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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305강-갈 5장 22-24(성령의 열매)180909-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갈라디아서

305강-갈 5장 22-24(성령의 열매)18090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5장 22-24절입니다. 신약성경 308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5:22-24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사도바울이 이 말을 할 때에 24절 뒷부분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이라고 되어 있어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하는 말을 구태여 할 필요도 없고 그렇게 언급하는 이유도 사람들은 잘 몰라요.

왜 그러냐 하면, 24절의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하는 것을 빼고 그 다음에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이것만 나열해 버리면 사람에게 하나의 목표가 생겨버립니다.

‘하나님이 이런 것 좋아하시는구나. 그렇다면 우리가 이것을 해내면 되지 않겠느냐. 성령의 열매라는 것을 해내면 되지 않겠느냐.’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여기 있고 그 다음에 성령이 찾아오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데,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이런 것을 갖게 되면 누가 뭐래도 우리는 신자 맞다. 천국 가는 백성 맞다.’ 이렇게 자부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22절과 23절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24절이 갑자기 등장해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 감정과 욕심이지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감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이렇게만 되어 있으면 ‘그래. 우리가 십자가에 고난당한 예수님의 낮아지심, 그 희생을 본받아서, (그래서 눈물 찔끔찔끔 흘리면서) 주님께서 이렇게 고생했구나. 아무것도 아닌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셨구나. 정신 차리자. 우리도 그 마음을 본받아서 남들에게 잘해줘야지. 우리도 욕심 부리지 말고, 너무 감정대로 하지 말고, 나대지 말고, 착하게, 바르게 살자.’

이렇게 생각해서 그렇게 사는 것은 뭐냐 하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 이런 것들이 나온다고 되는 거예요. 십자가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십자가는 우리 자신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하나님의 원하는 인간으로 살 수 있는가를 미리 모델로 보여준 것이 십자가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라는 그 말은 왜 들어가는 거지요? “육체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되어 있어요. 우리의 욕심을 못 박은 정도가 아니고, 우리의 감정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고, 지금 우리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하는 거예요.

이 대목을 제가 수십 년을 봤습니다. 수십 년 보고 여기에 관한 설교나 주석도 많이 봤어요. 사람들은 자꾸 뭘 의도적으로 빼먹느냐 하면, “육체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이것을 자꾸 빼버리고,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하는데 이것은 무슨 불교도 아니고요.

“우리 욕심 없이 삽시다. 무소유로 삽시다. 아무것도 아닌데 마음 낮춰서 삽시다. 그러면 성령의 열매를 맺어서 영광 돌리고 우리는 누가 뭐래도 신자 맞고 천국 가는 사람 맞습니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혹하게 만드는 그런 것들만 수십 년 동안 봐왔어요.

제일 중요한,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그 대목을 빠트리고 있는 거예요. 정말 답답하지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요, 이런 이야기에요. 혹시 늦게 오신 분들이 없는가? 어서 다 와야 하는데요. 이것은 중요한 이야기니까요.

너 시신이라는 거예요. 너 시체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죽어 있다는 겁니다. 시체에요, 시체. 김 시체, 박 시체, 최 시체. 시체입니다. 남자시체, 여자시체. 이미 우리의 육체 자체가 죽은 육체에요.

그런데 지금껏 내가 알고 있는 이 모든 성경해석은 뭐냐? 살아 있는 나인데, 그동안 성령 못 받아서 제대로 영광 못 돌렸는데, 하나님이 살아 있는 나에게 성령 주셔서 ‘이놈아, 정신 차려라. 예수님은 이런 길로 안 갔잖아. 마음 낮추고 갔잖아. 남 도와주며 갔잖아. 착하게 살았잖아. 너희들은 그동안 마귀에 잡혀서 못되게 살았는데 이제는 정신 바짝 차리고, 욕심 좀 줄이고, 감정 좀 절제하고, 그래서 살아 있는 네가 이제 성령을 통해서 바르게 살게 되면 사랑과 온유와 화평으로 영광 돌리고,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다.’

제가 잘못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지금껏 들었던 이야기는 그런 류만 들었지 그 외에 들은 기억은 없어요. 제가 공부가 많이 부족했던 모양이지요. 그런 것 외에는 들은 적이 없어요. 내가 알기에는 그게 전부에요.

여전히 그 바탕에는 뭐냐? 아직 우리가 안 죽고 시체가 안 되었다고 우기는 그 사고방식이 밑에 다 깔려있는 겁니다. 아직 자기에게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에요. 여러분, 죽음은 가능성이 제로, 없는 거예요. 죽음이란 가능성이 없는 겁니다. 죽음이란 구원될 가능성도 없고 살 가능성도 없는 것이 죽음이에요.

