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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강의20180622a 마가복음12장 18-27절(바꿔치기)-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마가복음

광주강의20180622a 마가복음12장 18-27절(바꿔치기)-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2장 18-27절. 18절,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19절,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주기를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어 아내를 두고 죽거든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찌니라 하였나이다20절,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후사가 없이 죽고 21절,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후사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22절, 일곱이 다 후사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23절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을 당하여 저희가 살아날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24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25절,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26절,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다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27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이래 되어 있죠. 부활은 원래 없는 거잖아요. 부활은 사두개인들만 없는 것이 아니고, 인간세상에서는 부활은 원래 있을 수 없는 겁니다. 태어났다 죽으면 그만이에요. 왜냐하면, 부활이 있다면 죽고 난 뒤에 다시 살아난 사람이 돌아다녀야 돼요. 너무나 단출한 이야기입니다. 돌아가신 아버지, 돌아가신 증조부가 돌아다니면 누가 부활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그렇게 돌아다닌 적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부활이 없는 것이 맞잖아요. 오히려 부활이 있다고 이야기한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들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로 왔다고 했을 때에, 우리는 누구 편에 서야 하느냐 하면, 어설프게 예수님 쪽에 서면 안돼요. 사두개인 편에 서서, 그쪽에서 봤을 때에 예수님은 얼마나 구라를 떠는지를 봐야 해요. 예수님이라는 그 분이. 부활이 없는데, 조상가운데 살아서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부활이 있다고 한다면 사두개인은 필히 그 근거를 제시하라고 할 거예요. 근데 그 근거가 말이 안 됩니다. 죽고 난 뒤에 살아있으면 따로 근거를 제시할 필요가 없어요. 눈으로 보면 되니까. 죽기 전에 살아있는 이 무리에서 무슨 증거를 끄집어낸다? 부활의 증거를 끄집어낸다는 이게 가당치도 않는 이야기에요. 공동묘지에서 끄집어내면 돼요. 근데 공동묘지가 아니고 지금 안 죽어 본 사람들 중에서 부활을 언급한다는 것은, 이건 희망사항일수도 있지만, 희망사항은 근거가 되지 못하잖아요. 근거가.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서 너무 자기가 예수님의 편에 있다고 하니까 예수님을 모르는 겁니다. 예수님이 좋은 분인 줄 알고 그냥 일단 챙기고 보자는 식이죠. 그러나 성경에 보면 분명히 예수님을 반대한 사람이 있잖아요. 그 반대한 사람이 무작정 반대하지는 않는다 이 말이죠. 그 시대에 반대할만해서 반대한 거예요. 예수님에 대해서 안 믿을만해서 안 믿는 거예요. 예수를 안 믿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도 안 믿을까요? 바리새인들 자기들은 철석같이 여호와하나님을 믿는다고 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은 믿되 누구는 못 믿겠다? 예수는 영 아니다 라는 겁니다. 이래야 논리적인 일관성이 수립된다는 거예요. 하나님 믿고 예수님 믿고 이거는 일관성이 없는 겁니다. 하나님 믿는데 거기에 하나 더 플러스가 된다, 이거는 그 시대의 입장에서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둘 중의 하나에요. 하나님을 안 믿든지, 예수님을 안 믿든지 둘 중의 하나해야 해요. 사도바울이 사도되기 전에 사울이었잖아요. 사울이었을 때 누굴 믿었습니까? 하나님을 믿었죠. 하나님에 대해서 그냥 걸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울이라는 그 사람의 행동하나하나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할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충성을 다할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순종을 다할까? 