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706a 울산강의-레위기 20장 : 유혹 속의 존재
20180706a 울산강의-레위기 20장 : 유혹 속의 존재(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레위기 20장 1절부터 하겠습니다. 레위기 19장 29절부터 36절까지 내용을 점프하는 것처럼 보일 텐데 사실은 레위기 20장에서 1장부터 거꾸로 레위기 19장 29절을 볼 겁니다. 왜 레위기 1절에서 3절까지 초반을 봐야 되느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또 이르라 무릇 그가 이스라엘 자손이든지 이스라엘에 우거한 타국인이든지 그 자식을 몰렉에게 주거든 반드시 죽이되 그 지방 사람이 돌로 칠 것이요 나도 그 사람에게 진노하여 그를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이는 그가 그 자식을 몰렉에게 주어서 내 성소를 더럽히고 내 성호를 욕되게 하였음이라” “반드시 죽이되”라는 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반드시 죽이는 거예요. 결정적인 거죠. 모든 법에 벌금형도 있고, 돌로 맞는 것도 있고, 보상해주는 것도 있지만 반드시 죽이는 것,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죽여 버리는 것, 그 죄에 대해서 20장 1절에 나와 있습니다. 반드시 죽이는 경우는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여기서 ‘몰렉’이라고 지목했지요. 2절에. 몰렉이란 이스라엘 동쪽에 암몬 민족들이 믿었던 신입니다. 이스라엘이 있다면, 모압, 암몬, 블레셋이 있고 에돔 있는데 이스라엘 바깥에 암몬 족속에 몰렉이란 신이 있어요. 그 신은 머리는 황소 모양이고 몸은 사람으로 돼있습니다. 인간들이 신을 표시할 때는 반드시 아이디어를 자연에서 끄집어내지요. 로마서 1장에 나오잖아요. 자연에 있는 것으로 모방해서 신을 끄집어낸다. 그런데 자연에 있는 것들이 그냥 신 되는 게 아니에요. 자연+인간 요소를 조합시킵니다. 자연이 있는데 인간을 결합시킨다는 말은, 인간적 요소 때문에 신을 인간 쪽에서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고 조종할 수 있는 대상의 신, 그게 바로 우상이에요. 인간이 만든 신인데 그냥 인간이 만들어놓고 섬기는 게 아니고, 인간이 만들 때는 다 의도가 있어요. 그 신을 내 마음대로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 내 뜻대로 원대로 하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을 만들지 자연을 만드느냐? 인간은 대자연에 기죽어 살거든요. 특히 농사짓는 사람들한테는 태풍이 오면 안 되잖아요.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큰 힘과 큰 변화를 지닌 자연, 그러면서도 그 자연을 내 뜻대로 필요한 것을 얻고 싶은 인간, 자연 요소+인간 요소, 그게 바로 우상이란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은 어때요?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 건성으로 우린 겉으로는 그래야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싶지요. 그런데 우리 인생이 자기 뜻대로 잘 진행이 안 되게 되면 은근히 화가 나지요. 화가 난다는 말은, 나는 누구의 종이 되기 싫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존중해줄 테니까 그만큼 대가를 내놓으라는 겁니다. 꼭 제가 이렇게까지 이야기해야 되겠어요? 원래 이런 마음이거든요. 이방민족이 우상을 섬긴다. 방금 우상 이야기했지요. 자연+인간 요소. 그 우상의 자식들이 우리들이에요. 이방민족이니까. 조상을 나무랄 필요 없어요. 그 조상이 생산한 성질과 본질을 우리가 그대로 물려받은 겁니다. 그 조상은 정화수 떠놓고 한복 입고 새벽에 손바닥에 불이 나도록 비는 것, 그 비는 분들의 자식이 오늘날 교회 다니는 거예요. 