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706b 울산강의-레위기 20장 : 유혹 속의 존재
20180706b 울산강의-레위기 20장 : 유혹 속의 존재(강의:이근호 목사) 첫 번째 시간에 레위기 20장을 하면서 반드시 죽이라는 말이 나오지요. 앞뒤 볼 것도 없이 그냥 죽이라. 사람을 돌로 칠 것이다. 그 이유가 나와 있어요. 20장 3절에 보면, 내 성소를 건드렸다는 거예요. 더럽혔다는 겁니다. “그 자식을 몰렉에게 주어서 내 성소를 더럽히고” 성소란 주님이 계신 곳이거든요. 주님의 관심사가 뭐냐? “나, 건드리지 마.” 그거에요. 인간의 얼마나 행복하냐는 전혀 고려대상도 안 됩니다. 건강? 그건 니가 건강하고 싶지요. 니 소원이고. 건강이 인생의 최고 목적이 아니에요. 돈을 잃으면 조금 잃고, 건강 잃으면 다 잃는다는 소리하는데 그런 인간은 반드시 죽여 버려야 돼. 나에게 관심을 가져버리면 하나님과 라이벌이 돼요. 경쟁관계에 돌입해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출애굽 할 때 네 자신을 위해서 구원이 된 게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변에 다 같이 노예를 만들고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을 같이 제공합니다. 그것이 레위기 19장 33절에 보면, “타국인이 너희 땅에 우거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너희와 함께 있는 타국인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객이 되었더니라” 애굽 땅에서 객이 되었다는 이 말을 아주 쉽게 말해서 개인주의 구원은 없다. 집단구원이에요. 그 집단 속에 하나의 개인이 있을 거잖아요. 그러면 개인은 무엇과 싸워야 되느냐 하면, 집단 위주냐 아니면 나 위주냐, 싸워야 됩니다. 나를 보고 구원한 것이 아니고 어디 소속되어 구원한 거예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인품이나 품격, 고매한 품위 이런 것 따지지 않아요. 어린양 피 보고 넘어왔다고. 넘어올 때마다 붙들고 출구조사해보세요. 누구 찍었습니까? 전부 다 어린양 피 찍어서 나온 사람들이에요. 인품이 좋아서, 성격 좋아서, 가정환경 괜찮아서, 배울 만큼 배워서 아는 게 많아서, 돈이 많아서? 전혀 없어요. 이것은 모든 인간의 요소를 꽃다발로 만드는 겁니다. 묶어버린 거예요. 히브리인들을 어린양의 피로 묶어요. 그런데 어린양의 피는 사람에게 묻히는 게 아니고 그 인간들로 하여금 공히 할례언약을 행하게 했어요. 할례언약이란 대대로 아버지로부터 내려온 육적인 혈통이 잘렸다는 티를 내는 거예요. 우리가 우린 된 것은 기존의 다른 민족처럼 혈통으로 된 게 아니고 이스마엘과 이삭이 다른 것처럼 약속된 민족이기 때문에 어린양을 우릴 위해서 보냈습니다. 어린양의 피가 우릴 덮친 거예요. 어린양이 오지 않으면 아버지, 자식, 손자, 혈통의 연관인데 그걸 끊어버리고, 그게 할례언약이에요. 모세를 하나님이 죽이려고 할 때 십보라가 무슨 행동을 취했습니까? 자기 아들 할례를 행했잖아요. 자기 아들 할례 안 한 것 때문에 아버지를 죽이려고 했단 말이죠. 하나님은 본인에게 관심 있어요. 관심 있는 본인이 제시한 게 뭐냐 하면, 언약입니다. 그 언약 중에 하나가 할례언약이에요. 내 백성 뽑을 테니까 위로부터 내려오는 혈통을 끊어라. 그겁니다. 할례언약을 행하게 되면 인간의 피가 나오지요. 할례언약은 피언약이니까. 그 피언약과 어린양의 피가 바꿔치기한 거예요. 끊어진 혈통에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어지면 그때부터 살아난 장자는 그 가정의 장자가 아니고 아버지께 드린바 됐습니다. 그게 출애굽기 13장에 나오죠. 초태생, 사람이든 가축이든 내게 돌리라는 말이 그 말이에요. 얼마나 분명합니까. 하나님 뜻은 모호하지 않고 분명해요. 그 분명한 걸 간단하게 말씀드릴게요. 죽으라. 참 분명하지요. 니는 이미 죽은 존재야. 사람들 보기에는 살아있지요. 하나님 보시기에 죽어야 돼요. 그런데 그냥 죽으면 안 돼요. 할례언약처럼 언약에 의해서 죽어야 돼요. 그래서 하나님께선 우리를 성령을 보내서 살아있는 자를 죽이되 자살하는 게 아니고 십자가에 죽게 만들어서 십자가에 죽은 자만 영생을 얻는 방법을 채택한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언약방법이거든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죽은 자 입장에 소속돼있어요. 죽은 자가 쳐다볼 것은 죽은 우리를 한 묶음으로 천국백성 만들었지, 그걸 쳐다봐야 돼요. 