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플란트 180709
20180709a 부산강의 : [시편]12(6편)-임플란트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6편입니다. 시편을 강의하거나 설교하면서 어떤 고백만 달랑 나오니까 여기에 살을 입혀야 되잖아요. 살을 입힐 때 억지가 많이 개입돼요. 그리고 살을 안 입히면 교인들이 이걸 보면서 현재 자기 입장을 여기에다 직접 들이대서 자기가 실제로 이런 고생을 하는 것처럼 자기 위로 또는 자기 연민, 자기 격려, 자기 응원, 특히 더 나쁜 것은 자기 정당성, 자기 옹호, 이런 것에 시편을 인용하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그러니까 너무 비약되는 겁니다. 시편의 고백과 QT한다는 인간들 사이가 너무 벌어졌어요. 벌어졌으면 시편의 내용과 실제 내용을 촘촘하게 채워야 되고 이어줘야 되거든요. 잘못 이어지게 되면 원래 시편에서 원하는 노선이 아니고 엉뚱한 노선으로 새버립니다. 쉽게 말해서 불교의 법경처럼 활용할 수 있단 말이죠. 어려울 때 이렇게 위로해주시는구나. 가정이 어려운데 시편 보니까 은혜 받았다고. 은혜 받았다면 시편 보고 어떤 결과를 낳았습니까, 하면 그저 은혜 받았데요. 은혜 받았다면 어떤 결과를 어떤 증거를 대라 하면, 그건 없지요.
시편 말고 다른 성경으로 할 때는 창세기라든지 그쪽에 어떤 사건들이 있기 때문에 목사 입장에서 설교 30분 때우기, 대충 이야기하고 그냥 넘어갈 수 있지요. 시편엔 고백만 달랑 나오니까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는 바탕을 다 채워야 되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채우는가? 채우는 방법은 허물고 채우는 거예요. 시편에 나오는 고백이 나의 고백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 말은, 나는 신자일리 없다는 자리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나 같은 인간은 신자일 수가 없어.”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래도 나는 신자인데 그럴 수 없다는 게 상상이 안 간다고 이야기하겠지요. 그건 여러분 식구 가운데 안 믿는 사람 있잖아요. 믿다가 안 믿는 사람, 그 사람 심정을 이해하면 되지요. 교회 다니다 안 다닌다는 말은, 그때 교회 다닐 때 남들에게 교회 다니는 것처럼 보이고, 신앙인인 것처럼 보였단 말이죠. ~~인 것처럼, 뭔가 보였다는 그것이 지금의 내 모습이 그렇지 아니한가를 거기다 대입할 필요가 있어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나는 결코 신자일 리가 없어. 나 같은 게 왜 신자야.” 이게 우리 출생에 합당합니다. 부합됩니다. 우리는 죄 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신자일 수 없어요. 신자 아닌 게 적당해요. 이 말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기대하지 말란 말이죠. 시편에 나오는 고백처럼 자기도 고상한 고백을 할 거라고 아예 기대하지 마세요.
시편에 나오는 고백들은 고백이 터져 나오는 그 자리와 우리의 자리가 대척관계에 있다. 마주보고 서로 노리고 원수지간에 있는 서로 섞일 수 없는 견제하는 장소에 우리는 쳐다보고 있는 겁니다. 시편을 보면서도 현재 내 자리에서 시편까지 건너갈 수 있는 다리나 어떤 연결고리를 끊어진 상태입니다. 없는 거예요. 그래서 시편은 우리에게 낯설고 시편의 고백은 우리를 약 올리고. 그럼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삐져서 그럼 앞으로 시편 보나봐라, 하고 쉽게 덮어버리는 요소가 이 시편에 들어있습니다. 너 같은 것은 볼 자격이 없어, 이런 식이란 말이죠.
제가 왜 이런 이야기하느냐 하면, 교회에서 전도할 간곡히 하잖아요. 커피 주고 휴지 주면서 우리 교회 한 번 나와 보세요. 오늘은 비가 와서 안 나왔지만 지하철 타고 오다보면 젊은 부목사와 아줌마 두 명이 늘 하는 게 있어요. 간곡하게 한단 말이죠. 그런 전도를 받는 사람은 그 순간 자기가 정상인으로 간주하게 됩니다. 내가 정상인데 저 교회에서 믿는 하나님이 나를 예쁘게 보려고 아주 용을 쓰는구나. 그럼 내가 나중에 마음 풀리고 여유 있을 때 봐주는 식으로 한 번 가주지, 뭐. 이런 건방을 떨어요.
그런데 우리가 아는 성경을 문을 두드려도 안 열어주는 곳이에요. 요한계시록 같은 경우에는 문을 우리가 열 수 없게 돼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 아니면 문이 안 열리게 돼있어요. 그 다윗이 시편을 쓰신 분이거든요. 시편 전체가 문이라고 보면 돼요. 그리고 어떤 문이야? 안 열리는 문,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문. 그게 시편이에요. 그러니까 시편을 건방지게 이해한다는 자체가 이건 말이 안 되지요. 시편 자체가 못 들어가도록 막는 문이란 말이죠. 어딜 넘봐.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처음부터 인간은 닫혀 있고 안쪽에서 문고리를 잡아당겨도 바깥에서 완전히 자물쇠로 잠가버렸단 말이죠. 이쪽에서 천국 가려고 문을 열려하는데 바깥에서 잠근 거예요. 내 쪽이 문제가 아니고 게을러서 구원 못 받는 게 아니고요. 열심을 다해서 구원을 못 받게 돼있어요. 그러니 교회가 사기꾼이죠. 열심을 다한다고 구원이 되는 게 아니에요.
그럼 교회는 왜 허락했는가? 네가 어느 정도로 사기꾼과 잘 놀아나는지 교회 다니면서 같이 합작해서 서로서로 위로하면서 교회 놀이하라 이 말입니다. 둘 다 안 돼요. 구원에 넣어주려는 사람도 구원 안 되고 들어가려는 사람도 구원이 안 되고. 왜냐하면 주도권을 다윗의 자손이 갖고 있다니까. 이 말은 나한테는 내 구원에 주도권이 없어요. 이게 지당한 겁니다. 너무 당연한 거예요. 그래서 복음을 전하고 목회를 한다는 것은 사기꾼이든지 마술사든지 하여튼 눈속임하는 그런 류 밖에 없어요. 안 되는 것을 된다고 언급하니까 이건 주님 보시기에 같잖지도 않은 이야기에요. 온갖 수완과 요령들을 다 이야기해주거든요.
오늘 시편 6편을 보게 되면, 여기 어떤 사람이 굉장히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인생을 고단하게 사는 지친 모습이 나와요. 그럼 우리는 시편 6편을 보면서 난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