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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두 개념 180807강의요한복음

강남-요한복음 17장 21절(두 개념)180807a-이근호 목사

오늘은 요한복음 17장 21절 할 차례입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게 우리의 희망사항이 아니고 예수님의 희망사항이죠. 그러면 이 본문을 우리가 이해하려면 우리는 평소에 어떤 상황이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습니까?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그런 상황 되기를 원합니까 아니면 우리가 평소에 그냥 무심코 하나님 나는 이렇게 내 일이 이렇게 풀렸으면 좋겠습니다 하는 그런게 각자 있을게 아니겠습니까. 장사하는 사람은 장사가 잘 됐으면 좋겠습니다 뭐 이런게 말이죠. 그런데 우리가 소망하는 그 어디에도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되기를 소망하지를 않겠지요. 왜냐하면 날씨가 덥잖아요.

지금 우리는 본성상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홀로 고립적으로 절대적인 존재가 되고 싶어 해요. 나한테 일어난 모든 것이 오직 나만을 위해서 필요한 것들로만 이렇게 내 주변에 남아있기를 모든 것. 이거는 부자가 되든 가난하든 관계없어요. 가난한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가난한 가장도 아내든 자식이든 오직 나만을 쳐다보면서 아버지 최고 당신이 최고 그렇게 되는 그런 상황. 역시 우리 아버지니까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고 항상 나에게 존중과 존경을 마지않는 상황.

비록 작은 테두리지만 식구 몇 명 안 되지만 그것이 그 가운데 그 좁은 구석에서도 내가 사람으로써 인정받는거요. 대우받는 것. 무시당하지 않고 우대받는 것. 내 존재 가치가 그 사람들에게 먹혀들어가는 것. 그런 것을 원하지요. 결국은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셋이 하나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거죠. 나로만 있어도 충분하다는 거예요. 내가 나의 최고의 즐거움에 즐거움은 도리어 셋이 귀찮아. 둘을 잘라내고 나 홀로 우뚝 설 때, 그 때 그런 보람으로 달려갑니다.

유치원 때 운동회들 다 해봤지요?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이기 때문에 사전에 협의해서 얘야 우리 1등 나란히 손잡고 들어가자 이러지 않습니다. 공책 차이가 나요. 두 권과 세 권의 차이. 세 권 얻으려면 마지막에 그렇게 해방을 했더라도 마지막에는 가슴을 내밀어서 일등을 해야 엄마가 아주 좋아하잖아요. 셋이 나란히는 우리는 못 견뎌 합니다. 셋이 함께 산다는 것은 우리 취향에 전혀 우리 성질에 전혀 맞지를 않아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기도한 것은 이미 틀어진거예요. 우리의 소망하고 이미 틀어져 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은 홀로 살수 없는 존재 만들어줄게 그걸 우리에게 마지막 최고의 대우를 해주는 겁니다. 그때가면 너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셋이 하나가 되는거야 기쁘지 않니? 정말 즐겁지 않아? 뭐 이렇게 우리에게 윽박지릅니다. 우리는 하나도 즐겁지 않은데. 기쁘지 않은데 이것 때문에 교회 온게 아닌데. 윽박지르죠. 내가 스스로 최고가 되고 싶은 그게 목적인데 실낱같은 목적인데. 같이 있다는 것은 버겁지요.

그러면 여기서 좀 더 이야기를 나가봅시다. 나 혼자 이렇게 있을 때에 혼자 있다는 것은 사람은 혼자는 못 살아요. 이발 누가 해줘야 되고 양복 누가 집어줘야 되고 누가 농사 대신 지어줘야 되고 고등어 누구 구워줘야 되고 잡아줘야 되고 사람은 혼자 살 수는 없어요.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못 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혼자 있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은 나를 수발들어야 되요. 나에게 전부 다 봉사를 해야 돼요.

이거는 우리가 어릴 때 태어나서 한 다섯 살 때까지 우리는 많은 이런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배고프다면 젖 주지요 밥 주지요 옷 입혀주지요. 내가 필요한 것을 다 제공하는 겁니다. 어린 아이들 이렇게 6개월에서 한 24개월 한 30개월짜리 어린 아이를 이렇게 관찰해보세요. 관찰해보시게 되면 자기가 그 집에 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그 집안에서 자기가 중요한 인물인 것처럼 설칩니다. 아무것도 한 것도 없으면서. 전부 다 자기 의견을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처럼 이야기해요. 싫어! 이런거요.