그 속성이 어딜 가지 않았어요. 옆으로 새질 않았어요. 정성을 다하여 순결을 유지하면서 빕니다. 목적이 있어요. 빌고 있는 나와 관련된 것이 잘 되게, 빌고 있는 당사자 내가 잘 되게, 내 뜻대로 잘 되게. 저는 그런 것으로 성경을 써봤으면 좋겠어요. 성경 있어도 보지 않는 성경 말고 내가 쓰는 성경. 내가 쓰는 성경이 옛날부터 나왔지요. 네 자로 ‘토정비결’이라 하는 것. 액운은 피하면 되고 행운 찾아내면 되고. 간편해요. 그게 우리가 쓰는 성경이에요. 우리가 만들어낸 집필한 신의 게시입니다. 우리는 그분들의 자식이에요. 우리는 이방민족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지적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네가 아무리 마음을 잡아도 본질상 못 지키는 것이라고 해서 지적해주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20장 2절에 그 자식을 몰렉에게 주거든 반드시 죽이라 했거든요. 안 죽입니다. 다 그걸 믿는데 왜 죽입니까. 한두 명 같으면 본을 보이기 위해서 죽일 수 있지만 이웃집부터 해서 201동, 202동 모든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신을 믿는데 어떻게 하겠어요?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 집사의 설교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7장 43절에, “몰렉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에 옮기리라” 여기서 초반부터 어려운 게 나와요. 뭐가 어렵냐 하면, 인간은 본인이 하고 싶은 게 없어요.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야 돼요. “인간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없다.” 왜 그러냐 하면 자기가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하고 싶은 게 뭔지 몰라요. 그럼 뭐냐? 인간은 하고 싶도록, 뭐가 하고 싶게 유혹받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내가 뭘 할까에 대해서 남들 시선과 눈치를 먼저 보게 돼있는 게 인간이에요. 그래놓고 자기가 하고 싶어서 했다고 우깁니다. 여기 유혹이란 말을 했지요. 이건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린 창세기 1장, 2장의 사람이 아니고 창세기 3장의 사람이에요. 이미 유혹에 넘어간 사람은, 아담을 우리 조상을 유혹에 넘긴 그 유혹이라는 영역, 그 세력에서 우린 절대로 그 유혹을 이기고 빠져나갈 수가 없어요. 오라 유혹이여, 우린 늘 유혹을 찾고 있습니다. 썩은 고기만 좋아하는 하이에나처럼. 배부른 때는 표범이 되고 싶지만 먹을 게 없다면 썩은 고기라고 좋아하는 하이에나처럼 킬리만자로 산을 헤매고 있어요. 배 좀 부르니까 고상을 떨지요. 교회도 나오고. 배고프면 이게 절 음식인지 여호와증인이 준 건지 그건 상관없어요. 인간은 원래 유혹을 그리워하고 있는 자들이에요. 그래서 노인네들 사는 게 서글퍼요. 아무도 자길 유혹 안 해줘서 서글픈 거예요. 있을 때 잘하란 말이 거기서 나왔어요. 당겨줄 때 당겨야지 나중엔 아무도 안 당겨줍니다. 여자나이 40 넘으면 시집 못 가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재취 자리 아니면 잘 나옵니다. 사람이 행동하는 모든 것이 유혹받을 준비하고 있는 거예요. 유혹받을 준비태세. 이 말은 유혹 없이 사는 사람이 없어요. 끊임없이 자극적인 유혹을 하이에나처럼 찾아 헤매게 돼있어요. 애들이 밥을 원한다고 밥 주면 밥으로 만족하지 않아요. 밥으로 만족하는 것은 세 숟가락이면 끝납니다. 밥 줬는데 좀 있으면 반찬은? 반찬 주면, “반찬이 이게 뭐야? 벌써 일주일 째 미역국만 주네.” 이렇게 되지요. 인간은 끊임없이 유혹이 작렬하는 세계 속에 넘어왔기 때문에 유혹을 그리워하고 유혹 없이는 못 살아요. 