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요한복음 17장 24절(가족)180821b-이근호 목사
강남-요한복음 17장 24절(가족)180821b-이근호 목사
아까 첫째 시간에 그냥 가상세계 따로 있고 진짜 세계 창세 전에 다 확정되었다고 한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서 죽는 것은 그것도 가짜 죽음이고 진짜 예수님은 너희가 백날 죽여봐도 나 안 죽지롱 이렇게 될 때 이게 이야기가 깔끔하게 나누어진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놀라운 사실은 이 가상세계에서 있는 그 죽음이 진짜 하나님의 죽음이라는 사실이에요.
가짜 같으면 그냥 죽는 척 이렇게 되는 걸로 우리의 논리에 의하면 진짜 가짜라면 그 죽는 것도 죽는 척 정도 밖에 안돼야 되는데 진짜 죽었다는 것이 충격입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죽음으로서 세상이 더 이상 가짜로서 내가 놔두지 않겠다는 거예요. 그걸 진짜 작업에 편입시키겠다는 겁니다. 예수님 죽음으로서.
그래서 고린도후서에 보면 예수님이 죽음으로서 모든 세상이 죽었다고 되어 있어요. 이제는 이 세상은 새로운 죽었다의 개념이 마지막 때에 붙여지는 죽음으로 미리 일찍 앞당겨서 이 세상에 완전히 보편적인 가치로서 덮쳐버립니다. 이 세상에다가 완전히 살충제를 뿌려버립니다. 살충제를. 다 죽어버려 다 죽어버렸어요. 예수님이 죽을 때 다 죽어버렸어요.
특히 예수님이 죽을 때 뭐가 죽느냐 하면 이게 죽어요. 예수님이 죽으실 때 십자가 죽을 때 뭐가 죽느냐. 시간이 죽어 버렸어요. 시간의 흐름이 의미가 없습니다. 시간이 죽었다는 말은 모든 시간이라는 말은 창세기 1장에 세상에 모든 피조물들이 변하거든요.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시간을 보여주는 시계예요. watch다. 시계다 이 말이죠 시계.
시계인데 시계가 예수님 돌아가실 때 이게 전부 다 의미없이 스탑이 되었다고 말하면 안돼요. 스탑이 되었다는 것은 가짜현실에서 스탑이 된거고. 이 가짜현실에서는 운동하는 것을 살아있다고 보거든요. 운동하는 것. 심장운동하면서 뛰잖아요. 살아있는거예요. 인간이 살아있다 죽어있다를 뭐로 보느냐 하면 돌멩이를 살았다고 하지 않죠? 돌멩이를 죽었다고 보잖아요. 그러나 식물은 살았다고 보는 것은 관찰해보면 움직이기 때문에 운동하기 때문에 그런거예요.
내가 움직이면 살았다고 보고 죽으면 죽었다고 보는 거예요. 그 개념이 날아가 버린겁니다. 그 개념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하늘이 뭐를 잃고? 해가 빛을 잃어버리죠. 빛을 잃어버려요. 해가 빛을 잃어버려요. 세상에 있는 모든 변화는 이제는 움직임도 죽음 안에서 죽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움직이는 움직임 밖에 안돼요.
움직여봤자다 이런 차원에서 움직이는 거예요. 살아봤자다. 살아봤자 결국 풀이고 풀의 꽃이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 그런 차원에서 돌아가는 거예요 이세상이.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지금 뿔난거예요 지금.
아까 오목사님이랑 이야기 나눴는데 오목사님은 자꾸 저보고 스포일러 달지 말라고 하거든요. 보통 영화보고 난 뒤에는 마지막 반전은 안 적거든요. 나는 꼼꼼하게 반전에 치중해서 적는단 말이죠. 다음에 보는 사람 재미 하나도 없게. 그걸 읽고 볼 마음이 안 생긴다고 하던데.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스포일러 마지막까지 다 이야기 해버렸어요.
그래서 성도의 입장에서는 모든게 시시해요. 시시하다니까. 손흥민 뭐 뛰어봐야 뭐. 아시안게임 뭐 1등 해봐야 그게 뭔데? 아이고 우리 애가 이번에 시집가게 되서 안 바쁘시면 오시기 바랍니다. 시집 가봤자 뭐. 세상에 그래 너희 형부가 이혼했단다. 이혼 해봤자 뭐. 이혼 해봤자. 또 뭐 누구 집에 불났다. 불 나봤자. 그래서 뭐? 교회 목사가 나갔대. 나가봤자 그래 뭐? 그래 뭐 어쩌라고?
이게 바로 시간의 의미가 없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본격적으로 모든 세상 일은 누구의 범주 안에서 장악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주의 하는 일에 전부 다 편입됩니다. 다 편입되요. 편입되게 되면 무슨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천사같은 믿음 좋은 사람은 교회 나오면 천사같이 보이지요? 믿음도 저렇게 좋다. 그런데 조금 지나보면 천사가 뭐로 바뀌냐하면 인간으로 바뀌어요. 서서히. 아 저 사람도 인간인거 같다 느낌들죠.
천사가 인간으로 바뀌는게 좋습니까? 인간이 천사로 바뀌는게 좋습니까? 처음에 인간 올 때 뭐 믿음 없어 보이고 그러다가 갈수록 믿음이 좋으네요. 겸손하고 세상에 성령 받으려고. 천사로 보이는거예요. 여기서 주님 안에서 주님이 편입시켰다 자기 일로. 전에는 인간의 일인데 악마의 일인데 이게 악마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로 편입시키면서 여기에서 주의 일에 합체되는 변화가 드디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변화가.