그런데 사람은 그게 싫은 거예요. 지금 꼴딱꼴딱 숨넘어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이미 죽은 것으로는 생각을 안 하고 있어요. 살아있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조금만 도와주게 되면 자기가 펄떡펄떡 살아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완전히 죽지는 않았지만 죽음으로 가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좋은 기회를 주셔서 말씀을 주시고, 성령 주셔서, 꼴딱꼴딱 넘어가는데 마침 성령이 와서 후~, 해서 죽을 뻔 했다가 살아나서 이제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는 겁니다.

인간에 대한 긍정이지요. 사람에 대해서 잘해보겠다는 겁니다. 아, 정말, 기가 막히지요. 아까도 쉬는 시간에 어떤 분이 이야기했지만, 자기 가게에 온 손님이 묻는데 그 사람이 ccc 활동하는 사람이랍니다. “당신은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는 거예요.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하는 그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예수님한테 관심이 없습니다, 하는 뜻이에요. 나는 내 구원받는데 관심이 있습니다, 하는 뜻이에요. 왜 구원받아야 될까요, 라고 물으면 “살아 있는 내가 더 살기 위해서, 좋은 데 가기 위해서.” 자기가 아직도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시체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귀신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몰라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라는 것, 사랑과 희락과 화평……, 이것은 뭐냐 하면, 성령에 의해서 나를 제대로 알게 되었고, 세상이 지옥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게 된 감사함에서 더불어 같이 나오는 거예요. 너무 고마워서.

내가 내 힘으로 알지 못했던 것, 인간이 자기 자신이 죽은 자라는 것을 무슨 수로 알겠습니까? 공부해봐야 그 전제가, 나는 살아 있다고 여기고 공부할 건데요. 영재발굴단을 봤어요. 잘 안 보는데 언뜻 보니까 9살 먹은 애인데 중국어 잘하지요, 영어 잘하지요, 한국말 너무 잘하지요. 세 살 때 동화 다 떼고, 네 살 때 모험이야기 다 떼고, 일곱 살 때 과학이야기, 아홉 살에 지금 철학이야기 떼고 있다는 거예요. 아홉 살에 철학이야기.

그런데 그 애가 자기가 시체라는 것을 몰라요. 그게 죽은 모습이라는 것을 몰라요. 자꾸 죽었다고 언급하니까 숨 끊어진 것을 생각하는데 저는 성경적으로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죽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죽었다고 이야기하고, 달리 이야기하면 악마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것을 죽었다고 하는 거예요. 악마가 원하는 마음 가지고 열심히 활동하는 그것이 죽은 거예요.

악마자체가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끊어져 있잖아요. 악마의 마음이 들어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 보시기에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숨 끊어지는 것이야 코에 뭐 집어넣고 하는 식으로 하면 목숨연장이야 되지요. 그것은 생명이 아니지요. 그냥 죽음의 연장일 뿐이고요.

생명, 영생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없는 겁니다. 이 세상에 없어요. 사람이 뭔가 기도하고 원할 때는 반드시 이 세상에서 괜찮다 싶어 자기 눈에 뜨이고, 갖고 싶다 하는 그것을 모아서 기도하기 마련이에요. 지금 이 집사님이 얼마나 병원에서 기도하겠어요. 빨리 낫게 하옵소서.

자기가 기억하는 것은 뭐냐 하면, 안 아플 때의 자기 모습을 기억하거든요. 그걸 기도제목으로 삼고 기도하는 거예요. 그 어떤 기도내용에도 생명을 달라, 영생을 달라는 내용이 안 들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한테만 해당되는 것인가? 본인이 시체라는 것을 아는 사람만 그 기도가 돼요. 나 지금 죽어 있습니다, 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에게만 그 내용이 기도내용으로 담기는 거예요.

살아 있는데 더 잘 살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는 죽은 자가 할 수 있어요. “주여, 아예 죽은 자니 알아서 쓰시되 바라기는 영생을 보여주는, 영생을 발산하는 도구로 사용해주옵소서.”라는 이런 기도는 정말 성령 받은 사람에 한합니다.

성령의 열매라는 말은 뭐냐 하면, 죽은 자에게서만 나오는 그 여분의 것이라, 그렇게 보시면 돼요.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23절에 나와요. “온유와 절제니……”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라고 나오는 것은 이 세상은 지금 모든 것이 금지의 법 안에 갇혀 있고, 사로잡혀 있고, 감금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인간이 죽었다는 것은 자기들 보기에는 안 죽었지요. 그러나 인간세계는 그 테두리를 넘어설 수 없는 거예요.

