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강-창 39장 19-23절(억울한 요셉)180829-이 근호 목사
153강-창 39장 19-23절(억울한 요셉)18082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9장 19-23절입니다. 구약성경 60페이지입니다.
창 39:19-23
“주인이 그 아내가 자기에게 고하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넣으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요셉의 처지가 더 밑바닥까지 내려갔습니다. 물론 요셉이 노예로 팔려왔지만 주인이 없는 곳에 주인의 부인이 요셉에게 악을 행하고자 할 때에 요셉은 과감하게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거절하고 후딱 나가는 바람에 요셉의 옷을 미처 챙기지 못하고 보디발의 처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보디발의 처가 아주 분노했습니다. 39장 14절에 보면, “집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도다 그가 나를 겁간코자 내게로 들어오기로 내가 크게 소리질렀더니 그가 나의 소리질러 부름을 듣고 그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
요셉과 보디발의 처만 있을 때 말고 이제는 공개석상에서 보디발의 처가 요셉에게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씌웁니다. 미투에 대한 무고죄가 되겠지요. 보디발이 집에 들어오자 보디발의 처가 또 다시 거짓말을 해서 요셉을 아예 없는 존재로 처리하면서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자, 여기서 처음에 여자가 요셉에게 행한 죄는 무슨 죄냐? 간음죄를 시도했지요. 간음죄는 간음죄고 그 다음에 무고, 거짓말을 했지요. 간음죄에다 남편이 들어오니까 남편에게 거짓말을 했어요. 여기서 우리가 세상 모든 죄는 통합이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이 죄 따로 있고 저 죄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죄라는 것은 그 형태만 다를 뿐 죄는 항상 한 덩어리에서 비롯되는 겁니다. 물리학에서 에너지라는 것이 있어요. 에너지라는 것이 뭐냐 하면, 위치에너지가 나중에 운동에너지로 바뀌고 또 위치에너지 또는 운동에너지는 화학에너지로 바뀌고 전기에너지로 바뀌어요.
수력발전 같은 경우에는 물이 위에 있잖아요. 물이 위에 머물러 있는 것을 운동을 시킵니다. 아래로 떨어뜨리면 여기서 에너지가 발생되지요. 그 에너지는 가만있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운동에너지가 잠재되어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것이 낙차를 통해서 밝혀지게 되지요.
모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힘들은 에너지의 형태변화에 지나지 않습니다. 죄도 그것과 마찬가지지요. 죄라는 것은 있는데 그 죄가 어떤 죄는 간음죄, 어떤 죄는 무고죄, 어떤 죄는 살인죄, 어떤 죄는 탐내는 죄, 맨 그 죄가 우상숭배 하는 죄, 그렇게 되는 겁니다.
모든 죄는 하나에서 나온 겁니다. 그래서 물리학에서는, 이 세상은 에너지의 물결이라고 보는데 저는 이 세상을 죄의 물결로 봅니다. 죄가 물결치게 되고 그 물결이 주름이 접히게 되면 그 주름 접힌 안에서 인간의 자아가 나오는 겁니다.
인간의 자아라 하는 것은 죄가 없이는 나오지를 않아요. 죄가 인간 속에 자아를 만들어 놓고, 물론 악마가 그렇게 했지요, 악마가 인간의 자아를 만들어놓고, 세상에 범람하는 그 모든 죄와 다르게 나만이 특별하게 의롭다고 우기게 만들어요.
나는 의롭다고, 이걸 로마서 10장 3절에서 ‘자기 의’라고 하는데, 자기 의가 있다는 것은 에너지의 변환과 마찬가지로 죄의 다른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은 인간의 자기 의 때문에 돌아가셨어요. 자기 의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를 지적하는 예수님을 떠밀어버린 겁니다.