인간 같았는데 천사가 되고 천사 같은데 인간이 되고 또 어떤 사람 보니까 악마처럼 미워 했는데 갈수록 사람이 좋아지는거예요. 인간이 되고. 어떤 사람은 상당히 좋은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갈수록 이단이었네. 악마로 드러나고. 이것 두 개를 한번 합쳐봅시다. 합쳐보면 이런 공식이 나오죠. 천사같은데 인간됐다가 뭐로 드러나고? 악마로 본색이 드러나고. 분명히 악마 같은데 얼추 인간이네 싶었다가 보니까 천사같은 사람되고.
자, 이러한 변화를 볼 때에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주님의 법칙이 주어지는데 이 변화를 가지고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예수님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이렇게 합니다. 천국이 이미 이르렀느니라. 천국이 이미 이르렀느니라. 천국에 변화가 이미 모든 세상의 일을 주님의 일로 인수인계 받았으니까 자기 일로 되었으니까 거기서 창세 전에 아버지와 약속된 것, 그걸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가족’ 이라고 했지요 가족.
꿈에 마귀한테 쫓겨나왔을 때 누굴 찾습니까? 꿈속이지만 엄마 찾지요? 가족만 있으면 이런 꼴 안 났다 이 말이거든요. 그러면 주님이 우리의 확정된 가족이라면 악마가 우리를 납치할 수가 이유가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지금 이 이야기가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누가복음에 나와요.
뭐라고 했느냐 하면 베드로가 제가 예수님을 제가 목숨 바쳐 따라가겠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베드로야 네가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이렇게 하면서 네가 악마는 누굴 원한다? 악마는 이 가짜 세계에서 너를 원했지만 진짜 예수님 세계에서는 예수님이 누굴 지켜줘요? 베드로를 지켜주니까 베드로는 걱정 할 필요 있어요? 없어요?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베드로가 스스로 자기 구원을 위해서 애쓸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혼자 나대는게 아니에요. 가족이 왜 있습니까? 왜 가족이에요? 가족은 둘이 아니고 3이 아니고 4가 아니에요. 가족은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사는 1이기 때문에 가족이죠. 1이기 때문에 가족. 세상 가족이야 살아봐야 걸리적 거리기만하고 귀찮기만 하지 뭐. 그건 왜 그러냐 하면 둘 다 가짜기 때문에 그래요.
창세 전에 가족은 가짜가 아니기 때문에 한번 가족은 영원한 가족이다 이 말이죠. 그러면 주님께서 시간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시간을 그냥 멈췄다고 해도 괜찮아요. 왜냐하면 원래 시간이라고 하는것은요 변화가 있을 때 시간을 느낍니다. 변화가 없을 때 시간은 안 느껴져요. 변화가 있을 때 시간을 느끼거든요.
그런데 그 변화를 주관하는 것은 뭐냐 하면 사건이라는 것 사건. 이미 십자가 사건 종말 되 버리면 종말 안에서의 모든 변화는 이미 고정된 고정을 보여주기 위한 변화에 불과해요. 왜 사건이 십자가와 재림사건으로 이미 가두어져 있기 때문에. 어떻게 사다리를 타도 재림이고 어떻게해도 지옥 갈 사람은 지옥가고 어떻게 노력해도 천국 갈 사람은 천국가기 때문에 그 말은 뭐냐 확정된거예요 확정. 확정된겁니다.
주께서 인수인계한 인수한 시간이고 인수한 세상 땅이거든요. 그러면 주님께서 하실 일은 뭐냐? 주님께서 일을 해요. 어떻게 내 안에. 자, 이야기 해봅시다. 아까 첫째 시간 해봅시다. 여기 가상현실이죠. 가상현실. 가상현실이고 가상현실 밖에 없어요. 가상현실이 뭘 지배한다고 했습니까? 진실과 진리를 지배한다고 했지요. 그 진실과 진리는 이거는 왜 가상이 지배하느냐 하면 진실과 진리 해봤자 가상현실에서 만들어낸 진실과 진리이기 때문에. 가상현실에서.
너무 사람만 사귀다가 힘드니까 교회 나가서 하나님 믿습니다. 그럼 그게 뭐에요? 그 하나님 이 가짜다. 가짜인데 그 사람은 그걸 뭐라고 합니까? 그게 복음이고 진실이고 진리라고 이렇게 인정을 하는거예요. 누가 믿기 때문에? 내가 믿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믿는데. 나는 고정돼있거든. 항상 출발이 나는 고정된거예요.
나는 고정되었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뭐냐 하면 나는 여기 있거든. 있음이라는 존재거든요. 나는 존재이기 때문에 내 존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나는 교회 나가서 예수 믿어야 되겠다. 이게 바로 가짜 이게 바로 가짜예요. 가짜가 백날 몸부림 쳐봐야 가짜 외에는 나올게 없어요. 삼위일체고 뭐 뭘해도 다 가짜 기독교는 다 가짜란 말입니다.
진짜는 뭐냐? 진짜는 내가 가짜인걸 알 때 진짜요. 내가 가짜인걸 알 때. 뭘 해도 내가 가짜였습니다를 알 때 그게 진짜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진짜인 나, 나가 있는데 이 가짜인 나가 어떻게 진짜로 갈 수 있느냐 그 문제가 남아있지요? 그렇죠? 예수님은 성공했잖아요. 예수님은 가짜한테 죽음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그 예수님의 죽음이 아까 레오의 죽음이 실제로 진짜세계에서 죽는 것처럼 예수님의 죽음이 진짜 하나님 앞에서도 그게 죽은 척한거예요? 진짜 죽은거예요? 진짜 죽은거예요. 그게 이상하다니까.
