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강-창 40장 9-20절(꿈 해석)180912-이 근호 목사
155강-창 40장 9-20절(꿈 해석)18091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0장 9-20절입니다. 구약성경 61페이지입니다.
창 40:9-20
“술 맡은 관원장이 그 꿈을 요셉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가 꿈에 보니 내 앞에 포도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서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고 내 손에 바로의 잔이 있기로 내가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그 잔을 바로의 손에 드렸노라 요셉이 그에게 이르되 그 해석이 이러하니 세 가지는 사흘이라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의 전직을 회복하리니 당신이 이왕에 술 맡은 자가 되었을 때에 하던것 같이 바로의 잔을 그 손에 받들게 되리이다 당신이 득의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고하여 이 집에서 나를 건져내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치 아니하였나이다 떡 굽는 관원장이 그 해석이 길함을 보고 요셉에게 이르되 나도 꿈에 보니 흰떡 세 광주리가 내 머리에 있고 그 윗광주리에 바로를 위하여 만든 각종 구운 식물이 있는데 새들이 내 머리의 광주리에서 그것을 먹더라 요셉이 대답하여 가로되 그 해석은 이러하니 세 광주리는 사흘이라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끊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 하더니 제삼일은 바로의 탄일이라 바로가 모든 신하를 위하여 잔치할 때에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으로 머리를 그 신하 중에 들게 하니라.”
여기에 등장하는 꿈이라 하는 것은 본인이 꾸고 싶어서 미리 예상해서 꾸지 않습니다. 5절에 보면, “옥에 갇힌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 두 사람이 하룻밤에 꿈을 꾸니 각기 몽조가 다르더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하룻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사흘 먼저 꿈을 꾸고, 사흘 후에 떡 맡은 관원장이 꿈을 꾸는 그것이 아니고 하룻밤에 두 사람이 동시에 꿈을 꾸었다는 이것은, 그들이 의도했던 대로 꿈을 꾼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꿈을 꾸게 한 겁니다.
꿈의 그 내용과 그들의 기대사항, 희망사항과 끊어져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자기가 예상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가 노리고 있던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일단 끊어진 거예요. 그러면 주도권은 어디에 있느냐? 본인들의 희망과 기대에 주도권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그 꿈이 그 꿈을 꾼 사람들을 지배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꾸게 된 특별한 그 꿈은 요셉의 경우를 생각하게 되면 잘 이해가 될 거예요. 요셉이 아버지나 어머니나 형들에게 절 받기 위해서 평소에 대단한 꿈을 노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요셉에게 꿈을 뒤집어 씌웠다고 보면 되지요.
그래서 요셉이 꿈의 주도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꿈이 요셉으로 하여금 데리고 다닌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요셉이 가는 곳마다 꿈이 원래 품고 있던 뜻이 조금씩 현실화되고 펼쳐지는 양상이 되는 겁니다.
만약에 꿈을 꾸지 않았다고 한다면 요셉은 그냥 자기의 소망과 자기의 희망과 기대를 스스로 만들어내서 자기의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아마 남들 못지않게 열심과 열심을 다해서 살려고 애를 쓸 겁니다. 때로는 그렇게 해서 꿈을 꿀 수도 있고요.
하지만 그 꿈은 본인의 기대사항과 관련되어 있는 그런 꿈을 꾸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요셉이 꾼 꿈은 꿈이 주도권을 갖고 있고 요셉은 어떤 의미에서, 꿈이 프로그램화 되었다, 그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 꿈의 내용이 어떻게 전개되고 펼쳐질지 본인은 모르고 있는 겁니다. 모르고 있다는 말은, 자기가 아무리 몸부림 쳐도 꿈이 이미 정해놓은 그 운명의 길을 벗어날 수 없다, 라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요셉과 함께 감옥에 갇힌 두 신하에게 하나님께서 꿈을 꾸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에게 준 꿈이나 이들 두 사람에게 준 꿈이나 둘 다 동일한 내용을 갖고 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동일한 내용을 갖고 있다는 말은, 그들이 그 꿈에 대해서 어디에 종속되어 있어요. 그들의 꿈이 자신들의 운명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자신들의 운명이 아니고 그 꿈과 그들 사이에 누가 끼어드느냐 하면, 요셉이 끼어듭니다.
