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180824a 마가복음12장 28-34절(자기포기)-이 근호 목사
광주강의20180824a 마가복음12장 28-34절(자기포기)-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2장 28-34절 28절,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저희의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대답 잘하신 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까 29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절,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31절,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32절,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33절,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34절,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이렇게 되어 있죠.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지금 서기관이 예수님과 대화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화하는 것. 그렇게 대화하니까, 34절에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칭찬받는 자가 등장했을 때에 우리의 관심사는 여기에 쏠리는 것입니다. 무슨 소리를 했기에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다 받는가? 그러면 우리도 똑같은 대답을 하면 칭찬을 받을 수 있겠네, 라는 그런 핵심부분을 뽑아내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이 서기관이 뭐냐 하면 이 서기관이 예수님과 함께 대화한 거예요. 대화. 대화를 했는데, 대화가 되는 사람이에요. 대화가 되는 사람을 보고 예수님은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것을 하나님 나라라고 본 것입니다. 하나님하고 대화가 된다는 것은 생각이 같다는 뜻이거든요. 하나님나라에 대화가 되는 사람이다. 근데 서기관입장에서는 지금 누구하고 대화를 하느냐 하면 예수님하고 대화를 하죠. 예수님하고 대화를 했는데, 이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거의 다 왔다, 가깝다, 하늘나라가 너 같은 사람을 통해서 보여 진다, 이렇게 되거든요. 여기서 이 사람이 예수님과 대화를 하면서 지금 세상을 바라봅니까? 안 봅니까? 안 보죠. 가족도 생각 안 하죠. 이 사람은 어디에 꽂혀 있느냐 하면 예수님한테만 꽂혀있는 거예요. 그러면 하늘나라라는 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에게 꽂혀있는 사람. 마치 모든 해답은 예수님에게로부터 나온다. 여기에 그냥 뿅 간 거예요. 이분한테는 전부를 걸어도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전부를 건다는 말은 내가 따로 예수님한테 요구하는 게 있겠어요? 없겠어요? 따로 요구하는 게? 요구하는 게 없죠. 하늘나라 백성, 또는 성도의 특징이라면 예수님이 주신 것 외에 달리 하나님 앞에 나아와 요구할 필요가 없는 사람, 존재, 그게 바로 성도죠. 건강하게 해달라, 자식문제 해결해 달라, 교회문제 해결해 달라, 이게 아니고 우선 요구를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요구를. 왜 그러냐 하면은 예수님께 율법에 대해서 언급했다는 것은, 모든 법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예수님이 정답을 갖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께로부터 그 모든 율법의 진의가 시작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에요. 내가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시작점이 내가 여기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시작점으로 안 보겠다고 하는 말은 이건 일종의 자기 소멸이죠. 자기 소멸.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첫 번째 계명이 뭐냐 하면 30절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이래 되어 있죠. 이 말은 내 뜻 다 걷어내고, 내 힘 다 걷어내고, 내 마음 다 걷어내고, 내 목숨 다 걷어내고, 다 걷어내는 거예요. 내 마음이 독자적으로 있을 필요가 없고, 내 목숨 따로 챙길 필요가 없고, 내 뜻 따로 챙길 필요가 없고, 내 힘 따로 챙길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나는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 말입니다. 제가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주님의 입장에서는 내가 죽는다는 것도 시시한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분명히 그렇게 이야기를 했죠. 