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존강의20180713a 베드로전서1장 17-20절(인생 재편)-이 근호 목사
서울의존강의20180713a 베드로전서1장 17-20절(인생 재편)-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1장 17-20 17절,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18절,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19절,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20절,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이렇게 되어 있죠. 이게 논리상 앞뒤가 바뀌어있어요. 논리상으로는. 보통 논리적으로 A다음에 B가 되거든요(A→B). A에 해당되는 사람에게 추가적으로 어떤 요소가 되게 되면 이게 B가 됩니다(A+추가요소=B). 원래 인간의 모든 논리는 내가 여기에 있는데, 하나님 쪽에서 뭔가 하시는 이야기, 그게 복음이든, 율법이든, 믿음이든, 어떤 정보가 흘러들어오게 되면 여기에다가 플러스, 보태게 되면 나는 여기에 있고 추가해서, 이 정보를 포함해서 나는 뭔가 달라진 자가 된다. A가 B가 된다. 동일인물이지만 뭔가 추가된 정보에 의해서 동일인물이 달라진 인물이 된다는 것이 우리의 논리입니다. 이게 인간의 논리거든요. 뭘 들었다는 것은, 배웠다는 것은 흘려보내라는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니 요소에다가 이 추가된 요소를 덧붙이라는 그런 이야기잖아요. 교회가면 목사님이 설교할 때, “이거 안 들은 것으로 하시고 잊어버리세요.” 이렇게 설교합니까? 그렇지 않잖아요. “오셨으면 이거 하나 보태시기 바랍니다. 보태시면 여러분들은 아마 새로운 사람으로, 괜찮은 사람으로 향상될 수 있습니다.”라는, 그런 취지로 설교를 하죠. “뭐, 안 들은 척 하세요. 이상한 것 들었거든 버리세요.” 이렇게 하지는 않는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 논리를, 오늘 베드로전서에서는 이 논리를 용납하지를 않아요.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허용이 되느냐 하면은, B부터 먼저 시작해요. 논리가 거꾸로 가서 A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은 B에 이미 포함이 된 사람만 A라는 사실이 들추어지는 겁니다(B⟶A). 보통 인간은 A에서 B로 가는데(A→B), 본문 베드로전서에서는 이 A에서 B로 갈 때에 A의 이야기가 B의 논리에서는 이 A가 없는 거예요. 없다 이 말이죠. 이게 터무니없는 예지만, 이 말씀 자체도 터무니없으니까,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해볼게요. 결혼한 지 10년 됐는데 애기가 없어요. 주위에서 뭐 입양해라, 시험관애기 해봐라, 그런 제안들이 들어올 게 아닙니까? 근데 애가 없는 이유가, 애 없이 우리끼리 재미나게 살아보자고 했는데, 슬슬 나이가 들고, 부부간에 봐도 정도 안 나고, 이제는 애 키우는 재미 외에는 달리 뭐 다른 재미가 없을 때, 부부가 서로 이야기를 해가지고 이제 우리도 애를 낳자고 해요. 그럼 그러자고 이랬다 이 말이죠. 그럼 애를 낳자고 하면 부부가 동침을 하든지 해서 애를 낳아야 하는데, 애를 낳자고 하자마자 일주일도 안 되어서, “여보! 애 낳아가지고 왔어.” 남편 쪽에서 애 하나 낳아가지고 오게 되면? 이상하죠. “어? 당신하고 나 사이에서 애를 낳아야하는데, 나 없이 애가 나왔다는 것은 논리가 이상하네.” 이래 되죠. 그럼 남편이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하죠. “내가 원래 그런 인간이야. 나는 여자 없이 애 낳을 수 있어.” 이래 나온다면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너 빼고 애를 낳았다는 거예요. 너 말고 구원하는 자를 예수님 쪽에서 만들어냈다는 겁니다. 우리는 무슨 생각하느냐 하면 나를 재료로 사용해서, 나를 집어넣어서, 구원받지 못한 내가 예수님을 경유해서, 예수님의 새로운 정보가 들어와서 구원 못 받은 인간이 이제는 구원받았다. 이걸 기대했는데,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니 제키고, 너 빼놓고 구원하는 사람을 제시해버렸어요. 그럼 여기서 무엇이 탈락되느냐 하면,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내 쪽에서 무슨 시도를 논리적으로 먼저 선행하면 됩니까? 라는 사실을 주님께서는 받지를 안 해요. 받지를 않습니다. 이거는 인간이 구원받고자 하는 모든 시도가 소용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왜 인간의 구원시도를 안 받아주느냐 하면, 우리가 구원받을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구원받을 대상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을 자를 예수님에 의해서 새롭게 조성해내는 겁니다. 