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40강( 없음의 전쟁), 마태복음 102강 (언약 구원) 180724
없음의 전쟁 (삼상 14장11-44절)
대전- 40강
이근호
2018년 7월 24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14:11-44
(삼상 14:11) 둘이 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보이매 블레셋 사람이 이르되 보라 히브리 사람이 그들이 숨었던 구멍에서 나온다 하고
(삼상 14:12) 그 부대 사람들이 요나단과 그의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너희에게 보여 줄 것이 있느니라 한지라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나를 따라 올라오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셨느니라 하고
(삼상 14:13) 요나단이 손 발로 기어 올라갔고 그 무기를 든 자도 따랐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요나단 앞에서 엎드러지매 무기를 든 자가 따라가며 죽였으니
(삼상 14:14)요나단과 그 무기를 든 자가 반나절 갈이 땅 안에서 처음으로 쳐 죽인 자가 이십 명 가량이라
(삼상 14:15) 들에 있는 진영과 모든 백성들이 공포에 떨었고 부대와 노략꾼들도 떨었으며 땅도 진동하였으니 이는 큰 떨림이었더라
(삼상 14:16)베냐민 기브아에 있는 사울의 파수꾼이 바라본즉 허다한 블레셋 사람들이 무너져 이리 저리 흩어지더라
(삼상 14:17) 사울이 자기와 함께 한 백성에게 이르되 우리에게서 누가 나갔는지 점호하여 보라 하여 점호한즉 요나단과 그의 무기를 든 자가 없어졌더라
(삼상 14:18) 사울이 아히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궤를 이리로 가져오라 하니 그 때에 하나님의 궤가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있음이니라
사무엘 상 14장 11절에 보면 지금 전쟁하는 중이에요. 누구와의 전쟁이냐? 다른 사람들 보기엔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전쟁한다고 이렇게 생각하는데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그렇게 보지 않고 할례 받은 자와 할레 안 받은 자와의 전쟁으로 보는 거에요. 이 관점이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왜냐하면 전쟁을 할 때 모든 전쟁이 나의 전쟁이 되어 버려요. 나의 자존심과 나의 위신과 관련되어 있고 그러면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전쟁을 할 때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직접 작살내도 되는 문제인데 왜 이스라엘을 앞장세워 전쟁하게 하는 가?
그 이유는 전쟁의 목표가 적을 물리치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게 네 주제 파악을 하라는 겁니다. 마치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와 생각이 같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하나님이 나와 생각이 같으니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하나님이 무조건 협조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나 오늘 날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자기는 늘 정당하다고 생각하니까 변명거리도 늘 생기고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내가 하는 일에 처벌 안하셨으면 좋겠다는 거에요. 용서를 해 달라는 말이 아니고 인간들은 용서란 말도 싫어해요. 처벌을 안 했으면 좋겠다. 처벌이 없었으면 좋겠다에요.
용서가 되면 죄인의 입장에 서 버리게 되요. 죄인의 입장은 용서만 귀해요. 그런데 이건 싫어해요. 왜냐하면 내가 뭐가 못 난 는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대인 관계에서도 늘 부딪히잖아요. 내가 너보다 못 난게 뭐가 있는데 하지요. 죄인이 될 경우에 용서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인간이 나는 내 자존심 무너져도 괜찮아! 라고 나설 인간 아무도 없어요. 전쟁 벌여야 되지요. 왜 자진해서 죄인의 자리를 거부하니까 인간은 타고난 거에요. 난 너보다 못한 게 없어! 나도 나름대로 잘났어!가 기본 베이스로 깔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 하지만 실은 하나님의 전쟁이 아니고 자기 잘남을 나타내는 전쟁이 됩니다.
모든 다툼이 다 그래요. 다퉈놓고 마지막에 계산해 보면 그다지 못나진 않았지! 죄인의 자리에 안 가는 겁니다. 주님의 전쟁이 아니고 나의 전쟁이 됐지요.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 듯이 나의 전쟁이 되어버리면 누가 적이냐 하면 주님이 오히려 나의 적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인간은 처벌을 하지 말아 달라 다시 말해서 늘 승리의 편에 서세 요구를 하게 되는 겁니다. 이런 전쟁은 하나님이 개입하게 되지요. 여기에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하나님께선 인간들이 이런 식으로 용서 보다는 승리를 구한다는 것을 뻔히 아십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이고 블레셋도 마찬가지이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똑같은 인간끼리 붙여버립니다.
블레셋이야 여호와를 안 믿으니까 힘으로 밀어붙이겠다는 것인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함께 있다고 우깁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떤 전쟁이든 질 리가 없다라는 거에요. 하나님이 질 리 없으니까 이길 것이다라고 여기는 겁니다. 만약에 이긴다면 누가 더불어 같이 이긴 자 편에서 생각하냐 하면 이스라엘이 한 것도 없이 그렇게 짐작하는 거에요. 주제 파악도 못하면서, 여기에서 요나단을 통해서 하는데 사실 요나단이 전쟁을 할 입장은 안되고 전쟁은 누굴 통해서 하냐 하면 그 당시에 왕이었던 사울의 명령대로 이스라엘은 포진되어 있고 저 쪽은 블레셋이 있습니다.