단절면, 끊어진 면이 있어요. 그게 영생 쪽으로는 갈 수 없는 겁니다. 제 말을 새롭다고 느끼지 마세요. 창세기 3장 이야기에요. 이미 추방된 자가 다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은 끊어져 있습니다. 차단되어 있어요. 링거 줄, 목숨 줄, 병원이라면 산소통에서 완전히 끊어진 상태에요. 비유로 한다면.

지금 우리가 숨을 쉬잖아요. 숨 쉬어도 몇 년 안 되어서 그마저 다 소모됩니다. 남아 있는 산소통 얼마 남지도 않았어요. 좀 많이 남은 사람도 있지만. 지금 우리는 그냥 세월만 소모하고 있는 중입니다.

화장품 처음 사면 가득 차 있거든요. 언제 다 쓰나 싶은 생각이 들어요. 여자들은 손가락 넣어서 팍팍 찍어 바르지만 남자들은 조금씩 찍어 바르거든요. 몇 달이가도 그대로에요. 하지만 언젠가는 그날이 오게 되면 다 없어져요. 벌써 화장품 다 썼어요. 치약도 마찬가지고.

치약도 언제 샀나 싶게 벌써 다 썼어요. 우리는 계속 제한된 것을 소비만 하고 있을 뿐이에요. 곧 바닥 드러냅니다. 22절에 나오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아까 금지할 법이 없다고 했는데 제가 말을 달리 바꾸겠습니다. 여분의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이유 때문에 원치 않는 것, 그겁니다. 왜냐하면 살아 있게 되면 내게 필요한 것으로 우리는 기대하고 있어요.

내게 필요한 것, 돈이나 명예, 권력, 그리고 남에게 인기 있는 것, 오래 사는 것, 건강한 것, 먼저 여기에 귀한 것이, 소중한 것이 있다고 치고 그 다음에 거기에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이 주옵소서, 라고 하는데 22절에 보면, 내가 여기에 있다고 치고 주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이거 있다고 취직됩니까? 이거 있다고 돈벌이가 될 수 있는 겁니까? 이런 걸로 간판 걸어서, “우리가게는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사랑이 있습니다. 돈 주고 사가세요.” 해봐야 아무도 안 사갑니다.

이 세상은요. 자기한테 필요한 것만 자기가 찾아요. 그래서 사람이 군중속의 고독이라고, 사람이 천명이든 만 명이든 두 사람이 있든 관계없이 인간은 개인과 개인이 다 끊어져 있어요. 왜? 각자 자기가 필요한 것이 따로 구축되어 있기에.

저는 그것을 현실의 조작이라 하는데요. 모든 인간은 주어진 모든 현실에 대해서 자기 유리한 쪽으로 전부 조작해내는 겁니다. 하루 일과가 뭐냐? 눈만 뜨면 시작! 하는 것이 하루 일과를 조작하는 거예요. 오늘 하루도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이 움직이기를.

“하나님, 사랑을 주옵소서.” 그런 기도 안 해요. 슬쩍 말을 잘 못해서 그런 기도를 할지라도, 사랑을 했더니만 부수적으로 내게 원하는 것을 주었다, 그렇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하는 말은, 신앙생활 40, 50, 60년 해도 헛짓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아무 의미도 없이 평생 자기 자신을 위해서 신앙생활 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죽어서 천당 가기를. 지가 뭔데? 왜 죽은 자를 천국 보내야 됩니까? 천국은 내가 가는 곳이 아니에요. 죽은 자가 가는 곳이 천국이 아닙니다. 천국은 죽은 자의 나라가 아니에요. 산자의 나라에요.

죽은 자가 왜 껄떡대고 넘보는데요? 기본적으로 성경을 볼 때 죽은 자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유죄한 세계, 죄 있음의 세계에 무죄한 분이 찾아옴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일반화되었습니다.

죄밖에 없는 세계에 유일하게 죄 없는 분이 들어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말씀, 사도바울이 하는 말, 주님의 말씀이지요, 모든 복음이 전파되는 그곳에, 인간들은 자진해서 “나는 온유하다, 화평하다, 나는 성도다” 했던 그 인간들이, 복음을 이야기해 보니까, “너는 이미 죽었고”라는 그 말을 하는 순간, “네 육체는 주님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이미 죽었다.”는 그 말을 하는 순간 “그러면 나는 시체인가?”라고 반발이 나오지요.

소위 억장이 무너진다 하는데 무너져야 돼요. 무너져야, 그래서 영이 다가와야 우리 속에서 악마가 튀어나오는 겁니다. 악마가. 악마를 눈으로 보고 싶지요. 악마가 있다면 눈으로 보고 싶다, 그렇게 되는데 영화에 보면 악마가 목이 막 뒤로 돌아가고 난리도 아니지요.