만들어내요. 아까 그 터무니없는 예가 적절하죠. 우리의 애가 아니에요. 남편의 애에요. 그래서 우리라고 집어넣어서, 아내까지 포함해서 내 자식이라는 그런 기대는 남편이 의도적으로 그걸 회피해버려요. 의도적으로 회피해버려요. 그럼 이야기를 더 발전시켜 해봅시다. 예수님의 의해서 새로운 성도가 등장했을 때, 사람은 무엇과 무엇을 비교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제시한 성도된 조건을 제시하겠죠. 예수님에 의해서 새로운 성도가 되었기 때문에 그 조건이 있을 거잖아요. 조건이. 이러이러한 자가 성도다, 라는 조건이 있잖아요. 조건이 있다면, 조건을 주께서 미리 제시하게 되면, 우리는 그 조건을 내 구원하기 위해 필요한 아이디어로 끌어당겨서 활용해버려요. 구원된 자는 이러이러한 자라고 해버리면, 그 구원된 조건을 내가 나에게 가져와요. 가져와서 내 행함으로 그걸 실시해버립니다. 그럼 논리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내가 먼저 있고, 구원된 자는 이러한 조건이라면, 나에다가 플러스를 시켜가지고 하나님이 원하는 합당한 구원된 자로 짜잔~! 하고 자기를 내세우려고 의도하겠죠. 그게 인간들이 하는 논리라 이 말이죠. 그래서 그 논리를 주님께서는 역으로 가져가버리는 거예요. 더 쉽게 말해서 구원받은 자는 예수님의 피를 믿는 자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내가 여기에 있는데,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피를 믿으라고 했으니까, 내가 예수님의 피를 믿어버리면 내가 믿는 피의 요건 하나가 더 추가되어서 나는 구원받은 자가 돼버려요. 그렇죠. 그래놓고 구원받았다고 우기는 겁니다. 그런데 이래서 천국 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거 지금 장난치고 있는 겁니다. 농간하고 있는 거예요. 학교에서 선생님이 이야기를 합니다. “이번에 시험을 치는데 문제가 이 문제, 이 문제가 나온다. 거기에 집중해서 공부를 해라.”라고 했을 때, 학생이 물어봅니다. “그 문제를 풀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합격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애들이 자기 자신을 합격시키기 위해서 선생님이 제출한 그 문제를 풀어서, “선생님! 저 풀었습니다. 저 합격이죠?”라고 제출하는 거예요. 그런데 선생님께서 “나 이미 합격자 다 따로 뽑아놨는데. 니 어디서 왔지?” “선생님, 제가 이 문제 풀었잖아요?” “그게 어떻게 푼 게 돼? 그거 어떻게 풀었어?” “제가 보기에는 이게 맞는데요? 백점인데요?” “그건 니가 봐서 그렇지. 니가 본 거지.” 문제를 더 심화시켜봅시다. 더 깊게 들어가 봅시다. 지금 나라는 이 자체도 괜찮은데, 괜찮고 점잖은 존재인데, 단지 뭐가 필요 하느냐 하면 “구원받는데 이거가지고 충족될까?” 하고 있었는데, 베드로가 하는 말이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이 점잖은 데에다가 뭘 보태느냐 하면 예수님의 피를 믿는다고 함으로써, 점잖은데다가 구원까지 받아버린, 진짜 괜찮은, 성도는 성도인데 괜찮은 성도로서 자기가 되겠다고 자기가 기대를 하죠. 근데 이것이 합격자의 모습이라고 누가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본인이 이미 기대를 했잖아요. 본인이 이미 기대했다고요. 그런데 예수님이 만든 사람에는 이런 종류의 사람이 없어요. 예수님의 구원에는 이런 사람이 없어요. 이런 사람을 넣어준 적이 없습니다. 이건 인간들이 괜히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구원받은 사람은 뭐냐, 예수님의 피를 믿은 사람이죠. 그거나 이거나, 내가 예수 피 믿나, 이렇게 생각하시는데,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에 의해서 후차적으로 생겨난 사람을 구원된 자로 보는 거예요. 시작이 예수님의 피라 이 말이죠. 시작을. 예수님이 자기 피로 만든 사람이 구원받은 자예요. 아니, 이게 어려워요? 어렵습니까? 하여튼 나는 아니에요. 무조건. 무조건 나는 아니에요. 예수님의 피로 구원한 사람이 등장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라는 것을 단순하게 생각해서 땅에 못 같은 것이 있으면, 못을 이렇게 들어 올릴 때는 자석가지고 하면 달라붙잖아요. 달라붙죠. 주님께서 흘리신 그 피라는 것이 자석 같은 것이 아닙니다. 기존에 있는 것을 그냥 잡아당기는 것이 아니에요. 피라는 것이 에너지가 아니에요. 피라는 것이. 구원의 힘, 구원에 필요한 능력 같은 것이 아니에요. 피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신 것은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있는 힘을 쪽 빼버리죠. 인간세계에서 힘이 없다는 말은 아무런 결과가 나온다? 안 나온다? 안 나오죠. 어떤 일이 있다, 거기에다가 어떤 결과를 나오게 하려면 그 중간에 무엇이 새롭게 추가가 되어야 해요? 힘이 추가가 되어야 합니다. 