가짜 진짜가 구분되면 이쪽은 가짜로 죽는거거든요. 영화배우가 연기하다가 죽었을 때 진짜 죽었다고 뭐 장례 치릅니까? 아니잖아요. 다음 보면 다음 드라마에 또 나오잖아요 살아서. 죽는 역할만 했을 뿐이죠. 옛날 영지주의가 그랬어요. 죽는 역할만 한다고. 왜? 예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게 뭐냐 하면 지금 착각하고 있는거예요.
자기가 나라는 존재가 어떤 진리를 알게 되면 그 진리가 나를 구원한다는 겁니다. 나라는 존재. 그러니까 이게 뭡니까? 어떤 복음이라도 누굴 위해서? 나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거예요. 하나님은 날 사랑하시고. 날 사랑해서 십자가 지셨다는 겁니다. 치매 걸리면 어떻게 하려고 그런 큰 소리 치는지 모르겠어요.
주님께서는 나를 구원할 때 어떻게 구원하느냐 하면 이 가짜를 내 속에 집어넣어 버려요. 이 가짜를 내 속에 집어넣어 버리면 내 안에 우리가 가짜라는 것을 알면서 내 안에 가짜가 본격적으로 일을 벌리게 되어 있어요. 가짜 일을 벌리는 것을 제가 아까 첫째 시간에 바벨탑 이야기했지요. 바벨탑이 그들 인간들끼리 교류하고 교제하고 언어를 매개로 해서 교류하고 사귀고 사귀고 당질하고 하는 모든 경향성이 있다고 했지요?
어떤 경향이 있지요? 그 경향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하나의 가족이 되고 국가 가족 지방 가족 전라도 경상도 하나의 가족처럼 지내서 그것을 어디까지 이르겠다? 꽉 차겠다 꽉 차겠다. 어디까지 이르는데? 하나님 앞에 꽉 차서 이만큼 잘 되서 꽉 차게 되면 나중에 하늘나라 가서 까꿍, 까꿍 안녕하세요. 우리 교회 목회 잘했습니다. 교인들 보세요. 이렇게 많이 모아서 데려오려고 천당 오려고 제가 목회 열심히 헌신적으로 해가지고 세상에 이만큼이나 많은 사람들 제가 데려왔으니까 받아주시겠지요? 까꿍!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가족끼리 가족은 뭐냐 하면 가족끼리는 서로를 용납하는 거예요. 어떤 짓거리를 해도 다 용납해주는 것은 가족 밖에 없습니다. 무슨 짓을 해도. 예수님께서 사람들 앞에 이야기했지요. 제자들이 와가지고 예수님 가족 오셨습니다 하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이 일을 시작해놓고 주께서 뒤통수 치지요?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형제들이냐? 주의 말씀 듣는 이들이 내 모친이고 내 형제들이다. 그러면 예수님 모친 또 있느냐 이렇게 하면 안돼요. 가짜세계에서 통용되는 모든 개념은 이미 주님 앞에서 죽은거예요. 죽어있기 때문에 죽은 가짜가 무슨 소리를 못합니까. 무슨 소리를 못해요. 용어 이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어차피 말을 해봐야 나 좋아라고 남한테 우리 사귀어 볼까요? 하는 내던지는 작업용 멘트이거든요.
사람은 왜이리 못사나 자꾸 이야기 한다는 것은 언어를 매개를 통해서는 뭐냐 하면 우리 둘이 같이 좋은 관계 한번 맺어봅시다 식이에요. 가짜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가짜 언어를 내세워서 둘이 하나 되서 서로의 외로움을 달래자 하는 식이다 이 말이죠. 그 행위가 또 가짜인데. 그럼 주님은 어떻게 하는가? 주님은 우리 안에다가 본격화 이 가짜를 본격화시켜버립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도 안에 뭘 하느냐 하면 성도 안에 자기 안에 뭐가 있다? 가짜만이 들어 있다는 것을 성도만이 알아요. 제가 아까 그 동영상 할 때 했지요. 아브라함이 제사 지낼 때 횃불이 지나가도록 뭘 한다 했습니까? 제물을 그냥 둔다고 했어요? 어떻게 한다고 했어요? 쪼개지요. 속살이 나오도록. 속살하면 김영훈 목사 아닙니까. 속살이 나오도록.
주님이여 제 껍데기에 속아 넘어가지 마세요예요 그말이에요. 주님이여 내 기도 속아 넘어 가지 마시고 내 십일조 헌금에 내 열심에 속아 넘어가지 마시고 주께서 받으시는 것은 뭐냐 하면 쪼갠거예요 쪼갠거. 쪼개서 제가 드릴 것은 가짜 밖에 드릴 것이 없습니다 이거예요 이게. 이게 산제물로 드리는거예요. 모든 제사의 원형이 아브라함의 제사니까.