요란스럽게 보이는데 그 악마영화의 문제점은 악마의 보편적 통치를 그들은 거부한다는 겁니다. 악마가 있는 곳이 따로 있어요. 축축한데 물 있는 곳에 악마가 살지 깨끗한 장소에는 악마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악마가 없는 곳이 따로 있고 있는 곳이 따로 있다고 보는 거예요. 괴기영화들 특징이 그래요.

그러나 성경은 모든 곳에 악마가 없는 곳이 없습니다. 모든 곳이 악마가 없는 곳이 없고 다 악마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악마를 발견할 수가 없어요. 성경에서는 악마를 이렇게 표면화 해서 등장시켜 놓았어요. 그게 가룟유다입니다.

가룟유다를 통해서 악마가 인간의 모습으로 자기의 역할과 임무를 깔끔하게 군더더기 없이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그 악마가 드러나야지만 그리스도가 누군지가 드러나요. 악마를 경유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를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악마의 역할로 마귀 들린 사람이 그렇게 중요한 겁니다.

가룟유다의 변절과 배신으로 인하여 열 두 제자체제가 와르르 다 무너졌습니다. 열 한 제자의 그 예수님에 대한 충성심이 악마를 이길 수가 없어요. 베드로가 자기의 목숨을 바치겠다는 그 헌신이 오늘 본문에 의하면 사랑처럼 보이고, 희락처럼 보이고, 화평처럼 보이고, 오래 참음처럼 보이고, 자비와 양선처럼, 충성처럼 보이지만 그것마저 악마가 다루는 요소 중 하나에요.

어떤 경우라도 이 성령의 열매가 인간에게서는 인간의 자기 행함으로, 자기 스스로 만들어낼 수가 없어요, 나타낼 수가 없습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악마가 인간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악마가 내놓는 것, 지난 시간에 했듯이,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 이 열 다섯 가지 대목을 가지고 하루 일과 끝내고 집에 와서 비춰보세요.

오늘은 몇 가지가 해당되는지. 몇 가지가 아니고 다 해당돼요. 해당 안 되는 것이 없지요. 다 해당돼요. 우리는 올인 하잖아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기 자신이 살고자 하는데 올인 한다고요. 살고자 할 때 누가 뒤에서 그것을 격려하고 힘을 줍니까? 마귀가 그렇게 하는 거예요.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한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을 개무시했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의 살아있음의 가치를 완전히 까발렸기 때문에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한 겁니다. 메시아여, 우리 같이 협조해서 일하자는 거예요.

당신은 당신 일을 하고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호응해서 서로 협조해서 좋게 하자는 그 말이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메시아 오기를 기다렸기 때문에. 메시아오기를 기다렸잖아요. 메시아오기를 기다렸으면 기다렸다는 그 기다림, 그 기다림만은 인정을 해주고 그 가치를 하늘나라도 봐줘야 된다는 말이지요. 그것을 고귀한 것으로.

그런데 죽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뭡니까? 메시아 기다린 그 자체도 하나님께서는 안받아주겠다는 뜻이거든요. 예수 믿어서 영광돌리겠다는 그 고귀한 마음, 태도마저도 주께서는 일체 인정하지 않아요. “죽은 놈이 헛소리하고 있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죽은 놈이 헛소리 하는 거예요.

어떤 분이 저한테 전화를 했어요. “목사님, 구원의 확신과 확신 있는 구원이 다르지요?” 이렇게 다르다 하니 다른 것으로 하겠는데 그분이 자신의 발언을 풀이를 했어요. 확신 있는 구원은 하나님이 선물로 준 것이고 구원의 확신은, 자기가 천당 가겠다고 ‘믿습니다’ 하는 것이 구원의 확신이다, 라고 했는데 제가 보기에는 빠진 것이 있어요.

정말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오게 되면 무슨 사실을 아느냐 하면, 내가 살아있어도 죽은 자, 시체에 불과하다는 그것이 밝혀져야 돼요. 무슨 말이냐 하면, 육의 열매가 그 때부터 본격화됩니다. 전에는 육의 열매가 나와도 내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하는 자기변명조가 나왔어요.

‘살아있는 내가 천사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고, 실수할 수 있잖아.’라고 자기핑계와 변명이 나왔어요. 그 핑계와 변명의 전제가 뭐냐 하면, 살아 있는 내가 그래도 하나님도 알고 잘 믿어보려고 애쓴 그 정도는 봐줘야 되지 않습니까, 하는 자기옹호가 들어있는 거예요. 그걸 자기연민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 자기연민을 배후에서 누가 조종했겠습니까? 마귀가 그렇게 조종한 거예요, 자기연민을. 이미 자기연민이 되어있다는 말은, 하나님이 쳐들어오든 누가 오든 간에 나에 대한 나의 연민, 나의 사랑, 이것만큼은 긍정적 요소로 여기고 손을 잡읍시다, 하는 식으로, 마중 나오는 식으로 이해하는 거예요.