인간들은 있고 거기에다가 힘이 추가가 되게 되면 그게 원하는 바가 된다. 이게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이잖아요. 근데 예수님의 피는 인간들이 있다고 하는 이것 자체도 없음으로 돌려놓는다 이 말이죠. “치워버려라! 이 쓰레기!” 하고 없애버리는 거예요.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이 다 죽은 것이다(고후5:14).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그러니까 살아있는 채로 예수 믿어서 구원받겠다고 하는 이 의도가 무엇을 오해하고 있느냐 하면 예수님이 피 흘리신 그 취지를 전혀 모르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의 피는 모든 것을 없애버리는 겁니다. 있더라도 없는 존재에요. 있어도 소용이 없는 거예요. 그리고 그 피로서 모든 인간을 죽이시고, 그 다음에 피 흘리신 예수님을 아버지께서 사흘 만에 살려냈잖아요. 살려냈으면, 거기에 뭐가 담겨 있느냐 하면 죽은 자를 대신했다는 그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죽은 자를 대신했다는 것. 그럼 죽은 자를 대신하려면 살아있어야 되겠어요? 죽어있어야 되겠어요? 죽은 자를 대신한다는 그 의미를 부각시키려면 이 사람이 살아있어야 돼요? 죽어있어야 돼요? 처음부터 죽어있어야 되겠죠. 죽어있다 이 말이죠. 죽어있는 자를 대신해서 살려냈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어떤 꼼수를 쓰느냐 하면 죽어있는 척을 하는 거예요. 죽어있으면서 눈을 딱 뜨는 거예요. 주께서 피 묻는 모습으로 데리려오는가 싶어서, 혼자 들킬까 싶어서 한쪽은 가리고, 주님이 부르면 “저요!” 하고 손들 준비하고 있어요. 피라는 것은 죽은 척 하는 것이 아니고 죽었다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죽은 척 하고 있으면 그냥 지나가겠죠. 죽은 척을 하려면 그 죽은 척 하는 당사자가 죽어있어야 돼요? 살아있어야 돼요? 살아있어야 죽은 척이라도 한다 이 말이죠. 연기를 할 수 있잖아요. 결국 이거는 뭐냐, 인간은 살아있는 한 죽은 척은 흉내 낼 수 있어도 살아있는 인간이 스스로 죽일 수는 없는 겁니다. 제가 여러 번 이야기를 했지만, 수면내시경을 해보셨어요? 수면내시경을 할 때 저같이 호기심 많은 사람은 정신이 말짱할 때와 정신 잃었을 때의 그 경계선이 궁금한 거예요. 그래서 처음에 마취한다고 할 때는 정신이 혼미하지 않잖아요. 정신 차리자! 정신 차리자! 내가 정신 차리고 있으면 의사가 와서 입 벌리고 들여다보겠지. 내가 마치 마취된 것처럼 간주해서 할 것이다. 정신 차리자! 정신 차리자! 정신 차리자를 열 번만 하자. 정신 차리자, 정신 차리자, 정신 차리자, 일곱 번 반을 했는데, 깨보면 벌써 회복실에 가 있어요. 정신차리자와 진짜 정신을 잃어버린 그 경계선은 정신 차리자 하는 그 상태에서는 절대로 그 경계선을 경험할 수가 없어요. 중요한 이야기를 했죠. 경험할 수 없다. 살아있는 인간은 죽은 척은 할 수 있지만 죽음의 경험은 인간에게는 배제되어 있어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뭐 해야 돼요? 기껏 해야 죽은 척 밖에는 할 수 없는데, 죽은 척은 주님께서 안 받아준다면 우리는 뭐 하면 돼요? 그냥 사는 거죠. 막 사는 거죠. 아무리 해도 안 되니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저는 죽었습니다.”라는, 이 발언을 내뱉는 순간순간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런 발언을 하거든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나는 날마다 내 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삽니다.”라고, 발언을 내뱉는 자체가 지금 죽은 게 아니고 살아있으니까 이런 흉내 내기를 한다는 그런 고백밖에는 안 돼요. 이래나 저래나 우리는 경험할 수 없는 그것을 주님께서는 우리의 경험으로 예수님의 핏속에서 제공해주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과 경험 못해가지고 경험하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과 차이점은 뭐냐, 그건 의외로 쉬워요. 그 차이점은 첫째 경험하지 못한 자는 죄용서 받고 싶다. 누가? 내가. 내가 죄용서 받고 싶다는 거예요. 그러나 이미 경험한 자의 특징은 뭐냐, 용서받았다가 돼요. ‘수면내시경하면서 의사선생님이 곧 오겠지.’ 그건 아직까지 정신 말짱한 거예요. 그런데 회복실에 있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끝났네! 끝났어!” 수면내시경은 끝났어요. 나한테 의논하지도 않고 협의하지도 않죠. 마취한 사람한테 무슨 협의가 됩니까? 죽어있는데. “여기 봐주세요. 저기 봐주세요.” 뭐 이렇게 논의를 한 적이 없어요. 그냥 자기는 퍼져가지고 눈 떠보니까 회복실에 와 있다 이 말이죠. 그럼 뭐냐, 끝났네! 이걸 성경적용어로 뭡니까? 다 이루었다! 이 말이죠. 다 이룬 거예요. 