내가 죽는 것도 시시한 일이 돼요. 내가 죽는 것이 나한테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일의 진행이 우리가 이렇게 요란을 떨어도 주님의 일은 차분하게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내가 몸이 아프고 가정에 우환이 있더라도 주님보시기에는 아무 하자가 없어요. 일의 진행이 잘 되고 있어요. 어떤 산골마을에 집들이 있는데, 저녁 되면 밥 짓는다고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가죠. 개도 몇 마리 있고. 박목월은 그 대목을 보면서 <나그네>라는 시에 이렇게 했어요. 그것을 무슨 마을로 봤느냐 하면 술 익는 마을로 봤어요. 나그네라는 시에요. 근데 그 술 익는 마을이라는 것은 아주 정감 있고, 오랜 정이 묵어있다는 것, 그리고 그 마을길이 굉장히 사랑이 넘치는, 묵은 사랑이 꾸준하게 이어지는 그 모습을 한꺼번에 술 익는 마을로 그렇게 표현을 했거든요. 근데 그 술 익는 마을에 KTX철도 공사한다고 되어 있거든요. 그것도 한 가운데에. 대뜸 보상금을 주고 나가라고 합니다. 아마 공사하게 되면 그 마을 한 가운데는 완전히 집들이 뜯겨나가겠죠. 남아 있는 집들에 개가 있을 것이 아닙니까? 근데 토목공사 한다고 오면 개들이 짖겠죠. 개가 왕왕 짖든지, 멍멍 짖든지 간에 KTX철도 회사에서는 공사를 밀어붙입니다. 우리는 술 익는 마을에 속았어요. 우리는 과거 옛날의 소박한 그 꿈이 있어요. 그 꿈의 한 가운데를 주님의 율법이 확지나간다면, 주님의 법이 지나간다면,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이럴 수가 있습니까? 라고 할 때, 주님은 무슨 개소리야! 라고 하시겠죠. 무슨 소리야? 지금 주께서 이렇게 밀어붙이면 밀어붙이는 것이지, 댁들의 사정을 고려할 바가 못 되죠. 하나님 나라가 그런 거예요. 제가 오늘 강의하면서 결론을 뭐라고 내려고 하느냐 하면, 이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가까운 것이 아니고, 이 서기관 속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 나라가 나오는 겁니다. 시작되는 거예요. 결국 논리적으로는 그렇게 돼요. 하나님 나라가 어디서부터 시작되느냐 하면 예수님부터 시작이 돼요. 예수님부터 시작이 되는데, 우리가 보통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잖아요. 그리고 오늘 본문도 니가 하늘나라에 멀지 않다고 했다 이 말이죠. 그러나 예수님과 단짝이 되는 이 사람을, 실제로 이 사람을 다루게 되면, 이 서기관이라는 별 볼일 없는 사람도, 거기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 나라의 정수, 본질이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한 인간을 통해서 하늘나라가 나와요. 이 소자한테 한 것이 누구한테 한 것이다? 곧 나한테 한 것이다. 이게 나온다 이 말이죠. 그게 바로 사도행전에 있지 않습니까?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이야기 나오죠. 우리는 헌금을 반만 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그 부부를 다 죽인다고 하는 것이 너무 과도한 처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누구나 갖고 있어요. 그래서 그 본문에 보게 되면 죽고 난 뒤에 그 교인들이 굉장히 두려워한다고 했어요. 이러려고 우리가 교회가 나왔나? 하루아침에 둘 다 하나님 앞에 벌 받았다고. 그때 들었던 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해보세요. 왜 그렇게 죽었느냐 하면, 사탄하고 의논했기 때문에 그랬다는 거예요. 악마하고 의논해서 교회헌금을 집어넣은 거예요. 그러면 악마하고 의논한 그 내용이 나와요. 뭐냐 하면 “반은 감추고 반만 내자.” 이게 악마하고 의논한, 사실은 부부하고 의논한 것이지만. 베드로는 그렇게 보지 않고 니가 악마의 사주를 받아서 그렇게 했다고 보거든요. 그러면 베드로의 말이 맞는 거죠. 헌금 반만 내자고 한 겁니다. 거기서 우리가 뭘 봐야 하느냐 하면, 무엇을 내자는 것, 또는 하나님 앞에 무엇을 드리자, 보통 헌금이나 헌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게 인간에게 성립이 되느냐 하는 겁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 앞에 향유를 드렸습니까? 깨트려 버렸습니까? 향유를 버려버렸죠. 예수님 발에다가 깨트렸죠. “예수님 향유 이거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주세요.”라고 안 했죠. 향유병이라는 그것을 예수님 발 앞에 깨트려버렸잖아요. 그거 향수 모으는데 자신의 청춘을 다 바쳤잖아요. 그럼 향수병을 예수님 발 앞에 깨트린다는 것은 뭘 깬다는 말입니까? 자기 자신을 깨는 거예요. 왜 깨는가 하면 내가 건방지게 주님 앞에 드린다는 것조차도 나한테는 그런 권리도 없고 그런 입장도 아니고 그런 자격도 안 되고 그런 존재도 아니라는 거예요. 주님 계신다면, 방해물밖에는 안 되는, 나는 주님 앞에서 주님의 돋보임을 어떤 식으로 하느냐 하면, 주님 앞에서 작살나고 박살나는 그것이 주님 앞에 나의 합당한 모습이라는 겁니다. 이게.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뭘 했습니까? 주님을, 하나님을 뭐로 보느냐 하면 같이 맞먹을 대상으로 본 거예요. 