유혹이 있기 때문에 만사에 고통과 아픔을 잊고 그 인간은 살아갑니다. 그래놓고 그 인간이, 내가 세상에 살면서 그다지 나쁜 짓은 안 했다고. 경찰서 왔다 갔다 하는 그런 짓을 안 했다고 주장하는데, 인간은 새로운 유혹거리에 멈출 수 없어요. 자제가 안 돼요. 그 유혹거리를 넘어서 그걸 차지하기 위해서 새로운 전략으로 준비하면서 인생을 또 도전하는데, 그 다음에 인간이 감추는 게 있어요. 뭘 감추느냐 하면, 내가 원하는 걸 가지는 과정에서 하지 말아야 될 것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돼있어요. 하지 말아야 될 약점을 숱하게 감춰왔거든요. 인간은 목표를 쟁취해놓고는 그 주변에 자기만 아는 뭔가 약점을 감추는 그런 동작이나 행위도 병행해서 지금까지 해온 겁니다. 쉬운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20대, 30대에 깡패 질했다. 그런데 40대 후반에 사업 망하고 난 뒤에 자살할까 하다 교회 종소리 듣고 그 다음에 목사 됐다. 그러면 남들 앞에선 목사임을 내세우지요. 방금 제 이론에 의하면, 목사가 그 사람의 유혹거리에요. 제가 왜 유혹거리란 말을 쓰느냐 하면, 창세기 3장에 이미 들어선 인간존재는 아무리 해도 창세기 2장의 본래 나를 모른다는 취지로 유혹거리라 하는 거예요. 자기는 목사가 됐기 때문에 하나님이 본래 원하는 뜻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러나 목사라는 것이 창세기 3장의 존재가 원했던 거예요. 그러면 목사 되고자하는 것도 일종에 유혹거리에 말려든 겁니다. 유혹 아닌 게 없어요. 인간 자체가 하나님 뜻은 배격하고 자기 유혹거리만 찾는 입장에서 죄 아닌 게 어디 있어요. 그래놓고 건전해 보이고 고상해 보이는 어떤 것을 쟁취해놓고는 하나님 은혜로 이렇게 됐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과거를 추적해보자. 그렇게 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악행을 저질러 왔는지 그 악행을 안 들키도록 다 치워놓은 거예요. 자기가 그렇게 되기 위해서 남들에게 얼마나 많은 피해를 줬는지 본인도 알아요. 알지만 그건 입 다물고 있어요. 한 평생 살면서 우리 때문에 내 생존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해 입었는지 생각하십니까? 생각 못하지요. 제가 어릴 때 집안 식구가 열세 식구였어요. 삼촌, 고모들도 많았고 결혼해선 갈라서서 애들 데리고 오고 해서 식구가 바글바글했어요. 화장실이 하나에요. 얼마나 남한테 피해 줬을까요? 그 열세 식구가 생존하면서 어린 나이에 오직 기대하는 것은 제 때 내 밥을 먹을 수 있어야 돼요. 된장찌개에 넣은 소고기나 두부를 먹으려면 투쟁을 벌여야 되지요. 큰 숟가락 갖고 있는 위에서 휘젓고 나가고. 열세 식구가 맛있는 음식이 나오면 제일 큰 삼촌부터 차지하니까 매일 밥 먹는 순간이 그 순간이에요. 양보, 배려? 없습니다. 인자함? 어림 반 푼도 없지요. 먹고 살려면 우선 나부터 챙겨야 되는 것이 습관화돼요. 동생 주라고 남기는 것 없어요. 다 먹어버려요. 그렇게 악행을 저질렀으면 다른 식구들은 어떻게 하느냐? 악행을 저질렀으니까 그걸 감추기 위해서 자기가 정당하다는 새로운 증거물을 내놓습니다. 그러니까 인생이란 내가 지금 이만큼 살았다는 것이 잘났다는 뜻으로 내놓는 증거물이에요. 우리는 그 사람에게 나타난 그럴싸해 보이는 결과물로 보잖아요. 하지만 그 사람이 결과물을 내놓기 위해서 얼마나 본인만 아는 이상한 짓들을 많이 했는지 그런 것들은 안 들키는 쪽으로 나서는 거예요. 드라마에 보면, 재벌 집에 총각들이 있을 때 아가씨가 재벌이라고 좋다고 했는데 나중에 출생에 비밀이 있고, 재벌 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화분 던지고. 아침 드라마가 주로 그런 내용이잖아요. 자기 살기 위해서 남 짓밟았다는 이야기. 그게 그 사람의 이야기로만 그칠까요? 그렇지 않아요. 이미 창세기 3장에서 유혹으로 사는 인간이라면, 재벌에겐 돈 많은 유혹이라면, 우리는 우리 나름의 유혹이 있어요. 만약에 그림 그리는데 소질 있다면 화가 되는 게 유혹이에요. 