그럼 다른 사람이 묻죠. “당신은 어떻게 용서받았습니까?” “주께서 하셨습니다.” 그럼 그쪽에서 못 알아듣고 “주께서 하신 것은 이해가 되는데, 나도 주께서 하신 것을 믿는데, 어떻게 했더니만 주께서 하셨습니까?”라고, 자꾸 방법론을 제시하라고 윽박지르는 거예요. 왜냐하면 경험을 못했기 때문에. 그 경험을 인위적으로 유발시키고 조작해내려고 하는 거예요. 그럼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어요. “당신은 왜 자꾸 용서받고자 하십니까?”라고 물으면, 그쪽에서 하는 말이 “내가 살면서 돈 벌다보니까 죄를 많이 지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이야기하세요. “죄지었으면 지옥가야죠.” 그러니까 그게 얼마나 큰 욕심입니까? 죄는 죄대로 지어놓고 지옥은 안 가려고 하고. 이거 뭐 그렇게 터무니없는 인간이 어디에 있어요? 터무니없는 인간이. 여러분 가족 중에 밥은 먹으려고 하고 일은 안 하고. 그거 참 못 됐죠. 어릴 때는 일은 안 해도 밥 줘요. 그런데 스물 몇 살 쯤 되어서 지 좋다고 남자만나서, 그렇게 집안에서 말려도 이십 대 초반에 떡하니 결혼해놓고, 이십대 후반에 가서 둘이 맞짱 뜨고 싸워놓고는, “엄마! 갈라섰어.”하고 와요. 이렇게 갈라서고 이제 친정에 왔으면 밥벌이를 해야 돼요. 그런데 꼭 철딱서니 없는 것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옛날 시집가기 전에 했던 대로 “이거는 내방~ 엄마! 용돈 줘~”하는 그 행세를, 늙은 엄마한테 또 그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럴 때 엄마가 아주 호되게 하죠. “니는 이제 니 밥벌이해라. 밥만 얻어먹지 말고 니가 설거지 하고 니 빨래하고 니가 다 해라. 내가 늙어가지고 니 것까지 해야 되느냐?” 그러면 하는 말이 “어릴 때는 나를 그렇게 예뻐하더니 왜 그렇게 차갑게 돌아섰느냐?” 이러고 있거든요. “니 밥벌이는 니가 해야지 그래.” 인간은 아무리 해도 변하지 않아요. 변하지 않는다는 말은 십대, 이십대에 했던 그 철없는 행세가 그대로 가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뭔가 달라지기를 원해요. 그 말이 맞는 거예요. 십대, 이십대는 일할 능력이 없으니까 준 거죠. 이거는 봐주는 거죠. 어머니의 은혜죠. 은혜. 근데 다 컸으면 어떻게 돼요? 이제는 은혜의 시효가 끝난 거예요. 나이 사십, 오십이 되어가지고 빌빌 놀면서 맨날 홈쇼핑만 하고, 밥도 빨래도 늙은 팔십대 엄마가 해줘야 돼요? 아니죠. 어느 게 정상입니까? 지 밥벌이는 자기가 하는 것이 정상이죠. 그동안 정상이 아니었던 것은 일할 수 없는 능력이 없었고 어렸기 때문에 밥벌이 할 때까지 봐주고 있었던 거죠. 우리가 살아있는 것이 지금 봐주고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 진즉에 지옥 보내도 우리는 할 말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봐주니까 계속 봐주는 줄 알고 착각하고 있어요. 나중에 지옥가거든 이런 소리하세요. “그때 세상에서 살 때는 뭐 공짜로 비주고 햇빛주고 하던데요?” 그거는 봐주는 거잖아요. 로마서 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 5장 45절에도 나오죠. 선인과 악인에게 햇빛주신다고. 이거는 악한 줄 알지만 봐주고 있는 거예요. 언제까지 봐줍니까? 마지막 인자가 오게 되면, 지옥가게 되면 봐주는 것은 끝났어요. 끝났습니다. 근데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자기 주제파악 하라는 이 말이죠. 내가 구원받고 싶다고요? 그거는 자기 분수를 모르는 거예요. 구원받고 싶었다고 이야기를 하면 안 되고, “왜 지옥 갈 사람을 뭉그적거리도록 계속해서 살려두십니까?” 이렇게 나와야 정상이다 이 말이죠. 근데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이미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아니고, 경험한 사람, 구원받은 사람의 입에서나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시 베드로전서를 한번 봅시다. 1장 17절,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죠. 그럼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신다면 그 판단하시는 것이 누구냐 하면 아버지죠. 그러면 아버지한테는 우리가 어떤 대상이냐 하면 아버지한테는 두려움의 대상일 수밖에 없어요. 행위대로 판단하시기 때문에. “니 밥벌이는 니가 해!” 그리고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구약에 율법대로 그냥 지나가지 않죠. 잘못했을 때는 거기에 해당되는 저주와 심판이, 책벌이 따박따박 주어지잖아요. 지금 아버지와 우리 사이가 그런 사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그것이 당연해요? 너무 심한 거예요? 당연하죠. 이 법이라는 것이 왜 있습니까? 법이라는 것은 벌주려고 있는 거예요. 