그러면 그 쪼개면 뭐가 나오느냐 쪼개면 나의 의가 나와요. 주님의 할 일은 그 나의 의를 뭐로 바꾸느냐 하면은 주의 의로 바꾸는거예요. 말은 쉬워요. 그런데 어려워요. 왜 그러느냐 하면 아까 제가 처음 시간에 했습니다. 가상현실에서 예수님이 죽을 때에 진짜 죽었다 했습니까? 가짜 죽었다 했습니까? 진짜로 죽었어요. 우리 논리에 의하면 가상현실에서 죽는 것은 하나의 드라마고 연기이기 때문에 가짜 죽음이라고 생각하는데 놀랍게도 주님께서는 진짜 죽음을 가지고 유일하게 가짜와 진짜를 오직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그 통로 외에는 아무 어떤 다른 통로를 마련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이 진짜로 죽었다는 것, 진짜 죽었다는 그것이 바로 유일한 통로가 되는 겁니다.
제가 어느 설교 때 그런 예를 들었어요. 어떤 그 외교관인데 호주에서 출장 갔는데 친구들이랑 같이 갔어요. 호텔에서 장난친 거예요. 평소에 장난이 뭐냐 하면 인간이 어느 각도에서 넘어지고 안 넘어질까를 그냥 계단에서나 이런 평지에서 하면 되잖아요. 간땡이가 부었어요. 그 호텔 5층에서 문 열어놓고 친구끼리 장난친거예요. 네가 넘어지려면 하면 잡아주자 하는거예요. 그런데 어릴 때 이거 좀 해봤지요. 이론하고 실제하고 잘 안 맞지요?
어릴 때는 보통 그냥 모래사장에서 넘어져요. 모래사장에서. 그런데 이 사람들은 어른이잖아요. 어른이니까 얼마나 담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5층 베란다 창문에서 한거예요. 넘어질 때 잡아줘야 되는데 넘어지는 속도를 미처 계산을 못했어요. 물리학자들이 아니라서. 그러니까 갑작스럽게 각도 넘어질 줄 몰랐어요. 떨어져 죽었어요. 장난인데 진짜 죽었어요. 장난인데.
영화에서 죽으면 그냥 죽는 역할이죠. 진짜 죽는게 아니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성도의 죽음을 진짜 죽음을 예수님의 진짜 죽음과 이렇게 합체를 시켜버립니다. 그렇게 되게 되면 우리의 죽음은 개죽음이 아니고 주님께서 의도해서 때가 되매 죽을 타이밍을 맞춰서 예수님의 증거용으로 죽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증거용으로서. 지중해 크루즈 여행 갔다가 뒤에 괜히 술 먹고 앉아 있다가 빠져 죽고 이런거.
그 타이밍은 세상을 누가 편입했다고 했습니까? 주께서 편입했지요. 죽을 인간은 안 죽으려고 백날 애써도 죽을 때 되면 아무리 편입해도 꼭 죽어야 돼요. 운명이라는 것 영어로 뭐라고 해요? ‘Destiny’ 그 영화가 있어요. 1편에서 4편까지 나왔어요. Destiny 그 영화가 공포영화거든요. 미리 죽는걸 알지만 미리 죽는걸 알고 그 주인공 젊은 사람들이 그 죽음을 피해보려고 될 수 있는 대로 죽음과 멀리 있는 곳으로 도망가는데 결국은 다 죽어요. 그래서 공포영화에요. TV에 엄청 많이 해줬어요. B급영화라 해가지고.
그래서 인간은 언제 죽느냐 하면은 죽을 때가 죽는 날이에요. 죽을 때가. 죽으려고 백날해도 소용없어요. 인자가 참새가 떨어지는 것도 인자가 알아서 떨어지듯이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너희가 계속 산다는 말이 아니에요. 내가 필요할 때 죽여줄게. 다시 말해서 죽음을 네가 관리하고 네가 걱정하면 그 죽음은 뭐냐 하면 가상현실에서 벌벌 떠는 마귀한테 사로잡힌 그 죽음이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주님께서는 우리 속에다가 예수님을 죽였던 그 요소를 우리 속에 꽉꽉 담아요. 꽉꽉 담아버려요. 그러면 예수님이 누구한테 죽었지요? 예수님이 누구한테 죽었어요? 인간들한테 죽었지요. 인간들한테 죽었잖아요. 그러면 가상현실이 우리 속에 있다는 말은 우리가 결국은 누굴 죽였다는 말이 됩니까? 우리 속에 있는 요소가 결국 예수님을 살해하는 그런 기운 살해하는 힘과 경향성이 있다는거 아닙니까.
그러면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말은 뭐냐 하면 너의 죽음 속에 예수님이 끼어든다는 말도 되고 주님의 죽음에 우리가 주님의 의해서 우리가 합류되었다는 둘 다 같은 말이 돼요. 로마서 6장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 할 때 그 말에 대해서 누가 이야기하면 여러분 물어보세요. 당신 언제 죽었어요?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면서 언제 어디서 어디 서울에 강남에서 죽었어요? 몇 시에 죽었는데? 한번 물어보세요. 답변 못하지요?
혹시 어머니께서 로마서 6장 공부 이렇게 상고하다가 그런데 얘야 죽었다 하는데 내가 죽은 적이 없는데 언제 죽었지? 현재 이게 우리가 죽어있다는 것과 살아있다는 것이 중첩이 돼버리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 다음에 뭡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날 때 살아버렸죠.
그런데 그걸 눈으로 목격을 하게 되면 달랑 남는게 뭐냐 하면 현재 우리 몸이에요 우리 몸. 우리 몸을 주님께서 인수해가는 겁니다. 인수해 가가지고 인수한걸 가지고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살아난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신 일을 우리 몸을 껍데기로 만들어서 그 내용을 채워넣는다 이 말이죠.