그것이 본인의 사명이었고 자기존재이유였어요. 존재이유. 내가 여기 사는 이유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존재이유다 이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누구는 들어갈 자리가 없다? 예수님의 자리는 없는 거예요. 현재 한국교회에서 하나님을 믿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자리는 없는 거예요. 이래야 논리의 앞뒤가 맞는 겁니다. 사울 자기가 믿던 그 하나님 때문에 누구의 적이 되었습니까? 바로 예수님의 적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내가 예수님의 적이 되었다는 말은, 예수님 쪽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과 그리고 적이 돼버린, 자기가 섬기던, 그 시대의 사람들이 조상 대대로 섬기던 그 하나님과 이게 대척관계가 되어 있죠. 서로 충돌되는 관계에 있죠. 사울은 뭘 경험했느냐 하면은, 충돌을 경험하고서 비로소 자기가 성령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천국의 백성으로 이 지점에, 이 지역에 들어왔다는 것을 충돌의 사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충돌을 통해서. 나는 니가 핍박하는 예수라(행9:4). 그냥 예수가 아니고 핍박하는 예수를 믿게 된 거예요. 핍박을 의도적으로 하던 안 하든 핍박이 되었다는 그러한 사실이 누구냐 하면 본인이고 바로 자기 자신이에요. 자기 자신을 예수님 앞에서 제대로 알게 된 겁니다. 나는 어느 대학 나왔다가 아니라 나는 예수님을 핍박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사는 게 죄에요. 사는 게 죄. 이 땅에 살아있는 게 죄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땅에 살다가 죽은 사람도 죄가 돼요. 죄 짓다가 죗값으로 죽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살아있으면서 예수님의 부활은, 그거는 생각지도 말아야 되겠죠.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것은 살아있으면서, 사는 게 죄기 때문에 살아있으면서 아무리 연구하고 부활의 소망, 소생의 희망을 가져봤자 그거는 진짜 부활하고는 전혀 안 맞는, 충돌되는, 그 자체도 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부활을 믿어도 죄고, 부활을 안 믿어도 죄고. 부활을 안 믿는다는 것은 너무나 정상적인 사람이고,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 죄를 가리기 위한 하나의 꼼수가 되는 겁니다. 이래나 저래나 부활의 증거라고 하는 것은 죄인 된 인간에게는 나올 수가 없어요.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살아난다고 하니까 베드로가 식겁하고 달려들었죠. 지금 여기 와서 주께서 그냥 돌아가시면 십자가마을이 어떻게 됩니까? 이런 식이죠. 전부 다 예수님 때문에 모였는데, 죽어버리면, 자기의 청춘을 바치고, 모든 삶을 바치고, 부름을 받았다는 그런 하늘나라의 기대가 가득 차 있는데, 여기서 예수님께서 잘 되어야 되거든요.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을 것 같으면, 까짓것 로마 군병 같은 것은 손보면 한꺼번에 다 날아가게 되어 있고, 그러면 이 나라, 옛날에 선조들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이 제대로 꽃 필 수 있는 희망의 고지가 그 앞에 있어요. 다 왔어요. 다 왔다 이 말이죠. 살아계셔서 옛날 다윗처럼, 솔로몬처럼 강력한 힘으로 로마를 쫓아내고 다시 옛날 다윗, 솔로몬시대처럼 융성하게 되면 그게 바로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구약성경에 있는 문자적인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인정하고 따라다니는 거예요. 다 왔는데, 이참에 죽어버리면 이거는 목표가 좌절되는 거거든요. 죽는다는 것은 패배를 의미하는 겁니다. 살아있는 자들의 현실 속에서 죽는다는 것은 뭐냐 하면 그 살아있는 자들에게 끼어들지 못하잖아요. 끼어들지 못한다면 눈에 보이는 세상을 접수할 수 없죠. 죽어버리니까. 이 세상에 끼어들 수 없다면 이거는 일종의 추방된 거에 불과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는다는 말을 베드로는 이렇게 이해하는 거예요. “나는 이 땅에서 별 볼일 없이 추방된다.” 그러니까 누가 다급했느냐 하면 베드로 자기가 나서서 지켜주겠다는 겁니다. 근데 예수님께서 이야기했죠. “사탄아 물러가라 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라고 해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사람을 대척관계에, 서로 대적하는 관계에 두시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등장한 것은 참 좋은 질문을 한 거예요. 우리가 뭔가 질문하고 싶은데, 신자라는 이유 때문에 차마 못한 질문을 이 용감하신 사두개인들이 우리를 대신해서 마구마구 질문을 해주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는,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부활의 의미라는 것은 뭐냐 하면, “너가 왜 꼭 신자가 되어야 하는가? 