그럼 벌주려고 법이 있다면 죄가 없는 곳에 법이 있을 일이 없잖아요. 이미 이쪽 동네가 뭐다? 지금 한창 뭘 만든다? 죄가 나온다는 것을 의식하고 법을 내린 겁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괜히 시비를 걸려고 가신 것이 아니잖아요. 소돔과 고모라에 천사가 가기 전에, 소돔과 고모라에서 뭐가 자꾸 올라옵니까? 완전히 불심판 받을 만한 죄들이 올라오잖아요. 그래서 간 거예요. 갔을 때 아브라함이 말렸습니다. “의인 열 명만 있어도 봐주세요. 열 명만 있어도.” 왜냐하면 의인 열 명만 있어도 죄인과 함께 멸망당한다는 것은 정의로운 하나님에게 모순된다는 것입니다. 악인이 당하는 것은 당연한데 의인이 당한다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이겁니다. 만약에 의인이 하나도 없다면 어떻게 할 거냐? 그건 당연히 멸망해야 되죠.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 보시기에 없는 거예요. 그러면 의인은 어디에 있느냐? 의인은 이 세상에 없어요. 없는데, 의인을 만들어주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줄 때, 그 언약 안에 있는 사람만 의인이 되는 겁니다. 그 아브라함의 기도에 의해서, 죄인이지만 그 언약의 범주에 들어온 사람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에요. 그래서 롯을 빼돌리고 다 불심판을 받을 때, 롯과 두 딸 빼놓고 다 멸망 받을 때, “자, 이러면 문제없지 그지?” 이러는 거예요. 그러면 이걸 다시 과거로 리마인드remind 해보게 되면, 아브라함과 관련된 사람, 언약과 관련된 사람이, 멸망당해도 마땅한 소돔과 고모라의 도시에 같이 섞여 사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표가 나려면 필히 심판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에요. 심판을 통해서 언약의 위력, 언약의 효과를 드러내야 하거든요. 심판이 없으면 언약의 효과가 없어요. 심판이 주어지게 되면 언약에 속한 자와 언약에 속하지 않은 자와 구분되게 되는 겁니다. 언약에 속하지 않은 자는 행함대로 조지기 때문에 그들이 벌 받는다고 해서 그들이 구시렁구시렁 대면 안 돼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행함대로 하기 때문에. 반면에 언약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대신 죄를 처리하는 장치가 그 안에 들어있어요. 따라서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이 용서받는 것도 바깥에 멸망 받는 사람이 거기에다 대고 구시렁구시렁 불만을 터트리면 안 되는 겁니다. 지옥 가는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에게 구시렁구시렁 대고 “쟤는 뭔데 봐 주냐?”라는 소리를 하면 안 돼요. 왜? 대가를 치렀거든요. 그래서 주님은 이 세상에 그 대가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 대가를. 그 대가가 오늘 본문 19절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죠. 그럼 돈이 대가가 아니에요. 돈이 대가가 아니라고요. 지금 초점이 누가 구원받느냐가 초점이 아니에요. 대가 자체를 주목하라는 거예요. 대가 자체를. 은이나 금이 아니죠. 그러면 복음과 돈이 있다면 어느 게 더 중요하다? 복음이 더 중요하죠(복음>돈). 그렇죠. 근데 이런 인간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복음과 돈의 관계에 있어서 돈이 더 중요해요(복음<돈). 그걸 어떻게 아느냐, 어느 것에서 히쭉히쭉 웃느냐를 보면 돼요. 어느 것에 히쭉히쭉 웃는가? 교회 가서 복음을 들었던 것이 히쭉히쭉 더 오래갔는지, 이게 아주 백만 한 번 백만 두 번하는 그 배터리가 오래갔는지. 아니면 로또를 샀는데 한 사십억이나 이십억이 들어왔을 때, “아휴! 이런 건 뭐 복음보다 가치도 없는 것인데, 귀찮아 죽겠어. 집도 좁아서 돈 쌓아놓을 데도 없는데.” 물론 수표로 하겠지만. 그 사십억을 찾아가지고 또 쓰려고 하니까, “집 두 채 사고 벤츠로 바꾸고 가게하나 낼까? 궁중족발해서, 또 잘못하면 쫓겨날 거니까 미리 준비해놓고. 아휴! 귀찮아 죽겠네. 왜 사십억을 줘가지고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하는지 모르겠다. 주여! 이런 벌을 왜 저한테 주십니까? 어찌하여 이런 벌주십니까?” 그럽니까? “역시 기도했더니만 복을 주시다니! 살아계시기는 살아계시는구나. 기도한 보람이 있구나.”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죠. 둘이 뭐 손잡고 울면서 “여보! 불행 끝 행복 시작.” 그 돈 찾으러 갈 때는 보디가드 한 두 세 명이 가가지고 혹시 깡패가 따라오는가, 도와달라는 인간들 전화 다 떨어버리고, 전화번호 다 바꾸고, 돈 빌려달라는 인간들 다 차단하고, 이사 가자고 하고, 사십억이 있는데 이 신월동에서 왜 삽니까? 지금 딴 데 갈 그 궁리를 하기가 바쁘죠? 