만약에 요셉이 끼어들지 아니했으면 그냥 그들은 꿈만 꾸었을 뿐 그 꿈의 내용에 대해서 들을 수 있는 기회는 없는 겁니다. 그러면 요셉이 그들 꿈에 어떻게 끼어드느냐 하면, 해석자로 끼어들어요. 꿈의 해석자입니다.
꿈에 해석자가 없으면 그 꿈은 소용없는 꿈입니다. 이 말은, 꿈의 해석자가 꿈꾼 그들의 주도권, 그들의 운명을 쥐고 있다, 그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정리하게 되면, 꿈은 꾸었지만 그 꿈의 해석자가 등장하지 않는 한 그 꿈에 대해서 꿈 꾼 사람은 전혀 알 길이 없는 겁니다. 그 내막을 알 수가 없지요.
그러면 꿈의 해석자가 들어가서 해석을 한다는 것은 꿈 꾼 사람이 해석자의 해석에 무조건적으로 종속될 수밖에 없어요. 얽매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 본인의 꿈을 본인이 해석을 못하니까요. 무능하니까. 꿈을 해석할 능력이 전혀 없어요.
사람들이 자기가 꿈을 꾸게 되면 그 꿈은 나의 장래와 관련되었다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그 생각을 접어야 돼요. 그 생각을 포기해야 됩니다. 내가 예상한 꿈을 꾸었으면 그 꿈은 나의 장래와 관련되어 있는데 그게 아니고 내가 꿈꾸고 싶은 것이 아니라 꿈이 나를 통해서 등장한 거지요.
꿈이 현실을 위하여 꿈이 주어진 것이 아니고 현실이 꿈을 위하여 꿈이 나타나게 된 겁니다. 현실은 꿈에 종속되는 거예요. 현실이라 하는 것은 다원화되어 있어서 사람이 열 명이 있다면 열 사람이 다 각자 자기의 희망사항과 기대사항이 달라요. 너 다르고 나 다르고 다 다릅니다. 열 사람이 있다면 열 개의 꿈을 꾸고 열 개의 운명이 있다. 그렇게 보는 것이 상식이거든요.
그런데 만약 그 열 사람 중에 꿈의 해석자가, 꿈을 제대로 해석하는 자가 등장한다면 열 가지의 꿈은 단 하나의 내용만 이야기합니다. 해석자의 운명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뿐이에요. 그리고 그들이 살아가는 인생이라 하는 것은 본인을 위한 인생이라는 것은 없고 꿈의 해석자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 협조하는 의미에서, 참조하는 의미에서 해석자가 갖고 있는 운명을 나누어서 꿈이라는 형식으로 보탰다고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요셉이 갖고 있는 꿈의 확장이 바로의 두 신하의 꿈으로 전개되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두 신하가 꿈을 꾸기 전에는, 꿈을 꾸지 않았다고 치게 되면 그들은 어디에 매였느냐 하면, 바로 왕에게 매여 있습니다.
40장 1절에 보면, “그 후에 애굽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그 주 애굽왕에게 범죄한지라.” 범죄가 무슨 범죄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범죄한지라. “바로가 그 두 관원장 곧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그들을 시위대장의 집안에 있는 옥에 가두니 곧 요셉의 갇힌 곳이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꿈을 꾸지 않았다고 칩시다. 이 내용을 보게 되면 두 신하는 지금 누구에게 범죄했느냐 하면 바로왕에게 범죄했고 바로왕은 그 당시에 어느 나라의왕이냐 하면 애굽나라의 왕입니다. 애굽나라의 왕에게 범죄했기 때문에 그들이 갇힌 곳이 애굽나라에 소속된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감옥에 누가 있느냐 하면, 지난 시간에 했듯이 요셉도 같이 갇혀 있습니다. 오늘 본문 40장 14절에 “당신이 득의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고하여 이 집에서 나를 건져내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치 아니하였나이다.”
애굽나라에 갇힐 만한 나쁜 짓을 하지 아니했다는 그 내용이 어디에 포함되어 있느냐? 요셉에게 꿈을 꾸게 한 꿈의 내용의 일부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억울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 이 애굽이라는 나라에서는 죄인취급 받아서 갇히게 되었다는 그것이 요셉에게 내려준 꿈의 내용 중에, 과정 속에 포함이 되어 있다는 그 말입니다.