그것은 바로 어디 나오느냐 하면, 20장 3절, “내 성소를 더럽히고” 이걸 저는 중앙부, 중심부. 이스라엘 내부에는 성소라는 중심부가 있어요. 그 중심부를 더럽히면 반드시 죽인단 말이죠. 그리고 난 뒤에 중심부에서 발생된 반드시 죽은 것에 어떤 게 있는지 20장 6절에, “음란하듯 신접한 자와 박수를 추종하는 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죽지요. 그 다음에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죽이라. 누구든지 그 계모와 동침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 ‘반드시’란 말이 나오죠. 11절에. 그 다음에 12절, “누구든지 그 자부와 동침하거든 둘 다 반드시 죽일지니” 20장 2절에 나오는 반드시 죽여라에서 발생된 죽이라는 거예요. 누구든지 여자와 교합하고 남자와 교합하거든 반드시 죽이라. 동성애 하거든 반드시 죽여라. 14절에, “누구든지 아내와 그 장모를 아울러 취하면 악행인즉 그와 그들을 함께 불사를지니” 그 다음에 15절에, 남자가 짐승과 교합하면 반드시 죽이고, 여자가 짐승에게 가까이하여 교합하거든 반드시 죽여 버려라. 그러니까 이것 죽이고 저것 죽이고 다 죽여 버려요. 그러면 이런 것 하거든 죽이란 말은, 이것이 유혹받는 인간 본성상 그것에 유혹받을 있다, 없다? 유혹받을 수밖에 없다. 이것에 네 모습이다. 그래서 내가 너 있는 곳에 성소를 보내서 개인구원이 아니고 집단구원을 시킨 겁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반드시 죽을 자에 포함돼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은 계속해서 추가적으로 주어지는 법에 의해서 20장에 있는 이것은 비껴가더라도 그 다음 율법에서는 비껴날 수 없어요.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도록. 나는 살아남았다는 것조차 마지막까지 찾아내서 다른 것 다 지키더라도 마지막 하나 끄집어내서 죽일 만한 요소를 만들어내서 죽여 버립니다. 의인은 없나니, 진짜 모든 것을 싹쓸이 해버려요. 운동회에서 하는 게임 중에 장애물경주 있지요. 장애물이 있을 땐 피해가면 됩니다. 그런데 피하면 다른 장애물이 또 나오지요. 주님은 율법이란 장애물을 계속 주는 거예요. 나는 6단계는 넘었어. 이러면 7단계에서 지게 돼있고, 8단계 넘었다면 9단계에서 지게 돼있어요. 결국 늙어죽던, 물에 빠져 죽던 인간은 죄 값으로 죽습니다.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율법 앞에 의롭다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키기 아니하면 반드시 저주받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다 죽여 버리면 천당에 아무도 없겠네,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죽어라’에 흔쾌히 죽는 자, 그 사람이 약속의 백성이에요. 그래야 내가 죽은 이유는, 하나님에 의해서 법에 의해서 죽어 마땅함을 본인이 버리지 않고 품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을 만해서 죽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온 거예요. 병원에서 건강한 사람은 의사 약 올리려는 사람이에요. “아저씨, 어디가 아픕니까?” “아픈데 없어요.” “그럼 쓸데없이 왜 왔습니까?” “그냥 재미삼아 내 자랑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이러면 그거는 업무방해에 걸리죠. 아프기 때문에 의사가 필요하잖아요.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사람이 아플 때 자기 자신을 안다고. 지금 주님께서는 율법으로 우릴 계속 아프게 해요. 우리는 단박 죄인이라고 고백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만만한 사람 아니에요. 계속해서 장애물경기를 합니다. 계속 변명으로 핑계로 일관합니다. 남의 차 안 박으려고 했는데 비가 와서. 비 내리신 분 탓이지 나는 브레이크 밟다 획 돌아서 박았지. 급발진이고. 급발진 맞아요. 비가 와서 그런 것 맞습니다. 그렇다면 본인에게 아무 일 없을 때도 본인이 잘나서 평안하게 살아가는 게 아니라는 것도 인정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걸 인정할 수 있는 근거가 없어요. 