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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80709b 부산강의 : [시편]12(6편)-임플란트자유게시판시편

20180709b 부산강의 : [시편]12(6편)-임플란트(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6편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분란을 우리 쪽에서 일으키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일부러 분란을 일으킵니다. 이미 인간은 망가졌거든요. 자기 백성도 망가졌고. 그런 가운데 자기 백성을 끄집어내야 되기 때문에 창세전의 계획으로 인간세계에 침투할 때는 이게 고요하게 되면 분리가 안 됩니다. 분란이 일어나야 돼요. 분란을 통해서 분리가 일어나지요. 분리라고 하면 택한 백성의 몸과 불신자의 몸으로 분리한다고 생각하실 건데 이렇게 되면 참 쉽지요. 더 어려운 게 있어요. 분란을 일으켜서 분리할 때 이 사람은 성도, 이 사람은 성도 아님으로 분리하는 게 아니고 시간의 분리를 일으켜요. 그러면 누가 저 사람은 성도 맞다, 아니다를 확정 질 수 있는 권한이 사라져버려요. 시간의 분리가 뭐냐 하면, 과거에서 현재에서 미래로 나아간다. 이렇게 생각하는 쪽과 이미 완성의 시간은 도달했다고 믿는 그 시간의 층과의 분리. 이런 걸 설명하려면 시간이 많이 가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이스라엘에 누가 동행해요.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이 동행해요. 그러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의 차이점이 뭔지 알아야 될 것 아닙니까. 이름이 있으면 하나님 쪽에도 속하고 인간의 시간과 공간에도 같이 거주가 가능한 어떤 분, 쉽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에요. 신약 같으면. 구약에서는 그리스도라 하지 않고 이름이란 분으로 동행하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신약에서는 예수라는 실제 몸으로 오셨고, 구약에서는 몸이 아닌 그냥 이름으로 오신 거예요. 몸이 아닌 이름으로 어떻게 구체적으로 나타나는가? 그것을 우발적 사건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아까 권사님께서 아주 좋은 말했어요. 은혜를 받았으면 그 다음부터 은혜 안 받아도 될 정도로 꾸준히 계속 됐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셨는데 누구 좋으라고 그런 계획을 세웠지요? 그래서 권사님이 하는 말이, 왜 재방송이 없느냐 말이죠. 자동적으로 재방송이 되도록 은혜를 비우면 리필 해드릴까요, 이런 식으로. 계속 은혜를 채워줬으면 하는데 실제로 주님께서 리필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인간의 시간과 공간에 들어왔을 때 당하는 수모와 아픔과 미움을 재탕해줘요. 어제 주일 낮 설교의 핵심이 뭐냐 하면, ‘나’가 없어지고 체계가 재편성돼요. 내가 있고 하나님 있다는 체계가 내가 없어지고 그 자리에 기능이 와버려요. 어제 기능 이야기했잖아요. 종의 멍에가 되는 건 어떤 경우고 거기서 벗어난 자유는 어떤 상태인지 한꺼번에 담아서 보여줄 때 그것이 바로 주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신체가 되는 겁니다. 마치 구약에서 주의 이름이 우발적인 사건이 되었다가 신약에 와서 구약의 주의 이름이 예수님 육체로 오신 것처럼. 그러면 주의 이름은 경계선이 쳐지지요. 경계선이란 기존의 것과 외재적인 것, 또는 외부적인 것이 공존하는 것. 어려운 것 하려니까 제가 미안하지만 이건 중요해요. 마태복음 1장 봅시다. 3절에 보면, “유다는” 그 다음에 뭡니까? “다말에게서”죠. 2절에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지요. 여기선 사라라는 자기 부인 이름이 없지요. 그냥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잖아요. 그런데 3절에 보면, 유다는 그냥 베레스와 세라를 낳는 게 아니에요, “다말에게서”에요. ‘에게서’란 말은 외재적, 외부에서 주어진 겁니다. 그런데 주어진 여인들의 특징이 뭐냐? 전부 다 이방여자에요. 마태복음 1장 족보는 경계선입니다. 외부적인 것과 내부적인 것이 공존하는 경계선을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그 경계선 끝에 뭐가 있느냐 하면, 바로 16절,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마리아에게서”지요. 