애들이 제일 먼저 하는 단어가 뭐냐 하면 엄마 다음에 배우는 단어 싫어! 입니다. 독일어로 하면 nein 영어로 하면 no. 자기가 그 집 안에 부모가 둘이잖아요. 그러면 자기가 하나 나았으면 ‘1’자가 작아요. 작은데 어느새 2+1이 ‘2’보다 숫자가 더 커. 왜냐하면 평소에 자기 중심으로 살았기 때문에 아주 당당한 구성요인이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30개월 지나면 숙제 들어오죠 어린이집 가야 돼죠 해서는 될 것 해서는 안 될 것 이렇게 나뉘니까 ‘1’이 점점 작아지죠. ‘1’이 작아지면서 균형을 맞혀들어가는 겁니다. 균형 맞출 때 ‘2’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1’이 들어간다는 것을 유념해야됩니다.

오늘 본문에 아까 오늘 본문 읽어봤지요. ‘3’입니다. 아버지 있고 그 다음에 누구입니까? 예수님 있고 그 다음에 성도, 제자.. 성도라고 합시다. 분명히 1,2,3이잖아요. 분명히 3인데 이 3이 그냥 3이 아니예요. 여기에 3이 그냥 3이 아닌 것이 2에다가 1을 첨가한거예요. 그럼 2가 뭐냐 하면 2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버지와 예수님만이 두 분이 2가 되어서 하나가 된겁니다. 두 분이. 거기에 나오잖아요.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먼저 2가 성립이 됩니다.

2가 성립되고 그다음에 1이 들어갈 때 이 본문을 보는 사람은 누구나 궁금한게 있어요. 내가 2안에 내가 1의 작용으로 들어갔는지 안 들어갔는지 내가 어떻게 아느냐 말입니다. 어떻게 그걸 내가 파악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예수님 2+1로 해서 전체가 3이고 이 3을 뭐로 바꿉니까? 1로 바꾸는 거예요. 3을 1로 바꾼다. 이렇게 하면 기존의 교회 좀 다닌 사람들은 목사님 지금 삼위일체 이야기 하는 거예요? 라고 갑자기 어떤 뭐 제자훈련 할 때 들은건 있어가지고 삼위일체에 대해서 거론할거예요.

목사들이 삼위일체를 이야기하는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자기가 계속해서 뭐로 남겠느냐 하면 스승 짓 하려고 스승 짓. 선생노릇을 계속 하고 싶어서 삼위일체를 계속 거론하는거예요. 너희 이거 모르지? 교수 아마추어야 이거 모르지? 사장님 아마추어야 이거 모르지? 그리고 판사 의사 아마추어들아 너희들 백날 해도 너희 이거는 모르잖아 삼위일체. 삼위일체 해가지고 지금 갑질 하고 있는겁니다. 삼위일체. 그럼 성경에 삼위일체가 있느냐 없느냐. 성경에는 삼위일체라는게 없어요. 삼위일체라는게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삼위일체라는 그 단에 자체가 용어 개념 자체가 없어요. 없는데 왜 삼위일체를 이야기 하느냐. 솔직하게 말해서 성경에 대해서 뭐가 뭔지 정리가 안 된다는 거예요. 정리가 안 되면서 마치 정리된 것처럼 소위 교회 지도자급이 교인들을 속일 수 있는 방법은 아마추어들을 속일 수 있는 방법이 삼위일체. 본인은 정리가 안 됐는데 또 정리가 안 됐다 하면 그 교인들은 목사님 말씀 듣고 천당 가려고 했는데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러면 그건 안되잖아요.

그럴때는 삼위일체 알면 천당 내가 보장해줄께요 이러면 아 이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주거든요. 안정감을 주면 그 교회 계속 다닐 가능성이 높아져요. 그래 이 교회가 나의 영혼을 제대로 살리는구나. 그때 뭐냐 하면은 바로 다른 것보다도 삼위일체를 아시면 삼위일체가 모든 신학의 절정이고 종합이고 이게 끝판왕입니다. 삼위일체 아시면 모든걸 다 안겁니다. 이 목사도 삼위일체 아는데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릅니다. 이런 노하우를 제가 어찌 갖고 있겠습니까. 특별히 우리 교회 교인들에게는 이 삼위일체에 대해서 이 숨겨진 하나님의 신비로움 또 신비로움을 집어넣어야돼요.