왜? 평소에 지 잘난 맛에 살았기 때문에. 아무 일 없으면 내 탓이고 안 되면 남 탓인데 뭐. 그렇지요. 그러니까 사람은 아무 일 없고 안 아플 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친구끼리 서로 연락 안 할 때는 이유가 있어요. 내세울 게 없어. 사단 났어. 일이 생겼어. 보톡스 잘못 맞았는지, 뭔가 일이 있어. 그러다 연락 왔다. 뭔가 자랑거리 있어. 결국 뭐냐 하면, 나는 내 뜻대로, 아까 배운 대로 하면, 내 유혹에 말려든 그 모습 그대로 되어줘야 좋은 하나님이고 내게 합당한 조치라고 우리는 이렇게 우기고 있습니다. 억지를 부리고 있어요. 참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이 세상에 안 걸리는 인간이 없어요. 모든 인간이 지 잘난 맛에 살아가는 것. 다시 이야기합니다. 율법을 어겨서 죄인이 돼버리면, 내가 아는 율법, 내가 일방적으로 유리한 쪽으로 해석한 율법에 대해서 나는 그걸 지켰다, 나는 위반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 율법은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요. 너무 촘촘해서 어느 것 하나 빠져나갈 구멍이 없습니다.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는 것은 지옥 갈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다. 어떻게 그 법을 지킬 수 있습니까. 눈만 뜨면 그 생각하는데.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 내놔라. 네가 용서받은 것처럼 남을 용서하라. 이게 가능합니까? 먹는 것, 입는 걸로 족한 줄 알라. 네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라. 이게 됩니까? 인간은 개인적으로 절대로 용서도 구원도 안 돼요. 그래서 인간 개인, 개인이 모여서 집단을 만들고 그 집단적으로 용서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언약을 보내서 할례언약과 피를 결합시켜서 이스라엘을 건져내신 거예요. 애굽에서. 그렇다면 19장 33절,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너희와 함께 있는 타국인을” 예멘 사람들 압니까? 제주도에 와있는 난민들, 이슬람 국가인데, 돈 모아서 지구상에서 제주도만 가면 시민권 준다는 소문 듣고 오는 거예요. 이 사람들 난민들인데요. 받아줄까요, 안 받아줄까요? 여기 레위기 19장 34절 이론에 의하면, 너희가 타국인을 자식 같이 여겨라. 제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예멘인이 제주도 오기 전에 제주도에 장로님이 믿음이 너무 좋은 거예요. 십계명을 어릴 때부터 다 지켰고 복을 받아서 부자가 되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신앙생활 잘했다고 복 주셨다고 했는데 자기 옆집에 예멘인이 와있습니다. 자기 외손자, 어린 아이들이 있어요. 그 난민들 남성들이 무슨 짓거리를 할지 몰라요. 왜냐하면 수개월, 몇 년 동안 쫓기다보니까 동물적인 본능이 그대로 살아있어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을 내 외손자처럼 받아줘야 됩니까? 예멘 사람들이 오기 전까지는 착한 사람이었죠. 딱 등장하는 순간 999가지 율법을 지켜도 그 사람은 못 지켰어요. 이유가 뭐냐? 999가지 지킨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그 사람이 하나님을 영광을 위해 지켰다는 뭐냐? 그게 나 자신 창세기 3장에서 2장으로 도망치려고 빠져보려고 율법을 이용한 거예요. 그게 들통 난 거예요. 그 사기가. 그 위장술이 들통 난 거예요. 예멘 사람 보낸 것이 하나님 뜻이었어요. 새로운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자기를 훌륭한 천국 가는 사람인 줄 알았지요. 예멘 사람 오기 전에 몇 개는 지키고 못 지키는 게 아니고 나 같은 인간이 십자가에 죽어 마땅한데 지키기는 뭘 지키겠습니까? 나 같은 인간은 아직까지 정신을 못 차렸습니다. 아직도 내가 어느 정도 죄인인 줄 모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와야지요. 옆집에 예멘 사람 오게 되면 또 내가 죄인인 것을 드러냈군요. 하는 거죠. 그럼 그건 그거고 이 예멘 사람들 어떻게 할까요? 저들 나라로 보내야지요. 