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강-YouTube강의(민주주의 사회)20180807-이 근호 목사
244강-YouTube강의(민주주의 사회)20180807-이 근호 목사 제 244강, 제목은 ‘민주주의 사회’입니다. 민주주의 사회가 공산주의와 대비되어서 상당히 호감이 있죠. 공산국가에 있는 사람들이 탈출하는 이유는, 뭐 이 땅에 와서 또 공산주의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죠. 민주주의를 찾아서 온 거죠. 공산주의를 탈출하는 사람에게 민주주의는 무조건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회라는 생각을 갖고 있죠. 공산주의에 있는 사람한테는 그 주변에 민주주의 사회가 있는 이상 희망을 갖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힘들어도 희망만 있으면, 어떤 희망이냐 하면, 지금보다 더 낫다는 희망만 있다면 아무리 힘들어도 견딜 수가 있어요. 민주주의가 가장 이상적인 사회라고 여겨진다면. 근데 만약에요, 민주주의가 맘에 안 들 때는 어디로 또 탈출을 해야 됩니까? 곤란하죠. 민주주의라고 할 때 반드시 사회라는 것을 붙여서 생각하는데, 민주주의 사회에서 그 민주주의를 떼 보자 이 말이죠. 떨어지게 하면 뭐만 남느냐 하면 사회가 남아요. 그래서 방금 연결한 것을 다시 연결시키면 사람에게 있어서의 희망은 혼자 사는데서 여럿이 사는 사회로 탈출을 시도하는 겁니다. 희망이라는 것은 혼자서 외롭게 있는 것보다 여러 사람하고 어울리는 것이 자기 삶의 안전망을 더 공고히 할 수 있다고 그렇게 여기는 겁니다. 물론 살다가 남들에게 치일 때는 산속이나 혼자 고립되어 살려고 하겠죠. 그러나 그걸 정상적이라고 하지를 않습니다. 으쌰으쌰 어울려서 살아가는 것을 좋다고 하는 거예요. 정신병에서도 그것은 약으로 치유되고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에요. 어울려야 그게 치료가 되는 것인데, 어울린다는 말은 내 말 좀 들어달라는 거예요. 복음을 알았다, 그 다음의 절차가 뭐냐 하면 “나 복음 알았으니까 이 사람들아! 내 말 좀 들어보게.” 이게 들어가요. “이 한 말 좀 들어보게.” 순서가 이래돼요. 그러나 그것이 스스로 자기를 위로한다는 것에 한계에 이른다는 겁니다. 본인이 스스로 본인을 위로한다는 것은, 위로가 안 되면 마약 먹고 술 먹고 이렇게 하겠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어요. 제일 좋은 것은, 내가 나를 위로하는 그 정도나마라도 누가 알아서 착착 나를 위로해줬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하는 일이 내 뜻대로 안 될 때, 내 뜻대로 안 되는 거야 뭐 그럴 수가 있죠.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니고, 내 뜻대로 안 될 때 누가 희망을 줄 수 있으면, 나는 뜻대로 안 돼도 감당을 할 수가 있어요. 내 뜻대로 안 돼도. 그러면 그 사람은 나에게 위로가 되려면 나는 뜻대로 안 됐는데, 어떤 사람이 나에게 위로가 되려고 대기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러면 그 사람이 나에게 이야기할 것은 뭐냐 하면 “지금은 당신이 이렇지만 앞으로 이런 요런 길로 일하시면 당신은 옛날 못지않은 당신의 가치를 계속 이어져 나갈 수 있습니다.”라는 내용의 위로의 말을 해주고 싶죠. “아이고, 이 바보야! 죽어라!”이런 식으로 한다면 아무리 옆에서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건 위로가 되지 못하죠. 왜냐하면 내 희망과 일치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민주주의 사회라고 하는 것은 그냥 사회인데요, 이 민주주의 사회는 모두가 헛꿈을 가지고 집합된 공간이 민주주의 사회에요. 전부 다 헛꿈을 꾸고 있는 거예요. 그 헛꿈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나는 이랬으면 하는 것이 내 입에서 나오지 말고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왔으면 참 좋겠다, 라는 생각이 민주주의 사회입니다. 그래서 민주주의 사회는 유토피아의 대체물이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유토피아 그게 이상사회인데 그걸 한번 시도해보는, 이상사회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 희망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존재할 것이라고 여기고 한번 시도는 해보자고 모인 곳이 바로 민주주의 사회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민주주의의 사회의 가장 중심은 뭐냐 하면 사회가 잘 되기 위한 것이 아니에요. 