남들은 예수 안 믿지만 나는 교회 나오고 예수 믿잖아요, 라고 하나님한테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성도는요, 죽은 자는, 죽었다는 말이 뭐냐 하면, 누구하고 더 이상 비교하지 말라는 말이에요. 누구를 부러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부러워할만한 어떤 위인이 없어요. 이 땅의 모든 인간은 다 죽었기 때문에.

누구하고 비교합니까? 문재인 대통령? 50퍼센트 밑으로 지지도가 떨어졌는데? 누구하고 비교해요? 누구하고 비교하겠다는 말은 따라 붙이겠다는 겁니다. 이만한 믿음 따라 붙이겠다는 것이고 너를 따라 붙이면 내가 천국 가겠지, 하는 그런 식이에요.

사람은 아침에 눈만 뜨면 비교해요. ‘저 사람보다 내가 낫지.’ 혹은 ‘저 사람보다 못하지만 노력해서 따라 붙여야지.’ 라이벌의식을 느끼고. 그 말은 뭐냐 하면, 이 세상이 이미 죽음에 포위되어 있으니까 이 세상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은 유죄의 바다에요. 죄의 바다에요.

이 세상을, 마귀가 통치하는 곳을 지난 시간에 분명히 지옥이라 했습니다. 백날 해봐야 헛듣지만. 이 세상은 지옥이에요. 지옥에 사는 인사들 가운데 존경할만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이 순신장군? 누가 존경할 만합니까? 지옥에서 왜 비교해야 되고, 지옥에서 왜 더 살아야 됩니까? 아, 참!

정말 십자가에 그냥 죽은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 우리 육체와 함께 죽었다는 이 말 한 마디, 사도바울의 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하는 이 짧은 말, 그 짧은 말도 모르면서 수십 년 째 신앙생활 하고 있어요. 수십 년 째 교회 다니고 있고. 목사 되어서 설교하고 있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올 사람 이제 다 왔기 때문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육체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은, 우리 자신에게 십자가가 들어와야 된다는 겁니다. 십자가가 들어와야 돼요. 십자가가 우리에게 들어올 때에 우리의 요청이라든지, 우리보고 의사를 타진하고, 우리에게 물어보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들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십자가를 알 때는 마치 뭐와 같으냐? 유럽여행가서 박물관에 가면 다윗의 동상이 있잖아요. 조각품이 있으면 그 조각품에 올라가면 안 되지요. 귀한 유물이기 때문에. 그냥 빙빙 돌면서 구경하잖아요.

유명한 조각품이 있다면 빙빙 돌면서 구경하듯이 교회 오는 사람들이 십자가주위를 빙빙 돌면서 십자가를 안다는 거예요. 불놀이하고 있습니까? 지금 캠프파이어 하고 있어요? 십자가 앞에 두고? 그것은 토인들이 축제 벌일 때 그 짓 하는 거예요. 불 피워놓고 제물 바치고 빙빙 도는 그것.

십자가가 들어와야 되는데 십자가가 들어오지도 않고 십자가를 관람하고 구경하고 있어요. 십자가 뒤에서 보고, 옆에서 보고, 앞에서 보고. 자기도 멀쩡하게 살아있고. 한 번도 십자가가 그 사람 속에 들어온 적이 없어요. 십자가 믿는다는 이야기는 천 번도 해요.

나는 저 조각품이 다윗이라는 것을 믿지요. 하지만 구경했지요, 구경. 십자가를 구경한 거예요. 목걸이 목에 걸고, 차에 달랑달랑 흔들리게 달고. 십자가가 인간에게 들어올 수가 없고 요청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반대하는 그 괴물이 인간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인간도 십자가가 들어올 수가 없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십자가가 안에 안 들어옵니다. 자기학대를 해도 안 들어와요. 베드로도 십자가가 안 들어왔어요. 그저 자기 몸을 주님께 바칠 생각을 했지요.

제가 울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아무리 남편이 아내를 씻겨주고 먹여주고, 병든 아내를 치료해주고 해도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남편이 아내 사랑한다고 선물 주게 되면 자기 좋아하는 것만 사왔다고 퇴박만 받을 겁니다. 안돼요.

사랑은 없어요. 왜 그런가 하면, 악마가 인간에게 사랑하도록 그렇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없다고 요한 일서 4장에 분명히 나와 있거든요. 사랑은 없어요. 제발 성경말씀 좀 믿으세요. 사랑은 없어요. 우리는 시체입니다. 좀 믿으세요.