그런데 마리아에게는 남편이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그리스도를 낳게 남편이 없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여자의 자손 아닙니까. 예수님은 외재성의 자손이에요. 외부가 내부에 침투한 거예요. 외부가 내부에 침투하는 걸 누가 가장 싫어하는가?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받지요. 시험받을 때 악마한테 시험받지요, 이 말은 예수님이 외부성의 대표자라면 내부성의 대표자는 사람이 아닙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아니에요. 문재인이 우리나라 대표자가 아니에요. 악마가 대표에요. 우리는 얼마 전에 악마를 뽑으라고 투표한 거예요. 모든 대표자는 악마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대표자는 예수 그리스도에요. 그러나 그건 우리가 뽑는 게 아니에요. 그분이 찾아오시는 거예요. 시편 6편을 가지고. 찾아오시면 우리를 데려가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행하셨던 기능을 이 땅에서 행하게 해요. 예수님의 기능이 뭐냐 하면, 외부성과 내부성을 공유하면서 이 땅에서 자기 백성을 끄집어내는 일을 해요.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분신이 되는 겁니다. 어제 낮 설교하면서 부활 이야기했잖아요. 요한복음 20장 이야기하면서 예수님 떠나고 난 뒤에 세마포 있지요. 그 세마포가 성도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어요. 죽고 난 뒤에 알맹이는 빠지고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와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 천국 가고, 어떻게 해서 지옥 가느냐를 그 기준의 패러다임이에요. 우리는 그 기준이에요. 그 기능을 해야 돼요. 나 편하라고 은혜가 재방송되는 게 아니고 내가 원하는 것을 나한테 주질 않아요. 하지만 우린 육체가 있잖아요. 우리 육체가 내게 심히 좋았더라를 요구하지요. 요구할 때 정말 최적화 반가운 것은 그 요구를 꺾는 식으로 주께서 감안해서 내 뜻대로 안 되는 은혜를 주셨다는 사실, 말이 어렵다만, 내 뜻대로 안 되는 은혜를 주시는 겁니다. 욥처럼. 그러면 집사님 같은 경우엔 후딱 떠나고 싶지요. 아이고, 지긋지긋해. 자식이고 남편이고 외손녀가 그냥 놓고 떠나고 싶다. 이거,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성도 계통입니다.(아멘) 장거리 기차여행하면 담배 피우는 사람은 꼭 흡연실 찾아가죠. 본능이잖아요. 우리는 내 뜻대로 되면 기분 좋은 게 아니고 기분 좋은 것은 며칠 안 가요. 이게 좋아도 떠나고 싶다는 생각, 한 대 피우고 싶다는 생각처럼 그냥 떠나고 싶어요. 여행 가면 좋지요. 일본여행 가고 다 좋은데 가봤자 가면서 싸우고 오면서 싸우고 집에 오니까 안 싸우고. 이상하게 떠나고 싶어. 성도의 특징은 자기 뜻대로 잘 되게 되면 얼마 안 가서 허무가 찾아온다는 거예요. “이게 뭐야? 이게 다야? 이것 때문에 내가 주님 버리고 교회도 안 가고 이 짓하려고 했어?”허무가 찾아오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분란을 누가 일으키느냐 하면, 주님 쪽에서 일부러 분란을 일으킵니다. 이런 표현하면 안 되지만 예수님의 자기 새끼를 계속 까는 거예요. 이 땅에서. 그걸 주의 이름으로. 어제 낮에 사도행전 4장 12절하면서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 없다. 그걸 설명하면서 절망하라, 그리고 찬미하라. 그게 천사의 찬양이라 했지요. 절망이 없으면 찬미가 안 돼요. 이것도 해보고 구원받으려고 애를 쓰고 용을 써도 그게 다 실패로 끝나야 진정한 찬미가 나옵니다. 안 되는 걸 되게 하셨으니까. 어제 종의 멍에를 무능성이라 표현했거든요. 그냥 무능함이에요. 종의 멍에란 힘들다가 아니라 그냥 무능함이에요. 돈 있어서 골프 치고 놀러 가는데 그게 구원에 전혀 보탬이 안 돼요. 뭔가 했는데 그게 나의 무능함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무능함이 감사해야 될 텐데 감사는 짧고 또 돌아서면 마귀가 부추겨서 결국 중요한 것은 돈이야, 인간아. 현실은 돈이 최고야, 하고 정신 차리게 만들지요. 맞아, 맞아, 맞아. 정신 차리는 거예요. 돈 없이는 못 사는 거예요. 당연한 현실인데. 