보내면 죽는데요? 죽더라도 보내야지요. 젊은 놈이 싸워야지 전쟁하기 싫어서 남의 나라로 내빼면 안 되잖아요. 비겁하잖아요. 한국에 전쟁이 났다. 전쟁하기 싫어서 나는 여호와증인이라 해서 일본에 난민 신청하면 일본이 받아주면 좋겠어요? 자기 나라에서 보상받았으면 지켜야지 왜 남의 나라로 도망치느냐 말이죠. 그것도 개인적인 영광과 영달 때문에, 나만 살자는 식으로, 자기 아버지는 조국을 위해서 목숨 바쳤는데 자기는 피신하면 되겠어요? 그리고 저들이 믿는 이슬람교 신념에도 위반되잖아요. 난민으로 온 게 아니고 취직하러 온 거예요. 그럼 국가에서 최저임금도 적용시키지 말고 한 시간 오백 원이나 천 원씩 줘서 국가경제에 도움이 된다면 국가에서 이용할 거예요. 그렇게 되면 한국은 죄인 되고, 예멘도 죄인 되고 이로서 주의 뜻대로 모든 게 죄인 되는 거예요. 인간은 전부 다 죽을 자에요. 죽을 자는 자기의 어떤 욕구, 기대와 목적을 요구할 권리는 없습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살게 해준 것만 해도 감지덕지지 이렇게 살게 해주세요, 저렇게 살게 해주세요, 요구할 입장이 못 됩니다. 집단구원에서 중요한 것은 뭐냐? 중심부를 어떻게 묶어내느냐는 겁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요. 할례언약과 피를 묶어서 이스라엘 중심을 묶어냈지요. 그 묶어낸 원칙에서 발생되는 게 있어요. 이제 오늘 강의 중에서 핵심부분에 도달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경계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할례언약을 통해서 혈통을 끊어버리고 약속의 자손으로 묶어낸 이게 경계선이거든요. 이 경계선이 새로운 민족을 만나서 A라는 경계선이 좀 시간이 지나면 B로 퍼져버립니다. 경계선이 이동해요. B 지점 지나면 그 다음에 C가 돼버려요. 점점 경계선이 이동합니다. 이동할 때마다 A 안에 있었던 경계선이 다 죽은 자들이 되지만 경계선이 A에서 B로 이동하게 되면 A를 포함해서 그동안 안 죽었던 B라는 보다 넓어진 경계선 영역에 있는 자가 다 죽은 자가 돼요. 이게 C로 이동하게 되면 다 죽은 자가 됩니다. 이동하다 마지막에 십자가에 도달하면 십자가 앞에서 모든 자가 죽은 자가 되는 거예요. 이건 뭐냐 하면, 너는 창세기 3장 이후의 존재라는 걸 분명히 하는 거예요. 죽어야 되기에 악마를 통해서 내가 죽이는 거야. 따라서 나는 죽어야 되는 것에 대해서 토 달지 말라는 겁니다. 네가 이렇게 죽던 저렇게 죽던 죽는 것은 인간을 향한 주님의 고유한 권한의 발휘에요. 주님의 자율권을 이 땅에 발휘하는 겁니다. 언약대로. 따라서 자기가 죽는 걸 고생하는 걸 억울하게 생각하면 안 돼요. 저기는 율법 어기고 나는 지켰으니까 복 달라. 그런 소리하는 것은 경계선 A라는 거예요. 경계선이 율법이 추가되며 점점 더 확대돼요. 확대되면 구약 때 양 바치고 소 바쳤는데 지옥 가요. 형식적인 제사 드렸다. 할례 행했는데 지옥 가요. 왜? 마음의 할례를 안 했다고. 그렇게 되면 우린 못 지키고 죽잖아요, 라고 한다면, 원래 죽으라고 율법 준 거예요. 로마서 3장에 나오잖아요. 율법을 주신 것은 모든 입을 막고 저주 아래 있게 함이에요. 원래 저주받으라고 준 겁니다. “잘하셨습니다, 하나님.” 이러면 돼요. 까라면 까겠습니다, 오라면 오고. 그게 백부장 믿음 아닙니까. 믿음이란 잘 조치하셨다는 뜻이에요. 왜? 내가 주인이 아니니까. 주님이 주인이고 주님께서 원대로 어떤 사람은 의사 되고, 판사 되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고 이건 주님의 뜻대로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잘 산다고 부러워하지 마세요. 잘 살든, 의사로 살든 결국 머리 세서 죽어버려요. 죽는 방식이 다르지 결과는 똑같아요. 누구나 죽습니다. 목욕탕에 옷 벗고 들어가 보세요. 문신한 사람 빼놓고 전부 다 똑같아요. 물론 거기서 돈 주고 때 벗기는 사람 따로 있겠습니다만. 레위기 19장 36절, “나는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 땅에서 나오게 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하나님을 뭐라고 표시하느냐 하면, 애굽 땅에서 그 다음에 뭐라고 돼있지요? 나온다는 것은 창세기 3장에서 2장으로 옮겼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인간은 절대로 죄라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나올 때 기존의 인간을 죽이고 어린양으로 교체해서 어린양의 피가 발린 인간으로 나오게 하신 겁니다. 