평소에 인간이 인간에게 정을 베풀 때 뭡니까? “아이고, 이사 왔는데 떡 드셔볼래요.” “이거는 우리의 성의니까 포도 드세요.”라고, 이렇게 주잖아요. 준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동등이라는 것, 주고받음의 관계가 성사가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그렇게 하거든요. 그게 베드로가 보기에 사탄과 평소에 인간 대 인간이 의논하는 행세, 인간을 사귀고 노닥거리는 그 행세를 그대로 하나님 앞에 한 겁니다. 하나님 앞에. 그게 말이 되느냐는 겁니다. 인간 대 인간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좋은 사회를 만드는데, 교회가 인간 대 인간이 사귀는 그 정도로 밖에 안 보이도록 마귀가 그렇게 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끝 절에는 바나바는 다 바쳤잖아요. 그럼 우리도 바나바처럼 다 바쳐야 됩니까? 아니에요. 우리는 주님 앞에 바칠 자격도 없고, 바칠 입장도 못 됩니다. 죄인이 뭘 바쳐요? 죄인이. 죄인이 뭘 바칩니까? 인간은 뭔가 바치고 난 뒤에는 반드시 내가 바쳤다, 라고 하거든요.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알아버린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이번에 책을 쓰면서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그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의 생포된 실험실의 시료에요. 시료. 교회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들을 잠시 발을 담갔다가 빼게 한 거예요. 악마는 교회에 들어오면 안 된다. 이거는 누구나 아는 문제죠. 거룩한 교회에 악마가 있을 수 없잖아요. 그러나 실제로 악마가 들어왔다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우리가 뭔가 내서, 하나님 앞에 드려서, 그걸 뭉쳐서 교회를 만들자. 이게 바로 뭐냐 하면 교회를 훼방하는 짓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사도행전 5장에서 베드로가 한 이야기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교회는 누가 만든다? 인간이 바쳐서 만드는 것이 아니고, 그냥 성령이 만드는 거예요. 어떤 식으로? 악마적인 것을 내쫓음으로서. 악마적인 요소를 노출시킴으로서. “이게 악마적인 것이야.”라는 것을 노출시키면서 교회를 만들어나가요. 그래서 강의에서 했잖아요. 베드로가 전도할 때 삼천 명, 오천 명 믿었죠. 도를 전하니까. 그 삼천 명, 오천 명 숫자로 부르는 게 아니에요. “아! 우리는 죽어도 괜찮네.”라는 그게 삼천 명, 오천 명이에요. 그래서 그들은 핍박을 겁내지 않았던 겁니다. 성령이 함께하니까. 사람이 걱정하고 근심하고 두려워한다는 것은 이 자리에 누가 있다는 말입니까?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거예요. 내가 여기에 있죠. 그래서? 그래서 그게 뭔데? 내가 여기에 있다고 한다는 것은 지금 내 대화상대를 누구로 잡았다는 겁니까? 나 외에 아무도 대화상대를 안 잡는 거예요. 지금. 나는 여기에 있다. 나는 누구보고 이야기를 할 거야. 나는 여기 있는 나보고 이야기를 할 거야. 그러니까 그런 사람에게 이 법이라는 자체는 아주 무시가 되는 거예요. 근데 법이 뭐냐 하면 법이 곧 현실이거든요. 성경에서 이야기하면 법은 곧 현실입니다. 따라서 법을 무시했다는 것은 뭐냐 하면 현실은 놔두고 엉터리 현실에 완전히 푹 젖어 있다는 것입니다. 엉터리 현실은 망상이죠. 망상에 빠져있다는 거예요. 근데 이 망상을 누가 자꾸 조작을 하는 겁니까? 너한테 몰두하라고 누가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건 바로 마귀가 그런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마귀가. 다시 한 번 정리해봅시다. 예수님과 대화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서기관이 대화하는데, 서기관이 누구한테 물었습니까? 질문 자체를 누구한테 한 겁니까? 예수님한테 최후의 법이 뭡니까? 라고 물었다는 자체가 이 법과 누구하고 관련이 되어 있다? 예수님과 관련되어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만이 정답을 안다고 이 서기관이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정답을 아는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이 현실을 만들었기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도 같이 아울러서 그 사람이 인정을 하고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34절에, 니가 하나님 나라에 멀지 않도다, 라고 했을 때에 이 서기관이 ‘아이고, 뭐 주님이 괜한 소리를 하네.’라고 이렇게 생각을 했겠어요? 아니면 이걸 사실로 받아들였겠습니까? 사실로 받아들였겠죠. “아이고, 뭐 그렇게 과도한 칭찬을 안 해주셔도 되는데, 그냥 한소리 했는데 그냥 넘어가시죠.” 이게 아니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그게 실제로 현실이 되는 거예요. 