오늘 참 정말로 엄청난 이야기에요. 믿거나 말거나 하는 그 이야기처럼 진짜 성경에 이런 내용 있었어요? 할 정도로 엄청난 이야기를 제가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이 세계와 저 세계가 중첩이 되는거예요 중첩이.
요한복음 17장 한번 봅시다. 17장 14절 제가 읽어볼께요.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다 같이 시작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어요. 세포가 60조 개인데. 우리 아프면 병원가는데요? 배고프면 식당에 가는데 왜 우리가 세상에 안 속해요? 거울 보세요. 그 거울에 보면 예수님 얼굴입니까? 내 얼굴이다 이 말이죠.
껍데기를 내 얼굴로 사용해놓고 그 안에 뭐로 채우느냐 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사시다가 죽어서 주님 아버지께 갔다가 다시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그 내용으로 우리 안을 꽉꽉 채운다니까요. 고추해가지고 안에 들어내고 안에 돼지고기하고 그 이야기 할까요? 그 이야기는 저는 못해요. 왜냐하면 하도 그 이야기해가지고 무안에 우집사님이 그걸 해줘가지고 앞으로 목사님 그 이야기하지 말라고. 고추튀김. 안에 있는 고추 씨앗 다 드러내고 그 안에 중첩해서 집어넣는다 이 말이죠.
집어넣으니까 이게 뭐냐 하면 내 안을 보게 되면 그 안에 누가 살아있느냐 하면 가짜로서 살던 내 경향성이 나오죠. 그게 뭐냐 하면 나같이 착한데 왜 날씨 덥습니까 나오죠. 이게 뭐냐 하면 나를 중심으로 해서 나를 기준에서 내 의에 의해서 세상이 돌아가야 마땅하다는 이러한 가짜의 본성을 우리가 그대로 노출하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순서가 어떻게 되냐면 순서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일이 어떻게 벌어지는가를 보고 그 다음에 주께서 조치를 하지요. 죄를 죄다 다 드러내게 해요 계속해서. 드러내게 되면 성도가 죄 드러내고 그 다음에 십자가 그래서 너는 죽은 인간이야 죽은 존재야 하고 십자가 쳐다보게 되면 그 다음에 뭐냐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나오죠.
죽은 존재를 살려주셔서 하나님의 의를 주셔서 감사하게 된단 말이죠. 그러면 그 하나님의 의를 할 때 아까 가족 이야기 했지만 성도는 우리를 뭐로 봅니까? 죄인으로 보지요. 왜? 주께서 죄인을 부르러 왔기 때문에. 우리는 고추니까 고추. 고추니까 죄인을 부르러 왔는데 세상 사람은 뭐로 봅니까? 의인으로 보는거예요.
자, 세상 사람들이 의인으로 볼 때 여기 뭐가 추가되느냐 하면 바로 법이 추가되는 겁니다 법. 법을 추가하니까 하나님께서 이 의인이 의인의 속내를 들춰내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뭘 줬습니까? 법을 계속 주는거예요. 법을 계속 주니까 법을 보고 사람들이 그걸 하라 했고 하지 말라 했잖아요. 십계명 나오잖아요. 그렇죠?
하라 하지 마라를 사람들이 그걸 따라하는거예요. 하라 하면 하고 하지 마라 하면 안 해버려요. 그럼 거기서 형성된 결과가 뭡니까? 누가 안 했어요? 내가 안 했지요. 누가 했어요? 내가 했지요. 결국 굳어지는 것이 뭡니까? 복숭아씨처럼 응축된게. 나의 의다 이 말이죠 나의 의. 그래서 이번 주일날 예를 들었잖아요. 율법을 추가하는 것을 뭐라고 했습니까? 뭐에다 뭐 뿌리는 것이다? 미꾸라지에다가 소금 치는거다 이 말이죠.
미꾸라지에 소금 한번 쳐보세요. 어떻게 됩니까? 애들이 난리다. 눈 따가워서 몸이 따가워서. 평소에 물에 염도보다 높이 들어가버리니까 그들의 세포내에 삼투압 작용에 이상이 생긴거예요. 그래서 쉽게 말해서 따갑다. 따가워 죽겠다 그래서 소금 쳐서 죽여 버리잖아요. 저 서천의 갯벌에 조개 빠졌을 때 구멍 속에 뭐 뿌립니까? 소금 뿌리면 답답해서 기어나오잖아요. 그 때 잡잖아요.
인간이 그런 지혜는 알면서도 어떻게 자기가 조개라는 사실을 왜 모르는지. 자기가 율법에 낚인걸 왜 몰라요. 천길은 구분할 줄 알아도 이 세상 자체가 악하다는 것은 왜 몰라요. 이게 가짜이기 때문에 모르는거예요. 그래서 악마는 가짜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 계속 선악과에 의해서 너는 이렇게 착할 수도 있고 너 혼자만으로 훌륭할 수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뭘 통해서? 법을 통해서.
그러면 율법을 준 것은 우리를 율법을 준 것은 우리보고 미꾸라지 소금 친 것처럼 결국은 우리보고 뭡니까? 죽으라는 이야기죠. 뭐로 죽입니까? 율법에 의해서 우리가 죽은 자가 되죠. 그래서 로마서 6장에 보면 ‘율법에서 죽은 자가 어떻게 더 죄에 거하리요’ 예요. 법이 없는 곳에 뭐가 없느니라? 로마서 7장에 법이 없는 곳엔 뭐가 없어요? 죄가 없어요. 죄가 있기 때문에 법을 줬고 법이 없으면 죄가 죄로 드러나지 않지만 소금을 쳐버리면 이게 발작을 해요. 무슨 발작? 나는 의롭다는 발작. 내가 의롭다는 그 모습이 이미 죽은 모습이다 이 말이죠.