왜냐하면 요셉이 가는 일대기가 꿈의 내용의 펼침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라톤 하는 사람이 경치구경해서는 경기 못합니다. 아, 경치 좋다, 이러다가는 꼴찌 가지요. 마라톤 하는 사람의 특징은 자기 가는 길만 기억한다는 거예요. 이게 인도네시아든, 한국이든, 부산이든, 대구든 관계없어요.
42,195미터를 뛰는 겁니다. 그 가는 길만 생각해요. 요셉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은 자기의 꿈의 내용이 자기를 통해서 어떻게 현실화되고, 구체화되고, 펼쳐지느냐 하는 겁니다. 더 간추려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세상이라는 것은 고정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세상은 고정되지 않고 요셉이 움직이게 되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데 그 세상이 뭐냐? 하나님의 뜻이 함유된 새로운 세계가 펼쳐집니다. 요셉이 가는 곳마다 그런 현상이 일어나요.
그러니까 요셉이 품고 있는 꿈의 세계와 요셉의 가치를 못 알아봐서 요셉을 죄인으로 만들어서 감옥소, 교도소에 집어넣은 그 애굽 바로왕의 세계관, 그 중에서 어느 것이 꿈이며 어느 것이 진짜 현실인가를 요셉을 통해서 분명하게 보여주는 겁니다.
일단 이 본문을 보는 우리들은 어느 쪽에 가느냐? 일단은 요셉 편에 서지 마세요. 요셉 편에 서지 마시고 어느 편에 서느냐? 바로의 신하 편에 일단 서야 돼요. 순서가 바로의 신하 편에 서서 그들이 생각하는 현실관부터 시작해서 그 다음에 어디로 가느냐?
진정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서 알려주고자 하는 진짜 현실 쪽으로 다가서는 방식이 되어야 됩니다. 바로의 두 신하는 일단 자기가 바로왕에게, 주님한테가 아닙니다, 바로 왕에게 뭔가 잘못한 것이 있어서 감옥에 갇혀 있는 입장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옛날에 바로 왕에게 술을 드렸다. 측근이라는 말이지요. 최측근, 일거수일투족에 관여하니까. 그리고 빵을 드렸던 그 자리에 어떻게 회복해볼까 하는 열의와 열망, 희망을 품고 지금 감옥살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 두 사람에게 어떤 꿈이 주어졌을 때 그 꿈에다가 자기의 기대를 듬뿍 집어넣겠지요. 교회 다니면서 그런 이야기들 많이 들었잖아요. “목사님, 꿈을 꾸었는데요. 내가 구원 받은 꿈 맞지요? 예수님이 허옇게 등장했는데 저 신자 맞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자기의 구원, 얼마나 자기 구원받는 소원을 했으면 개꿈까지 연결시켜서 자기 구원받은 것을 그런 식으로라도 확인받고 싶겠어요?
그러니까 이 바로의 두 신하에게 꿈을 주었다는 것은 애굽나라가 유일하게 현실이라고 우기는 그 당시의 평범한 모든 사람들의 한계를 보여주는 겁니다. 애굽나라에서 기억되는 것은 옛날 잘나갔던 자신의 그 자리가 그리운 거예요. ‘내가 감옥에 있을 것도 아닌데 바로왕에게 잘못해서 갇혔구나. 어서 우리 바로왕의 노가 풀려서 다시 원상회복되었으면 참 좋겠다.’
그런데 어느 날 꿈을 꾸거든요. ‘어? 꿈이다. 혹시 내가 다시 회복될 수 있는 희망을 주는 꿈이 아닐까?’ 하고 그 꿈을 기억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그 두 사람이 감옥살이가 좋아서 꿈을 꾼 것이 아니잖아요. 어서 거기서 탈피하고 싶어서, 벗어나고 싶어서 꿈을 꾸었을 것이 아닙니까?