그렇지 않은 인간은 없어요. 모든 인간은 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죄의 보편성이고 이것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죄의 평범함’이라고 했지요. 죄의 평범성. 너무나 평범해요. 무심코 하는데 거기에 죄가 되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보디발의 처가 이렇게 죄라고 나오지만 보디발의 처가 간음을 하나, 나중에 시장에 가나, 안 그러면 남편에게 고자질을 하나, 또는 일상적이고 평범하게 놀러가거나, 아침상이나 저녁상을 차리거나 상관없이 언제든지 무고죄가 나올 잠재력을 갖고 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이 저녁을 지어도 도적질을 할 수 있는 잠재력이 발산되는 겁니다. 그게 평범한 일상이에요.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뭐냐?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누가 이것을 죄라고 합니까? 아무도 죄라고 하지 않습니다. 베트남과 축구하고.
이게 무슨 죄가 돼요? 축구 시청하는 것이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 그것이 전혀 죄가 아니에요. 그런데 그 죄를 죄답게 노출시키는 것은 보디발의 가정 앞에 요셉이 사로잡혀 와서 맞닥뜨려야 되는 겁니다. 보디발의 처, 그리고 보디발의 가정 앞에 요셉이 등장했다는 것은 요셉의 입장에서 나를 보는 것과, 있는 요셉도 없애버림으로, 우리 집에서 꺼져, 하고 없앰으로서 계속 유지하려는 그 무엇, 그게 바로 죄가 됩니다.
요셉이 오기 전까지는 보디발의 가정이 죄라는 것이 노출된 적이 없어요. 그러나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왔다가 다시 감옥에 사로잡히는 그 과정을 통해서 보디발의 집은 문제 있다, 가 등장합니다. 특히 14절에 보면 보디발의 처가 요셉을 두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라고 되어 있고 17절에는,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라고 했어요.
히브리 사람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것이 단순히 누구의 죄라는 일반적, 일상적인 도덕을 범한 죄로 규정하지 않고 복음과 관련시킨 죄로 도출시키는 겁니다. 사람이 억울한 점이 있잖아요. 신앙과 관계없이, 종교와 관계없이 누구나 억울함을 당합니다.
그 억울함과 지금 요셉이 당하는 억울함이 차원이 달라요. 요셉이 당하는 억울함은 히브리인이라는 것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억울한 사태의 발생을 의미하는 겁니다. 사람이 누구를 죽일 수는 있어요. 그러나 사람이 일반사람을 죽이는 것과 예수님을 죽이는 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일반사람 죽어봐야 죄인이 죄인 죽이는 거예요. 죽을 만해서 죽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절대로 죽어서는 안 되고 죽을 이유도 없는 분을 인간들이 죽인 거예요. 예수님을 건드리게 되면 하나의 죄가 아니라 죄 중에 태어났다는 것이 들통 나는 그런 죄입니다. 죄를 짓고 싶을 때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죄짓는 것 외에는 할 것이 없음을 드러내는 방법은 인간이 다른 인간하고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상대했을 때 비로소 그것이 발각되는 겁니다.
오늘날에는 예수님이 전하는 복음, 십자가복음을 거부했을 때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서 죄 짓는 것이 아니고 날 때부터 죄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존재로서 부각시키는 겁니다. 성경공부를 하든 뭘 하든 그것은 죄인이에요.
성경공부라는 것이, 말씀공부라는 것이 그거잖아요. 나는 말씀공부 하는 이것도 죄라는 것을 알려줘야 그게 말씀공부잖아요. 말씀공부라 하는 것은 교회 나와도 그것이 죄가 된다는 것, 심지어 예수 믿어도 그게 죄가 된다는 것, 그게 바로 말씀이에요.
그리고 구원은 내 쪽에서 뭘 하나 거든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구원은 결정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창세전부터. 창세전부터 이미 구원이 결정되었어요. 몸부림, 맘부림 쳐도 소용없습니다. 다만 구원된 자는 창세전부터 구원되었다는 사실을 예수님에 의해서 알게 되는 기적을 받게 된다는 겁니다.