지중해가 있는 (블레셋 평야)에서 왔으니까 예루살렘 위인 북쪽에서 (우측으로) 조금만 가면 요단강이 나와요. 그 당시 사울의 고향(기브아)이 이쯤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지금 사울의 명령으로 전쟁을 했습니까? 명령 없이 요나단이 일방적으로 전쟁을 한 거에요? 요나단이 일방적으로 전쟁을 한 거지요. 그러면 사울이 명령을 한 적이 없지요. 사울은 왜 명령을 안 했냐하면 블레셋 군대가 수가 더 많다는 말이죠. 많을 때는 하나님의 지시를 기다릴 수 밖에 없는 거에요. 왜 기다려야 하나? 기다리면 무슨 수가 있겠지! 우린 숫자로는 밀리지만 하나님께서 쳐라! 그러면 이겼다는 공식으로 그렇게 막무가내로 믿었던 거에요.
시키는 대로 하면 이긴다. 사울이 그런 생각을 할 때 나에게 문제 있다는 것을 집어넣은 거에요? 뺀 거에요? 뺐지요. 나는 문제없다. 시키는 대로 하면 주님의 승리가 곧 나의 승리가 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시 없이 움직였어요. 지시 받지 않은 하나님의 명령이 왕을 통해 나와야 하는 데 왕을 비껴나 아들 요나단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전쟁을 이미 개시했어요. 요나단의 전쟁 할 때의 원리가 뭐냐하면 내편 네 편이 아닌 할례 없는 자로 봐요. 이스라엘은 할례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이 전쟁은 할례 없는 자와 할례 있는 자의 전쟁 그러면 할례 없는 자는 언약이 없다이고 할례 있는 자는 언약이 있다가 되요.
언약이 있다라는 말은 언약이 있으면 승리한다는 말이 아니라 반대로 생각해야 됩니다. 언약이 이렇게 현실적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는 거에요. 언약 세계 속으로 집어넣는 겁니다. 언약은 이 지상에 증거물을 남기기 원해요. 언약이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언약대로 움직이는 사람이 필요한 겁니다. 노아 때 생각해 봅시다. 노아가 하나님을 믿었지요. 노아는 믿었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사람과 믿는 노아 사이에 어떤 증표가 있어야 되는데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증표를 줍니다. 그게 뭐냐하면 방주 만들기에요.
방주를 만들므로 말미암아 이건 노아가 승리토록 하기 위해 만든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언약이 언약대로 펼쳐지기 위해서 노아를 다루시는 겁니다. 그럴 때 노아의 입장은 쉽게 말해 바보. 등신 되는 거지요. 땡볕에 비가 올 생각이 없는데 방주도 얼마나 엄청나게 만들었어요? 잠시 피하는 보트가 아닙니다. 세상이 전부 이사 짐 챙기는 거하고 같은 거에요. 그리고 이사 짐은 챙기는 데 갈 데가 없어요. 이게 언약의 멋진 내용이에요. 방주라는 배를 타고 갈 목적지가 없어요. 미친 겁니다. 완전히 미친 거에요. 그 당시 사람들은 뭐를 했냐 하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사고팔고 나름 목적이 있었어요.
부자가 된다든지 가정의 화목이라든지 행복이나 건강이라든지 목적이 있었는데 자기의 목적을 위해 열심히 사는 것이 일상 아닙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상이 뭐냐하면 목적을 세우고 목적을 향해 나가는 거에요. 막 노동도 먹고 살려고 땡볕에서 하잖아요. 그런데 방주는 왜 만듭니까? 아무 쓸데없는 것에 몰두하지요. 요나단이 움직일 때, 언약을 거론했다는 말은 언약 받지 못한 자들이 가만히 있는 이스라엘을 쳐들어 왔잖아요. 그러면 요나단이 보기에 언약 받지 못한 블레셋을 하나님이 움직이신 거에요. 움직였다는 말은 그들이 할례를 모르는 거에요. 개무시하고 있는 겁니다.