신비로운 삼위일체를 제가 여러분들에게 해서 삼위일체 안에 있으면 그것이 정통 보수 정통이고 삼위일체 삐딱하면 이건 이유도 없이 이단입니다. 한국의 교인들이 이단 되기 싫어가지고 이단 되면 지옥간다 하니까 벌벌 떨면서 예 삼위일체 그대로 해주세요. 설명해 주세요. 이렇게 하거든요. 문제는 설명이 안 된다는 거예요. 삼위일체 자체가 없고, 삼위일체가 성경이 어떻게 모순되는 구절들을 하나로 모을지를 몰라서 얼렁뚱땅 그냥 추상적인 있지도 않은 개념 하나를 덜렁 내놓은게 삼위일체이기 때문에 삼위일체를 설명을 할 수가 없어요.

아버지가 회사가면 사장님이고 집에 오면 아버지고 교회가면 장로님이고 삼위일체. 그거 삼위일체가 아니고 그거는 이단입니다. 그리고 또 햇빛은 빛이 있고 열이 있고 또 에너지가 나오고 그것도 똑같은 이야기예요. 어떤 사람은 머리가 3개인데 몸통은 하나다. 이거는 괴물이에요. 물이 얼면 얼음 되고 그 다음에 뜨거우면 수증기 되고 그냥 물이면 물입니다. 이거는 수증기 될 때 물은 없고 얼음 될 때 물과 수증기는 없어지고 수증기 될 때 물 없어져요.

그래서 이거는 다신론이 되어 버려요. 2면 2고 3이면 3이예요. 무슨 억지를 부려서 3을 1로 만들려고 하고 1을 3으로 만들려고 합니까. 말되 안 되는 소리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삼위일체라고 하는 것은 좌우간에 없는거예요. 뭐 사도행전에 보면 아들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아들과 아버지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아버지 이름으로 세례 줬잖아 그래. 세례 주잖아 성경에 보면 세례 주잖아. 그런데 그것이 하나고 그분이 하나잖아요. 그게 왜 삼위일체예요?

그런데 그게 삼신이 되면 곤란하고 삼신이 되면 왜 곤란한데요? 아버지가 삼신이 아니라고 하는데 왜 삼신 되면 왜 곤란한데? 하늘에서 걱정 안 하고 있는데 땅에서 걱정한다고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하면요 교회가 하나님은 걱정도 안하고 있는 것을 교회가 걱정해가지고 억지를 부리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가 걱정을 한다는 자체가 뭐하고 뭐하고 의견이 안 맞다? 하늘의 뜻과 지금 지상의 교회의 뜻과 지금 틀어져서 안 맞는 거예요. 안 맞으면 교회 자체가 이단이 되는 거예요. 교회자체가.

아버지께서는 그야말로 성경 그대로입니다. 아버지께서 성령을 통해서 일 하시잖아요. 아버지께서 옆에 예수님 계시고 아버지 옆에 오른쪽이라고 하는 것은 심판의 자리입니다. 원래 그 저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베드로가 설교할 때에 그 예수님이 어느 자리에 올라가냐 아버지의 자리에 올라가냐 예수님이 아버지의 옆자리에 올라가죠. 옆자리는 뭐냐 오른손의 자리 아닙니까 그 옆자리에 올라가야 요엘이 완성돼요. 요엘이 뭐냐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요.

하늘에 불이 떨어진다는 것은 뭐냐 불심판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 구약에서 불심판 날 때 유일하게 불심판 받은 도시가 어디입니까? 소돔과 고모라죠. 소돔과 고모라에 천사 몇 명 등장했어요? 두명 등장했잖아요. 오순절날 예수님 승천할 때 천사 몇 명 등장합니까? 두 명 등장하는거예요. 수상해요. 작살난거예요 이제는. 그러고 난 뒤에 베드로가 전도할 때 하늘에서 불이 떨어진거예요. 불이 떨어진다는 말은 불이 떨어지는 위치에 누가 가 있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이 승천하셔가지고 지금 본격적으로 구약의 예언대로 이 세상을 전면적으로 전반적으로 불심판을 하시기 위해서 거기 지금 거기 계시고 있는 겁니다. 심판주가 되시는 거예요.