내재적 현실에 외재적 사건을 일으켜버리죠. 그러면 돈이 최고다. 돈 없으면 못 산다. 아까 광야에서 마귀가 시험한 게 그거잖아요.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다. 사람은 돈 없이는 못 사는데 그런데 말입니다. 돈보다 더 소중한 것, 그리고 더욱 더 중요한 것은 뭐냐? 나보다 더 소중한 것, 내가 하는 기능이 내 생존보다 아니 나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에 기능이 발휘되는 그 순간 나는 사라져줘야 됩니다. 나는 없어져야 돼요. 회사직원이 메일로 그날 할 작업지시를 받을 때 과장은 대리한테, 그리고 과장은 부장한테 지시받은 거죠. 그러니까 떠밀려서 떠미는 거예요. 사람 산다는 게. 더러워서 못하겠다. 밖에 나가서 자영업자 하면 돼요. 자영업자는 라이벌이 나를 떠밀어요. 동종업자들이 나를 힘들게 한다고요. 그러면 나는 장사 접을래. 월드컵 기간에서 새벽 두시까지 장사해야 되는데 나는 월드컵이고 뭐고 싫어. 열시에 잠잘래. 장사되든 말든 4년마다 오는 장사 호황도 싫어. 이렇게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돈이 안 되는데. 그래, 나 돈 없이 살래. 그 말은 몸 아플 때는 잘 나요. 그런 소리할 때는 약간 배부르고 안 아프다는 뜻이에요.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몰라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인간이란 없어요. 현실의 표면입니다. 현실은 돈으로 구성돼있고 악마가 지배하고 있고 현실에 뾰루지 난 게 인간이에요. 인간과 따로 살 수가 없어요. 이게 인간의 현실이라니까요. 이걸 제가 어느 강의에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유적지에 묻혀있는 유물이라고 표현했어요. 유적지의 유물을 유적지를 발굴하지 않으면 거기서 떼어낼 수 없잖아요. 그처럼 우리는 유적지가 만들어낸 생산물이에요. 내가 따로 살겠다. 마귀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백날 도망쳐봤자 돈이 전부인 이 세상에서 우리 몸은 한시도 떨어나갈 수 없어요. 그래서 그걸 제가 무능함이다. 우리는 구원받고 싶어도 발목을 잡힌 게 너무 세기 때문에 못해요. 안 돼요. 구원이 안 됩니다. 우리는 신자 아닙니다. 안 되는 걸 되게 하시는 거예요. 누가? 시편 6편이, 말씀이. 시편 6편을 누가 데려온다? 시편 6편은 글자다. 맞아요. 글자 맞습니다. 글자가 뭉쳐지면 그게 어떤 분이 돼요. 그분이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그냥 맹탕으로 오시는 게 아니라 시편 6편을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와요. 우리 구원하려고? 아니요. 시편 6편을 기능화 시키기 위해서. 시편 6편을 기능화 시켜서 우리로 하여금 너처럼 다른 사람 데려오도록 사람 낚는 어부가 되도록 그런 일을 하시는 거예요. 그럼 시편 6편 내용이 뭐냐고 물으면, 우리에게 떨어질 수 없는 우리의 현실상이 여기에 그대로 반영돼있습니다. 갈등 일으키고 고민하고 걱정하고 무서워하고 두려워하고 뭔가 편안해도 안심 못하고. 평생을 살면서 얼마나 이게 숙달이 됐는지 조용하면, 조용해도 얼만 안 갈 거야, 우린 알아요. 며칠 안 간다는 것. 자식이 둘 있으면 다 잘 되는 게 아니고 하나 잘 되면 하나 문제 있다는 걸 알아요. 우린 익숙해있는데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맞으면 또 아파요. 교인수 적은 교회가 약간은 자존심 상할 순 있지만 교인수 적으면 좋은 게 한두 점이 아닙니다. 괴롭히는 사람이 그만큼 적어요.(아멘^^) 시답지 않은 것으로 시비 걸고 전화하는 이런 사람이 없다니까. 시편 6편을 다시 한 번 이야기하면, 시편 6편이 살아서 움직인다. 이렇게 보시면 제일 이해가 쉽고요. 뚜벅뚜벅 걸어서 시편 6편이 나타난 걸 보니까 예수님인데 그 예수님이 자신이 시편 6편이에요. 시편 6편의 얼굴이 상한 얼굴이에요. 고생에 절은 모습으로 육체로 온 천지에 상처투성이의 모습으로 시편 6편의 내용을 품고 우리 앞에 나타나셔서 최후까지 아낌없이 자기 육체를 찢어버렸습니다. 그게 십자가 사건이죠. 그래서 십자가 사건은 신약만 연결시키지 마시고 시편 6편과 다이렉트로 연결시키면 시편 6편의 내용대로 주께서 환경을 조성해 나가신 겁니다. 그럼 환경을 조성할 때 아까 이야기를 다시 해봅시다. 인간들의 육신이 자력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은 시간+공간에 완전히 새롭게 얽매여있습니다. 악마 쪽에서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공간을 계속 만들어내요. 