‘아, 내 구원이 내가 설쳐서 되는 것이 아니구나. 이미 결정된 사항을 추후에 주님께서 통보해주는구나.’ 그걸 아는 것이 진짜 주님 주신 구원입니다. 오늘 우리는 요셉이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요셉에게 집중하면 안돼요. 어디에 집중해야 되느냐 하면, 보디발의 처와 보디발의 태도에 대해서 우리는 오히려 집중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보디발의 처와 보디발은 뭔가 일이 벌어지고 난 뒤에 첫 번째 본능적으로 나오는 현상은 뭐냐? 자기 것을 지키려고 한 거예요.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을 내가 지키는 것을 인간세상에서는 절대로 죄라고 하지 않습니다.
어떤 목사가 개척해서 한 5백 명 끌어 모았다. 그래서 그 목사가 교인 하나하나 사랑한다. 그게 무슨 죄가 되겠느냐 하겠지요. 그런데 그 갑자기 교인들이 그 목사보고 한 10명 모인 교회로 가세요, 라고 하면 그 목사가 수긍하겠습니까? 어떻게 세운 교회인데 너희들이 왜 나를 쫓아내느냐, 하겠지요. 그게 자기 지키는 거예요.
도대체 사람들은 뭘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인간이 뭘 지키려고 하느냐 하면, 자기가 지은 죄를 지키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죄의 절정이 자기 의가 되기 때문에. 쉽게 말해서 내 몸은 내가 지키겠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죄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그게 바로 죄거든요.
내 몸은 내가 지킨다. 향토예비군정신, 여러분이 다 아시지요. 내 고장은 내가 지킨다. 내 몸은 내가 지킨다는 것이 밥만 먹는 것이 아니에요. 완력으로 내 것만 지킨다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는 단지 힘뿐만 아니고 그동안 쌓아온 내 명예와 체면과 위신, 그리고 대대로 내려오는 가문의 전통, 우리가정, 나에 관련된 모든 것, 내 교회, 선교사를 했다면 선교하면서 고생했던 그것마저 내가 했다는 이름으로 내가 지켜야 된다는 거예요.
내가 지키려고 하는 인간과 그것을 손상하는 인간 사이에서 부딪히다 보면 억울한 일이 있지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세상 살면서 억울한 일이 안 생길 수가 없어요. 그러나 그 이야기 하라고 오늘 본문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오늘 요셉이 억울한 것은 복음과 관련해서 억울한 거예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서로 억울하다 하는 것은 내가 지켜야 될 것을 남이 안 알아주고 손상할 때 억울한 거예요. 그럴 때 “하나님이여, 갚아 주옵소서.” 하나님이 안 갚아줍니다. 하나님은 복음중심이고 언약중심이에요. 억울해도 복음으로 억울해야 되지 내 것 안지켜준다고 억울하다고 하면 그것은 누구보고 따지는 것이냐?
결국 책임자가 누구냐? 나를 억울하게 한 책임자는 결국 돌고 돌아서 누구한테 귀속되느냐? 하나님이 나를 억울하게 한 거예요. 가을철에 장마가 지면 과수에 해를 입힌다는 거예요. 여름 폭염에 과수 다 화상 입었지요. 또 가을장마에도 과수가 잘 안된답니다.
그래서 과수농사가 잘 안되었다. 그러면 그 책임을 누가 져야 돼요? 너무 억울하잖아요. 과수농사 잘 안되어서 너무 억울한데 때 아니게 비가 너무 왔다. 그러면 그 책임자가 누구입니까? 비를 주관하신 분은 누구냐? 하나님이 비를 주관하셔요. 그러니 하나님 보고 따질래요?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과수원주인보고, “네가 뭘 지키려고 하느냐?” “내 것 지키려고 합니다.” 이렇게 답변하겠지요. 네 것이 있다는 그것이 바로 악마의 사주를 받았기 때문에 생성된 성품이고 사고방식이에요. 악마가 그렇게 한 거예요.
