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세계 180713
안양20180713a야3장1절(말의 세계)-이 근호 목사
야고보서3장1절에서 12절까지 하겠습니다. 기니까 생략하고요, 제가 그냥 1절부터 12절까지 흐름만 딱 말씀드릴게요. 선생은 말하는 사람인데 말을 할 때에 주의하라. 그리고 그 주의해야 될 것은 주의해야 될 이유가, 그 입으로 하나님을 9절에 보면 찬양하기 때문에 그렇고, 그것이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말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선생 된 자는 주의하라. 이렇게 돼있거든요.
그러면 이것은 선생이 아니다. 라는 사람은 볼 필요 없다. 이래 될 논리가 될 수가 있어요. 그러나 이것은 누구보고 특정해서 이렇게 하라, 하지 마라가 아니라 이렇게 생각해야 돼요. 왜 말을 하는 선생 된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내 말하는데 주의성을 그렇게 강조 하는 취지가 뭐냐, 고걸 캐치해야 됩니다. 그러면 이 성경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우리한테 한 이야기죠.
그럼 왜 그렇게 해야 되느냐 하면 요게 참 오묘해요. 보통 사람들한테는 이렇게 사람이 있고 또 사람이 있잖아요. 있으면 우리는 사람의 A라는 이 덩치, 덩어리, 육신, 우리 눈에는 육신과 육신이 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는 육신과 육신을 인정하지 않아요. 네가 보는 어떤 덩어리, 덩치 이걸 인정하지 않고 뭘 인정하느냐, 주고받는 말을 인정합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 야고보서3장7절에 나옵니다.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이 말은 쉽게 해서 짐승과 인간의 차이점이 뭐냐를 하나님께서는 이미 규정해 놓았습니다. 짐승은 말 없음, 말 못함. 인간은 말을 함. 이런 차이점이 있어요. 이런 차이점을 가지고 창세기1장을 그대로 가져가버립니다. 그러면 창세기1장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면 인간과 짐승의 차이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 없음. 형상 있고 형상 없고 이렇게 되거든요.
야고보서3장9절에 보면 그런 암시가 나와 있어요. 그러니까 야고보서3장9절에서 뭘 연관시키느냐 하면, 말과 무엇과 연관시켰다? 형상과 이렇게 직접 연관시켰다. 이런 뜻입니다. 인간이 무엇이냐, 니 말하는 품새, 말하는 내용을 통해서 그 인간이 어떤 인간인가를 하나님께서는 규정 하겠다. 이 말입니다. 규정하겠다는 말은 심판하겠다는 그런 말과 같지요.
그래서 이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 또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나왔을 때에 야고보는 말을 통해서 잠재되어 있는 형상이 외부로 드러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야고보서는 그렇게 보는데 일반적인 교회나 신학에서는 야고보처럼 이렇게 이야기하지를 않아요.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윤리성과 도덕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이렇게 규정해 버립니다.
이렇게 윤리성과 도덕성을 규정하는 것은 이것은 잘못이에요. 왜 잘못이냐 하면 윤리성과 도덕성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이게 되려면 선과 악이라는 체계 안에 있어서만 이게 윤리성과 도덕성이 나오게 되어있어요. 체계 안에서. 그런데 선악을 안다는 자체가 하나님께서 내치는 조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창세기2장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것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추방됐다 이 말이죠.
하나님이 보시기에 추방될 수밖에 없는 그런 조건을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을 끄집어내는 것은 이건 옳지 않은 거예요. 왜 윤리성 도덕성이 하나님께서 내칠 수밖에 없느냐 하면, 윤리성 도덕성은 결국 무슨 결과를 낳느냐 하면 이것은 선이다. 이것은 악이다. 요 두 가지를 대조해서 끄집어내는 겁니다.