그러면 창세기 3장을 알다시피 우리는 이미 쫓겨난 공간은 수상한 공간이에요. 원래 안 살아야 될 공간입니다. 인간은 그 공간마저 없으면 못 사니까 이걸 어쨌든 간에 절대화시키고 살려고 하니까 저주 속에서 살려고 하니까 이게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죠. 저주받았으면 저주받아 죽으면 되는데 이마에 땀 흘리고 결국 흙으로 돌아가면 되는데 그게 우리 성적표 아닙니까. 당연한 거거든요. 이 모습이 하나님에게 심히 좋은 모습이에요. 우리 매 맞는 게. 매 맞는 입장에서는 주의 뜻에 합당하더라도 막상 맞으니까 아프잖아요. 아플 때 가만있는 게 아니라 여기서 뭔가 반발이 나오는 거예요. 내가 사는 공간 아무 탈 없게 해주시고 지금은 힘들지만 우리의 미래는 영광스럽게 해 달라. 희망이 넘치는 나중에 완벽하고 완전한 세계가 돼 달라고 미래에 대해서 희망과 기대를 걸고 그 기대를 위해서 지금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참아내면서 감내하면서 살아갑니다. 이게 인간들 평소의 삶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는 거예요. 외재적인 적이 내부로 뛰어들면서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무엇을 하면 됩니까, 라고 하니까 무엇을 하는 게 아니에요. 그냥 다 이룸을 심어주는 거예요. 그게 바로 문둥병자가 즉각 나았고, 십이 년 병든 자도 나았고, 그 나은 결과가 백부장이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온다고, 이건 배알도 없어. 지 주장도 없어. 그냥 주님 부르시면 조르르, 이것도 하겠나이다. 저것도 하겠나이다. 종이 바깥에서 음식 먹는 건 당연한 겁니다. 주인부터 챙기고 종이 먹는 거지. 종은 할 바를 다할 뿐입니다.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희한한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자기 주관도 자존심도 없어요. 그냥 시켜만 주이소, 하는 식이에요. 너무 감사해요. 달란트 비유 있지요. 달란트 비유가 하도 유명하니까 다섯 개가 다섯을 남겼지요. 두 개가 둘 남겼지요. 그럼 한 개 받은 사람은 두 개나 다섯 개 남기면 돼요, 안 돼요? 안 되지요. 하나는 하나만 남기면 돼요. 그런데 한 개도 안 남겼어요. 다섯 개가 다섯을 남겼는데 다섯 개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떠난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주신 게 있다는 말은, 예수님이 떠나도 예수님과 함께 있는 거예요. 두 달란트 받은 사람도 예수님과 함께 있는 거예요.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예수님이 없어요. 떠나버렸다고 본 거예요. 떠나버렸으니까 분리가 된 거예요. 예수님이 함께 있을 땐 종으로 행세하다가 떠나니까 헤헤거리면서 “나, 종 아니지. 독자적인 나의 의식이 있지.” 이렇게 된 겁니다. 그럼 처음부터 주인과 함께 있더라도 뭡니까? 딴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달란트 비유의 특징이 뭐냐? 분리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 있는 비유, 기름 준비하는 것도 뭐예요? 분리에요. 아무리 섞여서 아닌 척해도 기어이 주께서는 내 백성과 아닌 백성을 분리해내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분리했을 나오는 결과, 백성의 특징이 뭐냐? 이것은 오히려 모든 일에 대해서 주님의 공로로 돌린다는 특징을 갖고 있어요. 그 특징에 하나가, 제가 언제 주님이 목마를 때 마실 걸 주었습니까, 하는 식으로 의아해하는 겁니다. 기능이니까. 제가 주님 목마를 때 마실 걸 주었잖아요, 해버리면 이건 기능이 아니고 자기에게로 환원돼버리죠. 내가 했습니다가 되는데 막상 구원받은 백성은 뭐가 없어졌지요? 내가 사라진 거예요. 인생이 엉망진창이든 뭐든 주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했잖아요, 라는 고백을 지금부터 해도 됩니다. 집에 가셔서 하시면 돼요. 누가 힘들거든 주께서 그렇게 내 남편 술 먹게 하셨잖아요. 그리고 나는 그 앞에서 성질나게 하셨잖아요. 성질 안 내란 말이 아니고 낼 때는 내야지요. 그것도 주께서 하신 거예요. 주님 보시에 심히 좋았더라. 이 작업을 위해서 주님께서 다가오실 때 그 작업의 모습은 시편 6편의 내용이 신기하게도 딱 들어맞아요. 누구한테? 예수님한테. 