다시 말해서 악마가 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네 것은 네가 지키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네가 없으면 하나님도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중요한가, 네가 중요한가? 우선 네가 중요하고, 네가 있고 난 그 다음에 하나님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이 연사는 외칩니다. 왜? 마귀가 그렇게 평소에 외치고 있는 거예요. 교회 왜 나옵니까? 하나님 좋아서 나옵니까? 내 것 지키려고 나오지요. 대전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행복과 자기의 구원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 감사한다고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의 행복과 나의 구원과 통하는 그 길을 비틀어버리지요. 나가 여기 있고 내 구원과 행복이 저기 있다면 거기에 길이 나 있잖아요. 그 길은 주님의 길이 아닙니다. 주님의 길은 좁은 길로 따로 있어요.
주님의 길은 어떤 길이냐 하면, 내 행복과 내 구원과 상관없이 예수님의 예수님 되심을 드러내는 길이에요. 예수님의 자기증거, 예수님이 여기 살아있다는 자기증거, 나는 네 목적 말고 내 원래의 목적은 따로 있음을 알려주는 그 길, 그 길을 가는 사람의 특징은 자기의 행복과 구원을 포기해야 되지요.
그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이에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주님이 다루는 용도가 되어야 돼요. 내가 구원을 소유하면 안 됩니다. 내가 구원을 소유하게 되고, 내가 믿음을 소유하게 되면 그 믿음을 내가 지키려고 하는, 평소에 마귀가 심어준 본성대로 믿음, 소망, 사랑을 다 내가 지키려고 해요.
그것을 통해서 내 가정도 지키고, 내 행복도 지키고, 내 천당 가는 구원도 지키고. 지키고, 지키고 해버리면 누가 떠밀리느냐? 그게 바로 요셉이 떠밀리는 거예요. 보디발의 가정과 요셉의 만남에서 지금 요셉이 억울함을 당했을 때 그 억울함이 인간적인 일상 속에서 나오는 억울함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꿈을 꾸게 한 그 요셉의 억울함이거든요.
이것은 요셉으로 하여금 요셉을 억울하게 하는 저쪽에 있는 그 사람의 개인의 성품에 관한 것이 아니고 그 전체가 나중에 히브리민족을 괴롭게 할 애굽의 모든 품성을 보디발이 대표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창세기 15장 13절에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에 다녀온 적이 있어요. 그러고 난 뒤에 애굽의 기능에 대해서, 애굽이라는 나라가 왜 아브라함 근처에 있어야 되는가? 그게 13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계속 이 땅에서 살지 못하게 만들어요. 어디로 가느냐? 이방의 나라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이방의 나라에 가게 만들어요. 이게 아브라함의 약속 안에 들어있는 필수과정속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남의 나라에서 나그네가 되어야 된다는 요소가 아브라함자손이 갖추어야 될 요건으로 삽입되어 있는 겁니다.
사람이 남의 나라에 가면 고생하지요. 고생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께 원망합니다. “하나님을 내가 좋아하는데 왜 나를 힘들게 하십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안 힘들게 하거나 행복을 주는 하나님이 아니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과정을 겪어서 구원하느냐?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에요. 언약에 관한 이야기에요.
창세기 15장 13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라고 해요. 이것이 창세기 15장에 약속된 것이고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대목은 창세기 39장입니다.
요셉에게 꿈을 주신 것은 야곱의 언약 안에 있었고, 야곱은 이삭언약 안에 있었고, 이삭의 언약은 아브라함언약 안에 있었습니다. 점점 더 언약의 깊이가 확대가 되고 확산되고 구체화되는 겁니다. 조밀하게 되고 세밀하게 되는 거예요.