그러면 성도가 되었으면 이미 법에 대해서 죽은 자이지요? 그럼 성도는 법에 신경 쓰면 되요? 안 돼요? 새삼스럽게 나만이 갖고 있는 나만이 간직할 수 있는 나만의 양심 이것이 필요해요 안 해요? 이것이 전혀 필요 없어요. 이것이 있으면 여러분 오늘밤에 여러분 마귀 와서 데려갑니다. 죽은 자다 이 말이죠 ‘죽은 자’
죽은 자는요 살아있는 자만 마귀가 데려가지 죽은 자는 마귀가 재미없어서 안 데려가요. 죽은 놈 데려가봐야 어디 쓸모 있다고. 계속 살아서 이렇게 계속 장난감처럼 이렇게 갖고 놀아야 마귀도 자기 살 재미가 나는데. 잘못했어요 두 번 다시 안 할께요 이래야 마귀가 재미가 나요. 너는 나쁜 놈이지?! 그래서? 죽는다!! 그러면 뭐 그럼 죽여라 그거 뭐 별로 심각하지도 않는 문제 가지고 너 나한테 협박 공갈하지 말아라. 죽은 놈인데 뭐.
그럴 때 아버지여 이렇게 가족을 부르세요. 가족을. “아버지~” 주님을 부르란 이 말이죠. 꿈에서 귀신 다 나가요. 건드릴 가족을 건드려야지 건드리면 안 될 가족을 건드리면 안 돼지요 마귀가. 그래서 인간적으로 할 수 있는 성도는 없어요. 어떤 노력을 해도 성도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그냥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야해요. 왜? 본인은 본인 보기에 미쳤어. 이럴 수는 없는거예요. 내가 이렇게 되려고 내가 교회 다닌건 아니잖아요. 이렇게 미치려고.
예상 밖의 일이에요 예상 밖의. 주님이 날 사랑할 줄 예상 밖에 몰랐다. 나는 내가 열심히 해가지고 주님 기다리세요 바르게 말씀 지켜가지고 상금 헌금 많이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게 우리가 예상한거예요. 남이 나쁜 짓해도 기분 좋아요. 왜? 나만 나쁜 짓 안하면 돼요. 왜? 구원받은 당사자가 남이 아니고 누구기 때문에? 나예요.
그런데 그것이 바로 주님 앞에서 그게 몽땅 다 가상현실이라는 거죠. 그동안 가짜에 놀아난 겁니다. 마귀가 만든 가짜 놀이동산에서 거기서 즐겁게 놀은거예요. 피노키오가 아버지 말대로 아버지 집에 와야죠 학교 마치고. 어디 빠졌느냐 하면 꾀임에 빠져가지고 피노키오가 놀이동산 에버랜드 놀이동산 가가지고 실컷 놀다가 뒤늦게 와가지고 어디 갔다 왔니 했더니 어디 다른데 갔다 왔다 거짓말 해가지고 코가 막 길어졌잖아요.
인간은 이 세상을 놀이동산으로 만들어요. 누가 필요 없어요? 십자가가 필요 없는 곳. 가상 현실이면 어때 우리가 행복하면 그만이지. 그래서 우리 속에 성도는 우리 속에 어떤 가짜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줬느냐 하면 우리 속에는 가짜가 한 세가지만 들어볼께요. 여러 가지 있지만. 예쁘게, 착하게, 진실되게. 이게 인류의 역사 가운데서 인간이 갖고 있는 도덕입니다. 도덕을 요약하게 되면 이 세가지예요.
이걸 한자로 하면 뭐냐 하면 ‘진선미’ 진선미 이걸 두자로 줄이면 ‘사기’ 이게 바로 사기예요. 이것 때문에 이 모습 그대로 천당 가려고 하는 거예요. 예쁘게 천당 가고 착하게 천당 가고 진실되게 천당 가려고 하는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했던 선두주자가 누구였습니까? 사두개인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죠. 오늘날의 청교도들 오늘날의 개혁주의자들 청교도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이미지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자기가 한 순간에 보면 예쁘고 착하고 진실해 보이죠? 그런데 내일 되가지고 내일 차운전 하다가 누구한테 욕할지 모르고. 내일 됐을 때에 내일이 만약에 여기 이 기준에 모자라게 되면 그 사람은 자기가 실수하고 뭐 이렇게 기준에 이걸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어제 괜찮았던 그것을 진실된 자기의 본 모습이라고 고집하게 되어 있어요. 자기 모습이라고.
이게 허세 허풍 아닙니까. 옛날에 자기가 착했던 것이 진짜 자기 본모습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남자들은 알아요. 한때에 20대 후반에 대학 다닐 때에 당구 좀 당구장에서 짜장면 좀 먹어본 사람들 전부다 300친다 하거든요. 그런데 지금 나이가 60이 됐다 이 말이죠. 당구 얼마 칩니까? 아직도 300이래. 지금 몸이 안 따라줘서 그렇지 아직도 300이래.
옛날에 그 저 헤엄 좀 치면 어느 무슨 동에 가물치라 한다고. 속초 앞바다에서 가물치하고 또 뭐 형제간에 나이 50, 60된 동생과 70넘은 형하고 수영 내기를 해요. 내기 하기 전에 얼마나 허세가 많은지 옛날 젊을 때 내가 뭐 가물치고 가물치 비슷한 가재미고 이런단 말이죠. 광산 김씨 이야기입니다. 막상 헤엄을 붙혔거든요. 전부 다 걸어가. 헤엄을 치는게 아니고.