심판주가 된다는 그 소식 심판의 소식을 불의 언어로 이야기하기 위해서 성령께서 뭐로 왔다? 불의 혀같이 온거예요. 혀의 기능이 말하는 기능이거든요. 그 불의 혀. 전반적인 전체적인 심판입니다. 뭐 판사 의사 소용없어요. 목사 장로 소용 없어요. 불 살라버리겠다는데 뭐. 집에 혹시 과수원 하십니까? 과수원하든 뭘 하든 의미 없다니까 의미 없어요. 불심판 앞에는 의미가 없어요. 그래서 베드로나 사도바울이 이야기 한 것은 딱 이거 이야기 한겁니다. 회개하라. 끝이에요. 회개하라. 회개하라가 반성하라가 아닙니다. 주제파악을 하라 이 말이죠. 네 본성을 파악하라.

내가 어쨌길래? 너 때문에 예수님이 돌아가셨잖아. 그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너희들이 죽은 예수를 누가 살렸다란 말이죠? 너희들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렸다는 말은 죽은 예수님을 근거로 해서 전면적인 이 세상에 대해서 끝장내겠다는 것이 마지막 때의 아버지의 뜻이에요. 그러면 그 아버지의 뜻과 하나가 됐다는 말은 우리는 똑같은 뜻으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가담시켜준거예요. 우리 한편이다. 한 편 먹은거예요. 한 편 먹은거예요. 아버지 뜻과 예수님 뜻이 우리 한 편 먹어서 하나라는 말을 한겁니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 된 것처럼.

존재로 삼위일체로 표현하는게 아니고 기능적으로. 존재가 아니고 기능적으로 움직여요. 존재 있음이 왜 아니냐 하면 이미 인간들이 자기가 여기 있음을 가지고 확정지었잖아요. 개념이 있음이라고. 있다라는 개념을 인간이 사용하고 있잖아요. 있다라는 개념을 사용하게 되면 인간이 이걸 사용하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이 개념을 사용을 안 해요. 인간들이 사용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삐딱선이에요. 항상 하나님은 인간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삐딱하게 나와버려요. 하나님의 계심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그 계심은 이방인들도 아는거예요.

로마서 1장에 있잖아요. 너희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이 계신걸 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하나님이 계신 것을 잘 아는 사람이 야고보서 2장에 누가 나옵니까? 누가 하나님이 한 분인걸 누가 아십니까? 귀신들도, 귀신이 귀신같이 알지요. 귀신이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나오잖아요. 귀신이 뭐까지 아느냐 하면 나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고. 귀신이 예수님 아는거야 우리가 상식인데 우리가 깜짝 놀란만한 것은 바로 사도바울을 안다는 겁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을 맞먹으려고 했잖아요. 우리와 똑같은데. 그런데 귀신나라에서 사도바울이 유명하다는 말은 사도바울이 보통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이에요. 사도바울이 보통내기가 아니다 귀신나라에서. 보통내기가 아닌거예요.

그래서 오늘 그 강의 내용이 지금부터 복잡해지는 겁니다. 왜 복잡해지느냐 하면은 마귀나 예수님이 아는 안목으로 성경을 다시 봐야 되기 때문에. 그걸 하려면 우리는 성경을 어떤 식으로 보고 있는가를 거쳐서 올라가야 되요. 이 작업이 정말 힘든 작업입니다. 힘든 작업이지만 해야죠 뭐. 해야죠.

자, 아까 제가 언급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출발은 뭐부터 한다고 했습니까? 있음부터 시작해요. 있음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어떤 결과를 기대했을 때 뭔가 소망할 때 이 소망에서의 나란 있음이 빠질까요? 여기 포함될까요? 반드시 포함되지요. 기도할 때 기원이나 기도를 할 때 내 문제 빠지고 기도합니까? 반드시 기도의 응답 속에 내 것이 들어갑니까? 내 것이 반드시 들어가잖아요. 반드시 내 것이 들어갑니다. 내 것이 들어가서 내가 이정도 되면 좋겠습니다 라고 기도를 하는거예요. 어떤 결과에 대해서 내가 여기서 이동하는 거예요. 이 소망 속에 내가 근사하게 달라진 모습을 보이는 겁니다.