노래 잘한다면 가수 되는 게 유혹이에요. 우린 유혹 없이는 한시도 행동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이 말을 하는 것은, 같은 창세기 3장에 넘어와서 똑같은 유혹을 받고 유혹대로 살아가는 인간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하고 싶은 게 없어요. 하고 싶어지게 유혹을 받고 있는 형편입니다. 따라서 누가 누구를 율법을 근거로 해서 지적질 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없어요. 더 나아가서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레위기 19장 29절, “네 딸을 더럽혀 기생이 되게 말라 음풍이 전국에 퍼져 죄악이 가득할까 하노라” 자기 딸을 기생이나 창녀나 몸 파는 자로 넘기지 말라는 말이죠. 이 말을 보면서 자기 딸이 그렇게 안 된 사람의 엄마의 기분은 어떻겠습니까? 우쭐, 어떤 구원받았다는 자신감? 그렇지요. 지금 그런 마음이 드는 이유가, 이 유혹은 안 받았거든요. 아직 딸을 술집에 보낼 만큼 그렇게 가난하진 않았으니까. 그 정도로 막가진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이 부분을 보면 갑자기 신자 된 느낌이 들고 나도 율법 지키는 것 같지만 그것이 잘못인 거예요. 왜냐하면 레위기 20장 10절을 봅시다.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이 본문을 보면서 바람을 피우지 않는 남자나 여자 같은 경우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 우쭐댈 수밖에 없어요. “이 정도까지 내가 막가진 않았다. 나도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여력이 있네. 나는 천국 백성인가보다.” 이런 생각이 들지요. 자, 그러면 여러분의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남과 바람을 피우지 않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위함입니까, 본인의 가정을 지키기 위함입니까? 가정을 지키려는 이유가 본인 때문이잖아요. 그 본인이 누구냐? 창세기 3장에 들어간 본인이란 말이에요. 아직 유혹을 덜 받은 거예요. 제가 강의 처음에 레위기 20장 2절부터 시작했지요. 이런 자는 반드시 죽이라 했지요. 그중에 나온 게 몰렉인데 몰렉은 황소 머리에다 사람 몸이라 했어요. 그 몸이 손을 내밀고 있어요. 이건 뭐냐 하면, 몰렉 신이 요구하는 것은 네 자식 바치라는 걸 요구하는 거예요. 사사 중에 입다 있지요. 깡패. 입다가 활동하고 있는 지역이 몰렉을 섬기는 분위기였어요. 그러니까 레위기에서 몰렉에 자식을 바치는 자를 죽이라 하지만 이스라엘 자체가 완전히 몰렉의 광팬이 돼있어요. 여호와는 안 보이니까. 몰렉 신은 보이잖아요. 만만하잖아요. 갖고 놀 수 있잖아요. 그런데 몰렉 신을 자식을 바치라는 거예요. 결국 이 영향을 받아서 입다가 자기 딸을 여호와께 바쳐요. 그것도 시집도 안 간 딸을. 그 딸이 너무 서러워서 친구들과 엉엉 울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마음 정해서, “아버지, 이것도 운명이니까 하나님께 속한 대로 날 바치세요.” 몰렉을 섬기던 지역에 몰렉 섬기는 방식으로 여호와를 섬길 때 하나님께서는 뭐라 하느냐 하면, 그 이방신을 좋아하는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아픔이 되는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그 사사에게 아픔을 유발시키는 겁니다. 사람이 아파야 자기 모습에 접근해요. 여러분도 그렇지만 집안에서 알뜰살뜰하게 살지요. 그렇게 살 때 내 몸은 하나님이 주신 거고 내가 할 일은 알뜰살뜰하게 살면 된다고 했는데 손가락이 부러졌다. 그리고 손가락 고친다고 십만 원 나갔어요. 그러면 손가락 하나에 십만 원짜리입니다. 그리고 그 밑으로 이십 만원, 삼십 만원……. 