그렇게 나오게 하셨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 가운데서 어린양의 취지가 보다 점점 더 A, B, C, D로 경계선이 넓혀져야 되는 겁니다. 그럼 인간이 왜 이렇게 안 되는가? 사람이란, 여기서 단어 하나 쓰겠어요. 여러분 싫어하는 단어지만 할 수 없다. 존재. 존재라는 단어를 쓸 때는 뉘앙스가 뭐냐 하면, 딱딱함, 고정화된 형체가 갖추어져 요지부동인, 돌부처, 꿈쩍도 안 함, 그런 용어로 쓰면 돼요. 사람이 율법을 지키고 살만큼 살고 돈 좀 여유 있으면 내가 너무 착하게 살아서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부자 됐다. 그 말 틀린 말 아니에요. 맞는 말이에요. 그런데 내 행함으로 복 받았는데 이 경계선이 언제까지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까지 이동하거든요. 그럼 따라가야 되는데 자기가 잘난 경계선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거예요. 기존교회 장로님들이, 젊은 아이들에게 내가 처음 교회 다닐 때 아버지 집 준 것 팔고 전세로 옮기고 지금 너희들이 앉아있는 의자와 예배당 토지와 건물을 세웠다. 틀린 말 아니지요. 맞지요. 그런데 그걸 50년째 우려먹는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경계선이 이동했거든요. 주의 뜻 맞아요. 그때 은혜 받아서 한 것 맞아요. 하지만 하나님 은혜 받은 것이 사건이 돼야 될 텐데, 사건이란 쉽게 존재의 반응을 바람이라. 성령에 의한 바람. 바람은 임의로 불잖아요. 바람을 잡을 수가 없어요. 바람을 비닐봉지에 담으면 바람 답답하다고 까불고 그럽니까? 조용하지요. 비닐봉지에 담긴 공기는 존재가 돼버려요. 사건이 안 됩니다. 성령을 비닐봉지에 담을까요? 기도 많이 해서 성령 받아서 내 안의 성령에, “성령님 꼼짝하지 마세요. 앞으로 내가 필요할 때 써먹을 테니까.” 이게 바로 몰렉 우상이거든요. 내가 다룰 수 있는 대상의 신이란 거죠. 그런데 성령은 임의로 불어요. 내 뜻대로 안 돼요. 태풍 노선도 지 마음대로 빠져버렸어요. 내륙으로 온다 해놓고 일본으로 쑥 가버렸어요. 울산은 피해를 좀 봤겠지만 대구는 별로 피해 안 봤어요. 바람은 임의로 불거든요. 개인이 그 앞에서 아무런 가치나 의미를 뽑아낼 수 없어요.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 했잖아요. 왔다가 가버리는 바담^^ 그냥 왔다가 가버려요. 사랑의 슬픔은 바로 그 사랑이 바람인데 그걸 내 것으로 쥐려고 할 때 그 사랑은 눈물, 그야말로 아픔이 돼버립니다. 어떤 남녀가 만나서 사귀다가 남자가 이야기합니다. “우리 이제 그만 만나자.” 이렇게 심각하게 이야기하는데 여자가 웃어요. “알았어. 갈게.” 하는데 손을 안 놔줍니다. 꽉 잡고 있어요. 왜 그런가 보니까 울음을 참느라고 하늘만 바라보고 있어요. 남자가 보니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어버려요. 남자도 그 아가씨 껴안는데 아가씨의 눈물이 남자에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사랑은 할 때 좋았는데 이별할 땐 이렇게 아프구나. 그래도 할 수 없이 헤어졌지요. 그래놓고 가라 했는데 그 여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고한우 씨가 불렀던 <암연>이란 노래 가사입니다. 이걸 들으면서 제가 뭘 느꼈느냐 하면, 이걸 사랑이라 했잖아요. 사랑이 아니고 혈육의 정이에요. 인간은 아무리 교회 나오고 목사, 장로, 어떻다 해도 혈육의 정은 남달라요. 할례언약으로 절대로 안 끊어져요. 그저 내 자식, 내 손자 밖에 몰라요.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내 자식 취직되면 최고에요. 혈육의 정을 못 끊습니다. 이걸 악마가 알고 주님이 알아요. 안 끊어지는데 끊는 방법이 있어요. 죽여 버리는 방법 밖에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가 끊을 수 있느냐? 다른 말로 네가 믿음이 있느냐? 네 손으로 네 자식을 죽여라. 하나님은 내 자식을 죽였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을 죽일 수 있는 분임을 언약을 통해서 다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죽였는데 못 돼먹은 인간들은 남은 죽여도 내 자식은, 남을 죽여서라도 내 자식을 살리려하죠. 