여기서 하나님 나라는 이미 예수님과 대화가 되는 사람만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과 대화가 된다는 말은 예수님에게 꽂혀있다는 말이에요. 예수님에게 꽂혀있다는 말은 누구한테 꽂혀있지 않다? 나한테는 별로 안 꽂혀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실제로 현실은 법이 시행되고 완성되는 것이 현실이지, 나 여기 있음이 그게 현실의 조건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서기관은 지금 율법이 있고 계명이 있다는 것을 아주 진지하게 생각을 하는 겁니다. 진지하게. “우리가 법 지키면 되지.” 이게 아니고, 법 자체에 법 지키시는 분이 따로 있음을 이 서기관이 이걸 알게 된 거예요. 법 자체에 법을 지키시는 분이 따로 있음을. 어떻게 해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이거죠. 그런데 이 말에 서기관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32절,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이 말은 다른 이가 있더라도, 그 다른 이들은 누구만 쳐다봐야 한다? 하나님 한 분만 쳐다봐야 한다는 겁니다. 왜 쳐다봐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그 모든 말씀의 실현은, 완성되는 것은, 완료되는 것은, 그것은 한 분이신 하나님의 개입이 없이는 이게 성사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점을 이렇게 설명하면, 보통 율법의 시작은 모세부터 시작이 되죠. 모세율법. 그럼 그전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는 그냥 나타나지 않아요. 반드시 하나님의 법을 들고 나타납니다. 그걸 언약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언약,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하는 이런 것도 언약이 아닙니까?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그 말씀을 딱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걸 누가 이야기했느냐 하면 하나님이 이야기를 했죠. 그러면 하나님이 이야기를 했다는 말은, 그 법을 실없이 그냥 던져놓고 책임도 안 지고 나는 모른다고 그렇게 돌아서버립니까? 아니면 그 법과 모든 피조세계가 그 법안에서 만나겠다는 겁니까? 하나님께서 만나겠다는 이야기잖아요. 피조물을 대할 때 그냥 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그 말을 드리는 거예요. 인간을 대할 때나 세상을 대할 때나 그냥 대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먼저 던져준 것이 있다는 거예요. 던져준 것 안에서 만나는 겁니다. 그러면 던져 준 것 안에서 할 때, 인간이 있고 하나님께서 뭘 주신다? 하나님께서 그냥 맨손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법을 들고 나타나죠. 모세가 애굽에 갈 때 그냥 간 게 아니에요. 여호와의 뜻을 가지고 애굽에 등장해가지고, 애굽 바로왕과 애굽 백성들을 작살내놓았습니다. 모세 개인적인 어떤 감정으로 된 게 아니잖아요.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법을 줄 때, 사람들은 하나님이 법을 인간에게 줬다 이래 하잖아요. 그런데 아브라함 같은 경우를 보세요. 모든 인간이라면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의 법을 아브라함에게 주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법을 줬다는 말은 하나님의 그 법이 누구의 몸을 통해서 계시가 된다는 말이죠? 아브라함의 몸을 통해서 계시가 되는 거예요. 아브라함의 몸을 통해서 나온 계시가 뭐냐 하면 바로 번제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할 때 그냥 맨입으로 약속을 한 게 아니죠. 3년 된 암소, 수양을 했죠. 번제를 드리고 그 제물들을 두 도막을 내서 그 속을 보이고 횃불이 지나가도록 지키고 그렇게 다 했잖아요(창15장). 그러니까 이거는 법이, 아브라함의 몸을 통해서 법이 계시가 되는 겁니다. 하늘나라는 어디에서 시작이 되느냐 하면, 하늘나라를 이야기 할 때 예수님께서 첫째 계명, 둘째 계명을 이야기했죠. 그러면 하늘나라의 구체화는 어느 몸을 통해서 구체화가 되는 겁니까? 예수님의 몸, 본인의 몸을 통해서 구체화가 되는 거예요. 법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잖아요.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잖아요. 우리에게, 그냥 인간에게 준 것이 아니에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그렇게 언급하는 예수님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표준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 죽으심 그게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이고, 그것이 아버지는 오직 한 분인 것을 증거 하는 유일한 증거가 되고, 이웃 사랑의 유일한 증거는 예수님이 십자가 죽으심이에요. 