인간이 알뜰살뜰하게 산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내 자신을 돈으로 가득 차 있는 몸이라고 은연중에 생각하는 상태에서 알뜰살뜰하게 사는 거예요. 이 몸으로 주님을 위해서 어떻게 살까가 아니고 내 몸 지키기 위해서 한 푼이라도 아껴야 된다고 생각할 때 뒤늦게 하나님께서 손가락 하나 부러트린 거예요. 그러면 돈 십만 원 나갈 때 얼마나 아깝고 아깝습니까.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포도주 반병밖에 없다고 하지 않고 반병이나 남았다고 하는 긍정적 사고방식처럼 십만 원짜리 날아갔지만 나머지 백만 원짜리는 남아 있잖아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하지요. 그만큼 인간은 이상하게 돈은 아끼면서 내가 누군지 모른다는 이렇게 모순된 생각을 하고 있다고 제가 지적하는 거예요. 공짜로 주신 거니까 오만 원 날아가도 내 돈 아니고 주님 돈이라 생각하면 되는데, 알아요. 내 몸은 공짜라 해놓고 오만 원 날아가니까 아깝다고 하는 거예요. 제 말은 뭐냐 하면, 내가 누군지 모른다는 거예요. 성경이 왜 있습니까? 성경이 이야기 안 하면 아무도 내가 누군지를 몰라요. 우리는 아까 예를 든 것처럼 자기가 바람 안 피우면 우쭐대고 자기가 진짜 괜찮게 인생사는 줄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게 나를 위함이에요. 나를 위해서 만든 게 뭐냐? 몰렉이라는 우상이란 말이죠. 제 말의 의미를 알리기 위해서 분명히 질문합니다. 여러분, 몰렉 신을 안 믿는 게 쉬울까요, 자기를 포기하는 게 쉬울까요? 몰렉 우상, 요새는 부처지요. 부처를 안 섬기기는 쉬워요. 종교 바꾸면 되니까. 교회 나오면 되니까. 하지만 자기를 포지 않는 것이 곧 부처 섬기는 것과 주님 보시기에는 똑같아요. 왜 자기를 포기해야 하느냐 하면, 포기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우리는 새로운 유혹을 찾아 나서기 때문에. 새로운 유혹을 찾아 나설 때 그게 몰렉을 안 섬겨도 몰렉 섬기는 게 되고, 몰렉 섬기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냥 죽이는 게 아니고 반드시 죽여야 돼요. 그래서 율법은 우리가 반드시 죽을 존재로 그 지역에 태어났다는 거죠. 그게 존재에요. 우리가 반드시 죽어야 마땅한 곳에 태어난 거예요. 제가 아까 몰렉 이야기하면서 스데반 집사 이야기했지요. 하나님께서 몰렉을 섬기지 말라는 말을 듣는 순간 그 몰렉은 이스라엘 사람에게 새로운 자극, 새로운 유혹이 된 겁니다. 어떤 원칙이냐 하면, 선악과 따먹지 말라 하는 말은, 아예 선악과 심지도 말고 아예 그 말도 안 했으면 그런 사단이 나지 않았는데 선악과 심어놓고 따먹지 말라는 순간 아담과 하와는 내내 유혹거리 주변을 맴돌고 있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처럼. 선악과 따먹기 전까지는 자긴 얼마나 잘나고. 자기 본질을 모르고 나는 잘났어, 훌륭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훌륭하고 잘난 것 선악과 따먹는 순간 어떻게 됐습니까? 따먹었다는 그 죄 하나 진 게 아니에요. 아예 그 자리를 놔야, 자리 자체를 모든 걸 털고 이쪽 저주의 땅으로 넘어오게 된 겁니다. 쫓겨난 거예요. 그게 우리 신세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신세, 어떤 위치에 있는가는 계속해서 율법을 통해서 유혹받게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레위기 19장 32절 봅시다. 누가 읽어보세요.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아멘. 이것 우리 흔히 하잖아요. 율법 지켰네. 율법 지켰으니까 천국 가겠네. 우쭐하네, 갑자기. 신앙인 같아. 그런데 그 뒤에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돼 있잖아요. 율법 자체가 일종에 우리에게 유혹이 돼버린 겁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법이다, 지키자. 