그게 장한 어머니, 훌륭한 부모잖아요. 그러다 둘 다 지옥 가는 사람이지. 오늘 본문에 의하면 절대로 살려두지 말라는. 내 중심, 개인중심, 내 가족중심, 혈육중심은 어떤 식으로도 율법을 못 지킵니다. 지켰다고 하지만 추가적으로 주어지는 경계선에 어느새 그 자리에. 아까 <암연> 가사처럼. 갔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면 그녀는 그 자리에 있어요. 이미 우리는 딱딱한 괴물덩어리, 물체덩어리 어느 날 우리는 존재가 돼있습니다. 존재가 딱딱하기 때문에 존재 빼놓고 나머진 다 바람이 돼요. 왔다가 가도 아무렇지도 않은 니가 죽든 말든 몰라. 이게 바로 우리가 영원한 고정적인 우상이 되는 겁니다. 우리 자신이 예수님 앞에서 우상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우상의 특징은 고정적이라는 것, 모셔놓고 찾아가는 거예요. 구약에서 물체니까. 그러나 신약성경에 오면 예수님을 우리가 찾아가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을 기도원에 교회에 모셔놓고 찾아가는 게 아니고 주께서 늘 우리에게 바람 같이 찾아오지요. 찾아올 때 우리의 존재를 시비 걸어요. 우리의 존재를 문제시하는 겁니다. 그걸 제가 오후에 문책성 일생이라 했는데 우리 자신을 문책성 인생이 아니고 문책성 일생, 우리 평생이 문책 당하는 일생이에요. 주님께서 늘 지적하는 거예요. 또 니 중심이었지. 내 중심이 돼버리면 우리는 모든 선과 악, 감사와 고마움과 불평을 무슨 기준이냐 하면, 내 존재로 더욱 더 강화되는데 유리했는지, 불리했는지 따져서 평가 내리게 돼있어요. 우리의 모든 판단을. 이게 바로 중국과 미국이 무역 전쟁할 때 또 우리나라 월드컵에서 마지막 게임은 독일한테 이겼잖아요. 그게 왜 그렇게 부각되는가? 내가 그 나라에 속했다고 생각하고 내가 대한민국 사람이기 때문에. 일어난 모든 일에 나한테 유리한 거예요. 스웨덴은 16강 올라갔는데? 난 스웨덴 사람 아니거든요. 스웨덴으로 이민 가면 달라질지 모르겠지만. 독일에서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한국과 축구할 때 독일에 있는 한국 사람들이 축구중계를 봤답니다. 2:0으로 이기고 난 뒤에 창문을 활짝 열고 우리가 이겼다고 고함질렀다는 거예요. 얼마나 자기중심이에요. 자기 소속중심이에요. 이게 존재입니다. 은혜를 받아도 도로 존재가 돼버려요. 주님께서는 이 존재를 우상이기 때문에 용납하지 않고 이걸 바람으로 바꿔버립니다. 바꿀 때 어떻게 바꾸느냐 하면, 이걸 죄로 녹여버려요. 뜨거운 렌지에 아이스크림 넣으면 녹잖아요. 죄 앞에서 우리가 녹아버립니다. 죄 앞에서 우리는 죄인이 되지요. 그럴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을 비로소 아는 거예요. 물론 그 가운데서 아파요. 그러나 아파야 뭘 안다? 아파야 날 알아요. 내가 아파야 평소에 건강한 것이 내 공로가 아닌 것을 알게 돼요. 우리로 하여금 내가 중심부에 있을 자격이 있을 수 없음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만약에 내가 중심부를 차지하게 돼버리면 하늘에 태양이 두 개가 돼요. 주님도 중심부고 나도 중심부고. 대결상태에 들어가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 중심부 앞에서 태양 같은 주님 앞에서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게 되면 어떤 효과가 있는가? 이 율법이 아무것도 아닌 게 돼버려요. 우리를 그렇게 주눅 들게 만들고 벌벌 떨게 만든 그 율법 전체가 아무것도 아닌 게 돼버려요. 율법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괜히 줬네? 아니에요. 율법은 거룩하고 선하다고 했거든요. 로마서 7장에서. 그럼 왜 줬느냐? <암연>에 이런 가사가 있어요. 그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지 모르겠지만 내가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사랑이 아픈 이유가 외부에서 사랑이 온 게 아니고 이미 내 안에 그녀를 사랑하는 사랑이 들어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택한 백성에게 율법을 주시고 말씀을 주시는 이유는, 지금 내 안에 있는 사랑을 잊지 말라는 거예요. 피로 주신 피의 생명이 내 안에 있는데 그동안 우리가 구원사건이 되지 못하고 존재가 되다보니까 우린 누굴 무시하고 짓밟느냐 하면, 내가 받은 영생을 누가 모독하고 무시하느냐 하면, 유혹받은 내 욕심이 주님의 고귀하고 소중함을 모르고 주님을 욕되게 만든 거예요. 