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39강( 믿음없음) , 마태복음 101강 (쳐내기) 180626
믿음 없음 (삼상 14장1-6절)
대전- 39강
이근호
2018년 6월 26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14:1-6
(삼상 14:1) 하루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건너편 블레셋 사람들의 부대로 건너가자 하고 그의 아버지에게는 아뢰지 아니하였더라
(삼상 14:2) 사울이 기브아 변두리 미그론에 있는 석류나무 아래에 머물렀고 함께 한 백성은 육백 명 가량이며
(삼상 14:3) 아히야는 에봇을 입고 거기 있었으니 그는 이가봇의 형제 아히둡의 아들이요 비느하스의 손자요 실로에서 여호와의 제사장이 되었던 엘리의 증손이었더라 백성은 요나단이 간 줄을 알지 못하니라
(삼상 14:4) 요나단이 블레셋 사람들에게로 건너가려 하는 어귀 사이 이쪽에는 험한 바위가 있고 저쪽에도 험한 바위가 있는데 하나의 이름은 보세스요 하나의 이름은 세네라
(삼상 14:5) 한 바위는 북쪽에서 믹마스 앞에 일어섰고 하나는 남쪽에서 게바 앞에 일어섰더라
(삼상 14:6)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지금 전쟁 중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전쟁을 하는데 전쟁을 왜 하느냐 하면 개인과 개인 사이의 가치를 무산시키기 위해서 그런 겁니다. 전쟁은 무산이다. 전부 평탄하게 만들어 버려요. 너 잘났다 내 잘났다가 전부 상실되는 만약에 한국에 전쟁이 없고 평화롭다면 비온 뒤의 우후죽순 같이 잘났다 하겠지요. 만약이 북한이 쳐들어와 해 폭탄 터뜨려 버리면 남자들은 군복 입어야 되고 여지들은 병기 공장에서 일해야 되겠지요. 그렇게 되면 전쟁이 없을 때 남하고 견주던 것이 무의미하게 되지요. 그런데 조용하고 고요하고 평화롭게 여기니까 갑자기 뭐가 부각되냐 하면 나는 너보다 잘났다가 부각되는 겁니다.
아무 일 없으니까 마치 자기 덕으로 자기가 평화롭게 사는 것처럼 그렇게 느껴지는 거에요. 그래서 자기 가치를 높여 버리면 사람이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고 점점 예민해지기 시작해요. 조금만 자기를 건드리면 와락 화를 내게 되지요. 왜냐하면 본인이 하는 일이 평화로운 때는 별 지장이 없기 때문에 자기가 애쓰고 행한 만큼 성과를 얻을 수 있는 희망을 환경이 제공해 주는 겁니다. 열심을 내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환경. 평화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전쟁이 일어나면 공동의 적을 맞닥드려야 되요. 평화 시에는 나 말고 나에게 대들면 전부 나의 사적인 적이 되지만 전쟁 시에는 너와 나의 다툼을 잠시 미뤄야 되고 접어야 되요.
공동의 막강한 적들이 오기 때문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전쟁을 일으키신다는 것은 결국 뭐를 의미하냐 하면 너와 나중 누가 의로우냐 잘났느냐 누가 훌륭했는가? 누가 실수가 없었는가? 누가 옳게 행동 했는가?의 비교 자체가 전부 무산 되게 하는 것이 첫째이고 두 번째는 공동의 적을 바라보게 하는 겁니다. 네가 나의 적이 아니라 우리의 적을 공동적으로 바라보면서 결합되는 행동을 보여주게 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와 에베소서에서 말하기를 우리는 전쟁 중이라고 이야기 했고 전쟁에서의 적은 성령을 통해서 사도 바울이 알려 줍니다. 세상 신. 세상을 지배하고 통치하는 신.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고 인간의 육체를 초월하는 영적 존재와의 싸움이다라고 해요. 영적 존재와의 싸움이 우리 공동의 적이라면 영적 존재를 공동의 적이라고 인식하는 그 집단이야말로 한 형제가 되는 겁니다. 교회하자고 뭉쳐봤자 옆에 교회와 라이벌이 되어 버려요. 교회 집안싸움에서 교회 싸움으로 번지게 되는 겁니다. 자기의 가치를 무신 시키지 않고 있어요. 사도 바울이 세상 신을 적으로 삼을 때는 달리 이야기 하게 되면 세상을 쳐다보고 사는 사람들이 우리의 적이 되는 겁니다. 세상 신이니까 세상 신은 그냥 혼자서 신이 되는 게 아니고 뭔가 지배하고 통치해야 될 대상 들이 있을 거에요.
