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사랑의 메아리 180914강의베드로전서

서울의존강의20180914a 베드로전서2장 1-5절(사랑의 메아리)-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2장 1-5

1절,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2절,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3절,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4절, 사람에게는 버린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5절, 너희도 산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

베드로전서 2장 1절부터 봅시다. 구원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는 현재 니 처지가 구원될 수 없는 처지에 있다. 그것을 니가 아느냐? 라고 되묻는 겁니다. 구원을 받으라는 말은 니 현 상태가 비참하다는 것이죠. 하나님 보시기에 받아들일만한 인간이 아니다, 라는 그런 뜻입니다. 구원을 이야기할 때, 저 구원을 가지자가 아니라 우선 니 주제파악부터 하라는 것이죠. 니가 누군지를 니가 아느냐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구원에 대해서 본인이 내가 이렇게 비참하구나, 내가 구원받아야 되겠구나, 라고 이렇게 생각을 했더라도, 본인이 스스로 비참하다고 여기는 그 상황에서는 인간은 어떤 구원의 방법을 강구하게 되어 있어요. 이 비참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 나름대로 자기가 어떤 계획을 잡은 것, 생각해놓은 게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방법은 소용이 없습니다. 안 통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구원을 언급했다는 말은 내가 형편이 없다는 말인 동시에 너는 절망적이다, 라는 것을 아울러 같이 언급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도대체 뭐가 그렇게 문제고, 뭐가 그렇게 잘못되었기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심각하게 보느냐는 겁니다.

여기 2장 1절에 보면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라고 되어 있는데, 평소에 악독하지도 않고 평소에 속이지도 않고 위선 떨지도 않고 평소에 시기하지도 않고 비방하는 말을 안 했다고 한다면, 그 사람한테는 이 사도의 이러한 지적이 해당이 안 되느냐 하는 그런 생각을 해봐야 하거든요.

성경에서 뭔가 나열을 할 때, 이러이러한 지적의 나열을 할 때, 아무리 봐도 나한테 해당되는 사항이 없다고 했을 때에, 그럼 그 사람은 건전하고 괜찮은 존재냐 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봐야 돼요. 악독과 모든 궤휼은 결국 위선을 떠는 것이고, 위선은 거짓이죠.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라고 하는 것은 인간을 향하여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는 인간에게 그럴 요소가 가득 들어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인간은 충분히 이렇게 될 수 있어요.

근데 인간의 악독과 모든 궤휼과 거짓의 이런 기준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은, 니가 나를 바르게 생각하는 거기서 나온 기준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가 오심으로서 비로소 우리는 악독한 사람이 되고 거짓되고 외식적인 사람이 되는 겁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그냥 구원한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하신다고 하면서 그 구원에 대한 방식을 하나님 쪽에서 이미 제시했습니다.

자, 하나님의 구원방식이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구원방식은 ‘하늘에서 누군가 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방식은 이겁니다. 하늘에서 누군가 오시는 거예요. 니가 열심히 말씀대로 살아 봐라가 아니라 하늘에서 누가 따로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이 할 것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일으키신 일, 하신 일을 그냥 그대로 전하면 되죠. 성도의 할 일은 뭐냐 하면 “예수님을 보내서 이런 일을 하셨습니다.”라는 그걸 그대로 전하고 나타내면 되잖아요. 신앙생활 하기가 굉장히 쉽죠.

“예수님이 오셔서 이런 일을 하셨습니다.”라는 것을 그냥 이야기하고, 그걸 고백하고 남한테 나타내면, 그게 전부잖아요. 구원의 방식이 하늘에서 누군가 오신 것, 예수님이 오신 것이 구원의 방식이기 때문에. 이렇게 누가 오셨다, 이런 일을 하셨다, 그러면 되지 않습니까? 뭐 더 필요한 것이 있어요?

식당을 갔는데 김밥이 먹고 싶어서 “김밥주세요.”라고 했어요. 그럼 식당에 있는 사람은 김밥을 만들면 되죠. 김밥을 달라고 했으면 김밥주면 되잖아요. 꼭 식당주인이 북한을 따라가야만 됩니까? 정상회담을 해야 돼요? 식당주인은 벤츠 타야 되고 뭐 자전거 타면 안 되고 그래야 돼요? 애기 셋 낳아야 되고 뭐 그래야 됩니까? 식당주인이. 우리 애 공부 잘한다고 식당 주인이 꼭 그런 이야기를 해야 되겠어요?

