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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인생 재편 180713강의베드로전서

서울의존강의20180713a 베드로전서1장 17-20절(인생 재편)-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1장 17-20

17절,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18절,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절,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20절,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이렇게 되어 있죠. 이게 논리상 앞뒤가 바뀌어있어요. 논리상으로는. 보통 논리적으로 A다음에 B가 되거든요(A→B). A에 해당되는 사람에게 추가적으로 어떤 요소가 되게 되면 이게 B가 됩니다(A+추가요소=B). 원래 인간의 모든 논리는 내가 여기에 있는데, 하나님 쪽에서 뭔가 하시는 이야기, 그게 복음이든, 율법이든, 믿음이든, 어떤 정보가 흘러들어오게 되면 여기에다가 플러스, 보태게 되면 나는 여기에 있고 추가해서, 이 정보를 포함해서 나는 뭔가 달라진 자가 된다. A가 B가 된다. 동일인물이지만 뭔가 추가된 정보에 의해서 동일인물이 달라진 인물이 된다는 것이 우리의 논리입니다.

이게 인간의 논리거든요. 뭘 들었다는 것은, 배웠다는 것은 흘려보내라는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니 요소에다가 이 추가된 요소를 덧붙이라는 그런 이야기잖아요. 교회가면 목사님이 설교할 때, “이거 안 들은 것으로 하시고 잊어버리세요.” 이렇게 설교합니까? 그렇지 않잖아요. “오셨으면 이거 하나 보태시기 바랍니다. 보태시면 여러분들은 아마 새로운 사람으로, 괜찮은 사람으로 향상될 수 있습니다.”라는, 그런 취지로 설교를 하죠. “뭐, 안 들은 척 하세요. 이상한 것 들었거든 버리세요.” 이렇게 하지는 않는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 논리를, 오늘 베드로전서에서는 이 논리를 용납하지를 않아요.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허용이 되느냐 하면은, B부터 먼저 시작해요. 논리가 거꾸로 가서 A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은 B에 이미 포함이 된 사람만 A라는 사실이 들추어지는 겁니다(B⟶A). 보통 인간은 A에서 B로 가는데(A→B), 본문 베드로전서에서는 이 A에서 B로 갈 때에 A의 이야기가 B의 논리에서는 이 A가 없는 거예요. 없다 이 말이죠.

이게 터무니없는 예지만, 이 말씀 자체도 터무니없으니까,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해볼게요. 결혼한 지 10년 됐는데 애기가 없어요. 주위에서 뭐 입양해라, 시험관애기 해봐라, 그런 제안들이 들어올 게 아닙니까? 근데 애가 없는 이유가, 애 없이 우리끼리 재미나게 살아보자고 했는데, 슬슬 나이가 들고, 부부간에 봐도 정도 안 나고, 이제는 애 키우는 재미 외에는 달리 뭐 다른 재미가 없을 때, 부부가 서로 이야기를 해가지고 이제 우리도 애를 낳자고 해요. 그럼 그러자고 이랬다 이 말이죠.

그럼 애를 낳자고 하면 부부가 동침을 하든지 해서 애를 낳아야 하는데, 애를 낳자고 하자마자 일주일도 안 되어서, “여보! 애 낳아가지고 왔어.” 남편 쪽에서 애 하나 낳아가지고 오게 되면? 이상하죠. “어? 당신하고 나 사이에서 애를 낳아야하는데, 나 없이 애가 나왔다는 것은 논리가 이상하네.” 이래 되죠. 그럼 남편이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하죠. “내가 원래 그런 인간이야. 나는 여자 없이 애 낳을 수 있어.” 이래 나온다면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너 빼고 애를 낳았다는 거예요. 너 말고 구원하는 자를 예수님 쪽에서 만들어냈다는 겁니다. 우리는 무슨 생각하느냐 하면 나를 재료로 사용해서, 나를 집어넣어서, 구원받지 못한 내가 예수님을 경유해서, 예수님의 새로운 정보가 들어와서 구원 못 받은 인간이 이제는 구원받았다. 이걸 기대했는데,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니 제키고, 너 빼놓고 구원하는 사람을 제시해버렸어요.