그러면 그 법 안에서 무엇이 무엇으로 이동을 해야 하느냐 하면, 법을 받은 인간이 지킨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킨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키는 그 방식은 누구와 대조가 되고 대비가 되겠어요? 그렇게 이야기를 하신 예수님의 살아가심과 본인이 살아가는 것과 대비를 시키는 가운데서 법의 완성이 어떻게 구현되는가를 대비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아주 극단적인 예를 든 적이 있잖아요. 어느 강의에서. 3더하기 5는 뭐다? 라고 선생님이 하니까, 어떤 학생이 손을 들고 3더하기 5는 8이라고 했어요. 근데 선생님이 틀렸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학생이 당황하면서 틀렸다고? 그럼 선생님 3더하기 5는 에이트(eight)입니다. 틀렸어! 이상하다? 이상하다? 8이 아니라니? 7은 아니고. 그럼 선생님 정답은 뭡니까? 선생님이 3더하기 5는 8이야. 이렇게 하거든요. 그럼 맞잖아요. 아니야. 그건 니가 말한 거잖아. 니가 8이라고 날렸잖아. 지금 이상하게 억지 같은 느낌이 들죠. 선생님이 8이라고 해야 이게 정답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제사를 드리라고 해서 제사를 드렸고, 할례를 행하라고 해서 할례를 행했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했더니만 추가적으로 주어진 것이 있어요. 뭐냐 하면 이삭을 줬어요. 이삭을. 이삭이 나타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시키는 대로 아브라함은 움직였어요. 시키는 대로. 시키는 대로 움직였으면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해요. 그러면 하나님 1, 아브라함 1, 그래서 2만 있으면 되죠. 법에 둘만 있으면 되죠. 근데 이삭은 생뚱맞게 등장한 겁니다. 그건 제 3의 요소가 돼버리죠. 하나님께서 번제 드리라고 하면 번제드릴 수 있어요. 그럼 제물은? 양 잡아라! 그럼 양잡죠. 평소에 아브라함이 했던 거니까. 근데 이번에는 뭘 집어넣어요? 평소에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가능한 것 같으면 할 수가 있는데, 거기에 뭘 집어넣느냐 하면 주께서 미리 제공하신 제 3의 요소를, 1과 1, 너와 나 사이에 제 3의 요소를 집어넣으라는 겁니다. 이거는 뭘 차버리느냐 하면 이삭이 없이, 하나님과 나하고 우리끼리 해서 법 지키겠다는 그것을 주께서는 거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법을 주신 그분의 법안에서 보게 되면, 내가 너희에게 법을 줘도 법을 받은 너는 그 법의 속성과 본질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법을 준 거예요. 이제 남은 것은 뭐냐 하면 어떻게 해서 모르느냐의 문제와 인간이 몰랐지만 그 모른다는 것을 어떻게 하나님께서 천국에 집어넣는가 하는 그 문제가 남았거든요. 어떻게 집어넣느냐 하면 하나님 쪽에서 제시한 제 3의 요소가 등장해요. 이삭이죠. 그걸 이삭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 자신으로 봅시다.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이 주신 그 법을 이루기 위해서 스스로 몸소 이 땅에 오셔서 누구 손에 의해서? 스스로 몸소 법을 지킬 수 없는 인간의 손에 의해서, 없는데서 생긴 제 3의 요소를 드러냄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하나님의, 여기 오늘 본문에 나오듯이 하나님의 유일하심의 그 진수를 보여주는 겁니다. 유일하심. 하나님이 한분이심의 진수를 보여주는 거예요.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한분이에요. 하지만 그것을 중간에 인터셉트, 가로채기 하죠. 누가요? 지금 서기관이 누구한테 물었어요? 예수님한테 물었죠. 예수님한테 물었을 때에 니가 참 똑똑하구나!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니가 하나님 나라에 멀지 않도다, 라고 이렇게 판정을 내렸잖아요. 예수님이 그렇게 판정을 내릴 자격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법주고, 그러면 이거는 내가 지키면 된다. 첫째 하나님 사랑하고 둘째 이웃사랑하고 지키면 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가 멀지 않다고 한다면 그 말은 그냥 덕담일까요? 격려차 말하는 겁니까? 아니면 내가 넣어주면 너는 그냥 들어간다는 겁니까? 어느 쪽입니까? 실제로 이 말씀을 이루신 분이 누구냐,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왔느냐, 이 두 말씀(첫째 계명, 둘째 계명)을 예수님이 자신이 십자가로 다 이루셨다는 것을 하시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그렇다면 이 서기관이야기가 왜 들어 있느냐 하면, 제자들이나 오늘날 우리를 보고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하면은,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할 때 우리는 그 앞에서 나라는 존재는, 이거는 없어져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뭐만 주목하느냐 하면 예수님과 그 율법의 관계만 우리가 주목해야 해요. 