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강-YouTube강의(낯선 사람)20180821-이 근호 목사
247강-YouTube강의(낯선 사람)20180821-이 근호 목사 제 247강, 제목은 ‘낯선 사람’입니다. 옛날부터 낯선 사람은 위험해요. 왜냐하면 사람은 누가 오게 되면 이익이냐, 손해냐를 판단하기 때문에, 낯선 사람은 내가 아는 정보량이 빈약해요. 그래서 친절하게 왔다가도 내 뒤통수를 칠 수도 있고 뒤에서 칼질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인간의 존재하는 모습을 구약 창세기에서 자주자주 언급했어요. 뭐냐 하면 창세기 20장, 21장에 쭉 나오는 인물이 있죠. 아브라함인데, 아브라함 자체가 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이렇게 쪼개면 그 안에 하나님이 들어있어요. 그걸 좀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있다는 말인데, 언약이 들어있다는 말과 하나님이 들어있다는 말은 같은 말이에요. 왜냐하면 언약은 아브라함이 성취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 성취하기 때문에 그래요.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 특징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제물을 둘로 쪼갰다는 겁니다. 제물의 속살을 드러낸 거예요. 제물의 속살을.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다룰 때에, 아브라함의 속살을 드러내는 식으로, 앞으로 너를 이끌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어떤 위치에 있느냐 하면 육과 영의 두 가지 요소가 다 중첩되어 있는 사람이에요. 중보자죠. 그 당시 중보자입니다. 육이 뭐며, 그리고 그 다음 영이 뭐냐, 두 가지가 다 들어있어요. 그런데 순서는 이렇습니다. 육과 영이 같이 동반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육을 충분히 아예 밟아버리죠. 육의 한계를 충분히 드러내면서, 순서가 육이 먼저 나오고, 육이 철저하게 밟혔다고 하는 그 현장에 준비해놓은, 숨겨진 영이 그 뒤에 나와요. 영이라고 하는 것은 신약적인 용어니까, 구약적인 용어로 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그 뒤에 나와요. 그래서 아브라함을 유념해서 봐야 됩니다. 아브라함이 그쪽 동네에 갈 때는 어떤 사람으로 가느냐 하면 낯선 사람으로 가야 돼요. 왜냐하면 자기가 살던 고향이 아니에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그쪽 사람에게 어떤 대우를 받느냐 하면 나그네 대접을 받습니다. 그리고 자기 소유의 땅이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자기 소유가 없는 아브라함을 언약이라는 사건을 일으켜서 소유가 없었는데 땅의 소유주로 제공해줘 버려요. 그러면 땅이 제공되었을 때에 그 다음 문제는 뭐냐 하면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은데 자식이 없죠. 자식이 없는 상태에서 땅을 가져봐야 소용이 없어요.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죽고 난 뒤에 유산으로 땅을 줄 사람도, 그 땅에 살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안 되겠죠. 땅을 주고 그 다음에 뭐냐 하면 자식을 아브라함에게 제공하는 겁니다. 그러면 아브라함과 그 자식, 이삭입니다. 그 사이에 또 무슨 원리가 주어지게 되느냐 하면 낯선 사람이라는 원리가 또 주어져버려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부름 받을 때에 자기 고향에서는 잘 나가는 사람이었죠. 근데 거주지를, 완전히 아브라함이 알지 못하는 동네로 이전을 해버립니다. 그러면 졸지에 아브라함은 그쪽 사람에게 낯선 사람이 돼버립니다. 거기서 낯선 사람 만들기 작업이, 그 다음에 아브라함 자식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이 돼버려요. 그러면 아브라함 입장에서 이삭이 낯선 존재가 돼버립니다. 흔히 아브라함이야기를 하면서 사람들은 이렇게 하죠. 아브라함이 누구를 대접했다고 이야기를 합니까? 낯선 사람을 대접했다고 하죠. 왜? 천사 세 명을 대접했잖아요. 왜 대접했을까요? 같은 처지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이 땅에서, 지금 아브라함이 거주하는 땅에서 전에 자기도 낯선 사람 대우받았거든요. 근데 하나님께서 작용을 하니까, 아브라함을 낯선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작용했기 때문에, 거주민들이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대접을 한 거예요. 그러면 그 경험을 아브라함이 갖고 있다 이 말이죠. 자기가 그렇게 해서 지금 살 수 없는 땅에 거주하고 있다면, 자기 앞에 천사 세 명인지 사람 세 명이 왔다면, 나그네잖아요. 그 나그네를 대접할 때, 아브라함이 자기의 옛날 처지를 생각해서 그 사람들에게 아주 친절을 베푸는데, 약간 오버성, 과하다 할 정도로 친절을 베풀어요. 동질성을 느끼는 거예요. 언약을 아는 사람의 특징이 하나님이 주신 어떤 같은 동질성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말이 좀 어려워집니다. 오늘날 성도가 둘이 이야기를 한다. 목사님하고 이야기를 한다고 하면, 이야기할 때 세상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하는 어떤 차이점이 있어야 해요. 어떤 차이점이냐 하면 내가 만들지 않은 것을 주제로 끄집어내야 하고, 목사님은 내 말을 받을 때 목사님이 만들지 않은 주제를 가지고, 이 땅에 없는 것을 가지고 대화가 되어야 해요. 그게 뭘까요? 그게 바로 복음이죠. 