이렇게 된 거예요. 사람 대 사람이 누구를 비평할 수 없다고요. 둘 다. 만약에 누굴 비판하려면 나는 지켰는데 저쪽이 못 지켰을 때는 비평이 돼요. 요한복음 8장에서 어떤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혔을 때 바리새인들이 질질 끌고 예수님 앞에 왔지요. 그들은 뭐냐? 나는 간음을 안 했는데 저 여자는 했다는 거예요. 만약에 예수님께서 땅에다 누구든지 마음속으로 간음하지 않은 자는 돌로 쳐라. 그 글을 썼다면, 니가 그 여자를 돌로 친다면 나는 새로운 법, 한 번이라도 마음속으로 간음한 자는 네가 던진 짱돌 그대로 들고 내가 너를 칠 때 너는 군소리하지 마라. 그래도 치려면 쳐봐라. 어떻습니까? 돌로 치려는 사람들 다 어디 갔습니까? 제가 묻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묻는 겁니다. “여인아, 널 치려고 한 사람들 다 어디 갔어?” 여자의 답변이 속이 다 시원합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없는데 여자는 남았지요. 그럼 여자는 뭐냐? 간 사람을 대표해서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을 대표로 보여주는 사람으로서 예수님 계신 현장에 그 여자가 앉아있는 거예요. 내가 너를 용서한다. 누구든지 주님 앞에 나오면 용서받고 나오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을 결합시켜보면, 죄인이 두 가지로 구분돼요. 첫째는 율법 어긴 자가 죄인이 되고, 두 번째는 뭐냐? 예수님의 은총을 받지 못한 자. 어느 게 죄인입니까? 율법 어긴 자가 죄인입니까, 예수님의 은총을 받지 못한 자가 죄인입니까? 둘 다 죄인이죠. 만약에 1번 같은 경우에 율법 어긴 자가 죄인이란 것만 있다면, 율법 안 어기면 되지, 라는 게 돼버려요. 그때 실수했네. 그때 술 한 잔 먹고 율법 어겼네. 음주운전과 비슷한 줄 알고, 율법이 음주운전 아니거든요. 술을 안 먹으면 음주운전 있을 수 없잖아요. 앞으론 술 먹으면 대리운전 불러야지. 운전 안 해야지. 이러면 본인은 율법을 안 지킨 경우는 있지만 지킨 것도 있다. 그게 나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두 번째, 예수님의 은총이 돼버리면, 어떤 인간도 한 번이라도 율법을 지킨 적이 없는 자로서 주님의 은총을 받은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2번 같은 경우엔 자신의 완벽함을 자랑하겠습니까, 아니면 예수님 자랑하겠습니까? 하여튼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랑하진 않겠지요. 내가 예수 믿는 것도 자랑 안 하겠지요. 내가 예수 믿으면 내가 잘난 게 되니까. 그냥 주님께서 나에게 속죄의 용서를 주신 거예요. 그럼 둘 중에 누가 구원받겠어요? 예수님한테 은혜를 받은 자가 구원을 받겠지요. 그러면 예수님의 은총을 받는다고 살 때에 예수님의 은총을 미리 예상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예상하면 안 되지요. 왜냐하면 예상한 값으로 구원받으니까.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그 지식으로 내가 구원받는 셈이 돼버려요. 그러면 예수 믿으면 구원받을 걸, 그것조차 뭐로 전환돼야 돼요? 이게 죄가 돼야 돼요. 이건 뭐 믿거나 말거나지. 그래서 아까 우리 자신을 포기해야 된다는. 그래서 제가 창세기 3장 이후라 했잖아요. 창세기 3장 이후에 온 인간은 이미 유혹으로만 살기 때문에 예수 믿고 천당 가는 것도 그 사람한테는 유혹이다, 유혹 아니다? 그것도 유혹이라니까요. 나를 위한 예수가 돼버려요. 나를 위한 예수 믿거든 그 예수 갖다 버리세요. 창세기 3장에서는 절대로 창세기 2장으로 도로 갈 수 없습니다. 여기서 내가 비법을 알려드릴게.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여러분이 호응이 안 되면 곤란해요. 몰렉을 섬기는 자는 반드시 죽이죠. 그런데 이게 율법이잖아요. 몰렉을 안 섬기는 우상숭배 안 한다는 그것도 율법 자체가 유혹이기 때문에 이것도 유혹된다고요.