예수님한테만 맞고 우리한텐 안 맞네요. 그게 아니고 예수님한테 일어난 일이 그대로 우리 일로 복사가 돼버립니다. 시편 6편이 그 기능으로 찾아오게 돼요. 복사가 되면 힘들다가 아니라 감사가 돼요. 힘 안 드는 게 아니고 감사함이 되죠. 그래서 어제 낮에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성도는 사는 것이 불편하지만 재미있다고 이야기했지요. 이건 어디서 표절했느냐 하면, <같이 살래요>란 드라마에서 장미희한 대사 중에 이게 들어가요. 정신 바짝 차리고 보는 거예요. 메모지 들고. 사는 게 불편해요. 그렇지만 다 이룬 입장에서는, 다시 합시다. 외재성이 내재성에 들어와요. 이야기 다시 합시다. 많은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정리해 나갑시다. 우리는 이 세상 따로, 나 따로 안 돼요. 유적지의 유물처럼 같이 박혀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 산다 해도 돈 없이는 못 살아요. 돈 푼이나 있고 배부르니까 괴롭다가 있지 정말 몸 아파 보세요. 기가 찰 일이에요. 진짜 도적질 안 할 수 없고 나쁜 생각 안 할 수 없어요. 현실이란 내가 현실을 바라볼 입장이 아닙니다. 왜? 현실의 일부니까. 그러니까 치마에 무늬가 있다면 우리는 치마 입장이 아니고 치마에 새겨진 무늬에 지나지 않아요. 치마가 바람에 펄럭이면 무늬도 같이 펄럭여요. 미국과 중국의 무역 전쟁이 일어나면 내 가계가 출렁이는 거예요. 이 세상이 같이 묶여있다니까. 뭐 현실이 어쩌고저쩌고 해요. 우리 자체가 현실인데. 안 되는 거예요. 거기에 성령을 통해서 외부성이 와버려요. 시편 6편이 찾아오지요. 찾아오게 되면 시편 6편 때문에 내가 구원받았다는 게 아니라 시편 6편에 나오는 내용대로 내가 기능하고 그렇게 움직이는구나, 하는 거예요. 그러면 현실에 묶여있는 이것은 시편 6편에 아주 적절하다고 누가 판단한다? 창세전에 하나님이 판단해서 시편 6편만 발산하라는 겁니다. 그럼 우리보다 먼저 선배가 있네요. 시편 6편 봅시다. [다윗의 시], 다윗이 우리보다 선배에요. 다윗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으면 대우 좀 해주지. 대우 없어요. 오히려 골리앗한테 이겼는데 그 다음부터 백성들한테 예쁨 받는데 그것이 화근이에요. 고생, 고생 그렇게 많이 해요. 그리고 거기서 생기는 게 뭐냐? 원래 다윗이 원수 만들어서 남 저주하는 걸 취미로 삼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기능을 하다보니까 갑자기 원수가 생겼어요. 여기서 다윗을 통해서 원수의 변동이 일어나요. 처음의 원수는 블레셋의 골리앗이었지요. 참 이런 게 재미있어요. 골리앗을 이겼잖아요.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때 이긴 이유가 뭐냐? 골리앗은 할례가 없어요. 할례 받은 민족은 할례 없는 민족을 반드시 이겨야 된다는 이것이 하나님 언약의 기능입니다. 이 기능 속에 있는 순간 이스라엘이 기능 밖,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이 드디어 밝혀졌지요. 이게 하나님의 개입이에요. 다윗이 자기 일했습니까? 골리앗과 싸움이 본인의 일을 했습니까? 인간이 본인의 일을 해버리면 절대로 하나님의 원수를 모르게 돼있어요. 교회 성가대 봉사하고 주일학교 봉사하다가 취직했습니다. 삼성에 취직했다면 그건 자기 일이 되지요. 그럼 하나님의 원수는 어디 있습니까? 없지요. 왜냐하면 이미 나는 삼성맨이 되는 순간, 삼성이 교회 가지 말라는 소리하는 게 아니고 내 일이 따로 있는 그 순간 내 일을 위해서 내게 심히 기쁜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조건 때문에 하나님의 원수가 없지요. 본인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기 때문에. 자기 원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원수는 없어요. 하나님의 원수가 없으면 시편 6편이 삼성그룹에 들어가고 난 뒤에 해석이 안 되네. 취직하고 시편 6편을 볼 일도 없고. 자기는 직장에서 일하면 되니까. 다시 이야기합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게 자기 일이 아니에요. 삼성맨으로 골리앗 이긴 게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의 일을 한 거예요. 목사님, 하나님 일했다는 걸 어떻게 압니까? 그게 상대를 볼 때 현실을 볼 때 그냥 본 게 아니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봤습니다. 언약적 관점에서 봤어요. 