그 이유가 있는가?”라고 묻는 거예요. 니가 꼭 신자 되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만약에 어떤 사람보고 “당신은 신자가 아니다.”라고 한다면, “예 아니에요. 신자가 아닌 것을 굉장히 다행스럽게 여깁니다.” 이러면 되는데, 신자 아니라고 하면 “내가 얼마나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성경 읽고 했는데?”라고 하면서 화를 벌컥 내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나는 꼭 신자 되어야 해.’라는 이런 욕구 같은 것이 여기에 자리 잡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는 게 죄죠. 사는 게 죄인데, 이 죄가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자꾸 설치게 돼요. 인간이 설치게 되면 설친 그 모든 것이 뭐냐 하면 내 위주의 세계가 따로 마련됩니다. 내 위주의 세계가. 지금 tv에서 월드컵 하잖아요. 메시 이야기를 어떤 여자아나운서가 소개를 하는데, 메시 이야기를 하면 지금 축구를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들은 잘 몰라요. 메시가 아르헨티나 대표선수로서 세계에서 축구를 제일 잘 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그 여자아나운서가 “저번 게임에서는 못했지만 이번 게임에서는 메시가 아주 잘할 겁니다.”라고 이야기를 했을 때에, 그걸 듣는 순간, 어떤 아주머니가 축구를 몰랐는데 그 방송에서 메시라는 축구선수 이야기를 듣는 동시에 메시가 축구를 잘하나 못하나가 나의 세계가 된다니까요. 인간에게는 나의 세계가 돼요. 엄마가 자녀들에게서 스마트 폰, 컴퓨터 다 없애버리면 그 애들은 컴퓨터게임이라든지 스마트 폰 게임을 아예 할 줄을 모르죠. 아예 없애버렸으니까. 간혹 보면 그런 가정들이 더러는 있어요. 세상에 있는 학교에 안 보내고 대안학교에 보내가지고, “세상 썩었다. 진화론 안 가르치고 우리는 창조론 가르친다.” 해가지고, 모든 걸 다 끊어버리고 tv도 없이 득도하듯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고 애들에게 일체 안 주는 그들의 세계는 무슨 세계냐, “컴퓨터게임이 뭐고?” 이래 되죠. 그런데 우연히 옆에 애들이 컴퓨터게임 하는 것을 보는 순간, 그 게임이 자기세계 속으로 쏙 들어온 거예요. 자기세계 속에.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은 부모가 원하든, 자녀가 원하든 계속 살아가면서 주변의 환경에 접속되는 동시에 그 환경은 자기세계를 구성하는 자기위주의 환경으로 이미 접속이 되어 있습니다. 컨택contact 접촉되게 되어 있어요. 연결이 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그 많은 세계 가운데 내가 80, 90살면서 접속한 세계가 있는 이상, 그 접속한 그 세계에서는, 이미 접속한 세계가 내 위주의 세계기 때문에, 잘 들어보세요. 내 위주의 세계죠. 그러면 이 세계가 있는 한 나는 쓸쓸하게 실패자로 죽을 수는 없는 겁니다. 내 세계가 다 끊어져나가면 나는 자살하면 돼요. 그때. 뭐 기분 좋아서 자살하는 사람 없잖아요. 내 뜻대로 되어서 자살하는 사람 없어요. 내 세계가 다 안 될 때에, 메시도 뭐 두 번째에서 뭐 좀 해볼까 했는데 엉뚱한 데 차가지고 동네축구보다 못한다고 욕 되게 얻어먹고. “메시도 집에 가라. 동네축구야!”라고 비난을 받았죠. 메시의 세계가 뭐냐 하면 수억의 패를 가지고 있는데, 갑자기 이쪽 반대로 돌아서면 그런 메시가 또 뭘 했느냐 하면 남의 나라에서 세금을 탈세하는 혐의로, 페이퍼컴퍼니(유령회사)로 걸린 거예요. 메시가 한 푼도 세금포탈한적 없다고 했는데 오늘 아침에 또 걸렸어요. 자칫하면 메시가 자살할 수도 있는 건데, 자살까지는 안 나가겠지만. 이 말은 뭐냐 하면 이미 내 세계가 형성되어 있는 이상은, 내가 형성되어 있는 세계에 나는 종으로서, 이 세계를 위해서라도 나는 거기에 매여살 수밖에 없는, 주객이 전도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세계는 누가 주느냐, 누가복음 4장을 한 번 봅시다. 누가복음 4장 5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마귀가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뭡니까? 천하만국을 다 보여줬죠. 그렇게 한 뒤에 약속이 뭐냐 하면, 6절에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했다 이 말이죠. 어떤 인간이 태어날 때 자기는 어떤 한 가정에 소박하게 태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두 살, 세 살이 되면서 자기고유의 자기만의 세계를 계속 형성해나갔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 형성한 그 자료들을 누가 제공했냐 이 말이죠. 그거는 모르죠. 백 살, 천살을 살아도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이 많기 때문에. 그때는 지상에서는 모르고, 평면에서는 모르고, 위로, 수직적으로 올라가야 해요. 누가복음 4장에서 악마가 예수님을 잡아당기는 겁니다. 잡아당기니까 뭐가 보입니까? 현재 악마가 갖고 있는 모든 게 다 보이는 겁니다. 그걸 뭐라고 했습니까? 천하만국의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천하만국의 영광. 인간은 그 속에서 태어난 거예요. 