지금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우리 정신머리를 보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내가 성도로서 이야기를 해야 될 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을 이야기하는 것! 끝! 그거다 이 말입니다. 근데 그걸 안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그거 하면 돈 벌게 해주실 겁니까? 그거 하면 행복하게 해주실 겁니까? 그거 하면 건강하게 해주시겠습니까? 자꾸 정신머리가 딴 데 가있기 때문에, 주님의 구원방식을 내가 방해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내가 복음 전하면 자꾸 뭐 주시렵니까? 자꾸 이거 생각하는 거예요. 정신을 엉뚱한데 팔고 있는 거예요.

김밥 만드는 사람은 김밥을 만들면 되는 거지, 왜 딴 걸 신경 쓰느냐 이 말입니다. 성도가 미장원에서 머리 잘 안 나올 수도 있어요. 그러나 머리 잘 안 나왔다고 해서 주께 영광이 안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애가 공부 못 할 수도 있어요. 공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하고 관계없어요. 성도의 특이성은 뭐냐 하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을 미리 알고 있다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인생을 어떻게 살았는지 몰라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하나 더 보태면 애 낳고.

인간은 왜 사느냐, 시집가고 장가가고 애 낳고 애 키우고, 그래서? 그리고 집사고, 그래서? 서울에 집값이 비싸서 못 사고 변두리 사고, 그래서? 그래서 뭐 어쩌라고? 아파트 들어갔다, 그래서? 그래서 뭐? 그게 사는 거예요? 그게 성도로 사는 겁니까? 왜 그런데 신경을 쓰죠? 장사하는데 손님이 안 온다, 그래서 뭐? 남대문에서 동대문으로 옮겼는데 영 손님이 안 온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교회했는데 교인들이 다 빠졌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게 성도의 할 일이 아니잖아요. 그게.

성도의 할 일은, 전에 예수님을 알기 전에 그것은 입에 올릴 가치도 없는 것이 성도의 할 일이에요. 내가 예수님을 알기 전에, 몰랐을 때에 내가 온 정신을 거기에다가 팔았던 그거 있잖아요. 내가 예수님을 몰랐을 때에 집중해서 관심 가졌던 것이 뭐냐 하면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사고팔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그런 것들이었어요. 남한테 우열해서 잘났다, 나는 이만큼 잘산다, 그런 것 비교하고. 등산가고 취미활동하고 그런 게 전부인줄 알았어요. 지금 불신자들처럼 말이죠.

그런데 성도가 됐다는 말은 그렇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해도 구원이 되더라? 안 되더라? 이게 구원이 안 되는 거예요. 구원될 수 없는 거예요. 그 이유를 제가 미리 말씀드릴까요? 이 세상에서 내 자리를 주님께서 빼앗아버렸다. 누가? 주님께서. 이 세상은 원래 누굴 위한 세상이냐 하면은 주님을 위한 세상이거든요.

왜 사람들이 예수님께 관심이 없느냐 하면은 이 세상에 돌아갈 자기 자리가 따로 있다는 거예요. 직장 끝나고 어디로 갑니까? 집에 가죠. 집에 돌아갈 내 자리가 있다는 겁니다. 내 자리가 따로 있으니까 나는 버티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해서 만들어진 것이 뭐냐 하면은 내 자리에요. 내 자리. 어디에? 이 세상에서 내 자리.

근데 주님에 의하면 이 자리는 시너 뿌려서 확 불을 붙여야 할 자리, 시너 안 뿌려도 하늘에서 유황불이 떨어져서 불살라 버려야 될 자리가 이 세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돌아갈 내 자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돌아갈 내 자리가 없어요. 회사에서 나가라고 하는데 안 나가고 있으니까, 아침에 회사에 출근해서 자기 자리에 턱 앉아가지고 꼼지락거리면서 일을 해야 되는데, 회사에서 나가라고 했다 이 말이죠. 그럼 그 다음부터 뭐부터 해야 됩니까?