그 오시는 제 3의 요소의 예수님이, 하나님이 던져준 그 법을 어떻게 일괄해서 혼자 독자적으로 그걸 다 이루어내시는가, 그것에 주목해야 해요.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처럼 자기의 향수를 과감하게 주님 발 앞에, 자기의 인생 자체를 깨트려도 오히려 속이 시원하죠. 쓸데없이 가져가봤자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는 내 인생, 그 인생 어디에 써먹을 겁니까? 장로님 인생 어디에 써먹을 겁니까? 별다르게 써먹을 데가 있습니까? 율법도 못 지키면서 어디에 써먹을 겁니까? 있어봐야 술 익는 마을에 개밖에 안 돼요. 주께서 하시는 일에 방해하는, 멍멍 짖어가면서 이 좋은 우리 마을에 평화를 지키겠다고, 우리 가정이 어떤 가정인데 주님이 들어와 가지고 개판이 다 됐다고, 제사도 못 드리고 집안끼리 사단 났다고, 왕왕 그거밖에 안 되거든요. 하여튼 십자가마을 중간에 KTX철도길이 나야 돼요. 이러시면 안 된다고 누가 개처럼 짖는지를 한번 봐야 돼요. 오늘 본문이 난해한 점이 있어요. 여기 하나님이 한분이라는 것이 첫째거든요. 그러면 둘째 계명에 있어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뭐냐 하면 이게 우산법칙입니다. 작은 우산을 큰 우산이 덮는 거예요. 이것 지키고 이것 지키는 것이 아니고, 첫 번째 큰 계명에서 파생된 계명이 이웃사랑 계명이에요. 우리 하나님이 유일한 주죠. 그러면 내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사랑한다는 말은 지금 초점이, 시선이 어디에 가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에게 가있죠. 하나님에게. 그러면 그 두 번째 계명의 이웃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서 파생되어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이웃이라고 하는 그 이웃의 경우에만 그게 이웃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 쳐다보다가 이웃 쳐다보면 시선이, 초점이 틀어지잖아요. 인간이 두 곳을 동시에 볼 수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쳐다보다가 다른데 쳐다보면 하나님을 안 쳐다보게 된다 이 말이죠. 따라서 하나님을 쳐다본다는 것은 하나님 쪽에서 유일하신 한분이죠. 그러면 유일하신 한분이라는 것은 뭐 다른 것을 볼 필요도 없고, 다른 것을 신경 쓸 필요도 없고 주님이 하신 일만 쳐다보면 된다는 그런 뜻이라 이 말이죠. 그런 뜻이면, 그 주님만 쳐다본다면 우리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어디를 안 쳐다봐야 해요? 내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에 관심 둘 필요도 없어요. 주님 쳐다보고 나 쳐다볼 수 없다 이 말이죠. 거기에 꽂혀버리면. 한분이신 주께서 법을 줬다는 말은 그 법만 줬다는 게 아니에요. 뭔가 자꾸 계시하잖아요. 계시가 되는 거예요. 아브라함의 예를 들었지만, 아브라함이 순종을 다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일에 전부다 커트를 했잖아요. “안 돼. 거기로 가지 말고 이리로 가야 돼. 그거 보지 말고 이거 봐야 해.” 자기 부인을 누이동생으로 거짓말해가지고 이렇게 자기 목숨 살리려고 할 때에 거기에 누가 개입을 합니까? 유일하신 하나님이 개입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아브라함 몸 자체가 법의 완성으로 보여 지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아브라함 몸 자체가. 아브라함이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몸 자체를 하나님이 지상에 남기고 싶은 제 3의 요소로 만들고 싶은 거예요. 실제로 아브라함의 몸을 통해서 누가 나왔습니까? 이삭이 나왔죠. 아브라함의 몸이 있는데 여기서 이삭이라는 자식이 나왔습니다. 이거는 아브라함이 예상을 했습니까? 예상 못했습니까? 예상 못했죠. 얼마나 예상을 못했으면 아이 이름을 웃음이라고 짓겠습니까? 웃음으로. 예상 못한 거예요. 예상 못했는데 나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기분이 좋아서 웃는 것도 되지만, 이거는 정말 황당한 일이라는 의미에서 웃음이 될 수도 있어요. 이삭이 나왔을 때에 이거는 일종의 아브라함을 감시하는 감시자 역할 하는 것밖에는 안 돼요.왜냐하면 아브라함이 율법을 지켜서 이삭이 나올 수가 없기 때문에. 법을 줬다면 법에 맞는 결실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결실. 이 결실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그냥 하나님께 당하기만 한 거예요. 아브라함을 통해서 결실이 나온 겁니다. 이삭이 나온 거예요. 이삭이 나왔을 때 아브라함의 언약이, 아.언이 뭐로 바뀌겠습니까? 이삭언약으로 바뀌겠죠. 이.언으로. 그러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일하시고, 모든 법을 홀로 일하신다는 그 증거를 아브라함은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뭐가 대신하느냐 하면 이삭의 인생이 아브라함의 인생을 대신하는 겁니다. 호랑이는 가죽에 줄무늬가 있지만 인간은 내부에 줄무늬가 있다고 이야기했어요.