그럼 여기서 무엇이 탈락되느냐 하면,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내 쪽에서 무슨 시도를 논리적으로 먼저 선행하면 됩니까? 라는 사실을 주님께서는 받지를 안 해요. 받지를 않습니다. 이거는 인간이 구원받고자 하는 모든 시도가 소용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왜 인간의 구원시도를 안 받아주느냐 하면, 우리가 구원받을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구원받을 대상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을 자를 예수님에 의해서 새롭게 조성해내는 겁니다. 만들어내요. 아까 그 터무니없는 예가 적절하죠. 우리의 애가 아니에요. 남편의 애에요. 그래서 우리라고 집어넣어서, 아내까지 포함해서 내 자식이라는 그런 기대는 남편이 의도적으로 그걸 회피해버려요. 의도적으로 회피해버려요.

그럼 이야기를 더 발전시켜 해봅시다. 예수님의 의해서 새로운 성도가 등장했을 때, 사람은 무엇과 무엇을 비교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제시한 성도된 조건을 제시하겠죠. 예수님에 의해서 새로운 성도가 되었기 때문에 그 조건이 있을 거잖아요. 조건이. 이러이러한 자가 성도다, 라는 조건이 있잖아요. 조건이 있다면, 조건을 주께서 미리 제시하게 되면, 우리는 그 조건을 내 구원하기 위해 필요한 아이디어로 끌어당겨서 활용해버려요.

구원된 자는 이러이러한 자라고 해버리면, 그 구원된 조건을 내가 나에게 가져와요. 가져와서 내 행함으로 그걸 실시해버립니다. 그럼 논리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내가 먼저 있고, 구원된 자는 이러한 조건이라면, 나에다가 플러스를 시켜가지고 하나님이 원하는 합당한 구원된 자로 짜잔~! 하고 자기를 내세우려고 의도하겠죠. 그게 인간들이 하는 논리라 이 말이죠. 그래서 그 논리를 주님께서는 역으로 가져가버리는 거예요.

더 쉽게 말해서 구원받은 자는 예수님의 피를 믿는 자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내가 여기에 있는데,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피를 믿으라고 했으니까, 내가 예수님의 피를 믿어버리면 내가 믿는 피의 요건 하나가 더 추가되어서 나는 구원받은 자가 돼버려요. 그렇죠. 그래놓고 구원받았다고 우기는 겁니다. 그런데 이래서 천국 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거 지금 장난치고 있는 겁니다. 농간하고 있는 거예요.

학교에서 선생님이 이야기를 합니다. “이번에 시험을 치는데 문제가 이 문제, 이 문제가 나온다. 거기에 집중해서 공부를 해라.”라고 했을 때, 학생이 물어봅니다. “그 문제를 풀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합격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애들이 자기 자신을 합격시키기 위해서 선생님이 제출한 그 문제를 풀어서, “선생님! 저 풀었습니다. 저 합격이죠?”라고 제출하는 거예요. 그런데 선생님께서 “나 이미 합격자 다 따로 뽑아놨는데. 니 어디서 왔지?” “선생님, 제가 이 문제 풀었잖아요?” “그게 어떻게 푼 게 돼? 그거 어떻게 풀었어?” “제가 보기에는 이게 맞는데요? 백점인데요?” “그건 니가 봐서 그렇지. 니가 본 거지.”

문제를 더 심화시켜봅시다. 더 깊게 들어가 봅시다. 지금 나라는 이 자체도 괜찮은데, 괜찮고 점잖은 존재인데, 단지 뭐가 필요 하느냐 하면 “구원받는데 이거가지고 충족될까?” 하고 있었는데, 베드로가 하는 말이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이 점잖은 데에다가 뭘 보태느냐 하면 예수님의 피를 믿는다고 함으로써, 점잖은데다가 구원까지 받아버린, 진짜 괜찮은, 성도는 성도인데 괜찮은 성도로서 자기가 되겠다고 자기가 기대를 하죠.