만약에 내가 목사님하고 대화를 할 때, “나는 이렇게 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라고 하는 그거는 대화가 안 되죠. 그 사람하고는 대화가 안 됩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만들어냈잖아요. 교회 가서 목사가 시키는 대로 만들어냈잖아요. 그러면 거기에 맞장구를 친다면 그쪽도 만들어내겠죠. 그러면 무슨 요소가 없어지느냐 하면, 우리 둘 다 만들지 않았다는 요소가 빠지겠죠. 그러면 우리 둘 다 만들지 않았는데 만약에 구원을 받았다면, 구원의 입장에서 우리는 나그네가 되는 거예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그 원칙이 나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고 목사님에게도 공히 주어진 거예요. 그러면 우리 둘이 이야기를 할 때 심지어 영화이야기, 드라마이야기해도 괜찮아요. 프로야구이야기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 의미는 어디와 연결시키느냐 하면 바로 우리가 나그네 입장에서 프로야구이야기 하는 겁니다. 나그네 입장에서 드라마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성도와의 대화입니다. 동질성을 느끼는 거예요. 이 동질성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친구라고 합니다. 좀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형제라고 하고 다른 말로 하면 자매관계에요. 그래야 이게 대화가 된다니까요. 대화가. 그래놓고 창세기 21장 32-34절을 보겠습니다. 32절,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우매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을 떠나 블레셋 족속의 땅으로 돌아갔고” 33절,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34절, “그가 블레셋 족속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내었더라” 이 대목이 무슨 대목이냐 하면 그 동네 터줏대감이 등장합니다. 이름이 뭐냐, 아비멜렉이에요. 이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갑자기 언약을 맺고자 나오게 됩니다. 약속을 맺고자 나와요. 그 약속을 맺는데, 어떤 것이 약속이 되는가 하면 30절에 보면 아브라함의 종들이 우물을 팠어요. 우물을 팠는데, 아비멜렉 그 토박이 추장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았어요. 빼앗으니까 그 아브라함의 종들이 와서 아브라함에게 토박이들이 빼앗아갔으니까 주인님이 조치를 해달라고 그렇게 했어요. 그렇게 할 때에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만났어요. 만나고 난 뒤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29절에 보면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음은 어찜이뇨” 30절, “아브라함이 가로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하고” 이래 되어 있어요. 지금 얼른 봐서는 스토리가 어떻게 엮였는지, 어떻게 흘러가는지 전혀 감이 안 오죠. 이게 아브라함의 특수성 때문에 그래요. 왜냐하면 지금 누가 잘못을 했느냐 하면 아비멜렉 쪽에서 잘못을 했어요. 그러면 아비멜렉이 잘못을 했으면 우물을 돌려줄 때에 누가 대가를 치러야 합니까? 아비멜렉 쪽이 대가를 치러야 해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 우물을, 자기 우물인데 도리어 아비멜렉에게 줘버려요. 주는데, 뭐까지 주는가 하면 일곱 암양 새끼까지 줘버립니다. 이건 피해자가 값을 치른 셈이 돼버려요. 피해자가 도둑놈한테 오히려 줘버린 셈이 돼버렸다 이 말이죠. 그리고 말하기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니가 우물을 가지되 이 우물을 누가 팠다? 이 아브라함이 판 걸로 여기서 증거를 삼고 우리 계약하자고 되어 있어요. 하나의 언약을 맺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존의 아비멜렉의 동네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계약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계약이 성립이 돼요. 아까 제목을 낯선 사람이라고 했죠. 낯선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어떤 동네에 갔을 때, 거기서 하나님에 의해서 거주했을 때 주변사람들은 아브라함과 동격으로 대화를 하지만 아브라함은 동격이 아니고 이 땅에 없는 원리를 그들에게 제공을 해버려요. 뭐냐 하면 “이 땅에서 우물은 내가 팠지만 너한테 그냥 줄게.” 그냥 줬다는 식으로 암양 새끼 일곱까지 주는 거예요. 이거는 절대 우물 값이 아니에요. 우물 값이 아니고 줘놓고 그 소유권을 영원히 아브라함의 소유권으로 이전하는 겁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내 덕에 너희들이 신선한 물을 공급받는다는 것을 아주 시그널로, 그 땅에서 영원한 언약의 이름으로 새겨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의 계통, 하늘의 언약이 오직 아브라함을 통해서 내려온다는 사실을, 그 뒤에 아비멜렉과 그 토착민들에게 아브라함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거예요. 낯선 존재라고 하는 것은 누구하고 붙었다하면 싸우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은혜를 베푸는 존재로서 우리가 이 땅에 출몰했다는 것을 주변에 보여주는 것, 이게 주의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