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라는 여류작가가 쓴 이야기를 보면 나와요. 그 사람이 쓴 책 제목이 <오래된 미래>라는 겁니다. 티베트 히말라야 산맥에 있는 아주 한적한 마을에 들어가서 문명과 뒤떨어져 사는 그들이 얼마나 행복하냐? 그걸 관찰해서 다큐멘터리로 쓴 소설이거든요. 소설이 아니고 보고서라고 할 수도 있지만. 오래된 미래라는 뜻이 뭐냐 하면 미래의 삶이 사실은 이런 식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아니냐는 뜻에서 벌써 온 미래, 우리가 지향될 그 목표를 이 마을은 벌써 시작하고 있다는 것에서 오래된 미래입니다. 근데 그 오래된 미래가 얼마 안 가서 청바지 입고, 세상에! 우리끼리 있으니까 이렇게 가난한 줄 몰랐다, 젊은 애들이 반항하고, 완전히 문명화되어 버렸어요.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어요. 호랑이는 이렇게 외형적으로 가치를 보지만 인간의 내부에는 호랑이의 연륜을 보여주는 그 줄무늬가 인간 속에 있다고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법을 지키게 하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을 택할 때부터 아브라함 속에, 진정 율법을 완성한 분이 아브라함 속에 있도록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공작하는 거예요. 공작. 공작하니까 영화제목 같은데. 흑금성. 아브라함 속에 뭘 만들어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 나라에요. 예수그리스도의 나라에요.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입니다. 우리 안에 마리아처럼 잉태시키는 겁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어떤 인간도 하나님에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말씀을 지킬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어떤 인간도 내 몸같이 이웃을 사랑할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우리 안에 예수님이 오셔서 첫째 계명, 둘째 계명을 다 이룬 겁니다. 그 이룬 보상으로 주어진 것이 의가 되는 거예요. 우리 성도가 하늘나라에 가면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 되죠.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 그렇게 죄인을 의인되게 하는 작업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이미 하늘나라가 있는 거예요. 우리 안에. 주님 안에는 물론이고 성령 받은 우리 안에도 역시 하늘나라가 있습니다. 하늘나라 꼬라지하고는 뭐 그렇습니다만.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어떤 작업이 일어나느냐 하면, 엉뚱한 것을 봤던 우리가 성령에 의해서 제대로 정방향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기 위해서 마가복음 12장에 우리의 표준 모델처럼 서기관이 등장한 거예요.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 보면, 서기관은 지금 누구하고 대화한다? 오직 주님하고 대화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지금 서기관은 요구하지를 않아요. 우리는 매일같이 요구하고 있는 것이 왜 그렇게 많은지. 지금 관심사가 엉뚱한데 가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자꾸 달라고 하는 거예요. 얼마를 바치면 이거 주시겠습니까? 하는 거예요. 얼마나 헌신하고 얼마나 기도하고 얼마나 성경 보면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겠습니까? 이래 되는 거예요. 관심사가 뭐냐 하면 자기가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서기관은 뭡니까? 지금 똑바로 예수님을 보고 대화하고 있는 거예요. 서기관은 누구한테 꽂혔어요? 주님한테 꽂힌 거예요. 자기 자신은 그야말로 막달라 마리아처럼 모든 것을 다 주님한테 깨버리는 겁니다. 나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거예요. 나는 내 인생이 어떻게 되어도. 주님 쳐다보기를 이렇게 보는데 나는 어떻게 되든 관계없죠. 이게 바로 이웃 사랑이고 이게 바로 주님 사랑 아닙니까?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존재만 느껴지는 게 사랑이잖아요. 둘이 부부십니까? 둘이 부부죠. 처음에 결혼할 때 누구만 봤어요? 상대만 봤잖아요. 상대만. 자기 옆의 상대만 봤죠. 그런데 결혼식 하면서 주례사 바라보고, 미국 같은데 보면, “자 반지 교환하세요.” 하면 “싫어요.” 결혼식 꼴이 좋겠다. “서로 사랑하십니까?” “아니요.” 아마 그런 결혼식은 없을 겁니다. 그런 결혼이라면 할 필요가 없죠. 결혼식 때 남자도 울고 여자도 울고, 이렇게 우는 이유는 어떻게 나 같은 자에게 하나님께서 저런, 물론 하나님을 거론하지 않지만, 이렇게 귀한 분이 나 같은 자에게 같이 살자고 한 것만도 감격스러워 우는 거예요. 너무 철이 없어서 그렇겠지만. 하여튼 감격스럽죠. 