그 꿈은 그들이 꾸었다고 생각하고, 개인적인 그들의 운명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꿈을 꾸었을 거예요. 그러나 성경은, 그 두 사람의 꿈은 동일한 꿈이고 이것은 요셉의 1인 2역이에요. 그들의 장래에 관한 꿈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꿈에 있어서, 아까도 이야기 했잖아요, 해석자가 등장했다는 말은, 그 꿈을 꾼 사람의 모든 권한은 해석자 앞에 개입될 수 없습니다. 배제되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요셉이 어떤 희망을 갖고 있는가와,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서, 꿈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과 요셉의 희망사항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이 두 신하가 꾼 꿈은 두 신하가 납득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꿈 따로 그들 따로입니다. 그들은 꿈을 해석할 권한도 없고 자격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의 꿈을 자기들의 희망과 관련된다고 철석같이 믿고 그 꿈 때문에 근심의 빛이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둘 다 왕에게 범죄했기 때문에 운명이 둘 다 동일한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동일한 운명인데 꿈의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는 가운데서 꿈의 내용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5절에 보면, “두 사람이 하룻밤에 꿈을 꾸니 각기 몽조가 다르더라.” 둘 다 희망적이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둘 다 희망적인지 아닌지는 판단이 안서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꿈은 꾸었는데 꿈의 해석에 대해서 자신감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을 때에 요셉이 가서 묻지요. “어찌하여 근심이 있습니까?” “우리가 꿈을 꾸었는데 해석할 자가 없습니다.” 해서 이제 두 사람은 꿈에서부터 떨어지고 꿈의 해석자가 이 꿈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를 따라서 이 두 가지의 꿈을 통해서 요셉이 가졌던 꿈의 내용이 보다 더 넓게 애굽 땅에 확장됩니다.
꿈의 해석을 이제 이야기를 하는데 그 해석이 뭐냐? 9절부터 꿈 이야기부터 보면, “술 맡은 관원장이 그 꿈을 요셉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가 꿈에 보니 내 앞에 포도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서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고 내 손에 바로의 잔이 있기로 내가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그 잔을 바로의 손에 드렸노라.” 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줄줄 풀어놓는 그 술 맡은 관원장이 먼저 그 꿈에 대해서 본인의 소감, 본인이 해석할 때는 어떻게 해석하겠는지 분명한 자기 나름대로의 것이 있었을 거예요. ‘그래. 이거야!’라고 했으면 그 꿈의 해석을 요셉에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고 요셉에게 꿈의 해석을 맡길 것도 없었어요.
그런데 꿈에 대해서는 이렇게 술술 이야기를 하면서도 꿈의 해석에 대해서는 전혀 막혀 있는 겁니다. 이 꿈의 내용에 누가 등장하느냐 하면, 바로가 등장합니다. 여전히 이 두 신하는 바로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알고 있던 과거의 애굽의 생활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애굽이라는 권력의 범위를 못 벗어난 거예요.
요셉이 거기에 대해서 해석을 합니다. 요셉의 해석을 보기 전에 우리들이 이 꿈을 해석을 할 때 어떻게 해석하겠느냐, 를 한 번 시도를 해보세요. 이 시도를 하기가 겁이 나는 이유가 있어요. 뭐냐 하면, 어떤 사람의 꿈을 해석을 할 때는 그 꿈에 등장한 여러 가지 사물과 사건과 그 이야기, 스토리의 모든 것이 일관성 있게 나와야 됩니다. 그게 첫 번째에요. 그 꿈 하나에 대해서 일관성 있게 이야기를 해야 돼요.
그 꿈의 내용에서 어떤 사물도 빠짐이 없어야 돼요. 그 이야기를 이루기 위해서는 다 필요한 사물과 등장인물이 딱딱 맞춤으로 다 들어가 줘야 비로소 해석이 완료된다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더 중요합니다. 그 일관성을 가지고 그 꿈과 내용이 다른 꿈을 해석할 때도 동일한 원칙을 적용시킬 때 앞에 있는 꿈의 해석도 옳고 나중의 꿈의 해석도 옳고, 그 두 가지 해석이 다 옳아야 되는 거예요. 백가지 해석을 해도 백가지가 다 옳은 겁니다.
지금 우리가 그걸 시도해 봅시다. 이 자리에서. 지금 꿈이 두 가지인데 두 가지가 아니고 천 가지 만 가지가 나오더라도, 어떤 꿈이라도 다 해석을 할 수 있는 일관성이 있는 핵심부분을 뽑아보자는 그 말입니다.