허세와 허풍, 허세와 허풍이란 뭐냐 하면은 바로 내가 썩 마음에 들었을 때 내가 이 정도 레벨까지 올라 갔어 썩 마음에 들었을 때 그걸 고정시켜버려요. 영원한 나의 이미지로서 확정시켜 놓고 그 다음에는 비겁한 핑계와 변명으로 일관해요. 악마의 종이 따로 없어요. 그게 악마에요. 남자들이 술 먹는 이유가 초란한 지금의 모습과 괜찮았던 그 모습을 그 차이를 술기운에 좁혀볼라고 그렇게 하는거예요. 마약도 그렇고 술 담배도 그렇고. 담배 피면 좀 멋있어 보이거든요. 자기가 제임스 딘도 아닌 것이.
나 남자 나이 60 넘어서 청바지 입는거 내 취향에서는 별로 안 좋아 보여요. 그런데 청바지 입고 하면 굉장히 갑자기 젊어 보이거든요. 청바지 입고 조끼입고 민소매 입고. 아이고 생각만 해도 끔찍해. 여자 60넘어가지고 머리 길게 기른 것. 아 정말 파마 좀 하시지. 특히 시인들 미술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 50까지는 봐줍니다. 60넘으면 컷트 하든지 뭐 이렇게. 이만큼 길러가지고. 이게 바로 본인이 변화되기를 본인이 겁을 내는 겁니다.
겁을 내니까 그 때 부터 뭐냐 인간이 아니고 악마로 변하는 거예요. 왜? 인간은 괜찮은데 그 모습까지 근처 못 갔으니까 자꾸 그 차이를 애써 피하고 감추는 겁니다. 특히 그 저 목사들도 마찬가지죠. 설교를 할 때 괜찮게 한 설교 그것을 그 이미지를 곧 자기라고 고정화 시켜버리면 그 다음부터 설교 안 될 때라도 내가 한 때 이 정도로 잘했다 한 이걸 가지고 변명 핑계 대는데 이게 뭐냐 하면 이게 가짜 티를 다 내는 거예요.
인간은 그냥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내가 사는 것도 정말 살아보면 나중에 죽을 때 보면 시시한 누구하나 그냥 살아온 거예요. 남한테 피해만 입히면서. 우리 집에 자리 하나 차지해가지고 실컷 잔소리만 하면서 아무데도 도움 없이 살아온거예요. 왜 도움 안 주는가. 사람은 그냥 사는게 아니고 자기 의를 내뿜으면서 살기 때문에 그 독소가 어디로 갑니까? 전부 다 남한테 피해를 주는거예요. 왜 남을 피해줍니까? 자기 잘났다 이거거든요. 나는 나쁜게 없다 나는 정당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고 그 다음에 그 말도 안 되는 깡통같은 아무것도 아닌 자들 자기가 인수하는 겁니다. 공장도 부도난 공장 있잖아요. 부도난 가게를 남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가게를 자기가 값을 치뤄가지고 뭔가 해보겠다고 그 고장 난 기계같은 그런 것을 자기가 인수해요. 인수하고 안을 쪼개지요. 쪼개고 거기에다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이 땅을 다녀갔던 그 코스를 거기다가 그대로 우겨 쑤셔 넣어버립니다.
넣어버리면 그 때부터는 우리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 것이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껏 자기가 죄인인 것을 감사하게 됩니다. 잘난 체 할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을 감사해요. 내가 더 잘난 체 할게 없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 죽는다 할지라도 그 소관은 내 소관이 아니고 주님 소관이에요. 그래서 어떤 일을 하게 되면 이것은 내가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일을 하게 하신거예요. 왜? 그 일을 함으로서 내가 미처 몰랐던 새로운 죄가 발생되기 때문에. 새로운 죄가 발생돼요.
자, 그러면 그 집어넣은 현상이 어떤 현상인가 그거하고 마치겠어요. 자, 우리 몸이 있습니다. 뭐가 들어간다고 했어요? 무슨 경로? 주님 가신 경로가 나오지요. 주님께서는 땅에 왔다가 어디로 가십니까? 하늘로부터 와서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 가잖아요. 1번 하늘로부터 내려오기 2번 땅에서 살기 3번은 땅에서 어디로 가기? 하늘로 가기. 이걸 그대로 우리 속에 집어넣어요.
그러면 너는 이미 창세 전부터 택했다. 에베소서 1장 4절. 땅에 살면서 뭐하냐 하면 땅에 살면서 네가 땅에 것을 생각지 말라 하죠. 땅에 살면서. 그 다음에 위로 올라가면서 주님을 네가 주님의 증인이 되리라. 땅에 살면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를 위를 바라보도록 그렇게 주께서 조치를 하시는거예요.
조치를 할 때 우리는 뭐를 생략하고 싶냐 하면 이 땅에 사는 것은 생략하고 바로 주께서 창세 전에 선택했기 때문에 바로 하늘로 가고 싶어. 바로요. 바로 가고 싶은데 바로 가 버리면 주께서 십자가 지신 체험을 우리가 공유 못하게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무엇 때문에 아파했고 무엇 때문에 창에 찔렸고 무엇 때문에 눈물 흘리셨는지를 우리가 한 가족이 아니고 동떨어져 우리는 관람객이 되어 버려 가족 같으면 같이 겪어야 되는데 우리가 안 겪게 되면 우리는 그냥 박수나 치고 영화 구경하는 셈이 되지요.