자꾸 인문학이나 귀담아듣지 마시고. 물론 배우는 것은 괜찮습니다만 그거 수용하지 마시고, 남과 비교해서 남에게 배울 생각 하지 마시고 성경 한 번 보시라 그 말이지요. 십자가는 못 믿습니다. 믿을 수가 없어요. 십자가는 악마가 가만 두지를 않습니다.

십자가가 우리 속에 들어올 때는 전쟁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게 구약 이스라엘 전쟁이에요. 전쟁할 때 작살나는 겁니다. 아킬레스건 끊어지는 그런 것은 문제도 아니에요. 와장창, 정말 우리에게서 분노가 나고 정말 주님에 대한 잔인한 마음까지 들 정도로 십자가가 들어오는 그 경로는 치열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주님이 인간 세상에 있다가 빠져나올 때 치열했기 때문에. 주님이 인간 세계에 들어왔다가 죽어서 나가셨거든요. 다시 들어올 때 예수님이 인간에게 당했던 그대로 우리 인간에게 들어옵니다. 우리가 곱게 주님을 영접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악마가 치열하게 반발합니다. 그 반발하는 모습이 바로 가짜 십자가, 가짜 복음, 가짜 언약, 가짜 성령, 가짜 교회, 가짜 기독교, 가짜 하나님, 가짜 삼위일체, 전부 다 동원해서 “다 알고 있으니까 내 인생에 제발 손 좀 대지 마세요. 미리 다 알아서 당도리 해서 곱게 순종하고 다 믿어줄 테니까, 십자가까지 내가 다 구경해줄 테니까 제발 내 바깥에서 십자가를 지셔야지 내 안까지 십자가가 들어오시면 나 죽습니다.” 그렇게 되거든요.

죽으라는 이야기에요. 십자가가 들어왔다는 말은, 네가 지금 그런 식으로 극렬하게 반발하는 그 자체를 바깥으로 빼내겠다는 겁니다. 펌프질을 해서 바깥으로 다 빼내겠다는 겁니다. 내 안에 이런 것들이 들어있다는 것, 이런 쓰레기가 들어있다는 것을 바깥으로 다 끄집어내는 거예요.

화가 나고, 분통이 터지고, 내가 이렇게까지 안 나가려고 했는데, 하는 그런 것까지도 다 하게 하고. 주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는 연극무대의 배우에 지나지 않아. 너는 세상을 조작하고, 너 자신을 날마다 조작하고, 날마다 너를 속이고, 꾸미고, 안에 들어있는 십자가의 원수는 그냥 억지로 덮어둔 채 ‘십자가 사랑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빈말만 늘어놓으면서 정작 자기 속에 자기가 살고자 하는 그것은 한순간도 포기한 적이 없”어요.

주님께서 마태복음 5장 46절, 47절에 이런 말씀 했습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너를 좋아하고 너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저주받을 세리, 지옥 갈 사람하고 다를 것이 뭐가 있느냐? 예수님 자신이 세상에 와보니까 서로 사랑한대요. 보니까 서로 좋아하는 사람끼리 사랑한대요.

그게 지옥 가는 면면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지옥 간다는 거예요. 그게 육이 할 수 있는 전부에요. 남을 사랑함으로서 “나는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을 감사합니다.” 헌금함으로서, “나는 헌금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을 감사합니다.”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서, “내가 예수를 믿는 나를 사랑합니다. 역시 나는 가치 있군요.”

이것 외에는 입에서 나올 것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그 외 나올 것이 뭐가 있어요? 주께서 말해요. 그것 말고 더, 더. 그것 말고 더 내 보라는 거예요. 그것이 마태복음 5장 47절,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방인들도.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게 가능합니까? 앞에 아무 소리 안하시고 그냥 “온전해라. 하나님처럼”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최선의 노력을 다할 거예요. 최선의 노력을. 자기가 알고 있는 이상, 자기양심, 선한 것, 온갖 것 다 동원해서 “주님, 이 정도 하면 되겠습니까? 이캐요? 이거 하면 되겠습니까?” 정성과 뜻을 모아서 다 할 거예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온전함을 뭐로 보느냐 하면, 금지의 영역을 넘어서서 무엇정도는 넘어서야 온전함에 해당된다고 보여주는데 그게 뭐냐? 너한테 잘해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 사랑할 만해서 사랑하는 것, 지킬 만해서 지키는 것, 그것은 온전함 근처도 못 갔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거든요.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그것이 과연 인간으로서는 성립이 안 되잖아요. 주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전제로 하고 온전하라고 이야기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세계에서 자기들끼리 지혜모아서, 교인들끼리 지혜모아서 이것이 온전하다고 여기는 그 모든 것을 완전히 다 부숴버립니다.