내가 잘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내가 남들로부터, 보다 더 많은 숫자로 위로를 받기에요. 한 둘로 위로받는 것은 이건 성이 안 차요. 보다 많은 사람이 나를 위로해주고, 그 위로해준다는 것이 힘이 모이면 그 다음에는 위로에서 더 나가요. 받들어 모시는 것이 됩니다. 받들어 모시는 것. 그게 바로 옛날에 귀족들이 했던, 또 왕이 했던 거예요. 사도행전 12장, 거기에 보게 되면 헤롯 왕이 군기를 잡는다고 요한의 동생 야고보를 죽여요. 죽이고서 아주 신이 났어요. 거기다가 누굴 잡느냐 하면 베드로를 체포하라고 명령해서 베드로를 감옥에 잡아넣습니다. 신났죠. 그리고 두로와 시돈에 있는 사람들이 왕한테 밉상을 받을까봐 겁을 내고 있다고 되어 있어요(행12:20). 그쯤 되면 왕의 자리라는 것이 뭐냐 하면 받들어 모시는 자리죠. 그래서 왕이 연설을 하니까 이거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신의 소리라고 해서 아주 거들먹거리다가 해충에 물려죽었어요(행12:21-23).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죽여 버렸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그 사람을 자기의 이상형으로 생각하죠. 왕이 된다는 것, 최고가 된다는 것. 그 왕이 되고자 하는 그 희망을 그냥 꺾자, 나는 집안의 왕이 아니다, 그냥 이렇게 꺾어버리면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에요. 누구나 잘만하면 보다 많은 사람한테 받들어 모심을 받을 수 있는 그런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라고, 떠벌이는 사회가 민주주의 사회에요. 아무리 사회가 민주주의나 공산주의라도 뭘 삭제하지 않느냐 하면, 나는 최고가 되겠다고 하는 그 희망, 여망을 보장만 해줄 수 있다면 그 사회가 최고의 사회에요. 예를 들어서 귀족들이 있는 사회에 민주주의 사회는 좋을까요? 나쁠까요? 귀족들에게 있어서. 당연히 그거는 나쁘죠. 지가 최고인데. 지가 현재 귀족인데 당연히 받들어 모셔야죠. 그래서 우리나라 조선말기에 민주주의 사회를 누가 싫어했겠어요? 소위 대관들, 귀족들, 양반들이 싫어할 수밖에 없죠. 누가 좋아했겠어요? 아주 집안 다 털어먹은 사람이 좋아하죠.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은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이거는 뭐냐 하면 옛날 귀족을 모델로 삼아서, 나도 기회만 주어진다면, 능력만 된다면 언제든지 그 위치에 올라갈 수 있다. 그거는 나의 희망이다. 결국은 봉건사회에서 탈출이죠. 봉건사회에서 민주주의 사회로 구원이 되는 겁니다. 자, 오늘날 한번 교회를 보세요. 이 교회가 천국가기를 원합니까? 이 세상에서 성공하기를 원합니까? 이 세상에서 성공하기를 원하죠. 마음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왕처럼 살기를 원하면서 능력이 없으니까 교회 와서 악바리처럼 기도해서, 그리고 약간의 헌금과 봉사를 해서, 정작 원하는 것은 내가 이 사회에 최고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여러분들의 희망은 뭡니까? 민주주의 사회에요? 아니면 내가 잘 되는 사회에요? 내가 잘 돼서 남한테 그래도 여전히 살만하다는 보람과 희망과 기대를 계속 충족시킬 수 있는 사회, 만약에 교회가 그것을 제공한다면 사람들은 교회를 떠날 이유가 없죠.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는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는 사회, 바로 우리는 죽었고 우리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 사회, 우리의 고향은 이곳에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 민주주의에서 살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욕심 많은 우리 자신을, 성공하기 원하는 우리 자신을 서서히 소멸시키고 제거하기를 원합니다. 이제 말레이시아에 가서 제거당하세요. 서서히 죽어 없어지는 것, 후딱 오너라! 그게 성경의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