그동안 사람들은 이론상 알아요. 예수님의 복음이 돈보다 더 귀하고, 그 찬송가도 있어요.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입에 침도 안 바르고 1절부터 4절까지 다 불러대잖아요. 근데 막상 돈을 더 벌었을 때는 몰론 좋을뿐더러, 돈을 더 번다는 기회는 자주 안 오니까. 평소에는 뭐로 알 수가 있느냐 하면 있는 돈이 날아갔을 때. 복음은 아는데 멀쩡한 돈이 날아갔을 때. 사기 당했거나 안 그러면 폐렴에 걸렸다든지. 갑자기 병원에 생돈을 냈을 때. 그냥 조용히 가다가 잠시 딴 데 봤는데 차를 박아서 한 이십 만원이 날아갔다든지 해서 보험이 할증돼서 더 받고. 뭔가 나는 아껴 살고 돈 벌면서 예수 믿고 더 바르게 살려고 하는데 남편이 차 몰고 가서 딱지 세장씩 끊어서 오는 거예요. 과속에다 벌점에다가, 나중에 보니까 칠만 원 짜리 한 개에 사만 원 짜리 두 개를 끊어왔을 때. 그게 복음으로 보충이 됩니까? 안 되죠. 그러니까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사람이 자기의 실패를 경험하지 않으면 자기가 누군지를 모른다는 거예요. 스크래치가 나야 돼요. 상처가 나야 돼요. 상처가 나야 어느 대목에서 내가 “아야!”라는 소리를 하는지를. 본인은 몰라요. 결국 경험이라는 것은 구원받은 경험 이전에 내가 죄인인 경험 속에 우리는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거 쓴 사람이 누구냐 하면 베드로죠. 베드로가 예수님 따라다니면서 베드로가 했던 그 모든 행적들이 마태마가누가요한복음에 다 나와 있잖아요. 베드로가 하는 것을 쭉 보세요. 베드로가 구원받을만한 일을 했던가요? 안 했죠. 오히려 베드로는 예수님한테, 사탄아 물러가라 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책망 받았잖아요(마16:23,막8:33). 근데 그게 베드로가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책망 받을 거라고 미리 예상을 했던가요? 자, 예수님께서 내가 고난 받는다는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자기는 사탄이라고 생각을 했었던가요? 아니죠. 자기가 알고 있는 경험은 나는 충실한 예수님의 수제자며, 예수님께서 나를 칭찬했다. 니는 베드로라 그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는 칭찬을 받은 것이 베드로의 지금까지 경험의 총합이에요. 그런데 거기서 불쑥 예수님께서는 내가 고난 받고 죽는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새로운 사태가 일어났어요. 새로운 사태가 일어났을 때, 베드로 본인이 생각하는 경험체제에서 불쑥 뭐가 튀어나오느냐 하면 거기에 대한 반응이 나왔죠. 그 반응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사탄아 물러가라고 했죠. 그러면 평소에 베드로는 자기 자신이 누군지를 예수님의 추가적인 발언이 오기 전까지는 본인이 알아요? 몰라요? 모르죠. 결국 이것은 뭐냐, 베드로의 제한적인, 작은 철없는 경험과 주님의 경험과의 마주침입니다. 이게. 그러면 성도가 은혜 받는 것은 성도의 자기경험입니까? 아니면 주님의 경험을 우리에게 제시했기 때문에 성도가 새로운 경험을 하는 거예요? 주님의 경험이 찾아온 거예요. 그 경험은 한번 주님한테서 오게 되면 내 것으로 전환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사기를 가지고 의사선생님이 환자에게 팔뚝에다가 주사를 놓게 되면, 그 주사액은 받지만 주사바늘을 환자가 똑 떼 가지고 이거는 내 것이라고 이렇게 하지는 않잖아요. 그렇죠. 링거바늘을 이렇게 꽂으면, 꽂은 채로 한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링거액이 계속 들어오잖아요. 그러면 링거액은 여기에 계속 남아있어야 돼요. 주님의 주사액이 우리 몸 안에 있어줘야 한다 이 말이죠. 있어 줄 때 주님의 경험이 침투한 셈이 되고, 주님의 경험 앞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우리의 경험은 죄다? 죄가 아니다? 죄가 되죠. 그래서 죄인이 구원받는 거예요. 우리가 하는 경험은 죄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그걸 몰랐죠. 우리는 선도 있고 악도 있고 이렇게 생각했죠. 선과 악 그 자체가 몽땅 죄가 되리라는 것은 감히 상상도 못했어요. 인간은 선악을 안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거는 나름대로 악이고 선이라고 분별력이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예수 믿는 것은 선이고 예수 안 믿는 것은 악이다. 자기 딴에는 이게 정답이라고 여긴 거예요. 근데 예수 믿는 것도 악이라고 하면 어떻게 할 건데요? 그게 죄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도 지옥 갈만한 죄가 된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아주 쉽게 이야기를 해서 인간의 경험이라는 것을 내가 되새기게 되면 나는 죽어있으면 안 돼요. 