여러분들이 수준이 있기 때문에 오늘 강의를 좀 어렵게 해보겠습니다. 이거는 뭐 쉽게 할 수가 없어요. 천하만국을 누가 쥐고 있느냐 하면, 이걸 세상신이라고 했죠. 악마가 쥐고 있죠. 악마가 쥐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걸 창세기 3장에서 보면 누구하고 누구하고 계약해서 이걸 악마가 쥐고 있습니까? 창세기 3장에 누가 나옵니까? 아담이죠. 그러면 악마가 쥐고 있다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이 세상 인구가 72억에서 75억이라고 하는데, 인구가 빨리 불어나니까, 이것을 각기 사람들이라고 하면 이 성경말씀이 풀리지를 않아요. 하나로 뭉쳐야 됩니다. 뭐로 묶을까요? 아담으로 묶어내야 하죠. 이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욥기 31장 33절에 나옵니다.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내가 언제 큰 무리를 두려워하며 족속의 멸시를 무서워함으로 잠잠하고 문에 나가지 아니하여 타인처럼 내 죄악을 품에 숨겨 허물을 가리었었던가” 타인은 히브리어에 보면 아담이죠. 욥은 자신과 아담을 동일시합니다. 욥이. 욥은 친구들보다 더 근원적인 것을 알아요. 근원적인 것을. 친구들은 뭐냐 하면 출발점이 각자의 사고방식, 나로부터 출발해요. 나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나는 무조건 신자가 되어야 하고, 성도되어야 된다는 생각부터 하는 거예요. 바리새인들처럼. 바리새인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죠.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믿는데, 너는 하나님을 안 믿어, 라고 하면 바리새인들이 화를 낼 거라 이 말이죠. 바리새인보고 “너는 나중에 가난하게 될 거야.” 이러면 보통은 기분 나쁘지만 가장 궁극적인 것은 안 건드렸어요. “뭐, 살다보면 가난하게 되지.” 이런 식으로 하는데, 너는 아예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이라고 해버리면 바리새인은 화내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평소의 모든 설교가 자꾸 내용이 뭘 담고 있는가 하면은, “너희들은 신자가 아니야.”라는 뉘앙스를 계속 풍기면서 말씀을 했거든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신자가 될 가능성에 넣어주게 되면, 예수님의 지시를 받았던 그 세례요한이 바리새인보고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그렇게 욕을 하지 않죠. 벌써부터 분리를 안 시킨다 이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신 그것이 “너희들은 마귀새끼다. 마귀자식들이다.” 이렇게 해서 자꾸 바리새인 쪽과 자기 쪽과 떼어놓는 뉘앙스가 굉장히 강해요. 그러니까 예수님 보기에 뭐냐 하면은, 예수님을 악마가 알거든요. 악마가 있는 세계 안에 있는 인간들은 이거는 필히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전부 다 아담이 되어야 해요. 아담이. 어떤 아담이냐 하면, 범죄 하기 전의 아담이 아니고 범죄 한 후의 아담이 되어야, 악마의 지배가 최초의 언약에 합당한 조건을 구성하는 겁니다. 합당한 조건을. 출발점을 이거만 생각하면 돼요. 내가 신자 되겠다는 이것도 뭐가 된다? 이게 악마의 지배 밑에 있는 인간들의 하나의 행세, 속성이라 이 말입니다. 내가 신자 되겠다는 것이. 그래서 사두개인들은 뭐냐 하면 부활 안 믿어도 충분하게 신자다 이 말입니다. 자기들은. 부활이 없다 하는 거예요. 부활 같은 것은 생각 안 해도 하나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충분한 신자가 되는 거예요. 사두개인들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만약에 부활까지 고려해서 이걸 믿어버리면 사람들에게 자기들 나름대로의 하나님을 전파하고 복음을 전파할 때에 설득력이 반으로 뚝 떨어져버리죠. 왜냐하면 부활의 증거가 없기 때문에. 부활의 증거가 없잖아요. 그들 입장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현실 자체가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면 현실 속에서 뭘 끄집어내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증거들과 흔적들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근데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만약에 부활이 있어버리면 이미 죽었던 사람이 돌아다녀야 된다니까요. “아이고, 아버지 5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니는 부활도 믿지 않는구나!” 이렇게 돼버리죠. “아! 부활 맞네. 부활 맞구나.” 정말 하나님께서 부활이라는 그 귀한 좋은 소식을 자기백성, 우리 유대인들에게 주려면, 하나님께서 그런 증거를 주변에 풍성하게 쫙 깔아놓아야 논리적으로 맞는 이야기라 이 말입니다. 어떻게 자기백성을 사랑하면서도 부활의 증거를 하나도 안 줄 리가 있겠느냐, 이건 부활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다만 인간의 기대사항이 되지만, 뭐 마지막 때에 메시아가 와서 부활이 되는 것, 그렇게 될 때는 그거는 뭔가 달리 해석해야 해요. 그들 입장에서는. 왜냐하면 마지막 때까지 믿음의 증거가 부활신앙이라서 그런 거예요. 