요셉은 그것을 시도했어요. 12절에 “요셉이 그에게 이르되 그 해석이 이러하니……” 제일 먼저 나온 해석은 바로에 관한 것도 아니고, 포도주에 관한 것도 아니고, 딱 뭐냐? “세 가지는 사흘이라.” 3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떡 굽는 관원장의 꿈을 해석할 때도 마찬가지인데 18절에 “요셉이 대답하여 가로되 그 해석은 이러하니 세 광주리는 사흘이라.” 이렇게 나와요. 두 신하가 꿈을 이야기할 때는 바로 이야기부터 먼저 해요. 바로에 종속되었으니까.
바로 이야기를 하는데 요셉이 서로 내용이 다른 두 가지의 꿈을 동일하게 해석할 때는 시작을 뭐로부터 하느냐 하면, 3, 하나 둘 셋, 그 3으로부터 시작을 해요. 둘 다 어떤 해석이든 3으로부터 해석합니다. 바로부터 해석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이 세상 애굽에 있는 인간, 현재 현실에 있는 모든 인간은 항상 인간이 인간에게 종속되었다고 보는 겁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종속된 거예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기억하는 것은 같은 사람들을 기억해요. 저 사람이 어떠하다, 저 사람 때문에 힘들었다, 저 사람에게 도움을 받았다.
사람과 사람에 의해서 현실이 구성된다고 보는 겁니다. 요셉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딱 사흘이에요. 3일을 집어넣습니다. 시간을 집어넣어요. 시간은 뭐냐 하면, 타이밍입니다. 시간은 운명이에요. 프로그램된 운명에 따라서 인간은 그냥 들러리일 뿐이고 장기판의 장기 알일 뿐이라는 거예요.
포도나무의 세 가지가 사흘이라 하는 것, 도대체 어느 근거에 의해서 요셉이 이런 비약적인 해석을 내리는 겁니까? 감히? 꿈에 나오는 포도나무의 세 가지나 꿈에 나오는 떡 세 덩이를 놓고서 철학박사나 과학박사 혹은 문학박사가 아무리 들여다봐도 여기서 사흘이라는 시간개념이 뽑혀 나올 수가 없어요.
요셉이 주목하는 것은 뭐냐 하면, 당신들 꿈은 사흘이라는 그 간격을 설명하기 위해서 꾼 꿈이라는 겁니다. 사흘이라는 그 간격. 꿈을 꾼 이 두 당사자, 신하는 3이라는 것은 머릿속에 들어있지를 않아요.
그 사람들 머릿속에는, 내가 여기 있고 그리고 옛날의 내가 모셨던 그 바로 왕이 있고, 바로 왕과 나 사이에 서로 정들었던 것, 주고받았던 것, 사랑받았던 것, 원상복구를 기대하면서 인간 대 인간의 관계성, 정, 우정, 열심, 희생이라든지 그런 것을 가지고 엮게 된 거예요.
엮게 되면 결국 꿈이라는 것은 뭐냐? 왕이라는 그 님에 대한 나의 애정과 그리움, 사랑, 옛날에 임금으로부터 사랑받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면서 살아갔던 사람이에요. 3이라는 것은 그들로서는 전혀 감안하지 않는 내용입니다. 그 ‘3’이라는 것은.
당신이 평소에 임금에게 잘했기 때문에 임금이 ‘내가 오해했구나. 좀 잘못한 것을 가지고 내가 과하게 감옥에 넣었구나. 이제 생각해보니 내가 너무 심하게 했네. 다시 내가 불러들여야지.’ 이렇게 생각 좀 해주기를 바라지요.
그런데 사흘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바로도 그 3일에 종속되어 있고, 신하도 3일에 종속된 거예요. 인간이 자기 의지대로, 자기 생각대로, 자기 뜻대로 세상을 움직여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요셉 앞에 있는 애굽나라 입장이라면 요셉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세계기 때문에 그 3이라는 것은 바로와도 관계없고, 신하와도 관계없고, 하나님과 요셉과의 관계성 안에서 3이라는 시간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거예요.