그러면 있음과 있음 사이에 여기서 무엇이 필요하느냐 하면 여기 시간이 소모가 되요 시간이. 시간이 소모가 되거든요. 시간이 소모가 되면 이 결과 올 때까지 초조하게 기다립니다. 초조하게 한 이틀을 기다렸다고 합시다. 이 2일 동안 우리 자신을 뭐로 보느냐 하면 과도기로 봐요 과도기. 뭔가 내가 되고자하는 꿈, 그리고 그 꿈을 프로젝트 했던 나 그 사이에 지금 중간과정 과도기로 봐요 과도기. 넘어가는 과도기로 보는 겁니다. 아주 소망이 코 앞에 있다고 확신하고 믿습니다 하고 있다 이 말이죠.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것은 무엇이 여기에 개입됐느냐 하면 시간이 개입되는 거예요. 시간이 개입됩니다.

시간이 개입되면 아까 우리가 봤던 본문 아버지 안에 예수, 예수 안에 나 이야기에는 뭐가 빠지느냐 하면 시간 자체가 거기는 성립이 안돼요. 시간은 들어갈 자리가 전혀 없어요. 아버지하고 아들관계가 시간 흐른다고 해서 아버지가 삼촌되고 조카되고 이런 법은 없잖아요. 관계라는 것은 족보관계는 시간이 흘러도 그대로 서로 처음관계가 계속 갑니다. 시간이 흐른다고 뭐 오촌이 육촌 되고 칠촌이 팔촌 되고 그런거 없지요. 삼촌 되고 이런거 없지요.

물론 막장 드라마 보면 그런거 있지만. 시누이가 엄마되고 엉망진창이 되고 출생의 비밀 때문에 혼선이 일어나고 그렇게 하겠지만. 자기하고 자기 사랑하는 여자가 아이가 있는데 보니까 나중에 보니 자기 딸이다. 원수. 기가 차지요. 그것도 의사 몰래 자기 정자 가지고 시험관해가지고 아기 낳아가지고 우연히 만나가지고 자기 딸을 만난거예요. 족보 완전히 이상하게 되어 버렸는데. 주님께서 하나라고 했을 때는 뭐를 빼느냐 하면 하나가 되려면 이 시간이 둘둘 감겨있는 이 시간을 나에게서 이걸 빼고 집어넣는 겁니다 시간을 빼고. 그러면 원래 알던 족보대로 가는 거예요. 우리가 몰랐던 족보. 양자지요.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니까.

그래서 원형이 뭐냐?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던 그 관계를 2라고 했잖아요. 아버지와 아들 2잖아요 둘이니까. 이 2를 어디다가 적용시키느냐 하면은 새로운 3번째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들어올 때 이 3번째에다가 이 2의 여기에서 성립된 관계에다가 그대로 이걸 설치해 버려요. 이 관계를 그대로 설치해 버립니다. 설치해 버리면 성도가 아버지와 예수님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살면서 유지했던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그대로 여기서 재현되어야 해요. 그대로 재현됩니다. 이게 구원의 방식 구원의 공식이에요 구원의 공식. 언약의 공식 구원의 공식입니다.

예수님께 일어난 것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창세 전에 이미 이야기가 끝난 이야기거든요. 그래서 그걸 가지고 예수 안에서 예정되었다 하거든요. 예수 안에서 예정된 에베소서 1장 4절 말씀 예정된 것을 그것을 그대로 성도에게 적용을 시켜버립니다. 그럼 우리는 그냥 들어가면 되겠네 하지만 그냥 들어가면 되는데 여기로 들어가면 되는데 문제는 우리라는게 없어요. 들어갈 우리가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아버지 뜻대로 관계대로 이 세상에 와서 어떻게 됐습니까? 죽으셨잖아요. 예수님이 죽음으로서 모든 인간이 죽어버렸기 때문에 죽은 인간이 나는 아버지하고 예수님 끼어들어야지 들어갈 수는 없는겁니다.