근데 이것이 합격자의 모습이라고 누가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본인이 이미 기대를 했잖아요. 본인이 이미 기대했다고요. 그런데 예수님이 만든 사람에는 이런 종류의 사람이 없어요. 예수님의 구원에는 이런 사람이 없어요. 이런 사람을 넣어준 적이 없습니다. 이건 인간들이 괜히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구원받은 사람은 뭐냐, 예수님의 피를 믿은 사람이죠. 그거나 이거나, 내가 예수 피 믿나, 이렇게 생각하시는데,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에 의해서 후차적으로 생겨난 사람을 구원된 자로 보는 거예요. 시작이 예수님의 피라 이 말이죠. 시작을. 예수님이 자기 피로 만든 사람이 구원받은 자예요.

아니, 이게 어려워요? 어렵습니까? 하여튼 나는 아니에요. 무조건. 무조건 나는 아니에요. 예수님의 피로 구원한 사람이 등장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라는 것을 단순하게 생각해서 땅에 못 같은 것이 있으면, 못을 이렇게 들어 올릴 때는 자석가지고 하면 달라붙잖아요. 달라붙죠. 주님께서 흘리신 그 피라는 것이 자석 같은 것이 아닙니다. 기존에 있는 것을 그냥 잡아당기는 것이 아니에요.

피라는 것이 에너지가 아니에요. 피라는 것이. 구원의 힘, 구원에 필요한 능력 같은 것이 아니에요. 피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신 것은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있는 힘을 쪽 빼버리죠. 인간세계에서 힘이 없다는 말은 아무런 결과가 나온다? 안 나온다? 안 나오죠. 어떤 일이 있다, 거기에다가 어떤 결과를 나오게 하려면 그 중간에 무엇이 새롭게 추가가 되어야 해요? 힘이 추가가 되어야 합니다. 인간들은 있고 거기에다가 힘이 추가가 되게 되면 그게 원하는 바가 된다. 이게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이잖아요.

근데 예수님의 피는 인간들이 있다고 하는 이것 자체도 없음으로 돌려놓는다 이 말이죠. “치워버려라! 이 쓰레기!” 하고 없애버리는 거예요.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이 다 죽은 것이다(고후5:14).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그러니까 살아있는 채로 예수 믿어서 구원받겠다고 하는 이 의도가 무엇을 오해하고 있느냐 하면 예수님이 피 흘리신 그 취지를 전혀 모르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의 피는 모든 것을 없애버리는 겁니다. 있더라도 없는 존재에요. 있어도 소용이 없는 거예요.

그리고 그 피로서 모든 인간을 죽이시고, 그 다음에 피 흘리신 예수님을 아버지께서 사흘 만에 살려냈잖아요. 살려냈으면, 거기에 뭐가 담겨 있느냐 하면 죽은 자를 대신했다는 그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죽은 자를 대신했다는 것. 그럼 죽은 자를 대신하려면 살아있어야 되겠어요? 죽어있어야 되겠어요? 죽은 자를 대신한다는 그 의미를 부각시키려면 이 사람이 살아있어야 돼요? 죽어있어야 돼요? 처음부터 죽어있어야 되겠죠. 죽어있다 이 말이죠. 죽어있는 자를 대신해서 살려냈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어떤 꼼수를 쓰느냐 하면 죽어있는 척을 하는 거예요. 죽어있으면서 눈을 딱 뜨는 거예요. 주께서 피 묻는 모습으로 데리려오는가 싶어서, 혼자 들킬까 싶어서 한쪽은 가리고, 주님이 부르면 “저요!” 하고 손들 준비하고 있어요. 피라는 것은 죽은 척 하는 것이 아니고 죽었다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죽은 척 하고 있으면 그냥 지나가겠죠. 죽은 척을 하려면 그 죽은 척 하는 당사자가 죽어있어야 돼요? 살아있어야 돼요? 살아있어야 죽은 척이라도 한다 이 말이죠. 연기를 할 수 있잖아요. 결국 이거는 뭐냐, 인간은 살아있는 한 죽은 척은 흉내 낼 수 있어도 살아있는 인간이 스스로 죽일 수는 없는 겁니다.