할례 없는 쪽은 할례 있는 쪽에 필히 망한다. 왜?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만들어졌을 때 할례 받는 조건 하에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그들이 건너왔기 때문에. 그 언약은 하나님이 동행하는 이상 줄곧 이어져온다는 논리에 의해서 다윗은 언약에 의해서 전쟁을 한 겁니다. 하는 순간 형이 그렇게 미워할 줄도 몰랐고, 요셉 형들이 요셉 미워한 것과 비슷하게. 그리고 사울이 그렇게 싫어한 줄 몰랐어요. 백성들은 좋아하잖아요? 여러분, 백성들이 좋아한다고 단정하지 마세요.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라고 팬들 많았잖아요. 그것 믿지 마세요. 인간은 권력 편입니다. 어느 쪽에 권력이 있느냐에 따라서 붙어요. 정치판과 똑같아요. 권력은 어디서 생기는가? 그때그때 승리한 쪽이 권력입니다. 롯데자이언트 응원하다고 두산이 독보적으로 1위할 때는 바꿔요. 이제 두산 팬이다. 롯데 포기했어. 이게 권력을 따라가는 거예요. 잘 되는 쪽에 몰빵하는 겁니다. 이런 말이 있지요. 승자독식이라고. 승리자가 돼있으면 패배자라 할지라도 노력한 만큼 그 비율을 따져서 이득을 나눠주는 것이 우리 상식인데 승자독식은, 일등만 하면 노력해서 얻은 것까지 몽땅 제로로 만들어버려요. 승리자가 다 가져가는 겁니다. 삼성화재 배 바둑대회하면 우상상금이 1억이라면 2등은 오천만 원 정도 생각하지요. 그런데 오천만 원 안 돼요. 승자독시이라면 일등은 1억, 이등은 제로인데 너무 야박하니까 이천만 원 정도 주는 거예요. 깃발은 하나밖에 없으니까. 승자독식을 누가 잘하는가? 우리 주님이 승자독식을 합니다. 마귀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항상 주님의 일은 인간이 저질러놓고, 창세기 2장에서 3장으로 넘어왔기 때문에 저질러놓은 것으로 분란이 일어나는 방식으로 주의 일이 나타나요. 그래서 주의 일은 몰라요. 하나님이 심히 좋았더라는 그 뜻이 뭔지 몰라요. 다만 내가 심히 좋았더라고 하고 있는데 그것이 와해되고 실패로 끝났을 때 외재성, 외부의 일이 내부에 침투한 흔적으로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도둑이에요. 강도에요. 북한한테 미국은 강도입니다. 주님이 우리한테 강도에요. 강도질하는 이유가, 내 것이라는 걸 용납 안 해요. 왜냐하면 아예 내 자신이 사라져야 되니까. 사람이 아무리 양보하고 주님한테 잘해도 여전히 남아있는 것은, 내가 남아 있잖아요. 그걸 유도하는 신학이 개혁주의신학이라 합니다. 아무리 주님께서 영광, 퍼줘도 꾸준히 끝까지 내 것은 챙기는 거예요. 기존교회가 그렇게 설교해요. 그러니까 마지막 내 것 챙기기 위해서 교회 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단이죠. 내 것은 없어요. 딴 꿍심 먹고 오면 안 돼요. 주님이 오시면 내 것을 아예 거덜 냅니다. 그게 아쉬워도 후에라도 내 것은 따로 챙기죠. 주의 은혜로 이렇게 잘 살았습니다. 또 챙기는데 내일 되면 또 깨집니다. 그냥 기능이라니까. 오늘 내가 사는 게 나한테 일어난 우발적 사건이에요. 그래서 살 때는 살아야 되고 아프면 병원 가야 돼요. 그것도 사건이니까. 지가 무슨 거룩한 척해서 그냥 죽겠다고 하지 마시고, 어떤 분이 병원도 안 가고 그냥 죽겠다는 사람 있습니다. 그냥 아플 땐 하고 돈 쓸 땐 쓰고 놀러갈 땐 놀러가고, 그게 사건이에요. 골프 칠 땐 골프 치고. 골프 치는 사건을 일으킨다니까. 차 바꿀 땐 바꾸고. 사건이죠. 바꾸면서 얼마나 고민했을까요. 주님이 가신 고난의 길을 가면서 차를 바꾸는 거예요. 주님께서 나의 영혼을 심히 떨리게 하시는군요. 내 영혼을 수척케 하시는 거예요. 다윗에게는 두 원수가 새롭게 생겼다. 하나는 골리앗에서 그 다음에 자기 백성 자체가 원수가 되는 겁니다. 이렇게 보면 시편 전체가 다 이해가 돼요.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버림받도록 조치했기에 배치돼있는 그 주변에 깔려있는 자들은 자기 백성이었어요. 그런데 언제 분리가 일어났느냐 하면, 하나님이 나를 제대로 사용하는 그 순간 내 백성처럼 여겼던 그들이 하나님의 원수가 된 겁니다. 아니 내가 말 잘못했네. 원수가 된 게 아니고 하나님의 원수가 이스라엘 모습으로 암약하고 거기에 잠재돼있었지요. 우리는 창세전의 내용을 모르기 때문에 그저 눈에 보이는 데로 한 형제다, 교인이다, 하고 얼싸안았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창세전의 계획이 언약의 이름으로 다윗에게 침투되는 순간 이스라엘에 있는 다윗을 공격하는 그게 원래 이스라엘이 아니고 악신이 들렸다는 거죠. 성신이 있으면 반대쪽은 악신이 있겠지요. 