그래서 이 땅에 뭐냐 하면 이 땅에서 주님께서 당했던 그 시련을 그 십자가 시련을 같이 겪게 만듭니다. 겪게 하기 위해서 우리 속에 들어있는 이 헛된 것 가상현실을 가지고 우리의 본색을 마음껏 발산하게 해요. 발산하게 되면 거기서 자동적으로 뭐가 나옵니까? 우리의 자기 의가 나오겠어요? 안 나오겠어요? 안 나올 수가 없지요. 나는 잘 했는데 저쪽이 와서 나를 힘들게 해서 못 살겠다!!! 하고 여기서 온갖 고함지르고 기도를 얼마나 했는데 헌금 많이 했는데 왜 어째서 이렇게 어렵습니까? 하는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하나의 광산에서 탄광을 하나 더 캐는 거예요. 캐는 겁니다. 바닥을 캐보면 이 죄의 바닥이 갈수록 점점 더 깊어지면서 위를 더욱 더 사모하게 되어 있어요. 점점 더 깊어지면서 세상 보는 것이 점점 깊어지면서. 그럼 위를 사모하게 되면 우리의 안목은 남이 보지 못한 더 깊은 안목까지 되겠지요.
그렇게 되게 되면 뭐냐 하면 바로 죄를 지어서 벌을 받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 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힘들게 살아간다는 위의 차원에서 바라보게 되는 겁니다. 내가 죄를 졌기에 이런 벌을 받는게 아니라 죄 지으나 착하게 사나 관계없이 이 세상은 허무하고 이 허무한 이 세상에 그 얼마나 허무한지는 예수님 그 십자가 지신 그 아픔에 동참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삶을 살게 만들어요.
그렇게 만들면 예수님의 죽음을, 예수님을 미워하고 싫어한 자가 누구냐 하면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싫어했고 주님은 싫어한 바 된 그 예수님을 싫어한 우리를 주께서는 이미 고정화시켜서 구원에 확정시켜 주시고 우리의 모든 변화는 내가 주님을 얼마나 미워하고 싫어하는가를 이 땅에서 실감나게 만드는 거예요.
나의 고집과 나의 그 잘남과 내가 낮아지기보다는 높아지고 남한테 지기 싫어하는 그 본성 그 모든 것이 예수님이 그걸 일부러 경험케해 주신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나의 구원도 가짜고 내가 생각했던 천국도 가짜고 나는 오직 가짜 밖에 없다는 것을 알 때 그렇게 아는 그 능력은 주의 성령이 임했기 때문에 주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주님이 한 가족이기 때문에 그러한 놀라운 능력이 등장하죠. 감사할 수밖에 없는거예요.
그리고 내가 사는 것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지은 죄에 비해서는 너무나도 이게 벌이 가볍다는 것이죠. 이보다 더 고생을 해도 되는데 봐줘도 너무 봐주고 있다는 사실을 고마워하죠. 제가 주일 낮설교 때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사는 것은 90년인데 벌 받는 것은 영원한 벌이라고. 이게 아구가 안 맞지요? 90년 죄지었으면 몇 년만 살고 출소하면 돼요? 90년 살고 다시 천국가면 되는데 우리를 지옥 보내는 것은 영원히 보낸단 말이죠.
그럼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가 90년 동안 산 죄가 이게 내가 행한 죄가 아니고 주님 보시기에 영원히 지옥가라 하는 주님의 원수가 지은 그 죄에 한패가 돼 있었다는 사실. 양이 아니고 질적으로 한 패가 되어 죄를 지었기 때문에 90년 사나 10년 사나 지은 죄로 영원히 죽어요. 따라서 우리의 죄는 내가 나쁜 짓 해서 지은 죄가 아니고 나쁜 짓 하나 착한 일도 죄거든요. 선악과 따먹는 자체가 죄니까.
착한 일한 것도 죄고 나쁜 일한 것도 죄고 이래도 죄고 저래도 벌 받아야 된다 이 말이죠. 벌 받는데 에어컨 틀어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모든게 감사 안 할게 없어요. 다 감사해요. 그리고 심지어 마지막에 이야기 했지만 내가 죽는 것도 왜 쓰십니까가 아니라 왜 그토록 오랬동안 살려주십니까? 그렇게. 오히려 감사하죠. 후딱 알아주시니. 주께서 알아주시는 것은 이제 됐다 이제 써먹을 거 다 써먹었다. 뽑아낼 거 다 뽑아냈어요. 부도기업 해가지고 뽑아낼 거 다 뽑아내고 주의 증인할 거 다 증인하고 이제는 우리를 없애버립니다. 우리를 데려가는 거죠. 주님 앞에 데려가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소원이 바로 그거였습니다.
율법 문제 그리고 예수가 죽었다는 로마서 6장 같이 세례로 죽고 산다는 그 문제 그리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 산다’ 이 모든 것이 바로 가상현실과 그리고 실제라는 두 개의 세계 가지고 다 설명을 다 될 수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이 땅에 오실 때에 외부에서 오셨다는 사실이 그 가치를 몰랐습니다. 그냥 잔소리하려고 오신 줄 알았습니다. 근원적으로 우리가 희망 없는 자였는데 창세 전에 구원 받기로 이미 확정이 난 존재인데 주께서 데리러왔다는 사실을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