네가 온전하다고 생각하는 그것은, 주님께서는 안 받는다는 이야기에요. 온전 못하면 어떻게 하느냐? 온전 못하면 그것은 지옥이에요. “지옥 가면 안 되잖아요.” 할 때 그게 바로 십자가가 우리 앞에 들어올 때에 결국은 십자가가 좋은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들이댐으로서 내가 몰랐던 것이 등장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좋은 것도 아니고, 예수님이 좋은 것도 아니고, 내가 천국가야 된다는, 내가 좋다는 이 악마적 본성이 십자가를 들이댐으로서 비로소 발각되는 겁니다. 뭐 때문에 그동안 수십 년 동안 교회 다녔는지 그 이유가. 나 잘되기 위해서 교회 온 거예요.

정신병자들이에요, 정신병자. 누구 맘대로 신자에요? 자기 맘대로 신자라 합니까? 유치원 애들 반에서 노는데 갑자기 정신병자가 시커먼 옷 입고 술 먹고 들어와 가지고 칼 들고 설치면 유치원 애들이 그 아저씨 무서워서 “엄마!” 하면서 교실 바깥으로 다 튀어나오겠지요.

예가 좀 이상합니다만 상상해 보세요. 다 튀어나오겠지요. 성령이 오게 되면 뭐가 튀어나오느냐 하면, 성령이 와서 신자가 되면 뭐가 튀어나오느냐 하면, 갈라디아서 5장 19절이 튀어나와요.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 이런 것들이 유치원 애들 튀어나오듯이 내 속에서 다 튀어나온다니까요. 엄마야, 놀래가지고.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 그동안 이 모든 것이 십자가가 우리 안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안전하게 우리 안에 들어있던 이유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남에게는 필요하지 않지만 나에게는 꼭 필요한 요소들이었거든요.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들이 아주 친구처럼 소복하게 내 안에 들어 있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채찍 들고, 혹은 세례요한이 도끼 들고 쳐들어오니까, 세례요한이 도끼의 세례요한 아닙니까, 세례요한이 도끼 들고 “이것들이 어디서!” 하니까 놀래서 다 튀어나온 거예요. 그걸 접수라 하는데 이미 우리 속은 십자가가 접수했어요. 성령이 접수했습니다.

아침에 눈 뜨면서부터 하는 일, 매일 생각하는 일, 모든 것들이 육체의 열매에 해당 안 되는 것이 없어요. 전부 다 그렇게 해당되어 나올 때, 나는 인간이 아니고 육체의 열매가 무엇이며 성령의 열매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의 성령에 의해서 다루어진 사람이라는 것이 드디어 밝혀집니다.

인간은 없어요. 내 안에 살아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닙니다. 성령이 살아 있어요. 주님이 이런 것들을 바깥으로 내보내는 거예요. 평생 살면서 우리의 바깥으로 이런 것이 튀어나오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가, 아, 이런 병균들이, 이런 암세포들이 꽉꽉 눌려 들어있어서 이것들이 집합된 것이 뭐냐 하면, 내가 천당 가야 되고 내가 이 땅에서 편하게 살아야 되고, 내가 행복해야 돼, 남 가정은 죽든 말든 내 가정만 괜찮아야 돼, 라는 그야말로 시기와 질투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겁니다.

누가 내 것을 건드리면 내가 감당 안 될 정도의 분노가 폭발해 버립니다. 내 것 건드리면 분노가 폭발해요. 그리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남이 좀 잘되면 그게 그렇게 부러워요. 이 세상이 지옥인 것도 모르고, 내가 이미 시체인 것도 모르고, 지옥인 것도 모르고 시체인 것도 모르니까 지옥이 부러운 거예요.

오늘 아침 뉴스에 보니, 어떤 사람이 바지락 캐다가 물때를 놓쳐서 죽은 사람이 있대요.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도 다슬기는 잡아봤지만 시커멓게 다슬기가 붙어 있으면요, 해가 넘어가는 것이 짜증나. 그걸 빨리 다 주워야 돼요.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가다보면 깊은지 얕은지도 몰라요. 바지락도 못지않거든요.

바지락 잡다보면 두 시간이 후딱 지나가요. 옆에 보면 바지락이 또 있고 그 옆에 보면 또 있는데 물때를 놓쳐버리지요. 우리네 인생이 바지락 줍는다고 평생을 다 보냅니다. 애 놓으면 애 잘 키워야 되고, 유기농 먹어야 된다는 바지락, 애 영어유치원 보낸다는 바지락, 영재발굴단 4개 국어 한다는 애 보면서 온갖 책들 다 사주면서 거기에 온 신경 다 쓰는 바지락, 취직했다면 취직했다고 도와주는 바지락, 결혼하면 결혼한다고 또 도와주는 바지락…….