3이라는 것은 시간적인 단절이에요. 끊어짐이에요. 이 현실과 꿈이 끊어져 있다는 것은 현실에서 어떤 노력을 해도 현실이 꿈이 될 수가 없고 꿈이 현실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흘이라는 그 간격이 있고 그 단절면이 있다는 것을, 그 3이라는 것을 두 신하 속에 집어넣은 거예요. 반도체 칩처럼 집어넣은 겁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집어넣은 그것을 끄집어내는 겁니다. 끄집어내는 자가 해석자에요.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인간이 세상에 살고 있었다. 하나님의 세계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하나님 아들이 왔습니다.
이 말은 뭐냐?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를 아무도 인간들 사이에서는 해석할 자가 없어요. 그리고 인간들은 인간들의 역사가 그 현실의 전부인줄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냈습니다. 보낼 때 이 세상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하늘나라 갈 수 없고, 하늘나라 들어가겠다고 요청하는 그것도 다 헛수고에요.
인간들은 헛짓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들은 그 점을 몰라요. 자기가 하늘나라와 끊어져 있다는 것을 몰라요. 단절되어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누군가 이 세상에 대해서 제대로 해석을 해줘야 돼요. 해석을 하러 오신 그 분이 이 땅에 들어오는 순간 예수님은 동시에 이 땅의 사람이 되고 맙니다.
죄도 없으면서 죄 있는 사람이 되어버렸어요. 그렇다면 죄 있는 세상을 대표해서 예수님은 단독대표자로서 아버지 앞에 나가서야 돼요. 예수님을 통해서 세상을 안다 그 말입니다. 너희들은 연구해봐야 몰라. 예수님이 가는 그 마라톤 길, 예수님이 가는 그 길을 통해서 세상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모양새며 우리의 본질은 어떤가를 비로소 알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예수님은 우리의,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갔습니다. 죄도 없으면서 죄인의 모습으로 갔을 때, 아버지 앞에 예수님이 그 모습으로 섰다 할 때에 그 간격은 며칠 간격인가? 사흘 간격입니다. 끊어졌어요.
사흘 동안 지옥에 가셔야 됩니다. 음부에 계셔야 돼요. 끊어졌어요. 몰라요. 인간들은 자기에 대해서 모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십자가에 대해서 몰라요. 성경은 간단히 이야기합니다. 성령이 임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주라고 할 수 없다고 했어요.
이게 무슨 의미냐 하면, 이 땅에서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걱정을 하고, 어떤 자기 일에 책임을 지고 뭘 바르게 하겠다는 그 모든 것도 개꿈에 속하는, 아무 소용없는, 현실도 아닌데 이게 현실이라고 우기면서, 이게 전부다, 라고 여기면서, 내막도 모르고, 자기가 알고 있던 과거의 기억의 자리로 빨리 회복하고, 자신의 잘난 과거가 자신의 미래인양, 미래를 대처하고 있다고 믿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로의 두 신하는 애굽에 속한 사람들이에요. 바로마저. 하지만 요셉의 해석에 의하면 그 바로마저, 두 신하마저 요셉이 품고 있던 그 꿈을 보여주는 하나의 장기 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현실을 모르고 요셉이 움직여야 그들이 현실에 존재하는 이유가 요셉의 입장에서, 해석자의 입장에서 비로소 밝혀지는 거예요.
나중에 바로왕은 꿈을 꾸게 됩니다. 또 꿈의 해석자가 없어요. 그럴 때 전에 꿈의 해석자로 등장했던 요셉이 바로의 꿈의 해석자로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애굽이라는 나라는, 바로라는 사람은 요셉이 갖고 있던 야곱의 언약, 하나님의 꿈의 나라에 복속되고 그 야곱의 언약을 위해서 필요했던 인간 세계라 하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납니다.
그 핵심이 바로 요셉의 꿈 해석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꿈속에서 세 가지, 그냥 나뭇가지에요. 포도나무 가지라니까요. 세 떡 덩이. 그냥 떡이에요. 그냥 떡이라니까요. 하지만 그것을 단절된 사흘로 보는 거예요.
사흘 뒤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움직여서 누구는 건질 것이고, 누구는 죽일 것이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의 본심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그 신하를 죽일 필요까지는 없거든요. 한쪽을 복권시키는 것은 좋아요. 그러나 한쪽을 잔인하게 죽일 필요까지는 없다는 말이지요. 둘 다 죄를 범했으니까.