제가 여러 번 이야기를 했지만, 수면내시경을 해보셨어요? 수면내시경을 할 때 저같이 호기심 많은 사람은 정신이 말짱할 때와 정신 잃었을 때의 그 경계선이 궁금한 거예요. 그래서 처음에 마취한다고 할 때는 정신이 혼미하지 않잖아요. 정신 차리자! 정신 차리자! 내가 정신 차리고 있으면 의사가 와서 입 벌리고 들여다보겠지. 내가 마치 마취된 것처럼 간주해서 할 것이다. 정신 차리자! 정신 차리자! 정신 차리자를 열 번만 하자. 정신 차리자, 정신 차리자, 정신 차리자, 일곱 번 반을 했는데, 깨보면 벌써 회복실에 가 있어요.

정신차리자와 진짜 정신을 잃어버린 그 경계선은 정신 차리자 하는 그 상태에서는 절대로 그 경계선을 경험할 수가 없어요. 중요한 이야기를 했죠. 경험할 수 없다. 살아있는 인간은 죽은 척은 할 수 있지만 죽음의 경험은 인간에게는 배제되어 있어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뭐 해야 돼요? 기껏 해야 죽은 척 밖에는 할 수 없는데, 죽은 척은 주님께서 안 받아준다면 우리는 뭐 하면 돼요? 그냥 사는 거죠. 막 사는 거죠. 아무리 해도 안 되니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저는 죽었습니다.”라는, 이 발언을 내뱉는 순간순간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런 발언을 하거든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나는 날마다 내 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삽니다.”라고, 발언을 내뱉는 자체가 지금 죽은 게 아니고 살아있으니까 이런 흉내 내기를 한다는 그런 고백밖에는 안 돼요. 이래나 저래나 우리는 경험할 수 없는 그것을 주님께서는 우리의 경험으로 예수님의 핏속에서 제공해주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과 경험 못해가지고 경험하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과 차이점은 뭐냐, 그건 의외로 쉬워요. 그 차이점은 첫째 경험하지 못한 자는 죄용서 받고 싶다. 누가? 내가. 내가 죄용서 받고 싶다는 거예요. 그러나 이미 경험한 자의 특징은 뭐냐, 용서받았다가 돼요. ‘수면내시경하면서 의사선생님이 곧 오겠지.’ 그건 아직까지 정신 말짱한 거예요.

그런데 회복실에 있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끝났네! 끝났어!” 수면내시경은 끝났어요. 나한테 의논하지도 않고 협의하지도 않죠. 마취한 사람한테 무슨 협의가 됩니까? 죽어있는데. “여기 봐주세요. 저기 봐주세요.” 뭐 이렇게 논의를 한 적이 없어요. 그냥 자기는 퍼져가지고 눈 떠보니까 회복실에 와 있다 이 말이죠. 그럼 뭐냐, 끝났네! 이걸 성경적용어로 뭡니까? 다 이루었다! 이 말이죠. 다 이룬 거예요.

그럼 다른 사람이 묻죠. “당신은 어떻게 용서받았습니까?” “주께서 하셨습니다.” 그럼 그쪽에서 못 알아듣고 “주께서 하신 것은 이해가 되는데, 나도 주께서 하신 것을 믿는데, 어떻게 했더니만 주께서 하셨습니까?”라고, 자꾸 방법론을 제시하라고 윽박지르는 거예요. 왜냐하면 경험을 못했기 때문에. 그 경험을 인위적으로 유발시키고 조작해내려고 하는 거예요. 그럼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어요. “당신은 왜 자꾸 용서받고자 하십니까?”라고 물으면, 그쪽에서 하는 말이 “내가 살면서 돈 벌다보니까 죄를 많이 지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이야기하세요. “죄지었으면 지옥가야죠.”