아직까지는 상대를 모르고 일방적으로 본인이 해석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남자 같으면 저런 여자를 준 존재, 그게 아까 제 3의 요소 존재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거죠. 3초는 더 갈 거예요. 아마 3일 갈 거예요. 신혼여행 갔다가 오면 생각이 바뀔 수가 있으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철저하게 나라는 존재가 의식되지 않는 거예요. 그러면 나라는 것이 의식되지 않으면 내 안에 호랑이, 호랑이도 아니에요. 호랭이 같은 줄무늬가 내 안에 있어야 돼요. 제 3의 요소가 내 안에서 잉태되어가지고 꿈틀거리고 있어야 된다 이 말이죠. 제 3의 요소가. 그리고 제 3의 요소를 내가 다루거나 관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에요. 반대가 되었어요. 제 3의 요소가 나를 인도하고 다루고 관리하고 조절해야 돼요. 잘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고 아예 우리를 없애버린다니까요. 나라는 존재를. 심지어 내가 죽는 것도 나한테는 시시한 일이 돼버리는 거예요. 시시한 일. 내가 죽는 것도. 내가 죽는 것도 시시하고 중요하지 않은데 남이 죽는 것은 뭐가 중요하겠어요. 가까운 사람이 죽었다고 애걸복걸하고 통곡하는 것은 지금 누굴 사랑했다는 겁니까? 그 사람에게 정 주었던 그 정이 다 날아가는 거예요. 잃어버린 거예요. 투자하고 공들였던 것이 날아갈 때, 내 것이 빼앗겨서 그래서 통곡하는 겁니다. 내 것이 빼앗겨서. 정 주고 마음 주고 사랑도 줬지만 지금은 뭐가 되고? 남이 되어 떠나갔느냐? 요새 같으면 데이트 폭력이죠. 정주고 마음 주고 사랑도 주고 다 줬어요. 다 줬는데 누가 등신이 됐어요? 혼자 등신된 거예요. 혼자. 주의 뜻은 뭡니까? “사람 잘 만났네. 왜? 그 사람이 안 떠나면 니가 애초부터 등신이라는 것을 모를 뻔 했잖아.” 처음부터 우리는 점수 줄 이유가 없어요. 점수주거나 채점의 대상도 안 돼요. 그런데 우리는 평생에 나한테 매일같이 점검합니다. 측정합니다. 제가 어느 설교해서 그런 이야기를 했죠. 오랜 만에 아멘소리 들었던 대목이에요. 여자는 날마다 남자를 테스트한다고. 여자는 뭐냐 하면요, 여자란 먼저 이야기를 안 해요. 남자가 하는 것이 내 마음 속에 둔 것하고 일치가 되는 것인지 늘 점검해요. 여자가 뭐하라고 하면 남자가 해주면 되는데, “니가 알아서 해봐라. 니 아직도 내 마음 모르나?” 딱 전제한다고요. 뭐 하나 해주면 “내가 언제 그거 해달라고 했나?”라고 이런 식으로 나와요. 남자는 환장합니다. 해주고 싶어도 확 들이밀고 싶어요. 왜냐하면 여자는 저 남자가 진짜 하나님이 보낸 남자라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진짜 내 남자라면, 운명적으로 내 남자라면 내가 무슨 생각을 갖고 있고 뭘 원하는지를 다 알아서 맞출 것이다. 그럴 때 나는 저 남자에게 모든 것을 다 바칠 가치 있는 남자라고 여자 쪽에서 자꾸 측정을 해요. 그렇지 않으면 안심을 못하니까. 먼저 들이대다가는 남자가 이용해먹을 생각을 하니까 끔찍하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이 개입하면 맞출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남자는 그걸 맞춘다고 삐질삐질 땀을 다 흘리고 있어요. “이거야?” “아니야.” “그럼 이거야?” “아니야.” 중국집에 가면, “뭘 시킬까?” “니 나 모르나?” “여기 짬뽕 둘요!” “내가 언제 짬뽕 먹겠다고 했냐? 당신이 그렇게 평소에 나를 모른다는 거야. 내가 언제 짬뽕 좋아한 것 봤어?” “그럼 짜장면 둘요!” “그래, 생각하는 꼬라지 좀 봐라. 니한테는 짬뽕하고 짜장면밖엔 없지?” 먹기 전에 벌써 밥맛이 다 떨어져버려요. 먹기 전에. 외식하러 나가면서 싸우고 외식하면서도 싸우고 외식하고 들어오면서도 싸울 참이에요. “그럼 뭐? 뭐?” “지금 묻는 것 좀 봐라. 우리끼리 산 세월이 얼만데 묻는 것 좀 봐.” “그럼 여기 탕수육요!” “돈이 얼만데, 자기 돈 아니라고!” 남자는 또 생각합니다. 사천원 내외에서 탕수육은 빠지고, “아, 군만두요!” “또 지가 먹고 싶은 것만 시키지.” “그럼 어쩌라고?!” “몰라! 하여튼 간에 평소에 생각하는 꼬라지하고는..”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그래, 니가 내 생각했나? 그래 좋겠다. 옛날 첫사랑 동창생 생각하고..” 갑자기 다 튀어나온다고요. 지금 시작이 뭐였습니까? 메뉴 고르다가 옛날 남자의 첫사랑까지 다 나오고, 지나간 이야기를 다 끄집어낸다고요. 시비를 걸러 왔는지, 외식을 하러 왔는지 분간이 안 돼요. 여자의 마음은 뭐냐 하면 당신 안에 내가 들어있는가를 묻는 거예요. 테스트가. 근데 여자는 남자들한테 그 테스트를 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천국가면 시집도 아니 가고 장가도 아니 가요. 이 땅에서는 사실상 부부라는 것이 망상이고 거짓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부부되게 한 겁니다. 사랑의 대상이 아니에요. 망상인데 무슨 사랑의 대상이 되겠습니까? 오직 뭐만 봅니까? 주님만 바라보게 되면, 주께서 남자역할, 여자역할 하라고 같이 붙게 한 거예요. 둘이 싸우든 찢든 말든 간에. 그게 바로 두 번째 강의해서 해야 될 사회라는 겁니다. 사회가 어디서 나왔는가? 이 법에서 망상을 도용해서 사회가 나온 겁니다. 이 망상의 주체는 뭐냐, 인간의 몸입니다. 이 몸과 예수님의 몸, 하나는 지옥이고 하나는 천국입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