인간의 심정, 인간의 분통같으면 죽이면 같이 죽이든지 살리려면 같이 살려야지 일방적으로 한쪽을 살리고 한쪽은 죽인다는 것은 그것이 바로의 의지가 아니라는 거거든요. 바로의 의지가 아니라면 뭐냐? 야곱언약의 의지가 뭐냐? 야곱언약에 속한 사람은 천국 가고 아니면 지옥 간다는 것, 이것은 꿈을 주신 하나님의 본래의, 본연의 자기고유권한입니다.
죄 많은 세상에 예수님 오실 때 다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에요. 애굽은 감옥이에요. 애굽은 죽음의 세계입니다. 모든 사람은 죽어 마땅해요. 그러나 죽어 마땅함에도 누구는 건지고 누구는 그냥 지옥 보내는 권한, 이것은 예수님 본인의 고유한 권리행사입니다.
그게 요한복음 5장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내가 살릴 자 살리고 죽일 자 죽인다는 이것은 그 모든 심판을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일임했다는 말이지요. 그것이 지금은 해석자 요셉에게 일임한 것이 되고, 요셉에게 일임된 그 권한을 바로가 본인의 의사에 관계없이 결정된 꿈의 운명대로 바로왕은 한쪽은 복권시키고 다른 한쪽은 잔인하게 죽여 버립니다.
17절에 보면, “그 윗광주리에 바로를 위하여 만든 각종 구운 식물이 있는데 새들이 내 머리의 광주리에서 그것을 먹더라.” 이미 이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 보게 되면 이 해석이 무척 쉬운 해석이지만 요셉의 해석을 모른다 치고 해석하게 되면 뭐냐?
얼마나 떡을 잘 만들었으면 바로 왕도 먹어야 되고, 새들이 와서 먹을 정도, ‘역시 네가 제조한 빵, 풍미 빵……’ 그 집 빵 맛있어서 그 빵 아니면 안 사먹거든요, 하여튼 ‘네가 감옥소에 있을 때 다른 사람이 만든 빵 못 먹겠더라. 네가 만든 빵이 얼마나 맛이 있었으면 새들이 와서 먹느냐. 역시 네가 최고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옛날에는 빵을 머리 위에 이었거든요. 여자들은 어깨위에 그리고 남자들은 머리위에 얹어서 빵을 이동시킵니다. 그러니까 이 빵 굽는 사람이 바로 왕을 위해서 꿈에 빵을 구웠다는 말이지요. 평소에 이 빵 굽는 관원이 얼마나 임금님을 사모하는지가 그대로 다 표현되는 거예요.
술 빚는 그 관원이나 빵 만드는 그 관원이나 주군에 대한 충성심은 차이가 없어요. 그런데 꿈이 다르다는 점에서 그들은 약간 불안했던 거예요. 차이가 나지 않는데 어떻게 차이가 나지? 야곱언약은, 요셉의 꿈은 차이 없이 완화시키는 세상에 하나님의 절대적 기준으로 차이를 보호하고 그 차이를 구체화시키는 작업에 하나님이 주 예수님을 보내신 겁니다.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 내가 사랑할 자는 기어이 사랑하시고 미워할 자는 기어이 미워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이 꿈의 해석자를 통해서 요셉이 야곱언약을 품고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애굽나라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애굽나라는 요셉의 나라, 야곱의 나라 천국을 보여주는 하나의 무대로서의 기능을 할 뿐이에요.
그리고 천국 가는 것만 좋아하지 말고, 기어이 지옥 갈 자를 떼 냈다는 것, 안 떨어지려고 아등바등 애쓰는 자를 야곱언약, 하나님의 결정에 의해서 기어이 지옥 갈 자를 떼 내는 이것도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인 것을 우리가 믿어야 돼요.
게을러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복음을 못 듣도록 발길로 차버리는 기적 때문에 그들은 지옥 가는 거예요. 유황불에 들어가는 겁니다. 어떤 것 하나, 주님의 꿈, 주님의 계획대로, 주님의 정하신 운명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바로 우리는, 성도는 꿈을 실어 나르는 요셉같은 존재기 때문에 이 애굽같은 세상에서, 죽음의 세상에서 조금도 기죽지 말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결정은 우리 주님께 달렸는데 우리는 착각해서 열심히 하면 구원받는 줄 알았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주님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애굽적인 방식이고, 마귀적인 방식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