세상 신이 그냥 혼자서 되는 게 아니고 뭔가 구체적으로 다스리고 자기 손 아귀로 줬다 폈다하는 업적을 발휘하고 있는 신이 세상 신이다는 말이죠. 세상 신은 현장감을 가지고 있어요. 현장감이란 것은 현재 지금 이루어 지고 있는 이론이 아니고 실제로 느껴지고 지는 것, 사도 바울은 세상을 제배하는 세상 신과 싸우자는 말은 세상은 자기 뜻대로 안되고 있다는 겁니다. 세상 배후에 악마가 세상을 통치하고 있으니까 그 통치하에 세상이 움직이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갇혀있는 거지요. 갇혀있고 닫혀 있는 겁니다. 이러한 사실이 이론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현장감을 반드시 드러내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시선이 네가 잘났다, 내가 잘났다로 보다가 갑자기 세상 신이 공동의 적이 되어 버리면 너와 나를 볼 필요가 없지요. 그동안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원리 같은 것이 있는 데 우연히 만나는 이웃이나 식구나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복음을 모르는 식구들의 모습을 보세요. 그들을 보면 얼마나 세상 신이 작용하고 있다는 좋은 재료가 됩니까? 그렇지요? 주변에 안 믿는 가족들이 있으니까 그들의 사고방식과 생활 태도 그들의 목적이나 삶의 태도나 삶의 의미가 세상 신이 배후에 작용하는 중이에요. 식구 붙들고 싸울 필요 없어요. 식구도 자기 마음대로 안 되니까, 악마가 시키는 대로 할 뿐이거든요.
욥기서 1장부터 보면 욥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먼저 하나님과 사단의 이야기부터 나와요. 1장 빼고 나머지는 욥의 현장감을 갖고 있어요. 욥이 고난 받고 친구들이 등장했고 아내가 남편에게 불평했고 이런 이야기가 죽 나와서 1장 빼놓고 이야기 하게 되면 그래 고난 받으면 구원 받는 거야! 이란 식으로 또 자기 개인 적인 자기 잘남과 현재 자기 모습의 정당성, 이런 것을 뽑아내는데 1장을 딱 보면 인간에게 어떻게 챙길 수 있는 여지를 안줘요, 왜냐하면 1장에서 하나님과 사단이 내기를 했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과 사단의 게임에 말려 든 거에요. 일방적으로 인간하고 의논한 적도 없이.
다른 말로 하면 인간 우리 사는 것, 우리의 원대로 되는 게 아니고 태어나는 것도 우리의 뜻대로 태어나는 게 아니에요. 뭔가 내기하고 게임 즐기고 있는 거에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예수님과 악마의 게임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서 다뤄지고 있는 겁니다. 1장을 빼놓으면 인간들끼리 잡는 거에요. 난 의로와! 넌 의롭지 않아 하며 싸우는 겁니다. 1장을 보면 그런 싸움이 주님 보시기에 가당치도 않은, 삐지고 토라지고 이 참에 본때를 보이겠다고 나서는 결국 이것은 세상 신이 인간에게 그동안 세뇌시킨 사는 데 원리가 되게 했어요. 네 잘남은 네가 챙겨야지! 챙길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네 잘남과 네가 사는 행복은 네가 챙겨야지 아무나 안 챙겨 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목적 자체를 인간으로 하여금 나를 위한 세상이라고 그 안에 동결시켜 버렸어요. 세상에서 난 손해 보기 싫다. 지금 세상 신에게 붙잡혀 사는 인간들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하다 보니 여러분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웃음) 울고불고 하는 이유들을 그 근거들을 한번 추려 보세요. 무엇 때문에 울었고 무엇 때문에 웃었는지, 십자가 생각하면서 울고 웃었어요? 아니지요. 자존심이 아니에요? 나를 위한 나의 싸움이 아니 였습니까? 그거잖아요. 그것을 유일한 현장성으로 느끼고 있다는 겁니다. 실감나는 현장을 느낍니다.
그런데 그 현장은 우리가 생각하는 나의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전쟁이에요. 그 전쟁의 이야기가 지금 사무엘상 14장에서 시작됩니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대치하고 있었어요. 대립하고 있는데 사울은 숫자가 몇 명 되지 않아요. 여호수아 같은 경우엘 보면 이방 민족과 싸울 때도 하나님께서 숫자를 넉넉하게 주고 싸우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이방 신들이 하는 원리와 이스라엘이 하는 전쟁의 원리가 가르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이방민족들은 자기가 가진 무기를 가지고 싸운다. 싸울 때 내가 지금 소유하고 있는 무기 될 만한 것이 어떤 것들이 있는 가?