그러니까 그게 얼마나 큰 욕심입니까? 죄는 죄대로 지어놓고 지옥은 안 가려고 하고. 이거 뭐 그렇게 터무니없는 인간이 어디에 있어요? 터무니없는 인간이. 여러분 가족 중에 밥은 먹으려고 하고 일은 안 하고. 그거 참 못 됐죠. 어릴 때는 일은 안 해도 밥 줘요. 그런데 스물 몇 살 쯤 되어서 지 좋다고 남자만나서, 그렇게 집안에서 말려도 이십 대 초반에 떡하니 결혼해놓고, 이십대 후반에 가서 둘이 맞짱 뜨고 싸워놓고는, “엄마! 갈라섰어.”하고 와요. 이렇게 갈라서고 이제 친정에 왔으면 밥벌이를 해야 돼요.

그런데 꼭 철딱서니 없는 것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옛날 시집가기 전에 했던 대로 “이거는 내방~ 엄마! 용돈 줘~”하는 그 행세를, 늙은 엄마한테 또 그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럴 때 엄마가 아주 호되게 하죠. “니는 이제 니 밥벌이해라. 밥만 얻어먹지 말고 니가 설거지 하고 니 빨래하고 니가 다 해라. 내가 늙어가지고 니 것까지 해야 되느냐?” 그러면 하는 말이 “어릴 때는 나를 그렇게 예뻐하더니 왜 그렇게 차갑게 돌아섰느냐?” 이러고 있거든요. “니 밥벌이는 니가 해야지 그래.”

인간은 아무리 해도 변하지 않아요. 변하지 않는다는 말은 십대, 이십대에 했던 그 철없는 행세가 그대로 가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뭔가 달라지기를 원해요. 그 말이 맞는 거예요. 십대, 이십대는 일할 능력이 없으니까 준 거죠. 이거는 봐주는 거죠. 어머니의 은혜죠. 은혜. 근데 다 컸으면 어떻게 돼요? 이제는 은혜의 시효가 끝난 거예요. 나이 사십, 오십이 되어가지고 빌빌 놀면서 맨날 홈쇼핑만 하고, 밥도 빨래도 늙은 팔십대 엄마가 해줘야 돼요? 아니죠. 어느 게 정상입니까? 지 밥벌이는 자기가 하는 것이 정상이죠. 그동안 정상이 아니었던 것은 일할 수 없는 능력이 없었고 어렸기 때문에 밥벌이 할 때까지 봐주고 있었던 거죠.

우리가 살아있는 것이 지금 봐주고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 진즉에 지옥 보내도 우리는 할 말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봐주니까 계속 봐주는 줄 알고 착각하고 있어요. 나중에 지옥가거든 이런 소리하세요. “그때 세상에서 살 때는 뭐 공짜로 비주고 햇빛주고 하던데요?” 그거는 봐주는 거잖아요. 로마서 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 5장 45절에도 나오죠. 선인과 악인에게 햇빛주신다고. 이거는 악한 줄 알지만 봐주고 있는 거예요. 언제까지 봐줍니까? 마지막 인자가 오게 되면, 지옥가게 되면 봐주는 것은 끝났어요. 끝났습니다.

근데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자기 주제파악 하라는 이 말이죠. 내가 구원받고 싶다고요? 그거는 자기 분수를 모르는 거예요. 구원받고 싶었다고 이야기를 하면 안 되고, “왜 지옥 갈 사람을 뭉그적거리도록 계속해서 살려두십니까?” 이렇게 나와야 정상이다 이 말이죠. 근데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이미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아니고, 경험한 사람, 구원받은 사람의 입에서나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시 베드로전서를 한번 봅시다. 1장 17절,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죠. 그럼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신다면 그 판단하시는 것이 누구냐 하면 아버지죠. 그러면 아버지한테는 우리가 어떤 대상이냐 하면 아버지한테는 두려움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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