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아까 했잖아요. 20장 10절에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남의 아내와 간음 안 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주님을 경외함이 아니고 내 가정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내 가정에 내가 있기 때문에. 아까 강의 흐름이 그래요. 내 가정은 괜찮은 가정이어야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내 가정은 건전한 가정이라고 남한테 제시하기 위해서 그런 거예요. 그런데 제가 뭐라 그랬습니까? 인간이 뭔가 남한테 근사한 것 내세울 때는 그만큼 부정한 것, 더러운 것들을 억지로 감춰놓은 형편에 있단 말이죠. 남에게 들키기 싫은 것은 다 뒤로 빼돌리고 자랑거리만 추려서 편집해서 나 이렇게 잘 살았다고 내놓는 거예요. 청문회 해봐야 돼요? 머리 센 여자 있잖아요. 외교부장관. 그 사람 똑똑하고 유엔에서 활동하고 대단하지요. 그런데 자기 딸이 이중국적이란 게 청문회 하니까 드러났잖아요. 그래서 이번에 한국국적을 취득한다고 했어요. 보세요. 그 사람이 외교부장관 후보 아니면 계속 묻히는 거예요. 그 사람만 그래요?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왜냐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모든 인간은 살 가치가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없어요. 없는데 인간은 나는 살만 해서 살았다고 전부 다 얼굴 들이대고 있으니까 주님 보시기에 같잖은 거예요. 웃기지도 않은 거예요. 아까 요한복음 8장 했잖아요. 돌로 치려하니까 그 글이 무슨 글인지 모르겠지만 예수님께서 전에 하신 말씀이겠지요. 마음속으로 간음한 자도 간음한 자다. 그걸 썼다면 그걸 보고 난 뒤에 그게 법이라면, 그 여자 치고 난 뒤에 예수가 칠 테니까 각오해라. 그러면 누가 치겠어요? 진짜 죄인 같으면 여자 치고 주님한테 얻어맞아야 돼요. 그래야 공평해요. 그런데 그 여자를 왜 치지 않느냐? 그동안 바리새인들이 자기 허점 드러나는 걸 싫어해서 살았다는 게 티가 난 거예요. 그럼 내 허점을 감추는 방편으로 율법을 지켰다면 그게 율법을 온전히 지킨 거예요? 안 지킨 거죠. 누구나 인간은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는데. 그게 주님 앞에 통합니까?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전부 다 몰렉 신자다. 우상 모으는 게 취미가 아니에요. 우리는 여호와는 시시해. 예수도 시시해. 새로운 자극적인 것. 물론 우리가 골프 모르던 사람이 교회 다니면서 골프 쳐보세요. 전에는 주일마다 교회 다닌 사람이 세 번 가고 한 번씩 빠진다니까요. 2년 뒤에는 두 번 가고 두 번 빠져요. 3년 뒤에는 한 번 가고 세 번 빠진다니까. 골프 모임 때문에. 집에 자식 없을 때는 부부가 손잡고 주님께 감사하지요. 아이 하나 생기면 처음에는 억지로 교회 다녀요. 그 다음부터는 아이 핑계로 교회 많이 빠집니다. 둘, 셋, 점점 빠지다 나중에는 교회 안 나와요. 누굴 위한 예수고 하나님입니까? 그 사람에게 몰렉은 자식이에요. 왜 그 사람들이 몰렉에게 예배를 드립니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자식을 바치면 네 가문이 많은 자식을 낳게 된다. 이렇게 되면 하나 죽이면 열 명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거든요. 그런 사례가 많다면. 제가 지난 화요일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인간이 힘든 것, 돈이 없어서 몸이 아파서 힘든 건 보통 건성으로 이해하잖아요. 인간이 제일 힘든 것은 확실한 게 없어요. 인간들이 제일 힘든 건 정신적인 거예요. 확실한 미래 보장되지 않고 내 인생 어떻게 될지 확실하게 모른다는 것. 