내가. 주님은 이런 우리의 행동에 대해서 봐주는 것 없습니다. 양보 없습니다. 여러분, 멍게나 대게 먹을 때 그냥 안 먹지요. 껍데기 다 떼고 속살만 먹잖아요. 주님 주신 그 사랑을 빨아 당기기 위해서 아깝지만 우리의 존재를 해체시키고 분해시켜 버립니다. 어떤 방식으로? 자식이 셋 있으면 하나 쯤 말썽피우고, 말썽 하나 해결되면 다른 게 말썽 되고. 이빨 아픈 게 나으면 허리가 아프고. 내 일이 아무 일 없으면 16강 못 들어가고. 하여튼 계속 쑤셔요. 어디 하나 아픈 구석이 있고 깔끔하게 마무리 지어지는 게 아니게 해요. 우리 인생을. 경계선 따라 이동하라고. 경계선 따라 계속 이동해야 돼요. 율법이 레위기 19장, 20장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뒤에 또 있어요. 계속 있어요. 우리로 하여금 너라는 존재가 얼마나 잘 되는가를 생각하지 말고 못난 네 존재와 그리고 너를 위해서 희생하신 성소에서 일어나는 제사라는 것과 늘 연결시키도록 하시는 겁니다. 율법의 완성은 뭐지요? 사랑입니다. 그냥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랑한 거예요. 그냥 사랑한 거예요. 회개하면 사랑하고? 그런 것 없어요. 회개란 조건도 필요 없어요.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요.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옆에 강도 둘이 있었잖아요. 왜 다 같은 강도인데 하나를 버렸습니까? 버린 강도는 강도이기 때문에 버렸어요. 그런데 다른 쪽은 왜 안 버립니까? 버려야 되지만 내가 사랑한다는 이유 때문에 안 버린 거예요. 죄 값은 치러야 되는데 그 죄 값을 대신 치루기 위해서 같이 십자가 지신 거예요. 꼭 우리가 내 십자가 달고 올라가야 됩니까? 아프게. 그렇게 실습할 필요 없지요. 그 상황, 주님이 중심이고 나는 변두리라는 주님의 십자가를 드러내가 위해서 나는 강도라는 입장으로 옆에 붙어있는 거예요. 종으로써. 그래서 고린도전서에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오직 그리스도밖에 없다고 했지요. 성령이 아니고서는 주라 할 수 없다는 이 말은, 이미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주님의 종 된 걸 영광으로 생각해야 돼요. 홀로 살지 않는다는 것을 감사히 여겨야 된다. 그런데 여러분이 세상에 나가보세요. 모든 인간은 자기 혼자 사는 맛에 삽니다. 흔히 말하기를 부부가 있다 하지만 부부요? 각자 홀로 둘이 살아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유혹받은 존재기 때문에 남의 사정을 이해할 수 없어요. 자기 유혹을 채우는 욕망이 작동하기 때문에 자기 존재기 때문에 그 사람 생각하듯이 내가 그 사람을 생각해줄 수 없어요. 개인주의를 신처럼 여기기 때문에 인간의 한계입니다. 너무 많이 기대하지 마세요. 그냥 돈 벌어주고 설거지 해주고 같이 놀아주고 티비 채널 양보해주고 심심할 때 같이 여행 가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너무 기대하지 마세요. 남편이 돈 벌어주고 건강하고 일찍 들어오고 자식 챙겨줄 때는 고마운 줄 아셔야지 너무 많은 걸 요구해선 안 됩니다. 다들 그렇게 살고 있지요? 인간은 아무리 퍼주고 퍼줘도 자식은 그 사랑 모르고 부모는 그 퍼준 것을 자랑하기 마련입니다. 개인은 죽지 않고서는 개인주의를 떠나지 못합니다. 감사한 것은 죽지 않는 개인을 향하여 주님께서 경계선을 십자가까지 확대시킨다는 거죠. 너 때문 나 죽었다는 사실을 매일같이 우리에게 통보해주죠. 낮에 집에 노는 사람들은 알지요. 12시 쯤 우체부 다녀가잖아요. 자동차세도 나오고 전기요금고지서도 있잖아요. 기관에서 통보해주잖아요. 주님께서 수시로 통보해줘요. 너 때문에 내가 죽었다고. 널 살리기 위해서. 그 통보해주신 것을 우리가 짓밟거나 무시하거나 해선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세상이란 것이 이미 몰렉 세상이거든요. 자기 잘난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 신을 믿고 예수 믿고 하는 그런 세상이란 말이죠. 전부 다 종교를 가진다는 게. 