제 논리가 참 어렵죠. 이게 바로 나사로의 여동생 마르다와 마리아의 논리가 그 논리였어요. “마지막에 부활되겠죠.”(요11:24). 그러니까 나중에 부활되는 쪽과 지금 부활이 없다는 쪽과 생각이 같은 거예요. 어차피 증거는 없잖아요. 갈 때까지 가봐야 되겠다는 것은 긴가민가 하는 수준이다 이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빠 나사로가 아픈데 일부러 안 가요. 죽여 놓고, 부활이 없다고 하니까 부활의 증거를 주기 위해서 오빠를 살리지 않습니까? 살리거든요. 강남강의에서 그 이야기를 하면서 오빠가 돌문을 손톱가지고 긁으면서 “내보내주이소!” 했다 이 말이죠. 그렇게 안 했지만, 그냥 있었는데 나오라는 소리를 듣고 나왔다 이 말이죠. 오늘 제목을 일단 이렇게 적어보겠습니다. ‘낯선 소리’ 부활의 소식이 낯선 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살아있는 인간이 부활을 접수하게 되면, 이 부활은 예수님이 생각하는 부활이 아니에요. 그리고 부활을 믿은 자들이 누굽니까? 사두개인들의 반대파 바리새인들이 부활을 믿었잖아요. 그럼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어서 구원받았습니까? 아니죠. 부활은 없어요. 인간이 만약에 부활이 된다면,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또 다시 죄인을, 죄를 부활시키는 논리와 똑같이 됩니다. 그래서 다시 이야기할게요. 항상 우리의 신앙은 예수님을 반대하는 쪽에 서야 됩니다. 그래야 충돌이라는 경계선을 넘어올 수 있기 때문에. 스무스(smooth,매끈)하게 믿어버리면 이건 뭔가 넘어오지도 않았으면서 넘어오는 척 지금 시늉을 하고 있다는 이런 감이 굉장히 강하게 들어요.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은 어떤 사람, 많은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함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99마리의 양 보다도 1마리의 양이 더 중요하죠. 그럼 이 말씀을 우리가 들었으면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느냐 하면, 1마리의 양다워야 해요. 한 마리의 양답다는 말은, 천하에 수천 명의 교인들이 있다고 해도 거기에 기죽지 않아야 해요. 그게 한 마리다운 거예요. 혼자 믿어도 아주 신이 나야 해요. “외롭습니다.” 이래 나오면 안 돼요. 그걸 영어로 유니크unique라고 해요. 유니크라는 것은 우수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독특함을 이야기하고 유일함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떤 음악가를 좋아하는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했죠. 베토벤은 어떤 사람이냐? 음악가 중에 최고의 음악가가 베토벤이다. 그럼 모차르트는 어떤 사람이냐? 모차르트는 유일한 음악가이다. 실컷 띄어 올려놓고, 그 집합에 포함되지 않은 따로 나온 집합, 독특한 것, 그러니까 이것은 기존 것과 차별화되는 속성이 예수님의 성도가 되어야 돼요. 지금 이 과정에 사두개인들로부터 부활이 있으면 이런 논리에 모순이 있다는 공격을 받는 겁니다. 사실은 이런 공격을 사두개인이 우리 대신 해준 거예요. 우리가 예수님을 알 때 그 질문을 사실은 해야 되는 겁니다. 미룰 게 아니에요. 자, 다시 묻습니다. 지금 사두개인은 이쪽 자기편에 있어요. 자기편이라는 것은 아까 강의를 했죠. 인간은 태어나 살아가면서 환경에 접속이 되게 되면 그게 무슨 세계에 들어가느냐 하면 자기위주의 세계가 되죠. 자기위주의 세계. 자기위주의 세계가 돼버리면 이미 여기는 악마에 매인바가 되죠. 그 세계가 있는 한, 자기위주의 세계가 구성되어 있는 한, 자기는 거기에 하수인이 되는 겁니다. 분명히 내 위주의 세계 같으면 내가 갑이 되어야 하는데, 막상 어떤 경험을 해버리면 그 경험이 나를 질질 끌고 갑니다. 이게 인생이에요. 인생이라는 것은 그런 겁니다. 흔히 사랑과 전쟁이라는 드라마를 보면 있잖아요. 차라리 니 같은 남자를 몰랐으면 좋았었겠다고 하는데, 그 남자를 알았기 때문에 옛날로 못 돌아가요. 옛날 나 혼자 살았던 그 행복을 못 느낍니다. 이미 그 세계가 나의 인생의 행복과 불행을 좌지우지하는 요소로써 이미 침범해있기 때문에, 나는 거기에 얽매일 수밖에 없어요. 둘이 살다가 이혼했다. 니는 니 인생 나는 내 인생이다. 서로 도장 찍었다. 얼마나 깔끔하게 일이 마무리되었겠습니까? 우리 생각은 그렇잖아요. “아이고, 지긋지긋했다. 이제는 내 좋아하는 남자를 만나 살아야겠다.” 이래 했는데, 그렇게 둘이 깔끔하게, 속 시원하게, 아쌀하게(깨끗이) 헤어졌는데, 헤어지고 난 뒤에 그 전 남편에게 돈이 한 200억이 생겼다. 근데 지가 새로 좋아하는 남편은 월급 한 300만원 받는다. 속에서 불이 나서 못 살아요. 어떻게 그럴 수가? 헤어지기 전에 돈 벌지 헤어지고 난 뒤에 잘 되도 더 잘 됐어요. 그리고 지보다 더 예쁜 여자하고 결혼했어요. 예쁜 여자라는 말은 나이 적은(젊은) 여자를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나하고 헤어지고 난 뒤에 띠 동갑하고 재혼한 거예요. 분명히 그 소식이 안 들리면 행복한데, 그 소식을 듣게 되어 있다고요. 듣게 되니까 화딱지가 나는 거예요. 날 버리고 간 사람은 십리도 못 가서 다리가 절든지, 허리가 아프든지, 다리가 부러지든지 해야 되는데, 십리가 되자마자 벤츠타고 가버렸어요. 벤츠타고 가버렸다 이 말이죠. 이게 인생입니다. 이미 형성된 세계이기 때문에 그걸 뒤로 미룰 수가 없어요. 