그럼 이건 무엇과 나중에 연결되느냐 하면 자기 변명조로 자기변명과 핑계로 이어지게 돼있어요. 기어이 나는 착해지고 싶어서. 심지어 조폭들 사이로도 이런 게 있어요. 조폭들. 나쁜 짓해도 사회가 그래서 그렇다든지 어릴 때 부모를 일찍 돌아가셔가지고 고아원에서 자라다 보니까 내가 못 배워서 그렇다든지 모든 탓을 자기는 여전히 선한 쪽에 있다는 것을 발악을 하듯이 주장하게 돼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자기 잘난 맛에 교회에 오는 거예요. 교회 손님들이 자기 잘난 맛에. 그래서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당신은 이렇게 하시면 잘남이 더욱더 확대됩니다.” 하면 거기에 “어메! 기 살어.” 해서 죽기 살기로 그 의와 도덕을 유지하려고 온갖 짓을 다하지요. 그러면 거기서 레벨에 따라서 선한 레벨과 악의 레벨에 따라서 점점 더 선과 악의 레벨이 높아지게 돼있어요.
어떤 식으로 높아지느냐 하면 남이 감이 나를 따라오지 못하는 레벨로 점점 내빼게 되는 겁니다. “따라오려면 따라와 봐!” 이게 교회에서 경쟁마당이 된 거예요. 경쟁마당. 신비주의가 왜 생깁니까? 새벽기도가서 옆에 사람이 대충 기도하고 나서려고 하는데 이거 뭐 초자가 와서 나보다 더 끓어 앉아있으니까 이게 자존심이 확 상하잖아요. ‘니 오늘 한 번 보자.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이리 한다고요.
그런데 개척교회 목사님 같은 경우에는 그렇게 되면 진짜 개척교회 목사는 속상하지요. 왜냐하면 겨울에 새벽기도하면 기름을 때야 되잖아요. 한 시간 있으면 기름 값이 얼마인지를 계산이 된다 말이죠. 둘이 버텨버리면 빨리 목사는 끝나고 집에 가서 자야 되는데 아침 일찍 나왔기 때문에 자야 되거든요. 큰 교회야 여유 돈이 있으니까 보일러 계속 돌아가도 되는데. 이게 배틀. 현금 배틀, 기도 배틀, 선교 배틀, 부흥 배틀, 청소, 꽃꽂이 전부 다 배틀 들어가는 겁니다.
기어이 자기는 니가 따라올 수 없는 높은 자리에 있다 하는 그래서 설악산 같은 데에 갈 때에 높은 곳 보게 되면 저 밑에 헉헉거리는 거 보면 참 가찬지요. 에이~~ 멀었네. 높은 산에 가서 자긍심을 제공해서 세상에서 주눅 들고 실패한 거 교회 와서 칭찬받음으로서 자기의 존재의 가치를 회복하는 그러한 심리적인 치료, 힐링 그런 것을 노리고 교회에서는 그렇게 사람들을 모으는 겁니다. 다 교회 사람들 왜 오느냐, 지 잘난 맛에 와요.
그러면 선악은 결국 어떤 부작용, 후유증을 낳느냐 하면, 이게 공포를 낳아요. 공포를 놓는다. 아무리 착하고 착해도 착한만큼 자기 자신의 착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철저에 철저를 기하다 보면 예상에 없는 사태가 벌어졌을 때에 그동안 쌓아온 나의 의로움과 착한 윤리에 흠집나지 않을까 주야로 걱정해요. 주야로. 걱정이 굉장히 되는 거예요. 스스로 공포를 만들어요.
그런데 요한일서4장에 보면 사랑에는 뭐가 없느냐 하면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 했지요. 오늘 강의 처음에 제일 중요한 게 뭐냐 하면 참, 오늘 강의 처음이 중요하지만, 끝까지 중요한 거 말씀드리겠습니다. 끝까지 중요한 거예요. 한 번 적어볼게요. 이건 말로 해서는 안돼요. 너무 중요해서.
“‘다행이다.’를 결정하는 조건은 이미 나타났다.” 다행이다를 결정하는 요건은 이미 나타났습니다. 다행이다! 가 뭐냐 하면 나에게 어떤 실수를 하고 내 인생이 어떻게 구겨지고 망가진다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묻지도 않고 따지지 않는 조건이 이미 나타났어요.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는 거예요.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는 겁니다.