지 잘난 맛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그런 세상에서 하는 사고방식이 우리에게 유혹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유혹을 이길 수 없어요. 20장 4절 봅시다. “그가 그 자식을 몰렉에게 주는 것을 그 지방 사람이 못 본 체하고 그를 죽이지 아니하면 내가 그 사람과 그 권속에게 진노하여 그와 무릇 그를 본받아 몰렉을 음란히 섬기는 모든 사람을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라” 몰렉이, 인신공양이라 하지요. 어린아이를 받아요. 순수하다고. 그걸 바친 사람도 나쁠뿐더러 그걸 보고 자식 바친 부모에게 돌을 던지지 않는 사람도 주께서 그냥 두지 않겠다고 하신 거예요. 이건 뭘 의미하는 겁니까? 몰렉에게 자식 바치는 걸 뻔히 보면서도 인간은 거기에 관여한다, 관여 안 한다? 관여 안 하지요. 자기는 몰렉을 안 섬겼으니까. 이게 개인구원이 아니고 집단이라니까. 이스라엘이 벌을 받을 때 아무리 지가 훌륭하더라도 집단적으로 범죄 하게 되면 똑같은 운명으로 바벨론으로 포로 잡혀가게 돼있습니다. 아까 스데반 집사 설교에 나오지요. 몰렉에게 우상숭배해서 집단적으로 고생하는 거예요. 바벨론 포로 생활한다는 것은 구원받기 전에 애굽 생활로 되돌아간다는 말입니다. 구원이 무효된 거죠. 사실은 구약의 구원이란 것도 율법이니까. 무효 돼야 마땅하죠.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한 구원이 되는 것은 신약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죽이고 우리와 함께 있는 그런 목숨과 목숨의 관계면 구원이 종결되고 완성되는데 그냥 뭘 행함으로 돼버리면 행했으면 경계선도 A, B, C로 옮겨지기 때문에 나는 제사 드렸다. 복 받았다.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의 절대화로 응축이 돼버린단 말이죠. 그러면 그것은 온전한 구원이 될 수 없지요. 방금 강의한 것을 통해서 여러분이 성경 전체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아셔야 돼요. 제가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우리 안에 나보다 더 소중한 게 있어요. 그게 내 안에 있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나는 내쳐도 내 안에 있는 주님의 사랑은 내치지 않아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십자가 사랑에서 누가 우리를 떼어낼 수 없어요. 악마라도 그걸 못 빼어내요. 한 번 집어넣은 칩은 악마가 와도 그게 안 빼앗겨요. 천 번을 타락해도 언젠가는, 여러분 범죄 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오늘 강의 끝나면서 걱정 되서 강의를 못 끝내겠네. 간음하고 살인이 범죄가 아니고 내가 더 소중하다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에요. 우상숭배하면 필히 죽이라 하는 것은, 나보다 더 소중한 게 주님인데 우리는 자꾸 주님보다 내가 더 소중하다는 거예요. 날 위해서 주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그것 당연한 것 아니에요? 다들 그렇게 살아가지 그렇게 안 사는 사람 어디 있습니까?” 맞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 없어요. 다 그렇게 살아요. 그런데 그렇게 산 것이 주님의 사랑 앞에서 천하의 죄인인 것을 죽어 마땅함을 인지하는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만큼은 주님과 함께 있는 사람이에요. 끝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인임을 알게 하기 위해서. 오늘 레위기 19장, 20장 준 것은 나 이것 안 했다, 이러지 마시고 죄인 됨을 알게 하기 위해서 나보다 더 귀한 말씀을 주셨다. 그렇게 받아들이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하나님 아버지, 남들 보면서 상대적으로 잘난 맛에 살았습니다. 나는 예수 잘 믿는데 저 사람은 못 믿는다고 비교, 경쟁하지 않았습니까. 주여, 그것이 하나에 유혹이란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해주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죄인을 구원해주신 십자가라는 천국과 지옥의 경계선 안에서 이미 영생 얻은 사람인 것을 다시 한 번 감사히 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