바라기는 현재 우리의 마음까지 아브라함 언약이 밀려오기를 바랍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내 것을 지키려 하는데 상대방이 방해를 놓아서 억울합니다, 이런 소리를 하지 말자는 겁니다. 내 차가 있는데 상대방이 박아서 내 차가 부서졌으니 하나님이 물어주세요, 이런 소리는 하지 말자는 거지요.
하나님이 풀어주는 억울함은 어떤 거냐 하면, 복음과 관련된 거예요. 복음과! 복음과 관련되었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고 물으신다면? 요셉은 내 것, 자기 것이 없는 입장에 있어요. 노예니까. 이 노예가 자유인이에요. 이방의 나라에서 나그네가.
아무것도 없는 자가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에요. 자기가 지킬 것이 없기 때문에. 왜?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거든요. 반대로 애굽에 있는 보디발은 모든 것이 내가 지켜야 하는 내꺼 에요. 자기 몸도, 자기 아내, 자기 재산조차도. 그저 노심초사 내 것 지켜야 돼요.
그런데 요셉은 처음부터 애굽에 들어올 때 자기 것 없이 팔려 들어왔습니다. 화학에 금속결합이라는 것이 있어요. 금속결합이 뭐냐? 모든 원자들이 조밀하게 있는데 그 금속에 전기가 통하는 이유가 있어요. 원자들이 단단하게 엮여 있어도 거기에 절대로 얽매이지 않는 자유전자가 있어요. 온 동네를 다 돌아다닙니다.
이 자유전자 같은 존재가 지금 요셉입니다. 그리고 장차 오실, 이 땅에 속하지 아니했다는 예수님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요셉은 지금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어요. 자기를 변호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왜? 애굽에서 나그네니까.
아무것도 없는데, 그 다음 39장 21절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아무것도 없지요. 그냥 빈털터리로 옥에 갇혔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같습니다.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이 말은 뭐냐 하면, 단절이 되고 난 뒤에 보디발이 살아가는 그 원칙과 요셉이 사는 원칙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 확인되고 난 뒤에, 요셉은 아무것도 지킬 것이 없다는 것이 확인되고 난 뒤에 여분의 것을 하나님께서 마음껏 퍼주는 거예요.
그래야 은혜가 은혜다운 거예요. 내 것 지켜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소용없습니다. “주여, 내 것을 내가 지키지 않게 하옵소서.” 할 때 현재 갖고 있는 모든 것은 주께서 퍼주시는 겁니다. 크게 은혜주신 거예요. 요셉처럼.
내 건강 지켜 주옵소서. 그게 어떻게 자기건강입니까? 자기 건강을 지키지 마세요. 이 땅에서는 진즉에 죽어야 됩니다. 살아온 것도 이상해. 더 안 살아도 되는 것을 괜히 살았어. 사는데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살아봐야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그것밖에 할 줄 모르잖아요. 살아봐야 머리 허옇게 쇠는 것밖에 없잖아요.
안 살아도 되는데 살게 하실 때 그것은 뭐냐? 덤으로 주신 겁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는 거예요. 내가 더 이상 나를 지킬 필요가 없을 때 그것보다 더 큰 자유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제가 악마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다시 하게 되면, 악마는 네 몸 네가 지켜야 된다, 라고 해서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내가 있어야 그 다음에 하나님이라는 것을 각인시키고, 세뇌시키고, 계속해서 그것을 반복해서 현실화시켜요. 기정사실화합니다.
마귀가 이렇게 합니다. “딴생각 하지 마라.” 베트남이 이기나, 한국이 이기나, 분명히 해라. 네가 지금 누굴 지키고 싶으냐? 계속해서 마귀는 우리한테 맞는 소리를 해요. 우리가 살아오면서 늘 옳다고 여기는 이야기만 악마는 해줘요.