나는 그 세계 잊는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아이고, 참 인생이라는 것이...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악마와 아담의 관계가 그런 관계에요. 한 번 선악과를 맛봤잖아요.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해요. 그 선악의 세계에서 악마가 제공하는 그러한 세계에서, 헉헉거리면서 자기위주의 세계를 따로 장만하는 그 방법 외에는 없습니다. 발을 뺄 수가 없어요. 조폭에 가담했는데 엄마가 애쓴다고 해서 그 조폭에서 발을 못 빼는 것처럼.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겁니다. 그런 입장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종교, 교회 다니는 것으로 나름대로 노력하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근데 이런 종교라는 것을 믿으려면 반드시 근거가 있어야 되는데, 이 근거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악마가 지배하는 세계 속에서 이미 자기 세계의 근거를 잡고 가지고 오거든요. 마귀가 제공하는 근거를 믿고 그걸 신앙이라고 우기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디에 있느냐, 예수님은 하늘에서 왔기 때문에 악마가 지배하는 이 세계에 소속이 안 되어 있죠. 그럼 이쪽 편(악마와 인간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따로 계시죠. 따로 계시니까, 예수님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이게 부활이에요. 내가 곧 부활이에요. 내가 죽었다 다시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곧 부활이에요. 예수님이 계심 자체에서 앞으로 부활도 나오고 십자가도 나오고 재림도 나오고 다 나올 거예요. 예수님 자체가 길이고 생명이고 진리고. 예수님 자체가 부활이라니까요. 나는 곧 부활이고 생명이다. 예수님이 생명이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하심으로 말미암아 어느 인간도 자기의 죄에서 벗어나서 나를 믿을 사람이 있다, 없다?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도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인간은 이 땅에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시는 모든 것은 아까 유니크, ‘유일한’이라고 했죠. 99명 대 1, 99마리의 양은 놔두고 1마리의 양이에요. 주님의 모든 체제는, 너희들은 나를 믿지 못한다는 그걸 목표로 말씀을 전하십니다. 사도바울도 그대로예요. 사도바울의 복음은 니가 백날 믿어도 믿는 자가 아니야, 라는 그것을 들추어내고, 통보시키는 식으로 말씀을 전한다 이 말입니다. 어떻게 하든 하나 붙들어서 신자 만들려고 하는 그게 아니에요.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 그래야 예수님마저도 아버지가 택하지 아니하면 예수님도 손 못 대는 거예요. 아버지가 택한 자만 예수님이 구원해야지, 이건 아버지와 예수님과의 약속이에요. 아버지가 택하지도 않았는데 예수님이 자기 마음대로, 아버지의 뜻과 달리 일방적인 자기 뜻대로 건지고 하면 안 돼요. 그럴 수가 없어요. 단독행위가 되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택한 자는 예수님한테 올 때 어떻게 오느냐, 그것은 그들 힘으로 예수님께 나올 수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 아버지와 함께 관계된 그 관계성, 예수님과 아버지와의 연결된 그 관계성이 있죠. 그 관계성을 그대로 따라야만 그들이 예수님께로 올 수가 있습니다. 그걸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버지가 내게 보내주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고 했습니다(요6:44). 자, 그 말씀을 분해해드리겠습니다. ‘나는 부활을 믿는다.’ 이거하고 ‘예수님이 부활이다.’ 이거하고의 차이가 뭐냐 하면, 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 이래돼버리면 내가 있고 예수님을 경유해서 이게 다시 나에게로 돌아와 버려요. 이건 뭐냐 하면 아까 이야기한 나 위주의 세계관을 따로 형성하는 것이 되는 겁니다. 아버지가 내게 보내주지 아니하면 내게 올 수 없다는 말은, 최종지점이 뭐냐, 신자의 최종지점은 본인한테 돌아가는 것이 최종지점이 아니고, 예수님께 오는 것이 최종지점이에요. 내게 올 수 없다고 했으니까. 아버지가 보낸 자는 누구한테 간다? 예수님에게로 가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내뱉는 모든 언어의 개념은 내가 믿는다는 것의 내용이 아니고, 예수님에 관한, 예수님에게서 나올 다양한 것들, 예수님에게 장착되어 있는 다양한 요소가 그게 개념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곧 부활이고, 예수님이 곧 길이고, 예수님이 곧 생명이 되는 거예요. 나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요. 예수님이 부활되면 그걸로 족한 거예요. 내 자리가 없어요. 주님의 자리만 있으면 내 자리는 없어져도 괜찮아요. 원래 없어져야 될 것이기 때문에. 원래 없어도 괜찮은 거거든요. 