내 경험을 내가 판단하려면 나는 살아있어야 돼요. 근데 예수님의 경험은 이미 십자가에 죽어버린, 자기백성에게 죽임당한 경험이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서 산자가 아니고 죽은 자가 되겠죠. 죽은 자인데, 죽은 원인이 뭐냐, 우리의 죄 때문에 죽었잖아요. 그렇다면 죽은 자의 경험은 뭐만 나와요? 의는 안 나오고 죄만 계속 나오는 거예요.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살아있으면서 예수님으로부터 링거 꽂아서 그 피를 수혈 받을 때, 그래서 피를 마시고 살을 먹으면서 영생을 얻는데, 피와 살을 먹는 그 모든 바탕은 죄와 죄의 연발로 계속해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죄가 나오는 그 즐거움이 있어야 돼요. 이것마저 죄라는 기쁨이 있어야 됩니다. 전에는 이것이 의라고 여겼는데 그것마저 뭐로 변한다? 죄로 바뀌게 될 때, 그것이 바로 누구의 경험이 촉발된? 주님의 십자가로 촉발된, 더 정확하게 말해서 십자가 안에 있는 자에게만 경험되는 그러한 경험. 나는 죽은 자로 간주하시고 주께서 죽은 자를 다루심으로서 예수 안에서 산자가 된다는 그 경험을 계속하는 거예요. 죄로 인하여 죽고 의로 인하여 산다고 할 때 그 중간에 뭘 집어넣어야 해요. 죄로 인하여 죽고 그 다음에 뭐냐 하면 ‘대신’이라는 말이 들어가야 해요. 죽은 자를 대신해서 의가 활달하게 반응을 나타내는 겁니다. 의가 뭘 대신한다? 죽은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 안에서 작렬하는 거예요. 그 대신을 빼버리면 죽은 내가 살았다. 또는 나는 죄인인데 의인이다. 이래되면, 죄인이야? 의인이야? 분명히 하라고 한다면, 죄인인데 의인이다. 의인인데 죄인이다. 이래 돼버려요. 루터도 헷갈려서 자기도 나중에는 무슨 소리하는지 몰랐어요. 그 유명한 신학자 16세기 루터도 마찬가지에요. 인간의 구원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니까요. 대신 죽으심이 주목이 되어야 해요. 예수 그리스도가 주목이 되어야 하지, “나는 구원받았다.” 이것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면 안 돼요. 성도치고 그런 사람 없습니다. 나 구원받았다고 돌아다니면 안 돼요. “주께서 나를 그렇게 했다.” 항상 주님이 초점이 되어야 해요. 그럼 여러분이 아시는지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주님의 경험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가 뭐가 된다고요? 죄인이 되죠. 그 죄인 된 즐거움을 가지라고 했죠. 그러면 죄인 된 입장에서 로또를 샀는데, 죄인이 살 리도 없겠지만 샀다고 칩시다. 아니, 시지는 않고 바람에 날려서 우리 집에 들어왔다고 칩시다. 로또가 안 맞았어요. 떨어졌어요. 기분 좋아요? 나빠요? 기분 좋을 것도 없죠. 죄인이니까 마땅히 떨어져야 마땅하거든요. 그래서 죄인 되라고 하는 것은 다 넘겨줘야 해요. 다. 왜 사람들이 구원받았는데 기쁘지 않는 이유가 뭐냐 하면 다 넘겨주지 않아서 그래요. 다 넘겨주지 않아서. 일부 남겨둬서 문제에요. 은근히 노리는 것, 은근히 꿍쳐(감춰)놓은 것, 이것만큼은 못 내놓겠다고 해서 그런 거예요. 다 내어주는 것, 이걸 두 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 다 주는 것. 사랑은 다 주는 거예요.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다 주는 거예요. 아끼지 않고 다 주는 거예요. 왜, 다 줘도 괜찮은가 하면 어차피 갖고 있어도 쓰레기니까. 어차피 쓰레기거든요. 내 쪽에서는 쓰레기지만 주님께서는 그 쓰레기를 대신해서 활용해버리면 그거는 주님의 의가 돼버려요. 주님한테는 이게 쓸모가 있는 거예요. 내 쪽에서는 죄밖에 없어요. 죄 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 자체가 쓰레기고 죄인이라면, 죄인하면 뭐가 없어지느냐 하면 실패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되죠. 실패라는 게. 실패라는 말은 언제 하느냐 하면, 어느 정도 얼추 기대했는데 그 기대한 것을 이루지 못할 때를 실패라고 하는 거예요. 벌써 마음은 붕 떠 있는 거예요. 나 같은 가치 있는 인간 같으면 이 정도는 돼줘야 내 격에 맞는다고 생각하는 게 따로 있는 거예요. 그걸 주님한테 넘겨줘야 하는데, 넘겨주려고 하니까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그럼 이것마저 넘겨주면 나는 살 보람이 없고, 나는 살 희망도 없고, 비전도 없고, 드림dream도 없고, 꿈도 없고, 4대강 그것도 없고, 뭐 실적도, 업적도 기대 않는다고 하면, 이건 내가 죽은 것인데. 은근히 욕심이 나는 거예요. 그것은 바로 사랑을 받지 못해서 그래요. 사랑이 없으니까 궁핍한대로 자기사랑을 계속해서 고수하시는 겁니다. 목사가 되어서 꿈에 막 이런 게 나타나요. 꿈도 목사다운 죄를 지어요. 꿈속에서. 지금 꿈입니다. 