평생을 바지락 줍다가 바지락, 바지락, 바지락, 김 바지락, 최 바지락, 전부 다 말하는 것이 내가 주운 바지락 이야기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어요. 자기는 모래로 만들어진 인간이 되어서 이제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고 바람에 모래 다 날려가면서도 여전히 아직도 계속 젊은 줄 알고 바지락만 줍고 있어요.

그러다가 보고 싶은 사람 하나 둘 떠나니까 자아에 구멍이 나서 허하지요. 그러면 갑자기 우울증 걸리고 허무해지고. 시체를 왜 좋아합니까? 시체밖에 없는데. 우리는 누구를 좋아하게 되면 사달이 나요.

나는 좋아하는 데 너는 안 좋아하거든. 이거 미치는 거예요. 좋아하기는 왜 좋아했어요, 애초부터? 제가 울산강의에서 했잖아요. 사랑은 없다고. 있는 것은 독백밖에 없어요. 독백. 자기 독백밖에 없어요. 전부 다 자기 소리에요. 그걸 개소리라 하는데. 이거 욕하는 것 아닙니다. 진짜입니다. 개소리, 욕 아니에요.

우리는 기적을 담고 살아야 됩니다. 도저히 죽은 자에게서 나올 수 없는 것이 있어야 돼요. 아저씨가 유치원에 난입해서 유치원 애들이 놀래서 교실 밖으로 뛰쳐나올 때에 선생님이 “얘들아, 갑자기 왜들 그러는데?” 애들이 “교실 안에 누가 있어요.”

이 말은 뭐냐? “제 안에 십자가 있어요. 우리보고 죽었대요. 죽은 자는 영생 얻을 자격도 없답니다. 십자가가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나를 사용하겠대요.”라고 세상을 향하여 고자질 하는 것 외에 무슨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까?

십자가 오라고 했습니까? 믿겠다고 했습니까?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냥 쳐들어온 거예요. 우리는 십자가 믿으려고 했지요.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십자가 쳐들어온 거예요. 내가 십자가를 믿는 것이 아니고. 너는 이미 나와 함께 육체가 죽은 자야. 죽었기 때문에 네 움직임은 네 움직임이 아니고 성령의 움직임이고 살아 있는 것은 네가 아니고 내가 네 안에 살아 있다는 겁니다.

정말 여러분이 신자라면 묻고 싶어요. 어떤 질문을 하고 싶으냐 하면, “당신은 무슨 연유로 이곳에 있습니까?” 만약에 어떤 사람이 병원에 있다면 “당신은 무슨 이유로 이곳 병원에 있는지 나에게 설명해 보세요.” 여러분은 무슨 이유로 여기에 있습니까?

내가 어릴 때부터 뭐가 어쩌고 저쩌고……. 그것은 아니고요. 만약에 미국에 놀러갔다. 나이아가라 폭포에 갔다면, 그래서 “당신은 무엇 때문에 여기 있습니까?” 한다면, 한국에서 칼기를 타고 왔으며……. 그 이야기 말고 “지금 왜 여기 있습니까?”

정답은 하나밖에 없어요. “주께서 지금 여기 있게 하셨습니다.” 언제 한국에 돌아간다는 그것도 내 일이 아니에요. 지금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여기 있다는 것, 주께서 나이아가라 폭포 구경하라고 여기 세웠다는 것.

만약 그게 정답이라면 그 사람이 다음 행선지로 이동해도 주께서 여기 있게 하신 거예요. 그 사람이 다시 한국에 와서 직장생활에 복귀해도 주께서 이 직장에서 일하게 하셨다는 거예요.

얼굴 갈았는데 교회 나왔거든요. 주께서 갈게 해서 갈고 지금은 여기 있게 하신 거예요. 그것이 천국입니다. 천국은 내가 있는 게 아니에요. 주님께서 함께 여기 있게 하신 것, 그것을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었는데 그것을 알게 하셨을 때 그것을 알면서 감사함이 나오는 것은 뭐냐?

사랑이고, 희락이고, 화평이고, 오래 참음이고, 자비고, 양선이고,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남이 묻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내 육체가, 내 육신이, 이 내 몸이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죽은 자로서 이 세상에 살기 때문에 이런 희한한 여분의 현상, 이방인보다 더한 현상, 세상이 아무리 해도 따라올 수 없는 다른 고백.

나는 죽었고 내 안에 주님 십자가로서 살아 있다는 것, 그로 인하여 지금 우리는 여기에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해야 할 어떤 것을 기대하지 말고, 목표 세우지 말고, 어떤 지경이든, 어떤 처지든, 어떤 사정이든, 어떤 입장이든 고려하지 말고 주께서 여기 있게 하셨다는 그것을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고마움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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