이런 원리를 아까 했던 욥기를 통해서 보면, 욥은 자신과 아담을 동일시해서, 이 세상 자체에 대해서 옛날 인간의 대표자 아담이 어떤 식으로 살았는가를 보여주는 거예요. 욥기 31장 33-34절에서. 아담은 죄인이죠. 따라서 이 세상 인간들은 죄인이라 하는 것을 욥기에서 이야기해주고 있는데, 이러한 원리가 창세기 2장 3장에서 세월이 훨씬 지나가도, 세월이 지나가고 시간이 지나간다는 것은 엿가락을 그냥 늘어트린 거예요. 물렁물렁한 엿이 있다면, 엿을 힘주어 땡겨버리면 엿의 경계선이 늘어지잖아요. 엿이니까, 점성도가 있으니까 쭉 늘어지잖아요. 그렇죠. 역사라고 하는 것은 원래 그 원리가 시간 따라서 축 늘어진 것뿐이에요. 손 놓으면 휙 하고 다시 원위치 되는 겁니다. 이 원리가 뭐냐 하면 바로 선악과와 생명나무의 원리에요. 이 이야기는 상당히 어려워서 제가 이번 여름수련회 때 할까 했는데, 특별히 여기서 해야 되겠죠. 왜 살기 좋다는 낙원에 죽음의 요인이 의도적으로 삽입되어야 하느냐 이 말이죠. 차라리 죽음이 없었으면 안심 놓고 살 수가 있잖아요. 도시 한 가운데에 공원을 만들어놓고, 그 이름을 ‘아이들의 공원’이라고 해놓고, 거기다가 독사 한 천 마리 풀어놓으면 어떻게 됩니까? 독사나 해충이나 독거미는 빠져야 되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거기다가 뱀을 집어넣어버린 거예요. 거기다가 마귀 집어넣고 뱀 집어넣고 낙원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어째서 이게 낙원이냐? 인간위주의 세계가 아니라는 겁니다. 뭐 위주냐 하면, 생명나무위주의 세계에요. 처음부터 그랬어요. 처음부터. 처음부터 생명나무의 위주인데, 생명나무가 갖고 있는 본질은 반드시 뭘 통해야 하느냐 하면 죽음을 통해서만 생명이 생명답게 이게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이 죽음에 합류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게 뭐가 어려우냐 하면은, 이 죽음이라는 것을 인간은 살아있는 한 모르잖아요. 모르는데, 이 선악과라는 것에 뭐가 있느냐 하면 이 아담에게 기호가 돼요. 기호. 선악과나무 자체가, 이게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입니다. 아담이 동물과 다른 점은 아담은 동물에게 이름을 짓죠. 추상적인 언어를 만들어낼 수가 있다 이 말이죠. 인간이 하는 행위를 하나님이 그대로 나중에 모방을 하게 되는데. 욥기의 내용에 보면 욥의 친구들이 하는 주장과 욥의 주장이 똑같은 주장을 하는 것처럼 보이죠. 욥기에 보면. 그게 왜 그러냐 하면 먼저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 있는데, 엘리바스와 빌닷의 질문가운데 욥이 대답하고, 빌닷과 소발 질문가운데 욥이 대답하고, 소발과 엘리바스 질문가운데 욥이 대답하고, 이래가지고, 한 순회, 두 번 순회, 세 번의 사이클cycle,순환적인 주기로 욥기가 짜여져 있습니다. 계속 질문하고 답변하고, 질문하고 답변이에요. 욥이 왜 고난을 받는가? 그 문제를 두고. 그런데 그것은 욥기 1장에 보면 그게 가리어져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과 악마가 내기했다는 사실은 천으로 가려버리고, 자기위주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끼리, 각자 인간들끼리 해봐라 이 말이죠. 인간들끼리 하니까 거기에 어떤 대표자가 없는 거예요. 왜? 다수죠. 다수를 단수로 만드는 겁니다. 욥기에서. 욥기의 마지막은 뭐냐 하면 다수가 단수가 되는 거예요. 욥이 대신해서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면 욥의 친구들은 저주받는 겁니다. 다수에서 단수를 끄집어낼 때는 반드시 이유 없는 고난을 통해서 고난 받는 자가 대표자가 돼요. 그게 욥입니다. 욥기에요. 그런데 그 과정을 통해서 욥이 응답을 하는데,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욥의 친구들 엘리바스, 빌닷, 소발의 논리를 그대로 모방해서 이야기합니다. 모방해서 너희는 악하고 나는 의롭다고 이야기를 해요. 욥이. 근데, 욥기 32장부터 엘리후 나오고 그 다음부터 하나님이 나오는데, 이 관점이 뭐냐, 욥의 논리를 흉내 내서 욥을 공격해버려요. 그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한 박자 쉬고 일하신다는 이야기에요.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어놓고, 인간에게 뭘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들을 죄인으로 만들어놓고 “그래서 니가 저주받는 거야. 벌 받는 거야.” 이렇게 하시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게 해놓고, 생명나무의 본질은 선악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발견되는 겁니다. 그때에는 생명나무의 의미가 뭔지 몰라요. 선악과에서 생명나무를 차단시켜버릴 때 비로소 생명나무의 가치가 나오는 겁니다. 이거는 지난 수요일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죠. 요셉이 가야 될 세계는 없어요. 요셉이 가야 될 세계는 없는데, 요셉의 형들이 추방시킴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발생된 세계가 요셉의 꿈과 더불어 동행하는 세계에요. 오히려 없는 세계인데. 그래서 요셉이 가면서 생산해내는 것이 뭐냐 하면, 요셉이 사는 세계가 생산되는 것이 아니고, 꿈과 인간과의 경계선, 그 윤곽을 새로운 사건이 등장할 때마다 새로운 윤곽이 발생되는 그러한 쪽으로 주께서 인도하시는 겁니다. 