우선 사원증 뺏어가지고 못 들어오게 만들고, 출입구 스크린 타넘고 들어왔다 칩시다. 개발부든 뭐든 가봤자 자기 자리에서 의자하고 책상하고 벌써 뺐잖아요. 그게 자리 빼는 거예요. 회사에 자기 자리 없으니까 잘린 것을 알고 집에 갔는데, 만약에 마누라하고 자식들하고 이사 갔다고 하면 어떡할 겁니까? 찬스라 해서 회사에 간 사이에 완전 등기이전하고 이삿짐센터에는 어디로 가는지는 알리지 말라하고 확 뺐어요. 집에 갔는데 다른 사람이 살고 있으면 어떻게 할 거예요? 그때 그걸 한번 상상해보세요. 그때 저와 여러분의 마음이 어떨 것 같습니까? ‘아, 이 세상에 내가 돌아갈, 내 몸 하나 눕힐 자리가 없구나!’ 없어야 되죠.

구원이라는 것은 이곳을 떠나는 것인데 왜 내 자리에 연연합니까? 사람이 복음에 관심이 없고 말씀에 관심이 없는 것은, 그딴 것 없어도 내가 몸 눕히고 푹 잘 수 있는 것은 내 자리가 확고하게 있다고, 지금 그것가지고 버티고 있는 거예요. 날 보호해줄 남편이 있고, 예쁜 애들이 둘이나 있고, 뭐든지 내가 이 땅에서 슬프지 않고 위로받으면서,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이상으로 사랑받을 수 있는 여건들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여건들을 받을만한 자격이 되기 때문에, 내가 설마 이 자리에 내 자리가 없을 정도로 그렇게 무가치한 존재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잘못된 거예요. 잘못된 겁니다.

베드로전서 1장을 하면서 여러 번 강조했지만, 베드로전서 1장 1절에 보면 본도, 본도는 터키 북쪽이죠. 갈라디아, 터기 중부. 갑바도기아, 터키 서부. 아시아 터키 중부. 비두니아 터키 남쪽. 이 사람들이 흩어진 그 다음에 뭐예요? 흩어진 나그네죠. 나그네. 떠돌이입니다. 떠돌이. 이 세상에서 몸 하나 누울 곳이 없도록, 우리 주님께서 그동안 내가 큰소리칠만한 든든한 내 자리가 있다고 했던 그 자리를 의자부터 해서 책상, 명찰까지 다 빼버렸습니다. 확 뺐어요. 갈 곳이 없습니다. 최백호에요.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없어요. 없으니까 스스로 큰소리칠 수 없는 거예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주의 이름으로 산다고 하는 겁니다.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에요. 주의 이름으로 산다는 이게. 주의 이름으로 산다는 것하고 같은 말이 뭐냐 하면 내 이름은 없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 내 이름은 삭제되었다 이 말이죠. 차라리 다 빼버린 거예요. 내 의자, 내 아파트, 내 앞으로 등기된 것도 없어요. 내 이름은 서울 어느 어떤 곳에도 없어요. 내 이름을 지워버렸어요. 델리트delete, 컴퓨터 용어로 삭제라고 하죠. 삭제.

슬프십니까? 안타까운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슬프죠. 옛날 하던 방식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 때 맨날 하던 이야기가 뭐냐 하면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거예요. 왜? 애굽에 누가 있다고요? 옛날 오순도순 자기 가족끼리 살았던 행복한 그 자리가 있잖아요. 누가 어린양 피 잡으라고 했습니까? 본인들이 잡으라고 안 했어요. 모세 오라고 한 적이 없어요. 일방적으로 모세, 아론이 들이닥쳐서 이런 사단을 만든 겁니다. 좀 힘들었긴 하지만 정들었던 이웃이 있고.

그러나 내가 거기서 어떤 희망과 보람을 가지고 살았던 그 자리가 약속의 땅이 아닙니다. 약속의 땅은 생소하기 짝이 없어요. 생판 모르는 땅이 약속의 땅입니다. 언제 우리가 약속하고 뭐 관계있었습니까? 우리는 내 육과 관계가 되어 있어요. 육으로 사는 자리고, 그 자리는 뭐냐 하면 내 이름이 계속 유통이 되는, 내 이름이 계속 사람들에게 통용이 되는 장소라는 말이죠.