그래서 제가 대전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간이 천국을 안다는데 알기는 뭘 알겠어요? 왜냐하면 살아오면서 한 모든 기억은 땅의 세계의 기억밖에 없어요. 땅에서 경험하면서 땅에서 내가 살아보려고, 그리고 가진 것을 지켜보려고 하는 그것만 경험했는데 어떻게 이런 경험에서 천국 가는 경험이 나오겠어요.
우리의 기억에서는 ‘땅에서 살아남아야 돼.’ 그 기억밖에 없지요. 그래서 천국 같은 것은 구라중의 구라에요. 완벽하게 거짓말입니다. 이미 꽉 차 있어요. 갈 때까지 한 번 가보자는 식으로. 꽉 차 있어요.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마귀가 계속 격려하고 독려해줍니다.
“힘내라 힘!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나라.”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네 것 네가 지켜야 된다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하나님의 언약대로, 하나님의 약속대로 그렇게 주시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지키지 않았기에 주시는 거예요. 지키지 않았기에.
그리고 앞으로 지킬 필요도 없기에 주께서 필요에 따라서, 주님이 함께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계속해서 우리의 목숨과 우리의 모든 것을 제공하는 겁니다. 보디발의 모습을 통해서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이야기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보디발과 요셉의 만남을 통해서.
마태복음 6장 21절에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 하실 때에 허공보고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 사람들, 이게 산상설교니까 산에 올라온 사람들을 똑바로 보고 이야기했어요. “너희들 다 각자 지키고 싶은 것 있지? 그렇지?”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지키는 그것에 하루 종일 마음 다 쏟고 있잖아.” 다 거기에 퍼붓는 거예요. 네 마음이 있는 곳에 네 보물이 있느니라. 보물이라는 것을 누가 규정하느냐? 본인이 그렇게 본인을 규정을 해요. “보물은 내가 곧 보물이다.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보물이다. 끝. 다른 소리 하지마라. 나 다른 소리 안 듣겠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 라고 해서 우리를 정확하게 지목을 합니다. 그 다음에 어려워요. 자, 지목 당했을 때 우리 힘으로, 우리의 능력으로 우리의 보물을 스스로 포기하거나 거부할 마음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의 몸이 거기에 다 응축이 되어 있고 거기 다 모아졌어요.
복숭아씨처럼 단단해졌다는 말이지요. 그거 외에는 보물이라고 여기지 않았어요. 쉽게 말해서 내 것이니 귀하다는 겁니다. 여기서 아무도 인간은 자기의 보물을 자기 것에서 주님 쪽이나 천국으로 옮길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요셉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요셉에게 꿈이 있어요. 요셉의 꿈을 신약성경으로 한다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짊어진 언약이라고 보면 되거든요. 요셉의 꿈은 야곱의 언약에 의해서 주어진 꿈이기 때문에 이것은 외부에서, 하늘에서 주어진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가는 길도 하나님이 원했던 거예요. 그 십자가의 길 가면서 뭐가 생겼느냐 하면, 여기서 억울함이 생기는 겁니다. 이걸 우리가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우리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야, 결과적으로 요셉이 이렇게 잘되었구나.’라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요셉이 여분으로 얻었던 이 시간벌기, 또는 요셉의 만사형통은 결코 요셉이 의도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리라고 사전에 예상도 안했어요.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 나와서 자기를 자칭 성도라 하고, 교회라고 주장하면서 오늘 본문을 본다고 칩시다.
그리고 목사님 설교하는 이 본문을 같이 봤다고 칩시다. 그러면 마음이 어디로 가느냐 하면, 보디발의 집에 가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저절로 요셉에게 가 있는 거예요. 약간 억울하지만 떼 부자 되었으니 괜찮잖아요. 약간 억울하지만 국무총리자리까지 올라갔으니까 그만한 것은 참을 수 있겠지.