악신 들린 사람이 여럿 있지만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다윗을 공격하는 사울.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악신은 노림수가 있다는 것. 악마는 어떻게 아느냐? 악마의 노림수를 보면 안 돼요. 악마가 있고 어떤 노림수를 몰라요. 악마는 눈에 안 보이니까 악마를 괄호쳐놓고 그 사람이 말하는 투, 노림수, 방향, 목적, 의미, 기대, 그 모든 것이 어딜 노리는지 보세요. 언약이 다 이루었음을 미래가 오지 않았더라도 현재 다 구원되었음을 시비 거는 그것을 추적해보면 악마에요. 그러면 그 악마가 다윗 외부에 있느냐고 묻겠지요. 하나님은 더 나갑니다. 악마가 다윗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윗 내부에 악신이 들린 거예요. 인구 조사하는 것도. 그러니까 다윗이 스스로 자기를 포기하고 사라지지 못해요. 아까 현실 이야기했지요. 현실에 꽉 묶여져 있어요. 현실이 우리고 우리가 현실이에요. 우리가 어떻게 스스로 일어설 수 없습니다. 여기선 나온 원칙이 있습니다. 오늘 제목을 이걸로 정해봤습니다. 임플란트. 임플란트 하려면 발치해야지요. 발치와 임플란트, 둘 중에 어느 게 아플까요? 임플란트의 아픔 정도가 1이라면 발치는 10이 돼요. 요새는 컴퓨터로 조정하기 때문에 임플란트가 아프질 않아. 옛날에는 두 시간씩 붙들고 사람 죽였는데 요새는 25~30분이면 깔끔하게 임플란트 끝납니다. 며칠 전에 두 개 했어요. 지금 약 먹고 있습니다. 발치는 상상도 못합니다. 아파요. 이게 시편 6편입니다. 이게 내 이빨이거든요. 이건 내 내부성이에요. 내부성, 외부성은 주님이 오니까 그게 분리되지 원래 내부성, 외부성 없고 이게 나의 전부에요. 그런데 이걸 찢어내는데 안 아플 수가 있어요? 내 남편이고 내 형제고 내 자식이고 내 손자고 내 평생 일궈낸 내 인생인데요. 그걸 어떻게 발치합니까? 심수봉 노래 있지요. 미워, 미워, 미워. 정말 너무 미워요. 내 인생을 왜 이렇게 모질게 몰아세우는지 미워요. 몰래 까치발해서 뭐 하나 숨기려하면 그것마저 들키게 하잖아요. 몰래, 주님 이것만큼은 허락해주세요. 그것 들고 나오다가 그것마저 놓게 만드니까. 왜 저를 이렇게 괴롭히십니까, 하면 주님께선 네가 없거든. 네가 없는데 왜 자꾸 너를 상정하느냐. 너를 설정하니까 너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자동적으로 딸려 나오고 그 좋았다는 내용들이 악마가 설치해놓은 미끼들, 유혹거리가 내가 원하는 욕망을 자극해서 악마가 원하는 걸 내가 좋아한 그게 제2의 자아가 돼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발치하기가 점점 더 힘들지요.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하셨어요.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어린아이가 뭐냐 하면, 세상 것에 물들기 전이에요. 그냥 생속이라. 이것다, 하면 그런 줄 알아요. 그런데 어른들 자아는 너무 악마의 유혹에, 선악과 과일을 너무 많이 먹었어요. 그걸 다 뜯어내는 거예요. 오래 산다고 죽고 싶은 게 아닙니다. 오래 살면 살수록 말로는 무슨 말을 못해. 오래 살면 뭐하노, 가야 될 건데, 가야 될 건데. 막상 몸 아프면 온 자식들한테 전화 걸어서 아파서 다 죽게 됐다고 엄살을 떨어요. 가보면 종기 하나 났을 뿐이고. 인간은 사랑 받기 원하기 때문에 자기가 자길 위로하려니까 안 되잖아요. 자식들 불러서 위로해 달라는 겁니다. 그냥 말로만 위로합니까. 돈 봉투가 오고가지요. 모든 만남은 돈이니까. 그러니까 발치가 어려워. 발치가 안 돼. 발치는 죽을 때 하는 게 아닙니다. 미리 당겨서 발치하고 임플란트 하고 박아버립니다. 아예 수술을 해버리죠. 발치에 비해서 하나도 안 아파요. 수술하면 이제는 내 이빨 아닌데 외재적이죠. 외부에서 온 이빨이 내게 심겨져있지요. 심겨진 이게 주가 돼버려요. 나는 백부장이 돼서 이게 가게 되면 따라갈 수밖에 없는 기능을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원치 않는 주의 원수가 우리 눈앞에 등장합니다. 내 원수기 때문에 화내는 게 아니고 주의 원수기 때문에 화낼 필요 없어요. 안 됐다고 하지요. 나도 옛날 저 모습이었다. 술 가져 와라. 지금도 내가 돈 좀 있다면 아마 저렇게 될 걸. 돈 있으면 이혼 대번해서 새 남자 만나서 내가 또 저 짓하고. 할 수 있는 문제에요. 왜냐하면 같은 아담의 자손이기 때문에 얼마나 성질났으면 이젠 이해가 돼요. 이해가 된다는 말은, 예쁘다는 말이 아니고 이해가 되지요. 아직까지 숨쉴만하니까 그렇지 만약에 아파보세요. “아이고, 여보. 전에 술 사오라 할 때가 좋았는데 이젠 그 말도 못하고. 불쌍해 죽겠다.” 하지만 인간은 다 죽는다는 점에서 불쌍해요. 