예수도 믿어봤다가, 기도도 해봤다가, 십일조도 해봤다가. 왜 그런 짓 하느냐 하면 불완전하기 때문에 그래요. 확실하지 않아요. 아주 정성 드려 열심히 하는데 불안해요. 뭘 해도 불안해요. 이렇게 바쳤는데 내 뜻대로 안 해주면 어떻게 하나.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자식 낳고 자식이 대학 다니다 말다하고 백수로 있을 때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취직이 되면 안심이 되고. “주여, 내 몰렉이 드디어 취직했군요. 7월부터 kbs에 출근한다니 아이고 감사합니다.” 얼마나 불안했겠어요. 그러니까 인간은 맞닥트리는 모든 사건이 나에게 유혹인 동시에 불확실성이 같이 주어집니다. 그런 불확실성을 확실성으로 바꾸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지요. 하나님 믿고, 예수 믿고, 시키는 대로 다 하지요. 그런다고 그게 확실해집니까? 확실한 건 모르겠고 할 도리는 해봐야지, 이런 식이라. 그게 무슨 안정성입니까? 불확실성이죠. 몰렉이란 신은 계속해서 인간에게 불확실성을 악마기 때문에 공격하는 거예요. 인간은 유혹을 받고 그 유혹과 현실과의 괴리에서 이렇게 해봐라. 그러면 네가 원하는 대로 될 거야, 라고 하는 것을 계속 우상은 제공하거든요. 그런데 여호와는 그게 아니에요. 여호와는 뭐냐 하면, 내가 너와 함께 동행 한다는 겁니다. 니가 주인이 아니고 내가 주인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주인도 아닌 게 걱정은 왜 하고, 불확실성으로 고민은 왜 하고, 주인도 아닌 게 유혹은 왜 받느냐 이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 세상을, 인간은 살았다고 여기거든요. 살았다는 것을 반드시 죽여 버려요. 살은 게 아니고 죽은 것임을 확인사살하기 위해서 율법을 줘요. 안 하면 반드시 죽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계속 추가적으로 유입됩니다. 마치 홍수 났을 때 장마 들었을 때 물 퍼내면 이쪽 새고, 이쪽 퍼내면 저쪽 새듯이 계속해서 들어와서 우리로 하여금 결코 우리가 산 자가 아니고 죽은 자임을 확인시켜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구약이니까 어린양의 제사에 함께 죽어 버려라. 죽게 되면 이런 불확실성이 없는 안전성 있는 어린양과 함께 새로운 생명을 우리한테 제공하겠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죄인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하나는 율법을 위반한 죄인이 있고, 또 하나는 주님의 은총을 거부한 자가 죄인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딱 보고, 나는 1번 안 하고 2번 할래. 그게 또 유혹이라니까. 2번은 1번을 거쳐서 이미 나 이것 할래요. 저것 할래요. 천당 갈래요, 라는 그 주둥이, 이게 죽은 자에게 결과를 남기면서 은총이 제공되게 돼있습니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주님 건데 걱정을 내가 왜. 이미 구원받았는데 은혜 받았는데. 이게 은총을 아는 사람이에요. 만약에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게 되면, 예수님을 자랑하는 게 아니고 나라는 인간이 예수 믿었다는 사실을 자랑해요. 이건 또 새로운 유혹이에요. 자, 주님께서 인간은 창세기 3장에서 절대로 2장으로 못 넘어가지요. 유일하게 넘어간 사람이 누구냐? 바로 선악과로 끊어진 것을 생명나무로 가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갈 때 우리를 그리스도 함께 죽이고 그 다음에 죽은 자를 모가지 잡고 저쪽 세계에 와버리면 우리는 살아날 땐 옛날 나로 살아나는 게 아니고 그리스도의 것으로 살아난다. 이걸 예수 이름으로 예수 이름을 위하라고 살아난 자, 그게 성도입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