“니 어디 살아?” “나 여기 산다.” 그게 바로 내 이름이 아직까지 유통될만한 그런 구조, 그런 체계, 그런 자리가 있다 이 말입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없다~~ 이 노래가 아니잖아요.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잖아요. 그 산골에 나만 살았습니까? 내가 알고 있던 순이, 내가 알고 있던 복순이, 철희 내가 알고 있는 철없이 놀았던 그 친구들이 거기에 다 있다 이 말이죠. 그런 기억들이 모아 모아져서 지금의 자아를 구축하는 겁니다. 그중에 누구하나 훌쩍 떠나버리면 나는 마음이 허하죠.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 사람에게 관심 두었던 것이 있었거든요.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봉양했는데 시어머니가 훌쩍 떠나버렸다. 그럼 며느리의 마음구석은 아리다고 하죠. 막 떨리고 아픈 거예요. 빈자리를 느끼는 겁니다. 있어야 될 것이 도려내졌으니까.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식을 잃은 사람이 있어요. 20대에. 세월이 15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려요. 자식이 나고, 자식이 곧 나였습니다. 모든 것을 바쳤는데, 약의 부작용인지 자살하고 말았어요. 멀리 가서. 그것도 외국에서. 마지막 모습도 못 보고. 본들 뭐하겠어요.

또 어른이 돌아가셨을 때 마지막 결정적인 모습을 못 봐서 왜 섭섭해 합니까? 어른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 어른이 돌아가셨을 때 그 마지막 순간까지 포착해서 그것을 자기 자아의 구성요소로 집어넣을 때 자기 완결성이 갖추어진다는 거예요. ‘나는 어머님이 돌아가셨을 때까지 지켰다.’ 지키면 뭐 안 돌아가십니까? 그거 지킨 게 뭐라고?

인간은 세상 모든 것을 내 자리의 단단함, 내 자리의 안정성, 확고함, 거기에 자기 이름을 걸고 그걸 수집하고 그 힘을 모으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이 모든 것이 내가 이 자리에 터 잡기 위해서 사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되니까 오늘 본문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게 악독이 되고 거짓이 되고 위선이 되고 시기가 된다는 겁니다. 그게. 나는 나로 인하여 살겠다는 그것이, 다들 그렇게 살기 때문에 그게 무슨 악독이 되겠는가 하겠지만, 주님 보시기에 그게 악독이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괜찮은 사람을 뽑아가지고, 예수님께서 자기 말고 베드로를 뽑든지 야고보를 뽑든지 뽑아가지고 이 사람을 좀 본받으라고 이렇게 했다면 우리는 가능성이 있어요. 왜? 그 야고보도 인간이고 우리도 인간이기 때문에. 그 사람처럼 순결하고 바르게 살면 될 거예요. 왜? 단절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팔다리 두 개인데 못 할 게 뭐 있어요. 따라붙으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아까 이야기한 것을 다시 이야기합니다. 구원은 뭐라고 했습니까? 구원은? 구원방식이 뭐라고 했어요? 하늘에서 누가 오는 거죠.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어처구니없이 인간은 못하죠. 인간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구원이 된 거예요. 그래서 성도가 할 일은 뭐라고 했습니까? 또 다시 합시다. 예수님이 이런 일을 하셨다. 그러면 되는 거예요. 성도의 삶, 신앙생활을 어떻게 합니까? 라고 자꾸 묻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워요? 왜 자꾸 묻느냐 하면은 내가 나를 조작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악독이고 궤휼이고 거짓이고 외식이고 시기고.

얼마든지 쉬운 일을 할 수가 있는데, 얼마나 간편한데, 그건 안 하고 자꾸 딴 거 열심히 하면서, 이렇게 하면 됩니까? 이렇게 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자꾸 엉뚱한 생각을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 챙기던 버릇이 그대로 가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 챙기던 버릇이. 내가 어느 교회에 가서 등록하면 되느냐? 그건 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잖아요. 새문안교회에 갈까? 말까? 새문안교회고 헌문안교회고 간에 그건 문젯거리도 안 돼요. 언제 발을 빼든 말든. 십일조를 할까요? 말까요? 교회를 두 번나갈까요? 세 번나갈까요? 아이고! 쓸데없는, 다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어요.