무기 될 만한 것으로 싸우는데 무기로 싸울 때는 목적이 있어요. 뭐냐하면 자기 보호입니다. 나를 안전하게 하게 보호하는 거에요. 물론 식구들을 보호하고 자존심을 보호하고 있지만 결국은 로마서 10장 3절에 나오는 것처럼 자기 의로움, 난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억울하게 당했다. 난 도저히 이런 상황을 못 참겠다. 그런 굴욕을 당해가며 살고 싶은 마음 없다. 난 싸워야겠다. 무엇을 위하여? 난 정당했노라! 난 옳았노라! 이런 대우 받을 존재가 아니다. 인간 같지도 않은 것이 나에게 함부로 대드냐 이런 거지요. 이방 민족들이 이스라엘을 공격 할 때 글들의 신은 자신의 정당성을 보장해 주는 신이에요.
자기를 위해서 필요했던 신이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자기 뜻을 구체화시키기 위해서 전쟁이 필요했던 거에요. 여호와 하나님의 전쟁은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 간의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과 모든 인간과의 싸움이에요. 이 싸움에서 이기려면 이스라엘은 적을 이길 생각은 하지 말고 본인들이 하나님 앞에 고꾸라지고 져야 하는 겁니다. 본인 스스로.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가진 무기를 가지고 적을 이기려 할 때 그 적은 너희 눈에는 이방 민족으로 보이냐? 내가 가진 무기를 가지고 승리 할 때 나는 잘 났다가 되잖아요. 그러한 사고방식이 하나님을 적으로 간주하는 바가 됩니다.
그것이 어디에 나요냐 하면 창세기 32장에 나와요. 야곱이 에서를 상대로 싸우려 했는데 나중에 저녁 지나 새벽에 보니까 자기가 밤새도록 누구와 싸웠습니까? 자기에게 축복을 주신다는 그 하나님과 싸웠어요. 그러면 축복을 주신다는 그 하나님의 원수가 누굽니까? 축복 받았다고 우기는 본인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거에요. 그게 바로 야곱 언약이에요. 받은 게 있기 때문에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그러한 의식의 끝은 하나님을 죽이는 거에요. 하나님과 대판 싸우는 겁니다. 누군지도 모르고 나에게 대든다는 것은 분명 하나님은 아닐 것이라고 여는 거에요.
왜 하나님은 나의 편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차마 죽이려고 달려드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인생 망치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본 거에요. 인생을 사는 데 모든 망신거리를 주면서 살도록 하시는 것은 절대로 좋으신 하나님이 내린 조는 아닐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이용할 뿐이지 결국 자기가 자기를 지키겠다는 일념이 변하지 않습니다. 제가 분명이 이야기 하지만 자기가 아직도 쓰레기인 것을 모르면 아직도 자기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쓰레기는 가치가 없는 거에요. 에스겔 30장에서는 네가 바짝 마른 뼈이다. 그냥 뼈도 아닌 희망 없는 바짝 마른 뼈다는 말이죠.
바짝 마른 뼈는 계속해서 바짝 말라 있어야 되요. 갑자기 거기에 화장하고 메이크업하면 안 됩니다. 이왕 바짝 마른 뼈이지만 이쁘기는 하다 이러면 안되요. 공동의 적 앞에서 악마를 이기는 재료가 되는 것은 일체 내가 가진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 기도나 헌신이나 순종이나 선교한 것이라든지 일체 사용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이김은 십자가 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먼저 십자가 앞에서 무기랍시고 자랑할 만한 것들 그것은 가까운 쓰레기통에 다 집어 넣어버려야 되요. 기도해서 자식 잘 키운 것, 기도해서 가족 다 전도한 것, 쓰레기통에 다 집어 넣어버려야 되요.
지금 주님의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잘남의 전쟁을 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 잘남의 전쟁 앞에 누가 적이 되겠어요? 바로 주님이 적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질 때 예수님의 12제자들 다 도망갔지요. 도망갔다는 말은 그동안, 3년 동안 누구의 전쟁을 했다는 말입니까? 주님을 위한 전쟁이 아니고 자기를 위한 전쟁하려고 자기편으로 열심히 예수님을 끌어당긴 겁니다. 그런데 막상 최후의 전쟁에선 다 도망쳤잖아요. 남아 있는 군사는 오직 예수님 밖에 없었어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대접했던 세 마리아도 엄마까지라도 예수님을 전혀 이해 못했어요.
오늘 본문의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대치하고 있어요. 이스라엘은 지금 겁먹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군대 수가 너무 많으니까 약간이라면 용기를 더 해서 의기충천으로 버틸 수 있는데 그것이 아니고 숫자가 모자라도 너무 모자라는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