼마나 밀어냈습니까? 격분이죠. 아직도 자신의 가치와 자신의 명예, 내가 평생 지켜온 그것, 자기도 뭔지 몰라요. 그런데 그것이 나의 기억 속에 있으면서 내가 나다움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절대적인 그것밖에 없다는 그것에 주께서는 피를 대면서, 주님이 바로 계약의 모델이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의 첫 번째 계약에 두 번째 계약이 합류가 되면서 완성이 되는 겁니다. 자, 이제 마지막 결론을 하고 마치겠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라고 할 때에, 이거는 말씀 안 드렸습니다마는, 다윗의 자손은 주가 되는데, 주가 될 때에 기능이 있어요. 기능이 뭐냐, 하나님의 원수, 36절,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의 원수를 원수답게 드러내고 원수를 이길 때 비로소 주가 주답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다윗의 자손의 기능입니다. 이 기능으로 인하여 결과물이 있는데, 그 결과물은 예수님께서 이런 기능을 하기 전까지는 원수 바깥으로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누구도 예수님의 구원의 대상자는 없습니다. 근데 주님께서 원수를 체포하고 거기에 갇혀있는 죄인을 끄집어낼 때, “오직 주님의 주 되심의 기능 때문에 우리는 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때에 없었던 백성이 주님의 언약에 의해서 새롭게 발생되는 겁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오신 겁니다. 끝으로, 그러면 이 작업에 우리가 할 게 뭐가 있느냐? 그걸 마지막으로 묻고 싶어요. 주님께서 이런, 이런 일을 하실 때 우리가 할 게 뭐가 있습니까? 할 게 있어요. “처리해주옵소서!” 내 안에 쓰레기가 계속 쌓이는 겁니다. 우울증도 걸리고, 특히 남자들은 가을이 되면 바바리 깃 세우고 잔잔한 음악이 깔리면서 걷잖아요. 호르몬 작용이랍니다. 기도죠. 흔히 말하는 기도를 성도는 하게 되는데, 기도할 때 무조건 달라고 하면 안 되고, “내가 할 수 있는 힘은 없습니다. 제가 힘은 없습니다. 주의 힘으로 처리해주옵소서!” 천국백성과 지옥백성을 나누는 그 작업을 처리해달라고 하는 거예요. 처리해달라고 할 때 처리해줍니까? 아니면 벌써 처리하고 있는 중입니까? 처리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처리해달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여기에 가담이 되고 고백을 하고 증거 하게 되는 거예요. 평소에 내 인생 내 힘으로 했다고 하지 말고, 주께서 천국과 지옥을, 복음 아는 자와 복음 모르는 자를 지금 이렇게 처리를 하는데, 그 처리를 내가 알도록 해주시옵소서! 라는 기도를 매일같이 하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살기 때문에, 우리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살아있다는 것을 증거 하게 해달라고 하는 겁니다. 같은 이야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괜히 오신 것이 아니고, 인간이 초대한 것도 아니고, 초청한 것도 아니고, 알아서 오셔서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사도바울 같은 성령 받은 사람을 만들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등신 같이 살면서도 기뻐하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