이미 우리가 어떤 드라마를 다 봤으니까 참을 수 있다고 하지만 요셉한테는 그게 용납이 안 되는 겁니다. 요셉한테는 그 다음이 없어요. 그래서 요셉에게 십자가라 하는 것은, 요셉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꿈이라 하는 것은 요셉으로 하여금 저쪽 보디발의 집과 의도적으로 끊어내기, 또는 갈라내기, 또는 분리시키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세상은 자기 것을 지킨다. 그런데 우리도 내 것 지킨다. 이러면 분리가 안 되잖아요.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무슨 조치를 하느냐 하면, 요셉같은 조치를 하시는데 나중에 떼돈 번다는 그런 조치를 하는 것이 아니고 갈라내기 싫은데도 불구하고 강제로 끊어내고 구분 짓는 사태가 일어나게 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세자로 ‘억울함’입니다. 이 억울함이 나쁜 짓을 해서 당하는 억울함이 아니에요. “정말 이럴 수 없습니다.” 하는 것, 세상 쪽에서 나를 내치게 만드는 억울함. 그럴 때 우리는 주님께 분노하지요. 이렇게 억울함 당하고는 못사니까 주께서 갚아주세요, 라고 하지요. 물론 그런 대목이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성도의 기도, 그 향로에 담기는 것은 바로 억울함인데 우리의 잘못은 뭐냐 하면, 내가 복음대로 사는데 저 사람이 나를 미워해서 나를 내쳤다고 생각하거든요. 나와 저 사람 둘 사이를 생각하는 이것이 우리의 잘못된 착각입니다.
저 사람이 나를 친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주님을 내쳤던 그 모든 세계의 대표자로서 나를 내치는 겁니다. 나를 내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요. 우리가 주의 사람이기 때문에 주님을 미워하듯이 세상도 너희를 미워하게 되리라, 하는 그 요한복음 15장의 말씀을 그대로 이루려 하는 겁니다.
우리는 세상과 떨어질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친하게 지냅니다. 제가 201호에 사는데 202호와 아~주 친하게 지냅니다. 달걀 서로 사고팔고 하는 사이입니다. 현관 열쇠도 맡기는 사이에요. 그 좋은 사이, 사는데 서로 도움이 되는데 왜 떨어지겠습니까?
202호와 사이좋게 지냈는데 이유가 뭐냐? 복음적인 말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 믿으라는 소리를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어요. 절에 푹 빠져 있는 사람이니까. 구태여 고난 받겠다고 설치는 이것도 노림수가 이상해요.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내가 이렇게 해서 고난 받아서 구원받았다는 소리가 안 나오도록, 난데없는 억울함이 주님의 십자가에 같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조치인 것을 감사하는 그런 계기를 주께서는 때를 따라 마련해주시는 겁니다.
이게 뭐냐? 우리는 이 땅에서 같이 살 수 없는 단절된 나그네 삶을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일은 우리 소관이 아니고 주님의 소관이니 우리는 그냥 막살아야 돼요. 막 사시면 주께서 딴 것 말고 복음 때문에 억울한 일이 생긴다면 이것은 예상 밖입니다.
왜? 우리는 세상에서 일부러 나갈 마음은 전혀 없어요. 그들과 함께 재미나게 살고 싶어요. 욕 안 얻어먹고 살고 싶고, 비난 안 받고 싶고, 서로 주고받고 정답게 살고 싶어요. 그러나 주님께서 복음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하게 할 때에는 도리어 기뻐하고 감사해야 됩니다.
왜? 주님이 우리를 통해서, 내가 이렇게 이런 길로 갔다는 것을 드러내는 용도로 요셉을 사용하듯이 오늘날 우리를 사용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이 돈 많은 것보다 주의 큰 은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내 중심으로 생각하면서 주님 도움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요셉의 모습이 아니라 보디발의 모습인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내 것 지키는 음흉한 생각으로 주님 이용하지 말고 주께서 어떤 분인가를 보이는데 마음껏 쓰시도록 자신을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