경계선상에서 요셉은 산다고 제가 말씀드렸죠. 경계선 위에서. 오늘날 성도가 그렇습니다. 예수 믿고 뭘 얻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 믿고 뭘 새롭게 출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예수 믿는 것 그게 전부에요. 그냥. 예수 믿고 난 뒤에. 예수 믿고 난 뒤에 뭘 얻겠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사기꾼들이에요. 예수 믿고 뭘 얻을 게 하나도 없어요. 예수 믿고 된 것은, 주께서 나를 이 세상에서 하나의 천국과 지옥의 기준점으로 사용한다는 것, 달랑 그거 하나밖에 없습니다. 욥기의 주제는 뭐냐, 지혜가 어디에 있느냐? 지혜는 욥기 28장에 보면, 은은 나는 광이 있어 거기서 은을 캐듯이, 이 세상의 광산은 땅을 파들어 가면 뭔가 광석이 있기는 있는데, 그러면 지혜의 광산은 어디에 있느냐? 그렇게 이야기했거든요. 욥기의 주제는 이 지혜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인데, 이 지혜는 바로 욥 자체가 지혜에요. 욥 자체에서 고난 나오고 거기에 하나님이 접속하고. 그동안 인간들이 접속한 것은 자기위주의 세계인데, 욥이 접속한 것은 그동안 자기기 접속했던 자기위주의 세계가 아니고 낯선 세계에요. 그게 낯선 소리, 낯선 세계. 전혀 경험하지 않은 낯선 사건에 의해서, 성도가 뭘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이 성도를 얻은 거예요. 성도는 주님의 작품이고 그 자체가 결과물이 되는 겁니다. 나는 있지만 성도는 내게 없죠. 있는 것을 성도가 되게 함으로 말미암아 원래 있는 나와 그리고 하나님이 만든 성도, 이것이 성도가 죽을 때까지 늘 갈등을 일으키는 거예요. 늘 갈등을 일으켜요. 우리가 우리한테 물어야 돼요. “니 누구고? 니 예수 믿고 그만큼 챙긴 것이 뭐가 있노?” 없지요. 없어요. “없으니까 나 예수 안 믿을래.” “그럼 믿지 마! 저리 가! 가!” 이러한 질문과 답변은 아무리 복음 알고 아무리 신앙생활 오래해도 죽을 때까지 계속 될 거예요. 더 나아가서 나라는 것은, 나는 미지의 나에요. 그림자에요. 그림자를 본체라고 보면 안 되죠. 다른 본체 때문에, 사실은 주님인데, 주님이라는 본체의 그림자가 오늘날 성도라는 이름의 ‘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보낸 자는 부활이 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부활과 함께 살고 있죠. 그렇다면 예수님께 일어났던 그 관계있잖아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하늘의 영광 받고, 그 모든 것이 성도에게 그대로 되풀이 되는 겁니다. 성도의 모양 형태가 상당히 다수가 되는 것은, 아담이 한 사람이지만 아담의 후손은 다양성이 있는 것처럼, 그 다수가 결국은 성질이 아담으로 모인 것처럼, 성도가 모양 다르고, 사는 환경 다르고, 얼굴 다르고, 어떻게 다 다르더라도, 그들이 고백하는 것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그리스도에게 다 모이게 되는 겁니다. 성도가. 로마서에 나오잖아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제가 주일 낮에도 이야기했는데 다 사소한 일이거든요. 지극히 사소한 일이에요.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다 사소한 일이에요. 이것들이 죄가 되는 이유는 이런 일을 해서가 아니라, 이게 뭐냐 하면 자기위주의 세계관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바깥의 세계관은 뭐냐 하면 사랑이에요. 사랑. 사랑하지 않는 것이 간음이고 살인이고 도적질이고 거짓말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것. 부부간에 사랑하지 않는, ‘저거 언제 뒈지나?’하죠. 그래서 누가 죽었다. ‘아이고 그래 잘 됐다. 잘 죽었다.’ 제발 죽어줬으면 하는 그게 뭔가 공범자 노릇을 한 셈이 되는 겁니다. 어떤 경우가 와도. 그래서 형제를 미워하는 그 모든 게 살인이 되는 거예요. 심지어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아는 것도, 이게 나쁜 짓이 되는 이유는 항상 그 근원이 뭐냐 하면 내 위주의 세계를 못 버리기 때문에 그래요. 내 위주의 세계를. 그래서 바르게 살겠다는 것도 결국은 뭡니까? 돌아보게 되면 주님이 바른 것이 아니고, “주님 덕분에 내가 바르게 됐다. 내가 의롭게 됐다.”라고 합니다. 이게 뭐냐 하면 주님 편에 서 있지 않은 사람, 성도 아닌 사람들이 내놓는 고백이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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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70 자유게시판 강남-요한복음 17장 8절(맞춤 신앙)180619b-이근호 목사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18-06-23
16,769 자유게시판 강남-요한복음 17장 8절(맞춤 신앙)180619a-이근호 목사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18-06-23
16,768 자유게시판 143강-창 37장 25-27절(팔려간 요셉)180620-이 근호 목사 창세기 최고관리자 18-06-21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