“주님은 이렇게 했습니다. 이렇게 하세요.” 왜 그 이야기를 왜 못합니까? 저 사람은 내 사람이라고 왜 말을 못해요? 저 여자는 내 여자라고 왜 말을 못하느냐 말이죠. 주님은 우리 주님이라고 왜 말을 못해요? 그 말을 못해서 어눌하게 더듬거리거든요. 뭔가 자신이 없는 거예요. 어떤 분이 저한테 그런 질문을 해서 약간 속으로 웃었는데, 예수님을 증거 하게 되는 나는 구원 받았습니까? 라는 질문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을 증거 하게 되면 자기한테 관심이 없거든요. 근데 지금 예수님을 증거 하게 되면 구원받습니까? 라고 하는 것은 지금 증거 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을 증거 하게 되면 나는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을 자기가 구상하고 있는 중이에요. 자기한테 관심을 갖고 있으면서 자꾸 예수님을 거론해봐야 그거는 소용이 없습니다. 저 사람이 이렇다, 라고 하게 되면 그 말을 하는 그 다음 순간부터 여기에 나라는 것을 잊어버리거든요. 나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고 주님 생각하면 되는 겁니다. 그게 주의 일이에요.

그럼 나에 대해서 생각 안 하기 위해서 뭘 생각하면 됩니까? 나에 대해서 생각 안 하기를 내가 만약에 심사숙고한다면 이미 그 시작이 나에게서부터 시작한 일이 되어서 빼도 박도 못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그냥 우연이죠. 우연. 우연입니다. 왜냐하면 계산할 필요가 없어요. 이유가 뭐냐 하면 2절에 나옵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그냥 젖이 아니고 어떤 젖입니까? 신령한 젖이에요. 육과 대비가 되는 겁니다. 육하고.

다시 이야기합니다. 육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땅에서 주의 이름으로 사는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727건 중 11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2,477 강의 유튜브(256강, 257강) 약점, 인생 181106 - 최고관리자 18-11-06
2,476 강의 2018 원주 특강 -잠언 속의 지혜- 181103 잠언 최고관리자 18-11-03
2,475 강의 차이의 생산 181102 레위기 최고관리자 18-11-02
2,474 강의 사무엘상 43강(이스라엘의 영), 마태복음 105강(지극히 작은 자) - 최고관리자 18-10-30
2,473 강의 [18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45 - 위반자 민수기 최고관리자 18-10-18
2,472 강의 두개의 세상 181016 - 최고관리자 18-10-16
2,471 강의 유튜브 강의 (254강, 255강) 자살, 행복 181016 역대상 최고관리자 18-10-16
2,470 강의 버림받은 분 181012 - 최고관리자 18-10-13
2,469 강의 마귀 대적 181012 야고보서 최고관리자 18-10-13
2,468 강의 [18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44 - 시간 공개념 - 최고관리자 18-10-12
2,467 강의 언약적 세계관 181008 시편 최고관리자 18-10-08
2,466 강의 토해냄 181005 레위기 최고관리자 18-10-05
2,465 강의 잃어버린 상태 181002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18-10-02
2,464 강의 유튜브 강의 (252강, 253강) . 웃음, 전쟁 181002 - 최고관리자 18-10-02
2,463 강의 [18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43 - 당당함 - 최고관리자 18-09-28
2,462 강의 떨어져 나감 180918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18-09-19
2,461 강의 유튜브 강의 (250강, 251강) 현실 , 자만 180918 - 최고관리자 18-09-18
2,460 강의 [18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42 - 아는 사이 여호수아 최고관리자 18-09-16
열람 ➜ 강의 사랑의 메아리 180914 베드로전서 최고관리자 18-09-15
2,458 강의 싸움 180914 야고보서 최고관리자 18-09-15
2,457 강의 사무엘상 42강 (소유욕), 마태복음 104강(임금) - 최고관리자 18-09-11
2,456 강의 구조와 정서 180910 시편 최고관리자 18-09-10
2,455 강의 하체2 180907 레위기 최고관리자 18-09-07
2,454 강의 사랑의 전달 180904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18-09-05
2,453 강의 유튜브 강의 (248강, 249강) 말씀의 권위, 극장과 교회 180904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18-09-05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