자, 피가 내 이마에 탁 붙어있다. 포스트잇을 이마에 붙였다 합시다. 여기에 피, 하나님의 약속된 피 입니다. 자기 피 아니에요. RH+ 이런 거 아니에요. 약속된 피를 이렇게 붙였다. 그럼 주님께서는 뭘 보느냐 하면 피를 보거든요. 그럼 주님의 시선은 피에 가있다 말이죠. 나의 행동에 안 가있어요. 어떤 인간도 이미 아담의 자손이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지를 못하는 이유가 뭐냐, 인간이 첫째는 율법이 뭔지를 모르고 두 번째는 자기가 누군지를 몰라요. 두 가지 다 모르기 때문에 율법을 못 지키는 거예요.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킬 때에 예수님이 와야 율법의 내용을 아는데 예수님 오기 전에 자기 딴아 율법을 안다고 우겼고 두 번째는 내가 얼마나 자기밖에 모르는 못된 인간인 것을 예수님 오기 전까지는 몰랐어요. 내가 오기 전까지는 죄로 드러나지 않다가 내가 오고 난 뒤에는 죄로 드러났다. 두 가지를 모르기 때문에 율법을 못 지킵니다.
못 지키지만 마귀가 이미 인간을 선과 악을 지키기 때문에 뒤에서 군불 때는 거예요. 계속 부추겨서 산에 올라가게 만들어요. 자꾸 산에 올라가게 해가지고 타인과의 상대적 비교를 통해서 우월감이라든지 자긍심 승부 걸도록 부추기는데 그렇게 되면 뭐가 생긴다고 했습니까? 공포심. 불안. 두려움.
내가 지금껏 교회 50년 60년 다니며 쌓아놓은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다 날아가면 어쩌냐 하는 거예요. 이건 교회에 온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교회에 안 나온 사람들 공자, 맹자하는 사람이나 종교 없다 하는 사람들도 전부 다 지 자존심 때문에 살잖아요. 자존심을 딱 깨보면 수십년동안 자기 인생 살면서 쌓아놓은 자기가 남한테 기죽지 않을 만큼의 뭔가 형성된 게 있어요. 기죽지 않을 만큼의 형성된 것. 그게 허풍이고 허세인데 특히 남자한테는.
허풍과 허세 지키기 위해서 온갖 과도한 짓을 하면서 “나 건드리지 마! 나 이정도 잘났다.” 하는 게 있어요. TV에 그런 게 있어요. 나오는 게 있어요. 살림남. 살림남에 광산김씨. 광산김씨는 잘 모르지요? 순박한 허세남이거든요. 아들 하나는 연애인인지 아닌지 경계가 모호한 놀면서 일하는 그 하나 있고 또 아이 하나는 식당하면서도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식당을 시작했고, 그 아내는 미스 주부대회에 나가가지고 예선에 떨어진 사람이에요. 광산김씨 그걸 아주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게 있어요. 그걸 보면서 뭘 보느냐 하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 품새를 대표적으로 보여줘요.
그 사람은 개뿔도 없으면서 누가 없다고 이야기하면 화를 벌컥 내는 거예요. 사람이 점을 왜 보느냐, 두려움 때문에 봐요. 점치는 거 무서워서 보는 거예요. 요한일서4장18절에 보면 사랑은 두려움이 없다 했지요.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쫒는다. 이렇게 되어있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성도한테 얼마나 하나님께서 부지런히 일하는지 보세요. 끊임없이 두려움을 내어쫒는 식으로 주께서는 이 피라는 이걸 붙여가지고 계속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강조하는 거예요.
니가 귀한 거 받아놓고도 니가 쓸 줄을 모른다는 거예요. 다행이다! 이 다행이다 하는 게 천국 갔을 때만 다행이 아니고 모든 매사가 피가 요건이 개입되어서 다행이다. 가 되는 겁니다. 집에 불이 나도 다행이고, 아들 가출해도 다행이고, 이 사랑을 훼손시키고 와해시킬 어떤 조건도 추가적인 조건은 이 세상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심정을 성도가 같이 공감되어야 돼요. 이건 요한일서에 보면 성령이 와서 그렇게 하신다 했는데.