출애굽 하기 전에 바로 왕이 누굴 먼저 건드려요? 바로 왕이 히브리인들을 먼저 건드리지요. 아들을 낳으면 다 죽여라! 그런데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빠져 나올 때 애굽의 아들들이 다 죽었어요. 맏이는 다 죽었습니다. 너희가 죽였으니 그렇게 다 죽이는 거에요. 하나님이 인간을 따라 합니다. 인간이 자존심을 세우면 하나님은 자존심 없는 방향으로 나타나지요. 왜 자존심 있는 것은 언약이 아니고 자존심 없는 것이 언약이기 때문에 자존심과 자존심의 싸움, 이것은 성사 될 수 없습니다. 왜 자존심 있는 인간이 나에게 시비를 거느냐? 이 전쟁은 자존심 없음이 주님의 마음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벌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용서를 못 하잖아요. 나의 지속적인 일상을 원합니다. 여기에 언약이 개입되면서 용서가 되려면 무슨 자리가 마련돼야 하냐하면 머리로는 알지만 실제로 마련되지 않는 자리. 죄인의 자리, 죄인의 자리란 아예 자존심은 없었습니다라는 자리. 나 같은 인간은 밟혀도 괜찮습니다하는 그 자리. 없는 자리를 만드는 거에요. 하나님이 개입하신 전쟁은 어떤 전쟁이냐 하면 없음으로 모든 있음을 치는 전쟁입니다. 인간 세상은 있음과 있음 밖에 없어요. 눈에 보이니까. 그런데 없음이라는 것은 아예 없으니까 신경 쓰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있음이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묻고 계신 거에요.
네가 살고 있다. 그럼 어디서 나왔느냐? 네가 어디서 나왔는가? 어떤 아들이 군대에 가 있다. 그러면 군대가 자기 직업이에요? 아니지요. 너 어디서 왔어? 대전에서 왔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여기 있잖아요. 있음을 계속 해버리면 이야기가 안 되고 있음과 있음과의 더 있기 위한 자존심 싸움인데 자존심이 뭡니까? 나는 없어지지 않을래! 에요. 난 여기서 허물어지지 않을래가 자존심 전쟁이에요. 더 버틸래가 자존심 전쟁이거든요. 주님은 너의 있음이 어디서 나왔는가를 다시 하번 묻는 거에요. 그 자동차 어디서 났어? 너 언제 월급 받아 자동차 샀나? 애 보고 묻는 게 아니지요. 분명히 없었는데 누구 줬잖아요.
우리 있음도 우리 존재도 없었는데 있는 거에요. 생년월일을 물을 때 1900 몇 년로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면 1800년대에는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었지요. 그런데 1800몇 년도라 하면 미친 사람이지요. 1900년도로 말하는 거에요. 하나님은 집요하게 우리의 바탕을 자꾸 제시합니다. 왜냐하면 있음은 없음을 위하여 봉사하라고 이 땅에 태어 난 겁니다. 고집이 있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있다 보니까 고집이 생긴 거에요. 집착인데.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수를 적게 하신 거에요. 저 쪽 블레셋은 숫자가 너무 많아요. 요나단은 언약대로 움직였지만 “어디서 할례 없는 것들이 우리를 공격해!”하고
하나님의 언약의 관점에서 쳐들어 온 것도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면 나가서 싸우는 것도 뜻이다 요나단이 가는 데 무기도 없어요. 칼 두 자루 밖에 없어요. 그런데 저 쪽은 숫자가 많지요. 그러면 있음이 풍부한 거에요. 요나단은 달랑 두 명 이에요. 두 명이라는 것은 어디에 가까우냐? 없음에 가까워요. 없음과 있음의 전쟁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떤 점에 유념해야 되냐하면 평소에 있음이 있음을 이기기 위해서 그동안 어떤 생각들을 꾸준히 해왔는가가 이 전쟁을 통해서 다 들통나요. 평소에 있음이 있음을 대결할 때 있는 것을 충분히 활용하잖아요. 그런 것은 블레셋이나 하라는 거에요.
언약 없는 것들은 마음대로 하라는 거에요. 그러면 이 쪽에 있는 것은 뭐냐하면 있음에서 없음으로 가버리면 그 다음 전쟁은 주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면 있는 것들의 내부에서 붕괴되요. 사사기 같아요. 미디안 군대가 기드온은 300명이지요. 300명과 수십만하고는 게임이 안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붙이셨잖아요. 기드온은 칼이 몇 자루였다고요? 칼은 없었습니다. 기드온은 횃불과 항아리 이건 그 전쟁의 성격을 논하는 겁니다. 캄캄한 속에 빛으로 존재하는 이스라엘, 그런 성격을 논하기 위한 것이지 전쟁의 무기에 관한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기드온의 칼이요. 여호와의 칼이라고 했거든요.
여호와의 칼은 있는 우리를 없음으로 바꾸는 거에요. 너는 쪼다 되면 성공이라는 것, 전쟁해서 쪼다되지 말고 전쟁 가운데서 쪼다라는 말은 있으나 마나 아무것도 아닌 존재. 사람이 아무것도 아닐 경우에만 자기 인생에 저항하거나 반항하지 않습니다. 물리학에서 무기라는 것은 뭐로 보냐 진공에 대해 반항할 때 무기가 되는 것이고 에너지가 있는 곳에서 저항이 생길 때 만약에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가지요. 어린 아이가 아파트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 덜 다쳐요. 왜 무게가 얼마 나가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