개인적으로 불쌍한 게 아니에요. 죽음의 암반 위에 나오는 화석 같은 존재기 때문에 죽음의 힘을 이기지 못해서 죽는 겁니다. 다 이루었다는 게 뭐냐 하면, 같이 죽어가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 아니고 산 자가 된 채로 살아요. 그러니까 인생은 불편하지만 재밌어요. 허망한 것을 좋다고, 치어스! 하면서 축배를 드는 그 모습을 보면 허망하다니까. 고급아파트에 살고 요트, 누리는 그 모습 자체가 허망하지요. 물론 내가 요트 사기 전까지는 허망해요. 사면 재밌을 거예요. 그러나 주께선 아직까지 적절하지 않다고 여겨서 그런 환경을 안 줘서 그렇지만. 사람은 주어진 기능 속에서 뭘 발견하느냐? 사망을 발견하죠. 여기 5절 봅시다.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이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죽기 때문에 주를 기억 못하는 게 아니고 주를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가 살아도 그게 사망의 상태란 뜻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지혜에선 안 나오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가운데 다 들어있어요. 네가 살았다하나 실은 죽은 자로다. 죽은 놈이 진리를 말하면 안 돼요. 빌라도가 예수님한테 진리가 무엇입니까? 물을 자격도 안 돼요.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군지 평할 자격도 안 돼요. 우리도 자격이 안 된 사람이었는데 구원받고 난 뒤에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과 관계가 성립된 존재가 된 겁니다. 그 기능은 우리 쪽에서 열심 낸다고 하는 게 아니고 관계가 성립됐기 때문에 주님 쪽에서 우리에게 계속 과제를 주고 기능을 주잖아요. 그러면 우리 살아가는 것이 뭐냐 하면,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할 사람이 없다. 다른 말로 하면 기억하지 못한 걸 보니까 예수님이 누구냐고 핀잔주는 걸 보니까 당신은 살았다하나 죽은 자요. 그러니까 이해 못하는 사람은 같이 살아도 죽은 사람과 같이 사는 거예요. 남편이 유품입니다. 안 믿는 남편 자체가.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6절) 적어도 우리가 이 수준까지는 안 되지요. 예수님 그리워서 울고불고 할 수준은 안 되잖아요. 하지만 그렇게 될 순간이 오게 되면 시편 6편 기능이 발휘된다고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시편 6편을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북한에 잡혀서 요덕정치수용서 갇혀서 밥도 못 먹고 눈물지을 때 시편 6편과 겸하여 생각하시면 주님 보실 때 그것도 이미 구원받은 자가 하는 하나의 작업이야. 오늘 작업은 그거야. 그게 시편 6편에 나오잖아, 하고 이렇게 끝나는 거예요. 8절에 봅시다.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자동적으로 복음을 모르는 사람은 말이 안 되기 때문에 떠나게 돼있어요. 떠날 때 시편 6편대로 움직인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시편 6편 참 쉽지요. 주께서 그대로 우리 인생을 가는 겁니다. 특히 마지막 10절 봅시다.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하나님의 원수가 떠나는 거예요. 내 돈 사기 친 사람이 떠나는 게 아니고 주님의 원수가 떠나는 걸 봐서 주께서 이미 우리를 구원하셨고 주의 일을 하심을 알고 감사하시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하나님 아버지, 말씀이 살아 움직인다는 것을 우리는 자주 잊어버렸습니다. 자꾸 내가 살아있다고 생각하니까 주님 살아있음을 놓쳤습니다. 이제는 주님이 시편 6편과 더불어 살아서 우리에게 일시키는 그런 관계에 놓여있음을 다 이루어진 구원의 표적이라고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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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17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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