니가 받은 게 얼마나 고귀하고 귀한 것인지 온 천하보다 귀한 걸 받아놨는데 뭐가 그렇게 아쉬워서 벌벌 떨고 있느냐, 이리 묻는 겁니다. 어떤 교회법, 어떤 세상 윤리, 도덕법이라도 이 사랑의 다행이다를 그걸 취소시킬만한 이유는 요건은 더 이상 없습니다. 손에 장 지으라 하면 장 지을게요. 어떤 경우라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피를 흘려서 이 사랑의 피에 응축되는데 그 피를 흘림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모든 걸 완료했다면 마귀의 노리는 점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마귀는 인간에게 모든 걸 다 허용합니다. 자유도 주고 모든 걸 허용하되 단 하나만큼은 절대로 거기에 관심두지 않게 합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다행이다! 예수님의 피로 다 이루었다! 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으로 다 이루었다. 그건 교회에서나 절에서나 세상에서나 그건 절대 발설 못하도록 계속해서 겁주는 식으로 하지요.
교회 나와서도 집구석 망해놓고 헌금 십일조를 안 해서 그렇다.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공갈 협박 보이싱피싱하는데 계속해서 겁주는 거예요. 빨리 통장 바꿔야 한다고. 그러면 그 협박 공갈에 말려든 사람은 뭐냐 하면 자기 자랑하기 위해서 교회 온 사람은 다 말려들어요. 그런데 처음에 교회 올 때는 지 자랑하러왔다가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복음 듣고 다행이다를 이미 선점해버린 사람한테는 아예 도배를 다행이다. 예수의 피로 자기 영혼을 도배를 한 사람한테는 그 협박 공갈에 우습지요. 진짜 웃기네!
아~ 교회가 저리 장사하는구나. 아~ 저렇게 하는구나. 믿음이 없으니까 목사 됐구나. 믿음이 없는 조건하에 마귀가 목사를 되게 한 거예요. 장로도 마찬가지고. 아~ 교회 운영을 저리하는구나. 그 운영 법을 알게 된 거죠.
그렇다면 다시 야고보서 돌아가 봅시다. 하나님의 형상이 이처럼 어떤 특정적인 말로 나온다는 것은 말을 주의하라고 하는 이 야고보서의 뜻은 뭐냐 하면 내용이 제대로 다행이다.에 관련된 내용인가를 주님께서 주목하고 주시하겠다는 겁니다. 그냥 인간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아니고 복음에 근거해서 하면 너무 딱딱하지요. 그러면 다른 더 쉽게 하겠습니다.
“이 기쁨에 얹어서 말을 하라.” 이 말입니다. 기쁨에 얹어서 말을 하라. 안 믿는 남편이나 복음을 모르는 가족들이나 할 때, 조건이 뭐냐 하면 기쁨에 얹어서 해야 돼요. 기쁨에 얹지 않으면 이게 시합이 돼버립니다. 나 이만큼 안는데 그것도 모르고 이 바보야! 나한테 한수 배워라. 이리되면 야고보서 3장에 나온 것은 이건 뭐냐 하면 졸지에 본인이 스승이 돼요. 이 스승의 특징 업무를 이야기한 게 아니지요.
모든 성도가 다 스승으로서 행세할 가능성이 있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스승이 될 때에 기쁨이라는 쟁반에 얹어서 말을 해야 되는데, 이걸 이제 여러분이 잘 아시는 고린도전서13장에는 이렇게 했어요.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뭐가 없으면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라.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사랑은 뭐냐 하면 사랑은 가벼움이거든요. 율법은 뭡니까? 무거움이죠. 무거웠었는데 무거움이 날아갔을 때 오는 가벼움. 뭔가 가슴에 응어리가 졌는데 어디 갔지? 그게? 갑자기 빠져나오니까 분화구처럼 빈자리가 생기는 거죠. 뭔가 있지 않아야 될 게 있었는데 내 힘이 아닌데 주님의 은혜로 빠져나오고 난 뒤에 그 기쁨의 자리가 그 빈자리가 기쁨의 자리에요. 기쁨의 자리.
그래서 기쁨의 자리를 주님께서 계속 만들기 위해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우리로 하여금 고민거리를 주셔요. 고민거리 주시고 끙끙대고 끙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