교인들이 이만큼 왔는데, 열한시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십분 남았는데 옷도 안 입고 설교도 안 되어 있어요. 근데 사택이 바로 옆에 있어서 준비찬송 소리가 막 들리는 거예요. 그럼 급하죠. 지금 들어가야 하는데. 준비한다고 하는데 벌써 열한시가 넘었어요. 꿈속의 이야기입니다. 장로님들이 강대상에서 웅성웅성 거립니다. “목사님 오늘 못 오시는 모양이다. 그럼 다른 분 시키지.” 나는 옷 입고 나가려고 하는데 다른 분이 설교하고 있어요. 나가보니 벌써 예배 끝나고 다 가버렸어요. 자, 이런 꿈의 스토리에서 문제점이 뭡니까? 뭐를 의식한 거예요? 실패를 의식한 거예요. 실패를. 꿈이라는 것은 나의 여망을 이루지 못한데서 오는 공포감이 꿈이거든요. 불안감 같은 것. 그렇다면 이거는 준비를 할 때 혹시 실패하면 어쩌나가 이게 꿈에 나타난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나는 뭐 해서는 안 된다? 나는 절대로 실패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슨 근거로? 무슨 근거로 본인은 실패를 안 해야 되는데요? 왜 본인만은 실패를 안 해야 될 존재라고 성경 어디에 근거해서 그렇게 우기는 겁니까? 없죠. 그런 근거 없죠. 그래서 꿈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죄악 된 경험들이에요. 경험들이 의식이 중단된 상태에서 눈치 없이 코치 없이 마구 등장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꿈 이야기를 계속 해보면 그 다음부터는 그 꿈을 꾼 뒤에는 그 목사는 열시 반이 되면 단단히 준비를 하겠죠. 꿈에서. 미리 경고했다고 치고. 단단히 준비하겠죠. 그럼 결국 뭐예요? 나는 실패하지 않고 계속 내가 원하는 것을 성공하겠다는 겁니다. 이게 대신하심이 거기에서 표출이 될까요? 주님의 대신하심이 거기서 나오는 겁니까? 그래가지고 그 목사가 설교할 때는 예수의 피에서 설교합니다. 본인 경험은 예수의 피의 경험이 아니면서도, 본인은 예수의 피의 경험에서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는 실패하지 않겠다는 경험으로 충분한 가운데서 성경에 나와 있다고 베드로전서 1장 19절의 보배로운 피에 대해서 언급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 설교 제대로 했다고 스스로 자부하고 흐뭇해하는 겁니다. 그 인간 진작 죽어야 돼요. 죽어야 정신 차리지. 인간인 이상은 실패를 두려워 안 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인간은 반드시 목적과 목표를 자기의 임의대로 정하기 마련이고, 그 목적과 목표라고 하는 것은 자기 욕망과 현실상과의 그 괴리, 그 격차, 그 격차만큼 강렬하게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 폭만큼. 되고 싶은 것은 저쪽인데 내가 거기에 미흡했을 때 화가 나는 거예요. 분노가 일어나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무슨 행함이라든지 기도라든지 뭔가를 하고자 하는 겁니다. 그 간격을 메우기 위해서. 자, 메웠다고 칩시다. 만약에 내가 어떤 여자를 사랑하는데 그 여자는 원치 않아요. 근데 생각해봅시다. 그 여자를 내가 원하는 대로 나를 사랑하게 했다고 칩시다. 그 다음에 뭡니까? 그 다음에 뭘까요? 우리가 스스로 실패하는 순간 자기 자신을 알아요. 자 다음에는 요시よし,좋아! 성공해야지! 이래되면 안 되고, 실패하는 순간 나는 실패할 권한도 자격도 없을 정도로 애초부터 실패였다는 것이 되어야 돼요. 그러면 애초부터 내가 패배자라면 현재 있는 그것을 내가 끙끙대지 말고 누구한테 넘겨줘야 해요? 대신해결해준 주님의 몫으로, 내가 쥐고 있지 말고 주님한테 넘겨줘야 하죠. 주님께 넘겨주게 되면 우리는 빈터가 되죠. 빈터가 되는 순간에, 아침에 밥 먹고 점심에 밥 먹고 저녁에 밥 먹고 하는 이 모든 것이 뭐냐 하면 그동안 놓쳐버린 감사거리가 되는 겁니다. 감사거리. 주님 앞에 왜 감사거리가 안 나오느냐 하면 모든 것을 넘겨주지 않아서 그래요. 내가 노리는 것이 있기 때문에 감사가 나올 수가 없어요. 나름대로의 성공을 기대하기 때문에 주님이 주신 보혈의 피가 그다지 좋아지지를 않아요. “그거 어디에 써먹는데?” 이런다 이 말이죠. “내 조그마한 소망도 안 이루어주는데 그거 어디에 써먹는데?” 그런다 말이죠. 예수의 피는 예수의 피고 나는 내 포부를 이루겠다는 야무진 자기의 가오(폼)같은 게 있거든요. 결심 같은 거. 제가 묻고자 하는 것은 이거에요. 그래서 얻고자 하는 것은 뭡니까? 얻고자 하는 게? 야무진 결심 같은 거 다 좋은데, 결국 거기서 챙기고자 하는 것이 뭐예요? ‘대신 죽으심’을 제거해버리는 겁니다. 나는 내 힘으로 살아왔다고 그렇게 외치고 싶은 거예요. 그게 바로 쓰레기에요. 하나님 보시기에. 그게 바로 지옥가도, 저주받아도 할 말이 없는 거예요. 지옥 간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 우글거려요. 지옥 간 사람들이 평소에 어떻게 살았는지 한번 생각해볼까요? 그건 10분 쉬고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