옛날 60년대 지금도 생각납니다 60년대 많이 나왔을 때 그냥 아이들을 양육이 아니고 그냥 방목하듯이 그렇게 키울 때에 방 두 칸도 옛날엔 부자였지요. 부자라 치고 방 한 칸에 이렇게 주무시고 나머지 방 한 칸에 세 명 네 명 잤잖아요. 한 방에 잤다고요. 그러면 춥다하면 머리 좋은 애들 중에 머리 좋은 요령 부리는 애들 같으면 이불 하나 주면 이게 3인용인데 3인용이니까 분명 하나는 발길에 차여서 새벽 두 시 반에 그러면 걔가 머리 나쁜 애 같으면 그냥 억지로 형들 안에 끼는데 머리 좋은 애 같으면 베개 들고 옆방에 가가지고 끼어 들어가면 돼요. 아빠 엄마 가운데. 그걸 내칠 가혹한 부모는 없거든요. 그 사이에 중간에 꼭 끼어서 따뜻해놨겠다 자면 된다고요.

성경을 보는 우리 인간은 성경을 보면서 어떤 오해를 하느냐 하면 하나님과 예수님 계시니까 우리가 그 사이에 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살아있는 내가. 뭐 어떻게? 산 채로. 60년대 어디 뭐 그런 처지가 아니예요. 우린 그런 처지가 아니예요. 낄 사람이 없어요 여기에.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면 없는데서 없어도 마땅한데 없어도 되는데 없는데서 있게 만들겠다는 것이 작전입니다. 없는데서 있게 만드는 것. 없는데서 있게 만들려면 소위 없는 것을 무엇으로 바꿔야 돼요? 모든 있음을 모든 없음으로 다 바꿔야 되겠지요? 존재를 다 죽은 자로 만들어야 되요.

구원해주세요 천국보내주세요 랄랄라 입 다물어! 다 없애요 전부 다 입 다물어 전부 다. 그래서 전부 다 그걸 다 해골로 만들어요. 에스겔 30장 전부 다 해골로 만들어요. 이중에 해골 안 된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다 가까운 사람도 있고 먼 사람도 더러 있지만은 모르지요. 순서야 모르지요. 전부 다 죽어줘야 되요. 그럼 죽기 6초전에 주여 사도신경 외웁니다 주여 구원해주소서 벌써 내가 오년전부터 예수 믿은거 아시지요? 이 주둥이는 나불나불 아직 살아있어. 그러면 그런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죽기나 해라. 죽기 5초전에 아멘 아멘 아멘. 그냥 죽어 그냥 제발 나대지말고 죽어 나대지말고. 나 여기 있습니다 땅땅 티내지 말고 그냥 죽어. 진작 티내지 말고 죽을걸. 꼭 끝까지 뭐 하나 붙들려고 하는 거예요 붙들려고.

지금 돌아가시려고 정신도 없는데 주기도문 외우십니까? 외우시면 합격이다 하고 옆에 목사는 구라를 떨고 그것도 저것도 아니면 중 염불하는 것처럼 찬송가 틀어놓고 해보세요. 치매 걸리면 찬송가 틀어놓으면 대번 끄라고 합니다. 정신없어요. 정신없으면 장기기억에 남기 때문에 기억 안나요. 인간은 끝까지 물에 빠질 때 또는 모래 늪에 빠질 때 처음에는 몸이 들어가면서 점점 머리카락이 마지막에 나오잖아요. 사람은 머리카락에 기대건다니까요. 머리카락은 보이겠지. 보일랑 말랑. 빨리 집어넣어~!! 없애버려요. 없습니다.

어떤 인간도 구원 받을 사람 있다 없다?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이걸 한마디로 이야기해요. 이걸 ‘육’이라고합니다 ‘육’. 이걸 육이라고 합니다. 육은 요한복음에 육은 육이고 육은 육이다란 말은 절대로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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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4 강의 하나님의 작품 180703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18-07-03
2,433 강의 유튜브(240강, 241강) 하나님의 지령, 기도와 성전 180703 - 최고관리자 18-07-03
2,432 강의 사무엘상 39강( 믿음없음) , 마태복음 101강 (쳐내기) 180626 - 최고관리자 18-06-26
2,431 강의 [18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37 - 성령 없는 현실 사도행전 최고관리자 18-06-24
2,430 강의 맞춤 신앙 180619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18-06-19
2,429 강의 유튜브( 238강, 239강) , 육의 한계 , 몰두 180619 - 최고관리자 18-06-19
2,428 강의 상처에서 상처로 180611 시편 최고관리자 18-06-11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